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제1부 우리 족보 변천사
제1장 족보의 발달 단계와 그 특징
족보란 ‘한 성씨의 시조를 기점으로 하여, 그로부터 출생한 자손을 일정한 형식과 범위로 망라한 집단적 가계 기록’이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지만 실제적인 기점은 17세기 후반이 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족보는 18세기에 완성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초기 족보에는 외손 당대만이 아니라 외손의 외손의 외손으로 한없이 이어지는 외후손을 족보에 차별 없이 등재하여, 내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가족의 지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는다는 개념도 없어서 가계가 단절된 경우도 많았다.
실질적인 족보는 합동계보로서 ‘창시보’를 드는데, 이는 인쇄물로 간행된 족보를 말하며, 공동 발의와 공동 노력에 의해 편찬, 간행됐다. 구체적으로 족보에 수록할 명단 및 관련 기사의 작성과 제출, 편찬과 간행에 들어가는 경비 역시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족보의 형태는 개인 단위의 조상을 밝힌 가승(家乘)류나 본인을 기준으로 종적인 조상 세계를 계보화한 세계도(世系圖), 횡적인 자녀와 내·외손의 파계를 정리한 것이 족도(族圖) 등의 초기 족보에서 그다음 단계인 8촌 이내에 드는 내·외손 모두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록한 내외자손록, 내·외손을 동일하게 추적해 수록한 내외종합보 등의 형태로 변화해갔고,, 이것이 다시 오늘날의 족보 형태인 합동계보로 이행해갔으며, 다시 수록 범위를 성관(姓貫) 전체로 포괄하는 ‘대동보(大同譜)’로 진화해갔다.
제2장 특수한 족보와 생뚱맞은 족보
족보에는 여러 성씨를 망라한 족보의 백과사전인 ‘만성보(萬姓譜)’ 부류와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등의 왕실 족보가 있으며, 내시도 가계의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의 계보를 밝힌 [진신보(搢紳譜)]나 [잠영보(簪纓譜)] 등이 있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에 관한 인명록이나 일반 문사록에 해당하는 문보(文譜), 무관 출신 집안의 가계를 정리한 무보(武譜), 그리고 음직으로 진출한 인물의 가계를 수록한 음보(蔭譜)가 있었다.
또한 만성보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이창현의 [성원록(姓源錄)], [백씨통보], 해남윤씨 종가에 소장된 [만가보] 등이 전해진다. 20세기에 접어들면 활자본으로 만성보를 간행하기 시작해 1916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동국만성잠영보], 1924년 윤창현에 의해 편찬된 [조선씨족통보], 1925년 송윤식 등에 의해 편찬된 [청구씨보], 1931년 윤직구에 의해 간행된 종합 씨족보의 결정판이라 할 [만성대동보] 등이 있었다.
한편, 고성이씨 가문에서 편찬한 [사성강목(四姓綱目)]이나 [선세외가족보(先世外家族譜)]처럼 다소 특이한 족보도 있었다. 16세기 말 송암 이노에 의해 편찬된 [사성강목]은 보기 드문 독특한 보첩 양식으로, 족보 작성자 이노를 기점으로 부의 내·외변과 모의 내·외변에 네 개의 성씨와 혼인으로 연결된 가문의 선계(先系)와 후손을 인물 전기 형식으로 정리하여 주목할 만한데, 특히 입양제도나 적서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상이 나타나 있다. [선세외가족보]는 외가의 계보를 추적한 외보(外譜)로, 대개 외보는 역대 직계 조상의 배우자를 대상으로 그 종족의 시조부터 배우자 당대까지 계보를 수록했다는데, 이 족보는 마치 팔고조도처럼 외가뿐 아니라 외가의 외가까지 수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2부 성씨와 본관 그리고 조상 찾기
제1장 성씨와 본관의 이중주
우리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다. 당시 제작된 각종 금석문을 비롯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고유 인명이 많은데, 이는 아직 중국식 한자 성을 받아들이는 초기 단계였다. 간혹 한자식 성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성은 그 계보가 후대에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통일신라 이전에는 중국과 달리 고유명만 사용하다가 그 후 점차 중국식 한자로 된 성을 받아들이면서 성과 이름이 조합된 것으로 봐야 한다.
신라에는 글자 수가 일정치 않은 즉 거칠부, 이사부, 비지부, 급진부 등과 같은 이두식 이름만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한 이후 중후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한자식 두 글자로 된 세련된 이름이 도입되고, 아울러 이 시기에 박·석·김을 비롯한 고유 성씨까지 출현하게 됐다. 따라서 박·석·김은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소급해 붙였다고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는 7세기 후반 금석문인 문무왕릉비에서부터 나타났다. 6세기 중반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에는 수많은 수행 인원이 나오지만 성을 사용한 예는 없다. 그러다가 9세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왔거나, 대외무역 과정에서 중국의 유명 성씨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오늘날 본관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시조가 살았던 거주지이거나 출신지요, 둘째는 동일한 본관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 셋째는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기호로서의 역할이다. 우리는 오랜 동안 성과 본관이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관습 속에서 살아왔지만, 실은 7세기 이후 성이 사용되고 보급됐다면 본관은 적어도 10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났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씨’라는 어휘는 성과 씨를 합성한 것인데, 성은 부계를 중심으로 한 혈통 계보를, 씨는 촌락 또는 지역단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혈연적 요소와 지연적 요소가 합쳐진 말이 성씨다. 전통사회에서 이런 두 가지 요소를 합쳐 부르던 용어가 ‘토성(土姓)’인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군현조를 보면 당시 행정구역별로 토착하고 있던 전국의 토성을 잘 정리해 놓고 있어,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듯 토성이 바로 본관을 나타내주므로, 그 성립 시기가 바로 본관제도가 시작된 시점일 것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고려 영토가 후삼국 통일 당시에 확정됐던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지역에만 토성이 존재하여, 오늘날 모든 본관이 이 지역에 존재했던 행정구역 단위다.
당시의 본관제도는 지역 단위별로 호구를 파악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시행됐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본관제도와는 다르다. 그러니 ‘경주김씨’ ‘전주이씨’ 하듯이, 성과 연관된 본관이 아니라 거주지나 본적지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을 갖지 못한 천민에게도 본관만은 국가에서 지정해주어, 고려 초에 정착된 본관제도가 조선시대까지는 양수척(楊水尺. 백정)과 같은 특수한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관이 있었다. 이렇듯 본관이 거주지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단독으로 사용되다가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성과 연칭됐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본관제도다.
고려시대에 우리의 민족의식이 형성됐다고 볼 때 그 이전에 귀화한 백성은 이미 우리 민족에 동화되어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따라서 귀화 성씨라고 할 때는 우리의 성과 본관을 바탕으로 혈연적 계보의식으로 살아갔던 고려 중기 이후에 귀화해 사성(賜姓) 혹은 창성(創姓)으로 본관지에 정착한 경우로 봐야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귀화 성씨로는 경주설씨, 상주이씨, 임천이씨 등이 있으며, 중국에서 온 소씨와 변씨도 있다. 그리고 1127년, 1226년에 고려로 이주해온 베트남 왕자들의 정선이씨와 화산이씨나 함경북도 북청을 본관으로 하는 청해이씨도 귀화 성씨다.
한편, 우리 인물 기록에는 출신지가 없는데, 이는 조선시대부터 당시 사람들이 먼 조상의 출신지에 불과한 본관만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본관으로 양반임을 자랑하려는 풍토에서 빚어진 것이다.
한국인 중에 족보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고, 족보상 양반이 아닌 경우도 거의 없지만, 전근대 신분제도하에서는 절반이 넘는 사람이 성씨조차 없었고, 성씨가 있었다 할지라도 양반일 수 없었다. 결국 가계 위조 방법 등이 나타난 것인데, 아버지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갈아치우는 환부역조(換父易祖) 행위로 특정 가계를 통째로 어느 인물의 후손으로 연접해 감쪽같이 둔갑시키는가 하면,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양자제도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조선 전기에 무후로 끝난 인물에 후손으로 연접하거나 한 세대를 더 끼워넣는 등의 첨간(添刊) 방법 등이 있었다.
제2장 시조와 조상 만들기
시조는 중국의 경우 두부 만드는 사람이나 돗자리 짜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국에서는 씨족제도가 유명 인물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형성 발전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일정한 세월이 흐른 뒤 추대해 넣어 모두가 이름난 인물들이다.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상의 연원을 엄청나게 올려잡는 한때의 풍조로 말미암아 본관을 달리해도 성만 같으면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조상동원설(祖上同源說)이 난무했다. 심지어 다른 성씨까지도 같은 형제로 갈라졌다는 설까지 나타났다. 여러 본관으로 나누어진 안씨가 모두 한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동원설과 함께 급기야 1700년대 후반에는 안씨·이씨동원설까지 제기됐다.
그 가문을 명문의 반석으로 올려놓은 실질적인 시조가 있었다. 명목상의 시조와 실질적인 시조를 구분해서, 그 가문을 있게 한 중흥조(中興祖)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그 가문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 기가조(起家祖)였다. 대개는 본관지에 정착해 살아가다 급제를 하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후 서울로 올라간 첫 번째 인물이 기가조인 셈이다.
또한 특정한 종족이 일정 공간에 오랜 기간 세거해왔던 동족 마을이 전국에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을 지칭할 때 그들의 성 앞에 세거해온 마을 이름을 연칭해 불렀다. 안동을 예로 들면, 본관인 풍산이나 의성을 버리고 하회류씨, 내앞김씨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남원 지방 둔덕리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를 둔덕이씨라 하고, 사립안마을과 인근에 사는 광주이씨를 사립안이씨라 했다. 둔덕이씨는 효령대군을 현조로 하고, 사립안이씨는 명종과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이준경을 현조로 내세운다. 현조가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와 동일한 경우도 있지만, 입향한 인물의 후예 중에 뛰어난 인물을 현조로 모실 때도 있었다.
우리가 조상을 적당히 미화하거나 전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두찬(杜撰)이 많은 것은 서열병과 경쟁 심리에 기인하며, 신분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모두가 갈망했던 양반이라는 것이 법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갑족 양반이라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겠지만, 신흥 양반이나 권력에서 멀어진 가문일수록 조상에 대한 두찬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3부 집단기억과 족보의 문화사
제1장 족보의 사회사, 족보의 문화사
한국의 혈통과 계보에는 한국 고유의 토착 전통과 중국의 유교식 습속이 혼합되어 있다. 원래 고대국가 이래 우리의 사회적 기본 단위는 다소 느슨한 형태의 족(族)으로서 유교적 관습과는 차이가 컸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말기부터 중국식 성을 받아들이고 고려에 들어와 본관을 정하다 보니, 족 집단의 정체성이 점차 높아져 배타적인 집단이 됐다. 특히 위정자들이 유교 문화를 꾸준히 전파하여 우리 사회는 15세기에 토착적인 수평 문화에서 유교적인 수직 문화로 넘어가게 됐다. 당시 성리학자들이 강조한 [예기]나 [가례]는 엄격한 부계질서를 가르쳤는데, 그 효과는 17세기부터 나타나 친족과 비친족의 차별, 직계와 방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종족 집단을 결속해 문중을 만들어냈다.
문중은 고유의 전통과 유교 규범을 조화시키기 위해 조선 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산물이다. 문중의 소속 범위는 사당 의례에 참여하는 집단보다 훨씬 넓었으며, 특히 형제의 평등 관계라는 토착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토착적인 수평 문화에다 유교적인 위계질서를 적용하기 위한 역사적 타협안이 문중이었고, 이 집단이 만들어낸 공동 작품이 바로 시조와 족보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시조 할배’를 떠받들게 됐다.
성관 문제를 놓고 볼 때 한국의 18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농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17세기 말까지 성관을 가진 인구 비율은 50퍼센트 내외였지만, 그 후 100년이 지나서는 90퍼센트를 넘는 사람이 성관을 지닌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새로운 성관을 획득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쓰던 기존의 성과 본관을 선택한 것이지, 창성이나 창관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조상 갈아타기를 한 셈이다.
17세기만 해도 극소수 양반만이 족보를 가졌는데 18세기에 접어들어 신분 상승을 위한 하층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맞물려 양반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거나, 유교 예법과 독서 경험을 쌓아 양반에 버금가는 평민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률을 비롯한 행정 관행을 숙지해 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족보 장사도 생겨났다. 위험한 장사임에도 인쇄소를 차려놓고 족보 장사를 서슴지 않았을 만큼 수요 또한 넘쳤다. 사적으로 활자를 소유하는 그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영조 때 한양 한복판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족보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제2장 족보에 목을 매는 사람들
우리 역사상 족보 간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양반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시간이 지나 나라가 망해버렸어도 양반 의식만은 그대로 잔존했다.
성리학자들이 엄격한 부계 질서의 가르침을 지속시켜 그 효과가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친족과 비친족을 차별하고 직계와 방계를 엄격히 구분해 종족 집단을 결속시켜 문중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보다 확대된 조상 숭배 집단이며, 이들의 공고한 결속을 위해 직계를 잇는 연장자에게 종손이라는 이름을 주는 동시에 막강한 권위까지 부여했다. 종손이 제사를 관리한다는 명분을 갖게 되자 각 지파는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종손을 사손(祀孫)이라고 하듯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권위를 부여받았기에 아무리 훌륭한 지손이 있다 할지라도 서열상 사손을 넘지 못했다. 영남 지방에서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다.
종손의 권위가 커질수록 종통(宗統)을 둘러싼 소송이 난무했다. 서로 종손이라고 우기는 소송들로, 웬만한 양반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한 예로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와 하양허씨 가문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안차씨와 문화류씨 간에 벌어진 시조를 놓고 벌이는 문중 간의 시비도 있었다.
우리 전통사회가 처음부터 적서를 차별한 것은 아니고, 조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명분으로 이용된 후 점차 굳어져갔다. 여기에는 당시 사대부의 서자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잘 나타나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지속적인 국가의 서얼소통 정책이 있어, 국가 차원에서의 차별 의식은 많이 완화되어가고 있으나 일반 사가에서는 명분론이 여전히 우세해 서자의 설움은 여전했다. 여기저기 산재한 고문서 중에서 족보 편간 당시 적서 갈등 때문에 관청에 소를 제기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제4부 조상과 족보에 대한 전통 가꾸기
제1장 전통사회의 족보와 보학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고려시대부터 계보 관념이 형성됐겠지만, 이때 개개인의 소속 의식을 넘어 상호 동질 의식을 통한 사회 집단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아울러 당시 계보 파악은 4조(부, 조, 증조, 외조)를 기본으로 했기에 나를 기준으로 설정됐다.
아울러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부계와 모계가 동일시되는 양측적(兩側的) 친족 관계가 유지됐기에, 피를 물려받은 외손의 외손의 외손도 친손과 차등을 두지 않았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로 양반가에서는 나를 기점으로 한 역삼각형 계보도를 그렸고, 그것이 팔고조도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실천윤리인 [주자가례]가 보편화되고 오복제와 종법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부계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되어갔다. 그리하여 장자 상속을 기반으로 한 단일 성씨 중심의 동족마을이 생기면서 문중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출가외인이라는 남녀 차별과 적서 차별 등 ‘차별의 논리’가 작용했다. 이에 따라 족보 편찬에도 영향을 주어 외손이 탈락하는 대신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동일 본관의 가계를 일가라는 관념으로 모두 찾아 넣는 합동계보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전혀 계보가 닿지 않는 계파까지도 별보 형식으로 함께 수록했다. 따라서 같은 성씨면 동족이라는 관념이 새롭게 자리 잡아 갔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지식인의 소통 수단 중에 가장 컸던 것이 바로 보학(譜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당시 선비사회에서는 자신의 족보만이 아니라 남의 집 혈통까지 훤히 꿰고 있어야만 대화에 끼일 수가 있었다. 통성명이 이루어지는 자리엔 늘 그들이 가진 보학 지식이 총동원됐으며, 보학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양반 됨됨이에 대해 험담도 늘어놓고 치부를 들먹이는 정도까지 갔다.
이에 비해 우리 족보에서 여자 이름은 안동권씨, 순천김씨라는 식의 성관 기록이 전부였다. 조선시대로 한정해 살펴보면, 여자의 이름이 밝혀진 경우는 범죄에 연루됐을 경우로, 어우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초기 가계 기록을 보면,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순으로 싣되, 외손(녀)도 세대를 제한하지 않고 편찬 당시까지 태어난 인물을 모두 수록했고, 그 대신 처의 본관과 4조, 이력 사항 등과 같은 처가 쪽 계보를 기록하지 않았다. 17세기 중엽까지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종법제도가 정착하는 18세기에 남계 혈통 만능주의로 변해갔다.
시집온 여성과 시집의 조상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이나 자식과 운명 공동체로 살아갔던 것이 조선 후기의 가족제도였다.
제2장 조상과 족보를 통한 전통 가꾸기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대상이 존귀할수록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혈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개나 말의 경우가 인간의 족보보다 철저하기도 하다. 개의 학명 켄넬을 따서 애견협회를 켄넬 클럽이라 하는데 나라마다 켄넬 클럽이 있어 순혈종의 혈통 관리를 한다. 말의 경우는 사람 족보보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관리된다. 혈통서(Stud Book)라고 불리는 경주마 족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며, 족보가 없는 말은 경주에 참가할 수 없다.
유럽이나 미국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가계도인 패밀리 트리를 만들었다. 패밀리 트리, 즉 가족나무 전통은 멀리 구약시대의 ‘누구는 누구와 혼인해 누구를 낳고……’ 하는 식의 가계보가 10대까지 이어진 것과 연결되니 인간의 족보에 대한 연원을 따지자면 구약성서가 유대인의 역사요, 족보인 셈이다. 그리고 미국 유타 주 소금호수의 도시 솔트레이크시티에는 대규모의 가족역사도서관이 있는데, 세계 족보 정보 자료를 보관하는 볼트마운틴이라는 지하 수장고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특히 한자 문화권의 종주국인 고대 중국에서부터 발달한 족보 문화가 이웃 국가로 파급되어갔는데, 일본에만 족보가 없다. 일본에는 ‘가계도’가 있는데, 이것도 피를 나눈 혈통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 중심으로 그려진 계보도다. 한국의 가문은 ‘혈연 중심’이지만 일본의 가문은 ‘업연(業緣) 중심’이기 때문이다. 혈통에 집착하던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양자나 데릴사위를 얻어 가업을 세습하기에 일본 총각이 장가들면서 성을 바꾸는 일은 흔한 일이다.
족보는 동일한 성관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수록한다. 성관이란 성씨와 본관을 합친 것으로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성과 본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귀화하는 외국인은 성과 본관이 없다.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는 귀화했으나 성과 본관을 한자식으로 변경하지 않았고, 교수와 방송인, 회사 경영자 등으로 활동한 이참도 귀화하면서 본관을 독일로 하여 ‘독일이씨’의 시조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방송과 광고에서 웃음을 주는 미국계 로버트 할리는 하일로 개명할 때 ‘영도하씨’ 시조가 됐다.
한편 ‘상대하세(上代下世)’라 하여, 위로는 대를 붙이고 아래로는 세를 붙이는 것이 오랜 관행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대와 세’는 다 같이 한 세대를 헤아리는 수의 단위다.
종친회라는 연줄 커뮤니케이션이 문제 될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을 지닌 구성원끼리 보다 생산적인 의사 교환을 촉진할 방안을 찾다 보면 건전한 시민사회 육성과 사회 통합을 위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혈연을 바탕을 한 집단기억의 매체인 족보를 새롭게 조명해 문화적 기억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재구성해주는 족보야말로 나의 뿌리 찾기라는 정체성 확인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 인식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박홍갑
195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했다. 영남대 대학원에서 『조선 전기 음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편사연구관, 연구편찬실장, 편사부장 및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정치?사회사 분야 40여 편의 논문을 토대로 [조선시대 문음제도 연구], [병재 박하징 연구], [조선조 사족사회의 전개] 등 학술서적을 저술했고,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양반나라 조선나라], [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공저)] 등 교양서적들을 집필하여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쏟아왔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제1부 우리 족보 변천사
제1장 족보의 발달 단계와 그 특징
1. 족보란 무엇인가?
2. 우리 가계 기록의 연원과 현황
3. 족보의 원형, 가승과 족도
4. 초기 족보, 내외자손록과 내외종합보
5. 족보다운 족보, 합동계보 - 초보草譜에서 간행본으로
6. 파보에서 대동보로 - 국성國姓 전주이씨 사례
제2장 특수한 족보와 생뚱맞은 족보
1. 왕실족보 [선원록]과 [선원계보기략]
2. 족보의 파생 상품, 팔고조도와 16조도
3. 내시의 족보, [양세계보]
4. 벼슬길 따라 나뉜 [문보] [무보] [음보]
5. 만인의 족보, 만성보
6. [사성강목]과 [선세외가족보]
제2부 성씨와 본관 그리고 조상 찾기
제1장 성씨와 본관의 이중주
1. 고유 성씨와 외래 성씨
2. 본관,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어느 행정구역
3. 발해 왕 대조영 후손의 본관 만들기
4. 출신지가 없었던 한국인
5. 조상, 우리에겐 선조인가, 신인가?
6. 환부역조와 창씨개명
제2장 시조와 조상 만들기
1. 시조, 여러 인물 중에 행운을 누린 단 한 사람
2. 시조는 왜 유명 인물뿐인가?
3. 내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는데?
4. 실질적인 시조, 기가조
5. 제2의 본관을 연 사람, 입향조
제3부 집단기억과 족보의 문화사
제1장 족보의 사회사, 족보의 문화사
1. 시조 할배와 집단기억
2. 조상 감추기와 전통 만들기
3. 족보여! 진실의 종을 울려라
4. 18세기의 신종 사업, 족보 장사
5.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의 그늘, 우리가 남이가?
6. 도시 전설, 천방지축마골피
제2장 족보에 목을 매는 사람들
1. 혈통의 줄을 바르게 하라 -첨간添刊과 별보別譜의 마력
2. 종손 자리를 탐하는 계보 전쟁
3. 시조를 놓고 벌이는 문중 간의 시비
4. 나도 양반의 피를 물려받았는데
5. 기생첩과 어우동, 왕가의 자손
6. 고문서에 나타난 보송譜訟 사례
제4부 조상과 족보에 대한 전통 가꾸기
제1장 전통사회의 족보와 보학
1. 계보 추적 두 원리가 낳은 촌수와 항렬
2. 전통사회 읽기의 키워드, 조상과 족보
3. 조선 지식인의 필수 교양, 보학
4. 차이에서 차별로, 여성과 외손
5. 시조동원설과 조상 만들기
6. 현대판 보학의 대가들
제2장 조상과 족보를 통한 전통 가꾸기
1. 개 족보, 말 족보 그리고 인간 족보
2. 다문화 사회와 시조 할머니
3. 영남 사람 호남 사람, 그대의 본관지는 안녕하신가?
4. 몇 대손인가, 몇 세손인가? 헷갈리는 논쟁
5. 연줄로 맺은 세상, 연줄로 풀자
6. 유구한 내 가문 전통 가꾸기
미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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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제1부 우리 족보 변천사
제1장 족보의 발달 단계와 그 특징
족보란 ‘한 성씨의 시조를 기점으로 하여, 그로부터 출생한 자손을 일정한 형식과 범위로 망라한 집단적 가계 기록’이라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지만 실제적인 기점은 17세기 후반이 되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족보는 18세기에 완성된 형태로 자리 잡는다. 초기 족보에는 외손 당대만이 아니라 외손의 외손의 외손으로 한없이 이어지는 외후손을 족보에 차별 없이 등재하여, 내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동등하게 가족의 지위를 인정했다. 그리고 양자를 들여 가계를 잇는다는 개념도 없어서 가계가 단절된 경우도 많았다.
실질적인 족보는 합동계보로서 ‘창시보’를 드는데, 이는 인쇄물로 간행된 족보를 말하며, 공동 발의와 공동 노력에 의해 편찬, 간행됐다. 구체적으로 족보에 수록할 명단 및 관련 기사의 작성과 제출, 편찬과 간행에 들어가는 경비 역시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족보의 형태는 개인 단위의 조상을 밝힌 가승(家乘)류나 본인을 기준으로 종적인 조상 세계를 계보화한 세계도(世系圖), 횡적인 자녀와 내·외손의 파계를 정리한 것이 족도(族圖) 등의 초기 족보에서 그다음 단계인 8촌 이내에 드는 내·외손 모두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수록한 내외자손록, 내·외손을 동일하게 추적해 수록한 내외종합보 등의 형태로 변화해갔고,, 이것이 다시 오늘날의 족보 형태인 합동계보로 이행해갔으며, 다시 수록 범위를 성관(姓貫) 전체로 포괄하는 ‘대동보(大同譜)’로 진화해갔다.
제2장 특수한 족보와 생뚱맞은 족보
족보에는 여러 성씨를 망라한 족보의 백과사전인 ‘만성보(萬姓譜)’ 부류와 [선원록(璿源錄)], [종친록(宗親錄)] 등의 왕실 족보가 있으며, 내시도 가계의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의 계보를 밝힌 [진신보(搢紳譜)]나 [잠영보(簪纓譜)] 등이 있다. 그리고 문과 급제자에 관한 인명록이나 일반 문사록에 해당하는 문보(文譜), 무관 출신 집안의 가계를 정리한 무보(武譜), 그리고 음직으로 진출한 인물의 가계를 수록한 음보(蔭譜)가 있었다.
또한 만성보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이창현의 [성원록(姓源錄)], [백씨통보], 해남윤씨 종가에 소장된 [만가보] 등이 전해진다. 20세기에 접어들면 활자본으로 만성보를 간행하기 시작해 1916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된 [동국만성잠영보], 1924년 윤창현에 의해 편찬된 [조선씨족통보], 1925년 송윤식 등에 의해 편찬된 [청구씨보], 1931년 윤직구에 의해 간행된 종합 씨족보의 결정판이라 할 [만성대동보] 등이 있었다.
한편, 고성이씨 가문에서 편찬한 [사성강목(四姓綱目)]이나 [선세외가족보(先世外家族譜)]처럼 다소 특이한 족보도 있었다. 16세기 말 송암 이노에 의해 편찬된 [사성강목]은 보기 드문 독특한 보첩 양식으로, 족보 작성자 이노를 기점으로 부의 내·외변과 모의 내·외변에 네 개의 성씨와 혼인으로 연결된 가문의 선계(先系)와 후손을 인물 전기 형식으로 정리하여 주목할 만한데, 특히 입양제도나 적서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상이 나타나 있다. [선세외가족보]는 외가의 계보를 추적한 외보(外譜)로, 대개 외보는 역대 직계 조상의 배우자를 대상으로 그 종족의 시조부터 배우자 당대까지 계보를 수록했다는데, 이 족보는 마치 팔고조도처럼 외가뿐 아니라 외가의 외가까지 수록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2부 성씨와 본관 그리고 조상 찾기
제1장 성씨와 본관의 이중주
우리 성씨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다. 당시 제작된 각종 금석문을 비롯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고유 인명이 많은데, 이는 아직 중국식 한자 성을 받아들이는 초기 단계였다. 간혹 한자식 성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성은 그 계보가 후대에까지 연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통일신라 이전에는 중국과 달리 고유명만 사용하다가 그 후 점차 중국식 한자로 된 성을 받아들이면서 성과 이름이 조합된 것으로 봐야 한다.
신라에는 글자 수가 일정치 않은 즉 거칠부, 이사부, 비지부, 급진부 등과 같은 이두식 이름만 있었다. 그러다가 신라가 통일한 이후 중후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한자식 두 글자로 된 세련된 이름이 도입되고, 아울러 이 시기에 박·석·김을 비롯한 고유 성씨까지 출현하게 됐다. 따라서 박·석·김은 신라 건국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대에 소급해 붙였다고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씨는 7세기 후반 금석문인 문무왕릉비에서부터 나타났다. 6세기 중반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에는 수많은 수행 인원이 나오지만 성을 사용한 예는 없다. 그러다가 9세기에 접어들어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왔거나, 대외무역 과정에서 중국의 유명 성씨를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오늘날 본관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시조가 살았던 거주지이거나 출신지요, 둘째는 동일한 본관을 사용하는 사람 모두 피를 나눈 혈족 집단의 일원이라는 것, 셋째는 문벌 의식을 드러내는 기호로서의 역할이다. 우리는 오랜 동안 성과 본관이 실과 바늘처럼 따라다니는 관습 속에서 살아왔지만, 실은 7세기 이후 성이 사용되고 보급됐다면 본관은 적어도 10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났다고 본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씨’라는 어휘는 성과 씨를 합성한 것인데, 성은 부계를 중심으로 한 혈통 계보를, 씨는 촌락 또는 지역단위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혈연적 요소와 지연적 요소가 합쳐진 말이 성씨다. 전통사회에서 이런 두 가지 요소를 합쳐 부르던 용어가 ‘토성(土姓)’인데, [세종실록지리지]의 각 군현조를 보면 당시 행정구역별로 토착하고 있던 전국의 토성을 잘 정리해 놓고 있어, 그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듯 토성이 바로 본관을 나타내주므로, 그 성립 시기가 바로 본관제도가 시작된 시점일 것이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의 고려 영토가 후삼국 통일 당시에 확정됐던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지역에만 토성이 존재하여, 오늘날 모든 본관이 이 지역에 존재했던 행정구역 단위다.
당시의 본관제도는 지역 단위별로 호구를 파악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시행됐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본관제도와는 다르다. 그러니 ‘경주김씨’ ‘전주이씨’ 하듯이, 성과 연관된 본관이 아니라 거주지나 본적지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을 갖지 못한 천민에게도 본관만은 국가에서 지정해주어, 고려 초에 정착된 본관제도가 조선시대까지는 양수척(楊水尺. 백정)과 같은 특수한 천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관이 있었다. 이렇듯 본관이 거주지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단독으로 사용되다가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성과 연칭됐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본관제도다.
고려시대에 우리의 민족의식이 형성됐다고 볼 때 그 이전에 귀화한 백성은 이미 우리 민족에 동화되어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따라서 귀화 성씨라고 할 때는 우리의 성과 본관을 바탕으로 혈연적 계보의식으로 살아갔던 고려 중기 이후에 귀화해 사성(賜姓) 혹은 창성(創姓)으로 본관지에 정착한 경우로 봐야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귀화 성씨로는 경주설씨, 상주이씨, 임천이씨 등이 있으며, 중국에서 온 소씨와 변씨도 있다. 그리고 1127년, 1226년에 고려로 이주해온 베트남 왕자들의 정선이씨와 화산이씨나 함경북도 북청을 본관으로 하는 청해이씨도 귀화 성씨다.
한편, 우리 인물 기록에는 출신지가 없는데, 이는 조선시대부터 당시 사람들이 먼 조상의 출신지에 불과한 본관만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는 본관으로 양반임을 자랑하려는 풍토에서 빚어진 것이다.
한국인 중에 족보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고, 족보상 양반이 아닌 경우도 거의 없지만, 전근대 신분제도하에서는 절반이 넘는 사람이 성씨조차 없었고, 성씨가 있었다 할지라도 양반일 수 없었다. 결국 가계 위조 방법 등이 나타난 것인데, 아버지를 바꾸고 할아버지를 갈아치우는 환부역조(換父易祖) 행위로 특정 가계를 통째로 어느 인물의 후손으로 연접해 감쪽같이 둔갑시키는가 하면, 가계를 이어야 한다는 양자제도에 대한 관념이 없었던 조선 전기에 무후로 끝난 인물에 후손으로 연접하거나 한 세대를 더 끼워넣는 등의 첨간(添刊) 방법 등이 있었다.
제2장 시조와 조상 만들기
시조는 중국의 경우 두부 만드는 사람이나 돗자리 짜는 사람들도 많은데, 한국에서는 씨족제도가 유명 인물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형성 발전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일정한 세월이 흐른 뒤 추대해 넣어 모두가 이름난 인물들이다.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조상의 연원을 엄청나게 올려잡는 한때의 풍조로 말미암아 본관을 달리해도 성만 같으면 동일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조상동원설(祖上同源說)이 난무했다. 심지어 다른 성씨까지도 같은 형제로 갈라졌다는 설까지 나타났다. 여러 본관으로 나누어진 안씨가 모두 한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동원설과 함께 급기야 1700년대 후반에는 안씨·이씨동원설까지 제기됐다.
그 가문을 명문의 반석으로 올려놓은 실질적인 시조가 있었다. 명목상의 시조와 실질적인 시조를 구분해서, 그 가문을 있게 한 중흥조(中興祖)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그 가문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 기가조(起家祖)였다. 대개는 본관지에 정착해 살아가다 급제를 하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후 서울로 올라간 첫 번째 인물이 기가조인 셈이다.
또한 특정한 종족이 일정 공간에 오랜 기간 세거해왔던 동족 마을이 전국에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 가문을 지칭할 때 그들의 성 앞에 세거해온 마을 이름을 연칭해 불렀다. 안동을 예로 들면, 본관인 풍산이나 의성을 버리고 하회류씨, 내앞김씨 등으로 불렀다. 그리고 남원 지방 둔덕리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를 둔덕이씨라 하고, 사립안마을과 인근에 사는 광주이씨를 사립안이씨라 했다. 둔덕이씨는 효령대군을 현조로 하고, 사립안이씨는 명종과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이준경을 현조로 내세운다. 현조가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와 동일한 경우도 있지만, 입향한 인물의 후예 중에 뛰어난 인물을 현조로 모실 때도 있었다.
우리가 조상을 적당히 미화하거나 전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두찬(杜撰)이 많은 것은 서열병과 경쟁 심리에 기인하며, 신분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모두가 갈망했던 양반이라는 것이 법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갑족 양반이라면 상대적으로 심하지 않았겠지만, 신흥 양반이나 권력에서 멀어진 가문일수록 조상에 대한 두찬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제3부 집단기억과 족보의 문화사
제1장 족보의 사회사, 족보의 문화사
한국의 혈통과 계보에는 한국 고유의 토착 전통과 중국의 유교식 습속이 혼합되어 있다. 원래 고대국가 이래 우리의 사회적 기본 단위는 다소 느슨한 형태의 족(族)으로서 유교적 관습과는 차이가 컸다. 그러다가 통일신라 말기부터 중국식 성을 받아들이고 고려에 들어와 본관을 정하다 보니, 족 집단의 정체성이 점차 높아져 배타적인 집단이 됐다. 특히 위정자들이 유교 문화를 꾸준히 전파하여 우리 사회는 15세기에 토착적인 수평 문화에서 유교적인 수직 문화로 넘어가게 됐다. 당시 성리학자들이 강조한 [예기]나 [가례]는 엄격한 부계질서를 가르쳤는데, 그 효과는 17세기부터 나타나 친족과 비친족의 차별, 직계와 방계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종족 집단을 결속해 문중을 만들어냈다.
문중은 고유의 전통과 유교 규범을 조화시키기 위해 조선 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산물이다. 문중의 소속 범위는 사당 의례에 참여하는 집단보다 훨씬 넓었으며, 특히 형제의 평등 관계라는 토착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토착적인 수평 문화에다 유교적인 위계질서를 적용하기 위한 역사적 타협안이 문중이었고, 이 집단이 만들어낸 공동 작품이 바로 시조와 족보였다. 그리하여 우리의 ‘시조 할배’를 떠받들게 됐다.
성관 문제를 놓고 볼 때 한국의 18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농촌이나 도시를 막론하고 17세기 말까지 성관을 가진 인구 비율은 50퍼센트 내외였지만, 그 후 100년이 지나서는 90퍼센트를 넘는 사람이 성관을 지닌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새로운 성관을 획득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쓰던 기존의 성과 본관을 선택한 것이지, 창성이나 창관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조상 갈아타기를 한 셈이다.
17세기만 해도 극소수 양반만이 족보를 가졌는데 18세기에 접어들어 신분 상승을 위한 하층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변동과 맞물려 양반보다 많은 재산을 모으거나, 유교 예법과 독서 경험을 쌓아 양반에 버금가는 평민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법률을 비롯한 행정 관행을 숙지해 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는 등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리고 족보 장사도 생겨났다. 위험한 장사임에도 인쇄소를 차려놓고 족보 장사를 서슴지 않았을 만큼 수요 또한 넘쳤다. 사적으로 활자를 소유하는 그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인데도 영조 때 한양 한복판에 인쇄 시설을 갖추고 족보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제2장 족보에 목을 매는 사람들
우리 역사상 족보 간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이미 양반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고 시간이 지나 나라가 망해버렸어도 양반 의식만은 그대로 잔존했다.
성리학자들이 엄격한 부계 질서의 가르침을 지속시켜 그 효과가 16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17세기 후반부터는 친족과 비친족을 차별하고 직계와 방계를 엄격히 구분해 종족 집단을 결속시켜 문중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는 보다 확대된 조상 숭배 집단이며, 이들의 공고한 결속을 위해 직계를 잇는 연장자에게 종손이라는 이름을 주는 동시에 막강한 권위까지 부여했다. 종손이 제사를 관리한다는 명분을 갖게 되자 각 지파는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종손을 사손(祀孫)이라고 하듯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권위를 부여받았기에 아무리 훌륭한 지손이 있다 할지라도 서열상 사손을 넘지 못했다. 영남 지방에서 ‘벼슬 중에 종손 벼슬이 최고’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다.
종손의 권위가 커질수록 종통(宗統)을 둘러싼 소송이 난무했다. 서로 종손이라고 우기는 소송들로, 웬만한 양반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한 예로 능성구씨 좌정승공파와 하양허씨 가문의 예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안차씨와 문화류씨 간에 벌어진 시조를 놓고 벌이는 문중 간의 시비도 있었다.
우리 전통사회가 처음부터 적서를 차별한 것은 아니고, 조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 때 명분으로 이용된 후 점차 굳어져갔다. 여기에는 당시 사대부의 서자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잘 나타나는데, 18세기 이후에는 지속적인 국가의 서얼소통 정책이 있어, 국가 차원에서의 차별 의식은 많이 완화되어가고 있으나 일반 사가에서는 명분론이 여전히 우세해 서자의 설움은 여전했다. 여기저기 산재한 고문서 중에서 족보 편간 당시 적서 갈등 때문에 관청에 소를 제기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제4부 조상과 족보에 대한 전통 가꾸기
제1장 전통사회의 족보와 보학
성씨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고려시대부터 계보 관념이 형성됐겠지만, 이때 개개인의 소속 의식을 넘어 상호 동질 의식을 통한 사회 집단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아울러 당시 계보 파악은 4조(부, 조, 증조, 외조)를 기본으로 했기에 나를 기준으로 설정됐다.
아울러 고려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부계와 모계가 동일시되는 양측적(兩側的) 친족 관계가 유지됐기에, 피를 물려받은 외손의 외손의 외손도 친손과 차등을 두지 않았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로 양반가에서는 나를 기점으로 한 역삼각형 계보도를 그렸고, 그것이 팔고조도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실천윤리인 [주자가례]가 보편화되고 오복제와 종법적 질서가 강화되면서 부계 혈통 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되어갔다. 그리하여 장자 상속을 기반으로 한 단일 성씨 중심의 동족마을이 생기면서 문중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출가외인이라는 남녀 차별과 적서 차별 등 ‘차별의 논리’가 작용했다. 이에 따라 족보 편찬에도 영향을 주어 외손이 탈락하는 대신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동일 본관의 가계를 일가라는 관념으로 모두 찾아 넣는 합동계보를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전혀 계보가 닿지 않는 계파까지도 별보 형식으로 함께 수록했다. 따라서 같은 성씨면 동족이라는 관념이 새롭게 자리 잡아 갔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지식인의 소통 수단 중에 가장 컸던 것이 바로 보학(譜學)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당시 선비사회에서는 자신의 족보만이 아니라 남의 집 혈통까지 훤히 꿰고 있어야만 대화에 끼일 수가 있었다. 통성명이 이루어지는 자리엔 늘 그들이 가진 보학 지식이 총동원됐으며, 보학 지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양반 됨됨이에 대해 험담도 늘어놓고 치부를 들먹이는 정도까지 갔다.
이에 비해 우리 족보에서 여자 이름은 안동권씨, 순천김씨라는 식의 성관 기록이 전부였다. 조선시대로 한정해 살펴보면, 여자의 이름이 밝혀진 경우는 범죄에 연루됐을 경우로, 어우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초기 가계 기록을 보면, 아들딸 구분 없이 출생순으로 싣되, 외손(녀)도 세대를 제한하지 않고 편찬 당시까지 태어난 인물을 모두 수록했고, 그 대신 처의 본관과 4조, 이력 사항 등과 같은 처가 쪽 계보를 기록하지 않았다. 17세기 중엽까지도 아들과 딸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종법제도가 정착하는 18세기에 남계 혈통 만능주의로 변해갔다.
시집온 여성과 시집의 조상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남편이나 자식과 운명 공동체로 살아갔던 것이 조선 후기의 가족제도였다.
제2장 조상과 족보를 통한 전통 가꾸기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대상이 존귀할수록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혈통을 중요하게 여긴다. 개나 말의 경우가 인간의 족보보다 철저하기도 하다. 개의 학명 켄넬을 따서 애견협회를 켄넬 클럽이라 하는데 나라마다 켄넬 클럽이 있어 순혈종의 혈통 관리를 한다. 말의 경우는 사람 족보보다 오히려 더 엄격하게 관리된다. 혈통서(Stud Book)라고 불리는 경주마 족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며, 족보가 없는 말은 경주에 참가할 수 없다.
유럽이나 미국의 아일랜드계 이민자들도 가계도인 패밀리 트리를 만들었다. 패밀리 트리, 즉 가족나무 전통은 멀리 구약시대의 ‘누구는 누구와 혼인해 누구를 낳고……’ 하는 식의 가계보가 10대까지 이어진 것과 연결되니 인간의 족보에 대한 연원을 따지자면 구약성서가 유대인의 역사요, 족보인 셈이다. 그리고 미국 유타 주 소금호수의 도시 솔트레이크시티에는 대규모의 가족역사도서관이 있는데, 세계 족보 정보 자료를 보관하는 볼트마운틴이라는 지하 수장고를 따로 관리하고 있다.
동양에서는 특히 한자 문화권의 종주국인 고대 중국에서부터 발달한 족보 문화가 이웃 국가로 파급되어갔는데, 일본에만 족보가 없다. 일본에는 ‘가계도’가 있는데, 이것도 피를 나눈 혈통을 표시한 것이 아니라 가업을 물려받은 사람 중심으로 그려진 계보도다. 한국의 가문은 ‘혈연 중심’이지만 일본의 가문은 ‘업연(業緣) 중심’이기 때문이다. 혈통에 집착하던 우리와 달리, 일본에서는 양자나 데릴사위를 얻어 가업을 세습하기에 일본 총각이 장가들면서 성을 바꾸는 일은 흔한 일이다.
족보는 동일한 성관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수록한다. 성관이란 성씨와 본관을 합친 것으로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성과 본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귀화하는 외국인은 성과 본관이 없다. 프랑스 출신 방송인 이다도시는 귀화했으나 성과 본관을 한자식으로 변경하지 않았고, 교수와 방송인, 회사 경영자 등으로 활동한 이참도 귀화하면서 본관을 독일로 하여 ‘독일이씨’의 시조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방송과 광고에서 웃음을 주는 미국계 로버트 할리는 하일로 개명할 때 ‘영도하씨’ 시조가 됐다.
한편 ‘상대하세(上代下世)’라 하여, 위로는 대를 붙이고 아래로는 세를 붙이는 것이 오랜 관행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대와 세’는 다 같이 한 세대를 헤아리는 수의 단위다.
종친회라는 연줄 커뮤니케이션이 문제 될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을 지닌 구성원끼리 보다 생산적인 의사 교환을 촉진할 방안을 찾다 보면 건전한 시민사회 육성과 사회 통합을 위한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혈연을 바탕을 한 집단기억의 매체인 족보를 새롭게 조명해 문화적 기억으로 되살릴 필요가 있는데, 이는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 과거의 현재적 의미를 재구성해주는 족보야말로 나의 뿌리 찾기라는 정체성 확인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 인식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박홍갑
1955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했다. 영남대 대학원에서 『조선 전기 음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편사연구관, 연구편찬실장, 편사부장 및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정치?사회사 분야 40여 편의 논문을 토대로 [조선시대 문음제도 연구], [병재 박하징 연구], [조선조 사족사회의 전개] 등 학술서적을 저술했고,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양반나라 조선나라], [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공저)] 등 교양서적들을 집필하여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힘을 쏟아왔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제1부 우리 족보 변천사
제1장 족보의 발달 단계와 그 특징
1. 족보란 무엇인가?
2. 우리 가계 기록의 연원과 현황
3. 족보의 원형, 가승과 족도
4. 초기 족보, 내외자손록과 내외종합보
5. 족보다운 족보, 합동계보 - 초보草譜에서 간행본으로
6. 파보에서 대동보로 - 국성國姓 전주이씨 사례
제2장 특수한 족보와 생뚱맞은 족보
1. 왕실족보 [선원록]과 [선원계보기략]
2. 족보의 파생 상품, 팔고조도와 16조도
3. 내시의 족보, [양세계보]
4. 벼슬길 따라 나뉜 [문보] [무보] [음보]
5. 만인의 족보, 만성보
6. [사성강목]과 [선세외가족보]
제2부 성씨와 본관 그리고 조상 찾기
제1장 성씨와 본관의 이중주
1. 고유 성씨와 외래 성씨
2. 본관,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어느 행정구역
3. 발해 왕 대조영 후손의 본관 만들기
4. 출신지가 없었던 한국인
5. 조상, 우리에겐 선조인가, 신인가?
6. 환부역조와 창씨개명
제2장 시조와 조상 만들기
1. 시조, 여러 인물 중에 행운을 누린 단 한 사람
2. 시조는 왜 유명 인물뿐인가?
3. 내 조상이 중국에서 왔다는데?
4. 실질적인 시조, 기가조
5. 제2의 본관을 연 사람, 입향조
제3부 집단기억과 족보의 문화사
제1장 족보의 사회사, 족보의 문화사
1. 시조 할배와 집단기억
2. 조상 감추기와 전통 만들기
3. 족보여! 진실의 종을 울려라
4. 18세기의 신종 사업, 족보 장사
5. 가족주의와 집단주의의 그늘, 우리가 남이가?
6. 도시 전설, 천방지축마골피
제2장 족보에 목을 매는 사람들
1. 혈통의 줄을 바르게 하라 -첨간添刊과 별보別譜의 마력
2. 종손 자리를 탐하는 계보 전쟁
3. 시조를 놓고 벌이는 문중 간의 시비
4. 나도 양반의 피를 물려받았는데
5. 기생첩과 어우동, 왕가의 자손
6. 고문서에 나타난 보송譜訟 사례
제4부 조상과 족보에 대한 전통 가꾸기
제1장 전통사회의 족보와 보학
1. 계보 추적 두 원리가 낳은 촌수와 항렬
2. 전통사회 읽기의 키워드, 조상과 족보
3. 조선 지식인의 필수 교양, 보학
4. 차이에서 차별로, 여성과 외손
5. 시조동원설과 조상 만들기
6. 현대판 보학의 대가들
제2장 조상과 족보를 통한 전통 가꾸기
1. 개 족보, 말 족보 그리고 인간 족보
2. 다문화 사회와 시조 할머니
3. 영남 사람 호남 사람, 그대의 본관지는 안녕하신가?
4. 몇 대손인가, 몇 세손인가? 헷갈리는 논쟁
5. 연줄로 맺은 세상, 연줄로 풀자
6. 유구한 내 가문 전통 가꾸기
미 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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