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 책을 말한다 -‘저들의’ 근대는 어떻게 이 땅을 조사하고, 구경하고, 전시했는가
# ‘조선 황제’는 그다지도 촌스러웠던가? - 일제의 ‘이미지’ 전략과 사진의 거짓말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다!”
1909년 함경도 경성군에 사는 일단의 촌맹들이 운곡학교에 봉안된 순종의 단발한 모습을 보고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라하여 사진을 불살라버린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전통적인 군주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랍고 낯설어서 취한 우발적 행동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식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의식의 표출이기도 했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중에서
제 몸집보다 네댓 배는 더 큰 짐을 진 지게꾼, 엿판을 든 꼬마아이, 초가집이 들어선 진흙투성이 골목……. ‘근대 사진’ 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세련된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조선 황실이나 황제의 이미지도 그렇다. 머리를 짧게 깎고 어울리지 않는 서양 제복을 입은 키 작은 고종 황제의 모습이 떠오를 뿐, 황실이나 황제라는 단어에서 풍겨 나오는 초월적이고 화려한 절대 권력의 이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근대 사진’이라고 하면 우리가 언뜻 가지는 심상은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진짜 근대’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문학 작품이나 신문 기사에서 발견되어 영화나 드라마로 재창조되곤 하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백화점 쇼핑을 하거나 카페에서 환담을 나누는 세련된 ‘모던 한국’의 이미지는 왜 떠오르지 않을까? 이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사진’이 우리의 근대를 그토록 전근대적으로 표상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박아놓기’ 때문에 사진이란 정직한 매체라는 생각을 하지만, 찍는 사람의 의도를 넣어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대상의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는 매체가 사진이다. 일제,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신경 쓴 식민지 지배 작업 중 하나는 사진을 통해 ‘일제의 지배를 받을 법한 나라 조선’을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천황의 권위 넘치는 어진영을 기획하는 등 ‘이미지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나갔던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 순행 사진, 기념사진, 국장 사진 등 다양한 국가 공식 사진을 촬영하게 하여 근대 한국의 이미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창출해갔다. 고종은 사진 기술을 배운 왕실 서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 사진을 찍게 하려 했으나, 이토는 일본인 사진사를 고종의 어용사진사로 붙여 조선 스스로가 황실과 근대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사진 속에서 황제 고종을 어설픈 ‘식민지 군주’ 정도의 이미지로 표상한 일제는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황태자 영친왕은 ‘식민지 태자’이자 ‘황국 군인’으로 속속 표상해 갔고 황실에서 시작된 표상 체계의 통제와 이미지 조작은 이후 진행된 각종 조사사업으로도 확대된다.
# 박물관에 갇힌 ‘구경거리 조선’ - 인류학과 고고학으로 만들어낸 식민지 풍경
토리이 류조 만큼 조선을 온몸으로 본 사람이 있을까. 교통수단도 수월치 않았던 시절, 함경북도에서 제주도 그리고 다도해와 울릉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역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걸어서 다녔던 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가 본 조선은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일제가 보고자 했던 조선이었다. -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중에서
식민지 시대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때 시행한 측량 수치의 오류를 수정하는 새로운 토지 측량을 시행한다고 한다. 토지 조사사업은 조선의 근대적인 지도를 만드는 작업인 동시에 효과적인 토지 수탈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고문화재를 수탈하기 전에 그 준비로서 진행한 조사 작업 ‘조선고적고사사업’이 있었음을, 또한 이 조사가 사진촬영을 통해 우리 문화재와 유적?유물에 대한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축적했었음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적연구위원 세키노 타다시의 지휘 아래 『조선고적도보』라는 자료집으로 정리된 이 식민지 고고학 조사 작업은 식민지 조선을 시각적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원래 위치와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채 박물관(사진첩)에 전시되는 소극적인 물품으로 변화시켰으며, 나아가 이 유물들의 일본 반출이나 개인적 점유로 이어지는 준비 작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문화재 중에서 ‘보일 것’과 ‘보이지 않을 것’을 구분하여 서구인과 조선인들 앞에 내놓음으로써, 일제의 입맛대로 재현된 조선의 이미지를 관람객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적 사진을 촬영하면서 유적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장치로 근처에 있는 조선인을 유물 옆에 세워두고 촬영한 방식은, 인물의 인격을 제거하고 눈금자로서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의지나 인격 없이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는 식민주의 담론을 표상하고 있다.
사진으로 표상된 식민주의 담론은 조선의 땅, 즉 유물?유적의 경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인류학이라는 당시 제국주의의 지도 학문의 활약은 근대 일본의 손꼽히는 인류학자 토리이 류조의 조선 인종 사진, ‘신체 측정 사진’이라는 인류학 사진 아카이브를 남겼다. 중국, 대만, 몽골, 쿠릴 열도, 시베리아, 나아가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해 인종에 대한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토리이 류조는 조선인의 원시성, 전근대성, 육체성을 사진으로 표상해 일제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 각 지방에서 ‘이주해오지 않은 순수 토착민’이자 백정이나 무당 등 토속성과 원시성이 부각되는 계층의 인물들을 선택해, 전형적인 인류학 사진의 촬영 방식인 정면과 측면 촬영을 통해 ‘야만적인 육체’로서의 조선과 조선인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근대화된 일본인들에게 그와 비교되는 자신들의 인종학적 우월함을 고취시켰다.
탑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 탑 옆에 뻣뻣하게 선 지저분한 아이, 다섯 명이나 열 명씩 줄지어 늘어서서 옷에 번호표를 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백정, 무당, 해녀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표본’이자 세계의 부족이라는 테마의 박람회장에 등장할 법한 ‘이색적인 구경거리’일 뿐이다. 인류학과 고고학을 탐구한다는 미명 아래 시행된 수많은 조사사업은 지배와 수탈과 식민 담론 주입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 ‘식민지 박람회’였던 것이다.
# 기이하고 더러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신선한 아침의 나라’로!
제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한국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죠 … 여기는 이미 전시법이 공포되어 총살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사형 집행 과정을 사진사 두 명에게 찍게 하는 등 일처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은 불쾌했습니다. 이 지독한 총살 장면이 담긴 사진을 살 수도 있답니다. -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중에서, 잔더의 편지
‘잠든 고요한 아침의 나라’, ‘금단의 나라’, ‘은자의 나라’. 근대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이 붙여준 별명들이다. 아직 전근대의 꿈속에서 나른히 깨어나지 않은 나라, 나귀를 타고, 짚신을 신고 고즈넉한 산길을 가만히 걷는 나라, 흰 옷을 입은 현자와 매혹적인 기생들의 나라이자 가슴을 다 내놓은 아낙과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돌아다니는 미개한 원시인들의 나라……. ‘조용한 아침’은 이제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근대 조선을 단편적으로 관찰한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적인 개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번 확립된 이런 이미지는 좀처럼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 초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의 쓴 저서와 찍은 사진, 수집한 사진을 통해 서구에 알려진 조선의 이미지는 서구에 각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마저도 그 각인된 이미지를 국가 홍보용 수단으로 사용하곤 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의 창출과 확산이 이루어진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과 독일 조사관 헤르만 산더의 조선 방문과 사진 컬렉션을 더듬어보았다. 이미 근대 초기 외국인 방문자들의 여행기나 사진집은 많이 소개된 편이나, 한불관계가 소원했던 시기에 방문한 프랑뎅과 다른 나라 방문자에 비해 그다지 발굴과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던 독일인 방문자 잔더의 사진 컬렉션을 살펴보는 작업은 당시 외국인들의 조선을 보는 시선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변화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조선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철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외교관 프랑뎅과, 러일전쟁의 전장을 조사하고 ‘일본이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밝힌 군 조사관 잔더의 시선과 사진 컬렉션들을 통해 서구의 방문자들이 재현하고 표상한 우리 근대의 모습을 뜯어봄으로써 그 안에 있는 편향된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굴레를 벗어나 ‘신선한 아침의 나라(지그프리트 겐테)’라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 ‘사진인문학’ 혹은 ‘사진 아카이브’를 통해 메우는 역사 공간의 빈틈
잔더가 자신의 사진첩에서 여러 지면을 할애하면서 촬영한 지역인 길주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의병들의 연전연승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인 북관대첩비가 있었던 곳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1905년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강탈되어 그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다가 최근 100년 만에 반환되었다고 하는데, 잔더가 촬영한 길주 지역 사진을 보면서 한일 간의 끊이지 않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만나게 된다. -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중에서
사진기록학이라는, 국내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분야를 개척해 온 저자는 체계화된 사진 아카이브 구축과 연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역사 연구와 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근대와 시작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어떤 매체보다 더 근대성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매체인 사진을 ‘역사기록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국가 차원의 제대로 된 관리 체계와 기관을 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십수년간 되풀이되고 있는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쟁을 보면, 단순히 사진의 촬영대상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오가는 1차적인 논란도 해결이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그 사진이 촬영된 맥락이나 유통 과정, 인물이 진짜 명성황후인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진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진중한 연구는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사진에 기록된 문화재, 건축물, 주거 형태, 도구, 복장, 인물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있는 미시사 연구의 가능성도 체계화된 사진 아카이브의 부재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사진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역사의 조각들도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러일전쟁의 한반도 내 전장, 즉 제물포, 성진, 길주 등을 샅샅이 기록한 헤르만 잔더의 사진 컬렉션은 우리에게 잊혀진 전장의 복원 가능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탁월한 영상역사기록물이 될 수 있다. 러일전쟁의 진행과정이 향후 강제합병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군사기지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므로, 이런 중요한 사진 자료의 발굴이 역사 인식과 연구 방식의 전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립아카이브 같은 국가 차원의 사진 아카이브를 일찍부터 구축해 꾸준히 관리 중인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국가가 지속적으로 수준 높은 영상 콘텐츠를 창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미지의 관리와 축적은 국가의 문화 경쟁력과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 : 이경민
한국 사진사 연구에 관심을 두고 사진 평론과 전시 및 출판 기획 등의 일을 해온 이경민은 현재 사진아카이브연구소(http://cafe.naver.com/fotoarchives.cafe)를 운영하면서 근대 사진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여 2005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사진비평』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전시기획자를 대상으로 주어지는 ''이동석 전시기획상''을 첫 회(2008)에 수상하였다. 『기념사진전』(문예진흥원미술관, 1999), 『다큐먼트전』(공동기획, 서울시립미술관, 2004),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대안공간 풀, 2004), 『우리사진의 역사를 열다』(한미사진미술관, 2006), 『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일민미술관, 2007), 『오월의 사진첩』(광주시립미술관, 2008) 등의 사진전을 기획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사진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프랑뎅의 사진 콜렉션을 통해 본 프랑스인의 한국의 표상」,「잔더가 본 100년 전 한국의 풍경지리 」등이 있으며, 지은책으로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공저),『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구보씨, 사진 구경가다』,『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구보씨’ 라는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전문적인 산보객이자 관찰자로서 다종다양한 근대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경성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복원·재구성하는 『대경성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읽어내려는 엄청난 시도를 꾀하고 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 표상되는 근대, 만들어진 조선
1부 제국의 렌즈로 조선을 붙잡다 - 사진의 거짓말과 빼앗긴 표상
일제, 조선 황실을 이미지 메이킹하다 - 황실사진과 표상의 정치학
아이콘이 되려한 황제, 고종
1907년에 생긴 일_변용하는 표상체계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표상하라
영친왕, ‘식민지의 태자’이자 ‘황국 군인’
재현과 표상에서 끌어낸 조선 황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 표상으로 조선을 지배하다
신황제 순종, ‘표상’을 명하다
그러나 천황에 경배하라
어린 학도들에게 ‘봉배의 광영’을
읽을거리: 금관 기생 이야기
2부 구경거리가 된 조선의 땅과 사람 - 일제의 조선 재현
제국의 지도, 식민지 고고학 - 세키노 타다시와 조선고적조사사업
지도와 아카이브, ‘이름 짓기’의 과정
지배하기 위해 조사하다
고적조사사업의 자취를 더듬다
‘보일 것’과 ‘보이지 말 것’
근대학문의 실험장이 된 한반도
사진과 고고학의 공생
『조선고적도보』,그 완벽한 식민주의의 컬렉션
사진 아카이브로 역사를 비추다
재현된 역사 읽기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 토리이 류조의 인체측정사진
20세기 말 다시 호명된 인류학자
학문의 열정인가, 제국에 봉사인가
토리이의 조선조사 사진과 근대의 시선
토리이가 ‘창출’한 ‘조선 인종’
근대성의 선택과 배제
우경화가 다시 불러낸 인류학
구경거리 : 구보씨, 박람회에 가다_박람회 사진첩
농업과 임업 | 경제와 산업 | 토목과 건축 | 교통 | 교육 | 고건축 | 보건위생 | 비교사진관 | 기념사진관
3부 잠든 아침의 나라는 언제 눈 뜨는가 - 서구의 조선 만들기
진흙과 새끼줄의 나라 -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의 조선 구경
근대(성), 표상, 오리엔탈리즘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을 찾아서
프랑뎅의 사진 컬렉션을 펼쳐보다
사진첩 속의 ‘표상덩어리’ 조선
프랑뎅을 넘어서_파리만국박람회와 조선인의 재현
외국인의 컬렉션, 사진과 출처의 퍼즐 맞추기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 독일 조사관 헤르만 잔더의 조선 읽기
잠자는 동양을 깨우는 서구의 표상
독일인 방문자들
조사관 잔더의 한국 정보 수집기
식민지 조사사업과 한국에서의 사진 촬영
잔더의 동아시아 여정과 사진첩 읽기
러일전쟁의 흔적을 찾아서
러일전쟁의 제2전장_한반도를 찾아서
잔더의 여행길, 누구와 어떻게?
빈 역사 공간을 메우는 잔더의 아카이브
‘신선한’ 아침의 나라 발굴하기
읽을거리: 전시되는 어린이, 아동의 탄생
보론 - 사진 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사진 아카이브의 개념과 시대적 요구
사진 아카이브의 필요성
우리나라 주요 사진 소장처와 관리 현황
사진 아카이브 구성을 위한 일본의 대응
사진 아카이브,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나오면서_근대의 완전한 몸을 보기 위하여
주석 | 원고출처 | 찾아보기
이 책을 말한다 -‘저들의’ 근대는 어떻게 이 땅을 조사하고, 구경하고, 전시했는가
# ‘조선 황제’는 그다지도 촌스러웠던가? - 일제의 ‘이미지’ 전략과 사진의 거짓말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다!”
1909년 함경도 경성군에 사는 일단의 촌맹들이 운곡학교에 봉안된 순종의 단발한 모습을 보고 폐하의 참사진이 아니라하여 사진을 불살라버린 웃지 못할 일도 발생했다. 그들이 기대했던 전통적인 군주상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랍고 낯설어서 취한 우발적 행동이기도 하겠지만, 일본식 복장을 한 국왕의 모습에 분노한 민중들의 항일의식의 표출이기도 했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중에서
제 몸집보다 네댓 배는 더 큰 짐을 진 지게꾼, 엿판을 든 꼬마아이, 초가집이 들어선 진흙투성이 골목……. ‘근대 사진’ 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세련된 데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조선 황실이나 황제의 이미지도 그렇다. 머리를 짧게 깎고 어울리지 않는 서양 제복을 입은 키 작은 고종 황제의 모습이 떠오를 뿐, 황실이나 황제라는 단어에서 풍겨 나오는 초월적이고 화려한 절대 권력의 이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근대 사진’이라고 하면 우리가 언뜻 가지는 심상은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진짜 근대’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문학 작품이나 신문 기사에서 발견되어 영화나 드라마로 재창조되곤 하는, 우아하게 차려입고 백화점 쇼핑을 하거나 카페에서 환담을 나누는 세련된 ‘모던 한국’의 이미지는 왜 떠오르지 않을까? 이 ‘이미지’를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사진’이 우리의 근대를 그토록 전근대적으로 표상해 놓았기 때문이다.
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박아놓기’ 때문에 사진이란 정직한 매체라는 생각을 하지만, 찍는 사람의 의도를 넣어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대상의 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는 매체가 사진이다. 일제, 특히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신경 쓴 식민지 지배 작업 중 하나는 사진을 통해 ‘일제의 지배를 받을 법한 나라 조선’을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다. 일본에서도 메이지 천황의 권위 넘치는 어진영을 기획하는 등 ‘이미지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나갔던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 순행 사진, 기념사진, 국장 사진 등 다양한 국가 공식 사진을 촬영하게 하여 근대 한국의 이미지를 자신의 의도대로 창출해갔다. 고종은 사진 기술을 배운 왕실 서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 사진을 찍게 하려 했으나, 이토는 일본인 사진사를 고종의 어용사진사로 붙여 조선 스스로가 황실과 근대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사진 속에서 황제 고종을 어설픈 ‘식민지 군주’ 정도의 이미지로 표상한 일제는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황태자 영친왕은 ‘식민지 태자’이자 ‘황국 군인’으로 속속 표상해 갔고 황실에서 시작된 표상 체계의 통제와 이미지 조작은 이후 진행된 각종 조사사업으로도 확대된다.
# 박물관에 갇힌 ‘구경거리 조선’ - 인류학과 고고학으로 만들어낸 식민지 풍경
토리이 류조 만큼 조선을 온몸으로 본 사람이 있을까. 교통수단도 수월치 않았던 시절, 함경북도에서 제주도 그리고 다도해와 울릉도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역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걸어서 다녔던 그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가 본 조선은 그 자체로서의 조선이 아니라 일제가 보고자 했던 조선이었다. -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중에서
식민지 시대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사람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때 시행한 측량 수치의 오류를 수정하는 새로운 토지 측량을 시행한다고 한다. 토지 조사사업은 조선의 근대적인 지도를 만드는 작업인 동시에 효과적인 토지 수탈을 위한 예비 과정이었다. 거기에 더해, 우리의 고문화재를 수탈하기 전에 그 준비로서 진행한 조사 작업 ‘조선고적고사사업’이 있었음을, 또한 이 조사가 사진촬영을 통해 우리 문화재와 유적?유물에 대한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축적했었음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고적연구위원 세키노 타다시의 지휘 아래 『조선고적도보』라는 자료집으로 정리된 이 식민지 고고학 조사 작업은 식민지 조선을 시각적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문화재를 원래 위치와 맥락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채 박물관(사진첩)에 전시되는 소극적인 물품으로 변화시켰으며, 나아가 이 유물들의 일본 반출이나 개인적 점유로 이어지는 준비 작업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문화재 중에서 ‘보일 것’과 ‘보이지 않을 것’을 구분하여 서구인과 조선인들 앞에 내놓음으로써, 일제의 입맛대로 재현된 조선의 이미지를 관람객들에게 심어주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적 사진을 촬영하면서 유적의 크기를 알 수 있는 장치로 근처에 있는 조선인을 유물 옆에 세워두고 촬영한 방식은, 인물의 인격을 제거하고 눈금자로서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의지나 인격 없이 일제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는 식민주의 담론을 표상하고 있다.
사진으로 표상된 식민주의 담론은 조선의 땅, 즉 유물?유적의 경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인류학이라는 당시 제국주의의 지도 학문의 활약은 근대 일본의 손꼽히는 인류학자 토리이 류조의 조선 인종 사진, ‘신체 측정 사진’이라는 인류학 사진 아카이브를 남겼다. 중국, 대만, 몽골, 쿠릴 열도, 시베리아, 나아가 남아메리카까지 진출해 인종에 대한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토리이 류조는 조선인의 원시성, 전근대성, 육체성을 사진으로 표상해 일제의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자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조선 각 지방에서 ‘이주해오지 않은 순수 토착민’이자 백정이나 무당 등 토속성과 원시성이 부각되는 계층의 인물들을 선택해, 전형적인 인류학 사진의 촬영 방식인 정면과 측면 촬영을 통해 ‘야만적인 육체’로서의 조선과 조선인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근대화된 일본인들에게 그와 비교되는 자신들의 인종학적 우월함을 고취시켰다.
탑의 크기를 알려주기 위해 탑 옆에 뻣뻣하게 선 지저분한 아이, 다섯 명이나 열 명씩 줄지어 늘어서서 옷에 번호표를 달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백정, 무당, 해녀들은 박물관에 전시된 ‘표본’이자 세계의 부족이라는 테마의 박람회장에 등장할 법한 ‘이색적인 구경거리’일 뿐이다. 인류학과 고고학을 탐구한다는 미명 아래 시행된 수많은 조사사업은 지배와 수탈과 식민 담론 주입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 ‘식민지 박람회’였던 것이다.
# 기이하고 더러운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신선한 아침의 나라’로!
제 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을 쏴 한국인 세 사람을 죽인 것이죠 … 여기는 이미 전시법이 공포되어 총살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사형 집행 과정을 사진사 두 명에게 찍게 하는 등 일처리를 공개적으로 한 것은 불쾌했습니다. 이 지독한 총살 장면이 담긴 사진을 살 수도 있답니다. -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중에서, 잔더의 편지
‘잠든 고요한 아침의 나라’, ‘금단의 나라’, ‘은자의 나라’. 근대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이 붙여준 별명들이다. 아직 전근대의 꿈속에서 나른히 깨어나지 않은 나라, 나귀를 타고, 짚신을 신고 고즈넉한 산길을 가만히 걷는 나라, 흰 옷을 입은 현자와 매혹적인 기생들의 나라이자 가슴을 다 내놓은 아낙과 벌거벗은 어린아이가 돌아다니는 미개한 원시인들의 나라……. ‘조용한 아침’은 이제는 긍정적인 개념이라기보다, 근대 조선을 단편적으로 관찰한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오리엔탈리즘적인 개념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한번 확립된 이런 이미지는 좀처럼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 초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의 쓴 저서와 찍은 사진, 수집한 사진을 통해 서구에 알려진 조선의 이미지는 서구에 각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마저도 그 각인된 이미지를 국가 홍보용 수단으로 사용하곤 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의 창출과 확산이 이루어진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과 독일 조사관 헤르만 산더의 조선 방문과 사진 컬렉션을 더듬어보았다. 이미 근대 초기 외국인 방문자들의 여행기나 사진집은 많이 소개된 편이나, 한불관계가 소원했던 시기에 방문한 프랑뎅과 다른 나라 방문자에 비해 그다지 발굴과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던 독일인 방문자 잔더의 사진 컬렉션을 살펴보는 작업은 당시 외국인들의 조선을 보는 시선과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변화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조선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철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으로 조선을 바라본 외교관 프랑뎅과, 러일전쟁의 전장을 조사하고 ‘일본이 조선에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밝힌 군 조사관 잔더의 시선과 사진 컬렉션들을 통해 서구의 방문자들이 재현하고 표상한 우리 근대의 모습을 뜯어봄으로써 그 안에 있는 편향된 시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이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굴레를 벗어나 ‘신선한 아침의 나라(지그프리트 겐테)’라는 이미지를 발견하고 일깨울 수 있을 것이다.
# ‘사진인문학’ 혹은 ‘사진 아카이브’를 통해 메우는 역사 공간의 빈틈
잔더가 자신의 사진첩에서 여러 지면을 할애하면서 촬영한 지역인 길주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의병들의 연전연승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인 북관대첩비가 있었던 곳이다. 이 북관대첩비는 1905년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강탈되어 그동안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었다가 최근 100년 만에 반환되었다고 하는데, 잔더가 촬영한 길주 지역 사진을 보면서 한일 간의 끊이지 않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만나게 된다. -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중에서
사진기록학이라는, 국내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분야를 개척해 온 저자는 체계화된 사진 아카이브 구축과 연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역사 연구와 발굴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근대와 시작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어떤 매체보다 더 근대성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매체인 사진을 ‘역사기록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국가 차원의 제대로 된 관리 체계와 기관을 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다. 십수년간 되풀이되고 있는 명성황후 사진 진위 논쟁을 보면, 단순히 사진의 촬영대상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오가는 1차적인 논란도 해결이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는 그 사진이 촬영된 맥락이나 유통 과정, 인물이 진짜 명성황후인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사진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진중한 연구는 당연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사진에 기록된 문화재, 건축물, 주거 형태, 도구, 복장, 인물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확대될 수 있는 미시사 연구의 가능성도 체계화된 사진 아카이브의 부재로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사진을 통해 새롭게 발견되는 역사의 조각들도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면, 러일전쟁의 한반도 내 전장, 즉 제물포, 성진, 길주 등을 샅샅이 기록한 헤르만 잔더의 사진 컬렉션은 우리에게 잊혀진 전장의 복원 가능성을 다시 일깨워주는 탁월한 영상역사기록물이 될 수 있다. 러일전쟁의 진행과정이 향후 강제합병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군사기지화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므로, 이런 중요한 사진 자료의 발굴이 역사 인식과 연구 방식의 전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국립아카이브 같은 국가 차원의 사진 아카이브를 일찍부터 구축해 꾸준히 관리 중인 프랑스, 독일, 일본 등의 국가가 지속적으로 수준 높은 영상 콘텐츠를 창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이미지의 관리와 축적은 국가의 문화 경쟁력과도 직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작가 소개
저 : 이경민
한국 사진사 연구에 관심을 두고 사진 평론과 전시 및 출판 기획 등의 일을 해온 이경민은 현재 사진아카이브연구소(http://cafe.naver.com/fotoarchives.cafe)를 운영하면서 근대 사진 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여 2005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계간 『사진비평』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전시기획자를 대상으로 주어지는 ''이동석 전시기획상''을 첫 회(2008)에 수상하였다. 『기념사진전』(문예진흥원미술관, 1999), 『다큐먼트전』(공동기획, 서울시립미술관, 2004),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대안공간 풀, 2004), 『우리사진의 역사를 열다』(한미사진미술관, 2006), 『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일민미술관, 2007), 『오월의 사진첩』(광주시립미술관, 2008) 등의 사진전을 기획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사진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프랑뎅의 사진 콜렉션을 통해 본 프랑스인의 한국의 표상」,「잔더가 본 100년 전 한국의 풍경지리 」등이 있으며, 지은책으로 『유리판에 갇힌 물고기』(공저),『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구보씨, 사진 구경가다』,『벽의 예찬, 근대인 정해창을 말하다』(공저) 등이 있다. ‘구보씨’ 라는 아이디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전문적인 산보객이자 관찰자로서 다종다양한 근대 사진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경성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복원·재구성하는 『대경성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며, 이를 통해 한국 근대성의 기원을 읽어내려는 엄청난 시도를 꾀하고 있다.
▣ 주요 목차
프롤로그 - 표상되는 근대, 만들어진 조선
1부 제국의 렌즈로 조선을 붙잡다 - 사진의 거짓말과 빼앗긴 표상
일제, 조선 황실을 이미지 메이킹하다 - 황실사진과 표상의 정치학
아이콘이 되려한 황제, 고종
1907년에 생긴 일_변용하는 표상체계
황실의 일거수일투족을 표상하라
영친왕, ‘식민지의 태자’이자 ‘황국 군인’
재현과 표상에서 끌어낸 조선 황실
천황의 사진과 감시하는 눈 - 표상으로 조선을 지배하다
신황제 순종, ‘표상’을 명하다
그러나 천황에 경배하라
어린 학도들에게 ‘봉배의 광영’을
읽을거리: 금관 기생 이야기
2부 구경거리가 된 조선의 땅과 사람 - 일제의 조선 재현
제국의 지도, 식민지 고고학 - 세키노 타다시와 조선고적조사사업
지도와 아카이브, ‘이름 짓기’의 과정
지배하기 위해 조사하다
고적조사사업의 자취를 더듬다
‘보일 것’과 ‘보이지 말 것’
근대학문의 실험장이 된 한반도
사진과 고고학의 공생
『조선고적도보』,그 완벽한 식민주의의 컬렉션
사진 아카이브로 역사를 비추다
재현된 역사 읽기
원시의 조선, 식민지 인류학 - 토리이 류조의 인체측정사진
20세기 말 다시 호명된 인류학자
학문의 열정인가, 제국에 봉사인가
토리이의 조선조사 사진과 근대의 시선
토리이가 ‘창출’한 ‘조선 인종’
근대성의 선택과 배제
우경화가 다시 불러낸 인류학
구경거리 : 구보씨, 박람회에 가다_박람회 사진첩
농업과 임업 | 경제와 산업 | 토목과 건축 | 교통 | 교육 | 고건축 | 보건위생 | 비교사진관 | 기념사진관
3부 잠든 아침의 나라는 언제 눈 뜨는가 - 서구의 조선 만들기
진흙과 새끼줄의 나라 - 프랑스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의 조선 구경
근대(성), 표상, 오리엔탈리즘
외교관 이폴리트 프랑뎅을 찾아서
프랑뎅의 사진 컬렉션을 펼쳐보다
사진첩 속의 ‘표상덩어리’ 조선
프랑뎅을 넘어서_파리만국박람회와 조선인의 재현
외국인의 컬렉션, 사진과 출처의 퍼즐 맞추기
아침의 나라에서 만난 서러운 장면들 - 독일 조사관 헤르만 잔더의 조선 읽기
잠자는 동양을 깨우는 서구의 표상
독일인 방문자들
조사관 잔더의 한국 정보 수집기
식민지 조사사업과 한국에서의 사진 촬영
잔더의 동아시아 여정과 사진첩 읽기
러일전쟁의 흔적을 찾아서
러일전쟁의 제2전장_한반도를 찾아서
잔더의 여행길, 누구와 어떻게?
빈 역사 공간을 메우는 잔더의 아카이브
‘신선한’ 아침의 나라 발굴하기
읽을거리: 전시되는 어린이, 아동의 탄생
보론 - 사진 아카이브의 현황과 필요성 고찰
사진 아카이브의 개념과 시대적 요구
사진 아카이브의 필요성
우리나라 주요 사진 소장처와 관리 현황
사진 아카이브 구성을 위한 일본의 대응
사진 아카이브,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나오면서_근대의 완전한 몸을 보기 위하여
주석 | 원고출처 |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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