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의 동행 -1597년 8월의 14박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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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훈
출판사항푸른역사, 발행일:2014/09/23
형태사항p.467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612019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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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순신 길’ 걸으며 ‘이순신의 길’ 되짚다

경남 원계→전남 군학 700리에 놓인 ‘이순신 길’
《이순신과의 동행―1597년 8월의 14박 16일》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장을 받은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마을에서 전남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까지 14박 16일 동안(1597년 정유년 8월 3일~8월 18일. 3일은 무박) 갔던 700리 노정을 따라 걸은 역사기행서다. 길은, 저자가 걸은 길로 경남 지역 50킬로미터, 전남 동부 지역 221킬로미터에 걸쳐 놓여 있다.
‘이순신 길’은 그동안 많은 학자, 이순신 추적자들이 지나갔지만, 가능한 한 옛길을 찾아 전 노정을 직접 걸어서 답사한 것은 저자가 처음이다. 저자 이훈은 40여 년 기자 생활을 한 언론인으로, ‘이순신 길’을 직접 걸으며 기자 특유의 감각과 역동적인 필체로 당시 상황을 생동감 있게 그린다. 특히 ‘이순신 길’ 여정에서 신격화된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에 주목함으로써 ‘이순신의 길’, 다시 말해 ‘이순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되짚는다.

참혹했던 7년 왜란, 광범위한 사료를 통해 재조명
이순신이 이 길을 갈 때는 정유왜란이 막 터진 때로, 왜적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남원성을 향해 노도처럼 밀려드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왜적의 재침공 소식에 천 리 밖 도성에 피란 행렬이 길을 메울 때, 이순신은 수군 재건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안고, 군사도 배도 없는 고독한 삼도수군통제사로 육지를 떠돌다가 배를 만난 한 달 뒤 13척으로 왜적선 133척을 격퇴하는 명량대첩을 이룬다.
저자는 당시 이순신이 갔던 14박 16일 노정을 따라가며, 7년 왜란 중 백성들이 겪었던 참혹한 삶과 전시 상황을 광범위한 사료를 통해 재조명한다. 강원도 평강 산골에서부터 한성과 경상도, 전라도 등 전국의 전시 상황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처참했던 백성의 삶, 천민으로 취급받던 수군들의 처지, 조정과 장수들의 무능한 대처와 부패, 가는 곳마다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던 왜적과 명나라 군사의 횡포, 처절했던 남원성 공방전과 함락 과정 등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길 이야기를 오버랩 기법으로 그렸다.

옛 지명 현재 위치 확인 등 학술적 성과도 이뤄
저자는 순천왜교성 전투 때 조명연합육군의 최전방 전초기지였던 ‘불우’가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라는 것을 최초로 찾아낸다. ‘이순신 길’을 걸으면서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지명의 현재 위치 중 잘못 추정한 몇 곳도 바로 잡았다. 행보역, 두치, 구치 등이 그런 곳이다.
또 이순신이 발 벗고 건넜다고 한 찬수강 물목으로 추정되는 구례읍 신촌마을 ‘나발목’도 확인했다. 이순신이 3박 4일 머물었던 보성 박곡 ‘양산항 집’ 위치도 현재 알려진 집이 아닌 ‘경춘씨 집터’에 있었다는 것도 새롭게 밝혀냈다.
정유년 《난중일기》 중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 일기가 두 벌이다. 학계에서는 이를 간과하거나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밝혀낸 것도 성과다. 독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정유년 두 벌 일기 비교표를 〈부록〉으로 붙였다.
또 《난중일기》는 앞뒤 없이 툭툭 던져진 기술로 빈 공간이 많다. 이 공간을 당시 상황을 유추해 소설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했다.


이순신과 함께 걷는 ‘이순신 길’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전쟁〉에서는 백성들이 겪었던 참혹한 삶을 중심으로 7년 왜란을 개괄한다. 2부 〈동행〉은 이 책의 주력 부분으로서, ‘이순신 길’ 노정을 따라가며 엮은 것이다. 3부 〈항진航進〉에서는 ‘이순신 길’ 이후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 과정을 간추린다.

임진-정유 ‘7년 왜란’, 그 처절한 기억
1부 〈전쟁〉에서는 ‘왜란 7년’을 전쟁의 한가운데서 저승사자에게 멱살을 잡힌 채 살아간 조선 백성들, 그 백성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양 5월 23일) 발발한 왜란은 불과 20일 만에 한성을 짓밟고, 두 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된다. 조선 백성들은 왜란 시작부터 1598년 무술년 11월 26일(양 12월 23일), 왜적들이 모두 부산을 떠날 때까지 7년 동안 아비규환의 지옥을 헤맸다. ‘닭, 돼지, 벌레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독기에 시달리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강항姜沆, 《간양록看羊錄》)을 정도로 전쟁의 참화는 참혹했다.
산천은 불타고 시체가 길을 메웠다. ‘천고에도 들어보지 못한’(《난중일기》 계사년 3월 기사) 나락으로 떨어진 백성들. 전쟁의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백성들은 왜적의 총칼에 짓이겨졌다. 무자비한 징집, 가혹한 군량 징발, 중국 군사들의 약탈, 탐관오리의 수탈로 급기야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금은 왕실 피란 걱정만 하고, 고위 벼슬아치와 장수들은 멀리서 왜적 소문만 듣고도 스스로 무너져 도망쳤다. 전쟁의 참화는 고스란히 백성들 몫이었다. ‘7년 왜란’은 어느 전쟁보다 백성들에게 가혹했다.

이순신, 바다 찾아 떠나다
2부 〈동행〉에서는 1597년 정유년 8월 3일부터 18일까지 16일간의 노정을 이순신과 동행하며 재구성한다.
1597년 정유년 8월 3일(양 9월 13일), 이순신이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었다. 합천 초계에 있던 권율의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 중이던 7월 18일, 이틀 전인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을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의 조선 수군이 왜적에게 궤멸됐다는 급보를 받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연해안 답사길에 올라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이날부터 8월 18일까지 16일 동안 이순신은 수군 재건이라는 막중한 책무를 안고 전남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까지 약 700리(271킬로미터) 길을 갔다. 이순신이 이 길을 가던 때는 임진년에 이어 나라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이순신이 섬진강 하류 두치진을 지나간 하루 뒤인 8월 5일 왜적이 두치에 상륙, 8월 16일 남원성을 함락한다. 이후 왜적은 1년여 동안 전라도, 주로 전남 지역에 50개 부대를 주둔시켜 전라도를 장악했다.
이순신은 남원성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8월 15일, 보성 열선루에서 ‘수군을 혁파한다’는 임금의 명령을 받았다. ‘수군을 없애니 모든 군사는 뭍에 올라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에게 배 12척이 있다”며 행군을 강행, 8월 18일 바다와 만난다.

승전의 해협 ‘명량’, 죽음의 바다 ‘노량’으로
3부 〈항진航進〉에서는 이순신이 다시 배에 올라 전사할 때까지 승전의 해협 ‘명량’, 죽음의 바다 ‘노량’으로 항진하는 이순신의 15개월 바닷길을 따라간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지 16일째. 군영구미에서 배에 올라 회령포로 간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배설의 선단을 인수, 한 달 뒤인 1597년 정유년 9월 16일(양 10월 25일) 명량대첩을 이룬다. 명량대첩은 이순신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려운 전투였다.
이순신은 승전 후 바로 명량을 떠나 그 길로 고군산도(전북 군산시 선유도)까지 전라도 서해를 순항巡航하며 전력을 보강하고, 이해 겨울을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서 보낸다. 고금도(전남 완도군 고금면)로 진을 옮긴 것은 1598년 무술년 2월. 7월에는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고금도에 와 합세했다.
이때 전라도 각지에 주둔하던 왜적은 일본으로 퇴각하기 위해 순천왜교성(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집결해 있었는데, 왜적의 퇴로를 막기 위해 조·명연합수군은 고금도를 떠나 광양만에 진입(1598년 9월 20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이렇게 조·명연합수군이 광양만을 틀어쥐고 있던 11월 중순, 순천왜교성에 고립된 왜적을 구하기 위해 사천 등 경상도 남해안에 있던 왜적이 몰려왔다. 앞뒤에서 협공당할 위기에 처한 조·명연합수군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바다로 나가 격전을 벌인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순신의 외로운 노정을 생생하게 그리다

배도 군사도 없는 빈손의 통제사
이순신이 지나는 길목의 읍성은 불타고, 관리와 군사들은 곡식창고를 털어 도망쳐버렸다. 길에서 만난 피란민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참담하고 고독한 길이었다. 군사도 배도 없는, 바다는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육지를 떠도는 삼도수군통제사. 산야는 불타고, 학살당한 백성들의 시신이 길을 메웠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 저자는 어떻게든 수군을 재건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그런 이순신의 외로운 노정을 책 전반에서 생생하게 그려낸다.

역사기행의 새 장을 열다
그렇다고 저자가 무작정 이순신만을 따라간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당시 백성들의 삶도 함께 추적한다. ‘7년 왜란’을 백성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전쟁의 참화가 백성들의 삶에 어느 정도로 어디에까지 미쳤을까. 이런 의문을 놓지 않고 ‘이순신 길’을 걷는 내내 면밀히 살핀다.
저자의 이런 노력에 대해, 역사학자 이이화 박사는 ‘광범위한 사료를 바탕으로 당시 전쟁 상황과 백성들의 참담한 삶을 충실하게 기술, 독자에게 자신이 직접 역사 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역사기행의 새로운 장을 연 역작’이라고 평가한다.
국립순천대 조원래 명예교수 또한 ‘치밀한 고증과, 그동안 학계에서 간과했던 ‘불우佛隅’ 같은 옛 지명과 《난중일기》의 빈 공간 등 많은 부분을 규명해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진 저서’라며 추천한다.
저자가 ‘이순신 길’이라 이름 짓고 떠난 700리 길. 많은 독자들이 함께 걸으며 ‘이순신의 길’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훈
광주광역시에서 38년간 기자로 살았다. 1996년 현장을 떠난 뒤, ‘몸과 마음에 땟국처럼 덕지덕지 낀 가식의 언어를 털어내기 위해’ 무작정 전남 서남해안을 따라 2천여 리를 걷고 《내가 걸은 남도 갯길》(2009)을 펴냈다. 그리고 다시 ‘이순신 길’로 떠났다.
지금은 광주 대인동 ‘노인보호구역?’에 있는 늙은 거리, 늙은 건물 4층에 움막 한 칸 얻어 살며 새로운 떠남을 꿈꾼다.
움막은 누추하지만 그래도 기웃거리는 객은 많다. 지난 4년여 이충무공을 비롯해 한?중?일 3국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 임금에서 무지렁이 백성들까지 많은 빈객이 오갔다. 이제 또 누가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설 것인가.

* 1942년 광주광역시 생.
* 광주고등학교,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1968~2006년 언론사 근무.
* 조선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언론중재위원 등.

▣ 주요 목차

서설_정유년(1597) 그해 8월, ‘이순신 길’로 떠나며

1부 전쟁
임진-정유 ‘7년 왜란’, 그 처절한 기억

조선 아침 바다 덮친 ‘7년 전쟁’
수평선 뒤덮고 몰려오는 왜적선|침공하자마자 무너진 부산진·동래성|사흘 동안 군졸 300 명도 못 모은 병조兵曹|전라좌수영 5관 5포에 비상령|경상도 바다로의 출동 놓고 격론|‘이순신의 전쟁’첫 희생자 황옥천|임금 도망치자 궁궐 불태워버린 ‘쌍놈’들|궁궐, 귀중 서적, 역대 실록 모두 잿더미로|내동댕이쳐진 임금님 수라상|한강 방어 장수 무기 내던지고 줄행랑|백성 머리 잘라 “왜적 머리다” 군공 다툼|원균도 백성 머리 베 군공 노려|굶주린 백성들 사람 잡아먹고 뼈 고아먹고|박광전 “백성 기름, 피 짜내는 것이 나라냐” 호통|벼랑 끝에 몰린 백성들은 도적떼로|도적 8명을 못 당한 군사 400명|이순신, ‘장수들 쥐새끼처럼 숨어버렸다’|정유왜란은 전라도 침략전쟁


2부 동행
이순신, 바다 찾아 떠나다

그대만 믿느니, 바다로 달려가 나라 구하라
백의白衣 벗다|‘이순신 복 있는 얼굴 아니다’|칠천량에서 궤멸된 조선 수군|배도 군사도 없는 빈손의 통제사|진주 원계→보성 군학, 남도 700리|경상도 연해안 도륙하며 밀려오는 왜적|군량에 말먹이, 요강까지 짊어진 병사들|‘달래나보지’ 전설 얽힌 매더기재|‘행보역’은 하동군 횡천면 대덕에 있었다

칠흑 세상으로 놓인 칠흑의 길
두치강이 위태롭다|어머니 장례날인데 몸은 천 리 타향에|선조 “이순신, 글은 아느냐?”|정유년《난중일기》는 왜 두 벌인가|의문의 지명‘두치豆恥’와‘강정江亭’|두치진은 하동읍 만지 배밭에 있었다|박대남이 잘못 간‘강정’은 섬진교 근처?|하동포구에 부는 피바람|의병장 김덕령의 동생‘덕린’에 대한 의문|김덕령 외아들 아버지 죽자‘용안 김씨’ 창본創本|김덕령 직계손 남한에 500명, 광주에 4명|정탐군사 모두 도망쳐 왜적 침공 모른 남원부|외롭게 석주관 지키는 구례현감 이원춘|인적 끊긴 구례읍성엔 음산한 정적만

왜적 선봉 두치에 오르다
“순천부 정탐하라” 송대립 급파|사천·곤양에서 대학살 자행하며 진격하는 왜적|전국에서 도적떼 창궐|운봉 군사 반은 도적 앞잡이|지리산‘임걸령’은 도적 두목의 이름|전라·경상도 잇는 교통 근거지 구례|이순신 발 벗고 건넌 섬진강‘나발목’|원효대사가 시끄러운 물소리 가둬버린‘잔수’|섬진강 따라 흐르는 수려한 강둑길|목재 집산지로 북적대던 교통 요지 압록|병사들 오갔던 길에 레일바이크 행렬|임금은 전라도 포기하고 왕실 피란 걱정만

전국 떠도는 전라도 피란민 …… “경기에 정착촌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전라도 모조리 한 번에 죽여라’|삼기면 괴소-월경리 길에 순천·낙안 피란민 가득|남원 인구 반이 경상도 피란민|고을 쑥대밭 되니 수령들 부임 기피|세월을 지키며 세월을 증거하는 고목들|곤장치려 하자 허겁지겁 나타난 옥과현감|왜적 소문에 옥과현 관리들 창고 털어 도망

백성들 일어서다 …… 전국 곳곳 의병 봉기
이순신은 왜 옥과에 갔을까|유팽로, 왜침 듣고 순창에서 창의|순창 대동산 아래 세운 의병 기치|담양 추성관서 전라도연합의병 출범|6,000 전라도 의병 금산성에 집결|“왕비 피란은 나라 멸망 자초하는 일”|명성 자자하던‘석곡 돼지고기’|이순신이 잔‘석곡강정’은‘능파정’

왜교성전투 후방기지 ‘창촌’, 전초기지 ‘불모퉁이’
옛길 찾아 세 번 걸은 석곡→창촌 길|‘적 막아달라’ 울며 이원익에게 매달린 임금|옛 흔적 사라지고 잊힌 부유창 옛터 창촌|개구리 즐겨 먹는 명 장수 …… 백성들 잡아 대느라 곤욕|부녀자 빼앗아 살림 차린 명군 수만 명|왜교성전투 전초기지‘불우’는 순천시 해룡면‘불모퉁이’|‘구치’는 순천시 서면 ‘비들치’|무기 버려둔 채 텅 빈 순천읍성

가자, 회령포로! 재기의 선단 꾸리리라
수군은 죽지 않고는 못 돌아오는‘귀신굴’|왜장에게 딸 바치고 권세 부린 박사유|전장에서 죽고 괴질에 죽고 굶어 죽고|원나라 일본 원정군 병선 건조한 회령포|순천-낙안 잇던 중세의 대로, 당고개 길|응령 매바위 옮기자 아랫마을에 재앙|불탄 낙안읍성엔 그을음 냄새만 가득|동헌 마당에서 치도곤 당하는 백성|낙안 병사들 훈련장‘뻔덕지’|길가에 늘어서서 술 권하는 노인들|군량 가득 찬 채 봉인된 조양창

성벽은 새마을사업으로 헐리고 건물은 팔려 뜯기고
옛 유적 많은 고내마을|위장병·신허증에 시달린 이순신|백성들 떠난 들판엔 오곡만 홀로 익고|천 리 밖 왜적 기세에 조정이 먼저 붕괴|섬마다 육지 피란민들로 인산인해|명량대첩 때 큰 공 세운 피란민 | 바다 휘덮은 불길한 정적

위기의 남원성 …… 전국에 총동원령
남원성안 병력 분산 배치 침공 대비|양산항 집 창고에 양식 가득|‘이순신 장군이 우리 집에서 사흘 잤답디다’|양산항 집은‘경춘씨 집터’에 있었다|뜻밖에 나타난 옛 부하 송희립·최대성

도망친 경상우수영 선단 행방 ‘비로소 알았다’
느닷없는 군대 행진에 놀란 남원성 왜적들|왕실 피란에‘임금 도륙 당할 일’ 신하들 반발|‘백성 못살게 구는 임금은 원수’|‘이제 바다로 나갈 때가 되었다’ 선상 식량 준비|도망친 배설의 선단 벽파진에 숨었다|한 끼에 쌀 한 말 먹은 원균|칠천량에서 도망친 배 8척인가 12척인가|곤장 맞다가 즉사한 보성군수

왜적, 남원성 덮치다
보성에 한꺼번에 들이닥친 어사와 선전관|사천왕 이용한 심리전에 기겁한 남원성안|기록에만 남은 채 사라진 보성읍성|어사 임몽정이 전하는 경상도 참상|장인 때 시작된 보성과의 인연|무인의 길, 시련의 길

‘수군 혁파’ 왕명에‘ 배 12척 있다’ 반발
마을에 연기 끊긴 추석 대명절|남원성, 적장과의 마지막 담판 무산|‘수군 없앤다. 뭍에 올라 싸워라’|비록 왕명을 거부한 죄를 짓더라도|이순신의 절대적 후원자 유성룡|유성룡, ‘의리’에 발목 잡혀 벼랑 끝에|이순신 전사한 날 유성룡 파직|폭우 속에 무너지는 남원성

남원성 함락되다
군수만 남겨두고 보성 관리들 모두 도망|관리들 숨은‘ 굴암’은 오봉산‘ 칼바위 동굴’?|‘보성인 박사명·사형’은 누구인가|‘절친’ 선거이, 이억기와 통제사 물망에|자폭으로 사라진 1만 목숨‘ 만인의총’에|생사당에 모셔진‘ 남원 패장’ 양원|쇠사슬에 묶여 노예로 끌려가는 백성들|인적 끊긴 전주성엔 시체 썩는 냄새만|도망친 관리들 잡아다 수군에 징발

배설이 배를 보내지 않았다 괘씸하다
마지막 노정, 군영구미 가는 길|봇재 저 아래 안개에 잠긴‘ 내 바다’|주검의 정적만 쌓인 유령의 성곽 남원성|산골짜기에 펼쳐지는 옛 회령포|백사정은 정경달 별장|배설이 배 안 보내 늦춰진 회령포행

이순신, 배에 오르다
파란만장한 장수의 삶, 운명인가|왜란 소문 급박하자 미치광이가 된 백성들|사방 천지에 아비 모르는 아이들|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밤늦게 조정에 날아든 남원성 함락 비보|왔구나! 우람한 몸체 드러낸 판옥선


3부 항진航進
승전의 해협‘ 명량’, 죽음의 바다‘ 노량’으로

승선 한 달 만에 명량대첩, 노량- 광양바다 마지막 대격전
어란에서 왜적선과 첫 조우, 배설은 겁먹고 우수영에서 도망|명량 뒤덮은 검붉은 전운, 시시각각 늘어나는 왜적선|꿈에 나타난 신인이 일러준 ‘승전비책’, 전라좌수영 바다에 나타나 병서 전한 자운선사|13척으로 133척 격퇴, 31척 수장, 중계하듯 생생히 전하는 명량대첩 ‘현장’|대첩 후 서해 순항하며 전력 보강, 섬마다 피란선 모여 북적 …… 통행첩 팔아 군비 조달|왜적들 전라우수영 불태워 분풀이, 순천왜교성에 집결, 일본으로의 탈출로 모색|의문의 섬‘안편도’는 신안‘장산도’, ‘나주와 영암 월출산까지 훤히 트였다’|막내아들 전사 소식에 장산도 염막에 숨어 통곡, 몸부림치다가 되 남짓 코피 쏟기도|명량대첩 포상 은 20냥, 비단 1필, 선조는 “몸보신하라” 고기 반찬 보내|‘지형지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다’ 고금도 이진, 군사·백성 동원 농사짓고 군비 강화|명나라 수군 1만 3,000명 고금도 합세, 이순신 소식 듣고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들|포연에 묻힌 순천왜교성, 9월 20일 기해 조·명연합수·육군 총공세|합동작전 중 도망친 명나라 제독 유정, 왜적 이순신에게 뇌물 보내며 “퇴로 열어달라”|큰 별, 죽음의 바다 노량에 지다, ‘반드시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마지막 축원|이순신 시신 60일간 고금도 안치, 지신地神도 애석해해 풀 자라지 않는 월송대

후기_새로운 여행을 위한 에필로그
부록_정유년 두 벌《 난중일기》 비교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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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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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환불불가
상품군 취소/반품 불가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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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상품/식품/화장품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가전/설치상품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용품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CD/DVD/GAME/BOOK등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내비게이션, OS시리얼이 적힌 PMP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