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전술의 한국사-국가전략에서 도하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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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이상훈
출판사항푸른역사, 발행일:2014/05/03
형태사항p.363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56120124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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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전략전술로 한국사를 새롭게 읽다

외면받는 전쟁과 전쟁사 연구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자 휴전국가다. 그럼에도 서구에 비해 군사학이나 전쟁사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한 편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외면받아왔다. 일본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장기간의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전쟁과 전쟁사에 대한 연구는 적극적으로 연구해야 할 분야가 아니라 기피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물론 각 군 사관학교, 국방대학교, 군 관련 연구소 등을 중심으로 전쟁사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긴 하다. 군사사 분야 최초의 종합 역사서로 평가받는 《한국군사사》(육군군사연구소 편, 총 16권)의 편찬, 대학별 군사학과의 증가, 밀리터리 마니아들의 활발한 활동 등은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전문 군사용어 사용과 접근의 제한으로 인해 일반 독자들에게 연구 성과가 소개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전략전술과 관련해서는 외국 저자가 쓴 번역서가 독자들의 선택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 주제에 따라 시대순으로 살피다
전략전술은 크게는 국가전략에서 작게는 소부대의 전술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전쟁사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이상훈은 《전략전술의 한국사―국가전략에서 도하전까지》에서 한국사 속에 등장했던 다양한 전략전술 중 9가지의 전략전술에 대한 사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1장은 국가전략, 2장은 보급전, 3장은 작전권, 4장은 포위전, 5장은 속도전, 6장은 방어전, 7장은 공성전, 8장은 기만전, 9장은 도하전이다. 전략전술 사례를 주제에 따라 시대순으로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의 관련 이해를 높이고자 했다.
김제의 벽골제는 저수지라고 알려져 있는데 왜 평지에 3킬로미터가 넘게 둑을 쌓았을까? 김유신은 어떻게 고구려 영토를 관통하면서 대량의 군량을 무사히 수송할 수 있었을까? 여몽연합군의 주력은 몽골군인데 왜 제주도 삼별초 진압 때는 고려군이 주도적으로 나섰을까? 고려 말 왜구와의 대규모 전투인 황산전투는 왜 해안이 아닌 내륙 지리산 일대에서 벌어진 것일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왜 진군 당시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남하했을까? 신립은 왜 조령을 포기하고 모두가 반대하는 탄금대를 결전 장소로 선정했을까? 대규모의 조명연합군은 왜 울산왜성에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했을까? 한양 도성을 순식간에 장악한 이괄의 반란은 왜 그리 허무하게 진압되고 말았을까? 병인양요 시기 조선군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염하수로를 건너 강화도로 상륙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필자 나름의 생각이다.
한국은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끊임없는 외침을 받아왔으며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역사 전반에서 전략전술을 살펴보는 시도는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 책이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을 극복해온 우리 선조들의 전략전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아홉 가지의 전략전술로 보는 한국사

벽골제, 국가전략 측면에서 그 성격을 살피다
4세기경 백제는 3킬로미터가 넘는 대규모 제방을 김제평야 일대에 건설한다. 바로 벽골제다. 과연 백제가 이른 시기에 국가 존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대한 제방을 쌓은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저수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방조防潮의 목적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은 국가전략 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까?
저자는 벽골제의 성격 고찰을 위해 4세기의 기후와 해수면의 변화에 대해 살핀다. 4세기 한반도는 한랭 건조했으며, 서해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에 따라 당시 한국의 서해안은 잦은 해일과 해침을 겪었다. 특히 벽골제가 축조된 곳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염수피해가 심각했을 것이다. 이에 벽골제를 축조, 해수의 침입을 막고 담수를 확보하여 김제평야 일대에 관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벽골제는 관개 제언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 저수지로서 홍수 조절의 역할을 수행하고, 만조위 시에는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여 제 내의 농경지 침수도 방비할 수 있는 다목적 기능을 가진 시설이었다.
저자는 벽골제의 성격에 대해 이 같이 결론을 내린 후 벽골제를 국가전략 면에서 살핀다. 3킬로미터에 달하는 공사에는 대규모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하고, 이들을 동원할 수 있는 집권력이 구비되어야 한다. 백제가 김제 지역을 영역으로 편입한 시기는 비류왕대로 추정되고 있으며, 4세기 전반 벽골제 축조를 위한 대규모 노동력 동원도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4세기 백제는 벽골제라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통제를 한층 강화해나갔던 것이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 보급전의 백미
보급은 전쟁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삼국통일전쟁이 한창이던 7세기에 평양을 포위한 당군이 식량난에 빠진 일이 있다. 이를 구원하기 위해 신라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가 파견되었다. 고구려 영토를 통과하여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한 후 다시 귀환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가 김유신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병력의 손실 없이 무사히 군량을 당군에게 전달하고 귀환했다. 어떻게 김유신은 대규모 군량 수송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의 구성, 여러 수송 경로 중 김유신이 선택한 수송로, 군량 수송을 위해 김유신이 선택한 거점, 군량 수송 방법, 철수 경로 등을 여러 측면에서 고찰한 후 평양으로의 대규모 군량 수송작전 성공이 김유신의 과감한 결단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임기응변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결론 내린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은 신라가 처음으로 고구려를 종심 깊이 횡단한 사건이었으며, 평양성을 포위한 당군의 철수를 보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군량 수송작전의 성공적 경험은 이후 나당연합군이 평양 진군과 점령에 성공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삼별초 진압과 고려군의 위상 변화, 작전권을 통해 고찰하다
1270년 삼별초는 몽골에 굴복해 개경으로 환도하려는 고려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 삼별초의 항쟁은 1270년부터 1273년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고려와 몽골은 삼별초 진압과 일본 원정을 위해 여몽연합군을 편성했다. 전시작전권은 몽골이 가지고 있었고, 고려군은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진도와 제주도의 삼별초 진압 과정에서 여몽연합군의 작전지휘권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여몽연합군 내에서 시기에 따라 고려군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당시 고려 국왕의 군사통수권은 여원관계의 특수성으로 인해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의 군사제도는 원의 강력한 군사적 견제와 통제에 의해 왜곡·변질되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군사적 유지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원종은 이처럼 완전히 붕괴된 중앙과 지방의 군사체계를 일정 부분이나마 회복했다. 원종은 복위 이후 태묘를 재건하고 동서학당을 설치하여 유교적 지배질서를 강화했다. 서서히 군사통수권을 회복하면서 새롭게 고려군을 모집하고 편성했다. 종친과 총신의 재산을 보호하여 자신의 측근세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원종은 왕권을 점차 강화했고, 이를 기반으로 제주도 삼별초 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진도 삼별초 진압 과정에서 몽골군을 보조하는 역할에 그쳤던 고려군이 제주도 삼별초 진압 시에는 주도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고려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은 그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몽골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 말 왜구 토벌, 포위전의 진수
고려는 북쪽으로는 거란·여진·몽골 등과, 남쪽으로는 왜구와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왔다. 특히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발하여 연해 지방의 피해가 극심했다. 1380년 고려에 대대적으로 침입한 왜구들은 해안 지역이 아닌 지리산 일대 황산에서 고려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동안 황산전투는 왜구들이 남부 지방을 횡행하면서 약탈하다가 내륙으로까지 진출했고, 그에 따라 황산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고려군이 왜구들을 지리산 일대로 몰아간 후 황산전투를 치렀다면 이는 그동안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저자는 이 같은 관점으로 황산전투를 재구성한다. 황산전투는 고려의 내륙을 횡행하던 왜구가 우연히 운봉 일대에서 고려군과 조우하여 발생한 전투가 아니다. 고려군의 왜구 토벌 전략에 의해 전장이 내륙 지역인 황산으로 선정된 것이며, 본격적인 전투에서도 왜구의 방어와 공격계획은 고려군에 의해 기만되고 차단되었다. 홍산전투, 진포전투, 황산전투 등 일련의 왜구 토벌 작전으로 고려군은 왜구와의 전투에서 주도권을 확보했고, 그러한 주도권 확보는 대마도 정벌로 이어졌다. 고려 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은 고려 조정의 지속적인 왜구 토벌 노력과 고려군의 성공적인 작전으로 잦아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속도전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요동을 공격하기 위한 원정군이 편성되었다. 이성계와 조민수 휘하의 5만 병력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위화도에 주둔하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개경을 장악한 이성계는 오래지 않아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했다. 유명한 위화도회군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성계는 회군 당시 우왕과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일부러 천천히 남하했으며, 우왕의 신료나 백성들도 이성계의 회군 병력을 마중나와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또한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부리며 전투를 수행했고, 비교적 손쉽게 최영군을 격파하고 회군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사서 기록 때문인지 이성계의 회군이 큰 저항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이 사서의 기록처럼 순조로이 진행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다양한 사료의 분석을 통해 위화도회군이 이성계의 철저한 사전 준비와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진 전격전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개경전투에서는 기만·견제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만만치 않았던 최영의 수비군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결국 이성계는 회군의 신속성과 전투의 승리를 통해 조선 창업의 제1보를 내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의 탄금대전투, 방어전의 시각으로 재고찰하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은 험준한 조령을 포기하고 남한강을 배후에 둔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고 일본군을 상대했다. 신립은 1546년에 출생하여 1567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 진주판관, 온성부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한성판윤으로 재직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순변사都巡邊使가 되었다. 그러나 탄금대전투에서 패배, 일본군이 한양에 무혈입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조선군에 막대한 손실을 안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한양은 손쉽게 일본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탄금대전투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은 잘못된 전장 선택이다. 신립은 조령의 험준함을 포기하고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쳤다. 조령이 방어에 용이했음에도 평지인 탄금대를 일본군과의 결전 장소로 택한 것이다. 위험한 전술임에 틀림없는 배수의 진을 신립은 왜 그렇게 고집했을까?
저자는 당시 방어거점으로 선택 가능했던 조령, 단월역, 충주성, 탄금대의 지형과 당시 풍향, 조선군과 일본군의 주요 무기와 전술 등을 면밀히 살핀 후 탄금대를 방어거점으로 선택하고 배수의 진을 친 신립의 선택이 합리적이었다고 강조한다. 한양으로의 철수를 거부당한 상태라 충주 일대에서 방어해야 했던 점, 탄금대의 지형이 방어와 기병 활용에 유리했던 점, 충주의 주풍향이 서풍이어서 원거리 발사무기에 유리했던 점 등을 감안하면, 신립이 전투 장소로 탄금대를 선정한 것은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에 따른 합리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신립은 당대 최고의 장수였고, 지형과 기상을 고려하여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으며, 일본군의 선봉대를 섬멸하고자 과감히 공격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울산왜성전투의 실패, 포위전의 관점에서 분석하다
정유재란 당시 5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을 포위한 적이 있다. 울산왜성에는 일본군의 대표적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하고 있었다. 울산왜성은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쌓아 올렸으며, 3중으로 성벽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향상시킨 성곽이었다. 조명연합군은 수차례 공격을 시도하고 대포도 쏘아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결국 일본군의 구원군들이 도착하고 조명연합군의 식량 문제가 불거지자, 포위를 풀고 철수하고 말았다. 조명연합군의 울산왜성 포위는 왜 성공하지 못했는가?
그동안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원인으로 일본군의 구원군이 있었다는 점, 날씨가 한랭하고 불순했다는 점, 성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준비가 불충분했다는 점 등이 거론되어왔다. 대체로 타당한 분석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조명연합군의 공격 의지가 약했던 점도 추가로 언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조명연합군은 직산전투 승리 이후 일본군을 과소평가했고, 공성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성벽과 방어가 상대적으로 약한 외성은 돌파할 수 있었지만, 울산왜성 자체 공격에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반면 일본군은 잦은 비 덕분에 식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고, 비축해둔 식량으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의 기만작전으로 조명연합군의 공격 의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일본군 포로와 조선인 탈출자들의 말을 듣고 울산왜성 내의 상황을 오판, 공세를 늦추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이괄의 난, 관군의 기만전에 당해 실패로 끝나다
조선 중기 서북방 변경을 담당하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이괄의 난이다. 도성을 장악한 이괄은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괄은 오래지 않아 안현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했고, 달아나다가 부하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이괄은 왜 관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을까?
관군은 반군과 부대 규모가 비슷했지만, 항왜를 이용하는 반군에 비해 전력이 열세였다. 게다가 장만과 이수일의 부대를 분산 배치하여 전력은 더욱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안현이라는 고지를 선점함으로써 보완했다. 또한 안현에 주둔한 관군의 병력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반군이 안현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장만의 부대만으로 전력을 균형을 이루고, 반군이 무악동 일대로 진입한 상황에서 바람의 방향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이수일의 부대가 배후를 타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부대를 분산 배치하여 적을 기만하고 포위공격을 감행한 ‘관군의 전술’이 승리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양헌수 부대의 도하전, 조선에 승리를 선사하다
병인양요 시기 강화도에서 프랑스군과 싸워 승리했던 조선군들, 즉 적의 후방에 침투하여 제2전선을 형성한 양헌수 부대의 활약은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인천상륙작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규모이지만, 양헌수 부대 또한 물살이 빠르고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몽골군도 쉽게 건너지 못했던 염하수로를 야간에 도하했다. 도하작전의 성공은 병인양요의 승리로 이어졌다. 조선군은 어떻게 도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을까?
양헌수는 병인양요 당시 지속적으로 정찰을 실시했고, 정찰을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염하수로 도하작전은 문수산성전투가 발생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문수산성은 염하수로를 사이에 두고 강화부와 마주보고 있다. 당시 프랑스군은 문수산성 일대의 조선군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양헌수는 프랑스군의 이목이 문수산성 쪽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빠르게 남하하여 덕포진에서 도하를 준비했다. 적이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도하작전을 성공시켰다. 결국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막아냄으로써 적의 공격의지를 상실케 만들었다.
염하수로를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이던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전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바로 양헌수 부대의 은밀한 우회침투작전이었다. 양헌수 부대의 성공적인 도하작전과 정족산성 장악이 프랑스군에게 철수를 강요했던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상훈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학군ROTC 37기로 임관하여 육군 중위로 전역한 후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역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논문을 수정 · 보완하여 출간한 《나당전쟁 연구》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일본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과 중국 베이징사범대학北京師範大學에서 수학했으며, 경북대학교 · 경상대학교 · 대구보건대학교 · 성광중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객원연구원과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전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경일대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나당전쟁 연구》(2012), 《いくさの歷史と文字文化》(공저, 2010), 《東アジア海をめぐる交流の歷史的展開》(공저, 2010)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당 무측천시기 이경업 난의 전개과정과 군사활동〉, 〈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진압과 고려군의 위상〉,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인조대 이괄의 난과 안현전투〉, 〈병인양요시기 조선군의 염하수로 도하... 작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을 펴내며

서설 _ 전략전술, 한국사를 읽는 새로운 방법

1장 벽골제, 저수지인가 방조제인가―벽골제의 성격 논쟁
벽골제 미스터리|4세기 기후, 한랭 건조화되다|4세기 서해의 해수면은 현재보다 높았다?|해수의 침입을 벽골제로 막다|백제, 벽골제 축조로 김제 지역 통제를 강화하다

2장 보급의 성공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김유신의 군량 수송부대, 이렇게 구성되었다|김유신, 평양행 수송길에 오르다|군량 수송 거점을 확보하다|김유신, 군량 수송 성공 후 철수길에 오르다
징검다리 1 _ 신라의 무기 개량과 삼국통일

3장 작전지휘권을 통해 고려군의 위상 변화를 살피다―여몽연합군의 삼별초 진압
삼별초 세력, 어느 정도였나|삼별초, 진압되다|여몽연합군, 어떻게 편성되었나|여몽연합군의 주력, 몽골군에서 고려군으로|원종, 왕권을 강화하다|고려, 군사권을 회복하다

4장 왜 고려군은 왜구와 내륙에서 전투를 벌였을까―고려군의 왜구 토벌작전
사근내역전투, 패전에도 불구하고 포상받다|사근내역전투는 고려군의 왜구 토벌 전략의 일환|고려군의 몰이사냥 전술|황산전투, 시작되다|황산전투에서 고려군은 어느 정도 규모였나|황산으로 가는 길|이성계, 우회기동으로 왜구를 격퇴하다
징검다리 2 _ 전근대 군율의 시행

5장 빠른 속도의 전격전, 회군을 성공으로 이끌다―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요동 원정길에 오르다|이성계, 회군하다|개경의 방어태세는 어떠했나|위화도회군,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지다|개경전투 시작되다|개경, 함락되다

6장 신립은 탄금대전투에서 왜 배수진을 고집했는가―신립의 탄금대전투
신립, 탄금대에 방어선을 치다|방어거점, 어떻게 달랐나|탄금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탄금대 방어, 풍향과 무기 면에서도 유리|탄금대 방어는 최선의 선택이었다|탄금대전투 시작되다|신립, 패배하다|패배, 그러나 탄금대 선택은 합리적
징검다리 3 _ 정여립의 군사 전략

7장 조명연합군, 울산왜성 함락에 실패하다―조명연합군의 울산왜성 포위작전
울산왜성을 포위하다|조명연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울산왜성 공격, 수월한 작전이 아니었다|울산왜성의 일본군, 상당한 군수물자를 비축해두다|일본군, 조명연합군을 기만하다|울산왜성전투, 왜곡되다

8장 이괄, 관군의 기만술에 당하다―이괄의 난과 안현전투
국경 중심 방어에서 수도 중심 방어로|도성, 성곽 중심의 방어|이괄, 남하하다|관군의 부대 편성|관군, 부대를 나누어 이괄을 치다|병력의 열세를 지형과 기상으로 극복하다|안현전투의 복원
징검다리 4 _ 조선 후기 군사 실태

9장 염하수로 도하, 조선에 병인양요 승리를 선사하다―조선군의 염하수로 도하작전
정족산성전투,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거둔 최초의 승리|프랑스군은 왜 철수했는가|염하수로 도하를 감행하다|염하수로 도하, 어떻게 이루어졌나|도하작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해병대 운용과 유사하다
징검다리 5 _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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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환불불가
상품군 취소/반품 불가사유
의류/잡화/수입명품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계절상품/식품/화장품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가전/설치상품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자동차용품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CD/DVD/GAME/BOOK등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내비게이션, OS시리얼이 적힌 PMP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