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국사의 통설, 조선왕조의 ‘신흥 사대부’ 건국론에 도전한다
획기적인 연구이며…… 조선왕조의 본질과 기원에 관련된 기존의 여러 통설을
뒤집는 독창적이고 원숙한 업적이다.
- 제임스 B. 팔레, 워싱턴대 교수
“이 책의 통계적 증거는 조선전기 지배층의 구성에 관련된 이전의 견해가 틀렸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던컨은 지금까지 가장 풍부한 증거를 모았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교수
한국사의 최대 전환기였던 1392년의 ‘고려-조선왕조 교체’,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역사적 중요성이 전혀 없는 단순한 궁중반란인가? 아니면 신흥 사대부가 고려의 구세력을 축출하고 새 시대를 연 일대의 사회혁명인가? 조선왕조가 그 이전의 과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였음을 제목에서 암시하는 이 책의 주장은 무엇일까?
1966년 미군으로 한국에 와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한 뒤 고려대에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동안 한국을 바라본 친한파이자, 1989년부터 UCLA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까지 24명의 한국학 박사를 배출하며 현재 서구에서 한국 역사학을 이끄는 존 던컨 교수. 그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뿌리를 고려왕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조선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교체로 보지 않고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식해 온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이 책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핵심요지는 고려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고려의 중앙관료귀족이 지방의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한 기나긴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조선의 건국에 대해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 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한다.
저자는 40년 한국사 공부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다는 소식에 접하며 “한국사 통설인 신흥 사대부설에 정면 도전하는 연구로서, 다시 여말-선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켜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대해 더 좋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정치 엘리트집단은 뿌리가 같았을까?
현행 국사 교과서를 포함하여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도세력은 고려 말에 대두한 ‘신흥 사대부’였다. 이 새로운 엘리트집단은 지방의 중소지주였고, 향리 출신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관계에 진출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중앙의 문벌귀족이며, 불교를 신봉하던 종래의 엘리트집단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이 이질적인 집단이 구체제와는 다른 ‘새 시대, 새 질서’를 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은 한국사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이 통설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전기(10세기)에서 조선전기(16세기)에 이르는 거의 6백 년 동안 임명된 관료 약 5천 명의 성분을 조사했다. 관심의 초점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엘리트들과 고려시대의 엘리트집단 사이에 뚜렷한 단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1351년 공민왕 때 신흥 사대부가 중앙관계에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의 연구결과는 그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조선전기의 주요 양반가문으로 38집안을 지적하였는데, 그중 9집안만이 1351년 이후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 가문과 공민왕 이전에 약간 명의 관리를 배출한 7집안까지를 더한 16집안을 던컨 교수는 신흥 사대부로 일단 가정해 놓고 보다 정밀한 검토 작업을 꾀한다. 그 결과, 이 16집안조차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왕조 교체의 주역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려 말에 ‘신흥 사대부’ 같은 새로운 엘리트집단의 출현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후기 권문세족과 신흥 사대부가 서로 대립하였다든지 권문세족이 도당(都堂)의 핵심이었다는 견해에도 던컨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문이란 당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세력가 개인 또는 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세족(世族)은 전통 깊은 귀족으로서 그들이 다름 아닌 사대부였다. 고려 말의 정치현실을 보면, 세족이 중심을 이루는 도당이 세족의 일부 구성원을 권문이라 하여 공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의 한국사 통설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흔히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고려의 귀족이 대거 숙청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려 말의 유명한 귀족 가운데 조선왕조가 등장함으로써 몰락한 가문은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16세기경까지 관계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는 문반이며,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도 던컨은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초기의 재추(재신과 추신, 즉 고위 관료) 중에서 20%는 무반 출신이었고, 조선초기에도 음직(蔭職)은 여전히 출사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중소지주이자 향리 출신인 신흥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 호된 비판을 하는 저자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후손들이 조선전기 지배층의 주류였음을 실증해 내고 있다.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소위 신흥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역이 아니었다면, 과연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던컨 교수는 여말선초의 한국지성계가 기존연구에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복잡 다양하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11세기 말 12세기 초에는 경세와 고전 중심의 유학이 발전하였고,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된 뒤에는 상당 기간 동안 사장(詞章)을 숭상하는 풍조가 두드러졌다. 그렇지만 여러 학풍이 혼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고문학(古文學)은 김황원과 김부식이 대표하였으며, 12세기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에는 북송의 고문학자 소식의 인기가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고문학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이제현, 이곡, 이인복 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현은 고문학과 성리학에 모두 정통하였다.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이름난 김종직도 마찬가지였으며, 15세기 후반 한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고 한다. 불교와 고려후기 양반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사정은 조선전기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유명한 권근의 형도 승려였으며 조선의 왕실이 불교를 후원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한국사회가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 초기는 한당유학과 성리학이 공존하는 일종의 과도기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상사적인 변화에 있어서도 점진적이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 성리학이 왕조교체의 이념적 무기였고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는 주장이 철저히 검증 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고려-조선 왕조의 지적 전통이 복합적이었다는 던컨 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지배층의 교체도, 사상적 변화도 동반하지 않았다면, 왕조교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던컨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이 높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새 왕조 건국에 수반된 개혁의 본질을 근거로 하여 “조선의 건국은 지방자치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고려 전기의 노력이 거둔 궁극적인 열매”라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장기적 지속성’을 찾아내려는 던컨의 다각적인 노력은 실로 감탄할 만하다.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연구대상을 시간과 공간을 크게 확장시킨다. 7세기의 통일신라로부터 시작해서 16세기 조선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한국역사를 해부한다. 중국의 당, 오대, 송, 원 및 명의 권력구조, 지배세력 및 통치이념의 변천을 밝힌 최근의 중요한 연구업적도 두루 참고한다.
시간과 공간으로 멀리 확장된 던컨의 비교사적인 관심은, 그러나 분산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연구의 주된 대상은 고려-조선의 왕조교체이다. 그는 한국사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네 가지 측면의 상호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정치체제의 변화, 다시 말해 한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형성과정을 구명하는 데에 연구역량이 총집결된다.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던컨 교수는 신라 말에서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과거제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지배층의 성격변화를 매우 중요한 변동으로 파악하였다. 동시에 신라 말 무인적 배경을 지닌 지방호족 세력이 고려왕조의 출현과 과거제도의 실시로 문민적 중앙귀족 관료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중국적 관료제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지방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기에, 지방통치에 있어서 지방토착세력인 향리들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두고 국가의 공권력과 지방 세력가 사이에 대립과 경쟁관계를 남겨둘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건국으로도 지배세력의 전면적 교체가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두 왕조의 지배세력의 구성이라는 면에서 일체성이 더 강하였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는 조선왕조의 창건으로 한국사회의 중앙집권화가 더욱 강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동안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은 실증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맞선 민족주의적 당위론에 따른 목적론적 요인이 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발견한 것만으로도 한국사회를 정체적이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일침을 가한다.
기다렸던 역사담론, 던컨 교수의 ‘장기적 지속성’론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는 식민사학의 청산이었다.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단순한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했던 시각이, 해방 후 긍정으로 달라지는 가운데 1960년대 말에 새로이 등장한 사관이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한국사의 각 시기마다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해서 역사를 주도해 간 것으로 한국사가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상 주도세력의 변천을 강조하는 발전사관은 점차 한국사학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고려시대의 호족-문벌-권문세족-신흥 사대부와 조선전기의 훈구-사림 등으로 지배층의 변화를 설명하는 시각은 현행 교과서를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공부한 분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중앙의 지배층이 교체되는 역동적인 사회변화가 일어났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모토에 부합되면서 힘을 얻게 되는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조선 건국사에서 지배층으로 떠오른 신흥 사대부나 이후 사림에 대한 연구 또한 이때 이루어진다. 즉 단순한 권력투쟁에 의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다분히 사회혁명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던컨 교수는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이 내부적 발전 논리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내재적 발전론의 암시에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 배경과 이 책의 집필 동기에 대해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80년대 중엽에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고심하던 중 지도교수 제임스 팔레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15세기 후반 사림파의 형성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거기에 대한 여러 학자의 논문을 읽어보니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사장학을 즐기고 서울에서 거주하는 대지주 계층인 훈구와 성리학을 신봉하고 지방에서 거주하는 중소 지주층인 사림 사이의 대립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의 문제만 놓고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겨우 70~80년 전에 불교를 믿고 개경에서 거주하는 대지주였던 고려의 권문세족과 성리학 계통이고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이었던 신흥 사대부의 대립과는 어떻게 달랐는가, 조선왕조를 건국했던 신흥 사대부들은 어떻게 됐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어 마침내 논문 주제의 초점을 고려-조선 왕조 교체로 돌렸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역동성보다는 안정성을, 단절성보다는 장기지속성에 무게를 둔 서술이다.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라 고려 전기부터 몇 백 년 이상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어 온 장기지속적 변화였다.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그동안 한국사의 뼈대를 이룬 ‘내재적 발전론’과 ‘장기적 지속성론’의 학문적 만남의 장이다. 이데올로기적 역사를 버리고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그릴수록 우리의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40년 동안 한국과 한국사를 바라본 노학자의 역작이 그래서 반갑다.
▣ 작가 소개
저자 : 존 B. 던컨
존 B. 던컨(John B. Duncan)은 1945년 미국 애리조나 야바파이 카운티 출생. 노던 애리조나대 재학 중인 1966년에 미군으로 한국에 와 2년 동안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했으며 제대 후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하와이대에서 석사학위,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이래 UCLA 아시아언어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는 같은 대학의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저서로 『Rethinking Confucianism: Past and Present in China, Japan, Korea, and Vietnam』(공저, 2002),『Reform and Modernization in the Taehan Empire』(공저, 2006), 『Institutional Basis of Civil Governance in Chos?n Dynasty Korea』(공저, 2009)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역자 : 김범
김범(金範)은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치사화 사회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 1·2(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 주요 목차
1장 고려의 정치제도
중앙 정치제도
왕권 - 중앙 관료 제도의 창출 - 무신 치하의 제도 개혁
지방행정 제도
지방의 사회·정치적 질서 - 중계적 지방 관서를 설치하려는 시도 - 군현의 통제
자원을 둘러싼 갈등
전시과 - 그 밖의 토지자원들
결론
2장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고려 전기의 중앙 관원층
고려 전기의 주요 가문들 - 주요 가문의 기원 - 등용 제도와 사회적 지배층 - 중앙 관원의 경력 유형 - 요 가문의 융성
고려 후기의 주요 가문들
고려 후기의 중앙 관원층 - 등용 제도 - 경력의 유형 - 권문세족과 사대부 문제
중앙 가문의 경제적 기반
고려 전기 - 고려 후기
결론
3장 왕조 교체기의 양반
조선 개창기의 중앙 관원층
1392~1400년의 중앙 관원층 - 태종 초반(1401~1405)의 중앙 관원층 - 지파의 연합 - 등용 제도
양반 가문의 내부 구조
조선 전기 주요 가문의 세계 - 주요 가문의 혼인 관계
15세기 중반의 주요 양반 가문들
15세기 중반의 관원층 - 15세기 중반의 과거제도 - 주요 중앙 양반 가문
조선 전기 양반의 경제적 재원
결론
4장 고려 후기의 제도적 위기
권력투쟁
고려 후기 정치제도의 구조 - 원 간섭기의 정치권력 - 원 간섭기 이후의 정치권력 - 개혁의 시도
자원의 장악을 둘러싼 투쟁
외침 - 중앙 세력의 지방 수탈 -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투쟁
문제의 기원 -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노력
결론
5장 개혁과 왕조 교체
재정 개혁
과전법 - 자원을 창출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시도
신분제도의 재정립
지방행정의 개편 - 지배층의 감축
중앙 정치제도의 재편
정치 개혁: 첫 번째 국면, 1392~1400년 - 정치 개혁: 두 번째 국면, 1400~1405년
결론
6장 개혁의 이념
사상의 복잡성
고려 전기부터 중기의 사장과 고문 - 왕조 교체기의 고문과 정주학 - 조선 전기에 남은 당풍의 흔적
과거제도를 둘러싼 갈등
고려 후기의 과거 - 조선 전기의 과거 - 유교와 개혁
결론
7장 몇 가지의 최종적 고려 사항
연구 성과의 요약
해석과 비교의 결과들
한국사의 통설, 조선왕조의 ‘신흥 사대부’ 건국론에 도전한다
획기적인 연구이며…… 조선왕조의 본질과 기원에 관련된 기존의 여러 통설을
뒤집는 독창적이고 원숙한 업적이다.
- 제임스 B. 팔레, 워싱턴대 교수
“이 책의 통계적 증거는 조선전기 지배층의 구성에 관련된 이전의 견해가 틀렸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던컨은 지금까지 가장 풍부한 증거를 모았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런던대 교수
한국사의 최대 전환기였던 1392년의 ‘고려-조선왕조 교체’,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처럼 역사적 중요성이 전혀 없는 단순한 궁중반란인가? 아니면 신흥 사대부가 고려의 구세력을 축출하고 새 시대를 연 일대의 사회혁명인가? 조선왕조가 그 이전의 과거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였음을 제목에서 암시하는 이 책의 주장은 무엇일까?
1966년 미군으로 한국에 와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한 뒤 고려대에서 한국사 공부를 시작한 이래 40여 년 동안 한국을 바라본 친한파이자, 1989년부터 UCLA 교수로 재직하며 지금까지 24명의 한국학 박사를 배출하며 현재 서구에서 한국 역사학을 이끄는 존 던컨 교수. 그는 이 책에서 조선왕조의 뿌리를 고려왕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조선의 건국을 단순한 왕조교체로 보지 않고 한국사회의 질적 변화로 인식해 온 통설을 뒤엎는 것이다.
이 책의 고려-조선왕조 교체에 대한 핵심요지는 고려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완성으로, 고려의 중앙관료귀족이 지방의 귀족인 향리를 완전히 제압한 기나긴 역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조선의 건국에 대해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 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라 한다.
저자는 40년 한국사 공부 역량을 총동원한 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다는 소식에 접하며 “한국사 통설인 신흥 사대부설에 정면 도전하는 연구로서, 다시 여말-선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조금이라도 불러일으켜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대해 더 좋은 해석이 나오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정치 엘리트집단은 뿌리가 같았을까?
현행 국사 교과서를 포함하여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도세력은 고려 말에 대두한 ‘신흥 사대부’였다. 이 새로운 엘리트집단은 지방의 중소지주였고, 향리 출신이었다. 과거시험을 통해 중앙관계에 진출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지주이자 중앙의 문벌귀족이며, 불교를 신봉하던 종래의 엘리트집단과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이 달랐다. 이 이질적인 집단이 구체제와는 다른 ‘새 시대, 새 질서’를 열었다. 따라서 1392년 조선왕조의 성립은 한국사의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던컨 교수는 이 통설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고려전기(10세기)에서 조선전기(16세기)에 이르는 거의 6백 년 동안 임명된 관료 약 5천 명의 성분을 조사했다. 관심의 초점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엘리트들과 고려시대의 엘리트집단 사이에 뚜렷한 단절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동안 1351년 공민왕 때 신흥 사대부가 중앙관계에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의 연구결과는 그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조선전기의 주요 양반가문으로 38집안을 지적하였는데, 그중 9집안만이 1351년 이후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이들 가문과 공민왕 이전에 약간 명의 관리를 배출한 7집안까지를 더한 16집안을 던컨 교수는 신흥 사대부로 일단 가정해 놓고 보다 정밀한 검토 작업을 꾀한다. 그 결과, 이 16집안조차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왕조 교체의 주역은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려 말에 ‘신흥 사대부’ 같은 새로운 엘리트집단의 출현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후기 권문세족과 신흥 사대부가 서로 대립하였다든지 권문세족이 도당(都堂)의 핵심이었다는 견해에도 던컨 교수는 동의하지 않는다. 권문이란 당시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세력가 개인 또는 그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여 세족(世族)은 전통 깊은 귀족으로서 그들이 다름 아닌 사대부였다. 고려 말의 정치현실을 보면, 세족이 중심을 이루는 도당이 세족의 일부 구성원을 권문이라 하여 공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의 한국사 통설에 대한 비판은 계속된다. 흔히들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고려의 귀족이 대거 숙청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그 역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고려 말의 유명한 귀족 가운데 조선왕조가 등장함으로써 몰락한 가문은 겨우 셋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도 16세기경까지 관계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말선초의 신흥 사대부는 문반이며, 과거에 급제한 관리로 보는 견해에 대하여도 던컨은 이의를 제기한다. 조선초기의 재추(재신과 추신, 즉 고위 관료) 중에서 20%는 무반 출신이었고, 조선초기에도 음직(蔭職)은 여전히 출사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중소지주이자 향리 출신인 신흥 사대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고 하는 역사적 해석에 대해 호된 비판을 하는 저자는 고려 말의 대표적인 귀족가문의 후손들이 조선전기 지배층의 주류였음을 실증해 내고 있다.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소위 신흥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창건한 주역이 아니었다면, 과연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이었을까? 던컨 교수는 여말선초의 한국지성계가 기존연구에서 밝혀진 것보다 훨씬 복잡 다양하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11세기 말 12세기 초에는 경세와 고전 중심의 유학이 발전하였고, 1170년 무인정권이 수립된 뒤에는 상당 기간 동안 사장(詞章)을 숭상하는 풍조가 두드러졌다. 그렇지만 여러 학풍이 혼재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고문학(古文學)은 김황원과 김부식이 대표하였으며, 12세기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 뒤에는 북송의 고문학자 소식의 인기가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 고문학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이제현, 이곡, 이인복 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현은 고문학과 성리학에 모두 정통하였다. 조선전기 성리학자로 이름난 김종직도 마찬가지였으며, 15세기 후반 한국의 저명한 유학자들은 대체로 그러하였다고 한다. 불교와 고려후기 양반의 관계는 대단히 밀접하였다고 하는데 그런 사정은 조선전기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성리학자로 유명한 권근의 형도 승려였으며 조선의 왕실이 불교를 후원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한국사회가 성리학 중심의 사회로 가는 과정에 있어서 조선 초기는 한당유학과 성리학이 공존하는 일종의 과도기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상사적인 변화에 있어서도 점진적이었다는 점을 그는 강조한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학계에서 성리학이 왕조교체의 이념적 무기였고 조선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다는 주장이 철저히 검증 받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고려-조선 왕조의 지적 전통이 복합적이었다는 던컨 교수의 주장은 경청할 만하다.
고려-조선왕조 교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지배층의 교체도, 사상적 변화도 동반하지 않았다면, 왕조교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던컨 교수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이 높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새 왕조 건국에 수반된 개혁의 본질을 근거로 하여 “조선의 건국은 지방자치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고려 전기의 노력이 거둔 궁극적인 열매”라 한다. 한국의 역사에서 ‘장기적 지속성’을 찾아내려는 던컨의 다각적인 노력은 실로 감탄할 만하다.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가 연구의 주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는 연구대상을 시간과 공간을 크게 확장시킨다. 7세기의 통일신라로부터 시작해서 16세기 조선에 이르기까지 1,000년의 한국역사를 해부한다. 중국의 당, 오대, 송, 원 및 명의 권력구조, 지배세력 및 통치이념의 변천을 밝힌 최근의 중요한 연구업적도 두루 참고한다.
시간과 공간으로 멀리 확장된 던컨의 비교사적인 관심은, 그러나 분산되어 흩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연구의 주된 대상은 고려-조선의 왕조교체이다. 그는 한국사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화 네 가지 측면의 상호관계에 주목하면서도 정치체제의 변화, 다시 말해 한국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의 형성과정을 구명하는 데에 연구역량이 총집결된다.
『조선왕조의 기원』에서 던컨 교수는 신라 말에서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과거제도의 출현과 그로 인한 지배층의 성격변화를 매우 중요한 변동으로 파악하였다. 동시에 신라 말 무인적 배경을 지닌 지방호족 세력이 고려왕조의 출현과 과거제도의 실시로 문민적 중앙귀족 관료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중시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중국적 관료제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전통적으로 뿌리 깊은 지방 세력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기에, 지방통치에 있어서 지방토착세력인 향리들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을 두고 국가의 공권력과 지방 세력가 사이에 대립과 경쟁관계를 남겨둘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건국으로도 지배세력의 전면적 교체가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두 왕조의 지배세력의 구성이라는 면에서 일체성이 더 강하였음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던컨 교수는 조선왕조의 창건으로 한국사회의 중앙집권화가 더욱 강화되어 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룩하였다고 강조한다.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동안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은 실증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맞선 민족주의적 당위론에 따른 목적론적 요인이 강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발견한 것만으로도 한국사회를 정체적이라 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일침을 가한다.
기다렸던 역사담론, 던컨 교수의 ‘장기적 지속성’론
해방 후 한국 역사학계의 과제는 식민사학의 청산이었다. 고려-조선왕조 교체가 단순한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매우 부정적으로 해석했던 시각이, 해방 후 긍정으로 달라지는 가운데 1960년대 말에 새로이 등장한 사관이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한국사의 각 시기마다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해서 역사를 주도해 간 것으로 한국사가 체계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상 주도세력의 변천을 강조하는 발전사관은 점차 한국사학계의 주류로 성장했다. 고려시대의 호족-문벌-권문세족-신흥 사대부와 조선전기의 훈구-사림 등으로 지배층의 변화를 설명하는 시각은 현행 교과서를 비롯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를 공부한 분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중앙의 지배층이 교체되는 역동적인 사회변화가 일어났다는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사학의 극복이라는 모토에 부합되면서 힘을 얻게 되는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에 조선 건국사에서 지배층으로 떠오른 신흥 사대부나 이후 사림에 대한 연구 또한 이때 이루어진다. 즉 단순한 권력투쟁에 의한 왕조교체가 아니라 다분히 사회혁명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던컨 교수는 한국사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이 내부적 발전 논리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내재적 발전론의 암시에 불만을 느꼈다고 한다.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저자의 비판 배경과 이 책의 집필 동기에 대해 한국어판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980년대 중엽에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고심하던 중 지도교수 제임스 팔레 선생님의 건의에 따라 15세기 후반 사림파의 형성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거기에 대한 여러 학자의 논문을 읽어보니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사장학을 즐기고 서울에서 거주하는 대지주 계층인 훈구와 성리학을 신봉하고 지방에서 거주하는 중소 지주층인 사림 사이의 대립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의 문제만 놓고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석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겨우 70~80년 전에 불교를 믿고 개경에서 거주하는 대지주였던 고려의 권문세족과 성리학 계통이고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이었던 신흥 사대부의 대립과는 어떻게 달랐는가, 조선왕조를 건국했던 신흥 사대부들은 어떻게 됐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어 마침내 논문 주제의 초점을 고려-조선 왕조 교체로 돌렸다.”
이 책은 조선사회의 역동성보다는 안정성을, 단절성보다는 장기지속성에 무게를 둔 서술이다.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라 고려 전기부터 몇 백 년 이상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행되어 온 장기지속적 변화였다.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기원』은 그동안 한국사의 뼈대를 이룬 ‘내재적 발전론’과 ‘장기적 지속성론’의 학문적 만남의 장이다. 이데올로기적 역사를 버리고 다양한 시각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그릴수록 우리의 한국사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40년 동안 한국과 한국사를 바라본 노학자의 역작이 그래서 반갑다.
▣ 작가 소개
저자 : 존 B. 던컨
존 B. 던컨(John B. Duncan)은 1945년 미국 애리조나 야바파이 카운티 출생. 노던 애리조나대 재학 중인 1966년에 미군으로 한국에 와 2년 동안 비무장지대 부근에서 근무했으며 제대 후 고려대 사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하와이대에서 석사학위, 워싱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이래 UCLA 아시아언어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는 같은 대학의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저서로 『Rethinking Confucianism: Past and Present in China, Japan, Korea, and Vietnam』(공저, 2002),『Reform and Modernization in the Taehan Empire』(공저, 2006), 『Institutional Basis of Civil Governance in Chos?n Dynasty Korea』(공저, 2009)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역자 : 김범
김범(金範)은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9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치사화 사회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화와 반정의 시대』(2007),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2010), 번역서로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 1·2(제임스 B. 팔레 지음, 2008)가 있다.
▣ 주요 목차
1장 고려의 정치제도
중앙 정치제도
왕권 - 중앙 관료 제도의 창출 - 무신 치하의 제도 개혁
지방행정 제도
지방의 사회·정치적 질서 - 중계적 지방 관서를 설치하려는 시도 - 군현의 통제
자원을 둘러싼 갈등
전시과 - 그 밖의 토지자원들
결론
2장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고려 전기의 중앙 관원층
고려 전기의 주요 가문들 - 주요 가문의 기원 - 등용 제도와 사회적 지배층 - 중앙 관원의 경력 유형 - 요 가문의 융성
고려 후기의 주요 가문들
고려 후기의 중앙 관원층 - 등용 제도 - 경력의 유형 - 권문세족과 사대부 문제
중앙 가문의 경제적 기반
고려 전기 - 고려 후기
결론
3장 왕조 교체기의 양반
조선 개창기의 중앙 관원층
1392~1400년의 중앙 관원층 - 태종 초반(1401~1405)의 중앙 관원층 - 지파의 연합 - 등용 제도
양반 가문의 내부 구조
조선 전기 주요 가문의 세계 - 주요 가문의 혼인 관계
15세기 중반의 주요 양반 가문들
15세기 중반의 관원층 - 15세기 중반의 과거제도 - 주요 중앙 양반 가문
조선 전기 양반의 경제적 재원
결론
4장 고려 후기의 제도적 위기
권력투쟁
고려 후기 정치제도의 구조 - 원 간섭기의 정치권력 - 원 간섭기 이후의 정치권력 - 개혁의 시도
자원의 장악을 둘러싼 투쟁
외침 - 중앙 세력의 지방 수탈 -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투쟁
문제의 기원 -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노력
결론
5장 개혁과 왕조 교체
재정 개혁
과전법 - 자원을 창출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시도
신분제도의 재정립
지방행정의 개편 - 지배층의 감축
중앙 정치제도의 재편
정치 개혁: 첫 번째 국면, 1392~1400년 - 정치 개혁: 두 번째 국면, 1400~1405년
결론
6장 개혁의 이념
사상의 복잡성
고려 전기부터 중기의 사장과 고문 - 왕조 교체기의 고문과 정주학 - 조선 전기에 남은 당풍의 흔적
과거제도를 둘러싼 갈등
고려 후기의 과거 - 조선 전기의 과거 - 유교와 개혁
결론
7장 몇 가지의 최종적 고려 사항
연구 성과의 요약
해석과 비교의 결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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