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 공간’ 전반기를 5권으로 완성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한국인은 20세기 100년 전반기의 대부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고, 후반기를 분단국가로 지냈다. 두 시기 사이의 전환기가 해방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37개월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집필 작업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3개월 남겨두고 있다. 너머북스의 책 출간 또한『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의 출간으로 모두 10권의 시리즈 중 그 절반인 『해방일기 상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대선 정국에서 촉발된 한국 현대사 논쟁이 최근 ‘백년 전쟁’ 동영상으로 다시 점화되는 가운데 한국현대사의 기원에 관한 탐구서인 『해방일기』가 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목받고 있다. 김기협 교수는 현대사의 주인공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진영논리에 입각한 극단적 주장들이 충돌하는 그 이면은 ‘분단의 의미에 대한 실질적 이해’가 아직도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장벽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며,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해방공간을 세밀히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병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불건강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60여 년 전 이 민족이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때문이었는가? 당시 이 민족의 약점을 드러냈던 인물들이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하는지, 엄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1946년 9월에서 12월까지 조명한 『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에서는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의 상황을 생생히 중계하는 가운데, 특히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이 왜 미국에게 있는지를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좌우 대립의 분수령인 ‘대구 사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개원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요”
-『해방일기』상편인 1∼5권을 펴낸 김기협 교수의 소회
이제 1946년 말까지 “해방일기” 작업의 전반부를 진척시키며 시야가 명료해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45년 8월의 ‘해방’이 어떤 제약을 가진 것이었는지 분명해졌다. ‘허울만의 해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이 가져다3준 상황은 암담한 것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이 저절로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이란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분단건국과 전쟁의 참극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한탄은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좋은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은 조선인에게 정의와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전술적 조치일 뿐이었다.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힘이 거둔 것이었고, 두 나라는 그 힘으로 승리의 상품을 거머쥐고 있었다.
큰 변화의 계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계기에는 같은 노력으로도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이 하나의 기회이기는 했다. 또한 위기이기도 했다. 과연 우리 선인들은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고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지금 와서 바꿀 길을 물론 없다. 그러나 위기의 악화에 공헌한 사람들과 기회의 활용에 진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수는 있다. 그와 비슷한 기회와 위기는 그 후에도 거듭거듭 닥쳐왔으며 앞으로도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지배한 것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으로 보이기 쉽다.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가운데 나는 극좌와 극우가 주어진 상황에 편승했을 뿐, 역사 전개에 능동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은 좀 더 나은 민족의 진로를 열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이 좌절된 것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엄혹했기 때문이지만 그 자세에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다. 이승만, 조병옥, 김일성, 박헌영 등이 당시의 승리자처럼 부각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주어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재주를 역사에서 배워 무엇에 쓰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중간파의 가르침이 무시되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당시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밀려난 것과 같은 상황이 수십 년간 분단-대립 속에 계속된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대립의식이 크게 완화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그들을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 적은 것은 승리자만을 받드는 극한 경쟁사회의 속성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쓴 선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나요? -『해방일기 5』개요
점령 1년, 불리한 위치를 깨달은 미국
하나의 민족이 대결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온갖 비극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당시 조선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분단건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어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이 선거를 흑백함선거니 뭐니 하면서 흠을 잡는 반공주의 선전과 교육을 우리는 받아왔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기본원칙이 잘 지켜진 선거였다. 반면 같은 시기 이남에서 시행된 입법의원 선거는 어떠했는가? 90명 의원 중 절반을 주둔군 사령관이 임명했고(관선의원), 나머지 절반(민선의원)을 선출한 선거도 형편없는 엉터리였다. 곧 이어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지만 진짜 정부가 못되었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이라는 민정장관부터가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다.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악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같은 시기에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 한 짓을 보면 미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조선에서 소련의 태도가 미국보다 좋았던 것은 조선 사정이 소련 쪽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억압한 일본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 정책이었으므로 항일운동의 경제적 성향은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해방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토지개혁 등 넓은 범위의 사회주의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체의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던 조선총독부의 관행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구분 없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선택받을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에서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조선에 세우고 싶어 한 자본주의 체제는 조선의 상황에도 맞지 않고 민족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강행하는 데 많은 비용을(경제원조와 국가폭력) 투입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대표적 비용이 경찰력이다. 미군정은 일제시대보다 갑절 이상의 경찰 인원을 이남 지역에 키워냈고 일제시대 경찰 경력자로 그 주축을 삼았다. 게다가 전국 경찰을 하나의 ‘국가경찰’로 조직함으로써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찰의 횡포 때문에 민심이 더욱 이반하는 악순환의 수렁에 미국은 빠지게 되었다.
이남 좌익의 몰락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1946년 8월 말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 창설을 통해 안정된 정치체제를 마련했다. 신민당과 통합하며 범좌익을 규합하고 민족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이남 좌익의 지도력은 박헌영과 여운형 사이에 갈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박헌영 일파와 그 반대파 간의 대립이었고, 반(反)박헌영파가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간판이 여운형이었다.
이 심각한 대립 속에 희극적일 정도로 난처한 처지에 놓인 것이 여운형이었다. 좌익 최고 명망가라는 이유 때문에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이하 사로당) 양쪽의 준비위원장을 맡은 여운형은 양쪽 위원장 직무를 모두 거부하고 통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박헌영파가 사로당 쪽의 무조건 해체와 개별 합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로당이 박헌영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로당 추진파는 지리멸렬에 빠졌다.
이남에서 좌익 약화의 직접 원인이 미군정의 탄압과 극우 세력의 공격에 있었지만 저자는 박헌영 일파의 모험주의 노선도 문제의 하나로 지적한다. 지나치게 과격한 노선으로 역량을 불필요하게 소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까지도 모험주의 노선의 범주에 넣어본다면 한국 분단의 극심한 강화에 그 노선의 책임이 엄청나게 큰 것인데, 그 폐단은 1946년 가을부터 쌓이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좌우합작이 희망이었던 이유
좌우합작위원회(이하 합작위)의 첫 성과인 ‘7원칙’이 46년 10월에 나왔다. ‘토지개혁’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 문제에 합작위는 ‘체감매수(遞減買收) 무상분배’의 원칙을 내놓았다. 좌익이 주장하던‘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과 우익 주장의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을 절충한 것이다. 매수할 토지의 규모가 작을 때는 시가 그대로 보상하는 ‘유상’으로 하고, 규모가 커질 때는 보상률을 점진적으로 낮춘다는 것이다.
합작위의 토지개혁 원칙은 효과에서 좌익 측에 접근하는 것이면서도 명분과 이론에서는 우익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민당이 이 원칙에 반대한 결과, 원세훈, 김병로 등 그 절반이 당을 떠나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중간파에 합류하고, 한민당은 친미·반공의 지주당 성격을 분명히 했다. 부일 협력자 집단을 중심으로 극우 세력이 범우익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 진영을 갖추는 계기였다. 저자는 같은 시기 박헌영 일파를 중심으로 한 남로당과 ‘지주당’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이 짝을 이루는 변신을 했고, ‘적대적 공생 관계’의 새로운 단계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한편, 1946년 연말은 지난 1년간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밀월 관계의 전환점이었다. 미군정이 절대 권력을 쥐고 군림하던 점령 초기에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미군정에 의지해서 힘을 키웠다. 1년 남짓 이 밀착 관계를 뒷받침한 것은 좌익에 대항하는 공조의 필요였다. 1946년 12월 4일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이승만의 위상은 김구, 김규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4개월간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분단 건국을 통한 권력 장악을 향해 치달려가게 된다.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던가?
“1946년을 지내는 동안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도덕성은 파탄을 드러낼 대로 드러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권력 장악이 커밍스가 탄복하는 이해력과 술수와 참을성만으로 가능한 것이었을까?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뿐 아니라 세태와 풍속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해방 공간을 들여다볼수록 절감하게 된다. 군정사령과 하지에게까지 정면으로 도전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위상의 이승만이 나타난다. 이제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중을 두고 이승만의 움직임을 추적해나가야겠다.” -1946.12.9. 중에서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하편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주요 목차
머리말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
1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1946년 9월 2∼ 30일
1946. 9. 2. 밀수선, 밀항선, 해적선이 넘치는 조선 바다
1946. 9. 5. ‘대중정당’의 개념이 없는 박헌영 일파
1946. 9. 7. 공산당에 포문을 연 하지 사령관
1946. 9. 9.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거래?
1946. 9. 12. 스스로 가다듬기를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
1946. 9. 14. 학교를 투쟁의 본산으로 만든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
1946. 9. 16. 아시아 신질서의 구조를 바꾼 중국 국공(國共) 내전
1946. 9. 19. 일본에 기대어 조국 ‘해방’을 바라본 사람들
1946. 9. 21. 미군정 정책에 따라 춤추는 조선 쌀값
1946. 9. 23. 9월 총파업과 공산당의 ‘신전술’
1946. 9. 26. 좌익을 위해 최악의 길을 걸은 ‘총파업’
1946. 9. 30. “나라를 구한” 김두환, 감격하는 장택상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언젠가 역사가로서 미군정을 비판하겠다”
2 좌우 대립 격화의 분수령, 대구 사태
1946년 10월3∼31일
1946. 10. 3.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경찰
1946. 10. 5. 반란인가, 폭동인가, 항쟁인가?
1946. 10. 7. 어렵게 얻은 좌우합장의 성과 ‘7원칙’
1946. 10. 10. 여운형의 족쇄가 된 입법 기구
1946. 10. 12. ‘지주당(地主黨)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
1946. 10. 14. 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고?
1946. 10. 17. 정판사사건, 공산당에는 책임이 없었나?
1946. 10. 19. 민중의 ‘몽둥이’가 된 민중의 ‘지팡이’
1946. 10. 21. 끝내 평행선을 그린 좌익 합당
1946. 10. 24.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의 역할
1946. 10. 26. 입법의원 엉터리 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박헌영
1946. 10. 31. 해방 공간 속의 청년 김대중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좌우합작 원칙 타결과 입법의원 설치
3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역할과 의의
1946년 11월2∼28일
1946. 11. 2. 조병옥과 장택상을 (잠깐) 혼내준 조미공동위원회
1946. 11. 4. 박해하는 민족, 박해받는 민족
1946. 11. 7. 현실주의자 김규식의 등장
1946. 11. 9. 미소공위를 둘러싼 하지와 이승만의 대립
1946. 11. 11. 입법의원 선거에서 김규식의 역할
1946. 11. 14. ‘반미 좌경’ 미국 기자가 본 이북의 모습
1946. 11. 16.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 발전의 남북 격차
1946. 11. 18. 조선에서 소련의 성공, 미국 대사도 인정했다
1946. 11. 21. ‘경찰 개혁’ 엄두도 못 내는 미군정
1946. 11. 23. 귀국 1주년을 맞은 김구의 심경
1946. 11. 25. 입지를 잃어버린 여운형과 백남운
1946. 11. 28. 하지와 이승만, 한때는 그리도 다정했건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백범 주변에 사람이 없다”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946년 12월2∼30일
1946. 12. 2. 서울특별시장, 이런 사람도 있었다
1946. 12. 5. 미국통이지만 친미파가 되지 못한 최능진
1946. 12. 7. 입법의원 구성의 우여곡절
1946. 12. 9. 새로운 위상으로 떠오르는 이승만
1946. 12. 12.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밀월 관계의 전환점
1946. 12. 14. 부흥의 사각지대가 된 조선
1946. 12. 16. 조병옥, 미군정의 재신임으로 기고만장
1946. 12. 19. 좌익은 봉사 활동도 규제 대상
1946. 12. 21. “요정을 전재민에게 내줘? 우린 어디서 놀라고?”
1946. 12. 23. 1946년 말, 경찰의 적나라한 모습
1946. 12. 26. 제 앞가림도 힘든 입법의원
1946. 12. 28. 해방 대신 전쟁을 맞은 베트남
1946. 12. 30. 조선인도 베트남인의 항쟁을 성원했다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12월까지 ‘해방 공간’ 전반기를 5권으로 완성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한국인은 20세기 100년 전반기의 대부분을 일본의 식민지로 지냈고, 후반기를 분단국가로 지냈다. 두 시기 사이의 전환기가 해방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분단건국으로 치달은 것이 우연이었는가, 필연이었는가? 그 책임이 민족사회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분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 37개월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집필 작업이 이제 대단원의 막을 3개월 남겨두고 있다. 너머북스의 책 출간 또한『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의 출간으로 모두 10권의 시리즈 중 그 절반인 『해방일기 상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대선 정국에서 촉발된 한국 현대사 논쟁이 최근 ‘백년 전쟁’ 동영상으로 다시 점화되는 가운데 한국현대사의 기원에 관한 탐구서인 『해방일기』가 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목받고 있다. 김기협 교수는 현대사의 주인공인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진영논리에 입각한 극단적 주장들이 충돌하는 그 이면은 ‘분단의 의미에 대한 실질적 이해’가 아직도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장벽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하며,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해방공간을 세밀히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병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불건강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60여 년 전 이 민족이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때문이었는가? 당시 이 민족의 약점을 드러냈던 인물들이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하는지, 엄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1946년 9월에서 12월까지 조명한 『해방일기 5권 -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에서는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의 상황을 생생히 중계하는 가운데, 특히 분단 건국의 일차적 책임이 왜 미국에게 있는지를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좌우 대립의 분수령인 ‘대구 사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개원 등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요”
-『해방일기』상편인 1∼5권을 펴낸 김기협 교수의 소회
이제 1946년 말까지 “해방일기” 작업의 전반부를 진척시키며 시야가 명료해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45년 8월의 ‘해방’이 어떤 제약을 가진 것이었는지 분명해졌다. ‘허울만의 해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방’이 가져다3준 상황은 암담한 것이었다. 외세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독립’이 저절로 보장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방이란 좋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서 분단건국과 전쟁의 참극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한탄은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좋은 기회는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 독립을 약속한 카이로 선언은 조선인에게 정의와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전술적 조치일 뿐이었다. 전쟁 승리는 미국과 소련의 힘이 거둔 것이었고, 두 나라는 그 힘으로 승리의 상품을 거머쥐고 있었다.
큰 변화의 계기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계기에는 같은 노력으로도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해방이 하나의 기회이기는 했다. 또한 위기이기도 했다. 과연 우리 선인들은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고 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분단과 전쟁이라는 비극적 결과를 지금 와서 바꿀 길을 물론 없다. 그러나 위기의 악화에 공헌한 사람들과 기회의 활용에 진력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수는 있다. 그와 비슷한 기회와 위기는 그 후에도 거듭거듭 닥쳐왔으며 앞으로도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모습을 밝혀내는 데서 얻는 보람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당시 상황을 지배한 것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으로 보이기 쉽다. 극좌와 극우는 분단건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경험을 추체험하는 가운데 나는 극좌와 극우가 주어진 상황에 편승했을 뿐, 역사 전개에 능동적 공헌을 한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
여운형, 김규식, 홍명희, 안재홍 등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은 좀 더 나은 민족의 진로를 열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이 좌절된 것은 주어진 상황이 너무 엄혹했기 때문이지만 그 자세에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다. 이승만, 조병옥, 김일성, 박헌영 등이 당시의 승리자처럼 부각되었지만 그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주어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재주를 역사에서 배워 무엇에 쓰겠는가?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중간파의 가르침이 무시되어 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당시 극좌-극우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밀려난 것과 같은 상황이 수십 년간 분단-대립 속에 계속된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대립의식이 크게 완화된 지금의 한국 상황에서도 그들을 제대로 살피는 눈길이 적은 것은 승리자만을 받드는 극한 경쟁사회의 속성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 애쓴 선인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되기 바란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나요? -『해방일기 5』개요
점령 1년, 불리한 위치를 깨달은 미국
하나의 민족이 대결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온갖 비극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당시 조선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분단건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어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이 선거를 흑백함선거니 뭐니 하면서 흠을 잡는 반공주의 선전과 교육을 우리는 받아왔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기본원칙이 잘 지켜진 선거였다. 반면 같은 시기 이남에서 시행된 입법의원 선거는 어떠했는가? 90명 의원 중 절반을 주둔군 사령관이 임명했고(관선의원), 나머지 절반(민선의원)을 선출한 선거도 형편없는 엉터리였다. 곧 이어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지만 진짜 정부가 못되었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이라는 민정장관부터가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다.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악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같은 시기에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 한 짓을 보면 미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조선에서 소련의 태도가 미국보다 좋았던 것은 조선 사정이 소련 쪽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억압한 일본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 정책이었으므로 항일운동의 경제적 성향은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해방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토지개혁 등 넓은 범위의 사회주의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체의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던 조선총독부의 관행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구분 없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선택받을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에서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조선에 세우고 싶어 한 자본주의 체제는 조선의 상황에도 맞지 않고 민족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강행하는 데 많은 비용을(경제원조와 국가폭력) 투입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대표적 비용이 경찰력이다. 미군정은 일제시대보다 갑절 이상의 경찰 인원을 이남 지역에 키워냈고 일제시대 경찰 경력자로 그 주축을 삼았다. 게다가 전국 경찰을 하나의 ‘국가경찰’로 조직함으로써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찰의 횡포 때문에 민심이 더욱 이반하는 악순환의 수렁에 미국은 빠지게 되었다.
이남 좌익의 몰락
이북 공산주의자들은 1946년 8월 말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 창설을 통해 안정된 정치체제를 마련했다. 신민당과 통합하며 범좌익을 규합하고 민족주의자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이남 좌익의 지도력은 박헌영과 여운형 사이에 갈라졌다. 엄밀히 말하면 박헌영 일파와 그 반대파 간의 대립이었고, 반(反)박헌영파가 최대한 결집할 수 있는 간판이 여운형이었다.
이 심각한 대립 속에 희극적일 정도로 난처한 처지에 놓인 것이 여운형이었다. 좌익 최고 명망가라는 이유 때문에 남로당과 사회노동당(이하 사로당) 양쪽의 준비위원장을 맡은 여운형은 양쪽 위원장 직무를 모두 거부하고 통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박헌영파가 사로당 쪽의 무조건 해체와 개별 합류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로당이 박헌영파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로당 추진파는 지리멸렬에 빠졌다.
이남에서 좌익 약화의 직접 원인이 미군정의 탄압과 극우 세력의 공격에 있었지만 저자는 박헌영 일파의 모험주의 노선도 문제의 하나로 지적한다. 지나치게 과격한 노선으로 역량을 불필요하게 소진하고 또 한편으로는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까지도 모험주의 노선의 범주에 넣어본다면 한국 분단의 극심한 강화에 그 노선의 책임이 엄청나게 큰 것인데, 그 폐단은 1946년 가을부터 쌓이기 시작한 것이라 한다.
좌우합작이 희망이었던 이유
좌우합작위원회(이하 합작위)의 첫 성과인 ‘7원칙’이 46년 10월에 나왔다. ‘토지개혁’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이 문제에 합작위는 ‘체감매수(遞減買收) 무상분배’의 원칙을 내놓았다. 좌익이 주장하던‘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과 우익 주장의 ‘유상매수 유상분배’ 원칙을 절충한 것이다. 매수할 토지의 규모가 작을 때는 시가 그대로 보상하는 ‘유상’으로 하고, 규모가 커질 때는 보상률을 점진적으로 낮춘다는 것이다.
합작위의 토지개혁 원칙은 효과에서 좌익 측에 접근하는 것이면서도 명분과 이론에서는 우익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적 소유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민당이 이 원칙에 반대한 결과, 원세훈, 김병로 등 그 절반이 당을 떠나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중간파에 합류하고, 한민당은 친미·반공의 지주당 성격을 분명히 했다. 부일 협력자 집단을 중심으로 극우 세력이 범우익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적 진영을 갖추는 계기였다. 저자는 같은 시기 박헌영 일파를 중심으로 한 남로당과 ‘지주당’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이 짝을 이루는 변신을 했고, ‘적대적 공생 관계’의 새로운 단계가 열리는 것으로 본다.
한편, 1946년 연말은 지난 1년간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밀월 관계의 전환점이었다. 미군정이 절대 권력을 쥐고 군림하던 점령 초기에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은 미군정에 의지해서 힘을 키웠다. 1년 남짓 이 밀착 관계를 뒷받침한 것은 좌익에 대항하는 공조의 필요였다. 1946년 12월 4일 이승만은 도쿄에서 맥아더를 만난 뒤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까지 이승만의 위상은 김구, 김규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4개월간의 미국 체류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분단 건국을 통한 권력 장악을 향해 치달려가게 된다. 1947년 이승만의 득세는 무엇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던가?
“1946년을 지내는 동안 지도자로서 이승만의 도덕성은 파탄을 드러낼 대로 드러냈다. 부도덕한 정치인의 권력 장악이 커밍스가 탄복하는 이해력과 술수와 참을성만으로 가능한 것이었을까?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뿐 아니라 세태와 풍속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해방 공간을 들여다볼수록 절감하게 된다. 군정사령과 하지에게까지 정면으로 도전하는 데서부터 새로운 위상의 이승만이 나타난다. 이제부터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중을 두고 이승만의 움직임을 추적해나가야겠다.” -1946.12.9. 중에서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하편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주요 목차
머리말 앞서가는 이북과 혼란에 빠진 이남
1 미군정의 공산당 탄압
1946년 9월 2∼ 30일
1946. 9. 2. 밀수선, 밀항선, 해적선이 넘치는 조선 바다
1946. 9. 5. ‘대중정당’의 개념이 없는 박헌영 일파
1946. 9. 7. 공산당에 포문을 연 하지 사령관
1946. 9. 9.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거래?
1946. 9. 12. 스스로 가다듬기를 마지않는, 그런 지도자
1946. 9. 14. 학교를 투쟁의 본산으로 만든 국립서울대학교 설치령
1946. 9. 16. 아시아 신질서의 구조를 바꾼 중국 국공(國共) 내전
1946. 9. 19. 일본에 기대어 조국 ‘해방’을 바라본 사람들
1946. 9. 21. 미군정 정책에 따라 춤추는 조선 쌀값
1946. 9. 23. 9월 총파업과 공산당의 ‘신전술’
1946. 9. 26. 좌익을 위해 최악의 길을 걸은 ‘총파업’
1946. 9. 30. “나라를 구한” 김두환, 감격하는 장택상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언젠가 역사가로서 미군정을 비판하겠다”
2 좌우 대립 격화의 분수령, 대구 사태
1946년 10월3∼31일
1946. 10. 3.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경찰
1946. 10. 5. 반란인가, 폭동인가, 항쟁인가?
1946. 10. 7. 어렵게 얻은 좌우합장의 성과 ‘7원칙’
1946. 10. 10. 여운형의 족쇄가 된 입법 기구
1946. 10. 12. ‘지주당(地主黨)의 본색을 드러낸 한민당
1946. 10. 14. 박헌영이 관 속에 숨어서 월북했다고?
1946. 10. 17. 정판사사건, 공산당에는 책임이 없었나?
1946. 10. 19. 민중의 ‘몽둥이’가 된 민중의 ‘지팡이’
1946. 10. 21. 끝내 평행선을 그린 좌익 합당
1946. 10. 24. 해방 공간에서 기독교인들의 역할
1946. 10. 26. 입법의원 엉터리 선거의 최대 수혜자는 박헌영
1946. 10. 31. 해방 공간 속의 청년 김대중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좌우합작 원칙 타결과 입법의원 설치
3 조미공동소요대책위원회의 역할과 의의
1946년 11월2∼28일
1946. 11. 2. 조병옥과 장택상을 (잠깐) 혼내준 조미공동위원회
1946. 11. 4. 박해하는 민족, 박해받는 민족
1946. 11. 7. 현실주의자 김규식의 등장
1946. 11. 9. 미소공위를 둘러싼 하지와 이승만의 대립
1946. 11. 11. 입법의원 선거에서 김규식의 역할
1946. 11. 14. ‘반미 좌경’ 미국 기자가 본 이북의 모습
1946. 11. 16. 선거에서 드러난 정치 발전의 남북 격차
1946. 11. 18. 조선에서 소련의 성공, 미국 대사도 인정했다
1946. 11. 21. ‘경찰 개혁’ 엄두도 못 내는 미군정
1946. 11. 23. 귀국 1주년을 맞은 김구의 심경
1946. 11. 25. 입지를 잃어버린 여운형과 백남운
1946. 11. 28. 하지와 이승만, 한때는 그리도 다정했건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백범 주변에 사람이 없다”
4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
1946년 12월2∼30일
1946. 12. 2. 서울특별시장, 이런 사람도 있었다
1946. 12. 5. 미국통이지만 친미파가 되지 못한 최능진
1946. 12. 7. 입법의원 구성의 우여곡절
1946. 12. 9. 새로운 위상으로 떠오르는 이승만
1946. 12. 12. 미군정, 한민당, 이승만, 밀월 관계의 전환점
1946. 12. 14. 부흥의 사각지대가 된 조선
1946. 12. 16. 조병옥, 미군정의 재신임으로 기고만장
1946. 12. 19. 좌익은 봉사 활동도 규제 대상
1946. 12. 21. “요정을 전재민에게 내줘? 우린 어디서 놀라고?”
1946. 12. 23. 1946년 말, 경찰의 적나라한 모습
1946. 12. 26. 제 앞가림도 힘든 입법의원
1946. 12. 28. 해방 대신 전쟁을 맞은 베트남
1946. 12. 30. 조선인도 베트남인의 항쟁을 성원했다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1946년은 어떤 해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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