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격정이 숙고보다 더 강력하니,
이것이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이로다!
거대한 운명에 맞선 인간의 위대한 분투기, 희랍 비극을 읽다
우리는 왜 고전을 읽는가
그동안 많은 독자가 일종의 의무감에 떠밀려 고대 서양의 고전 작품을 읽어왔다. 그런데 그 끝은 어땠는가? 생소한 어휘와 이질감 물씬한 이야기 전개에 질려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거나, 다 읽더라도 작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난감했던 경우가 대다수다. 고대 서양 고전 작품 중 희랍 비극은 특히 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와 노래뿐이니, 작품을 둘러싼 환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희랍 비극 텍스트를 접한다면,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차라리 ‘활자 스캔’이라 부르는 게 나을 정도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할 책, 『비극의 비밀』이 출간되었다. 정통 서양 고전 연구자가 들려주는 희랍 비극 지상 강의이자, 문학동네가 선보이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네번째 책이다. 희랍 비극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와 형식적 장치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기본적인 독서의 배경지식은 물론, 각각의 작품이 지닌 의의와 이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작품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세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같은 주제 또는 같은 모티프가 변주되는 희랍 비극 작품의 특성을 고려, 유사 작품들을 비교하며 읽는 방법과 그 재미까지 엿보게 해준다.
3대 비극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한눈에 조망하다
흔히 비극(悲劇)을 ‘슬픈 극’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비극’이라는 번역어의 표현적 한계에서 비롯한 문제인데, 이 때문에 작품을 읽으며 등장인물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상 희랍 비극은 인물에게 닥친 불행과 고통 자체보다는, 환난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에 주목한다. 아울러 희랍 비극은 한 인간에게 닥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그리는데, 이 ‘운명’에 관한 비극 작가의 철학적 사고에 따라 등장인물이 사태에 임하는 태도 역시 다양하게 변주되고 진화한다. 이 책은 비극 작품의 이런 미세한 부분들에 주목하며, 고대 희랍의 3대 비극 작가가 남긴 주요 작품들을 하나하나 섭렵해나간다.
고대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일컫는다. 기원전 5세기에 창작된 이들의 작품은,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며 끊임없이 재해석, 재창작되고 있다. 불과 한 세기 동안 창작된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칭송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품의 행간마다 녹아든 고대 희랍인의 깊고 다채로운 생각들과 그 문학적 성취를, 『비극의 비밀』은 읽어간다.
콩알 헤아리기, 그 시시콜콜함의 매력
이 책이 자랑하는 최고의 미덕은 바로 ‘치밀하게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아마추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그것이 지닌 가치만을 두루뭉술하게 전하는 게 아니라, 작품에 채용된 낱낱의 형식과 거기 숨은 작가의 의도까지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서양 고전어 번역의 권위자인 천병희 교수의 원전 번역을 기반으로, 저자는 우선 작품 속 대사 한 행 한 행을 톺아보며 비극 작가가 미묘하게 조율해놓은 표현 의도를 읽어내 독자에게 알려준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알아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 진실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하지만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왕의 물음은 점점 짧아진다. 다섯 단어, 네 단어, 두 단어, 한 단어. (후략)
오이디푸스: 그녀가 그대에게 주었단 말인가?
하인: 물론입니다, 왕이시여.
오이디푸스: 어떻게 하라는 것이었나?
하인: 저더러 그 아이를 없애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 어미가 감히?
하인: 예, 불길한 예언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어떤?
하인: 그 아이가 부모님을 죽일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한 단어 다음은 무엇인가? 온 우주의 질량을 한 점에 응축한 듯, 가슴이 오그라붙는 이 긴장의 순간. 시인은 아마도 이 대목에서 배우에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도록 지시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돌연 한 줄짜리 질문으로 돌아간다.
오이디푸스: 그대는 대체 왜 이 노인에게 넘겨주었는가?
하인: 아이가 가여워서였습니다.
이 마지막 질문은 그의 신분을 밝히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질문은 왜 들어갔는가? 오이디푸스가 얼마나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내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불분명하게 남겨져서는 안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저자는 이처럼 대사 한 행 한 행에 주목할 뿐 아니라, 우리말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운율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포착한다. 이른바 ‘콩알 헤아리기(bean counting)’라 부를 수 있는 이런 상세한 작품 해석을 통해, 독자는 비극 작가가 작품 속에 심어놓은 전언은 물론, 작품 속 여러 장치들의 미묘한 조율이 자아내는 형식미와 희랍 비극 읽는 재미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
변주의 묘미, 진화의 숭고함
이 책은 3대 비극 작가에 의해 변주된 동일한 주제의 작품들을 비교 독서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한 세기(기원전 5세기)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희랍 비극이라는 장르에 나타난 사고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이러한 변주와 변화는 곧 고대 인류의 철학적 진화를 시사하는 것이기에,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저자의 노력은 더욱 값지다 할 수 있다.
희랍 신화를 비극 작품으로 재창조해낸 작가들에게, 신화의 모티프는 어쩌면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 예로, 같은 ‘엘렉트라’를 놓고도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어머니를 살해한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극단적인 복수 사건을 두고, 두 작가는 저마다 다른 곳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결과 작품의 성격이 달라졌다. 소포클레스는 악에 맞서 그것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구도를 유지한 채, 인간 운명의 부조리함에 주목하여 복수의 양가적 측면을 부각했다. 반면 에우리피데스는 선(정의)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정의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지향을 흩뜨려놓고, 주변성, 분산성, 단절성, 우연성과 같은 ‘해체적’ 특성까지 작품에 도입했다. 두 작품의 의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일종의 정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 정의를 실행하는 개인들도 대가를 치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틀림없이 신들은 이 사건에 개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개개인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행동은 정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이 처한 조건이라고 보는 듯하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중에서)
주인공들은 제 행동의 결과에 어쩔 줄 몰라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신들은 그 행동을 지지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중략) 시인은 거듭해서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주의를 분산시키고,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걸 방해한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심오한 메시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볍고 되바라진 것으로 보일 작품이다. 하지만 이전 세대 작품들과는 다른 기준에서 보아야 하는, 새로운 장르의 것이다. 새 장르에는 새 잣대가 필요하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중에서)
한편 아이스퀼로스는 이른바 ‘오레스테이아 3부작’, 즉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을 통해 인류의 사고와 체제가 도약하는 과정을 재현해 보인다. 「아가멤논」은 아르고스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아전쟁에서 돌아와 자기 부인의 손에 죽는다는 내용이고,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약 7년 뒤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이웃 나라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어머니를 죽인 사건을 다룬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겨다니다가 아테나이에 이르러 재판을 받고 풀려난다는 내용이다. 앞의 두 작품에서 잔혹한 피의 복수가 거듭된 끝에, 세번째 작품에서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어 구시대의 방식이 퇴출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끝없는 피의 복수는 어디선가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판 제도가 도입되어야만 한다. 그런 중대한 제도가 도입되려면,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죽여야만 하는’ 오레스테스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이 나와야만 한다. 그의 결행에 신들의 신탁과 명령이 개입되어야 하고, 신들 사이의 대립도 있어야 한다. (중략) 핵심은 인류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피의 복수를,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인류 역사에서 사고가 비약하는 순간을 재현해 보인 것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 중에서)
비극은 탄식이 아니라 찬송이다
「메데이아」에서 주인공 메데이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격정이 나의 숙고보다 더 강력하니, / 그것은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의 원인이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강대진은 비극 작품의 정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거의 언제나 불행에 빠진다. 하지만 비극이 그런 인간들을 애도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불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힘, 그 재앙 속에서 인물들이 도달하는 어떤 높이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비극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불완전한 존재에게나 열린 가능성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로, 영원한 행복 속에 사는 신들에게는, 그 완벽함과 행복함 때문에 오히려 그 가능성이 닫혀 있다.”(‘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이것이 바로 희랍 비극이다.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격정에 휘말리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함, 그에 맞서 다시금 투쟁을 수행하며 불행을 극복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 결국 희랍 비극은 인간의 슬픈 운명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존재의 불완전함에 좌절하지 않고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한 분투에 대한 찬송이다. 희랍의 3대 비극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보석같이 빛나는 인간 존재의 비밀을, 『비극의 비밀』은 이렇게 찾아내 다시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독자가 ‘비극의 비밀’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길 고대한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는…
『비극의 비밀』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네번째 책으로, 저자가 2012년 가을부터 2013년 봄까지, 매주 한 차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cafe.naver.com/mhdn)에 연재한 글을 엮은 결과물이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는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된 인문학 온라인 연재라는 점에서 많은 독서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일방향적 정보 전달 방식과 제한된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 방식을 벗어나 매주 업데이트되는 연재글을 기반으로 실시간 소통이 이루어지고, 독자들과 함께하는 지적 탐험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온라인 연재를 거쳐 출간된 책으로는 『삶을 바꾼 만남』(정민), 『권력과 인간』(정병설), 『궁극의 시학』(안대회)과 이번 책 『비극의 비밀』(강대진)이 있다. 현재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연재되고 있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정민)과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이진경) 역시 연재가 끝난 후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후속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 작가 소개
저 : 강대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플라톤의 『향연』 연구로 석사 학위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근래에는 희랍?로마 서사시 속에 숨어 있는 민담의 요소와, 희랍문화에 끼친 고대 근동문화의 영향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지은 책으로 『옛사람들의 세상 읽기, 그리스 신화』,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세계와 인간을 탐구한 서사시 오뒷세이아』, 『고전은 서사시다』, 『잔혹한 책 읽기』, 『신화와 영화』, 『신화의 세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르고 호 이야기』, 『아폴로도로스 신화집』, 『오이디푸스 왕』,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들어가며
첫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두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세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
네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다섯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여섯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일곱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여덟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아홉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열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
열한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
열두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글을 마치며
더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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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이 숙고보다 더 강력하니,
이것이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이로다!
거대한 운명에 맞선 인간의 위대한 분투기, 희랍 비극을 읽다
우리는 왜 고전을 읽는가
그동안 많은 독자가 일종의 의무감에 떠밀려 고대 서양의 고전 작품을 읽어왔다. 그런데 그 끝은 어땠는가? 생소한 어휘와 이질감 물씬한 이야기 전개에 질려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거나, 다 읽더라도 작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난감했던 경우가 대다수다. 고대 서양 고전 작품 중 희랍 비극은 특히 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와 노래뿐이니, 작품을 둘러싼 환경을 파악하기 어렵다.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희랍 비극 텍스트를 접한다면,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차라리 ‘활자 스캔’이라 부르는 게 나을 정도다.
이 안타까운 현실을 타개할 책, 『비극의 비밀』이 출간되었다. 정통 서양 고전 연구자가 들려주는 희랍 비극 지상 강의이자, 문학동네가 선보이는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네번째 책이다. 희랍 비극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와 형식적 장치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함으로써 기본적인 독서의 배경지식은 물론, 각각의 작품이 지닌 의의와 이에 대한 평가, 그리고 작품을 속속들이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세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같은 주제 또는 같은 모티프가 변주되는 희랍 비극 작품의 특성을 고려, 유사 작품들을 비교하며 읽는 방법과 그 재미까지 엿보게 해준다.
3대 비극 작가의 문학적 성취를 한눈에 조망하다
흔히 비극(悲劇)을 ‘슬픈 극’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비극’이라는 번역어의 표현적 한계에서 비롯한 문제인데, 이 때문에 작품을 읽으며 등장인물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상 희랍 비극은 인물에게 닥친 불행과 고통 자체보다는, 환난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에 주목한다. 아울러 희랍 비극은 한 인간에게 닥친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를 그리는데, 이 ‘운명’에 관한 비극 작가의 철학적 사고에 따라 등장인물이 사태에 임하는 태도 역시 다양하게 변주되고 진화한다. 이 책은 비극 작품의 이런 미세한 부분들에 주목하며, 고대 희랍의 3대 비극 작가가 남긴 주요 작품들을 하나하나 섭렵해나간다.
고대 희랍의 3대 비극 작가란,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일컫는다. 기원전 5세기에 창작된 이들의 작품은,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류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꼽히며 끊임없이 재해석, 재창작되고 있다. 불과 한 세기 동안 창작된 작품들이 현재까지도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칭송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품의 행간마다 녹아든 고대 희랍인의 깊고 다채로운 생각들과 그 문학적 성취를, 『비극의 비밀』은 읽어간다.
콩알 헤아리기, 그 시시콜콜함의 매력
이 책이 자랑하는 최고의 미덕은 바로 ‘치밀하게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아마추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그것이 지닌 가치만을 두루뭉술하게 전하는 게 아니라, 작품에 채용된 낱낱의 형식과 거기 숨은 작가의 의도까지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서양 고전어 번역의 권위자인 천병희 교수의 원전 번역을 기반으로, 저자는 우선 작품 속 대사 한 행 한 행을 톺아보며 비극 작가가 미묘하게 조율해놓은 표현 의도를 읽어내 독자에게 알려준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알아내야만 하는 사람이다. 이제 그 진실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이다! 하지만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왕의 물음은 점점 짧아진다. 다섯 단어, 네 단어, 두 단어, 한 단어. (후략)
오이디푸스: 그녀가 그대에게 주었단 말인가?
하인: 물론입니다, 왕이시여.
오이디푸스: 어떻게 하라는 것이었나?
하인: 저더러 그 아이를 없애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이디푸스: 어미가 감히?
하인: 예, 불길한 예언이 두려워서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어떤?
하인: 그 아이가 부모님을 죽일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한 단어 다음은 무엇인가? 온 우주의 질량을 한 점에 응축한 듯, 가슴이 오그라붙는 이 긴장의 순간. 시인은 아마도 이 대목에서 배우에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도록 지시하였으리라. 그러다가 돌연 한 줄짜리 질문으로 돌아간다.
오이디푸스: 그대는 대체 왜 이 노인에게 넘겨주었는가?
하인: 아이가 가여워서였습니다.
이 마지막 질문은 그의 신분을 밝히는 데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질문은 왜 들어갔는가? 오이디푸스가 얼마나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내는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불분명하게 남겨져서는 안 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저자는 이처럼 대사 한 행 한 행에 주목할 뿐 아니라, 우리말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운율의 미세한 차이까지도 포착한다. 이른바 ‘콩알 헤아리기(bean counting)’라 부를 수 있는 이런 상세한 작품 해석을 통해, 독자는 비극 작가가 작품 속에 심어놓은 전언은 물론, 작품 속 여러 장치들의 미묘한 조율이 자아내는 형식미와 희랍 비극 읽는 재미를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다.
변주의 묘미, 진화의 숭고함
이 책은 3대 비극 작가에 의해 변주된 동일한 주제의 작품들을 비교 독서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또한 한 세기(기원전 5세기)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희랍 비극이라는 장르에 나타난 사고방식의 변화를 살펴본다. 이러한 변주와 변화는 곧 고대 인류의 철학적 진화를 시사하는 것이기에, 이를 포착해 소개하는 저자의 노력은 더욱 값지다 할 수 있다.
희랍 신화를 비극 작품으로 재창조해낸 작가들에게, 신화의 모티프는 어쩌면 도전과 극복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한 예로, 같은 ‘엘렉트라’를 놓고도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해석은 사뭇 다르다. 어머니를 살해한 엘렉트라와 오레스테스의 극단적인 복수 사건을 두고, 두 작가는 저마다 다른 곳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결과 작품의 성격이 달라졌다. 소포클레스는 악에 맞서 그것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인간이라는 구도를 유지한 채, 인간 운명의 부조리함에 주목하여 복수의 양가적 측면을 부각했다. 반면 에우리피데스는 선(정의)과 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정의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지향을 흩뜨려놓고, 주변성, 분산성, 단절성, 우연성과 같은 ‘해체적’ 특성까지 작품에 도입했다. 두 작품의 의의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일종의 정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그 정의를 실행하는 개인들도 대가를 치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틀림없이 신들은 이 사건에 개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개개인의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행동은 정의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개인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시인은,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이 처한 조건이라고 보는 듯하다.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중에서)
주인공들은 제 행동의 결과에 어쩔 줄 몰라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신들은 그 행동을 지지하는지도 불분명하다. (중략) 시인은 거듭해서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주의를 분산시키고,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걸 방해한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심오한 메시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볍고 되바라진 것으로 보일 작품이다. 하지만 이전 세대 작품들과는 다른 기준에서 보아야 하는, 새로운 장르의 것이다. 새 장르에는 새 잣대가 필요하다.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중에서)
한편 아이스퀼로스는 이른바 ‘오레스테이아 3부작’, 즉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을 통해 인류의 사고와 체제가 도약하는 과정을 재현해 보인다. 「아가멤논」은 아르고스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아전쟁에서 돌아와 자기 부인의 손에 죽는다는 내용이고,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은 약 7년 뒤에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이웃 나라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고자 어머니를 죽인 사건을 다룬다. 「자비로운 여신들」은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가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겨다니다가 아테나이에 이르러 재판을 받고 풀려난다는 내용이다. 앞의 두 작품에서 잔혹한 피의 복수가 거듭된 끝에, 세번째 작품에서는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어 구시대의 방식이 퇴출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인간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끝없는 피의 복수는 어디선가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판 제도가 도입되어야만 한다. 그런 중대한 제도가 도입되려면,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를 죽여야만 하는’ 오레스테스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이 나와야만 한다. 그의 결행에 신들의 신탁과 명령이 개입되어야 하고, 신들 사이의 대립도 있어야 한다. (중략) 핵심은 인류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피의 복수를,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인류 역사에서 사고가 비약하는 순간을 재현해 보인 것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 중에서)
비극은 탄식이 아니라 찬송이다
「메데이아」에서 주인공 메데이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 그러나 격정이 나의 숙고보다 더 강력하니, / 그것은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의 원인이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 강대진은 비극 작품의 정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비극의 주인공들은 거의 언제나 불행에 빠진다. 하지만 비극이 그런 인간들을 애도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불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힘, 그 재앙 속에서 인물들이 도달하는 어떤 높이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비극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불완전한 존재에게나 열린 가능성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존재로, 영원한 행복 속에 사는 신들에게는, 그 완벽함과 행복함 때문에 오히려 그 가능성이 닫혀 있다.”(‘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이것이 바로 희랍 비극이다. 불행해질 것을 알면서도 격정에 휘말리는 인간 운명의 부조리함, 그에 맞서 다시금 투쟁을 수행하며 불행을 극복하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 결국 희랍 비극은 인간의 슬픈 운명에 대한 탄식이 아니라, 존재의 불완전함에 좌절하지 않고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위대한 분투에 대한 찬송이다. 희랍의 3대 비극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보석같이 빛나는 인간 존재의 비밀을, 『비극의 비밀』은 이렇게 찾아내 다시금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독자가 ‘비극의 비밀’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길 고대한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는…
『비극의 비밀』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네번째 책으로, 저자가 2012년 가을부터 2013년 봄까지, 매주 한 차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cafe.naver.com/mhdn)에 연재한 글을 엮은 결과물이다. ‘우리 시대의 명강의’는 대한민국 최초로 시도된 인문학 온라인 연재라는 점에서 많은 독서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다. 일방향적 정보 전달 방식과 제한된 저자와 독자 간의 소통 방식을 벗어나 매주 업데이트되는 연재글을 기반으로 실시간 소통이 이루어지고, 독자들과 함께하는 지적 탐험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명강의’ 온라인 연재를 거쳐 출간된 책으로는 『삶을 바꾼 만남』(정민), 『권력과 인간』(정병설), 『궁극의 시학』(안대회)과 이번 책 『비극의 비밀』(강대진)이 있다. 현재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서 연재되고 있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정민)과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이진경) 역시 연재가 끝난 후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후속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 작가 소개
저 : 강대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플라톤의 『향연』 연구로 석사 학위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민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정암학당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근래에는 희랍?로마 서사시 속에 숨어 있는 민담의 요소와, 희랍문화에 끼친 고대 근동문화의 영향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지은 책으로 『옛사람들의 세상 읽기, 그리스 신화』,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 『세계와 인간을 탐구한 서사시 오뒷세이아』, 『고전은 서사시다』, 『잔혹한 책 읽기』, 『신화와 영화』, 『신화의 세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아르고 호 이야기』, 『아폴로도로스 신화집』, 『오이디푸스 왕』,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들어가며
첫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
두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세번째 작품_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
네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다섯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
여섯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일곱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여덟번째 작품_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아홉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열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
열한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
열두번째 작품_ 에우리피데스의 「알케스티스」
글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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