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국사 최고의 맞수들이 펼치는 팽팽한 설전舌戰!
『역사가 말하게 하라』에는 총 22쌍의 맞수들이 등장한다. 계백과 김유신, 정도전과 이방원,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같은 대표적 라이벌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낙랑국의 왕조와 왕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6·25전쟁의 미·중 양진영 군지휘관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등 고조선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맞수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저자 복거일이 마련한 토론의 장에 한데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입담을 과시하며 팽팽한 설전을 벌인다. 개인의 생사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각자가 대변하는 세력의 역사적 배경과 당위를 생생히 묘사한다.
가족의 목을 베고 황산벌 전투에 임한 계백 장군은 “어차피 백제군이 패배해서 나라가 망할 것을 확신했다면, 싸우는 대신 일찍 항복하고 협상해 많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 낫지 않았겠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만일 의자왕이 친정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인정하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자신의 상황을 설파하고(제4장 〈계백과 김유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나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를 지적하면서 “나라가 위급한 상황인데, 임금은 겨우 노래책 만드는 일에 간여하고 온 각간이 거기에 매달렸다”며 기병의 배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제6장 〈왕건과 견훤〉).
한국사를 다루지만 때로는 적군 측 인물이 등장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평가하기도 한다. 예컨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던 거란의 장군 소손녕은 “사절을 해치는 행위는 인류 문명의 근본 질서를 해치는 일이며, 예물로 바친 짐승들을 굶겨 죽인 일은 비판할 가치도 없는 짓"이라며 고려의 외교적 대응이 형편없이 서툴렀음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제7장 〈소손녕과 서희〉). 그런가하면 최충헌의 사노(私奴)로 노비해방을 위해 난을 도모했던 만적은 “동양은 서양보다 노예제도가 훨씬 엄격했지만, 그래도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느슨했다”며 유독 노예계급의 비율이 높고 국가에서 나서서 속량을 억제하고 주기적으로 도망친 노예들을 수색했던 연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제9장 〈최충헌과 만적〉).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왜적을 상대로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이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 해군의 상황과 조정의 상황, 전함을 타본 적도 없는 책상물림 문관들의 안목에 대한 불신과 섭섭함의 토로 또한 흥미롭다(제16장 〈이순신과 와키사카 야스하루〉).
때로는 협력자, 때로는 라이벌 관계였던 인물들이 늘 격론을 벌이며 자신이 대변한 세력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복거일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은원(恩怨)의 감정이 씻긴 이들이 객관적으로 과거를 성찰하게 하며, 일종의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예컨대 세종과의 대화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반대했던 학자 최만리는 “얼마 전 ‘중요한 것은 언어지 특정 언어가 아니다’라는 글을 읽고 아프게 성찰했다”며 자신의 생각이 얕고 짧았음을 부끄러워한다. 군데군데 유머 감각이 발휘되기도 한다. 숙종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꼭 해보고 싶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며 여러 가지를 나열하다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배필로 삼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공통된 합의에 도달하는 장면은 딱딱하기만 한 역사의 나열 대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저자의 유머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틀렸다!
이렇듯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다양한 관점과 인물들을 통해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리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관점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반발이다. 복거일은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조하기 위해 왜곡해왔던 역사를 바로잡고 과거와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며, 논쟁거리들을 제공한다.
먼저 이 책은 단군왕검으로 시작되는 역사의 연대기와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문제들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시작하며(제1장 〈기준과 위만〉), 3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 정권으로 융성했음에도 기존의 교과서가 간과 혹은 축소했던 낙랑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조선이 망한 지 200년 만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본격적 고대 국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낙랑이 발전된 중국 문명의 도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삼국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제2장 〈왕조와 왕준〉).
저자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오래 존속했던 부자연스럽고 잔인한 노예 제도 또한 강하게 비판한다.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유례없이 높은 노예계급의 비율은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폐쇄적이고 추출적인 사회제도의 핵심이며, 그러한 제도가 유지된 배경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저자는 만적의 입을 빌려 통찰한다(제9장 〈최충헌과 만적〉).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기생들이 비참한 성(性)노예에 불과했음에도 양반 흉내를 내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연애시만을 쓴 점을 지적하며, “글을 배웠지만, 세상을 옳게 바라보는 법은 끝내 깨우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산해와 송강 정철은 과거제도와 붕당의 문제점을 심도 깊게 파헤친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추출적 특질을 짙게 띠었기에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이들은 과거 공부만 하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아 수많은 ‘과거 폐인’들이 양산되어 사회적 낭비가 심했고, 그렇게 급제한 이들 또한 특정 이념이 아닌 이해관계로 서로 뭉쳤다는 지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부분이다(제 15장 〈이산해와 정철〉).
또한 저자는 식민통치 부분에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전작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서도 당시의 인구 추세와 실제 생활을 근거로 한 ‘계량적 연구 방법론’으로 경직된 역사관의 민족주의를 정면 비판했던 저자는 이번 『역사가 말하게 하라』에서도 과감한 ‘개념적 돌파’를 시도한다. 지형학적 한계로 건국 이후 주변 강대국에게 휘둘려온 우리 역사에서도 특히 분단 상황인 지금,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아군과 적군을 파악해 응당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비용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일본의 잔혹한 민족성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도, 6·25전쟁 때 극명히 드러났듯 일본이 대한민국의 전략적 후방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제 22장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이 책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올 부분은 통상 애국심과 정의에 불탄, ‘항쟁 영웅들의 집단’으로 알려진 삼별초의 본질이 실은 ‘중앙의 권신을 호위하는 사적 조직’에 불과하다며 기존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시각일 것이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고려의 장군 김방경은 “강화의 삼별초는 항몽을 한 적이 없으며 싸움터에서 몽골군과 싸운 적이 없다”며 삼별초가 권신들의 부당한 권력을 지키기만 했지 실제 몽골군과 맞선 적이 없음을 꼬집는다. 또한 삼별초의 저항을 이끌다 자결한 김통정의 입을 빌어 “‘낭만적 애국심’은 자연스러우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제10장 〈김방경과 김통정〉)은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통찰하고, 현대와 미래를 진단하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의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현명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일민족의 환상에서 벗어난 유연한 사고와 개방적 역사관, 무엇보다 민족적 자긍심을 위해 훼손되고 왜곡되어 온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필요하다.
저자 복거일이 당대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대담을 꾸미며 목표한 바는 분단, 분열의 시대에 통합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시대정신’이라는 화두를 제시하는 일이었다. 저자는 거듭 “괴롭더라도 뼈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권력을 쥔 지배계급은 언제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얽혀있기에, 세종대왕과 같은 드물게 뛰어난 지도자가 아닌 이상 합리적인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고해진 기존의 지식체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시대정신을 읽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이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존의 혈연 위주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경계하고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이며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하려는 포용적 태도이다. 엄밀한 역사 인식과 비판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답을 찾아야 한다. 특히 남북한이 단절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 책은 통합을 모색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화두를 제시한다. 저자는 위에서 소개했듯 흥미로운 질문과 관점들을 제시하면서도 특정 방향으로 귀결되는 ‘정답’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대신 각기 다른 입장과 상황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기존의 역사가 놓쳐온 지점들을 되짚고자 했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다루지만, 21세기 한반도의 현실 정치로 이어져 진보, 보수진영을 떠나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역사관과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 작가 소개
저 : 복거일
BOK,KOH-ILL,卜鉅一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작가이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한 작가이다. 작가는 문학 창작 활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짚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여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불리면서 사회평론가로도 활동해 왔으며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하기도 했다.
복거일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실패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식민지 서울을 살아가는 반도인의 1년을 쫓은 작품인 『비명을 찾아서』로 1987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2002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SF 장편소설 『목성잠언집』으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다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전통 경제이론에 정통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전파에 앞장 서는 보수내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다. 1998년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영어 공용화'' 제안으로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원화 대신 달러를 통화로 채택하자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탈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오장원(五丈原)의 가을』,『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장편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캠프 세네카의 기지촌』,『목성잠언집(木星箴言集)』,『그라운드 제로』, 문학평론집『세계환상소설 사전』, 사회평론집『현실과 지향』,『진단과 처방』,『소수를 위한 변명』,『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동화를 위한 계산』,『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주의의 시련』, 과학평론집『쓸모 없는 지식을 찾아서』, 산문집『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죽음 앞에서』,『현명하게 세속적인 삶』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역사가 말하게 하라』가 있다.
▣ 주요 목차
서장 역사의 시작
제1장 기준과 위만
제2장 왕조와 왕준
제3장 당 태종과 연개소문
제4장 계백과 김유신
제5장 장보고와 문성왕
제6장 왕건과 견훤
제7장 소손녕과 서희
제8장 묘청과 김부식
제9장 최충헌과 만적
제10장 김방경과 김통정
제11장 최영과 이성계
제12장 정도전과 이방원
제13장 세종과 최만리
제14장 세조와 김종서
제15장 이산해와 정철
제16장 이순신과 와키사카 야스하루
제17장 김상헌과 최명길
제18장 인현왕후와 장희빈
제19장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제20장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제21장 존 하지와 이반 치스치아코프
제22장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저자 후기
한국사 최고의 맞수들이 펼치는 팽팽한 설전舌戰!
『역사가 말하게 하라』에는 총 22쌍의 맞수들이 등장한다. 계백과 김유신, 정도전과 이방원,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같은 대표적 라이벌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낙랑국의 왕조와 왕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6·25전쟁의 미·중 양진영 군지휘관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등 고조선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쟁쟁한 맞수들이 총출동한 셈이다.
저자 복거일이 마련한 토론의 장에 한데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입담을 과시하며 팽팽한 설전을 벌인다. 개인의 생사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걸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각자가 대변하는 세력의 역사적 배경과 당위를 생생히 묘사한다.
가족의 목을 베고 황산벌 전투에 임한 계백 장군은 “어차피 백제군이 패배해서 나라가 망할 것을 확신했다면, 싸우는 대신 일찍 항복하고 협상해 많은 생명을 살리는 길이 낫지 않았겠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만일 의자왕이 친정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인정하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자신의 상황을 설파하고(제4장 〈계백과 김유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나친 신라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를 지적하면서 “나라가 위급한 상황인데, 임금은 겨우 노래책 만드는 일에 간여하고 온 각간이 거기에 매달렸다”며 기병의 배경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제6장 〈왕건과 견훤〉).
한국사를 다루지만 때로는 적군 측 인물이 등장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평가하기도 한다. 예컨대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던 거란의 장군 소손녕은 “사절을 해치는 행위는 인류 문명의 근본 질서를 해치는 일이며, 예물로 바친 짐승들을 굶겨 죽인 일은 비판할 가치도 없는 짓"이라며 고려의 외교적 대응이 형편없이 서툴렀음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제7장 〈소손녕과 서희〉). 그런가하면 최충헌의 사노(私奴)로 노비해방을 위해 난을 도모했던 만적은 “동양은 서양보다 노예제도가 훨씬 엄격했지만, 그래도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느슨했다”며 유독 노예계급의 비율이 높고 국가에서 나서서 속량을 억제하고 주기적으로 도망친 노예들을 수색했던 연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제9장 〈최충헌과 만적〉).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왜적을 상대로 기적적인 승리를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이 생생하게 묘사한 당시 해군의 상황과 조정의 상황, 전함을 타본 적도 없는 책상물림 문관들의 안목에 대한 불신과 섭섭함의 토로 또한 흥미롭다(제16장 〈이순신과 와키사카 야스하루〉).
때로는 협력자, 때로는 라이벌 관계였던 인물들이 늘 격론을 벌이며 자신이 대변한 세력의 입장만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복거일은 오랜 시간이 지나 은원(恩怨)의 감정이 씻긴 이들이 객관적으로 과거를 성찰하게 하며, 일종의 역사적 화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예컨대 세종과의 대화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반대했던 학자 최만리는 “얼마 전 ‘중요한 것은 언어지 특정 언어가 아니다’라는 글을 읽고 아프게 성찰했다”며 자신의 생각이 얕고 짧았음을 부끄러워한다. 군데군데 유머 감각이 발휘되기도 한다. 숙종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던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지금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꼭 해보고 싶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해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며 여러 가지를 나열하다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배필로 삼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공통된 합의에 도달하는 장면은 딱딱하기만 한 역사의 나열 대신, 살아있는 듯한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저자의 유머를 생생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틀렸다!
이렇듯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다양한 관점과 인물들을 통해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입체적이고 실감나게 그리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관점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반발이다. 복거일은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단일민족의 신화를 강조하기 위해 왜곡해왔던 역사를 바로잡고 과거와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며, 논쟁거리들을 제공한다.
먼저 이 책은 단군왕검으로 시작되는 역사의 연대기와 장소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문제들이 많음을 지적하면서 시작하며(제1장 〈기준과 위만〉), 3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 정권으로 융성했음에도 기존의 교과서가 간과 혹은 축소했던 낙랑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조선이 망한 지 200년 만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본격적 고대 국가들이 나타나는데, 이는 낙랑이 발전된 중국 문명의 도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삼국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제2장 〈왕조와 왕준〉).
저자는 유독 우리나라에서 오래 존속했던 부자연스럽고 잔인한 노예 제도 또한 강하게 비판한다.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유례없이 높은 노예계급의 비율은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폐쇄적이고 추출적인 사회제도의 핵심이며, 그러한 제도가 유지된 배경에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다고 저자는 만적의 입을 빌려 통찰한다(제9장 〈최충헌과 만적〉). 같은 맥락에서 수많은 기생들이 비참한 성(性)노예에 불과했음에도 양반 흉내를 내며 음풍농월(吟風弄月)하고 연애시만을 쓴 점을 지적하며, “글을 배웠지만, 세상을 옳게 바라보는 법은 끝내 깨우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이산해와 송강 정철은 과거제도와 붕당의 문제점을 심도 깊게 파헤친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추출적 특질을 짙게 띠었기에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이들은 과거 공부만 하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아 수많은 ‘과거 폐인’들이 양산되어 사회적 낭비가 심했고, 그렇게 급제한 이들 또한 특정 이념이 아닌 이해관계로 서로 뭉쳤다는 지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한 부분이다(제 15장 〈이산해와 정철〉).
또한 저자는 식민통치 부분에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전작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서도 당시의 인구 추세와 실제 생활을 근거로 한 ‘계량적 연구 방법론’으로 경직된 역사관의 민족주의를 정면 비판했던 저자는 이번 『역사가 말하게 하라』에서도 과감한 ‘개념적 돌파’를 시도한다. 지형학적 한계로 건국 이후 주변 강대국에게 휘둘려온 우리 역사에서도 특히 분단 상황인 지금,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아군과 적군을 파악해 응당 지불해야 할 최소한의 비용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저자는 일본의 잔혹한 민족성의 근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하면서도, 6·25전쟁 때 극명히 드러났듯 일본이 대한민국의 전략적 후방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제 22장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이 책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올 부분은 통상 애국심과 정의에 불탄, ‘항쟁 영웅들의 집단’으로 알려진 삼별초의 본질이 실은 ‘중앙의 권신을 호위하는 사적 조직’에 불과하다며 기존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시각일 것이다.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고려의 장군 김방경은 “강화의 삼별초는 항몽을 한 적이 없으며 싸움터에서 몽골군과 싸운 적이 없다”며 삼별초가 권신들의 부당한 권력을 지키기만 했지 실제 몽골군과 맞선 적이 없음을 꼬집는다. 또한 삼별초의 저항을 이끌다 자결한 김통정의 입을 빌어 “‘낭만적 애국심’은 자연스러우나, 자연스러운 것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제10장 〈김방경과 김통정〉)은 독자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해 과거를 통찰하고, 현대와 미래를 진단하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의 등장인물들은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현명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일민족의 환상에서 벗어난 유연한 사고와 개방적 역사관, 무엇보다 민족적 자긍심을 위해 훼손되고 왜곡되어 온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 필요하다.
저자 복거일이 당대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대담을 꾸미며 목표한 바는 분단, 분열의 시대에 통합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시대정신’이라는 화두를 제시하는 일이었다. 저자는 거듭 “괴롭더라도 뼈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반성해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권력을 쥔 지배계급은 언제나 이해관계에 직접적으로 얽혀있기에, 세종대왕과 같은 드물게 뛰어난 지도자가 아닌 이상 합리적인 정책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공고해진 기존의 지식체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시대정신을 읽는 것은 지식인의 의무이다.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존의 혈연 위주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경계하고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이며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하려는 포용적 태도이다. 엄밀한 역사 인식과 비판을 통해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해답을 찾아야 한다. 특히 남북한이 단절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이 책은 통합을 모색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화두를 제시한다. 저자는 위에서 소개했듯 흥미로운 질문과 관점들을 제시하면서도 특정 방향으로 귀결되는 ‘정답’을 독자에게 강요하는 대신 각기 다른 입장과 상황을 대변하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기존의 역사가 놓쳐온 지점들을 되짚고자 했다. 『역사가 말하게 하라』는 대한민국의 지난 역사를 다루지만, 21세기 한반도의 현실 정치로 이어져 진보, 보수진영을 떠나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리적 역사관과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는 토론의 장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 작가 소개
저 : 복거일
BOK,KOH-ILL,卜鉅一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한 작가 복거일은 책이 좋아 읽다보니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날, 넉넉한 보수를 주던 은행을 그만둔 이유도 오롯이 책 읽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작가이다.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대체 역사 소설’이라는 장르를 만들기도 한 작가이다. 작가는 문학 창작 활동뿐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짚어야 할 문제들에 주목하여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불리면서 사회평론가로도 활동해 왔으며 그의 여러 저서를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하기도 했다.
복거일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실패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식민지 서울을 살아가는 반도인의 1년을 쫓은 작품인 『비명을 찾아서』로 1987년 데뷔하였다. 이 소설은 2002년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또한 그는 SF 장편소설 『목성잠언집』으로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다시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전통 경제이론에 정통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전파에 앞장 서는 보수내 지식인으로 활동해 왔다. 1998년 한국어 대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는 ''영어 공용화'' 제안으로 논란이 대상이 되었고 원화 대신 달러를 통화로 채택하자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탈민족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오장원(五丈原)의 가을』,『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장편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역사 속의 나그네』,『파란 달 아래』,『캠프 세네카의 기지촌』,『목성잠언집(木星箴言集)』,『그라운드 제로』, 문학평론집『세계환상소설 사전』, 사회평론집『현실과 지향』,『진단과 처방』,『소수를 위한 변명』,『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동화를 위한 계산』,『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 『자유주의의 시련』, 과학평론집『쓸모 없는 지식을 찾아서』, 산문집『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죽음 앞에서』,『현명하게 세속적인 삶』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역사가 말하게 하라』가 있다.
▣ 주요 목차
서장 역사의 시작
제1장 기준과 위만
제2장 왕조와 왕준
제3장 당 태종과 연개소문
제4장 계백과 김유신
제5장 장보고와 문성왕
제6장 왕건과 견훤
제7장 소손녕과 서희
제8장 묘청과 김부식
제9장 최충헌과 만적
제10장 김방경과 김통정
제11장 최영과 이성계
제12장 정도전과 이방원
제13장 세종과 최만리
제14장 세조와 김종서
제15장 이산해와 정철
제16장 이순신과 와키사카 야스하루
제17장 김상헌과 최명길
제18장 인현왕후와 장희빈
제19장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제20장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제21장 존 하지와 이반 치스치아코프
제22장 매슈 리지웨이와 펑더화이
저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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