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우리는 백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번성했다. 건국 초기에는 한강의 중?하류를 차지한 작은 나라였지만, 점차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며 성장해나갔다.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첫 도읍으로 삼은 백제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두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 웅진과 사비시대를 거치면서 바다 건너 여러 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발달시키고 독창성과 국제성을 지닌 우수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이어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에도 백제는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국가의 운명을 다했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사라졌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아름답고 풍부한 문화유산은 백제의 고토古土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약 700년 동안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중앙부에 그들의 깊은 흔적을 남긴 고대왕국 백제. 그러나 고대 삼국 가운데 백제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한참 동안 뒤처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71년 공주에서 기적처럼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20여 년 후인 1993년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는 등 두 번의 대 사건이 벌어지면서, 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백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이후 백제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아 잇따라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에 대한 무수한 질문과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전히 백제의 옛 땅에서는 발굴을 통한 자료조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백제 역사의 기록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700년 고대국가의 신비를 풀어가는 흥미진진한 시간여행
소설처럼 읽고, 여행처럼 즐기는 백제사
이 책은 백제의 건국에서 발전, 멸망과 부흥운동, 백제인의 생활 전반과 그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백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다룬 ‘한 권으로 읽는 백제사’다. 이 책을 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백제의 옛 땅에 기반을 두고 그동안 백제 문화유산의 현장을 찾아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연구를 축적해 왔다. 한국 고대사는 물론 동아시아사를 종합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 하에서,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이 책 『한권 백제』에 오롯이 담아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추진단은 현재 공주와 부여를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오는 9월 28일에 열리는 백제문화제는 2014년 60주년을 맞이한다. 백제 역사의 재고再考와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이러한 시점에, 보다 많은 독자들이 백제라는 나라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책을 기획, 출간하게 되었다.
백제 역사상 가장 핫한 인물들, 무령왕 , 무왕 , 의자왕
* 백제 부흥의 주역, 무령왕 -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으로,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백제의 부흥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의 능은 현재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왕릉 가운데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삼국사기』에 무령왕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기 높은 왕이었고, 훌륭한 체격에 절세미남이었으며 인품 또한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령왕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그는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구의 아들이고, 왜 40이 되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까? 무령왕릉 발굴 당시 입구에는 두 장의 지석誌石이 깔려 있었는데, 이 중 왕의 지석에 쓰인 기록에 의하면 그는 40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백제를 통치했고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그가 중년이 될 때까지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살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현재 학계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동생이자 일본에 보내졌던 곤지의 아들이면서 동성왕의 이복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무령왕의 탄생과 업적, 무령왕릉의 발견과 관련해서는 47~69쪽 참조).
* 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 - 무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르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어머니가 과부이고 지룡池龍과의 사이에서 그를 낳았으며 어려서 마를 캐다 팔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했다 한다. 또한 잘 알려진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으나,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작업을 통해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무왕의 왕후가 당시 좌평이었던 사탁적덕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비시기의 대찰인 왕흥사나 미륵사의 창건뿐 아니라, 도교의 원지로 알려진 부여 궁남지를 조성하는 등 무왕 대의 백제는 사비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왕에 관한 기록과 전설은 다른 왕들에 비해 더 풍부하고 흥미롭다. 이러한 무왕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이견이 많은데, 필자는 무왕이 위덕왕(제27대)의 손자이며 일찍 죽은 위덕왕의 망왕자亡王子가 죽기 전에 얻은 아들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무왕의 출생에 대한 여러 설 중 하나이지만,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무왕이 위덕왕의 죽은 아들인 망왕자의 아들이라는 논리를 이끌어내는 이야기는 98~107쪽 참조).
* 승자의 역사에서 왜곡된 패자의 기록, 의자왕 -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나다가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항복해버린 무능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구당서』의 기록에 의자왕은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이란 소리를 들었고, 용맹스럽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고 전한다. ‘의자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마도 ‘낙화암과 삼천궁녀’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점을 볼 때, 사비시대 백제의 인구 대비 3000궁녀란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를 기록한 어느 문헌에도 ‘삼천궁녀’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으니, 이는 아마도 15세기 이후 중국 문학작품에 ‘많다’는 의미의 극적 표현을 위해 ‘삼천’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중국의 이러한 문학적 표현 양식을 차용하여, 낙화암을 읊은 작품에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낙화암’이라는 명칭도 고려 말기의 문인 이곡李穀이 부여를 회고하며 쓴 시에 나타난다. 즉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사실이나 문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멸망기 왕이었던 의자왕의 호색군자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승자의 역사에서 왜곡된 패자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의자왕 대 백제의 정세와 멸망의 과정,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는 112~137쪽 참조).
백제를 여행하기 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역사의 현장을 따라 떠나는, 백제 역사 문화 기행
* 한성기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풍납토성 - 서울은 한성시대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곳이며, 기록에는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고 되어 있다. 오랜 시간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학계의 논란이 되어왔는데 천안 위례산성, 하남시 춘궁동 일대,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이 네 곳에 대한 수차례의 발굴이 추진되었으나 1990년 중반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남위례성으로 확정지을 만한 확실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96년 송파구 풍납동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풍납토성 일대의 땅이 마구 파헤쳐졌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1999년과 2000년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엄청난 양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규모나 구조가 왕성에 버금가는 구조임이 드러났다. 2004-2006년에 걸친 조사에서는 특히 당시까지 그 예가 많지 않았던 백제 한성기 유물과 유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이 시기에도 기와지붕에 초석을 사용한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성기 백제의 왕성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풍납토성은 성의 실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건물과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으며, 일부만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풍납토성에 관한 이야기는 33~35쪽 참조).
* 서울 몽촌토성과 방이동?석촌동의 한성백제 고분군 -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계기로 보다 일찌감치 발굴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이나 시설에 있어 현재까지는 최고 지배세력의 근거지로 보기에는 미약하다고 판단되나, 몽촌토성 역시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중심 성곽으로 중요하다. 공원 안에 있는 만큼 목책의 일부와 초기 움집터 등이 보존되어 있어 그나마 안도의 마음을 갖게 한다. 그 외 서울에는 한성백제의 유적으로 방이동과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의 고분군이 있다. 석촌동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흙무덤 23기와 돌무덤 66기를 합하여 90여 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이유로, 현재는 형태가 온전한 4기를 포함한 8기만이 남아 있다. 돌로 단을 쌓아 조성한 이러한 형태는 남한 지역에서는 이곳 석촌동 고분군이 유일하며,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양식의 무덤으로, 방이동 등의 돌방무덤과 비교할 때 규모가 거대해 이곳이 고구려계 백제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보통 백제의 무덤은 구릉을 파서 그 속에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잘 알려져 있다. 방이동에는 강남의 난개발에 겨우 살아남은 8기의 고분이 남아 있는데, 그나마 도굴과 함께 덮여 있던 흙이 많이 사라진 채 보존되어 있다(백제의 고분에 관한 이야기는 164~175쪽 참조).
* 무령왕릉의 찬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 곳, 공주 -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던 기간은 63년으로, 짧지만 찬란했던 시기로 남아 있다. 가는 곳마다 푸른 물결을 마주하게 되는 금강을 중심으로 백제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공산성은 북쪽에 금강을 두고 공주 시가를 외호하는 위치에 있다. 백제 당시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다. 공산성의 서북쪽으로는 무령왕릉이 속해 있는 송산리고분군이 있다. 웅진시대 63년 동안 재위했던 다섯 왕과 관련된 능으로 추측되나, 이 중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고 도굴의 손길을 피한 것은 무령왕릉 단 한 기뿐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4,600여 점의 찬란한 유물들 중 주요 유물들은 바로 가까이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무덤 내부의 구조 등이 재연되어 있는 기념관도 있어 1,500년 전 백제 역사의 현장을 거닐고, 그 안에 들어가 보고, 동시에 실제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더 서쪽으로 가면 웅진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곰나루가 있다. 여기에는 곰과 사냥꾼의 애달픈 이야기인 곰나루 전설이 전한다. 이외에 공주 남쪽에 위치한 한 절터에서는 발굴을 통해 ‘大通寺’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그곳이 『삼국유사』에 성왕 7년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공주 최대의 절 대통사지임을 알게 되었다(무령왕릉과 그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52~61쪽, 곰나루전설 등 백제에 전하는 옛이야기는 190~198쪽 참조).
*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 부여의 진산 부소산은 북쪽으로 백마강이 흐르는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 산에는 사비의 왕궁과 시가를 수호하던 부소산성이 있다. 부소산성 안에는 백제 말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가 있으며, 부소산의 북서쪽으로 삼천궁녀의 전설이 전하는 낙화암이 있다. 부여 근방에는 백제 고분 수백 기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능산리에 위치한 고분군은 왕성과 가장 가까우면서 규모 면에서도 큰 무덤들이 모여 있다. 예부터 왕릉이라 전해지는 이 무덤들은 발견 당시 모두 도굴되어 있어 무덤 주인을 알 수 없기에 왕릉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분군 중 동하총에는 사신도와 연꽃, 구름무늬 벽화가 남아 있다. 사비도성 안에는 북쪽의 부소산폐사지-중앙의 정림사지-남쪽의 군수리절터를 축으로, 동서 방향으로 수많은 절이 있었다. 부소산폐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발굴조사된 건물지로 보아 그 웅장했던 위용을 떠올릴 수 있다. 사비도성 안팎에서는 3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되어, 백제가 “절과 탑이 매우 많은” 나라였음을 증명해준다. 군수리절터와 매우 가깝게 도성 남쪽에 위치해 있는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 무왕 조에 궁 남쪽에 못을 파서 신선이 노닐었다는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했다는 글이 있으니 바로 이 궁남지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무왕이 뱃놀이도 즐겼다는 이곳이 현재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무왕의 전설이 서린 이곳에 7월 중순 연못 가득 연꽃이 피면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낙화암과 백제의 절터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본문 135~137쪽, 199~210쪽 참조).
* 무왕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는 익산 - 무왕이 어려서 홀어머니와 살면서 마를 팔아 생활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그리고 노래를 퍼뜨려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서동요와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로운 전설로 전하지만 그것이 모두 사실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왕이 성장했던 익산 지역에는 지금도 무왕 부부의 능으로 전하는 쌍릉이 남아 있고, 무왕 부부가 발원하여 지은 미륵사지와 현재 해체복원작업 중인 미륵사지 서탑이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조사 과정에서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리를 봉안한 기록인 사리봉영기에는 639년 백제 무왕의 왕후인 사탁적덕의 딸이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륵사지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마한의 도읍지였다거나 무왕의 별도別都였다거나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라는 등의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대체로 백제 후기부터 통일신라 후기에 걸친 유적지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다. 매년 5월 익산에서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간직한 서동요의 고장임을 강조한 ‘서동축제’가 열리고 있다(익산과 무왕의 이야기는 94~109쪽 참조).
백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엮은, 한 권으로 읽는 백제사
* 1부 한성시대 - 백제는 누가, 언제 세웠는가?|백제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백제의 성립과 발전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나?
『삼국사기』에 실린 건국설화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전신으로 하여 주변 마한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최대 세력이었던 목지국까지 통합하면서 백제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이후 가야세력을 영향권 내에 넣어 영산강유역을 확보한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된 고구려마저 격퇴하고 북쪽 경계선을 확장하게 된다. 더불어 통지제도를 완성해나가면서 4세기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영역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백제는 한족과 예족, 맥족이라 불리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맥족과 예족은 지배층인 부여계이고 한족은 토착세력이자 피지배층으로 이들 간에는 사용 언어도 달랐다. 이들은 백제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백제인’으로 융합되어갔다.
* 2부 웅진시대 - 문주왕은 왜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나?|백제 부흥의 주역, 무령왕은 누구인가?|세기의 대발견, 무령왕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무령왕릉 속에는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을까?|백제는 고대 한류의 중심이었나?|《양직공도》 속 백제인은 어떤 모습인가?
5세기 후반, 백제의 수도 한성은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다. 초토화된 한성을 뒤로하고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장차 다시 백제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곳으로 수도 이전을 감행한다. 사방이 천연의 요새이자 금강 이남으로의 지배력 확산 및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곳으로 웅진(공주)이 선택되었다. 제22대 문주왕 대의 일이다.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에서 다시 사비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5대 왕에 걸친 63년의 웅진도읍기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백제사 여러 측면에서 큰 변혁을 맞게 된다. 동성왕 대를 거쳐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국제교류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무령왕은 대내적으로 개혁의 군주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문화교류와 외교에 있어 큰 성과를 이뤘다. 특히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어져 1,500년이란 긴 세월을 견뎠으며, 이 세기의 대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혁신을 가져왔다.
* 3부 사비시대 -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나제관계의 도화선, 관산성전투는 어떤 전쟁이었나?|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은 누구인가?|무왕 부부는 왜 익산에 ‘미륵사’를 지었을까?
고구려에 쫓겨 긴급하게 천도지로 선택한 웅진은 군사지리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적합했을지 모르나, 도성으로서의 기능과 왕도의 경제적 기반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더불어 전왕 대의 계속된 염원이었던 한성 회복의 새로운 발판을 다지기 위해, 백제는 성왕 대에 와서 다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사비 천도 후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칭하고 각종 제도의 정비에 진력하면서 동시에 신라와 연합하여 남진하려는 고구려에 맞선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 역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이 신장되는 시기를 맞아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에 맞선 나제동맹은 결국 신라의 배반으로 깨지고 만다.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는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고 이 전쟁에서 백제는 성왕과 군사 3천여 명이 전사하며 신라에 대패하고 가야 지역까지 신라의 영향 아래로 넘어가게 된다. 이 전쟁이 관산성전투이며, 이로써 한반도에는 진정한 3국이 정립되는 형세를 맞는다.
* 4부 멸망과 부흥운동 - 우리가 갖고 있던 의자왕에 대한 오해와 진실은?|의자왕은 정말 삼천궁녀를 두었을까?|백제의 운명을 가른 황산벌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멸망 후 백제군의 치열한 부흥운동, 그 시작과 끝은?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성공적인 대내정치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의자왕 대의 백제는 주변국으로부터 “큰 나라이자 강한 나라”로 불렸다. 이러한 의자왕 대에 백제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얼까?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 신라, 당나라 등 주변국과의 대외정책 실패를 그 요인으로 든다. 특히 삼국 관계에 당나라의 개입이 심해지고 당이 국제질서의 중심의 서게 되는 7세기 중반, 신라와 당이 손을 잡음으로써 백제는 쇠락의 길로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659년에 이르러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660년 봄 당의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러 내려온다. 충남 논산 황산벌에서 벌어진 운명의 전투에서 결국 백제는 무너졌고, 이해 8월 의자왕은 신라의 왕과 소정방, 김유신 등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굴욕적인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백제는 멸망 후 3년간 다시 일어서려는 맹렬한 부흥운동을 펼치게 되니, 이는 한반도 역사상 멸망 왕조의 유일한 부흥운동으로 기록된다.
* 5부 생활 - 백제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백제인은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었을까?|백제인은 죽은 후 어떤 무덤을 썼을까?|‘입 벌린 호랑이’처럼 생긴 토기 호자의 쓰임새는? 백제는 삼국 중 평야가 가장 발달한 곳에 위치했다. 건국 초기부터 주산업은 농업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백제 영역의 발굴 유적에서는 논과 밭 유적이 확인된다. 김제 벽골제나 제천 의림지 등은 마한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논 경작을 위해 필수적인 물 공급을 위한 시설이다. 백제의 수공업은 철의 생산 및 수요의 증대와 더불어 보다 체계적인 단계로 발전했고, 5-6세기의 기록을 통해 삼베, 비단 등의 직물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특히 금과 은 등을 소재로 한 금속공예가 발달하였는데, 왕과 세력가의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과 능산리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가 대표적이다. 백제의 옛 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마을과 주거가 발견되었는데 기둥이나 목책의 자리, 화덕과 부뚜막, 출입시설의 흔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을 가늠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공복제도에 대한 자료,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도》,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과 금동신발 등에서 백제인들의 옷차림새를 알 수 있고, 유적지에서 발견된 곡물과 과일의 씨앗, 육류와 어패류의 뼈와 껍질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와 매우 유사한 식재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6부 문화와 예술 - 백제인의 종교와 사상,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나?|백제에 남아 있는 글과 노래, 이야기는?|백제는 왜 절과 탑의 나라로 불렸을까?|백제 금속공예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백제의 정신과 마음의 정수, 금동대향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백제는 384년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사비시대에 이르러서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불교를 깊이 신봉했다. 미륵을 통해 현세의 구원을 바라는 현실적 불교의 성격이 강했으며, 부여 지역에서는 백제시대의 수많은 절터가 조사되었고 중요한 불교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도교는 불교와 함께 백제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여러 기록의 내용과 함께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사신도, 외리절터에서 출토된 산수 경치의 산수문전, 능산리절터에서 수습된 금동대향로를 통해 백제인의 도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금동대향로는 무령왕릉 발굴 이래 백제 고고학사의 가장 빛나는 성과이다. 이를 통해 백제인들의 문화예술 수준뿐 아니라, 그들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밑으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과 용을, 위로는 태평성세를 예언하는 봉황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불교와 도교의 이상적인 세계를 배치함으로써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4년에 설립되었으며 충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조사?수집?연구하는 기관이다. 『백제문화사대계』를 비롯한 많은 역사서를 편찬하였고, 매장문화재의 조사?발굴은 물론 문화재 전시 및 정비?복원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 책 『한권 백제』의 집필에는 이훈(연구위원), 강종원(연구위원), 이상엽(책임연구원), 박재용(선임연구원), 이경복(선임연구원), 이창호(선임연구원), 이호경(선임연구원), 이현상(연구원), 신유진(연구원)이 참여하였다.
▣ 주요 목차
서문 이야기로 읽는 한 권의 백제사
1부 한성시대, 한강유역에 나라를 세우다
백제는 언제, 누가 세운 나라인가
백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나
◎ 한성백제의 도성, 풍납토성
2부 웅진시대, 백제의 번영과 무령왕
문주왕은 왜 웅진으로 천도했나
백제 부활의 신화, 무령왕
◎ 백제사 최고의 발견, 무령왕릉의 보물들
백제는 고대 한류의 중심이었나
◎ 백제 사신의 모습이 그려진 《양직공도》
3부 사비시대, 금동대향로의 꿈과 이상
또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백제와 신라 관계 악화의 도화선, 관산성전투
◎ 관산성전투와 옥천
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은 누구인가
◎ 무왕 부부의 염원이 담긴 왕실 발원 사찰, 미륵사
4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의자왕은 정말로 무능한 왕이었나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백제 부흥운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의자왕은 정말 삼천궁녀를 두었을까
5부 백제인의 생활
백제의 경제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백제의 마을과 주거는 어떤 모습이었나
백제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백제 사람들은 어떤 무덤에 묻혔을까
◎ ‘입 벌린 호랑이’처럼 생긴 토기 호자의 쓰임새
6부 백제의 문화와 예술
백제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은
백제의 글과 노래, 이야기
백제는 왜 절과 탑의 나라로 불렸을까
◎ 외리유적 출토 전돌의 여덟 가지 아름다움
백제의 금속공예, 왜 주목할까
◎ 백제의 얼굴, 백제의 미소
부록
백제 왕 계보
백제사 연표
도판목록
찾아보기
우리는 백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약 700년 동안 번성했다. 건국 초기에는 한강의 중?하류를 차지한 작은 나라였지만, 점차 주변 국가들을 병합하며 성장해나갔다. 한강유역에 위례성을 쌓고 첫 도읍으로 삼은 백제는 국가의 중흥을 위해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두 번이나 도읍을 옮겼다. 웅진과 사비시대를 거치면서 바다 건너 여러 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관계를 펼쳤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발달시키고 독창성과 국제성을 지닌 우수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도성이 함락되고, 이어 3년에 걸친 치열한 부흥운동에도 백제는 끝내 국권을 회복하지 못한 채 국가의 운명을 다했다. 비록 백제라는 국가는 사라졌지만 백제인들이 창조한 아름답고 풍부한 문화유산은 백제의 고토古土에 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고 있다.
약 700년 동안 우리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서울을 비롯한 한반도 중앙부에 그들의 깊은 흔적을 남긴 고대왕국 백제. 그러나 고대 삼국 가운데 백제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와 신라에 비해 한참 동안 뒤처져 있었다. 그러던 중 1971년 공주에서 기적처럼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20여 년 후인 1993년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는 등 두 번의 대 사건이 벌어지면서, 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백제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이후 백제사 연구는 새로운 전기를 맞아 잇따라 주목할 만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에 대한 무수한 질문과 궁금증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여전히 백제의 옛 땅에서는 발굴을 통한 자료조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백제 역사의 기록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700년 고대국가의 신비를 풀어가는 흥미진진한 시간여행
소설처럼 읽고, 여행처럼 즐기는 백제사
이 책은 백제의 건국에서 발전, 멸망과 부흥운동, 백제인의 생활 전반과 그들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백제 역사와 문화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다룬 ‘한 권으로 읽는 백제사’다. 이 책을 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백제의 옛 땅에 기반을 두고 그동안 백제 문화유산의 현장을 찾아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연구를 축적해 왔다. 한국 고대사는 물론 동아시아사를 종합적이고 다원적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 하에서,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를 종합하여 이 책 『한권 백제』에 오롯이 담아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추진단은 현재 공주와 부여를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노력 중이며, 오는 9월 28일에 열리는 백제문화제는 2014년 60주년을 맞이한다. 백제 역사의 재고再考와 역사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이러한 시점에, 보다 많은 독자들이 백제라는 나라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 책을 기획, 출간하게 되었다.
백제 역사상 가장 핫한 인물들, 무령왕 , 무왕 , 의자왕
* 백제 부흥의 주역, 무령왕 - 무령왕은 백제 제25대 왕으로, 백제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백제의 부흥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의 능은 현재까지 발견된 삼국시대의 왕릉 가운데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유일하다. 『삼국사기』에 무령왕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기 높은 왕이었고, 훌륭한 체격에 절세미남이었으며 인품 또한 뛰어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령왕에 대해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있다. 그는 어디서 태어났으며 누구의 아들이고, 왜 40이 되는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까? 무령왕릉 발굴 당시 입구에는 두 장의 지석誌石이 깔려 있었는데, 이 중 왕의 지석에 쓰인 기록에 의하면 그는 40살에 왕위에 올라 23년 동안 백제를 통치했고 62세로 생을 마감했다. 아직도 그가 중년이 될 때까지 무엇을 하며 어디에서 살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현재 학계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동생이자 일본에 보내졌던 곤지의 아들이면서 동성왕의 이복형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무령왕의 탄생과 업적, 무령왕릉의 발견과 관련해서는 47~69쪽 참조).
* 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 - 무왕의 출생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다르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어머니가 과부이고 지룡池龍과의 사이에서 그를 낳았으며 어려서 마를 캐다 팔아 사람들이 ‘서동’이라 했다 한다. 또한 잘 알려진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으나, 2009년 미륵사지 서탑 해체작업을 통해 발견된 사리장엄구에는 무왕의 왕후가 당시 좌평이었던 사탁적덕의 딸이라 기록되어 있다. 사비시기의 대찰인 왕흥사나 미륵사의 창건뿐 아니라, 도교의 원지로 알려진 부여 궁남지를 조성하는 등 무왕 대의 백제는 사비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왕에 관한 기록과 전설은 다른 왕들에 비해 더 풍부하고 흥미롭다. 이러한 무왕이 누구의 아들인지는 이견이 많은데, 필자는 무왕이 위덕왕(제27대)의 손자이며 일찍 죽은 위덕왕의 망왕자亡王子가 죽기 전에 얻은 아들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무왕의 출생에 대한 여러 설 중 하나이지만,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무왕이 위덕왕의 죽은 아들인 망왕자의 아들이라는 논리를 이끌어내는 이야기는 98~107쪽 참조).
* 승자의 역사에서 왜곡된 패자의 기록, 의자왕 -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향락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간신들에게 놀아나다가 나당연합군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항복해버린 무능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구당서』의 기록에 의자왕은 ‘해동증자’라 불리며 성군이란 소리를 들었고, 용맹스럽고 과단성이 있으며 성품이 고고했다고 전한다. ‘의자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마도 ‘낙화암과 삼천궁녀’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점을 볼 때, 사비시대 백제의 인구 대비 3000궁녀란 불가능하다. 또한 당시를 기록한 어느 문헌에도 ‘삼천궁녀’에 관한 언급은 찾을 수 없으니, 이는 아마도 15세기 이후 중국 문학작품에 ‘많다’는 의미의 극적 표현을 위해 ‘삼천’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중국의 이러한 문학적 표현 양식을 차용하여, 낙화암을 읊은 작품에 ‘삼천궁녀’라는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낙화암’이라는 명칭도 고려 말기의 문인 이곡李穀이 부여를 회고하며 쓴 시에 나타난다. 즉 의자왕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사실이나 문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멸망기 왕이었던 의자왕의 호색군자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승자의 역사에서 왜곡된 패자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의자왕 대 백제의 정세와 멸망의 과정,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대한 이야기는 112~137쪽 참조).
백제를 여행하기 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역사의 현장을 따라 떠나는, 백제 역사 문화 기행
* 한성기 백제의 왕성으로 추정되는 서울 풍납토성 - 서울은 한성시대의 수도가 위치해 있던 곳이며, 기록에는 백제가 하남위례성에 도읍하였다고 되어 있다. 오랜 시간 하남위례성의 위치는 학계의 논란이 되어왔는데 천안 위례산성, 하남시 춘궁동 일대, 서울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이 네 곳에 대한 수차례의 발굴이 추진되었으나 1990년 중반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남위례성으로 확정지을 만한 확실한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996년 송파구 풍납동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풍납토성 일대의 땅이 마구 파헤쳐졌는데 이를 계기로 이후 1999년과 2000년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엄청난 양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규모나 구조가 왕성에 버금가는 구조임이 드러났다. 2004-2006년에 걸친 조사에서는 특히 당시까지 그 예가 많지 않았던 백제 한성기 유물과 유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으며, 이 시기에도 기와지붕에 초석을 사용한 건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성기 백제의 왕성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풍납토성은 성의 실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건물과 아파트로 둘러싸여 있으며, 일부만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풍납토성에 관한 이야기는 33~35쪽 참조).
* 서울 몽촌토성과 방이동?석촌동의 한성백제 고분군 -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은 88올림픽을 계기로 보다 일찌감치 발굴조사되었다. 출토 유물이나 시설에 있어 현재까지는 최고 지배세력의 근거지로 보기에는 미약하다고 판단되나, 몽촌토성 역시 한성시대를 대표하는 중심 성곽으로 중요하다. 공원 안에 있는 만큼 목책의 일부와 초기 움집터 등이 보존되어 있어 그나마 안도의 마음을 갖게 한다. 그 외 서울에는 한성백제의 유적으로 방이동과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의 고분군이 있다. 석촌동 일대에는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흙무덤 23기와 돌무덤 66기를 합하여 90여 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안타까운 이유로, 현재는 형태가 온전한 4기를 포함한 8기만이 남아 있다. 돌로 단을 쌓아 조성한 이러한 형태는 남한 지역에서는 이곳 석촌동 고분군이 유일하며,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양식의 무덤으로, 방이동 등의 돌방무덤과 비교할 때 규모가 거대해 이곳이 고구려계 백제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보통 백제의 무덤은 구릉을 파서 그 속에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 잘 알려져 있다. 방이동에는 강남의 난개발에 겨우 살아남은 8기의 고분이 남아 있는데, 그나마 도굴과 함께 덮여 있던 흙이 많이 사라진 채 보존되어 있다(백제의 고분에 관한 이야기는 164~175쪽 참조).
* 무령왕릉의 찬란한 보물을 만날 수 있는 곳, 공주 -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던 기간은 63년으로, 짧지만 찬란했던 시기로 남아 있다. 가는 곳마다 푸른 물결을 마주하게 되는 금강을 중심으로 백제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공산성은 북쪽에 금강을 두고 공주 시가를 외호하는 위치에 있다. 백제 당시에는 흙으로 쌓은 성이었으리라 짐작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석축은 조선시대에 쌓은 것이다. 공산성의 서북쪽으로는 무령왕릉이 속해 있는 송산리고분군이 있다. 웅진시대 63년 동안 재위했던 다섯 왕과 관련된 능으로 추측되나, 이 중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고 도굴의 손길을 피한 것은 무령왕릉 단 한 기뿐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4,600여 점의 찬란한 유물들 중 주요 유물들은 바로 가까이에 위치한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실제 무덤 내부의 구조 등이 재연되어 있는 기념관도 있어 1,500년 전 백제 역사의 현장을 거닐고, 그 안에 들어가 보고, 동시에 실제 유물을 직접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 더 서쪽으로 가면 웅진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곰나루가 있다. 여기에는 곰과 사냥꾼의 애달픈 이야기인 곰나루 전설이 전한다. 이외에 공주 남쪽에 위치한 한 절터에서는 발굴을 통해 ‘大通寺’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그곳이 『삼국유사』에 성왕 7년에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공주 최대의 절 대통사지임을 알게 되었다(무령왕릉과 그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52~61쪽, 곰나루전설 등 백제에 전하는 옛이야기는 190~198쪽 참조).
*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 부여의 진산 부소산은 북쪽으로 백마강이 흐르는 나지막한 구릉으로, 이 산에는 사비의 왕궁과 시가를 수호하던 부소산성이 있다. 부소산성 안에는 백제 말의 충신이었던 성충,흥수,계백의 위패를 모신 삼충사가 있으며, 부소산의 북서쪽으로 삼천궁녀의 전설이 전하는 낙화암이 있다. 부여 근방에는 백제 고분 수백 기가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능산리에 위치한 고분군은 왕성과 가장 가까우면서 규모 면에서도 큰 무덤들이 모여 있다. 예부터 왕릉이라 전해지는 이 무덤들은 발견 당시 모두 도굴되어 있어 무덤 주인을 알 수 없기에 왕릉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분군 중 동하총에는 사신도와 연꽃, 구름무늬 벽화가 남아 있다. 사비도성 안에는 북쪽의 부소산폐사지-중앙의 정림사지-남쪽의 군수리절터를 축으로, 동서 방향으로 수많은 절이 있었다. 부소산폐사지에서 출토된 치미와 발굴조사된 건물지로 보아 그 웅장했던 위용을 떠올릴 수 있다. 사비도성 안팎에서는 30여 곳의 절터가 확인되어, 백제가 “절과 탑이 매우 많은” 나라였음을 증명해준다. 군수리절터와 매우 가깝게 도성 남쪽에 위치해 있는 궁남지는 우리나라 연못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공연못이다. 『삼국사기』 무왕 조에 궁 남쪽에 못을 파서 신선이 노닐었다는 방장선산方杖仙山을 모방했다는 글이 있으니 바로 이 궁남지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무왕이 뱃놀이도 즐겼다는 이곳이 현재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는지는 모르나, 무왕의 전설이 서린 이곳에 7월 중순 연못 가득 연꽃이 피면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낙화암과 백제의 절터에 대한 이야기는 각각 본문 135~137쪽, 199~210쪽 참조).
* 무왕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 있는 익산 - 무왕이 어려서 홀어머니와 살면서 마를 팔아 생활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그리고 노래를 퍼뜨려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서동요와 관련된 이야기는 흥미로운 전설로 전하지만 그것이 모두 사실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왕이 성장했던 익산 지역에는 지금도 무왕 부부의 능으로 전하는 쌍릉이 남아 있고, 무왕 부부가 발원하여 지은 미륵사지와 현재 해체복원작업 중인 미륵사지 서탑이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조사 과정에서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리를 봉안한 기록인 사리봉영기에는 639년 백제 무왕의 왕후인 사탁적덕의 딸이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미륵사지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마한의 도읍지였다거나 무왕의 별도別都였다거나 후백제 견훤의 도읍지라는 등의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대체로 백제 후기부터 통일신라 후기에 걸친 유적지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다. 매년 5월 익산에서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간직한 서동요의 고장임을 강조한 ‘서동축제’가 열리고 있다(익산과 무왕의 이야기는 94~109쪽 참조).
백제에 대한 질문과 해답으로 엮은, 한 권으로 읽는 백제사
* 1부 한성시대 - 백제는 누가, 언제 세웠는가?|백제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백제의 성립과 발전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풍납토성은 한성백제의 도성이었나?
『삼국사기』에 실린 건국설화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십제十濟라는 나라를 전신으로 하여 주변 마한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고 최대 세력이었던 목지국까지 통합하면서 백제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이후 가야세력을 영향권 내에 넣어 영산강유역을 확보한 백제는, 국경을 맞대게 된 고구려마저 격퇴하고 북쪽 경계선을 확장하게 된다. 더불어 통지제도를 완성해나가면서 4세기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영역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춘다. 백제는 한족과 예족, 맥족이라 불리는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맥족과 예족은 지배층인 부여계이고 한족은 토착세력이자 피지배층으로 이들 간에는 사용 언어도 달랐다. 이들은 백제사회가 발전하면서 점차 ‘백제인’으로 융합되어갔다.
* 2부 웅진시대 - 문주왕은 왜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나?|백제 부흥의 주역, 무령왕은 누구인가?|세기의 대발견, 무령왕릉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무령왕릉 속에는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었을까?|백제는 고대 한류의 중심이었나?|《양직공도》 속 백제인은 어떤 모습인가?
5세기 후반, 백제의 수도 한성은 고구려에 의해 함락된다. 초토화된 한성을 뒤로하고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장차 다시 백제의 부활을 꿈꿀 수 있는 곳으로 수도 이전을 감행한다. 사방이 천연의 요새이자 금강 이남으로의 지배력 확산 및 당시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곳으로 웅진(공주)이 선택되었다. 제22대 문주왕 대의 일이다.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475년에서 다시 사비로 천도하는 538년까지 5대 왕에 걸친 63년의 웅진도읍기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백제사 여러 측면에서 큰 변혁을 맞게 된다. 동성왕 대를 거쳐 무령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다시 동아시아의 강국이자 국제교류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무령왕은 대내적으로 개혁의 군주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문화교류와 외교에 있어 큰 성과를 이뤘다. 특히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어져 1,500년이란 긴 세월을 견뎠으며, 이 세기의 대발견은 백제사 연구의 혁신을 가져왔다.
* 3부 사비시대 -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나제관계의 도화선, 관산성전투는 어떤 전쟁이었나?|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은 누구인가?|무왕 부부는 왜 익산에 ‘미륵사’를 지었을까?
고구려에 쫓겨 긴급하게 천도지로 선택한 웅진은 군사지리적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적합했을지 모르나, 도성으로서의 기능과 왕도의 경제적 기반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이와 더불어 전왕 대의 계속된 염원이었던 한성 회복의 새로운 발판을 다지기 위해, 백제는 성왕 대에 와서 다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 사비 천도 후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칭하고 각종 제도의 정비에 진력하면서 동시에 신라와 연합하여 남진하려는 고구려에 맞선다. 그러나 이 시기 신라 역시 체제를 정비하고 국력이 신장되는 시기를 맞아 적극적인 정복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터라, 고구려에 맞선 나제동맹은 결국 신라의 배반으로 깨지고 만다. 6세기 중반, 백제와 신라는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고 이 전쟁에서 백제는 성왕과 군사 3천여 명이 전사하며 신라에 대패하고 가야 지역까지 신라의 영향 아래로 넘어가게 된다. 이 전쟁이 관산성전투이며, 이로써 한반도에는 진정한 3국이 정립되는 형세를 맞는다.
* 4부 멸망과 부흥운동 - 우리가 갖고 있던 의자왕에 대한 오해와 진실은?|의자왕은 정말 삼천궁녀를 두었을까?|백제의 운명을 가른 황산벌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나?|멸망 후 백제군의 치열한 부흥운동, 그 시작과 끝은?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성공적인 대내정치로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었으며, 의자왕 대의 백제는 주변국으로부터 “큰 나라이자 강한 나라”로 불렸다. 이러한 의자왕 대에 백제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무얼까?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 신라, 당나라 등 주변국과의 대외정책 실패를 그 요인으로 든다. 특히 삼국 관계에 당나라의 개입이 심해지고 당이 국제질서의 중심의 서게 되는 7세기 중반, 신라와 당이 손을 잡음으로써 백제는 쇠락의 길로 다가설 수밖에 없었다. 659년에 이르러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660년 봄 당의 소정방은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러 내려온다. 충남 논산 황산벌에서 벌어진 운명의 전투에서 결국 백제는 무너졌고, 이해 8월 의자왕은 신라의 왕과 소정방, 김유신 등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굴욕적인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백제는 멸망 후 3년간 다시 일어서려는 맹렬한 부흥운동을 펼치게 되니, 이는 한반도 역사상 멸망 왕조의 유일한 부흥운동으로 기록된다.
* 5부 생활 - 백제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백제인은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었을까?|백제인은 죽은 후 어떤 무덤을 썼을까?|‘입 벌린 호랑이’처럼 생긴 토기 호자의 쓰임새는? 백제는 삼국 중 평야가 가장 발달한 곳에 위치했다. 건국 초기부터 주산업은 농업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백제 영역의 발굴 유적에서는 논과 밭 유적이 확인된다. 김제 벽골제나 제천 의림지 등은 마한과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논 경작을 위해 필수적인 물 공급을 위한 시설이다. 백제의 수공업은 철의 생산 및 수요의 증대와 더불어 보다 체계적인 단계로 발전했고, 5-6세기의 기록을 통해 삼베, 비단 등의 직물을 생산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특히 금과 은 등을 소재로 한 금속공예가 발달하였는데, 왕과 세력가의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들과 능산리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대향로가 대표적이다. 백제의 옛 영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마을과 주거가 발견되었는데 기둥이나 목책의 자리, 화덕과 부뚜막, 출입시설의 흔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을 가늠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공복제도에 대한 자료, 백제 사신이 그려진 《양직공도》,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과 금동신발 등에서 백제인들의 옷차림새를 알 수 있고, 유적지에서 발견된 곡물과 과일의 씨앗, 육류와 어패류의 뼈와 껍질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와 매우 유사한 식재료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 6부 문화와 예술 - 백제인의 종교와 사상, 삶의 가치는 무엇이었나?|백제에 남아 있는 글과 노래, 이야기는?|백제는 왜 절과 탑의 나라로 불렸을까?|백제 금속공예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백제의 정신과 마음의 정수, 금동대향로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백제는 384년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사비시대에 이르러서는 “절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불교를 깊이 신봉했다. 미륵을 통해 현세의 구원을 바라는 현실적 불교의 성격이 강했으며, 부여 지역에서는 백제시대의 수많은 절터가 조사되었고 중요한 불교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도교는 불교와 함께 백제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여러 기록의 내용과 함께 부여 능산리고분군의 사신도, 외리절터에서 출토된 산수 경치의 산수문전, 능산리절터에서 수습된 금동대향로를 통해 백제인의 도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금동대향로는 무령왕릉 발굴 이래 백제 고고학사의 가장 빛나는 성과이다. 이를 통해 백제인들의 문화예술 수준뿐 아니라, 그들의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밑으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과 용을, 위로는 태평성세를 예언하는 봉황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불교와 도교의 이상적인 세계를 배치함으로써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 작가 소개
저자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4년에 설립되었으며 충남 지역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조사?수집?연구하는 기관이다. 『백제문화사대계』를 비롯한 많은 역사서를 편찬하였고, 매장문화재의 조사?발굴은 물론 문화재 전시 및 정비?복원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 책 『한권 백제』의 집필에는 이훈(연구위원), 강종원(연구위원), 이상엽(책임연구원), 박재용(선임연구원), 이경복(선임연구원), 이창호(선임연구원), 이호경(선임연구원), 이현상(연구원), 신유진(연구원)이 참여하였다.
▣ 주요 목차
서문 이야기로 읽는 한 권의 백제사
1부 한성시대, 한강유역에 나라를 세우다
백제는 언제, 누가 세운 나라인가
백제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였나
◎ 한성백제의 도성, 풍납토성
2부 웅진시대, 백제의 번영과 무령왕
문주왕은 왜 웅진으로 천도했나
백제 부활의 신화, 무령왕
◎ 백제사 최고의 발견, 무령왕릉의 보물들
백제는 고대 한류의 중심이었나
◎ 백제 사신의 모습이 그려진 《양직공도》
3부 사비시대, 금동대향로의 꿈과 이상
또 다시, 사비로 수도를 옮긴 이유는
백제와 신라 관계 악화의 도화선, 관산성전투
◎ 관산성전투와 옥천
사비시대 스캔들의 중심, 무왕은 누구인가
◎ 무왕 부부의 염원이 담긴 왕실 발원 사찰, 미륵사
4부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의자왕은 정말로 무능한 왕이었나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백제 부흥운동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의자왕은 정말 삼천궁녀를 두었을까
5부 백제인의 생활
백제의 경제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백제의 마을과 주거는 어떤 모습이었나
백제 사람들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백제 사람들은 어떤 무덤에 묻혔을까
◎ ‘입 벌린 호랑이’처럼 생긴 토기 호자의 쓰임새
6부 백제의 문화와 예술
백제 사람들의 종교와 사상은
백제의 글과 노래, 이야기
백제는 왜 절과 탑의 나라로 불렸을까
◎ 외리유적 출토 전돌의 여덟 가지 아름다움
백제의 금속공예, 왜 주목할까
◎ 백제의 얼굴, 백제의 미소
부록
백제 왕 계보
백제사 연표
도판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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