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 ‘해방 1년’을 4권으로 완성
“역사의식의 결함, 박근혜만의 것인가?”
"역사의식의 결함”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옹호 앞에서 쏟아져 나온 말이다. 김기협은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역사의식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던 반공독재의 여파에서 아직도 이 사회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사 인식이 진영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그는 오른쪽으로 굽히거나 왼쪽으로 비틀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한다. 비뚤어진 것 이전에 생각의 분량 자체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이다. 해방공간 3년간의 역사를 열 권의 책으로 읽히겠다는 ‘물량공세’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5년 전부터 역사에세이의 새 영역을 열어온 김기협 박사가 2년 전 “3년간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해방일기』 집필을 꾸준히 진행해온 결과, 계획된 37개월 중 25개월째 접어들었고,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의 출간으로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해방 1년’을 4책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에 따르고자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선의 향방 속에 한국현대사 논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데도 정작 역사학자들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김기협의 해방공간 대장정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이 다루는 기간은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5월에 시작되는 한편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 속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진다. 한편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노동당으로 창당되면서 좌익의 주도권이 평양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하는 극좌 노선을 택한다. 김기협은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가 왜 열세에 빠졌는가?”를 주제의식으로 하여 좌우합작 국면에서 극우, 극좌라는 양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쓴 중간파의 과업을 소개한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임을 강조한다.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해방일기 4권』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5.1 ∼ 1946.8.30) 개요
해방공간 3년 중 가장 큰 갈림길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소위 ‘반탁’이 핵심 주제가 되는 시점이었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인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는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 할 수 있다.
1946년 5월이 되면 상황 전개의 기본 틀이 분명해져 있었다. 외래 세력인 미군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반탁 세력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박헌영 세력이 민주주의인민전선을 중심으로 좌익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돈도 조직도 별반 없는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라 할 만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힘’없는 그들이 ‘중간파’라 불리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5월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좌우합작’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이 세력 안에서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섰다.
좌우합작을 작동시킨 동력은 미군정이 일으킨 것이었다. 미군정은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결국 극좌파를 고립시키는 통일전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좌우합작은 다음 책에서 다루는 4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만 여름 동안에도 좌우합작위원회는 중도 우파의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주었고, 좌익 재편 과정에도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했다.
김기협 박사는 이 책에서 중간파의 재평가를 위해‘좌우 대립’ 대신 ‘중극(中極) 대립’의 좌표계를 제시한다. 중간파가 갖지 못한 ‘힘’을 극좌와 극우는 외세로부터 얻었고 중간파가 민심의 지지로부터 얻은 ‘힘’은 외세에 의지한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궁핍과 매장,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중간파 덕분이라 강조한다. 비록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김규식이 등장하였다. 중경 임정 부주석을 맡고 있었던 김규식은 이승만에 이어 조선인 미제 박사 2호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영수’ 체제로 굳어진 우익 판에 막상 김규식이 나서니 두 영수에 버금가는 제3의 지도자로서 존재감이 드러났다. 좌우합작에 나설 것을 이승만이 권하러 왔을 때 김규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님은 대통령 못 하면 못살 사람이고 나는 대통담배를 못 피우면 못살 사람이니 나를 대통이나 피우게 내버려 두시오.”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 나설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설 결심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극우세력의 배경인 기득권층의 위세가 얼마나 대한한 것인지, 미군정의 반공주의가 얼마나 굳건한 장벽인지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1946년 여름 정치계의 흐름을 크게 좌우한 움직임 중의 하나는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익 정당의 합당을 통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창당이었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정회에 들어갈 무렵부터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좌우합작 추진과 짝을 이루는 책략이었다. 공산당의 힘을 꺾음으로써 공산당 외의 좌익이 좌우합작의 마당으로 나오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준 조치가 ‘정판사사건’ 조작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건의 실체를 밀착 취재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공산당사로 쓰던 건물에 해방 전 지카자와 인쇄소가 있었다. 『해방일기』 1권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이 항복하고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20여 일 동안 총독부가 30억 원이라는 거액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는데 인쇄량이 너무 많아 민간 인쇄소까지 징발했고, 지카자와 인쇄소에 ‘정판사’란 간판을 달고 활용했는데, 화폐 인쇄에 쓴 평판 등 재료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김창선이란 자가 화폐 인쇄용 평판을 들고 나가 위폐단에 팔아먹었고 5월 4일 그 위폐단이 검거된 사건이었다. 군정청의 사건발표에 따르면 공산당 재정ㆍ총무부장 이관술과 정판사 사장 박낙종을 위시한 공산당원 십여 명이 3백만 원 원의 위폐를 찍어 유통했다는 것인데, 이 사건 혐의는 철저한 조작 아니면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사건 발표 직후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무기 정간되었다 폐간되었고 공산당도 이 건물에서 축출당했다. 저자는 30억 원 위폐사건의 핵심 공범인 미군정이 1천 수백만 원의 공산당 위폐사건을 조작했다고 하며 가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지적한다.
한편 북로당과 남로당의 창당은 평양으로 좌익의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의미하였고 그럴수록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극좌의 길을 선택한다. 미군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강경 노선으로 소위 ‘신전술’이란 말이 나돌고 있었다. 김기협 박사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 차이에서부터 벼랑 끝 전술을 펼치는 박헌영의 극좌 노선의 뿌리를 파헤져 간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1946년 5월 2∼ 6일
1946. 5. 2. 협의 자세를 안 갖춘 협의상대’ 신청자들
1946. 5. 3. 미소공위에 배짱으로 임한 미국대표단
1946. 5. 4. 전범재판이 없던 유일한 나라 조선
1946. 5. 6. ‘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소공위 중단책임이 미국에게 있는 거 맞죠”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
1946년 5월10∼30일
1946. 5. 10. 조봉암이 한국현대사에 던진 첫 충격
1946. 5. 13. 좌익탄압의 에스컬레이션
1946. 5. 16. 좌익탄압의 절정 ‘정판사 위폐사건’
1946. 5. 17. 해방공간 최대의 위폐범은 미군정
1946. 5. 23. 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사건
1946. 5. 26. 우리의 수도는 아직도 ‘게이조(京城)’입니다
1946. 5. 27. 한민족의 분단 일본이 벌써 저질러놓은 짓
1946. 5. 30. 폭압적 ‘직접통치’에 나서는 미군정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독립’을 너무 쉽게 생각한 민족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5월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
1946년 6월2∼13일
1946. 6. 2. 조선의 일본인과 중국의 조선인
1946. 6. 3. 분단 건국을 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 6. 5. 이승만의 ‘치고빠지기’ 작전
1946. 6. 13. 1946년 여름의 콜레라 사태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만담가 신불출의 ‘국기모독죄’
4 좌우합작 추진
1946년 6월14∼30일
1946. 6. 14. ‘좌우합작’에 임하는 하지의 꿈
1946. 6. 16. 하지에게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던 좌우합작
1946. 6. 17. 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1946. 6. 20. 김규식의 등장
1946. 6. 21. 유민(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1946. 6. 22. 북핵문제 장택상에게도 책임이 있다
1946. 6. 24. 좌우합작 불리한 싸움이지만 민족대의를 받드는 싸움
1946. 6. 27. 1946년 여름 이남주민들의 고통
1946. 6. 28. 소련군의 군표와 미군의 군표
1946. 6. 30. 좌우합작 노력에 시동을 걸어준 미군정의 지원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군정 좌우합작에 방해나 안 했으면…….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6월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
1946년 7월 1∼28일
1946. 7. 1. 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1946. 7. 4.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차이
1946. 7. 5. 간첩혐의를 불러온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1946. 7. 7. 좌우합작 분위기를 보여준 3의사 국민장
1946. 7. 11. 박헌영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1946. 7. 12. 언론의 자유에 관심 없던『동아일보』
1946. 7. 14.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1946. 7. 15.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1946. 7. 18. 여운형 습격 역시 극우의 소행이었다
1946. 7. 19. 3상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의 의미는
1946. 7. 21. 이북에서 남녀평등법을 내놓는 동안
1946. 7. 22. 출발선에 선 좌우합작
1946. 7. 25. 박헌영 일당의 좌우합작 좌초 시도
1946. 7. 26.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1946. 7. 27. 아직도 폭력은 우익의 것
1946. 7. 28. 공산당의 정판사 사건 ‘공판투쟁’ 전략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한탄은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7월
6 해방 1주년을 돌아보다
1946년 8월1∼31일
1946. 8. 1. 종속과 독재의 발판이 된 민족 열등감
1946. 8. 2. 박헌영에게서 해방된 김일성
1946. 8. 4. 대쪽 아나키스트 유림(柳林)을 생각한다
1946. 8. 5. 최고 원로 김철수를 배신한 박헌영
1946. 8. 8. “미군정이 잘한 일이 무엇?” 98퍼센트가 “할 말 없어”
1946. 8. 9. 전평과 대한노총의 경쟁
1946. 8. 11. 경찰과『동아일보』가 꾸민 8·15 공안정국
1946. 8. 12. 해방 1주년의 사회상 오기영의 탄식
1946. 8. 15. 궁지에 빠진 김구
1946. 8. 19. 여운형 “박헌영과는 이제 그만…….”
1946. 8. 22. 잉여물자 ‘차관’에 좋아 날뛰는 이승만
1946. 8. 23. 극렬분자 반동분자 그리고 기회주의자
1946. 8. 24. 박헌영 극좌노선의 뿌리
1946. 8. 29.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사건
1946. 8. 31. 북로당은 왜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좁아지기만 하는 공산당의 길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8월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 ‘해방 1년’을 4권으로 완성
“역사의식의 결함, 박근혜만의 것인가?”
"역사의식의 결함” 박정희의 쿠데타에 대한 박근혜의 옹호 앞에서 쏟아져 나온 말이다. 김기협은 역사의식의 결함이 박근혜만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역사의식을 제도적으로 봉쇄하던 반공독재의 여파에서 아직도 이 사회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사 인식이 진영 논리의 근거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그는 오른쪽으로 굽히거나 왼쪽으로 비틀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한다. 비뚤어진 것 이전에 생각의 분량 자체가 너무 모자란다는 것이다. 해방공간 3년간의 역사를 열 권의 책으로 읽히겠다는 ‘물량공세’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5년 전부터 역사에세이의 새 영역을 열어온 김기협 박사가 2년 전 “3년간의 대장정”으로 선포했던 『해방일기』 집필을 꾸준히 진행해온 결과, 계획된 37개월 중 25개월째 접어들었고,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의 출간으로 1945년 8월에서 1946년 8월까지‘해방 1년’을 4책으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연구자들의 업적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며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에 따르고자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진영논리를 넘어섬으로써 색안경을 벗어나려는 노력에 스스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대선의 향방 속에 한국현대사 논쟁이 격렬하게 부딪히는데도 정작 역사학자들이 안 보이는 상황이다. 김기협의 해방공간 대장정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 『해방일기 4권 -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이 다루는 기간은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다.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움직임이 5월에 시작되는 한편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 속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진다. 한편 김일성의 북조선분국이 북조선노동당으로 창당되면서 좌익의 주도권이 평양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하는 극좌 노선을 택한다. 김기협은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가 왜 열세에 빠졌는가?”를 주제의식으로 하여 좌우합작 국면에서 극우, 극좌라는 양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쓴 중간파의 과업을 소개한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들 덕분임을 강조한다.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해방일기 4권』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5.1 ∼ 1946.8.30) 개요
해방공간 3년 중 가장 큰 갈림길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직후, 소위 ‘반탁’이 핵심 주제가 되는 시점이었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인 1946년 5월에서 8월까지는 해방공간 중 가장 결정적 변화를 가져온 시기라 할 수 있다.
1946년 5월이 되면 상황 전개의 기본 틀이 분명해져 있었다. 외래 세력인 미군정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는 반탁 세력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왼쪽에서는 박헌영 세력이 민주주의인민전선을 중심으로 좌익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돈도 조직도 별반 없는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라 할 만한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힘’없는 그들이 ‘중간파’라 불리는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내는 사건이 5월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좌우합작’이었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이 세력 안에서 우파와 좌파를 대표하는 입장에 섰다.
좌우합작을 작동시킨 동력은 미군정이 일으킨 것이었다. 미군정은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 사이의 좌우합작을 성공시키면 극우파는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결국 극좌파를 고립시키는 통일전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좌우합작은 다음 책에서 다루는 4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만 여름 동안에도 좌우합작위원회는 중도 우파의 새로운 입지를 만들어주었고, 좌익 재편 과정에도 하나의 큰 변수로 작용했다.
김기협 박사는 이 책에서 중간파의 재평가를 위해‘좌우 대립’ 대신 ‘중극(中極) 대립’의 좌표계를 제시한다. 중간파가 갖지 못한 ‘힘’을 극좌와 극우는 외세로부터 얻었고 중간파가 민심의 지지로부터 얻은 ‘힘’은 외세에 의지한 극단파의 ‘힘’에 압도당했다. ‘중’을 민심의 대표로, ‘극’을 외세의 대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방공간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극’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궁핍과 매장, 그리고 위험을 무릅쓴 중간파 덕분이라 강조한다. 비록 그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리 막강한 외세 앞에서라도 양심적 민족주의자가 노력할 여지는 있었다는 가르침이다.
김규식이 등장하였다. 중경 임정 부주석을 맡고 있었던 김규식은 이승만에 이어 조선인 미제 박사 2호였다. 이승만과 김구의 ‘영수’ 체제로 굳어진 우익 판에 막상 김규식이 나서니 두 영수에 버금가는 제3의 지도자로서 존재감이 드러났다. 좌우합작에 나설 것을 이승만이 권하러 왔을 때 김규식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님은 대통령 못 하면 못살 사람이고 나는 대통담배를 못 피우면 못살 사람이니 나를 대통이나 피우게 내버려 두시오.”
이전투구의 권력투쟁에 나설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설 결심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좌우합작이 독립을 위한 단계라면 독립을 위하여 내가 희생하겠다. 형님이 나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댈 것을 안다. 또 떨어뜨린 후에는 짓밟을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 내가 희생한 다음에 형님이 올라서시오.”
극우세력의 배경인 기득권층의 위세가 얼마나 대한한 것인지, 미군정의 반공주의가 얼마나 굳건한 장벽인지 김규식은 잘 알고 있었다.
1946년 여름 정치계의 흐름을 크게 좌우한 움직임 중의 하나는 미군정의 노골적인 공산당 탄압이었고, 다른 하나는 좌익 정당의 합당을 통한 북조선노동당(북로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창당이었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정회에 들어갈 무렵부터 공산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좌우합작 추진과 짝을 이루는 책략이었다. 공산당의 힘을 꺾음으로써 공산당 외의 좌익이 좌우합작의 마당으로 나오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가장 큰 타격을 준 조치가 ‘정판사사건’ 조작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사건의 실체를 밀착 취재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공산당사로 쓰던 건물에 해방 전 지카자와 인쇄소가 있었다. 『해방일기』 1권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이 항복하고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20여 일 동안 총독부가 30억 원이라는 거액의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는데 인쇄량이 너무 많아 민간 인쇄소까지 징발했고, 지카자와 인쇄소에 ‘정판사’란 간판을 달고 활용했는데, 화폐 인쇄에 쓴 평판 등 재료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김창선이란 자가 화폐 인쇄용 평판을 들고 나가 위폐단에 팔아먹었고 5월 4일 그 위폐단이 검거된 사건이었다. 군정청의 사건발표에 따르면 공산당 재정ㆍ총무부장 이관술과 정판사 사장 박낙종을 위시한 공산당원 십여 명이 3백만 원 원의 위폐를 찍어 유통했다는 것인데, 이 사건 혐의는 철저한 조작 아니면 터무니없는 과장이었다. 사건 발표 직후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무기 정간되었다 폐간되었고 공산당도 이 건물에서 축출당했다. 저자는 30억 원 위폐사건의 핵심 공범인 미군정이 1천 수백만 원의 공산당 위폐사건을 조작했다고 하며 가히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 지적한다.
한편 북로당과 남로당의 창당은 평양으로 좌익의 주도권이 넘어갔음을 의미하였고 그럴수록 박헌영은 좁아지기만 극좌의 길을 선택한다. 미군정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강경 노선으로 소위 ‘신전술’이란 말이 나돌고 있었다. 김기협 박사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 차이에서부터 벼랑 끝 전술을 펼치는 박헌영의 극좌 노선의 뿌리를 파헤져 간다.
『해방일기』 시리즈 소개
역사학자 김기협의 해방일기,
65년 전의 ‘오늘’에서 민족의 미래를 찾는다
3년 전부터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는 김기협은 특이한 배경의 역사학자다. 1968년 서울대 이공계열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사학과로 전과해서 중국사 전공을 시작한 뒤 석사과정은 경북대에서, 박사과정은 연세대에서 수학했다. 1990년 대학교수를 그만둔 이후 칼럼니스트와 번역가로 활동하다가 근년 들어 본격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환갑을 맞은 작년 8월 1일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했다.(?프레시안? 연재) 목표는 2013년 8월 31일까지 37개월간. 1945년 8월 1일 해방 전야부터 1948년 8월 31일 대한민국 건국 무렵까지의 기간 동안 ‘65년 전의 오늘’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8월 1일자 첫 회에서 김기협은 선친의 전쟁일기를 언급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그의 선친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60년 전 세상을 떠난 선친을 스스로 들먹인 데서 새 작업에 대한 만만찮은 각오를 느낄 수 있다.
(…)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독자께서는 바로 제 아버님을 떠올리시겠죠. 그렇습니다. 이 작업에는 아버님의 전쟁일기를 흉내 내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이란 상황에 마주쳤을 때 한 역사학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신 것이 그 일기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 방법으로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합니다.
(…) 이 막막한 작업에 구상이 떠오른 지 불과 한 달 만에 착수하고 있다는 사실부터 어리둥절합니다. 가만 생각하면 바로 이런 성격의 작업을 위해 지금까지의 제 인생이 배치되어 온 것이 아닌가, 운명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
그 후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100여 매씩 글을 올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지금 1주일 동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누군가가 150매 분량으로 정리해준다면 재미있게 읽을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물며 65년 후의 어느 필자가 그런 일을 할 때 그것을 참을성 있게 읽어줄 65년 후의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이런 서술을 꾸준히 읽어주는 독자가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놀라운 일이다. 그 방대한 서술에 독자들이 질리지 않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1) 『해방일기』에는 현장감이 있다. 저자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보다 ‘씨름’으로 보고, ‘대화록’을 정리해주기보다 ‘생중계’를 펼치겠다고 나선다. 65년 전 상황의 ‘생중계’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 대상이 ‘해방공간’이라서 그 필요가 성립된다.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기로였던 그 시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아직도 차단과 굴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중계’가 반가운 것이다.
“나는” 하고 거침없이 나서는 주관성이 현장감을 북돋워준다.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보다 동시대인으로서, 이웃으로서 독자들과의 연대감을 앞세운다. 주어진 자료와 연구결과를 놓고 독자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최선의 해석을 추구하는 것이다.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 애쓰지만 그 한계에 이를 때는 한계를 서슴없이 인정함으로써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다.
(2) 『해방일기』는 정치적 시각을 넓혀준다. 저자는 이 사회에서 ‘진보적’ 인사로 흔히 간주되는 사람인데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해 왔다. 그는 이 작업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의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분명히 했다. 그가 내세우는 ‘원론적 보수주의’는 역사만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정치상황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해방공간의 정치 상황은 지금까지 ‘좌우 대립’을 위주로 풀이되어 왔다. 저자는 ‘적대적 공생관계’로 맺어진 극좌와 극우가 함께 중도파를 억압하고 침식하고 봉쇄하던 상황을 그려 보인다. 원칙과 상식에 따르려는 중도파와 이해관계에 얽매인 극단파 사이의 ‘중극(中極) 대립’의 새 그림을 내놓는다. 원칙과 상식을 따르는 다수가 강력한 동기를 가진 소수 집단의 집요한 도발에 굴복한 해방공간의 상황이 65년 후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자는 본다.
(3) 『해방일기』는 풍부한 관점을 제공해준다. 저자는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아닐 뿐더러 학술논문 위주의 표준적 학술활동에서 벗어나 자기 식으로 오랫동안 공부해 온 사람이어서 일반 역사학자와 다른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는 문명사가의 관점도 있고 저널리스트의 관점도 있다.
원자폭탄의 등장은 우리 해방공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폴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일본, 중국 등지에서 펼쳐진 상황에 비추어 우리 ‘해방’의 의미를 다시 음미해 볼 점은 없는가?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어떤 변화를 겪고 있었고, 그 변화가 우리의 해방공간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 근대적 변화가 억압체제를 통해 민족사회에 작용한 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등등 해방공간의 실질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관점들이 이 작업에서 새로 제시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20여 년 전 해방공간을 향해 이 사회의 시야를 열어주었다. 수십 년 동안 해방공간을 철저히 가로막아 온 반공체제의 장벽에 구멍을 뚫어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벽을 치워버리고 통째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만져보고, 쓸어보고, 현미경도 들이대보고, 성분조사도 해볼 때가 되었다.
20년 전 젊은 세대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가진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그 내용을 씹어 삼켰다. 상식이 철저히 봉쇄된 상황에서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상식의 편린에라도 접하는 것이 너무 황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식과의 모처럼의 만남이 일으키던 황홀함은 빛이 바랬다. 충격적인 황홀함보다 차분한 이해를 늘리기 위해 ‘인식’을 더 심화시킨 ‘재인식’이 나올 때가 되었다. 그런데 연전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인식의 심화가 아니라 인식의 전복을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저자가 한국근현대사 서술에 나선 계기가 3년 전의 『뉴라이트 비판』 작업이었다. ‘대한민국 체제’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방식을 그는 그 작업에서 비판했다. 이제 그는 『해방일기』를 통해 뉴라이트 진영의 입론 내용을 반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것이 이 작업의 기본목적의 하나다.
저자는 『해방일기』가 특정 진영에 대한 반박을 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보완이 되기 바란다. 벽 틈의 구멍으로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는 단계를 넘어 독자들이 해방공간의 역사를 품에 끌어안고 마음껏 어루만질 수 있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65년 전에는 우리 민족사회의 건강한 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이후 억눌려 온 그 정신을 지금이라도 되살리는 것이 민족사회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독자들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1권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1945. 8 ~ 10, 일본의 항복)
해방일기 2권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1945. 11 ~ 1946. 1, 신탁통치안)
해방일기 3권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1946. 2 ~ 4, 미소공위 개막)
해방일기 4권 반공의 포로가 된 이남의 해방(1946. 5 ~ 8, 좌익 탄압)
해방일기 5권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1946. 9 ~ 12, ‘대구폭동’)
해방일기 상편
해방일기 6권 냉전에 파묻힌 조선 해방(1947. 1 ~ 4, 이승만의 승리)
해방일기 7권 깨어진 해방의 약속(1947. 5 ~ 8, 미소공위 결렬)
해방일기 8권 의미를 잃어버린 해방(1947. 9 ~ 12, 김구의 몰락)
해방일기 9권 해방된 자, 누구였던가(1948. 1 ~ 4, 친일파의 득세)
해방일기10권 해방을 끝장낸 분단 건국(1948. 5 ~ 8, 대한민국 탄생)
▣ 작가 소개
저 : 김기협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 사학과로 전과한 보기 드문 배경의 역사학자다. 문명사의 거시적인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동아시아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중국 고대 천문학 연구로 석사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마테오 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과학분과), 중앙일보 문화전문위원과 한국과학사학회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미국인의 짐』,『밖에서 본 한국사』, 『뉴라이트 비판』,『김기협의 페리스코프』,『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아흔 개의 봄』이 있고 역서로는 『용비어천가』,『역사의 원전』,『소설 장건』,『공자평전』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민심을 대변하는 중간파, 왜 열세에 빠졌나?
1 미소공동위원회 무기 휴회
1946년 5월 2∼ 6일
1946. 5. 2. 협의 자세를 안 갖춘 협의상대’ 신청자들
1946. 5. 3. 미소공위에 배짱으로 임한 미국대표단
1946. 5. 4. 전범재판이 없던 유일한 나라 조선
1946. 5. 6. ‘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북행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소공위 중단책임이 미국에게 있는 거 맞죠”
2 미군정의 폭압적 통치
1946년 5월10∼30일
1946. 5. 10. 조봉암이 한국현대사에 던진 첫 충격
1946. 5. 13. 좌익탄압의 에스컬레이션
1946. 5. 16. 좌익탄압의 절정 ‘정판사 위폐사건’
1946. 5. 17. 해방공간 최대의 위폐범은 미군정
1946. 5. 23. 천안함의 데자뷔 정판사사건
1946. 5. 26. 우리의 수도는 아직도 ‘게이조(京城)’입니다
1946. 5. 27. 한민족의 분단 일본이 벌써 저질러놓은 짓
1946. 5. 30. 폭압적 ‘직접통치’에 나서는 미군정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독립’을 너무 쉽게 생각한 민족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5월
3 남북의 분열을 희망할 자 어디 있는가
1946년 6월2∼13일
1946. 6. 2. 조선의 일본인과 중국의 조선인
1946. 6. 3. 분단 건국을 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 6. 5. 이승만의 ‘치고빠지기’ 작전
1946. 6. 13. 1946년 여름의 콜레라 사태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만담가 신불출의 ‘국기모독죄’
4 좌우합작 추진
1946년 6월14∼30일
1946. 6. 14. ‘좌우합작’에 임하는 하지의 꿈
1946. 6. 16. 하지에게 하나의 ‘옵션’일 뿐이었던 좌우합작
1946. 6. 17. 법조계를 덮친 양극화의 쓰나미
1946. 6. 20. 김규식의 등장
1946. 6. 21. 유민(流民)의 도시가 된 서울
1946. 6. 22. 북핵문제 장택상에게도 책임이 있다
1946. 6. 24. 좌우합작 불리한 싸움이지만 민족대의를 받드는 싸움
1946. 6. 27. 1946년 여름 이남주민들의 고통
1946. 6. 28. 소련군의 군표와 미군의 군표
1946. 6. 30. 좌우합작 노력에 시동을 걸어준 미군정의 지원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미군정 좌우합작에 방해나 안 했으면…….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6월
5 좌우합작 회담과 원칙
1946년 7월 1∼28일
1946. 7. 1. 처음으로 ‘힘’을 가지게 된 중도파
1946. 7. 4. 김일성과 박헌영의 입장차이
1946. 7. 5. 간첩혐의를 불러온 박헌영과 하지의 ‘비밀’
1946. 7. 7. 좌우합작 분위기를 보여준 3의사 국민장
1946. 7. 11. 박헌영 노선 무엇이 문제인가
1946. 7. 12. 언론의 자유에 관심 없던『동아일보』
1946. 7. 14. ‘국대안 파동’의 출발점
1946. 7. 15. 전승국도 패전국도 아니었던 조선
1946. 7. 18. 여운형 습격 역시 극우의 소행이었다
1946. 7. 19. 3상회의 결정 ‘총체적 지지’의 의미는
1946. 7. 21. 이북에서 남녀평등법을 내놓는 동안
1946. 7. 22. 출발선에 선 좌우합작
1946. 7. 25. 박헌영 일당의 좌우합작 좌초 시도
1946. 7. 26. 좌익 5원칙과 우익 8원칙
1946. 7. 27. 아직도 폭력은 우익의 것
1946. 7. 28. 공산당의 정판사 사건 ‘공판투쟁’ 전략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한탄은 하지만 후회는 않는다”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7월
6 해방 1주년을 돌아보다
1946년 8월1∼31일
1946. 8. 1. 종속과 독재의 발판이 된 민족 열등감
1946. 8. 2. 박헌영에게서 해방된 김일성
1946. 8. 4. 대쪽 아나키스트 유림(柳林)을 생각한다
1946. 8. 5. 최고 원로 김철수를 배신한 박헌영
1946. 8. 8. “미군정이 잘한 일이 무엇?” 98퍼센트가 “할 말 없어”
1946. 8. 9. 전평과 대한노총의 경쟁
1946. 8. 11. 경찰과『동아일보』가 꾸민 8·15 공안정국
1946. 8. 12. 해방 1주년의 사회상 오기영의 탄식
1946. 8. 15. 궁지에 빠진 김구
1946. 8. 19. 여운형 “박헌영과는 이제 그만…….”
1946. 8. 22. 잉여물자 ‘차관’에 좋아 날뛰는 이승만
1946. 8. 23. 극렬분자 반동분자 그리고 기회주의자
1946. 8. 24. 박헌영 극좌노선의 뿌리
1946. 8. 29. 양심적인 검사를 괴롭힌 정판사사건
1946. 8. 31. 북로당은 왜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안재홍선생에게 묻는다 좁아지기만 하는 공산당의 길
● 해방의 시공간?일지로 보는 194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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