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때 애국자로 독립협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이완용,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치하 독립협회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 명목상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가 되었으니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던 치욕적인 자리에 독립기념물(그것이 바로 ‘독립문’이며 현판을 쓴 사람 역시 이완용이다)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서재필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였다. 그런데 독립협회와 ‘매국노’ 이완용이 깊은 관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 관계가 돈독한 차원을 넘어 창립총회 당일 최대의 후원기금을 낸 사람이 이완용이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우호적인 차원을 넘어 때때로 비호와 찬양까지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저자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에 맞닥뜨려서는 당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면서, 글의 실마리를 독립협회와 이완용의 관계로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민족 반역자의 매국적 삶을 역사에 고발함으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겠다는 당초의 집필 의도는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고”, “고발은커녕 그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냄으로써 매국행위를 희석시킨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은 그런 점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소학교령’을 공포(1895)한 인물도 이완용이었다는 사실까지 접하게 되면 과연 그를 매국노로만 몰아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저자가 이 책을 써내려가는 가장 큰 취지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완용의 본모습을 들추어내고, 그가 어떻게 한때는 대단한 애국자였다가 점차 만고의 매국노 소리를 듣는 역적으로 표변해가는지의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아울러 저자는 단순히 이완용 한 개인에 의해 우리나라가 구한말의 격동의 세계사 속에서 나라를 잃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망했지만 왕실(특히 고종과 민비, 대원군 등)과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출세가도를 달리며 친미, 친러, 친일파로 표변하면서 결국 나라를 팔아먹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구한말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0세가 되던 해인 1867년 먼 친척이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과는 친구이자 사돈이기도 했다. 25세에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충북 장호원에 피신해 있던 민비가 무사히 환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한 이완용은 4년 후인 1886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임명되면서부터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이완용은 두 번째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이 바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 것이다. 조정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육영공원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9년만에 폐교하지만, 이것을 인연으로 이완용은 카멜레온적 인생의 변신과정의 첫 단추인 친미파로의 길을 걷게 된다. 즉 1887년 새로 개설된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고, 2년여의 미국 생활은 그에게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남긴 『일당기사』(一堂紀事, 1927)에서 그가 “나의 지나온 바를 말한다면 최초 25세경에는 종래 조선인이 목적으로 삼았던 문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졌기 때문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러시아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후 일러전쟁이 끝났을 때 여기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일본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변역(變易)이라 하며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점은, 이후 그의 인생행로의 전체 구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그는 시세(時勢)에 따라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거듭났고, 특히 을사조약 이후부터는 친일파로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 결국 매국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당시 조정을 이끌어가던 지배집단의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속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이완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을사오적을 비롯해 당시 친일인사 대부분과 친미파였건 친러파였건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그러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종과 민비, 대원군조차 외세에 기대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맺는 1905년까지 친러파에서 차츰 친일파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매국의 길에 들어선다. 아관파천 직후 외부대신이 된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무더기로 외국에 넘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이 땅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러시아는 베베르와 스페예르 공사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비록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지만 수구파가 다시 득세하고 러시아가 원치 않던 고종 환궁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그는 러시아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가 외부대신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무렵 이완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독립협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러시아의 침략정책(절영도 조차 요구와 한러은행 개설 등)과 군사교관, 재정고문 철수를 요구한 만민공동회 개최에도 적극적으로 임한다. 당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완용과 서재필의 결단에 의해 열리게 된 만민공동회에 대해 독립협회 연구로 유명한 신용하 명예교수(서울대, 사회학)는 그의 저서 『독립협회연구』(일조각, 2006)에서 1898년 3월 10일자 『윤치호영문일기』를 근거로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반대했다고”고 주장하고, 일부 연구자들도 『윤치호일기』를 인용해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앞두고 당국의 압력을 의식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저자에 의하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이 날짜의 영문 『윤치호일기』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는 사실이 본문 186~88쪽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당시 새롭게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는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팽창주의자며 제국주의자였는데, 그런 그에게 이완용은 군사교관 파견 거부 등 자신의 계획에 반대한 인물로 “그는(이완용)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어떤 벼슬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독립, 독립을 외치는 친미 그룹의 우두머리다. 나는 이 그룹을 없애버릴 것이니 두고 보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단국대 사학과 김원모 교수는 그가 번역한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2004)에서 이 발언을 미국공사 알렌이 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역시 저자의 자료조사에 의해 밝혀진다(본문 183쪽 참조).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 결과 일본이 청나라에 되돌려준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부동항을 확보하게 되자, 1898년 갑자기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친러 수구파가 득세한 이 시기에 이완용은 지방 관찰사에 밀려나 있었지만 그들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재입각함으로써 다시금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주지의 사실처럼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현실순응적 태도로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
국내 연구자에 의해 이완용에 대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사료에 근거에 바로잡다
이완용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관파천, 독립협회 활동, 을사조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 식민통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 고비마다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다. 시대사로서 이 시기를 다룬 역사서는 많지만 격동의 구한말 시기를, 그것도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한 이완용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개인 이완용에 초점을 맞춰 1999년 국내에서 최초로 『이완용 평전』을 펴낸 당시,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은바 있다. 10여 년 만에 개정판을 펴내는 이 책에서 저자는 상세한 주석과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앞서 신용하 교수와 김원모 교수의 연구 사례)을 사료에 근거해 바로잡음으로써 좀 더 완성도를 높였다.
매국노로만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이완용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근거해 그가 어떻게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해갔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던 그가 권력을 잡자 시세에 영합하며 국운을 좌지우지했던 점은 우리가 역사적 교훈으로 반드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단 저자의 말처럼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결코 이완용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민비나 대원군이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 역시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고, 고급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지메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윤덕한(尹德漢)
194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72년 경향신문에 제13기 견습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ㆍ경제부ㆍ외신부 등에서 근무했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언론검열과 광주학살 왜곡보도에 항의, 신문제작 거부운동을 벌이다 해직되었으며,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88년 경향신문에 복직되어 국제부 차장, 사회부 차장, 정치2부장, 심의위원, 기획취재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95년 퇴사하였다. 1999년 도서출판 중심을 설립해 2007년까지 운영한 바 있으며, 현재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친일인명사전』 집필위원으로 참가했다. 논문으로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에 대한 국내언론 보도태도와 그것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이 있으며, 저서로 『소설 재벌신문』(움직이는 책, 1995),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공저, 다섯수레, 2000)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개정판을 내면서
책머리에
1. 문제의 제기, 『독립신문』의 일관된 이완용 찬양과 비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2.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우봉 이씨 시조묘를 찾아 개축한 이완용
3. 첫 번째 인생의 전기, 명문대가로의 입양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
시문과 서예를 즐긴 전형적 조선 선비의 풍모
벼슬길 시작부터 세자를 가르친 온건 개화파
4. 두 번째 인생의 전기, 신식 교육과의 만남
이완용은 세계화 논리의 증조 할아버지
5. 초대 주미 공사관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하다
청국의 간섭과 험난한 부임 과정
서양인 남녀 승객들의 망측한 무도회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만나다
서구 사회를 가장 깊이 있게 관찰한 친미파 원조
6. 알렌의 지원으로 30대에 학부대신이 되다
주일 전권공사 부임 거부
정동파의 대표로 일본세력 배격에 앞장서다
학부대신으로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다
7.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대원군의 민비살해와 미국 공사관 피신
파천 당일 대신 감투를 세 개나 쓰다
8. 외부대신으로서 무더기로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다
경인철도 부설권 허가와 뇌물수수 혐의
9.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다
독립협회 위원장에 선출되다
외부대신직을 걸고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
만민공동회 개최 다음날 전북 관찰사로 쫓겨가다
공금 유용혐의로 전북 관찰사에서 해임당하다
10. 매국의 길로 들어서다
8년 만의 학부대신 재입각
을사조약에 찬성하다
엄귀비 방으로 뛰어든 한규설
보호조약의 최고 책임자는 고종이다
11. 이토를 대신해 고종을 퇴위시키다
이토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이 되다
“황실과 나라를 지키는 길은 양위밖에 없다”
12. 이토 암살에 넋을 잃고
황태자의 소사(少師)가 되다
‘며느리와 사통했다’ 삼척동자도 노래 불러
서울시 일원에 사흘간 가무음곡 금지명령
13.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다
일진회의 합방 주장에 반대하다
대한의원 입원실에서 맞은 ‘경술년’ 새해 아침
14. 이름뿐인 나라마저 일제에 넘겨주다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왔다”
15. 총독정치에 적극 협력하다
일본 천황과 조선 왕실에 똑같이 충성을 바치다
3·1운동과 동족을 향한 협박
16. 학교비 납부 거부 소동과 여론의 집중 비난
조선 귀족 중 민영휘 다음의 두 번째 재산가
17. 화려한 장례식,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장례 행렬
생전의 영광이 죽어서도 이어지다?
18. 이완용만 매국노인가
비열한 책임전가와 역사의 이지메
이완용 관련 연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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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애국자로 독립협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이완용,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일제치하 독립협회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 명목상 조선이 자주독립 국가가 되었으니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던 치욕적인 자리에 독립기념물(그것이 바로 ‘독립문’이며 현판을 쓴 사람 역시 이완용이다)을 세우자는 취지에서 서재필의 주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 독립협회였다. 그런데 독립협회와 ‘매국노’ 이완용이 깊은 관계가 있었고, 더군다나 그 관계가 돈독한 차원을 넘어 창립총회 당일 최대의 후원기금을 낸 사람이 이완용이고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그에 관한 기사가 우호적인 차원을 넘어 때때로 비호와 찬양까지 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저자 역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실들에 맞닥뜨려서는 당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면서, 글의 실마리를 독립협회와 이완용의 관계로부터 풀어나가고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민족 반역자의 매국적 삶을 역사에 고발함으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겠다는 당초의 집필 의도는 완전히 빗나간 것 같았고”, “고발은커녕 그의 알려지지 않은 애국활동을 들춰냄으로써 매국행위를 희석시킨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분은 그런 점에서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더군다나 학부대신으로서 이 땅에 의무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해 법제화한 ‘소학교령’을 공포(1895)한 인물도 이완용이었다는 사실까지 접하게 되면 과연 그를 매국노로만 몰아세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들 정도이다.
이런 의문으로부터 저자가 이 책을 써내려가는 가장 큰 취지는 바로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부터 이완용의 본모습을 들추어내고, 그가 어떻게 한때는 대단한 애국자였다가 점차 만고의 매국노 소리를 듣는 역적으로 표변해가는지의 비극적 과정과 변신의 논리를 밝히는 데 있다. 아울러 저자는 단순히 이완용 한 개인에 의해 우리나라가 구한말의 격동의 세계사 속에서 나라를 잃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록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에 의해 망했지만 왕실(특히 고종과 민비, 대원군 등)과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외세의 침략을 불러들인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강조한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출세가도를 달리며 친미, 친러, 친일파로 표변하면서 결국 나라를 팔아먹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구한말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0세가 되던 해인 1867년 먼 친척이었던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당시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과는 친구이자 사돈이기도 했다. 25세에 임오군란이 평정되고 충북 장호원에 피신해 있던 민비가 무사히 환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증광별시(增廣別試) 문과에 급제한 이완용은 4년 후인 1886년 규장각 대교(待敎)로 임명되면서부터 관직의 길에 들어선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이완용은 두 번째 인생의 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이 바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한 것이다. 조정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육영공원은 비록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9년만에 폐교하지만, 이것을 인연으로 이완용은 카멜레온적 인생의 변신과정의 첫 단추인 친미파로의 길을 걷게 된다. 즉 1887년 새로 개설된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고, 2년여의 미국 생활은 그에게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완용의 조카 김명수가 남긴 『일당기사』(一堂紀事, 1927)에서 그가 “나의 지나온 바를 말한다면 최초 25세경에는 종래 조선인이 목적으로 삼았던 문과에 급제했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미국과의 교제가 점점 긴요해졌기 때문에 그때 신설된 육영공원에 입학하여 미국에 가게 되었다. 갑오경장 후 을미년에 이르러 아관파천 사건으로 러시아당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후 일러전쟁이 끝났을 때 여기에서 전환하여 현재의 일본파라는 칭호를 얻었다. 때에 따라 마땅한 것을 따를 뿐 달리 길이 없다. 무릇 천도(天道)에 춘하추동이 있어 이를 변역(變易)이라 하며 인사(人事)에 동서남북이 있어 이 또한 변역이라 한다. 천도와 인사가 때에 따라 변역하지 않으면 이는 실리를 잃어 끝내 성취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점은, 이후 그의 인생행로의 전체 구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다. 즉 그는 시세(時勢)에 따라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거듭났고, 특히 을사조약 이후부터는 친일파로서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 결국 매국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떻게 보면 당시 조정을 이끌어가던 지배집단의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속성을 대표하는 사람이 이완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을사오적을 비롯해 당시 친일인사 대부분과 친미파였건 친러파였건 지도층 인사 대부분이 그러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물며 고종과 민비, 대원군조차 외세에 기대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으니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은 을사조약을 맺는 1905년까지 친러파에서 차츰 친일파로 변모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매국의 길에 들어선다. 아관파천 직후 외부대신이 된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 등 이권을 무더기로 외국에 넘겨주기 시작한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이 땅에서 세력을 키워나간 러시아는 베베르와 스페예르 공사를 앞세워 노골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비록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완용이었지만 수구파가 다시 득세하고 러시아가 원치 않던 고종 환궁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그는 러시아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가 외부대신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무렵 이완용은 앞서 언급했듯이 독립협회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며, 러시아의 침략정책(절영도 조차 요구와 한러은행 개설 등)과 군사교관, 재정고문 철수를 요구한 만민공동회 개최에도 적극적으로 임한다. 당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완용과 서재필의 결단에 의해 열리게 된 만민공동회에 대해 독립협회 연구로 유명한 신용하 명예교수(서울대, 사회학)는 그의 저서 『독립협회연구』(일조각, 2006)에서 1898년 3월 10일자 『윤치호영문일기』를 근거로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반대했다고”고 주장하고, 일부 연구자들도 『윤치호일기』를 인용해 이완용이 만민공동회 개최를 앞두고 당국의 압력을 의식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저자에 의하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편찬한 이 날짜의 영문 『윤치호일기』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는 사실이 본문 186~88쪽에 걸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아울러 당시 새롭게 부임한 러시아 공사 스페예르는 러시아의 영토와 세력 확장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팽창주의자며 제국주의자였는데, 그런 그에게 이완용은 군사교관 파견 거부 등 자신의 계획에 반대한 인물로 “그는(이완용)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사람 중에서 가장 나쁜 인간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는 어떤 벼슬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독립, 독립을 외치는 친미 그룹의 우두머리다. 나는 이 그룹을 없애버릴 것이니 두고 보라”고까지 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단국대 사학과 김원모 교수는 그가 번역한 『알렌의 일기』(단국대학교출판부, 2004)에서 이 발언을 미국공사 알렌이 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역시 저자의 자료조사에 의해 밝혀진다(본문 183쪽 참조).
그러나 기세등등하던 러시아는 삼국간섭(1895) 결과 일본이 청나라에 되돌려준 요동반도를 차지하여 부동항을 확보하게 되자, 1898년 갑자기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친러 수구파가 득세한 이 시기에 이완용은 지방 관찰사에 밀려나 있었지만 그들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재입각함으로써 다시금 중앙정계에 발을 들여놓고 주지의 사실처럼 본격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게 된다.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더 이상 거칠 것 없이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현실순응적 태도로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
국내 연구자에 의해 이완용에 대해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사료에 근거에 바로잡다
이완용은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부터 시작해서 아관파천, 독립협회 활동, 을사조약, 정미7조약, 한일합방, 식민통치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 고비마다 관련되지 않은 곳이 없다. 시대사로서 이 시기를 다룬 역사서는 많지만 격동의 구한말 시기를, 그것도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한 이완용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개인 이완용에 초점을 맞춰 1999년 국내에서 최초로 『이완용 평전』을 펴낸 당시,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찬사를 받은바 있다. 10여 년 만에 개정판을 펴내는 이 책에서 저자는 상세한 주석과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역사적 사실(앞서 신용하 교수와 김원모 교수의 연구 사례)을 사료에 근거해 바로잡음으로써 좀 더 완성도를 높였다.
매국노로만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이완용에 대해 저자는 역사적 사실과 사료에 근거해 그가 어떻게 애국자에서 매국노로 변절해갔는지를 밝혀내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 선비였던 그가 권력을 잡자 시세에 영합하며 국운을 좌지우지했던 점은 우리가 역사적 교훈으로 반드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단 저자의 말처럼 망국에 이르는 과정에서 결코 이완용만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민비나 대원군이 역사와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 역시 이완용의 그것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고, 고급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망국과 매국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지메이며 그를 속죄양으로 삼은 대다수 매국노들의 비열한 책임전가라는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 윤덕한(尹德漢)
194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대전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1972년 경향신문에 제13기 견습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ㆍ경제부ㆍ외신부 등에서 근무했다. 1980년 전두환 군부의 언론검열과 광주학살 왜곡보도에 항의, 신문제작 거부운동을 벌이다 해직되었으며, 이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88년 경향신문에 복직되어 국제부 차장, 사회부 차장, 정치2부장, 심의위원, 기획취재부장 등을 역임한 후 1995년 퇴사하였다. 1999년 도서출판 중심을 설립해 2007년까지 운영한 바 있으며, 현재는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친일인명사전』 집필위원으로 참가했다. 논문으로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에 대한 국내언론 보도태도와 그것이 남북관계에 미친 영향」이 있으며, 저서로 『소설 재벌신문』(움직이는 책, 1995),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공저, 다섯수레, 2000)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개정판을 내면서
책머리에
1. 문제의 제기, 『독립신문』의 일관된 이완용 찬양과 비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의 몇 째 안 가는 재상’
2. 보잘것없는 양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우봉 이씨 시조묘를 찾아 개축한 이완용
3. 첫 번째 인생의 전기, 명문대가로의 입양
양부 이호준은 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
시문과 서예를 즐긴 전형적 조선 선비의 풍모
벼슬길 시작부터 세자를 가르친 온건 개화파
4. 두 번째 인생의 전기, 신식 교육과의 만남
이완용은 세계화 논리의 증조 할아버지
5. 초대 주미 공사관원으로 워싱턴에 부임하다
청국의 간섭과 험난한 부임 과정
서양인 남녀 승객들의 망측한 무도회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을 만나다
서구 사회를 가장 깊이 있게 관찰한 친미파 원조
6. 알렌의 지원으로 30대에 학부대신이 되다
주일 전권공사 부임 거부
정동파의 대표로 일본세력 배격에 앞장서다
학부대신으로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다
7. 아관파천을 주도하다
대원군의 민비살해와 미국 공사관 피신
파천 당일 대신 감투를 세 개나 쓰다
8. 외부대신으로서 무더기로 외국에 이권을 넘겨주다
경인철도 부설권 허가와 뇌물수수 혐의
9.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이끌다
독립협회 위원장에 선출되다
외부대신직을 걸고 러시아의 군사교관 파견을 거부하다
만민공동회 개최 다음날 전북 관찰사로 쫓겨가다
공금 유용혐의로 전북 관찰사에서 해임당하다
10. 매국의 길로 들어서다
8년 만의 학부대신 재입각
을사조약에 찬성하다
엄귀비 방으로 뛰어든 한규설
보호조약의 최고 책임자는 고종이다
11. 이토를 대신해 고종을 퇴위시키다
이토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이 되다
“황실과 나라를 지키는 길은 양위밖에 없다”
12. 이토 암살에 넋을 잃고
황태자의 소사(少師)가 되다
‘며느리와 사통했다’ 삼척동자도 노래 불러
서울시 일원에 사흘간 가무음곡 금지명령
13. 이재명 의사의 칼을 맞다
일진회의 합방 주장에 반대하다
대한의원 입원실에서 맞은 ‘경술년’ 새해 아침
14. 이름뿐인 나라마저 일제에 넘겨주다
“그물 속으로 물고기가 뛰어 들어왔다”
15. 총독정치에 적극 협력하다
일본 천황과 조선 왕실에 똑같이 충성을 바치다
3·1운동과 동족을 향한 협박
16. 학교비 납부 거부 소동과 여론의 집중 비난
조선 귀족 중 민영휘 다음의 두 번째 재산가
17. 화려한 장례식, 고종 국장 이후 최대의 장례 행렬
생전의 영광이 죽어서도 이어지다?
18. 이완용만 매국노인가
비열한 책임전가와 역사의 이지메
이완용 관련 연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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