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창덕궁, 조선왕조 문화의 화려한 꽃
오백 년 세월이 만들어낸 그 어긋남의 미학
정치, 건축, 그림, 조경에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까지
열 한명의 전문가가 그 장엄하고 미려한 역사와 실존을 읽어내다
『창덕궁 깊이 읽기』 기획의도
국립고궁박물관의 왕실문화 기획총서 제3권으로 『창덕궁 깊이 읽기』가 출간되었다. 김동욱, 유홍준, 박정혜, 황정연, 박상진, 최종희, 권선정, 김영운, 양정석, 박수희, 서영희 등 각계의 11명 전문가가 2011년 국립고공박물관의 ‘왕실문화 심층탐구’ 교양강좌를 바탕으로 전면 재집필한 이번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창덕궁을 그야말로 심층적으로 들여다본 본격 궁궐연구서이다. 파란만장한 창덕궁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운 건축과 조경, 어마어마한 회화와 공예, 그리고 조선 최고의 음악과 춤, 마지막으로 궁궐의 전통 풍수와 나무들의 식생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창덕궁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5대 궁궐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공간 구성을 지닌 아름다운 궁궐이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왕의 사랑을 받았던 궁궐이자 조선왕조 최고의 문화가 집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임금이 사는 도성을 수선首善이라고 했듯이 왕조 시대에 임금은 모든 사람의 으뜸이면서 본보기로 여겨졌다.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궁궐에 모이고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 관리가 되어 궁궐에서 일하고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춘 장인들이 궁궐을 위해 봉사했다. 궁궐은 당대 모든 제도와 사상과 문화의 최고봉을 장식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조선 전기까지 궁궐을 대표하는 곳은 정궁으로 지은 경복궁이었고 창덕궁은 이궁에 지나지 않았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위상은 달라졌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들이 소실된 뒤 경복궁은 복구되지 못하고 260여 년을 비워진 채로 지냈다. 대신 임금이 거처하는 법궁法宮의 자리를 이어받은 곳이 창덕궁이었다. 최고 수준의 건축과 조경이 여기에 담기고 최고의 회화작품이 이곳을 그려냈으며 가장 세련된 음식과 복식,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이곳에서 발현되었다. 장엄함의 절정에 도달한 음악이 연주되고 화려함의 극치를 다한 춤이 이곳에서 피로되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가장 철저하게 유린되고 파괴된 곳이 궁궐이었다. 장대한 전각들이 철거당한 것은 물론이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모든 궁궐의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 궁궐은 문화유적의 보존 대상에서도 철저히 외면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부터 중요 유물들이 보물이나 고적 등으로 지정하기 시작해 1943년까지 보물 419점, 고적 145점, 천연기념물 133점, 고적 및 명승 4점이 지정·고시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궁궐은 단 한 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960년에 와서 비로소 경복궁이 사적으로 지정된 일을 꼽을 수 있으며 1962년에 와서 창덕궁과 창경궁, 덕수궁이 사적에 포함되었다. 궁궐이 이처럼 홀대되었으니 학자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사이에 소중한 유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다행스럽게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라에서도 궁궐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 연구자들의 관심도 모아지기 시작했다. 궁궐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의궤의 중요성이 연구자들에게 인식되어 연구 성과가 서서히 나왔다. 음악이나 공연 분야가 이 일에 앞장을 섰다. 또 음식과 복식이 그 뒤를 이었다. 과천에 서울대공원이 개장되어 창경원의 동물들이 과천으로 이사하면서 창경궁이 본래의 모습을 조금 되찾았다. 이어서 창덕궁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궁궐 복구와 정비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청사를 철거하고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궁궐을 연구하는 이들도 늘어났으며 분야도 크게 다양해졌다. 회화에서부터 공예, 음식, 공연은 물론 궁궐 역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논저가 나오고 건축이나 조경에 대한 연구 성과도 쌓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창덕궁의 건축과 조경, 회화, 공예, 음악과 춤, 풍수, 그리고 근대기에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창덕궁 깊이 읽기』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은 총 11개의 장으로 나눠서 창덕궁을 다루고 있다. 조선왕조 5백년의 건축기법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창덕궁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먼저 다루고, 조선시대에 그려진 궁궐도를 통해 창덕궁의 전체적인 모습과 이모저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왕의 얼굴을 화폭에 담는 어진 제작의 현장이었던 창덕궁 선원전의 설치와 운영의 실태를 들여다보는가 하면, 그 넓고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로 인하여 비원秘苑으로 불리는 창덕궁의 후원을 구조적으로 뜯어보기도 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에 가장 화려한 잔치가 열린 현장이었다. 그 잔치를 빛낸 궁중음악과 춤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탐구했다. 또한 풍수를 통해 창덕궁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선조들이 궁궐에 담아놓은 자연의식을 읽어냈으며, 1만5000그루가 넘는 창덕궁의 나무들을 통해 각 나무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기억과 풍광을 겹쳐서 읽어내기도 했다. 비운의 군주 헌종의 서화수장 취미가 펼쳐졌던 창덕궁 낙선재의 기억을 보듬어보았으며, 대한제국 최후의 정전인 인정전의 건축사를 시대별로 살펴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창덕궁의 벽화를 하나하나 선별해 깊이 읽기를 시도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기도 했던 창덕궁의 근대시기 모습을 영친왕과 덕혜옹주라는 창을 통해 되새김해보았다.
우리는 창덕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요 장별로 보는 창덕궁의 이모저모
1장은 창덕궁의 건축을 다룬다. 경복궁은 주요 전각을 남북에 일렬로 배치해, 왕이 남쪽을 향해 앉아서 관청이나 백성들의 살림집을 내려다보도록 함으로써 통치자의 위상을 드러낸 점이 돋보인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언덕과 골짜기가 발달한 아늑한 지형에 건물을 맞춰 동서 방향으로 자유스럽게 배치하여 편안하게 거처하도록 한 의도가 잘 드러났다. 이처럼 창덕궁의 건물 배치가 보이는 특징은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그 모습을 간직했다. 이렇듯 창덕궁은 굴곡이 많은 지형 조건 속에서 편안히 머물 곳을 마련함과 동시에 궁궐의 의례와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는데, 김동욱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첫째는 연속해서 꺾이는 진입이 가져오는 시선 변화의 풍부함이다. 둘째는 크고 작은 비대칭 공간이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율동감이다. 셋째는 좌우 방향으로 전개되는 건물배치가 주는 편의성이다. 창덕궁의 전각 중 석조물은 15세기까지 건립 연대가 올라가고 목조 건물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시기의 것들이 남아 있다. 시기를 넘나드는 건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만 기본적인 배치는 달라지지 않았고 형태도 서로 간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아서 전체적으로는 시대를 뛰어넘는 통일성과 통합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창덕궁은 1405년에 처음 세워지고 20세기에 와서 순종 황제가 숨을 거둘 때까지 500년 넘는 기간 동안 궁으로 활용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건물이 지어졌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으며 그중 몇 안 되는 건축물이 처음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는 처음 지었을 때 만들었던 금천교가 있고, 17세기 이후에는 목조건물 중 일부가 각 시대를 대표해서 잘 남아 있다. 조선시대 건축은 500년 긴 시간을 거치면서 부단히 변화하고 달라졌다. 초기의 건축은 왕조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이 반영된 듯 힘차고 씩씩한 외관이 드러나며 16세기에는 조금씩 유연한 변화를 보이다가 17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자재를 아끼면서 조금씩 장식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19세기에 이르면 생활의 편의가 강조되며 치장이 한층 과도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2장은 붓끝에서 살아난 창덕궁을 만나는 공간이다. 우리의 기대만큼 궁중기록화에 창덕궁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한 아쉬움을 19세기의 진하도陳賀圖 병풍들이 모두 상쇄시켜준다. 19세기에 들어서 궁중기록화에 나타나는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가 문무백관이 궁궐의 정전에 모여 진하를 올리는 광경을 그린 진하도가 관청의 기념화로서 매우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844년(헌종 11) 헌종이 계비를 맞아들인 것을 칭경하는 진하례를 그린 「헌종가례진하도병憲宗嘉禮陳賀圖屛」은 왼편에서 사선으로 부감하는 평행 사선구도를 사용하여 인정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전각을 파노라마식으로 포치하였으므로 상당히 장엄한 궁궐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시각의 범위는 서쪽 금호문金虎門에서 희정당熙政堂까지 외전 중심인데, 모든 건물을 다 그리지 않고 주요 건물 위주로 선별적인 묘사를 하였다. 「서총대친림사연도瑞?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19일 신하들에게 내린 곡연曲宴(궁중에서 왕이 베풀던 비공식적인 작은 연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서총대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화면에는 곡연 장면이 그려졌지만 사실 곡연을 베풀기 전에 문신은 시를 지어 올리고 무신은 짝지어 활쏘기를 행했던 순서가 있었다. 중종대에 철거된 서총대는 야트막한 대臺로 바뀌었으며 그 주변은 너른 공간임을 말해주듯 아무런 묘사가 없다. 좀 더 구체적인 서총대 주변의 모습은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후대에 모사한 「서총대친림사연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주변의 바위와 나무, 개울의 포치는 실제의 경관이 많이 가미된 듯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서총대에 오르기 위한 계단이 마치 정전正殿의 월대와 같은 형식으로 그려진 점은 1564년에 완성된 원작과 대비된다. 원작의 서총대는 그저 낮고 단순하며 계단도 없는 대臺로만 그려졌는데 이러한 차이가 15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인지 상상이 가미된 관념적 표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3장은 비운의 군주 헌종의 문예취미라는 창으로 보는 창덕궁이다. 수렴청정과 스물세 살의 나이에 절명한 탓에 거의 그 존재가 무시되어온 헌종. 그러나 유홍준 교수는 헌종에게는 헌종 나름의 인생이 있었다고 말문을 연다. 헌종은 교양이 넘치는 군주로 열정적인 문예취미 활동을 펼쳤다. 헌종의 서화취미 활동은 자신이 짓고 생활하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齊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는 낙선재 뒤편에 있는 승화루承華樓 서고에 많은 도서와 서화 인장을 수집해놓았는데,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에 실린 그 소장 목록을 보면 양과 질 모두에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헌종이 서화가들과 서화를 함께 즐겼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이 지은 『소치실록小癡實錄』, 일명 『몽연록夢緣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소치는 1848년(헌종 14) 신관호申觀浩의 안내를 받아 낙선재로 헌종을 알현하러 가게 되었다. 그 과정을 소치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무신년(1848) 8월 27일, 우수영 수사水使 신관호가 특사特使를 시켜 내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뜯어보니 임금(헌종)께서 부르신다는 내용이었지요. 약간의 추사 글씨를 갖고 들어오라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 우수영에게 재촉하여 9월 13일 서울에 도착했지요. 초동椒洞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려 임금께 바치는 것을 매일 일과로 삼았으며, 가지고 온 서축은 대내大內에 진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치가 마침내 낙선재로 헌종을 알현한 것은 이듬해 정월이었다. 낙선재에 들어서니 추사의 현판이 많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이듬해인 기유년(1849, 헌종 15) 1월 15일 나는 비로소입시入侍했습니다. (…) 화초장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가니 바로 상감께서 평상시 거처하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의 것이 많더군요.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치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리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상감께서는 기쁜 빛을 띠시고 가까이 와 앉으라고 분부하시고는 좌우에 있는 사람을 시켜 벼룻집을 열어 먹을 갈라고 분부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손수 양털로 된붓 두 자루를 쥐고 붓뚜껑을 빼어 보이시며 ‘이것이 좋은가, 아니면 저것이 좋은가 마음대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 또 평상平床을 가져다놓으라 하시오나, 운필하기에 불편하다고 아뢰니 곧 서상을 거두라고 하시고는 당선唐扇 한 자루를 내어놓고 손가락 끝指頭으로 그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매화를 손가락 끝指頭으로 그리고 화제?題를 썼습니다.” 이어서 소치는 임금과 축을 맞잡고 황공망의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고 한다. “상감께서는 또 오래된 그림 족자 한 개를 내어놓는데 길이는 두 자쯤 되어 보이더군요. 상감께서 손수 그 윗부분을 잡으시고 나더러 그 두루마리를 풀게 하시는데 나에게 아랫부분을 잡도록 했습니다. 다 펴놓고 이 그림이 어떻냐고 물으시기에 ‘이것은 원나라 황공망의 산수화 진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그림을 감상하신 뒤에 한쪽에 펴놓으시고 다시 소동파의 진품 첩책을 가져다 끝에 고목과 대나무와 돌을 그리라고 분부하시기에 바로 그렸습니다.” 이후에도 소치는 여러 차례 헌종의 부름을 받고 낙선재로 들어가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서화를 함께 감상했다.
4장은 창덕궁이 어진을 그리는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어진을 그리는 데에는 용안容顔을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와 어진을 보고 그리는 모사摸寫가 있었던 만큼 제작 전반을 담당하는 임시관청 역시 때에 따라 도사도감과 모사도감으로 나뉘어 설치되었다. 어용을 그릴 화가를 뽑는 일은 국왕과 실무자들에게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털끝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전통적인 초상화관觀이 뜻하듯, 주인공의 외형과 내면을 아우른 진실한 모습은 결국 화가의 붓끝에서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원은 자신이 맡는 분야와 그 비중에 따라 주관主管화원과 동참同參화원, 수종隨從화원으로 나뉘었다. 주관화원(‘화사’라고도 함)은 어진의 초草를 잡고 주요 부위를 그리는 중심 역할을 했고, 그를 도와 동참화원은 의복 등을 색칠했으며, 수종화원은 보조 역할을 하면서 화업을 배우는 이들이었다. 어진이 완성된 후 이들은 자신들이 해낸 역할에 따라 차등을 두어 포상받았다. 생존하는 국왕의 어용을 그릴 때 화가들은 직접 왕의 얼굴을 뵐 기회를 얻기도 했다. 1713년 자신의 어용이 그려질 당시 숙종은 햇빛이 밝은 낮에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잠시 확인하는 것을 허락했고, 1902년 고종과 순종은 도사가 이뤄졌던 덕수궁 정관헌에 무려 50차례나 나아가 화가가 자신을 자세히 보고 그리도록 했다. 어진을 온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진전眞殿’은 조선 임금들의 영정을 봉안했던 곳을 아울러 부르는 용어다. 태종의 의지에 힘입어 궐내에 가장 먼저 운영된 진전은 인소전仁昭殿이었다. 인소전이 비록 진전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혼전으로 쓰이면서 그 기능이 바뀌자, 경복궁에 선원전을 세워 열성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으로 사용했다. 선원전은 위에서 말한 경복궁 인소전의 후신後身으로, 종묘처럼 열성의 초상을 봉안함으로써 선왕의 위업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을 확대하고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56년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다시 세워져 이곳을 주로 이용했다. 이때 건립된 신원전이 오늘날 ‘구舊선원전’(문헌에는 ‘원선원전元璿源殿’)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궐도」에 그려진 (구)선원전의 모습을 보면, 인정전 서쪽에 일직선의 행각이 있고 가운데 부분에 선원전의 정문인 연경문衍慶門이 있으며 그 문을 들어서면 (구)선원전이 있다. 창덕궁 (구)선원전은 창건 이후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함에 따라 1725년과 1754년 등 몇 번에 걸쳐 중수했지만, 창건 당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이 인정되어 1985년 보물 제817호로 지정되었다.
5장은 오백 년 왕의 숨결과 함께한 창덕궁의 꽃과 나무를 다룬다. 오늘날 창덕궁에 자라는 나무는 1만6708그루다. 이 숫자는 대략 줄기 지름 6센티미터가 넘는 나무를 가리킨다. 종種수는 94종이며 통계 수치에 들지 않은 작은 관목이나 덩굴나무 등까지 합하면 100종이 넘는다. 가장 많은 종은 참나무로 전체 나무 숫자의 약 23.5퍼센트 되는 3922그루이고, 때죽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순으로 그 뒤를 잇는다. 또 참나무 중에는 갈참나무가 1367그루로 전체 참나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창덕궁에선 네 가지 수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모전 앞의 약 700년 된 제194호 향나무, 후원 깊숙이 대보단 터의 600년 된 제251호 다래나무, 관람지 입구의 400년 되었다는 제471호 뽕나무,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의 300~400년 된 제472호 회화나무 8그루가 천연기념물이다. 복사나무는 왕실과 인연이 깊다. 1420년(세종 2) 모후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병은 낫지 않았다” 하며, 1503년(연산군 9)에는 “대궐의 담장 쌓을 곳에다 복숭아 가지에 부적을 붙여 예방하게 하라” 하였고, 1506년(중종 원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사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동궐도」에 보면 후원은 거의 소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대나무와 함께 상록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1436그루나 자라며 다섯 번째로 많은 나무이지만 소나무의 존재감은 그렇게 높지 않다. 일제강점기 동안 후원을 거의 방치하면서 소나무는 다른 활엽수에 밀려 차츰 사라졌기 때문이다.
6장은 창덕궁 후원을 가꾼 이들의 마음을 엿본다. 창덕궁은 자연지세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건축을 조영하고 이 안에다 하늘과 땅과 자신을 하나로 합일시키려는 고도의 철학적 자연관을 심어 넣었다. 이를 토대로 ‘자연스러움,’ ‘자유분방성’, ‘단순함’ 등의 조영의식을 벼려내고 ‘형상과 물성의 조화’, ‘정신성의 형태화’, 즉 관계성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특히 창덕궁 후원은 눈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자연을 제공해 잘 짜인 아름다움의 저류를 흐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특히 부용정 일원을 보자. 이곳은 축선으로 둘로 나뉘어 전혀 경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주합루 화계에 심겨진 나무들과 부용지 섬의 나무와 식물들이 곡선의 형태를 띠기 때문으로, 인공미와 자연미가 상생적으로 순응한 것이다. 정원의 가치는 올라서 내려다볼 때 어떠한 시야를 확보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주합루 아래에 서서 바라다보면 주합루 화계 상위 2단을 제외하고 부용정 뒤편의 수림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즉 연꽃이 둥둥 뜬 부용정과 뒤쪽 수림을 감상할 수 있다. 규장각원 중에는 혹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기는 왕의 모습을 보곤 했던 자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주합루 2층 누에 올라섰을 때는 어수문 끝단과 부용정 뒤편의 수림 부분까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원에서 주합루 일대가 가장 높은 건물로 지어졌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한편 공간 구성에 있어 이 일대는 창덕궁 안 내의원을 옆으로 하고 석담을 낀 채 북쪽으로 뻗은 통로를 따라가다 언덕을 지나면 왼쪽으로 훤하게 펼쳐진 곳이 나타난다.
7장에서는 동궐을 꽃피운 잔치·의식의 춤과 음악을 만난다. 조선 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거행된 연향은 순조 초부터 고종 초에 이르는 70여 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로 자리잡았던 때로, 고종 초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복궁이나 경운궁(현 덕수궁)이 그 중심 공간이 되었다. 국연이 열리면 대개 국연의 설행 목적이나 성격에 따라 여러 차례의 잔치가 마련된다. 국왕이 주빈일 때는 대소 신료들이 참여하는 외연이 정전에서 열리며, 이어서 왕실의 종친·내외명부 등이 참여하는 내연이 또다른 곳에서 치러진다. 같은 장소에서 야연이 열리는 것이 보통이며, 그다음 날에는 회작會酌과 야회작이 열린다. 긴 연회가 끝나면 잔치 음식은 가자架子라 불리는 들것에 실려 종친과 고관대작의 집에 보내졌다. 음식 한 가지씩을 한지에 포장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전해 받는 음식이 달랐다. 국연에서 주악을 맡았던 악대 중에는 특이하게도 군대음악을 연주하는 악대도 있는데, 어가의 행차를 앞서 이끌거나 선유락·항장무項莊舞를 반주하는 데 쓰였던 내취內吹가 그것이다. 오늘날 대취타大吹打로 알려진 이 악대는 궁중 선전宣傳관청의 악대로, 요즈음의 군악대원과 같은 취고수吹鼓手들이 연주했다. 이들 내취의 악기도 의궤의 ‘내취악기도’로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고, 도병圖屛에 악대의 모습이 남아 전한다. 조선시대 궁중정재 중에서 독무로 추는 춤은 춘앵전과 무산향인데, 이 둘은 춤추는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특이한 공통점을 지녔다. 춘앵전은 화문석 한 장을 깔고 무용수가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추는 춤이고, 무산향은 마루처럼 짠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추는 춤이다. 이 둘은 조선시대 궁중 무용이 지니는 절제의 미美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즉 매우 좁은 공간에서 차분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감정을 극도로 조절하며 표현하던 춤이다.
8장 창덕궁과 풍수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정치적 관계였다. 창덕궁은 왜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고 태종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을까. 그곳 자리가 풍수상 경복궁보다 명당자리여서 그랬던 것일까? 한양의 내룡來龍 맥세를 보면 국도 한양의 중심이 되는 주산主山은 경복궁이 기대는 북악산(백악산)이고 창덕궁이 기대는 산세는 사신사四神砂 가운데 청룡 맥세를 이루는 응봉 자락이다. 최고 지존의 위치에 있는 왕이 풍수상 최고의 명당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풍수 이외에 다른 요인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경복궁은 태종이 왕자 시절 세자로 책봉되었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芳碩과 방번芳蕃 그리고 그 일파를 제거한 골육지쟁의 참극을 겪었던 곳이다(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대개 이런 경우 풍수를 공유하고 있던 당시 상황으로는 경복궁 터와 관련된 풍수 옷을 입힌 이야기들이 떠돌기 마련이다. 마치 경복궁의 터가 좋지 못해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이다. 또한 창덕궁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세종대 국도 주산 문제다. 지리학인(풍수학인) 최양선이 북악산 주산을 부정하며, 문헌기록상 지금의 운니동·계동·가회동 사이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승문원 자리로 이어지는 산세를 한양의 새로운 주산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특히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곳 승문원 터로 창덕궁을 옮기면 만세의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풍수를 통한 주산 논쟁에서 세종은 새로운 주산설을 제기한 최양선의 입장을 어느 정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이는 세종에게 있어서 선친이 머무르는 창덕궁을 한양의 중심으로 만들 수도 있는 국도 주산 논쟁이 결코 불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찬반논쟁의 요지에는 모두 풍수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 만일 세종대 주산 논쟁에서 창덕궁 옆의 승문원 기지설이 채택되었다면 창덕궁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 조선의 법궁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덕궁을 중심으로 놓으면 한양의 공간 구성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현 서울의 모습도 오늘날과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조선의 법궁으로 창덕궁이 유지되는 운명은 피할 수 없었던 듯하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이 폐허가 된 뒤 궁궐 복원사업에서 창덕궁이 영건 대상이 되어 조선의 법궁으로 고종대까지 유지되는 것이다. 이때에도 경복궁 영건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풍수적 해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당시 궁궐 복원의 주체였던 광해군은 단종이 세조에 의해 쫓겨나고 연산군이 폐위되었던 현장인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꺼렸다. 그럼에도 결국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것은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특히 광해군은 지금의 파주 지역인 교하交河 천도를 계획하기까지 해 신하들과 무수한 격론을 벌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창덕궁은 역사상 주요 왕들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을 가질 수밖에 없는 궁궐이었다. 그만큼 정치적인 권력관계가 중심이 되는 국도 한양에서 창덕궁의 풍수는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구성되어온 것이리라.
9장은 창덕궁의 중심 중의 중심 인정전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지으면서 정면 3칸의 규모로 조영된 뒤 1418년(세종 즉위년)에 정면 5칸으로 확장되어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궁궐이 전소될 때 인정전 역시 소실되었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모습을 되찾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정전 앞 광장의 품계석은 정조대(1777)에 설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내전 대부분이 타버리는 와중에도 모습을 지켰던 인정전은 1803년 선정전 서쪽 행각의 화재로 다시 불탔다. (…) 알현도 일제에 강제병합된 뒤에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창덕궁 인정전에도 그 격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황제 폐하’라는 칭호를 쓸 수 없었으며 격을 낮춰 ‘왕 전하’라고 해야 했다. 이에 따라 주권자의 존엄을 의미하는 인정전의 옥좌 또한 폐기되었던 것이다. 이후 만들어진 한 엽서는 알현을 받던 3단으로 구성된 대좌가 사라지고 어좌만 남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전으로서 알현의 장소였던 인정전 역시 다른 궁궐의 정전과 마찬가지로 쓰임새가 바뀐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이후의 역사를 정리한 『순종실록부록』(3권 5년 5월 2일)에 “인정전, 비원, 창경원을 특별히 종람하는 것을 허가하는 취급 규정을 외방에 고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3년 뒤인 1915년 최초의 친일 잡지인 『신문계新文界』(제3권 제8호)에 실린 최찬식의 「창덕궁배관기昌德宮拜觀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 글에 따르면 관람객은 궁문을 경위하는 경관이 소개한 안내자와 동행하여 창덕궁을 관람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인정전의 관람 코스는 인정문에 들어가서 서쪽의 익랑 복도를 따라 식당과 휴게소를 지나 정실正室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정전으로 향하는 관람로가 서쪽 행각 내부에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그런데 동편 익랑 방향으로는 관람을 하지 않는데, 안내자는 이곳에 옥돌부玉突部, 지금의 당구장이 있다고 했다. 사실 이 동편 행각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이왕가만의 공간이었다. 이왕 전하로서의 순종이 데라우치 총독 일행과 찍은 기념사진에는 대한제국 시기와도 다른 좀더 변화된 인정전이 보인다. 이 사진을 통해 인정전의 이중 기단에는 마치 테라스처럼 테이블과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고 이곳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눴을 총독 일행을 그려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정전은 실제 쓰임새가 있는 건물이 아닌 보여주기 위한 전시 공간으로서 역할하는 일종의 세트장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왕 전하, 즉 순종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안에서 왕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10장은 조선 왕실의 장식화와 창덕궁의 벽화를 다룬다. 이 장에서는 근대의 전환기인 1900년에서 1920년 사이 조선 왕실을 장식했던 그림을 살펴보고, 192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규모 왕실 화사?事였던 창덕궁 벽화의 제작과 그 특징을 조망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을 체결해 한반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식민화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왕실로 들어온 일본 화가들은 주로 황실에서 활동하면서 어진을 그리거나 궁중 회화를 제작했다. 일본인 화가들이 주로 맡았던 일 가운데 하나는 궁궐장식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을 장악한 시점에서 장식 그림의 일본화日本化를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일본의 정치적 의도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나이 덴로쿠金井天祿의 후스마에 4폭은 그 좋은 예다. 「산수도」와 「노안도」가 4폭 앞뒤로 그려진 이 후스마에를 그린 가나이는 어전에 들어 휘호를 썼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화가들의 그림으로 조선 궁궐이 일본식으로 꾸며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몇몇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마쿠사 신라이의 송학도 벽화는 현존하지 않으나 어전에 그려 바친 것으로 보이는 「수하쌍록도樹下雙鹿圖」 6폭 병풍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이처럼 조선 왕실의 실내 장식화가 일본화로 꾸며지는 것에 대해 조선 왕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김은호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고종 어진을 그리기 위해 궁에 들어갔을 때 이미 일본 화가가 이왕직 차관의 중계로 고종의 어진을 그리게 되어 그 자신은 순종의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이에 고종은 자신의 초상을 일본 화가에게 맡기는 것에 불만을 느껴 김은호에게 각별히 호의를 보이며 어진 제작에 적극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왕실 구성원들이 일본 화가들의 어전 휘호활동에 대해 내심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궐의 장식 그림을 제작할 도화서 화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터에 일본화로 궁궐이 뒤덮이는 것을 막을 방법도 마땅치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192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규모 궁궐장식화 제작 작업은 순수 조선 화가들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조선왕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창덕궁 벽화는 모두 6점으로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벽에 각각 2점씩 붙여졌다. 화가들은 자신이 맡은 주제를 극채極彩의 북종화법으로 완성했는데 크기는 희정당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가 약 가로 9미터, 세로 2미터이고, 대조전의 「백학도白鶴圖」와 「봉황도鳳凰圖」는 약 가로 6미터, 세로 2미터, 경훈각의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는 약 가로 5미터, 세로 2미터의 대작들이다.
11장은 창덕궁에 비친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이다. 1931년 첫아들 이진이 사망한 뒤 10년 만에 다시 아들 구玖를 얻은 영친왕은 이방자와 함께 한때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북경군 사령부로 혹은 만주로 파견되는 등 일본 군인으로서 참전해야만 했다. 일본 군부는 영친왕을 전쟁터에 파견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의 참전 의욕을 높인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 같고, 이 때문에 해방 뒤에 한국민들은 영친왕의 친일 경력을 시비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황실의 남자들은 모두 일본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1923년 일본에 끌려간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는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사망했다. 그는 일본 측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여의 끈질긴 투쟁 끝에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던 인물인데, 그의 형 이건李鍵이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가 결국 이혼하고 나중에 일본에 귀화해버린 것과는 대비된다.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는 엄비 사망 이후인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나이 61세에 얻은 고명딸이다.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노년의 고종에게 유일한 낙이었던 덕혜옹주를 위해 고종은 덕수궁 내에 유치원을 설립해 황족 아이들과 함께 교육시킬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덕혜옹주가 여덟 살 되던 해에는 영친왕처럼 일본에 끌려가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까지 시켰다. 하지만 고종이 사망한 뒤 창덕궁 관물헌에 옮겨 생활하던 덕혜옹주는 1921년부터 일본인 자녀들과 함께 히노데日出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소학교 생활 중 음악, 무용, 그림 등에 특별한 재주를 보이며 총명했던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5일, 열네 살의 나이로 역시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1930년 조발성 치매증이란 진단을 받고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던 중 조금 차도가 있자, 일제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옹주를 강제로 결혼시켜버렸다. 양친은 물론 순종 황제까지 사망한 마당에 덕혜옹주의 결혼을 반대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도 일본 여인과 결혼한 영친왕은 이러한 결혼을 반대할 처지가 못 되었고, 의친왕 이강공의 장남 이건도 일본 황족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하는 등 한일 간의 강제 결혼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덕혜옹주까지 일본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이제 대한제국 황실은 완전히 일본과 동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작가 소개
엮음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의 전시 · 연구, 과학적 보존처리, 교육을 담당하는 문화재청 소속 왕실박물관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992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에 설립한 ‘궁중유물전시관’을 통합하여 2005년 8월 15일, 1개층 5개 전시실로 개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후 2007년 11월, 3개층 12개 전시실로 전관 개관하여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의 역사 ·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하는 조선왕실 전문박물관으로서, 16회 특별전과 2회 작은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연간 140여만 명이 찾는 한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성장하였다. 2012년에는 왕실유물의 보다 안정적인 보존환경을 위해서 2월 초부터 6개월간 휴관하면서,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와 전시기법을 반영하고, 스토리텔링을 강화하여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면적인 전시실 개편으로 2012년 8월 1일 새롭게 문을 열었다
▣ 주요 목차
왕실문화 기획총서를 펴내며
책머리에|조선왕조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전당, 창덕궁
창덕궁에 스며든 오백 년 세월, 그 어긋남의 미학
건축적 아름다움은 어떻게 완성되는가_김동욱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붓끝에서 살아난 창덕궁
그림으로 살펴본 궁궐의 이모저모_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부 교수
비운의 왕, 뛰어난 문예취미
낙선재에서 이뤄진 헌종의 서화 수장_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왕의 얼굴을 화폭에 담다
창덕궁 선원전과 조선 왕들의 어진 제작_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오백 년 왕의 숨결과 함께한 창덕궁의 꽃과 나무
「동궐도」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살펴본 궁궐의 식물_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그 넓은 후원을 가꾼 이들의 마음을 엿보다
창덕궁 후원 구조적으로 읽기_최종희 배재대 생명환경디자인학부 교수
동궐을 꽃피운 예술의 절정
잔치와 의식을 빛낸 조선의 춤과 음악_김영운 한양대 국악과 교수
조선의 서울 자리를 겨루다
풍수로 창덕궁 읽기_권선정 전 서원대 지리교육과 교수
대한제국 최후의 정전正殿, 인정전
한인무용韓人無用의 개조_양정석 수원대 사학과 교수
조선 왕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다
근대 조선 왕실의 장식화와 창덕궁 벽화 읽기_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
영친왕과 덕혜옹주_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양학과 교수
주註 /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 지은이
창덕궁, 조선왕조 문화의 화려한 꽃
오백 년 세월이 만들어낸 그 어긋남의 미학
정치, 건축, 그림, 조경에서 대한제국 최후의 숨결까지
열 한명의 전문가가 그 장엄하고 미려한 역사와 실존을 읽어내다
『창덕궁 깊이 읽기』 기획의도
국립고궁박물관의 왕실문화 기획총서 제3권으로 『창덕궁 깊이 읽기』가 출간되었다. 김동욱, 유홍준, 박정혜, 황정연, 박상진, 최종희, 권선정, 김영운, 양정석, 박수희, 서영희 등 각계의 11명 전문가가 2011년 국립고공박물관의 ‘왕실문화 심층탐구’ 교양강좌를 바탕으로 전면 재집필한 이번 책은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인 창덕궁을 그야말로 심층적으로 들여다본 본격 궁궐연구서이다. 파란만장한 창덕궁의 역사부터 시작하여, 아름답고 신비로운 건축과 조경, 어마어마한 회화와 공예, 그리고 조선 최고의 음악과 춤, 마지막으로 궁궐의 전통 풍수와 나무들의 식생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창덕궁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5대 궁궐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룬 독특한 공간 구성을 지닌 아름다운 궁궐이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왕의 사랑을 받았던 궁궐이자 조선왕조 최고의 문화가 집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임금이 사는 도성을 수선首善이라고 했듯이 왕조 시대에 임금은 모든 사람의 으뜸이면서 본보기로 여겨졌다. 최고 수준의 학자들이 궁궐에 모이고 가장 모범적인 사람들이 관리가 되어 궁궐에서 일하고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갖춘 장인들이 궁궐을 위해 봉사했다. 궁궐은 당대 모든 제도와 사상과 문화의 최고봉을 장식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조선 전기까지 궁궐을 대표하는 곳은 정궁으로 지은 경복궁이었고 창덕궁은 이궁에 지나지 않았지만 17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위상은 달라졌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들이 소실된 뒤 경복궁은 복구되지 못하고 260여 년을 비워진 채로 지냈다. 대신 임금이 거처하는 법궁法宮의 자리를 이어받은 곳이 창덕궁이었다. 최고 수준의 건축과 조경이 여기에 담기고 최고의 회화작품이 이곳을 그려냈으며 가장 세련된 음식과 복식,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이곳에서 발현되었다. 장엄함의 절정에 도달한 음악이 연주되고 화려함의 극치를 다한 춤이 이곳에서 피로되었다.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가장 철저하게 유린되고 파괴된 곳이 궁궐이었다. 장대한 전각들이 철거당한 것은 물론이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모든 궁궐의 문화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 궁궐은 문화유적의 보존 대상에서도 철저히 외면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부터 중요 유물들이 보물이나 고적 등으로 지정하기 시작해 1943년까지 보물 419점, 고적 145점, 천연기념물 133점, 고적 및 명승 4점이 지정·고시되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궁궐은 단 한 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1960년에 와서 비로소 경복궁이 사적으로 지정된 일을 꼽을 수 있으며 1962년에 와서 창덕궁과 창경궁, 덕수궁이 사적에 포함되었다. 궁궐이 이처럼 홀대되었으니 학자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 사이에 소중한 유물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없어졌다. 다행스럽게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나라에서도 궁궐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에 따라 연구자들의 관심도 모아지기 시작했다. 궁궐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의궤의 중요성이 연구자들에게 인식되어 연구 성과가 서서히 나왔다. 음악이나 공연 분야가 이 일에 앞장을 섰다. 또 음식과 복식이 그 뒤를 이었다. 과천에 서울대공원이 개장되어 창경원의 동물들이 과천으로 이사하면서 창경궁이 본래의 모습을 조금 되찾았다. 이어서 창덕궁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궁궐 복구와 정비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청사를 철거하고 경복궁에 대한 전면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궁궐을 연구하는 이들도 늘어났으며 분야도 크게 다양해졌다. 회화에서부터 공예, 음식, 공연은 물론 궁궐 역사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논저가 나오고 건축이나 조경에 대한 연구 성과도 쌓였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창덕궁의 건축과 조경, 회화, 공예, 음악과 춤, 풍수, 그리고 근대기에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았다.
『창덕궁 깊이 읽기』의 구성과 내용
이 책은 총 11개의 장으로 나눠서 창덕궁을 다루고 있다. 조선왕조 5백년의 건축기법을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창덕궁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먼저 다루고, 조선시대에 그려진 궁궐도를 통해 창덕궁의 전체적인 모습과 이모저모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왕의 얼굴을 화폭에 담는 어진 제작의 현장이었던 창덕궁 선원전의 설치와 운영의 실태를 들여다보는가 하면, 그 넓고 아름답고 그윽한 정취로 인하여 비원秘苑으로 불리는 창덕궁의 후원을 구조적으로 뜯어보기도 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에 가장 화려한 잔치가 열린 현장이었다. 그 잔치를 빛낸 궁중음악과 춤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탐구했다. 또한 풍수를 통해 창덕궁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조명함으로써 우리의 선조들이 궁궐에 담아놓은 자연의식을 읽어냈으며, 1만5000그루가 넘는 창덕궁의 나무들을 통해 각 나무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기억과 풍광을 겹쳐서 읽어내기도 했다. 비운의 군주 헌종의 서화수장 취미가 펼쳐졌던 창덕궁 낙선재의 기억을 보듬어보았으며, 대한제국 최후의 정전인 인정전의 건축사를 시대별로 살펴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창덕궁의 벽화를 하나하나 선별해 깊이 읽기를 시도했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기도 했던 창덕궁의 근대시기 모습을 영친왕과 덕혜옹주라는 창을 통해 되새김해보았다.
우리는 창덕궁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주요 장별로 보는 창덕궁의 이모저모
1장은 창덕궁의 건축을 다룬다. 경복궁은 주요 전각을 남북에 일렬로 배치해, 왕이 남쪽을 향해 앉아서 관청이나 백성들의 살림집을 내려다보도록 함으로써 통치자의 위상을 드러낸 점이 돋보인다. 이에 비해 창덕궁은 언덕과 골짜기가 발달한 아늑한 지형에 건물을 맞춰 동서 방향으로 자유스럽게 배치하여 편안하게 거처하도록 한 의도가 잘 드러났다. 이처럼 창덕궁의 건물 배치가 보이는 특징은 세월이 흘러 조선왕조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고 그 모습을 간직했다. 이렇듯 창덕궁은 굴곡이 많은 지형 조건 속에서 편안히 머물 곳을 마련함과 동시에 궁궐의 의례와 행사를 치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냈는데, 김동욱 교수는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첫째는 연속해서 꺾이는 진입이 가져오는 시선 변화의 풍부함이다. 둘째는 크고 작은 비대칭 공간이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율동감이다. 셋째는 좌우 방향으로 전개되는 건물배치가 주는 편의성이다. 창덕궁의 전각 중 석조물은 15세기까지 건립 연대가 올라가고 목조 건물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시기의 것들이 남아 있다. 시기를 넘나드는 건물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만 기본적인 배치는 달라지지 않았고 형태도 서로 간의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아서 전체적으로는 시대를 뛰어넘는 통일성과 통합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 창덕궁은 1405년에 처음 세워지고 20세기에 와서 순종 황제가 숨을 거둘 때까지 500년 넘는 기간 동안 궁으로 활용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건물이 지어졌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으며 그중 몇 안 되는 건축물이 처음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는 처음 지었을 때 만들었던 금천교가 있고, 17세기 이후에는 목조건물 중 일부가 각 시대를 대표해서 잘 남아 있다. 조선시대 건축은 500년 긴 시간을 거치면서 부단히 변화하고 달라졌다. 초기의 건축은 왕조 초기의 진취적인 기상이 반영된 듯 힘차고 씩씩한 외관이 드러나며 16세기에는 조금씩 유연한 변화를 보이다가 17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자재를 아끼면서 조금씩 장식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19세기에 이르면 생활의 편의가 강조되며 치장이 한층 과도해지는 변화를 보인다.
2장은 붓끝에서 살아난 창덕궁을 만나는 공간이다. 우리의 기대만큼 궁중기록화에 창덕궁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다. 그러한 아쉬움을 19세기의 진하도陳賀圖 병풍들이 모두 상쇄시켜준다. 19세기에 들어서 궁중기록화에 나타나는 커다란 특징 중의 하나가 문무백관이 궁궐의 정전에 모여 진하를 올리는 광경을 그린 진하도가 관청의 기념화로서 매우 유행하였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1844년(헌종 11) 헌종이 계비를 맞아들인 것을 칭경하는 진하례를 그린 「헌종가례진하도병憲宗嘉禮陳賀圖屛」은 왼편에서 사선으로 부감하는 평행 사선구도를 사용하여 인정전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전각을 파노라마식으로 포치하였으므로 상당히 장엄한 궁궐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시각의 범위는 서쪽 금호문金虎門에서 희정당熙政堂까지 외전 중심인데, 모든 건물을 다 그리지 않고 주요 건물 위주로 선별적인 묘사를 하였다. 「서총대친림사연도瑞?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19일 신하들에게 내린 곡연曲宴(궁중에서 왕이 베풀던 비공식적인 작은 연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서총대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화면에는 곡연 장면이 그려졌지만 사실 곡연을 베풀기 전에 문신은 시를 지어 올리고 무신은 짝지어 활쏘기를 행했던 순서가 있었다. 중종대에 철거된 서총대는 야트막한 대臺로 바뀌었으며 그 주변은 너른 공간임을 말해주듯 아무런 묘사가 없다. 좀 더 구체적인 서총대 주변의 모습은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후대에 모사한 「서총대친림사연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주변의 바위와 나무, 개울의 포치는 실제의 경관이 많이 가미된 듯 현장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서총대에 오르기 위한 계단이 마치 정전正殿의 월대와 같은 형식으로 그려진 점은 1564년에 완성된 원작과 대비된다. 원작의 서총대는 그저 낮고 단순하며 계단도 없는 대臺로만 그려졌는데 이러한 차이가 15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인지 상상이 가미된 관념적 표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3장은 비운의 군주 헌종의 문예취미라는 창으로 보는 창덕궁이다. 수렴청정과 스물세 살의 나이에 절명한 탓에 거의 그 존재가 무시되어온 헌종. 그러나 유홍준 교수는 헌종에게는 헌종 나름의 인생이 있었다고 말문을 연다. 헌종은 교양이 넘치는 군주로 열정적인 문예취미 활동을 펼쳤다. 헌종의 서화취미 활동은 자신이 짓고 생활하던 창덕궁 낙선재樂善齊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그는 낙선재 뒤편에 있는 승화루承華樓 서고에 많은 도서와 서화 인장을 수집해놓았는데, 『승화루서목承華樓書目』에 실린 그 소장 목록을 보면 양과 질 모두에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헌종이 서화가들과 서화를 함께 즐겼다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소치小癡 허련許鍊(1809~1892)이 지은 『소치실록小癡實錄』, 일명 『몽연록夢緣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소치는 1848년(헌종 14) 신관호申觀浩의 안내를 받아 낙선재로 헌종을 알현하러 가게 되었다. 그 과정을 소치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무신년(1848) 8월 27일, 우수영 수사水使 신관호가 특사特使를 시켜 내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뜯어보니 임금(헌종)께서 부르신다는 내용이었지요. 약간의 추사 글씨를 갖고 들어오라는 말도 적혀 있었습니다. (…) 우수영에게 재촉하여 9월 13일 서울에 도착했지요. 초동椒洞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려 임금께 바치는 것을 매일 일과로 삼았으며, 가지고 온 서축은 대내大內에 진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치가 마침내 낙선재로 헌종을 알현한 것은 이듬해 정월이었다. 낙선재에 들어서니 추사의 현판이 많이 걸려 있었다고 했다. “이듬해인 기유년(1849, 헌종 15) 1월 15일 나는 비로소입시入侍했습니다. (…) 화초장을 지나 낙선재에 들어가니 바로 상감께서 평상시 거처하는 곳으로 좌우의 현판 글씨는 완당의 것이 많더군요. 향천香泉, 연경루硏經樓, 유재留齋, 자이당自怡堂, 고조당古藻堂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치는 헌종 앞에서 그림을 그리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상감께서는 기쁜 빛을 띠시고 가까이 와 앉으라고 분부하시고는 좌우에 있는 사람을 시켜 벼룻집을 열어 먹을 갈라고 분부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손수 양털로 된붓 두 자루를 쥐고 붓뚜껑을 빼어 보이시며 ‘이것이 좋은가, 아니면 저것이 좋은가 마음대로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 또 평상平床을 가져다놓으라 하시오나, 운필하기에 불편하다고 아뢰니 곧 서상을 거두라고 하시고는 당선唐扇 한 자루를 내어놓고 손가락 끝指頭으로 그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매화를 손가락 끝指頭으로 그리고 화제?題를 썼습니다.” 이어서 소치는 임금과 축을 맞잡고 황공망의 그림을 함께 감상했다고 한다. “상감께서는 또 오래된 그림 족자 한 개를 내어놓는데 길이는 두 자쯤 되어 보이더군요. 상감께서 손수 그 윗부분을 잡으시고 나더러 그 두루마리를 풀게 하시는데 나에게 아랫부분을 잡도록 했습니다. 다 펴놓고 이 그림이 어떻냐고 물으시기에 ‘이것은 원나라 황공망의 산수화 진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그림을 감상하신 뒤에 한쪽에 펴놓으시고 다시 소동파의 진품 첩책을 가져다 끝에 고목과 대나무와 돌을 그리라고 분부하시기에 바로 그렸습니다.” 이후에도 소치는 여러 차례 헌종의 부름을 받고 낙선재로 들어가 임금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서화를 함께 감상했다.
4장은 창덕궁이 어진을 그리는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어진을 그리는 데에는 용안容顔을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와 어진을 보고 그리는 모사摸寫가 있었던 만큼 제작 전반을 담당하는 임시관청 역시 때에 따라 도사도감과 모사도감으로 나뉘어 설치되었다. 어용을 그릴 화가를 뽑는 일은 국왕과 실무자들에게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털끝 하나만 달라도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便是他人’라는 전통적인 초상화관觀이 뜻하듯, 주인공의 외형과 내면을 아우른 진실한 모습은 결국 화가의 붓끝에서 완성되기 때문이었다. 어진 제작에 참여한 화원은 자신이 맡는 분야와 그 비중에 따라 주관主管화원과 동참同參화원, 수종隨從화원으로 나뉘었다. 주관화원(‘화사’라고도 함)은 어진의 초草를 잡고 주요 부위를 그리는 중심 역할을 했고, 그를 도와 동참화원은 의복 등을 색칠했으며, 수종화원은 보조 역할을 하면서 화업을 배우는 이들이었다. 어진이 완성된 후 이들은 자신들이 해낸 역할에 따라 차등을 두어 포상받았다. 생존하는 국왕의 어용을 그릴 때 화가들은 직접 왕의 얼굴을 뵐 기회를 얻기도 했다. 1713년 자신의 어용이 그려질 당시 숙종은 햇빛이 밝은 낮에 화가가 자신의 얼굴을 잠시 확인하는 것을 허락했고, 1902년 고종과 순종은 도사가 이뤄졌던 덕수궁 정관헌에 무려 50차례나 나아가 화가가 자신을 자세히 보고 그리도록 했다. 어진을 온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세워진 ‘진전眞殿’은 조선 임금들의 영정을 봉안했던 곳을 아울러 부르는 용어다. 태종의 의지에 힘입어 궐내에 가장 먼저 운영된 진전은 인소전仁昭殿이었다. 인소전이 비록 진전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혼전으로 쓰이면서 그 기능이 바뀌자, 경복궁에 선원전을 세워 열성의 어진을 봉안한 진전으로 사용했다. 선원전은 위에서 말한 경복궁 인소전의 후신後身으로, 종묘처럼 열성의 초상을 봉안함으로써 선왕의 위업과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을 확대하고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56년 창덕궁 인정전 서쪽에 다시 세워져 이곳을 주로 이용했다. 이때 건립된 신원전이 오늘날 ‘구舊선원전’(문헌에는 ‘원선원전元璿源殿’)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궐도」에 그려진 (구)선원전의 모습을 보면, 인정전 서쪽에 일직선의 행각이 있고 가운데 부분에 선원전의 정문인 연경문衍慶門이 있으며 그 문을 들어서면 (구)선원전이 있다. 창덕궁 (구)선원전은 창건 이후 세월이 흘러 건물이 퇴락함에 따라 1725년과 1754년 등 몇 번에 걸쳐 중수했지만, 창건 당시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이 인정되어 1985년 보물 제817호로 지정되었다.
5장은 오백 년 왕의 숨결과 함께한 창덕궁의 꽃과 나무를 다룬다. 오늘날 창덕궁에 자라는 나무는 1만6708그루다. 이 숫자는 대략 줄기 지름 6센티미터가 넘는 나무를 가리킨다. 종種수는 94종이며 통계 수치에 들지 않은 작은 관목이나 덩굴나무 등까지 합하면 100종이 넘는다. 가장 많은 종은 참나무로 전체 나무 숫자의 약 23.5퍼센트 되는 3922그루이고, 때죽나무, 단풍나무, 팥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산벚나무 순으로 그 뒤를 잇는다. 또 참나무 중에는 갈참나무가 1367그루로 전체 참나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창덕궁에선 네 가지 수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모전 앞의 약 700년 된 제194호 향나무, 후원 깊숙이 대보단 터의 600년 된 제251호 다래나무, 관람지 입구의 400년 되었다는 제471호 뽕나무, 돈화문과 금천교 사이의 300~400년 된 제472호 회화나무 8그루가 천연기념물이다. 복사나무는 왕실과 인연이 깊다. 1420년(세종 2) 모후인 원경왕후가 위독해지자 “임금이 직접 복숭아 가지를 잡고 지성으로 종일토록 기도하였으나 병은 낫지 않았다” 하며, 1503년(연산군 9)에는 “대궐의 담장 쌓을 곳에다 복숭아 가지에 부적을 붙여 예방하게 하라” 하였고, 1506년(중종 원년)에는 “해마다 봄가을의 역질 귀신을 쫓을 때에는 복사나무로 만든 칼과 판자를 쓰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다. 「동궐도」에 보면 후원은 거의 소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대나무와 함께 상록수로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1436그루나 자라며 다섯 번째로 많은 나무이지만 소나무의 존재감은 그렇게 높지 않다. 일제강점기 동안 후원을 거의 방치하면서 소나무는 다른 활엽수에 밀려 차츰 사라졌기 때문이다.
6장은 창덕궁 후원을 가꾼 이들의 마음을 엿본다. 창덕궁은 자연지세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건축을 조영하고 이 안에다 하늘과 땅과 자신을 하나로 합일시키려는 고도의 철학적 자연관을 심어 넣었다. 이를 토대로 ‘자연스러움,’ ‘자유분방성’, ‘단순함’ 등의 조영의식을 벼려내고 ‘형상과 물성의 조화’, ‘정신성의 형태화’, 즉 관계성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특히 창덕궁 후원은 눈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자연을 제공해 잘 짜인 아름다움의 저류를 흐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생각,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특히 부용정 일원을 보자. 이곳은 축선으로 둘로 나뉘어 전혀 경직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주합루 화계에 심겨진 나무들과 부용지 섬의 나무와 식물들이 곡선의 형태를 띠기 때문으로, 인공미와 자연미가 상생적으로 순응한 것이다. 정원의 가치는 올라서 내려다볼 때 어떠한 시야를 확보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주합루 아래에 서서 바라다보면 주합루 화계 상위 2단을 제외하고 부용정 뒤편의 수림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즉 연꽃이 둥둥 뜬 부용정과 뒤쪽 수림을 감상할 수 있다. 규장각원 중에는 혹 부용정에서 낚시를 즐기는 왕의 모습을 보곤 했던 자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주합루 2층 누에 올라섰을 때는 어수문 끝단과 부용정 뒤편의 수림 부분까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후원에서 주합루 일대가 가장 높은 건물로 지어졌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한편 공간 구성에 있어 이 일대는 창덕궁 안 내의원을 옆으로 하고 석담을 낀 채 북쪽으로 뻗은 통로를 따라가다 언덕을 지나면 왼쪽으로 훤하게 펼쳐진 곳이 나타난다.
7장에서는 동궐을 꽃피운 잔치·의식의 춤과 음악을 만난다. 조선 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에서 거행된 연향은 순조 초부터 고종 초에 이르는 70여 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때는 창덕궁과 창경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로 자리잡았던 때로, 고종 초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복궁이나 경운궁(현 덕수궁)이 그 중심 공간이 되었다. 국연이 열리면 대개 국연의 설행 목적이나 성격에 따라 여러 차례의 잔치가 마련된다. 국왕이 주빈일 때는 대소 신료들이 참여하는 외연이 정전에서 열리며, 이어서 왕실의 종친·내외명부 등이 참여하는 내연이 또다른 곳에서 치러진다. 같은 장소에서 야연이 열리는 것이 보통이며, 그다음 날에는 회작會酌과 야회작이 열린다. 긴 연회가 끝나면 잔치 음식은 가자架子라 불리는 들것에 실려 종친과 고관대작의 집에 보내졌다. 음식 한 가지씩을 한지에 포장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전해 받는 음식이 달랐다. 국연에서 주악을 맡았던 악대 중에는 특이하게도 군대음악을 연주하는 악대도 있는데, 어가의 행차를 앞서 이끌거나 선유락·항장무項莊舞를 반주하는 데 쓰였던 내취內吹가 그것이다. 오늘날 대취타大吹打로 알려진 이 악대는 궁중 선전宣傳관청의 악대로, 요즈음의 군악대원과 같은 취고수吹鼓手들이 연주했다. 이들 내취의 악기도 의궤의 ‘내취악기도’로 그 모습을 그려볼 수 있고, 도병圖屛에 악대의 모습이 남아 전한다. 조선시대 궁중정재 중에서 독무로 추는 춤은 춘앵전과 무산향인데, 이 둘은 춤추는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특이한 공통점을 지녔다. 춘앵전은 화문석 한 장을 깔고 무용수가 그곳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추는 춤이고, 무산향은 마루처럼 짠 평상을 놓고 그 위에서 추는 춤이다. 이 둘은 조선시대 궁중 무용이 지니는 절제의 미美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즉 매우 좁은 공간에서 차분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감정을 극도로 조절하며 표현하던 춤이다.
8장 창덕궁과 풍수는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정치적 관계였다. 창덕궁은 왜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고 태종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을까. 그곳 자리가 풍수상 경복궁보다 명당자리여서 그랬던 것일까? 한양의 내룡來龍 맥세를 보면 국도 한양의 중심이 되는 주산主山은 경복궁이 기대는 북악산(백악산)이고 창덕궁이 기대는 산세는 사신사四神砂 가운데 청룡 맥세를 이루는 응봉 자락이다. 최고 지존의 위치에 있는 왕이 풍수상 최고의 명당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은 풍수 이외에 다른 요인이 있음을 짐작케 한다. 널리 알려졌듯이 경복궁은 태종이 왕자 시절 세자로 책봉되었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芳碩과 방번芳蕃 그리고 그 일파를 제거한 골육지쟁의 참극을 겪었던 곳이다(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대개 이런 경우 풍수를 공유하고 있던 당시 상황으로는 경복궁 터와 관련된 풍수 옷을 입힌 이야기들이 떠돌기 마련이다. 마치 경복궁의 터가 좋지 못해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고 말이다. 또한 창덕궁과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세종대 국도 주산 문제다. 지리학인(풍수학인) 최양선이 북악산 주산을 부정하며, 문헌기록상 지금의 운니동·계동·가회동 사이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승문원 자리로 이어지는 산세를 한양의 새로운 주산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특히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곳 승문원 터로 창덕궁을 옮기면 만세의 이점이 있을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풍수를 통한 주산 논쟁에서 세종은 새로운 주산설을 제기한 최양선의 입장을 어느 정도 보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목된다. 이는 세종에게 있어서 선친이 머무르는 창덕궁을 한양의 중심으로 만들 수도 있는 국도 주산 논쟁이 결코 불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찬반논쟁의 요지에는 모두 풍수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 만일 세종대 주산 논쟁에서 창덕궁 옆의 승문원 기지설이 채택되었다면 창덕궁은 역사적으로나 풍수적으로 조선의 법궁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창덕궁을 중심으로 놓으면 한양의 공간 구성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현 서울의 모습도 오늘날과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조선의 법궁으로 창덕궁이 유지되는 운명은 피할 수 없었던 듯하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이 폐허가 된 뒤 궁궐 복원사업에서 창덕궁이 영건 대상이 되어 조선의 법궁으로 고종대까지 유지되는 것이다. 이때에도 경복궁 영건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풍수적 해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당시 궁궐 복원의 주체였던 광해군은 단종이 세조에 의해 쫓겨나고 연산군이 폐위되었던 현장인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꺼렸다. 그럼에도 결국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것은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특히 광해군은 지금의 파주 지역인 교하交河 천도를 계획하기까지 해 신하들과 무수한 격론을 벌였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창덕궁은 역사상 주요 왕들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끈을 가질 수밖에 없는 궁궐이었다. 그만큼 정치적인 권력관계가 중심이 되는 국도 한양에서 창덕궁의 풍수는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구성되어온 것이리라.
9장은 창덕궁의 중심 중의 중심 인정전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인정전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지으면서 정면 3칸의 규모로 조영된 뒤 1418년(세종 즉위년)에 정면 5칸으로 확장되어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궁궐이 전소될 때 인정전 역시 소실되었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모습을 되찾았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정전 앞 광장의 품계석은 정조대(1777)에 설치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내전 대부분이 타버리는 와중에도 모습을 지켰던 인정전은 1803년 선정전 서쪽 행각의 화재로 다시 불탔다. (…) 알현도 일제에 강제병합된 뒤에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창덕궁 인정전에도 그 격에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제 ‘황제 폐하’라는 칭호를 쓸 수 없었으며 격을 낮춰 ‘왕 전하’라고 해야 했다. 이에 따라 주권자의 존엄을 의미하는 인정전의 옥좌 또한 폐기되었던 것이다. 이후 만들어진 한 엽서는 알현을 받던 3단으로 구성된 대좌가 사라지고 어좌만 남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전으로서 알현의 장소였던 인정전 역시 다른 궁궐의 정전과 마찬가지로 쓰임새가 바뀐다. 한일병합이 이뤄진 이후의 역사를 정리한 『순종실록부록』(3권 5년 5월 2일)에 “인정전, 비원, 창경원을 특별히 종람하는 것을 허가하는 취급 규정을 외방에 고시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내용은 3년 뒤인 1915년 최초의 친일 잡지인 『신문계新文界』(제3권 제8호)에 실린 최찬식의 「창덕궁배관기昌德宮拜觀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 글에 따르면 관람객은 궁문을 경위하는 경관이 소개한 안내자와 동행하여 창덕궁을 관람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인정전의 관람 코스는 인정문에 들어가서 서쪽의 익랑 복도를 따라 식당과 휴게소를 지나 정실正室에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인정전으로 향하는 관람로가 서쪽 행각 내부에 만들어져 있던 것이다. 그런데 동편 익랑 방향으로는 관람을 하지 않는데, 안내자는 이곳에 옥돌부玉突部, 지금의 당구장이 있다고 했다. 사실 이 동편 행각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이왕가만의 공간이었다. 이왕 전하로서의 순종이 데라우치 총독 일행과 찍은 기념사진에는 대한제국 시기와도 다른 좀더 변화된 인정전이 보인다. 이 사진을 통해 인정전의 이중 기단에는 마치 테라스처럼 테이블과 의자들이 배치되어 있고 이곳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눴을 총독 일행을 그려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정전은 실제 쓰임새가 있는 건물이 아닌 보여주기 위한 전시 공간으로서 역할하는 일종의 세트장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왕 전하, 즉 순종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그 안에서 왕의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10장은 조선 왕실의 장식화와 창덕궁의 벽화를 다룬다. 이 장에서는 근대의 전환기인 1900년에서 1920년 사이 조선 왕실을 장식했던 그림을 살펴보고, 192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규모 왕실 화사?事였던 창덕궁 벽화의 제작과 그 특징을 조망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사조약을 체결해 한반도를 완전히 손에 넣은 일본은 대한제국 황실의 식민화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왕실로 들어온 일본 화가들은 주로 황실에서 활동하면서 어진을 그리거나 궁중 회화를 제작했다. 일본인 화가들이 주로 맡았던 일 가운데 하나는 궁궐장식화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을 장악한 시점에서 장식 그림의 일본화日本化를 통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일본의 정치적 의도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가나이 덴로쿠金井天祿의 후스마에 4폭은 그 좋은 예다. 「산수도」와 「노안도」가 4폭 앞뒤로 그려진 이 후스마에를 그린 가나이는 어전에 들어 휘호를 썼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 화가들의 그림으로 조선 궁궐이 일본식으로 꾸며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몇몇 사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마쿠사 신라이의 송학도 벽화는 현존하지 않으나 어전에 그려 바친 것으로 보이는 「수하쌍록도樹下雙鹿圖」 6폭 병풍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전한다. 이처럼 조선 왕실의 실내 장식화가 일본화로 꾸며지는 것에 대해 조선 왕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김은호의 증언에 따르면 1912년 고종 어진을 그리기 위해 궁에 들어갔을 때 이미 일본 화가가 이왕직 차관의 중계로 고종의 어진을 그리게 되어 그 자신은 순종의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이에 고종은 자신의 초상을 일본 화가에게 맡기는 것에 불만을 느껴 김은호에게 각별히 호의를 보이며 어진 제작에 적극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왕실 구성원들이 일본 화가들의 어전 휘호활동에 대해 내심 부정적인 태도를 내비쳤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궐의 장식 그림을 제작할 도화서 화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터에 일본화로 궁궐이 뒤덮이는 것을 막을 방법도 마땅치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왕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1920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규모 궁궐장식화 제작 작업은 순수 조선 화가들에게 맡겨졌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조선왕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창덕궁 벽화는 모두 6점으로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벽에 각각 2점씩 붙여졌다. 화가들은 자신이 맡은 주제를 극채極彩의 북종화법으로 완성했는데 크기는 희정당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가 약 가로 9미터, 세로 2미터이고, 대조전의 「백학도白鶴圖」와 「봉황도鳳凰圖」는 약 가로 6미터, 세로 2미터, 경훈각의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는 약 가로 5미터, 세로 2미터의 대작들이다.
11장은 창덕궁에 비친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이다. 1931년 첫아들 이진이 사망한 뒤 10년 만에 다시 아들 구玖를 얻은 영친왕은 이방자와 함께 한때 행복한 생활을 했으나 중일전쟁 발발로 북경군 사령부로 혹은 만주로 파견되는 등 일본 군인으로서 참전해야만 했다. 일본 군부는 영친왕을 전쟁터에 파견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의 참전 의욕을 높인다는 전략을 세웠던 것 같고, 이 때문에 해방 뒤에 한국민들은 영친왕의 친일 경력을 시비하게 되었다. 사실 이때 황실의 남자들은 모두 일본군에 소속되어 참전했는데, 1923년 일본에 끌려간 의친왕의 차남 이우李?는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사망했다. 그는 일본 측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여의 끈질긴 투쟁 끝에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던 인물인데, 그의 형 이건李鍵이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가 결국 이혼하고 나중에 일본에 귀화해버린 것과는 대비된다.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인 덕혜옹주는 엄비 사망 이후인 1912년 5월 25일 고종의 나이 61세에 얻은 고명딸이다. 덕수궁에 유폐되어 있던 노년의 고종에게 유일한 낙이었던 덕혜옹주를 위해 고종은 덕수궁 내에 유치원을 설립해 황족 아이들과 함께 교육시킬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덕혜옹주가 여덟 살 되던 해에는 영친왕처럼 일본에 끌려가 정략결혼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까지 시켰다. 하지만 고종이 사망한 뒤 창덕궁 관물헌에 옮겨 생활하던 덕혜옹주는 1921년부터 일본인 자녀들과 함께 히노데日出 소학교에 다니게 된다. 소학교 생활 중 음악, 무용, 그림 등에 특별한 재주를 보이며 총명했던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5일, 열네 살의 나이로 역시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1930년 조발성 치매증이란 진단을 받고 영친왕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던 중 조금 차도가 있자, 일제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藩主의 아들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옹주를 강제로 결혼시켜버렸다. 양친은 물론 순종 황제까지 사망한 마당에 덕혜옹주의 결혼을 반대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신도 일본 여인과 결혼한 영친왕은 이러한 결혼을 반대할 처지가 못 되었고, 의친왕 이강공의 장남 이건도 일본 황족 마쓰다이라 요시코와 결혼하는 등 한일 간의 강제 결혼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덕혜옹주까지 일본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이제 대한제국 황실은 완전히 일본과 동화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 작가 소개
엮음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의 전시 · 연구, 과학적 보존처리, 교육을 담당하는 문화재청 소속 왕실박물관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1992년 10월 덕수궁 석조전에 설립한 ‘궁중유물전시관’을 통합하여 2005년 8월 15일, 1개층 5개 전시실로 개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후 2007년 11월, 3개층 12개 전시실로 전관 개관하여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의 역사 ·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시하는 조선왕실 전문박물관으로서, 16회 특별전과 2회 작은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연간 140여만 명이 찾는 한국의 대표적인 박물관으로 성장하였다. 2012년에는 왕실유물의 보다 안정적인 보존환경을 위해서 2월 초부터 6개월간 휴관하면서, 그간 축적된 연구 성과와 전시기법을 반영하고, 스토리텔링을 강화하여 국민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전면적인 전시실 개편으로 2012년 8월 1일 새롭게 문을 열었다
▣ 주요 목차
왕실문화 기획총서를 펴내며
책머리에|조선왕조 최고의 문화와 예술의 전당, 창덕궁
창덕궁에 스며든 오백 년 세월, 그 어긋남의 미학
건축적 아름다움은 어떻게 완성되는가_김동욱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붓끝에서 살아난 창덕궁
그림으로 살펴본 궁궐의 이모저모_박정혜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부 교수
비운의 왕, 뛰어난 문예취미
낙선재에서 이뤄진 헌종의 서화 수장_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왕의 얼굴을 화폭에 담다
창덕궁 선원전과 조선 왕들의 어진 제작_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오백 년 왕의 숨결과 함께한 창덕궁의 꽃과 나무
「동궐도」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살펴본 궁궐의 식물_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
그 넓은 후원을 가꾼 이들의 마음을 엿보다
창덕궁 후원 구조적으로 읽기_최종희 배재대 생명환경디자인학부 교수
동궐을 꽃피운 예술의 절정
잔치와 의식을 빛낸 조선의 춤과 음악_김영운 한양대 국악과 교수
조선의 서울 자리를 겨루다
풍수로 창덕궁 읽기_권선정 전 서원대 지리교육과 교수
대한제국 최후의 정전正殿, 인정전
한인무용韓人無用의 개조_양정석 수원대 사학과 교수
조선 왕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다
근대 조선 왕실의 장식화와 창덕궁 벽화 읽기_박수희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모습
영친왕과 덕혜옹주_서영희 한국산업기술대 교양학과 교수
주註 /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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