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여성 -그녀들의 가슴에 묻어 둔 518 이야기-

고객평점
저자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출판사항후마니타스, 발행일:2012/10/22
형태사항p.372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64371619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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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숨겨진 오월의 봄, 그녀들의 이야기,
여성 19인의 낮은 목소리로 들여다본 5·18,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일상사가 만들어 낸 그날의 실천들,
창녀들과 넝마주이, 더 낮은 곳을 바라보는 생생한 증언들…….


80년 5월, 그녀들이 묻어 둔 이야기가 봉인을 뚫고 나오다

5·18을 직접 체험한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생애사를 담은 이 구술집은 ‘80년 5월’의 기억뿐만 아니라 5·18을 전후로 한 그녀들의 전 생애를 담은 책이다. 당시 방송차를 타고 광주 시민들에게 현장의 실상을 알리는 데 힘썼던 전옥주 씨와 5·18 당시 수습대책위 활동을 했고, 항쟁 이후에는 교육 운동과 민가협 활동에 헌신한 현 오월어머니집 이사 이귀님 씨를 비롯한 구술 외에도, 두 차례에 걸친 좌담을 실어 여성 주체의 실천에 대한 각계각층의 해석과 논쟁, 그리고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 방법에 대한 논의를 더했다.

간호사, 시장 상인, 여공 등 당시 5·18 현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했던 여러 계층의 여성들의 구술로 구성된 이 책은, 무엇보다 그간 5·18담론에서 주변화되어 왔던 주체들, 즉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건네주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전면화하면서, ‘저항’의 의미와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책은 국가가 자행한 거대한 폭력 앞에서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그녀들이 어머니로서, 간호사로서, 노동운동가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자신과 주변인들의 삶을 지켜내고자 했는지를 생생히 드러내 준다.

또 전체 구성을 3부로 나누어, 평범한 이들의 어떤 삶이 5·18의 투쟁을 가능케 했고,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후에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부각시킨 것도 특징이다. 1부에는 5·18 이전 여성의 삶을 중점적으로 보여 주는 이들의 구술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시집살이를 견디며,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이어 가야 했던 시장 상인, 일용직 노동자 등의 삶과 자기 일터에서 노조를 결성하고 임금 인상 투쟁을 진행하며 5·18 투쟁을 예비했던 여공들의 삶이 펼쳐진다. 5·18 당시의 기억이 중심이 되는 구술로 구성된 2부에는 당시 방송차를 타고 다니며 현장 상황을 생생히 전달해 주었지만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던 전옥주 씨의 파란만장한 삶과, 부상자와 사망자로 가득한 병원에서 갖가지 참상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시체를 수습해야 했던 간호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5·18이 이들 여성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보여 주는 3부에서는 고등학교 때 5·18을 경험한 이후 대학에 와서 학생운동에 뛰어든 이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취직을 못해 생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운동을 멈추지 못한 여성들의 삶이 펼쳐진다.

80년 5월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70년대 한국 여성의 일상사가 5·18의 실천을 만들다
“총과 수류탄 대신 밥과 수의를 들고”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여성들의 전 생애를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은 60, 70년대 한국 여성들의 질곡 어린 삶을 보여 주면서 80년 5월 광주에서 이루어졌던 실천들이 바로 이들의 이전 삶 속에서 연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웅변해 주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딸이라는 이유로” 배운 것도 없이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여성들과 얼굴 한번 제대로 못보고 “돼지 팔려가듯” 결혼해 고된 시집살이를 견뎌 내고 병들거나 “자기 자유만 챙기는” 남편 대신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여인들, 배고프다는 자식들에게 풀을 쒀먹이면서도 질기게 악착같이 삶을 이어온 어머니로서의 그들의 삶이 이 책에는 가득하다. 그리고 광주 5·18은 바로 이런 이들이 시위 학생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내 자식 같고 이녁 동생 같은” 마음, “아무라도 배고프믄 먹여야 된다”는 생각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보듬었던 일들이 80년 5월 광주 공동체를 구성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노조를 조직화하며 5·18 투쟁을 예비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80년 5월 광주가 단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이 아니며, 그날 그곳에서 보여 주었던 많은 이들의 실천 역시 YWCA, JOC 등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에도 빚지고 있는 바가 크다는 것을 말해 준다.

80년 5월 거리에서 : 창녀들과 넝마주이, 더 낮은 곳을 바라보는 생생한 증언들

이 책의 구술에서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이들 여성이 들려주는, 아직도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더 낮은 곳의 목소리”에 대한 증언이다. 당시 방송차를 타고 시위 현장을 누볐던 전옥주 씨는, 술집에서 서럽게 번 돈으로 도청에 가서 향을 사다 피우고 무명옷을 사다가 시체에 입혔던 술집 아가씨들의 이야기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한다. 또 송희성 씨는 술집 여자들과 넝마주이들이 헌혈을 하러 온 이야기, “우리는 총 맞아 죽어도 된다”며 자신을 숨겨주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짓는다. 이런 이야기들은 5·18에서 여전히 가시화되지 못한 주체들의 공백을 채워 주는 동시에, 여전히 채워지지 못한 역사의 한켠을 과제로 남겨 두고 있기도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그 이후로 많이 변했제”

이 책은 5·18의 ‘현재’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5·18의 현재는 비단 이들이 과거에 입었던 물리적·정신적 상처의 후유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80년 5월이라는 과거의 경험은 이들에게 고문의 육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외상을 통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상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들의 현재 삶을 버티게 해주는 자부심과 자기 정체성의 원천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전옥주 씨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철저히 파괴된 일상을 견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긴” 전라도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 또 이정희 씨에게 광주는 5·18 이후 협박에 의해 회사를 그만두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 한번 못한 채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2억에 달하는 사측의 회유금을 뿌리치며 꿋꿋이 양심을 지킬 수 있었던 원천이었다. 5·18로 인해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들의 삶은 5·18이라는 체험이 이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고, 5·18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5·18 이후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갖가지 봉사 활동을 하며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삶을 돌보는 일을 멈추고 있지 않은 이들의 삶 역시 이 책의 이름 없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살려내고 있는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5·18은 잊힌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역사인 것이다.

광주, 여성들

김막님_____딸이 넷이어서 이름을 막님이라 했어라
화순에서 태어나 열일곱에 결혼해 주남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주남마을은 5월 27일 계엄군이 충정 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주둔하던 곳으로, 이들은 이곳에서 광주로 통하는 외곽 도로를 차단·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녀는 남편이 사망한 후, 일용직 근로자로 생활하다가 1980년을 맞았다. 1980년 5월 21일, 공수부대원들이 주남마을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녀는 마을 앞 하천둑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 일용 근로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무조건 총으로 쏴죽이던 그날 밤의 계엄군을 잊지 못하지만, 여전히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여백이 상당히 많다.

박수복_____우리가 다 그렇게 빨갱이로 보여요?
나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 공부를 곧잘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기집애가 공부해 봤자 시집가서 친정에다 편지나 쓴다”며 반대했다. 그래도 꾸준히 공민학교를 다니던 그녀는 이웃집 아줌마의 애 봐주는 일을 하다가 공부와 연이 끊겼다. 이후 “없이 사니까 공장 생활이라도 해야” 했던 그녀는 베 짜는 공장에 다니다 친구의 오빠를 만나 결혼했고, 이후에도 도시 공장으로 옮겨 일을 계속했다. 당시 그녀는 잠이 쏟아지는데도 일을 하다 베틀에 눈을 다쳐 실명한 동료를 지켜보아야 했고, 임금인상을 위한 데모도 해보았다. 그녀 역시 시집생활은 순탄치 않았는데, 시어머니가 혼수 문제를 들먹이고 딸을 낳았다고 구박하는 등의 이유로 속을 썩어야 했다. 게다가 남편은 정신병에 걸렸는데, 생계를 위해 옷장사를 시작한 그녀는 양동시장에서 5·18을 맞았다. 당시 그녀는 상인들과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했으며,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사망한 사촌 동생 박병규 씨의 시신을 망월동에서 수습해야 했다. 또 다른 사촌이 시위에 가담했다가 구속되어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난 가족사도 안고 있다. 이 경험 때문에 한동안 분노감을 안고 살았다. 지금도 양동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김동심_____내 자식 같고, 이녁 동생 같고
강진의 가우도라는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했다. 스물셋에 결혼해 10년 넘게 강진에서 살다 “이중인격을 쓰는”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피해 광주로 옮겨 대인시장에서 고추 방앗간을 열었다. 5·18 당시 시장 상인들과 함께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김동심 씨에게 5·18은 ‘징그럽게 무서운 전쟁’이자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현재도 여전히 대인시장에서 방앗간을 지키고 있으며, 어렸을 때 못했던 공부가 한이 되어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곽근례_____아무라도 배고프믄 살려야 돼
함평에서 태어난 그녀는 20세에 결혼해 시골에서 살다가 1980년에 광주로 이사했다. 광주 대인시장에 닭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가 바로 5·18을 만났다. 당시 시장 상인들과 함께 시민군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지금도 대인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하문순_____아야, 학생들이 굶고 있단다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22세에 결혼해 서울로 갔다가, 남편이 아프기 시작하자 남편 대신 생계를 책임지게 되면서 다시 광주로 왔다. 대인시장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한 지 3년이 됐을 때 5·18을 맞은 그녀는 “학생들이 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시 시장 상인들로부터 조금씩 돈을 걷고 재료를 얻어와 시민군에게 주먹밥을 만들어 보냈다. 비록 “먹고살기 바뻐” 시위 현장은 보지도 못했지만 뒤에서 하루에도 세 가마니씩 밥을 쪄서 보냈던 그녀는 그 와중에 “허리가 너무 아퍼서 펴다가” 우연히 찍힌 사진 때문에 지금도 기자들이 찾곤 한다. 평생 동안 아픈 남편을 돌보며 지금까지 리어카 행상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5·18 행사는 리어카 놓을 데가 없어 제대로 가보지 못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세상을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삶의 확신을 지니고 있다.

윤청자_____이 애리디애린 것들이 우리 여자를 보호한다고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8년, 호남전기에 여공으로 들어가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호남전기는 방위산업체로 노조를 결성할 수 없는 조건이었으나, “화장실에 오래 있지 말라고 똥도 안 퍼주는”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JOC 활동을 하면서 만난 김성애, 이정희, 추선숙 등과 함께 노조를 결성해 임금 인상 투쟁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노동운동에 몰두하던 와중 5·18을 만난 그녀는 도청에서 시신 수습을 위한 ‘국민장례위원회’에 참여해 활동했으며, “피 냄새, 땀 냄새, 시체 냄새가 펄펄” 나는 와중에도 밥을 해 날랐다. 5월 27일 마지막 밤까지 밥을 해주던 그녀는 “그 애리디애린 것들이 여자를 보호한다고” 가라는 말에 그곳을 떠나왔던 것을 지금도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이후 ‘가톨릭노동상담소’, ‘성요셉의집’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현재는 지역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작은 꽃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정희_____왜 때리는지, 이유나 알고 맞자
여수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6년, 호남전기에 입사해 김성애를 만나 JOC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후 전남 최초로 여성 노조 위원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 일에 대해 “남자가 어용으로 노조위원장을 할 때와 달리 여성 조합원에 대한 노동조합의 문턱을 낮췄다”고 이야기한다. 1979년 임금 인상 투쟁을 성공시키고 이듬해 5·18을 만나지만,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항쟁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5·18 직후 기무사로 끌려가 고문을 받으면서 ‘김대중 내란 음모’에 가담했다고 시인하든지, 회사에 사표를 쓰든지 결정하라는 협박에 시달리다 결국 사표를 쓰기로 하고 풀려난다. 이런 이력 때문에 더 이상 취업하지 못한 그녀는 지금까지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취직을 못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당당했던 과거에 대해서만은 자부심을 느끼며 살고 있다.

전옥주_____모든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 무용을 했던 그녀는 “운동가 하나 알고 있는 게 없었”지만, 친구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 왔다가 5·18 현장을 만나 항쟁 상황을 알리고 시민의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주도했다. 항쟁 중간에 계엄군에게 잡혀가 간첩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을 당한 그녀는 고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내가 방송을 안했으면 피해가 줄었을까”를 생각하다가도 그 일은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현재 수도권의 장애인 관련 신문사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박정자_____그때 그런 일 안 한 사람은 없겠죠, 다 내 일이었으니까
광주에서 태어난 박정자 씨는 속칭 ‘무등산 타잔 사건’으로 알려진 박흥숙 씨의 동생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이 사건을 이해해야만 읽어 나갈 수 있다. 이는 1970년대 무허가 빈민촌이 조성되어 있던 무등산 자락에 1977년 4월 20일 새벽, 철거반이 갑자기 들이닥쳐 집을 불태우며 철거를 시작하자 박흥숙이 이에 저항하면서 철거반 네 명을 숨지게 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광주 각계각층에서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결국 1980년 사형이 집행된다. 5·18 당시 박정자 씨는 어머니와 함께 대인시장 골목에서 만화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물건을 떼러 가던 도중에 금남로 일대에 전경들이 시민들을 쫓아다니며 “때려죽이는”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시위 현장을 매일 찾았고, 밥을 해서 도청 시민군에게 제공하는 역할도 했다. 지금도 오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빈민촌 노인들을 돌보던 오빠의 성품을 이야기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는, 용산 참사를 보면서도 그때를 떠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완도에서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다.

정순자_____더 많이 도와주지 못한 게 후회가 돼요
순천에서 태어난 그녀는 5·18 당시 기독병원 간호과장이었다. 당시 기독병원은 광주 시내 어느 병원보다도 부상자가 많이 몰렸던 곳이어서 부상자 치료와 시신 수습의 강도가 아주 높았고, 그녀의 구술 역시 “총에 맞아 발이 덜렁덜렁 해도 웃고 있는 전대생”이나 “헌혈한 여고생이 한 시간도 안 돼 총에 맞아 시체로 돌아온 이야기” 등을 통해 당시 긴박했던 상황과 참상을 생생히 전해 주고 있다. 당시 부상자들뿐만 아니라 “걸레가 된 시신”을 모아 수습하는 일까지 해야 했던 그녀는 충격 때문에 상당 기간 우울증과 분노감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더 많은 사람을 도와줄 걸”하고 후회가 된다고 말하는 그녀는 현재 은퇴하고도 독거노인을 돕는 사회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방귀례_____저놈들 다 죽겄다 싶응께 그걸 했제
남원에서 태어나 15세에 결혼해 농사를 짓고 살다가 자식들 교육 때문에 광주로 왔다. 5·18 이전에도 성당에서 시신을 염해 주는 봉사활동을 하던 그녀는 전남대 뒤에서 일어난 데모 광경을 목격한다. “저짝서 온 사람들은 총을 갖고 있는디, 우리 광주 사람들은 연장도 없이 손으로만 가던” 모습에 그녀는 자갈을 치마에다가 싸서 대학생들에게 전해주었다. 신부님으로부터 데모하던 학생들이 총에 맞아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전남대학교병원과 적십자병원으로 달려가 시신 수습 활동에 참여했다. “가마니때기에 싸인”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에 “어찌케 울면서 했는지, 기가 막혀 죽겄어”라고 말하는 그녀의 구술은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잘 전해준다. 이후로도 그녀는 15년째 빈민이나 독거노인의 시신을 염해 주는 봉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송희성_____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해남에서 태어난 그녀는 진보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나 대학 때는 최초로 대학생 계몽대(농활대)를 조직하는 등 학생운동에 열심이었으며, 대학 졸업 이후에도 “비서보다는 사회운동을 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 YWCA 활동, 유신 반대 운동 등을 했다. 5·18 당시에는 이웃 주민들을 모아 시신 수습을 위해 필요한 마스크와 장갑 등을 만들어 공급하고 도청에 밥과 간식을 날마다 배달했다는 이유로, 505 보안대 지하실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지금도 당시 넝마주이들이 “우리는 죽어도 된다”며 자신을 숨겨준 일화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5·18 이후에는 ““돈 벌어서 남 주자, 배워서 남 주자”는 신조로 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고 여성운동을 펼쳤으며, 법학 박사 학위를 따고 강단에 서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은 글 쓰는 것이지만 가만히 앉아서 글 쓰는 것이 울화통이 터져서 활동을 한다는 그녀는 현재 ‘한국여성지도자연합’ 광주·전남 회장, ‘오월민주여성회’ 회장, ‘우리겨레하나되기’ 광주·전남 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오경자_____간호사 나와라, 우리는 국군이다
화순에서 태어난 그녀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자신을 힘들게 키운 어머니의 권유로 간호사가 되었다. 1980년 당시 조선대학교병원 간호부장으로 있었던 그녀는 항쟁 초기에 조선대학교 체육관을 임시 주둔지로 쓰던 계엄군과 시민 부상자를 모두 치료한 경험을 갖고 있다. 병원에 들어온 학생들을 쫓아온 군인들과 젊은 의대생들 사이의 긴장감이나 환자와 보호자를 굶기지 않기 위해 밥 반 그릇 먹기 운동을 하고 의사나 간호사 모두 환자를 위해 자기 피를 내어 주던 당시 “야전병원” 같은 상황을 그녀의 증언은 생생히 전달해 주고 있다. 또 시체 검안을 위해 도청에 갔다가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파리약 위의 파리처럼 죽어 있는 광경을 이성을 가지고 볼 수가 없었던” 이야기도 나온다. 그녀는 지금도 “환자들 방에 한 번 더 가볼 걸”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기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모성이 간호의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정숙경_____5·18이 내 청춘을 다 가져갔어
남평에서 태어난 그녀는 1980년 당시 JOC 활동을 하면서 요한병원 상담사로 일하던 중 5·18을 만나 도청에 들어가 시민군에게 밥을 해주고 시체를 염하는 등의 일을 도왔다. 당시 들었던 총소리 후유증으로 지금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장애를 지니고 있다. 지금은 남편과 시골에서 버섯을 기르면서 살고 있다.

노영숙_____우리는 광주 가족이다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1978년 전남대학교 ‘교육 지표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후 5·18 때 다시 구속되었던 노준현 씨의 누나이다. 당시 노영숙 씨는 YWCA 청년부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구속된 이후 ‘5·18 구속자 가족협의회’ 결성에 참여해 구속자 석방 운동을 벌였다. 현재는 오월어머니집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현옥_____총알은 그냥 갖고 살아요
장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5·18 때 부상을 당했던 남편과 결혼했다. 지금까지 그 후유증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고통을 함께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쓰고 싶었던 이현옥 씨는 신춘문예로 등단해 현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순덕_____군인들한테 애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진보적 분위기의 중앙여고를 다니면서 박정희 시절부터 데모에 익숙했던 여고생이었다. 교직에 있는 남편과 결혼해 첫 아들의 돌이 막 지났을 때 5·18을 겪었다. 친구가 5·18 때 사망했으며, 이후 1987년 KAL기 폭파 사건 때도 친구를 잃어 유독 삶과 죽음의 문제에 고민이 많던 시간을 보냈다. 현재는 국악 관련 일을 하며 5·18 행사에도 참여하고 전라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다.

이귀님_____남편 뒷바라지가 아니라 빈자리를 채운 거야
광주 금남로 5가에서 태어났다. 1~3대 전교조 위원장을 역임했던 고 윤영규 선생과 결혼했다. 5·18 당시 수습대책위 활동을 한 남편과 함께 다양한 일에 관여했으며, 항쟁 이후에는 교육 운동과 민가협 활동에 헌신했다. 지금은 오월어머니집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정미례_____아줌마들이 움직여야 변화가 생겨요
광양에서 태어난 그녀는 1980년 당시 광주중앙여고 학생이었다. 당시 중앙여고는 상당히 진보적인 분위기여서 항쟁에 대한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5·18이라는 충격적 경험으로 인해 한동안 무력감에 시달리다, 대학 진학 후 이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학생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남편과 결혼해 생활하면서 지역운동과 여성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 왔다. 현재는 ‘성매매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 연대’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 작가 소개

기획 :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여성의 사회참여, 성평등, 민주사회를 목적으로 1999년 3월에 창립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 오고 있는 광주전남의 대표적인 여성운동 단체이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사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며,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을 좀 더 아름답고 평화롭게 가꾸는 일에 늘 앞장서고자 한다.

편자 : 이정우
광주의 신문?잡지사에서 몇 년간 기자로 일했다. 지금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간행물 작업, 문화평론 등을 하며 자유 기고가로 활동 중이다.

▣ 주요 목차

추천사
발간사
편집자의 말

1부 오월의 시작
김막님_____딸이 넷이어서 이름을 막님이라 했어라
박수복_____우리가 다 그렇게 빨갱이로 보여요?
김동심_____내 자식 같고, 이녁 동생 같고
곽근례_____아무라도 배고프믄 살려야 돼
하문순_____아야, 학생들이 굶고 있단다
윤청자_____이 애리디애린 것들이 우리 여자를 보호한다고
이정희_____왜 때리는지, 이유나 알고 맞자

2부 80년 5월, 거리에서
전옥주_____모든 시민들은 도청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박정자_____그때 그런 일 안 한 사람은 없겠죠, 다 내 일이었으니까
정순자_____더 많이 도와주지 못한 게 후회가 돼요
방귀례_____저놈들 다 죽겄다 싶응께 그걸 했제
송희성_____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오경자_____간호사 나와라, 우리는 국군이다

3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숙경_____5?18이 내 청춘을 다 가져갔어
노영숙_____우리는 광주 가족이다
이현옥_____총알은 그냥 갖고 살아요
정순덕_____군인들한테 애원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이귀님_____남편 뒷바라지가 아니라 빈자리를 채운 거야
정미례_____아줌마들이 움직여야 변화가 생겨요

1차 좌담
2차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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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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