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장준하, 그는 누구인가
191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평양 제42부대를 거쳐 중국 서주 쓰카다 부대로 전속되었으나 7월에 부대를 탈출한 뒤 무려 6,000리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중 한 분이다. 이후 OSS(미국 전략첩보대) 1기 훈련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국내 진입 훈련을 하던 중, 단 5일 차이로 해방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에 임정요인들과 귀국하여 김구 주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4월 한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계』를 창간하여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당 정권, 박정희 정권을 줄기차게 비판하면서 시대의 양심과 등불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스물일곱 번 연행되고 아홉 번 구속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상계』의 가치와 의의가 높은 평가를 받아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67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된 상태에서 제7대 총선에 서울 동대문(을)구 신민당 후보로 옥중 출마하여 1만 8,000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공화당의 강상욱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에 지원하여 수구 우익 세력들마저 감동시키는 가장 모범적인 국회의원직을 수행했으나 제8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부정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이라는 어이없는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75년 ‘제2차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 발표 3일 전인 그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검ㆍ경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원인이 ‘실족 추락사’라고 밝혔으나 75도 경사진 곳에서 15미터나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시신의 상태,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매번 엇갈리는 진술,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보온병의 유리가 전혀 깨지지 않은 점 등 숱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해 대표적인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8월 많은 비가 내려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는 재난을 당했고 2,000만 원이 넘는 공사비로 망연자실해 있던 유족에게 파주시에서 추모 공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 덕에 1년 뒤 묘소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37년 만에 선생의 유골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고, 누가 봐도 선명한 지름 6센티미터 크기의 가격흔(加擊痕)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결국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세력에 의해 타살되었으리라는 그간의 의혹이 진실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연히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2003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내린 최종 결정이 ‘진상규명 불능’이었다는 점을 들어 재조사를 반대하는 정부와 여당의 작태는 거대한 민심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인면수심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나꼼수’에서 밝힌 이야기는 30퍼센트에 불과하다
2003년 7월부터 1년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조사관은 처음에 이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난 8월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재촉이라도 하듯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방송 출연을 해오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 하는 많은 기자들에게 고 조사관은 자신이 작성하여 국가기록원에 이관시킨 최종 보고서를 참고하라고만 말해왔다. 그러다 MBC 모 기자로부터 국가기록원에서 장준하 사건 관련 자료를 향후 70년간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하든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정부의 비열한 ‘꼼수’에 맞서 이 사건의 전말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두 달여 동안 불철주야 집필에 매달렸다. 그가 작심하고 밝히는 사건의 전말과 세세한 조사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도 같다. 특히 ‘없는 자료도 실제로 없음을 확인한다’는 원칙하에 1975년 문익환, 계훈제 등이 장준하 발인 전날 찾아온 김용환(그는 모두가 증언하는 20일이 아니라 18일에 상가를 찾아갔다고 홀로 주장한다)과 사고 경위에 대해 1시간 7분 동안 나눈 문답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19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이 사건을 얼마나 철저히 조사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더욱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오락가락하는 신빙성 없는 진술, 『월간조선』과 가진 사실과 다른 인터뷰 내용 등을 하나하나 엮어서 읽다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와 기무사령부가 끝내 협조해주지 않은 존안 자료가 하루 빨리 공개되어야 이 사건이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초 공개 자료, 어떤 것들이 있나
이 책에는 고 조사관이 최초로 밝히는 여러 자료들이 들어 있다. 우선 문익환 목사의 혜안으로 남게 된 1975년 1시간 7분짜리 녹음테이프의 내용을 비롯해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을 확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9년 3개월간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이 들려준 김재규와 긴급조치 10호 및 박근혜 후보·최태민 목사 관련 이야기, 법정 스님으로부터 확인한 장준하 ‘거사’의 실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과가 도출되기까지의 상세한 과정, ‘진상규명 인정’ 의견을 밝힌 한상범·홍춘의·이기욱 위원의 ‘소수 의견서’와 당시 위문사위 위원장이었던 한상범 교수의 ‘인정 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서’ 전문 등이다. 국가기록원이 장준하 관련 자료를 70년간이나 비공개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이 자료들은 간간히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일부만 발췌 소개되거나 끝내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가장 상세히, 또 정확히 알고 있는 고 조사관이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통해 그동안 숱한 자료 협조 요청에 번번이 ‘존안 자료 없음’이라는 여섯 글자의 뻔뻔한 답을 되풀이해온 국가정보기관과 재조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외면하는 정부·여당에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해야 할 때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진실은 힘이 센 법이므로.
문제의 인물 김용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상만 조사관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을 최소한 열여덟 번 이상 만났다. 아버지 연배의 평범한 시골 아저씨 같은 김용환에게 고 조사관은 인간적인 연민을 여러 차례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안타깝게 만든 것은 상황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김용환의 진술이었고 급기야는 “다 필요 없어”라고 소리치며 조사를 거부하고 나가버린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항간에 떠도는 김용환 관련 의혹들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 조사 결과 진실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일례로 김용환이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었다는 ‘설’이 일부에서 마치 검증된 사실인 양 회자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일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이외에도 김용환은 정말 유일한 목격자가 맞는지, 중정의 ‘중요 상황 보고’ 문서에 사고 당일 유족에게 ‘괴전화’를 건 인물이 김용환으로 명기되어 있는데도 왜 그는 한사코 그 문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김용환은 왜 장 선생의 상가에 간 날짜를 20일이 아닌 18일이라고 혼자만 우기는지 등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사건의 중심에 서서 오랫동안 시달려온 김용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하루 빨리 재조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이 책을 김용환을 비난하는 근거로 삼지 말아달라는 조사관으로서의 간곡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고상만
1970년 경기도 판교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학 입학 후 광주민주항쟁을 비롯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알게 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1990년 3월,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김용갑이 부패한 사학재단과 맞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가 이듬해 3월 구속된다. 이때 구치소로 이송되는 버스 안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되는’ 인권운동가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1992년 ‘유서대필 조작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를 시작으로 1993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1994년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 1999년 ‘인권연대’, 2000년 ‘반부패국민연대’ 등에서 직업운동가로 일해왔다. 한편 1998년에는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자문위원으로, 이후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2006년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조사관으로 일했다. 2010년부터는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육 비리 근절’을 위해 감사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젊은 인권운동가가 쓴 인권 현장 이...야기?니가 뭔데』(2003)와 『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2011)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2006년 ‘국무총리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을 받았고, 2011년에는 ‘오마이뉴스’에서 ‘2월 22일상’ 외 다수의 상을 받기도 했다.
▣ 주요 목차
추천사 1 - 고상만 선생, 참으로 고맙소(정연주, 전 KBS 사장)
추천사 2 - 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절로 드러난다(명진, 전 봉은사 주지)
프롤로그 - 나는 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나
37년 만에 나타난 장준하의 엄숙한 외침
장준하 관련 기록 2074년까지 비공개? 내가 책을 쓴 이유!
1장 독립군 장준하 대 친일파 박정희
장준하를 처음 만나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는……”
장준하,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 연인을 위해 일본군 징집을 선택한 장준하
일본군 탈출 후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 대장정 / 장준하, 『사상계』를 통해 언론인으로 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격돌은 운명 / 장준하의 두 번째 구속, 정치의 길로 접어들다
돈 없는 장준하의 선거운동, ‘사탕과 손수건’의 비밀 / 편치 않은 정치인의 길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을 폭로한 김대중 /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 그가 지킨 약속은……
민주주의와 인권 압살, ‘유신시대’의 개막 / 긴급조치 남발,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대한민국
장준하를 석방하라, 미국 정부의 압력
2장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 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관련 업적 세 가지 / ‘교수의 양심’ 최종길 교수가 맞이한 참담한 최후
1973년 10월 19일, 중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의문사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
1986년 서울대 김성수,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의문사 첫 번째 담당 사건, ‘남현진 이병 의문사’ / 구타 진술을 은폐한 군 헌병대 수사
헌병대 수사관도 믿지 않는 ‘구타 없는 군대’ / 밝혀진 남현진 이병 의문사의 진실
당신이 맡을 사건은 따로 있소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되다
3장 장준하 사건은 왜 의문사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를 본 사람들 /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구당 김남수의 장준하 치료설? / 김남수는 왜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을까?
장준하 사건 조사팀이 세운 세 가지 원칙 / 답은 늘 쉬운 곳에 있었다
폐기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라! / 극적으로 찾아낸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들
사라진 ‘1시간 7분’ 증언, 녹음테이프를 찾다 / 국가와 민간 전문가를 동원한 음성 복원 싸움
사건 후 3일간 행적이 묘연한 목격자? / 김용환, 그는 왜 사실이 아닌 신원보증을 말하나
김용환, 그는 누구인가 / 직업 없이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1971년 이후 사라진 김용환이 다시 장준하에게 나타나다
4장 목격자 김용환, 그에게 묻다
김용환은 정말 목격자인가? / 장준하는 정말 군인 두 명을 만났을까
장준하의 약사봉 산행은 과연 사실일까 / 최초 공개, 1975년 8월 20일 김용환은 뭐라고 말했나
장준하는 나무를 잡은 사실이 없다? 목격자의 ‘반란’ / 사건 직후 사라진 목격자의 미스터리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 장준하는 약사봉을 등반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정말 벼랑에서 추락했나? / 사라진 보안사령관 직보 문서
유족에게 걸려온 괴전화의 정체를 추적하다 /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 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괴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분노, “모두 조작이다” / 괴전화를 부정한 이유, ‘새로운 늪’
김용환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다? / 김용환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
‘박정희’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을 만나다 / “장준하가 누구지?”, 생각지도 못한 김정렴의 반격
뜬금없는 김정렴의 발언, ‘긴급조치 10호’와 김재규의 비밀
김정렴이 들려준 ‘박근혜와 구국선교단’, 그리고 진실 / ‘무소유’ 법정 스님이 말하는 장준하의 거사
장준하의 거사를 알고 있었던 중정 /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는 왜 만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해준 ‘조언’ / 2004년 3월, 의문사위원회는 왜 시국성명을 발표했나?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시국선언 배후 조사 / ‘개구리 소년’ 법의학자, 마지막 희망을 쏘다
에필로그 - 장준하 사건은 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나
장준하 사건 재조사를 위해 선택한 ‘진상규명 불능’
7인 위원의 표결, 그 결과는……
장준하 사건 ‘인정’ 의견, 한상범 위원장 ‘소수에 또 소수 의견’
이 세상 또 다른 두 사람 위해 진실 가려야
장준하, 그는 누구인가
191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 선생은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평양 제42부대를 거쳐 중국 서주 쓰카다 부대로 전속되었으나 7월에 부대를 탈출한 뒤 무려 6,000리를 걸어 광복군에 합류한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중 한 분이다. 이후 OSS(미국 전략첩보대) 1기 훈련을 마치고 이범석 장군 휘하에서 국내 진입 훈련을 하던 중, 단 5일 차이로 해방을 맞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11월에 임정요인들과 귀국하여 김구 주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53년 4월 한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상계』를 창간하여 대학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당 정권, 박정희 정권을 줄기차게 비판하면서 시대의 양심과 등불의 역할을 자처했다. 이 과정에서 스물일곱 번 연행되고 아홉 번 구속되는 등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사상계』의 가치와 의의가 높은 평가를 받아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1967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된 상태에서 제7대 총선에 서울 동대문(을)구 신민당 후보로 옥중 출마하여 1만 8,000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공화당의 강상욱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방위원회에 지원하여 수구 우익 세력들마저 감동시키는 가장 모범적인 국회의원직을 수행했으나 제8대 총선에서는 여당의 부정선거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엄혹한 유신독재 시절이었던 1973년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여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5년형이라는 어이없는 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75년 ‘제2차 민주회복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던 중 거사 발표 3일 전인 그해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검ㆍ경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원인이 ‘실족 추락사’라고 밝혔으나 75도 경사진 곳에서 15미터나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시신의 상태,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매번 엇갈리는 진술,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보온병의 유리가 전혀 깨지지 않은 점 등 숱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해 대표적인 의문사로 남아 있었다. 그러던 중 2011년 8월 많은 비가 내려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는 재난을 당했고 2,000만 원이 넘는 공사비로 망연자실해 있던 유족에게 파주시에서 추모 공원을 조성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 덕에 1년 뒤 묘소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37년 만에 선생의 유골이 세상 빛을 보게 되었고, 누가 봐도 선명한 지름 6센티미터 크기의 가격흔(加擊痕)이 만천하에 드러남으로써 결국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독재세력에 의해 타살되었으리라는 그간의 의혹이 진실에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당연히 재조사가 이루어져야 함에도 2003년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내린 최종 결정이 ‘진상규명 불능’이었다는 점을 들어 재조사를 반대하는 정부와 여당의 작태는 거대한 민심의 흐름에 역행할 뿐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는 인면수심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나꼼수’에서 밝힌 이야기는 30퍼센트에 불과하다
2003년 7월부터 1년간 제2기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담당했던 고상만 조사관은 처음에 이 책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난 8월 준엄한 역사적 심판을 재촉이라도 하듯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세상에 드러난 이후 여기저기에 글을 쓰고 방송 출연을 해오면서도 사건의 전말을 궁금해 하는 많은 기자들에게 고 조사관은 자신이 작성하여 국가기록원에 이관시킨 최종 보고서를 참고하라고만 말해왔다. 그러다 MBC 모 기자로부터 국가기록원에서 장준하 사건 관련 자료를 향후 70년간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하든 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정부의 비열한 ‘꼼수’에 맞서 이 사건의 전말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두 달여 동안 불철주야 집필에 매달렸다. 그가 작심하고 밝히는 사건의 전말과 세세한 조사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다큐멘터리와도 같다. 특히 ‘없는 자료도 실제로 없음을 확인한다’는 원칙하에 1975년 문익환, 계훈제 등이 장준하 발인 전날 찾아온 김용환(그는 모두가 증언하는 20일이 아니라 18일에 상가를 찾아갔다고 홀로 주장한다)과 사고 경위에 대해 1시간 7분 동안 나눈 문답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19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과정을 보면 그가 이 사건을 얼마나 철저히 조사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더욱이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의 오락가락하는 신빙성 없는 진술, 『월간조선』과 가진 사실과 다른 인터뷰 내용 등을 하나하나 엮어서 읽다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와 기무사령부가 끝내 협조해주지 않은 존안 자료가 하루 빨리 공개되어야 이 사건이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을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최초 공개 자료, 어떤 것들이 있나
이 책에는 고 조사관이 최초로 밝히는 여러 자료들이 들어 있다. 우선 문익환 목사의 혜안으로 남게 된 1975년 1시간 7분짜리 녹음테이프의 내용을 비롯해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을 확신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 9년 3개월간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김정렴이 들려준 김재규와 긴급조치 10호 및 박근혜 후보·최태민 목사 관련 이야기, 법정 스님으로부터 확인한 장준하 ‘거사’의 실체,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과가 도출되기까지의 상세한 과정, ‘진상규명 인정’ 의견을 밝힌 한상범·홍춘의·이기욱 위원의 ‘소수 의견서’와 당시 위문사위 위원장이었던 한상범 교수의 ‘인정 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서’ 전문 등이다. 국가기록원이 장준하 관련 자료를 70년간이나 비공개하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이 자료들은 간간히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일부만 발췌 소개되거나 끝내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가장 상세히, 또 정확히 알고 있는 고 조사관이 들려주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통해 그동안 숱한 자료 협조 요청에 번번이 ‘존안 자료 없음’이라는 여섯 글자의 뻔뻔한 답을 되풀이해온 국가정보기관과 재조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외면하는 정부·여당에 이제는 국민들이 나서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해야 할 때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진실은 힘이 센 법이므로.
문제의 인물 김용환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상만 조사관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일한 목격자를 자처하는 김용환을 최소한 열여덟 번 이상 만났다. 아버지 연배의 평범한 시골 아저씨 같은 김용환에게 고 조사관은 인간적인 연민을 여러 차례 느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안타깝게 만든 것은 상황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김용환의 진술이었고 급기야는 “다 필요 없어”라고 소리치며 조사를 거부하고 나가버린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항간에 떠도는 김용환 관련 의혹들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 조사 결과 진실로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해서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일례로 김용환이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었다는 ‘설’이 일부에서 마치 검증된 사실인 양 회자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일 뿐이라며 선을 긋는다. 이외에도 김용환은 정말 유일한 목격자가 맞는지, 중정의 ‘중요 상황 보고’ 문서에 사고 당일 유족에게 ‘괴전화’를 건 인물이 김용환으로 명기되어 있는데도 왜 그는 한사코 그 문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김용환은 왜 장 선생의 상가에 간 날짜를 20일이 아닌 18일이라고 혼자만 우기는지 등등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혹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사건의 중심에 서서 오랫동안 시달려온 김용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하루 빨리 재조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이 책을 김용환을 비난하는 근거로 삼지 말아달라는 조사관으로서의 간곡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 작가 소개
저자 : 고상만
1970년 경기도 판교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학 입학 후 광주민주항쟁을 비롯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알게 되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1990년 3월, 함께 학생운동을 하던 김용갑이 부패한 사학재단과 맞서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가 이듬해 3월 구속된다. 이때 구치소로 이송되는 버스 안에서 ‘사회적 약자에게 힘이 되는’ 인권운동가로 살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1992년 ‘유서대필 조작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를 시작으로 1993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1994년 ‘전국연합 인권위원회’, 1998년 ‘천주교 인권위원회’, 1999년 ‘인권연대’, 2000년 ‘반부패국민연대’ 등에서 직업운동가로 일해왔다. 한편 1998년에는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자문위원으로, 이후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2006년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조사관으로 일했다. 2010년부터는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육 비리 근절’을 위해 감사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젊은 인권운동가가 쓴 인권 현장 이...야기?니가 뭔데』(2003)와 『그날 공동경비구역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2011)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 2006년 ‘국무총리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을 받았고, 2011년에는 ‘오마이뉴스’에서 ‘2월 22일상’ 외 다수의 상을 받기도 했다.
▣ 주요 목차
추천사 1 - 고상만 선생, 참으로 고맙소(정연주, 전 KBS 사장)
추천사 2 - 검은 구름 흩어지면 밝은 달 절로 드러난다(명진, 전 봉은사 주지)
프롤로그 - 나는 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나
37년 만에 나타난 장준하의 엄숙한 외침
장준하 관련 기록 2074년까지 비공개? 내가 책을 쓴 이유!
1장 독립군 장준하 대 친일파 박정희
장준하를 처음 만나다 /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 “박정희는……”
장준하,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 연인을 위해 일본군 징집을 선택한 장준하
일본군 탈출 후 임시정부를 향한 6,000리 대장정 / 장준하, 『사상계』를 통해 언론인으로 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격돌은 운명 / 장준하의 두 번째 구속, 정치의 길로 접어들다
돈 없는 장준하의 선거운동, ‘사탕과 손수건’의 비밀 / 편치 않은 정치인의 길
박정희의 영구집권 계획을 폭로한 김대중 /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던 박정희, 그가 지킨 약속은……
민주주의와 인권 압살, ‘유신시대’의 개막 / 긴급조치 남발, ‘거대한 감옥’으로 변한 대한민국
장준하를 석방하라, 미국 정부의 압력
2장 장준하 사건 조사관이 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권 관련 업적 세 가지 / ‘교수의 양심’ 최종길 교수가 맞이한 참담한 최후
1973년 10월 19일, 중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의문사위원회가 규명한 사건들
1986년 서울대 김성수,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사건
의문사 첫 번째 담당 사건, ‘남현진 이병 의문사’ / 구타 진술을 은폐한 군 헌병대 수사
헌병대 수사관도 믿지 않는 ‘구타 없는 군대’ / 밝혀진 남현진 이병 의문사의 진실
당신이 맡을 사건은 따로 있소 / 장준하 의문사 사건 조사관이 되다
3장 장준하 사건은 왜 의문사인가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를 본 사람들 / 장준하 사건에 얽힌 ‘오해와 진실’
구당 김남수의 장준하 치료설? / 김남수는 왜 장준하를 치료했다고 주장했을까?
장준하 사건 조사팀이 세운 세 가지 원칙 / 답은 늘 쉬운 곳에 있었다
폐기된 ‘88년 경찰 재조사’ 기록을 찾아라! / 극적으로 찾아낸 장준하 의문사 관련 기록들
사라진 ‘1시간 7분’ 증언, 녹음테이프를 찾다 / 국가와 민간 전문가를 동원한 음성 복원 싸움
사건 후 3일간 행적이 묘연한 목격자? / 김용환, 그는 왜 사실이 아닌 신원보증을 말하나
김용환, 그는 누구인가 / 직업 없이 무슨 돈으로 살았을까
1971년 이후 사라진 김용환이 다시 장준하에게 나타나다
4장 목격자 김용환, 그에게 묻다
김용환은 정말 목격자인가? / 장준하는 정말 군인 두 명을 만났을까
장준하의 약사봉 산행은 과연 사실일까 / 최초 공개, 1975년 8월 20일 김용환은 뭐라고 말했나
장준하는 나무를 잡은 사실이 없다? 목격자의 ‘반란’ / 사건 직후 사라진 목격자의 미스터리
사라진 그가 다시 사건 현장에 나타났다? / 장준하는 약사봉을 등반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정말 벼랑에서 추락했나? / 사라진 보안사령관 직보 문서
유족에게 걸려온 괴전화의 정체를 추적하다 / 중앙정보부 ‘중요 상황 보고’에 적힌 괴전화의 주인공
괴전화를 했다는 김용환의 분노, “모두 조작이다” / 괴전화를 부정한 이유, ‘새로운 늪’
김용환은 중정의 ‘사설 정보원’이다? / 김용환의 ‘특수인물 존안 카드’?
‘박정희’의 9년 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을 만나다 / “장준하가 누구지?”, 생각지도 못한 김정렴의 반격
뜬금없는 김정렴의 발언, ‘긴급조치 10호’와 김재규의 비밀
김정렴이 들려준 ‘박근혜와 구국선교단’, 그리고 진실 / ‘무소유’ 법정 스님이 말하는 장준하의 거사
장준하의 거사를 알고 있었던 중정 / 1975년 7월 29일 김대중과 장준하는 왜 만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전해준 ‘조언’ / 2004년 3월, 의문사위원회는 왜 시국성명을 발표했나?
감사원으로부터 받은 시국선언 배후 조사 / ‘개구리 소년’ 법의학자, 마지막 희망을 쏘다
에필로그 - 장준하 사건은 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나
장준하 사건 재조사를 위해 선택한 ‘진상규명 불능’
7인 위원의 표결, 그 결과는……
장준하 사건 ‘인정’ 의견, 한상범 위원장 ‘소수에 또 소수 의견’
이 세상 또 다른 두 사람 위해 진실 가려야
01. 반품기한
- 단순 변심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7일 이내 신청
- 상품 불량/오배송인 경우 : 상품 수령 후 3개월 이내, 혹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0일 이내 반품 신청 가능
02. 반품 배송비
반품사유 | 반품 배송비 부담자 |
---|---|
단순변심 | 고객 부담이며, 최초 배송비를 포함해 왕복 배송비가 발생합니다. 또한, 도서/산간지역이거나 설치 상품을 반품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
고객 부담이 아닙니다. |
03. 배송상태에 따른 환불안내
진행 상태 | 결제완료 | 상품준비중 | 배송지시/배송중/배송완료 |
---|---|---|---|
어떤 상태 | 주문 내역 확인 전 | 상품 발송 준비 중 | 상품이 택배사로 이미 발송 됨 |
환불 | 즉시환불 | 구매취소 의사전달 → 발송중지 → 환불 | 반품회수 → 반품상품 확인 → 환불 |
04. 취소방법
- 결제완료 또는 배송상품은 1:1 문의에 취소신청해 주셔야 합니다.
- 특정 상품의 경우 취소 수수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05. 환불시점
결제수단 | 환불시점 | 환불방법 |
---|---|---|
신용카드 | 취소완료 후, 3~5일 내 카드사 승인취소(영업일 기준) | 신용카드 승인취소 |
계좌이체 |
실시간 계좌이체 또는 무통장입금 취소완료 후, 입력하신 환불계좌로 1~2일 내 환불금액 입금(영업일 기준) |
계좌입금 |
휴대폰 결제 |
당일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6시간 이내 승인취소 전월 구매내역 취소시 취소 완료 후, 1~2일 내 환불계좌로 입금(영업일 기준) |
당일취소 : 휴대폰 결제 승인취소 익월취소 : 계좌입금 |
포인트 | 취소 완료 후, 당일 포인트 적립 | 환불 포인트 적립 |
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
의류/잡화/수입명품 | 상품의 택(TAG) 제거/라벨 및 상품 훼손으로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된 경우 |
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가전/설치상품 |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
자동차용품 | 상품을 개봉하여 장착한 이후 단순변심의 경우 |
CD/DVD/GAME/BOOK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의 포장 등을 훼손한 경우 |
상품의 시리얼 넘버 유출로 내장된 소프트웨어의 가치가 감소한 경우 | |
노트북, 테스크탑 PC 등 | 홀로그램 등을 분리, 분실, 훼손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하여 재판매가 불가할 경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