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정치결사체’ 넘어 ‘지식생산’ 공간이었던 서원
책의 생산과 양반층의 정체성은 어떤 관계인가?
지금까지는 주로 서원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서원은 사족이라고 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로서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문화센터로서의 서원에 주목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주로 유학적 지식인이었고, 그러한 지식인을
위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의 공간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에서 이뤄진 지식 생산과 지적 탐구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영남지역의 문화 형성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2011년 한국국학진흥원 서원자료 연구팀이 한 해 동안 연구한 결과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였다.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이 기획한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1권으로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이다. 이 책은 도산서원에서 소장해오던 각종 고서, 고문서 가운데 지식 생산과 관련된 자료를 사학, 철학, 교육학, 경제학, 서지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공동연구팀을 구성해 학제간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연구팀을 구성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전통사회에서 서원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과 기능들을 한두 분야의 연구자로는 제대로 조명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도산서원이 갖는 상징성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도산서원 연구가 대개 서원 외부 자료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도산서원 광명실에 보존해오던 자료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됨으로써 학술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일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도산서원 자료를 직접 연구할 기회가 만들어졌기에 가급적 많은 연구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지식의 생산과 지역문화’를 주제 아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것이 어떤 절차를 거쳐 보존되고 전파되었으며, 영남의 지식문화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혔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주로 서원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서원은 사족이라고 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로서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문화센터로서의 서원에 주목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주로 유학적 지식인이었고, 그러한 지식인을 위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의 공간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서원의 권위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성리학적 지식과 그 실천에서 나왔다. 규율과 타성에 길들여진 관학 체제에 대한 비판 위에서 등장한 서원은, 향풍을 교화하고 관권을 견제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지역문화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지식과 지식인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도산서원은 어떻게 역사에 등장했고 서원의 으뜸이 되었는가
서원이 강학과 장수를 위한 기구임을 그렇게 강조한 퇴계 역시 현실에서 서원을 세울 때는 계기를 사림계가 존봉하는 인물의 연고지에서 구했다. 성주에 고려 말의 학자 이조년李兆年을 위해 영봉迎鳳서원을 건립하려 할 때 김굉필의 처향妻鄕이어서 왕래했다는 연고를 들어 함께 제향할 것을 제안한 것이라든가, 특히 예안 출신의 인물인 역동易東 우탁禹倬에 대해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다는 것은 예안 사림의 수치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역동서원의 건립을 독려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산서원이 퇴계 제향에서 기선을 잡았지만, 퇴계가 벼슬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머물렀고 특히 만년 10년 동안 많은 저술 문자를 남기면서 문인들과 더불어 강학하던 향리인 도산에 서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도산에 서원을 세우자는 여론이 일어나기는 퇴계의 장례가 끝난 선조 4년 봄, 아마도 문집 편찬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던 역동서원의 모임에서였을 것이다. 이후 서원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공식화된 것은 이듬해인 선조 5년 4월에 열린 도산서당 문도들 모임에서였다. 이 기록은 서원 건립에 관여했던 몇몇 문인의 연보에 공통되게 나오고 있다. 이때의 모임에서 ‘선사를 제향하는 사묘尙德祠’를 도산서당 뒤에 세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완성되자 그 위상은 먼저 이뤄진 여강서원을 능가했다. 역시 퇴계의 본거지로서 도산서당이, 명종이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을 정도로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미처 퇴계 판位版의 봉안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조정으로부터 사액이 내려왔다. 일반적인 사액은 유생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리면 예조가 이에 대한 의견을 내고 대신의 수의收議를 거쳐 임금이 결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한편 백운동서원의 사액에서처럼 풍기군수였던 퇴계의 부탁을 받은 경상도 관찰사의 계문啓聞으로 조정에서 바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초창기였던 만큼 도산서원도 이러한 예에 속하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18세기의 영조 이후 높아진 도산서원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정조 16년의 도산서원 치제였다. 이때 정조는 규장각 각신인 이만수李晩秀에게 경주에 가서 신라 시조 묘와 옥산서원에 치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에도 치제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단순한 치제로만 그치지 않았다. 영남의 선비들에게 도산에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미리 열읍에 고지되었던 터라 도
산서원 앞에 개설된 시험장에 등록한 유생 수는 7000명을 넘었고 수행 인원까지 합하면 1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임금이 미리 정한 제목을 전교당典敎堂 앞에 내걸고 응제應製하게 하여 여기서 거둔 시권만 3632장이었으며, 이를 서울로 가져와 임금이 친히 고열해서 두 명을 급제시켰다.
지금까지 도산서원은 퇴계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주로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알려져왔다. 그렇지만 도산에서는 퇴계가 생전에 수행해왔던 대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의리변석義理辨析을 위한 강론이 펼쳐지고 강회가 열려 영남 각 지역의 유교문화 파급을 이끌었다. 또 국가로부터 내려오거나 문중과 개인에게서 기증받은 서적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지적 수요를 감당하고 생산하는 역할을 해냈다. 특히 도산서원을 짓고 퇴계집을 간행한 뒤 적지 않은 서적이 침자?梓되어 필요한 곳에 보급됨으로써 유교문화의 지적 확산에 기여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영남 지식문화의 산실로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퇴계와 그 후손들의 강학활동, 베일을 벗다- 도산강회를 통한 지식생산의 의미
퇴계의 강학활동은 조선조 교육에서 한 전범으로 자리했다. 그가 평소 제자들에게 행한 다양한 형식의 강학활동은 제자들의 각종 기문록記聞錄이나 언행록 등에 남아 있어 이에 관한 적잖은 연구가 이미 이뤄졌다. 반면 서책을 중심으로 그의 강학활동을 조망한 연구는 많지 않다. 애초에 이 책에서는 광명실 고문서를 통해 퇴계의 서적관과 독서관 그리고 강학활동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현재 광명실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근본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우선 광명실 고문서에는 퇴계 당대나 16~17세기 자료가 매우 희소하다. 따라서 우선 일차적으로 퇴계나 그의 제자들의 문집을 중심으로 그들의 교육활동에 어떤 유의 서책이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퇴계의 독서과정과 독서관, 강론 교재, 서책의 유통 방식, 간행 경위 등을 살펴보고, 이것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도산서원에서는 내부에서 자파 학설에 대한 중요한 합의점을 도출할 필요가 있을 때나, 또는 조정이나 다른 사림 집단으로부터 퇴계 학설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나 이견이 나올 때 이에 답하기 위해 강회를 열어 퇴계 학단 내부의 공론을 이끌어냈다. 강회에서는 자신들 학파의 학설을 넘나드는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고, 심도 있는 토론이 이어졌다.
강장講長으로는 당대의 퇴계 학단을 이끌어가던 인물이 뽑혔고, 강생들도 대부분 주요 가문을 대표하는 신진기예의 학인이었다. 도산서원은 강회를 통해서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서원, 학문하는 서원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도산서원의 강학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한 연구는 없었다. 2장에서는 퇴계와 그의 문도들의 연보를 중심으로 그들의 서적관, 유통과정, 교육에서의 구체적인 활용법들을 살펴보고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어떻게 도서관 역할과 지식의 거점으로 기능했는지를 추론해보았다. 정순우 교수는 “이 시기 지식에 관한 계보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단순한 사승관계의 복원에만 논의를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책의 전승과 해석과정에 대한 치밀한 접근이 요청된다. 앞으로 좀 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서적을 통한 도산서원의 교육 실태를 재구성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바로 주자학이 한국 철학으로 내면화하는 함양과 성찰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787년 12월에 역동서원에서 거행된 『심경』 강회는 그 형식이 매우 독특했다. 역동서원에서의 강회는 예안 유림들을 중심으로 하여 100여 년 만에 모임이 이뤄진 비교적 소규모 강회였으나 시회 형식을 함께 갖추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퇴계학을 이어가고자 하는 학문적 고민이 함께 실린 시편들은 당시 강회에 관한 풍속지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한편 1795년에 시행된 을묘강회는 강회의 정치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도산서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의 영남지역에 대한 관심은 탕평 정국에 대한 정국 구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을묘년 전후는 매우 중요한 정치·문화적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진산사건(1791)과 문체반정에 관한 새로운 지침(1792)을 내린 직후의 상황이었다. 정조로서는 사상적 혼란을 막고 중앙 정부의 정치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때다. 정조가 도산서원을 주목한 것은 서학을 비롯한 이른바 이단 잡설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을묘강회는 이러한 정국의 흐름에 도산서원이 기민하게 대응한 강회였다.
서원을 중심으로 한 스승과 제자의 토론과 편지, 지식의 깊이를 더하다
도산서원의 보물이라는 의미의 ‘원보院寶’로 일컬어져온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퇴계가 월천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이라는 편지첩이다. 『사문수간』에는 1550년(퇴계 50세, 월천 27세)부터 1570년(퇴계 70세, 월천 47세)까지 20년 동안 퇴계가 월천에게 보낸 113통의 친필 편지가 8책으로 첩장되어 있다. 이 첩장은 월천이 65세 때 손수 묶은 것으로 후에 월천 후손에 의해 도산서원에 헌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사문수간』이 왜 원보로까지 인식되었을까? 『사문수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퇴계와 월천 사이에 이루어진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운 진리 탐구의 여정과 퇴계 문하에 이뤄진 학문 수수 현장의 모습이 100통이 넘는 편지 속에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문수간』에는 사제 간에 이루어졌던 주요한 학문적 논의, 서원 건립과 같은 유림사회의 중요 사안,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예법의 해석 문제, 선비로서 출처出處와 과거 응시 등 처신에 관한 문제, 그리고 양식이 떨어졌을 때 곡식을 보내준다든지 취직자리를 알아봐주는 등 지극히 사적인 사안도 묘사되어 있다.
월천이 42세 되던 을축년(1565)에는 『심경부주』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해에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는 오히려 월천이 정통 주자학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퇴계는 월천의 지적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그 과실은 스스로의 주장을 지나치게 하는 데 있다”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크게 보면 『심경부주』가 정주학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퇴계는 월천에게 “문자상의 흠을 찾아내는 데 힘쓰지 말고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뜻을 공손히 하여 한결같이 그 책을 높이고 숭상하기를 허노재가 『소학』에 대해 한 것처럼 한다면, 그 가운데 한 마디 한 구절이 스승과 법으로 삼아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을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사람은 편지와 논변으로도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는지, 시로 여운을 승화시키면서 마무리지었다. 『월천집』에는 같은 해에 지은 두 사람의 시가 실려 있다.
책으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다
도산서원은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특정 경로를 통해 확산시키는 기초 단위였다. 말하자면 서원은 이 공동체들이 작업하는 미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은 지식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고, 지식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또한 서로의 인적 연망관계도 다양하게 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지식을 발견하고 저장해서 정교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었다. 서점이나 책을 유통시키는 시장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사회에서 지방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선호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했던 지식을 퍼뜨렸고, 그 과정에서 서로 정보와 생각을 공유하는 담론 공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적 명망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영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안동 중심 영남에서 이황은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영남, 특히 안동지역의 문집 간행을 저자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라기보다는 문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컸다. 실제로 조선 후기 문집의 간행은 조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손들은 문집을 통해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문중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크게 드러내 보였다. 간행된 문집을 지역의 사족과 다른 문중에 배포함으로써 문중의 건재를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문집의 공유를 통해 다른 문중과 학문 및 사상뿐만 아니라 사족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문집 간행은 문중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책 출판 과정은 어떠했을까
목판을 만드는 작업은 각수가 했지만 그 내용이 되는 자료를 수집, 정리, 교정하는 작업은 책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맡았다. 이 작업은 한 문중이나 여러 문중에 속한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맡아 했다. 『급문록영간시일기』는 교감 작업을 기록해두었다. 1913년 5월 6일 교정도감校正都監에 소속된 인물 등이 도산서원에서 정회定會를 가졌고, 7일자 일기에는 “교정 참봉 이중철李中轍이 들어와 교감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중철은 당시 도산서원 원장으로 교정도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18일에는 주註를 정리했고 그 외의 작업들을 거쳐 24일 교감을 마쳤다. 6월 7일 세 차례의 교정회의를 열 것을 결정하고 여러 사람이 합석해 교감했다. 이후 여러 문중에서 문안하고 자료를 가져와 검토했다.
6월 9일에는 금대기琴岱基가 “교감은 지극히 공정한 다음에라야 다른 사람의 심한 꾸중을 면할 수 있으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이강호李康鎬가 “이번 교감은 모두 세 차례나 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으니 이 같은 정본이면 어찌 공정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교정도감에 소속된 두 사람의 말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공정함을 원칙으로 삼아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 교정의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의 주가 소략한 것이 거론되어 광명실에 소장된 『약포집』을 꺼내 주를 고쳐 바로잡았다. 이후에도 증빙이 필요할 때마다 광명실 서책을 활용했다. 광명실이 도산서원의 도서관이자 지식저장고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6월 10일 교정 작업에서는 학문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율곡의 주를 교정하면서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변이 많았다.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에 대한 사실기록에서 오류도 발견되어 논의하여 수정했다. 서애 류성룡의 주를 둘러싸고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뜻을 가지고 논박했다. 6월 11일 일기에서 드러나듯이, 의심나는 글자가 있으면 원본을 확인하여 고쳤다.
6월 12일에는 오천烏川 설월당雪月堂에서 우리 집안 선조의 호만 빼먹었다며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패지牌旨가 도착해, 그것이 실수였지만 다른 뜻은 없었다는 내용의 답패答牌를 보냈다. 설월당은 퇴계 문인인 김부륜金富倫(1531~1598)으로 그의 호인 설월당이 누락되었던 모양이다. 이날 모두 합의하기를, 퇴계 문인의 기록에 의심스러운 점들은 따로 적어두기로 했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이나 문중의 문집 간행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 서적의 수요자가 직접 생산을 맡았던 것이다. 이러한 비시장 생산은 보급에 한계가 뒤따를 수 있다. 그런데 서적 제작이 많은 사람의 폭넓은 참여와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문집은 문중 사람의 폭넓은 참여 속에 제작되고 문중 간에 간행 문집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서원이나 문중의 서적 생산이 지식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행한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문집 등의 내용이 오늘날의 과학기술, 경제경영과 같은 유용한 지식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런데 조선 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안정된 도덕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과제로 보면, 문집에 실린 내용은 유용한 지식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원이나 문중이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서적을 간행할 때라도 압도적으로 시장에 의존했다.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그 화폐가치를 헤아려 시도기에 적고 일정 부분을 정산해 하기에 옮겼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현물이 들어간 것도 화폐로 환산하여 회계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제작경비를 조달하는 데는 부조에 크게 의존했다. 요컨대 조선시대 서원이나 문중의 서적 생산에서 경비 조달은 호혜적인 부조에 크게 의존했고 제작과정은 압도적으로 시장에 의존했으며, 서적은 제작에 참여하거나 부조를 했거나 혹은 서로 문집을 주고받은 사람에게 배급되는 독특한 양식이었다.
조선시대에 도덕사회의 구현을 위한 학문과 지식이 중시되고 그와 관련하여 서원이나 문중이 문집 등을 간행하는 것은 유교문화의 산물이었다. 달리 말해 도덕과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가 문집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출판을 성행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교 목판은 국가가 아닌 민간 사족이 주도한 민간 유교문화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책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도산서원은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많은 기록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왔으며,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내용의 정보가 함축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건립 초기부터 별도의 서책보관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재협실과 광명실이 그것이다. 상재협실은 처음부터 서책 보관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기보다는 작은방의 의미로 이해되며, 서책이 늘어나면서 쓰임새가 책방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서책 관리에 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마련해두고 있진 않지만, 도산서원원규 총칙에 광명실 개폐에 관한 간략한 규정을 마련해두었으므로 서고인 광명실 출입과 서책 점검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을미서책치부』와 광명실전장기 같은 서책목록을 통해 원규의 규정이 계속 준수되었으며, 특히 서책목록 작성 방식이나 서책 관리 기록에 쓰인 용어 등을 통해 도산서원의 서책 관리가 매우 엄격하고 세밀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전장기 가운데 서책전장기인 광명실전장기의 서책에 대한 주석에 쓰인 용어 또는 설명 방식은, 도산서원의 여러 서책목록에 일정한 용도와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이를 유형별로 검토함으로써 도산서원 서책 관리 기록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도산서원이 서책 관리에서 중요시한 사항이 무엇인지, 같은 서책에 대한 주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록상의 오류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서책전장기 외에 재물전장기에는 서책 관련 기록이 많지 않고 내용도 다양하지 않지만, 서책의 가격 등 서책전장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작성 시기 면에서 서책전장기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의 공백을 보충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장기류 외에 간찰, 통문 등의 기록은 작성 목적이 전장기와 완전히 다르므로 서책 관련 내용 또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내용이 희소하고 특정 서책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며, 관점에 따라서는 보다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
도산서원 서책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현전하는 서책 그 자체일 것이다. 한편 서책의 전래 경위를 보여주는 서책목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서책의 전래 경위를 비롯해 서책에 관한 매우 다양한 정보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초기 장서목록의 수록 서책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들이며, 이는 초기 서원이 어떻게 장서를 구성했는가 하는 일반적인 형태를 알려주기에 한국의 서원 장서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실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다. 따라서 도산서원 초기 장서목록에 나타나는 16세기 서원 장서는 단일 컬렉션으로서 손색이 없으며,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 작가 소개
기획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한국국학진흥원은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문화유산의 체계적인 조사·수집을 통해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가는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이다. 고문서·고서 등의 기록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물론,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시대 유교목판을 보존하는 데 역량을 쏟고 있다. 또한 여기서 축적된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문화박물관과 인성교육연수원을 운영함으로써 기록 속에 담긴 조상의 숨결이 오늘을 인도하는 지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자 : 정만조
국민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후기 정치사회사와 관련한 수많은 논저를 펴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대 서원연구』 『음애 이자와 기묘사림』(공저),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공저), 『한국사상의 정치형태』(공저) 『조선시대 경기북부 지역 집성촌과 사족』(공저)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개항기 시장구조와 그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한국경제통사』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박제가』 『서울상업사』(공저),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공저) 『류성룡의 학술과 사상』(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후기 지성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공부의 발견』『도산서원』(공저) 『지식 변동의 사회사』(공저), 『東亞傳統敎育與學禮學規』(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이수환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영남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서원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조선후기 서원연구』 『경주 회재 이언적 종가』 『용산서원』(공저) 등이 있고 편저로 『玉山書院誌』 『道東書院誌』 등이 있다.
저자 :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경북대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호남지방 목활자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공저서로 『해외 한국본 고문헌 자료의 탐색과 검토』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장서각에서 옛 기록을 만나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승총명록으로 보는 조선후기 지식인의 생활사』 등이 있다.
저자 : 손숙경
동아대 사학과 강사. 동아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변경지역의 무임조직과 무임집단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근세사회의 비교』(공저),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공저), 『조선후기 동래의 무청선생안과 무임총람』(편저), 『조선후기 동래 석대동 하리의 영양 천씨 가문과 이들의 고문서』(편저) 등이 있다.
저자 : 김종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경북대를 졸업하고 영남대에서 퇴계의 심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 『근현대 영남유학자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청년을 위한 퇴계평전』 등이 있고 대표 역서로 『심경강해』 『도산급문제현록』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여는 글 서원, 조선 지식의 힘
도산서원과 영남의 지식문화
제1장 심학과 이기, 정학을 둘러싼 논쟁들
퇴계의 강학활동과 도산강회
제2장 스승과 제자가 함께 지식을 빚어내다
도산서원 자료를 통해 본 퇴계와 월천
제3장 책으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다
도산서원의 서책 간행과 지역사회의 문화 형성
제4장 도산서원은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특질
제5장 엄격한 서책 관리와 도서관 역할
『전장기』를 통해 본 서책의 전승과 관리
주註
‘정치결사체’ 넘어 ‘지식생산’ 공간이었던 서원
책의 생산과 양반층의 정체성은 어떤 관계인가?
지금까지는 주로 서원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서원은 사족이라고 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로서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문화센터로서의 서원에 주목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주로 유학적 지식인이었고, 그러한 지식인을
위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의 공간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에서 이뤄진 지식 생산과 지적 탐구의 모습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영남지역의 문화 형성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2011년 한국국학진흥원 서원자료 연구팀이 한 해 동안 연구한 결과가 한 권의 단행본으로 묶였다.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이 기획한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제1권으로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이다. 이 책은 도산서원에서 소장해오던 각종 고서, 고문서 가운데 지식 생산과 관련된 자료를 사학, 철학, 교육학, 경제학, 서지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공동연구팀을 구성해 학제간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로 연구팀을 구성하게 된 배경은, 무엇보다 전통사회에서 서원이 지니는 다양한 측면과 기능들을 한두 분야의 연구자로는 제대로 조명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도산서원이 갖는 상징성과 더불어 지금까지의 도산서원 연구가 대개 서원 외부 자료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도산서원 광명실에 보존해오던 자료가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됨으로써 학술적 접근이 가능해졌다. 일반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도산서원 자료를 직접 연구할 기회가 만들어졌기에 가급적 많은 연구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지식의 생산과 지역문화’를 주제 아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것이 어떤 절차를 거쳐 보존되고 전파되었으며, 영남의 지식문화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밝혔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주로 서원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서원은 사족이라고 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사체로서의 기능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식을 생산하고 확산하는 문화센터로서의 서원에 주목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주로 유학적 지식인이었고, 그러한 지식인을 위한 강학講學과 장수藏修의 공간이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서원의 권위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성리학적 지식과 그 실천에서 나왔다. 규율과 타성에 길들여진 관학 체제에 대한 비판 위에서 등장한 서원은, 향풍을 교화하고 관권을 견제하는 등 어떤 식으로든 지역문화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지식과 지식인이 지역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도산서원은 어떻게 역사에 등장했고 서원의 으뜸이 되었는가
서원이 강학과 장수를 위한 기구임을 그렇게 강조한 퇴계 역시 현실에서 서원을 세울 때는 계기를 사림계가 존봉하는 인물의 연고지에서 구했다. 성주에 고려 말의 학자 이조년李兆年을 위해 영봉迎鳳서원을 건립하려 할 때 김굉필의 처향妻鄕이어서 왕래했다는 연고를 들어 함께 제향할 것을 제안한 것이라든가, 특히 예안 출신의 인물인 역동易東 우탁禹倬에 대해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없다는 것은 예안 사림의 수치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역동서원의 건립을 독려했던 것이 좋은 예다.
이산서원이 퇴계 제향에서 기선을 잡았지만, 퇴계가 벼슬할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머물렀고 특히 만년 10년 동안 많은 저술 문자를 남기면서 문인들과 더불어 강학하던 향리인 도산에 서원이 없을 수는 없었다. 도산에 서원을 세우자는 여론이 일어나기는 퇴계의 장례가 끝난 선조 4년 봄, 아마도 문집 편찬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던 역동서원의 모임에서였을 것이다. 이후 서원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공식화된 것은 이듬해인 선조 5년 4월에 열린 도산서당 문도들 모임에서였다. 이 기록은 서원 건립에 관여했던 몇몇 문인의 연보에 공통되게 나오고 있다. 이때의 모임에서 ‘선사를 제향하는 사묘尙德祠’를 도산서당 뒤에 세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도산서원이 완성되자 그 위상은 먼저 이뤄진 여강서원을 능가했다. 역시 퇴계의 본거지로서 도산서당이, 명종이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을 정도로 서울, 시골 할 것 없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나 미처 퇴계 판位版의 봉안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조정으로부터 사액이 내려왔다. 일반적인 사액은 유생이 청액소請額疏를 올리면 예조가 이에 대한 의견을 내고 대신의 수의收議를 거쳐 임금이 결정하는 절차를 밟는다. 한편 백운동서원의 사액에서처럼 풍기군수였던 퇴계의 부탁을 받은 경상도 관찰사의 계문啓聞으로 조정에서 바로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도 초창기였던 만큼 도산서원도 이러한 예에 속하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18세기의 영조 이후 높아진 도산서원의 위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정조 16년의 도산서원 치제였다. 이때 정조는 규장각 각신인 이만수李晩秀에게 경주에 가서 신라 시조 묘와 옥산서원에 치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도산서원에도 치제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는 단순한 치제로만 그치지 않았다. 영남의 선비들에게 도산에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미리 열읍에 고지되었던 터라 도
산서원 앞에 개설된 시험장에 등록한 유생 수는 7000명을 넘었고 수행 인원까지 합하면 1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임금이 미리 정한 제목을 전교당典敎堂 앞에 내걸고 응제應製하게 하여 여기서 거둔 시권만 3632장이었으며, 이를 서울로 가져와 임금이 친히 고열해서 두 명을 급제시켰다.
지금까지 도산서원은 퇴계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주로 제사지내는 서원으로 알려져왔다. 그렇지만 도산에서는 퇴계가 생전에 수행해왔던 대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의리변석義理辨析을 위한 강론이 펼쳐지고 강회가 열려 영남 각 지역의 유교문화 파급을 이끌었다. 또 국가로부터 내려오거나 문중과 개인에게서 기증받은 서적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지적 수요를 감당하고 생산하는 역할을 해냈다. 특히 도산서원을 짓고 퇴계집을 간행한 뒤 적지 않은 서적이 침자?梓되어 필요한 곳에 보급됨으로써 유교문화의 지적 확산에 기여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영남 지식문화의 산실로서 새롭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퇴계와 그 후손들의 강학활동, 베일을 벗다- 도산강회를 통한 지식생산의 의미
퇴계의 강학활동은 조선조 교육에서 한 전범으로 자리했다. 그가 평소 제자들에게 행한 다양한 형식의 강학활동은 제자들의 각종 기문록記聞錄이나 언행록 등에 남아 있어 이에 관한 적잖은 연구가 이미 이뤄졌다. 반면 서책을 중심으로 그의 강학활동을 조망한 연구는 많지 않다. 애초에 이 책에서는 광명실 고문서를 통해 퇴계의 서적관과 독서관 그리고 강학활동에 관한 자료를 살펴보고자 했다. 하지만 현재 광명실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 이러한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근본적으로 어려움이 있다. 우선 광명실 고문서에는 퇴계 당대나 16~17세기 자료가 매우 희소하다. 따라서 우선 일차적으로 퇴계나 그의 제자들의 문집을 중심으로 그들의 교육활동에 어떤 유의 서책이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퇴계의 독서과정과 독서관, 강론 교재, 서책의 유통 방식, 간행 경위 등을 살펴보고, 이것이 교육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개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리라 본다.
도산서원에서는 내부에서 자파 학설에 대한 중요한 합의점을 도출할 필요가 있을 때나, 또는 조정이나 다른 사림 집단으로부터 퇴계 학설에 대한 중요한 질문이나 이견이 나올 때 이에 답하기 위해 강회를 열어 퇴계 학단 내부의 공론을 이끌어냈다. 강회에서는 자신들 학파의 학설을 넘나드는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고, 심도 있는 토론이 이어졌다.
강장講長으로는 당대의 퇴계 학단을 이끌어가던 인물이 뽑혔고, 강생들도 대부분 주요 가문을 대표하는 신진기예의 학인이었다. 도산서원은 강회를 통해서 비로소 살아 움직이는 서원, 학문하는 서원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도산서원의 강학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논의한 연구는 없었다. 2장에서는 퇴계와 그의 문도들의 연보를 중심으로 그들의 서적관, 유통과정, 교육에서의 구체적인 활용법들을 살펴보고 서원이 향촌사회에서 어떻게 도서관 역할과 지식의 거점으로 기능했는지를 추론해보았다. 정순우 교수는 “이 시기 지식에 관한 계보학적 이해를 위해서는 단순한 사승관계의 복원에만 논의를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책의 전승과 해석과정에 대한 치밀한 접근이 요청된다. 앞으로 좀 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함으로써 서적을 통한 도산서원의 교육 실태를 재구성할 수 있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바로 주자학이 한국 철학으로 내면화하는 함양과 성찰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1787년 12월에 역동서원에서 거행된 『심경』 강회는 그 형식이 매우 독특했다. 역동서원에서의 강회는 예안 유림들을 중심으로 하여 100여 년 만에 모임이 이뤄진 비교적 소규모 강회였으나 시회 형식을 함께 갖추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퇴계학을 이어가고자 하는 학문적 고민이 함께 실린 시편들은 당시 강회에 관한 풍속지적인 정보를 제공해준다.
한편 1795년에 시행된 을묘강회는 강회의 정치적 성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도산서원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정조의 영남지역에 대한 관심은 탕평 정국에 대한 정국 구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을묘년 전후는 매우 중요한 정치·문화적 사건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진산사건(1791)과 문체반정에 관한 새로운 지침(1792)을 내린 직후의 상황이었다. 정조로서는 사상적 혼란을 막고 중앙 정부의 정치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절실했던 때다. 정조가 도산서원을 주목한 것은 서학을 비롯한 이른바 이단 잡설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을묘강회는 이러한 정국의 흐름에 도산서원이 기민하게 대응한 강회였다.
서원을 중심으로 한 스승과 제자의 토론과 편지, 지식의 깊이를 더하다
도산서원의 보물이라는 의미의 ‘원보院寶’로 일컬어져온 책이 있다. 그것이 바로 퇴계가 월천에게 보낸 친필 편지를 묶은 『사문수간師門手簡』이라는 편지첩이다. 『사문수간』에는 1550년(퇴계 50세, 월천 27세)부터 1570년(퇴계 70세, 월천 47세)까지 20년 동안 퇴계가 월천에게 보낸 113통의 친필 편지가 8책으로 첩장되어 있다. 이 첩장은 월천이 65세 때 손수 묶은 것으로 후에 월천 후손에 의해 도산서원에 헌정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사문수간』이 왜 원보로까지 인식되었을까? 『사문수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퇴계와 월천 사이에 이루어진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운 진리 탐구의 여정과 퇴계 문하에 이뤄진 학문 수수 현장의 모습이 100통이 넘는 편지 속에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문수간』에는 사제 간에 이루어졌던 주요한 학문적 논의, 서원 건립과 같은 유림사회의 중요 사안,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예법의 해석 문제, 선비로서 출처出處와 과거 응시 등 처신에 관한 문제, 그리고 양식이 떨어졌을 때 곡식을 보내준다든지 취직자리를 알아봐주는 등 지극히 사적인 사안도 묘사되어 있다.
월천이 42세 되던 을축년(1565)에는 『심경부주』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해에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는 오히려 월천이 정통 주자학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퇴계는 월천의 지적이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사람이 학문을 하는 데 그 과실은 스스로의 주장을 지나치게 하는 데 있다”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크게 보면 『심경부주』가 정주학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퇴계는 월천에게 “문자상의 흠을 찾아내는 데 힘쓰지 말고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뜻을 공손히 하여 한결같이 그 책을 높이고 숭상하기를 허노재가 『소학』에 대해 한 것처럼 한다면, 그 가운데 한 마디 한 구절이 스승과 법으로 삼아 받들기에도 겨를이 없을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두 사람은 편지와 논변으로도 견해 차이를 좁히지 못했는지, 시로 여운을 승화시키면서 마무리지었다. 『월천집』에는 같은 해에 지은 두 사람의 시가 실려 있다.
책으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다
도산서원은 지식을 구축하고 이를 특정 경로를 통해 확산시키는 기초 단위였다. 말하자면 서원은 이 공동체들이 작업하는 미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은 지식을 다른 곳으로 전달하고 퍼뜨리는 역할을 맡았고, 지식 사이의 교환이 일어나도록 도왔다. 또한 서로의 인적 연망관계도 다양하게 했다. 이처럼 도산서원은 지식을 발견하고 저장해서 정교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었다. 서점이나 책을 유통시키는 시장이 극히 드물었던 조선사회에서 지방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선호하고 널리 알리고 싶어했던 지식을 퍼뜨렸고, 그 과정에서 서로 정보와 생각을 공유하는 담론 공간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적 명망과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영남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인 명성을 누렸다. 안동 중심 영남에서 이황은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영남, 특히 안동지역의 문집 간행을 저자의 학문적 업적의 결과라기보다는 문족을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더 컸다. 실제로 조선 후기 문집의 간행은 조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후손을 위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손들은 문집을 통해 문중의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문중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크게 드러내 보였다. 간행된 문집을 지역의 사족과 다른 문중에 배포함으로써 문중의 건재를 널리 알리기도 했으며, 문집의 공유를 통해 다른 문중과 학문 및 사상뿐만 아니라 사족 공동체 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문집 간행은 문중의 생존 전략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책 출판 과정은 어떠했을까
목판을 만드는 작업은 각수가 했지만 그 내용이 되는 자료를 수집, 정리, 교정하는 작업은 책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가 맡았다. 이 작업은 한 문중이나 여러 문중에 속한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맡아 했다. 『급문록영간시일기』는 교감 작업을 기록해두었다. 1913년 5월 6일 교정도감校正都監에 소속된 인물 등이 도산서원에서 정회定會를 가졌고, 7일자 일기에는 “교정 참봉 이중철李中轍이 들어와 교감하는 일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중철은 당시 도산서원 원장으로 교정도감에 소속되어 있었다. 18일에는 주註를 정리했고 그 외의 작업들을 거쳐 24일 교감을 마쳤다. 6월 7일 세 차례의 교정회의를 열 것을 결정하고 여러 사람이 합석해 교감했다. 이후 여러 문중에서 문안하고 자료를 가져와 검토했다.
6월 9일에는 금대기琴岱基가 “교감은 지극히 공정한 다음에라야 다른 사람의 심한 꾸중을 면할 수 있으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이강호李康鎬가 “이번 교감은 모두 세 차례나 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으니 이 같은 정본이면 어찌 공정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교정도감에 소속된 두 사람의 말을 특별히 기록한 것은 공정함을 원칙으로 삼아 신중히 해야 한다는 것이 교정의 기본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의 주가 소략한 것이 거론되어 광명실에 소장된 『약포집』을 꺼내 주를 고쳐 바로잡았다. 이후에도 증빙이 필요할 때마다 광명실 서책을 활용했다. 광명실이 도산서원의 도서관이자 지식저장고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6월 10일 교정 작업에서는 학문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율곡의 주를 교정하면서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변이 많았다.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에 대한 사실기록에서 오류도 발견되어 논의하여 수정했다. 서애 류성룡의 주를 둘러싸고는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뜻을 가지고 논박했다. 6월 11일 일기에서 드러나듯이, 의심나는 글자가 있으면 원본을 확인하여 고쳤다.
6월 12일에는 오천烏川 설월당雪月堂에서 우리 집안 선조의 호만 빼먹었다며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하는 패지牌旨가 도착해, 그것이 실수였지만 다른 뜻은 없었다는 내용의 답패答牌를 보냈다. 설월당은 퇴계 문인인 김부륜金富倫(1531~1598)으로 그의 호인 설월당이 누락되었던 모양이다. 이날 모두 합의하기를, 퇴계 문인의 기록에 의심스러운 점들은 따로 적어두기로 했다.
조선시대 도산서원의 서적 간행이나 문중의 문집 간행은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 서적의 수요자가 직접 생산을 맡았던 것이다. 이러한 비시장 생산은 보급에 한계가 뒤따를 수 있다. 그런데 서적 제작이 많은 사람의 폭넓은 참여와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문집은 문중 사람의 폭넓은 참여 속에 제작되고 문중 간에 간행 문집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서원이나 문중의 서적 생산이 지식의 확산이라는 차원에서 행한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문집 등의 내용이 오늘날의 과학기술, 경제경영과 같은 유용한 지식이 아니라고 지적할 수는 있다. 그런데 조선 사회에서 가장 중시된 안정된 도덕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과제로 보면, 문집에 실린 내용은 유용한 지식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원이나 문중이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서적을 간행할 때라도 압도적으로 시장에 의존했다.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그 화폐가치를 헤아려 시도기에 적고 일정 부분을 정산해 하기에 옮겼던 데에서 드러나듯이, 현물이 들어간 것도 화폐로 환산하여 회계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제작경비를 조달하는 데는 부조에 크게 의존했다. 요컨대 조선시대 서원이나 문중의 서적 생산에서 경비 조달은 호혜적인 부조에 크게 의존했고 제작과정은 압도적으로 시장에 의존했으며, 서적은 제작에 참여하거나 부조를 했거나 혹은 서로 문집을 주고받은 사람에게 배급되는 독특한 양식이었다.
조선시대에 도덕사회의 구현을 위한 학문과 지식이 중시되고 그와 관련하여 서원이나 문중이 문집 등을 간행하는 것은 유교문화의 산물이었다. 달리 말해 도덕과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가 문집이라는 독특한 형식의 출판을 성행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교 목판은 국가가 아닌 민간 사족이 주도한 민간 유교문화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의 책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도산서원은 서원의 관리와 운영을 위해 많은 기록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왔으며, 여기에는 아주 다양한 내용의 정보가 함축되어 있다.
도산서원은 건립 초기부터 별도의 서책보관실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재협실과 광명실이 그것이다. 상재협실은 처음부터 서책 보관을 위해 지은 건물이라기보다는 작은방의 의미로 이해되며, 서책이 늘어나면서 쓰임새가 책방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서책 관리에 관해서는 별도의 규정을 마련해두고 있진 않지만, 도산서원원규 총칙에 광명실 개폐에 관한 간략한 규정을 마련해두었으므로 서고인 광명실 출입과 서책 점검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을미서책치부』와 광명실전장기 같은 서책목록을 통해 원규의 규정이 계속 준수되었으며, 특히 서책목록 작성 방식이나 서책 관리 기록에 쓰인 용어 등을 통해 도산서원의 서책 관리가 매우 엄격하고 세밀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산서원의 전장기 가운데 서책전장기인 광명실전장기의 서책에 대한 주석에 쓰인 용어 또는 설명 방식은, 도산서원의 여러 서책목록에 일정한 용도와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 이를 유형별로 검토함으로써 도산서원 서책 관리 기록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도산서원이 서책 관리에서 중요시한 사항이 무엇인지, 같은 서책에 대한 주석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록상의 오류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살펴봤다.
서책전장기 외에 재물전장기에는 서책 관련 기록이 많지 않고 내용도 다양하지 않지만, 서책의 가격 등 서책전장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 적혀 있을 뿐 아니라, 작성 시기 면에서 서책전장기가 남아 있지 않은 기간의 공백을 보충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장기류 외에 간찰, 통문 등의 기록은 작성 목적이 전장기와 완전히 다르므로 서책 관련 내용 또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내용이 희소하고 특정 서책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며, 관점에 따라서는 보다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될 수 있다.
도산서원 서책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현전하는 서책 그 자체일 것이다. 한편 서책의 전래 경위를 보여주는 서책목록 또한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는 서책의 전래 경위를 비롯해 서책에 관한 매우 다양한 정보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초기 장서목록의 수록 서책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들이며, 이는 초기 서원이 어떻게 장서를 구성했는가 하는 일반적인 형태를 알려주기에 한국의 서원 장서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군다나 실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가 높다. 따라서 도산서원 초기 장서목록에 나타나는 16세기 서원 장서는 단일 컬렉션으로서 손색이 없으며, 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 작가 소개
기획 :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한국국학진흥원은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기록문화유산의 체계적인 조사·수집을 통해 민족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해나가는 한국학 전문 연구기관이다. 고문서·고서 등의 기록문화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물론, ‘목판 10만장 수집운동’을 통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선시대 유교목판을 보존하는 데 역량을 쏟고 있다. 또한 여기서 축적된 성과를 바탕으로 유교문화박물관과 인성교육연수원을 운영함으로써 기록 속에 담긴 조상의 숨결이 오늘을 인도하는 지혜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자 : 정만조
국민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선후기 정치사회사와 관련한 수많은 논저를 펴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시대 서원연구』 『음애 이자와 기묘사림』(공저), 『한국 역사상 관료제 운영시스템에 관한 연구』(공저), 『한국사상의 정치형태』(공저) 『조선시대 경기북부 지역 집성촌과 사족』(공저)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개항기 시장구조와 그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한국경제통사』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박제가』 『서울상업사』(공저),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공저) 『류성룡의 학술과 사상』(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서울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후기 지성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공부의 발견』『도산서원』(공저) 『지식 변동의 사회사』(공저), 『東亞傳統敎育與學禮學規』(공저) 등이 있다.
저자 : 이수환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영남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서원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조선후기 서원연구』 『경주 회재 이언적 종가』 『용산서원』(공저) 등이 있고 편저로 『玉山書院誌』 『道東書院誌』 등이 있다.
저자 :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경북대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호남지방 목활자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공저서로 『해외 한국본 고문헌 자료의 탐색과 검토』 『풍석 서유구와 임원경제지』 『장서각에서 옛 기록을 만나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승총명록으로 보는 조선후기 지식인의 생활사』 등이 있다.
저자 : 손숙경
동아대 사학과 강사. 동아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변경지역의 무임조직과 무임집단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동아시아 근세사회의 비교』(공저), 『여성 천주교와 만나다』(공저), 『조선후기 동래의 무청선생안과 무임총람』(편저), 『조선후기 동래 석대동 하리의 영양 천씨 가문과 이들의 고문서』(편저) 등이 있다.
저자 : 김종석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경북대를 졸업하고 영남대에서 퇴계의 심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 『근현대 영남유학자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청년을 위한 퇴계평전』 등이 있고 대표 역서로 『심경강해』 『도산급문제현록』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여는 글 서원, 조선 지식의 힘
도산서원과 영남의 지식문화
제1장 심학과 이기, 정학을 둘러싼 논쟁들
퇴계의 강학활동과 도산강회
제2장 스승과 제자가 함께 지식을 빚어내다
도산서원 자료를 통해 본 퇴계와 월천
제3장 책으로 헤게모니의 중심에 서다
도산서원의 서책 간행과 지역사회의 문화 형성
제4장 도산서원은 어떻게 책을 만들었는가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특질
제5장 엄격한 서책 관리와 도서관 역할
『전장기』를 통해 본 서책의 전승과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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