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강철재상 이면의 인간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2012년 1월 30일자 〈뉴욕타임스〉는 비스마르크의 육성이 녹음된 축음기의 실린더 보관통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1889년 발명가 에디슨의 대리인 방게만(Theo Wangemann)이 프리드리히스루우를 방문했을 때 녹음한 기록이 2011년 마침내 기술자 푸이(Stephan Puille)에 의해 디지털화함으로써 가녀리고 가라앉은 듯 흐릿하지만 복원된 진짜 목소리를 통해 예상치 않게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20년이 넘었다. 그 출발점인 ‘비스마르크의 제국’과 그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도 시대적 과제로 자리해왔고, ‘프로이센의 천재’요 ‘독일제국의 창건자’로서 영웅이라는 찬사 이면에 제3제국 나치 독재의 ‘개척자’이자 ‘군부 독재자’, ‘독일역사 발전의 파괴범’이라는 오명도 여전하다.
비스마르크는 모순의 화신이었다. 프로이센에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역사의 그늘로 밀어넣어 버렸고, 독일에 국민국가를 건설했으나 수백만의 독일인들을 배제했으며, 혁명에 대항해 투쟁을 불사했으나 스스로는 ‘혁명’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의회를 경시했으나 민주주의 선거권을 지닌 제국의회를 일궈냈고, 옛 군주국과 작별을 고했으나 자신과 왕조를 위해 드높은 명망을 이뤄냈으며, 적 없이는 살 수 없었으나 노동자운동에 맞서 투쟁하는 와중에도 과감하게 사회복지국가의 건설을 외쳤다.
비스마르크는 28년을 집권했다. 국가적·경제적으로 제대로 통합조차 되지 못했던 독일을 통일하고 산업화를 이룩하는 한편, 민족주의가 만연하고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19세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일의 위상을 확립하고 국제정치를 조정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힘의 논리를 추종하고 분열과 대립을 초래한 주역이었던 만큼 그 자신과 시대를 평가하는 데 공과의 논란은 여전하다.
비스마르크는 정적이나 이념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안팎으로 어떤 제한이나 구분도 두지 않았다. 사안의 경중에 좌우되었을 뿐 두 개의 공만 바라보고 두 개의 공만을 가지고 놀지 않은, 이른바 실용주의적 처세에 능했다.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한꺼번에 다섯 개의 공도 마다하지 않는 “다선의 정책”으로 “가능의 기교”를 완성함으로써 현실정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 왕조”는 젊은 황제 호엔촐레른 왕조로 교체되면서 모든 직위와 권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일층 객석”으로 물러났음에도 정치적 조력자인 국방장관 론의 표현처럼 “커피 대용”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조용히 말없이 그 존재만으로 독일 국가의 위상과 자국민의 영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일화 291편은 전무후무한 비스마르크의 성공담보다는 남달리 풍부한 유머와 재치, 신랄한 풍자로 상황마다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비스마르크 스타일’로 유독 눈길을 끈다. 중갑기병의 헬멧에다 부릅뜬 두 눈만으로도 적수에게 호전적으로 비치기에는 그만인가 하면, 주치의 슈베닝거 말처럼 손놀림의 제스처 하나로 상대를 매료시킬 수도 있다. 독일문학의 백미를 장식하는 문학적 소양이 번득이는 예술가의 지성에 찬사를 잇게 하면서도, 공명심과 소유욕, 사랑과 열정, 분노와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굴레를 새삼 일깨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말과 행동은 이런 모순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처리하고 보답하되 헛되이 말하는 법이 없었고, 냉대하고 관리하되 가벼이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중하고 집요하며 저돌적인 생명력을 지닌 정치가, 또 철두철미한 통치력과 충심을 품은 지도자로서 그 이상의 이미지를 대면케 되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말은 지략이고 술책이면서 또한 그의 정신과 인격을 담아냈고, 행동은 화합이나 탄압에 기울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과 충성으로 일관했다. 정치가로서 지도자로서 그의 말과 행동은 곧 정치의 중심이고 국가의 얼굴이었다.
언젠가 비스마르크는 “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유머감각을 놓아버린 적이 없었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던 그였기에 남다른 인내와 자제력의 고충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패’의 순간에서조차 진한 연륜을 드러내는 타고난 자산을 수긍하게 된다. 론의 말이 새삼스럽다. “누구든 가지는 행운이지만, 많지 않은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며, 또 겨우 소수만이 그걸 이용할 뿐이다.”
1815년 4월 1일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올해로 탄생 197주년을 맞는다. 19세기의 비스마르크를 비판하면서도 그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비스마르크에게 공감하면서도 또한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서 우리의 시대도 돌아보게 된다.
일화 몇 편
015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방탕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장래 희망으로 외교관을 꼽아 줄곧 미련을 버리질 못했다. 어느 날 외무고시 결과에 가문의 배경이나 관료와의 친분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데다, 특히 프로이센의 평범한 지방 귀족 자제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고 주저앉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결국 외교 업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등 사생결단의 각오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나는 프로이센의 최고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이 되고 말 테다.
025 영원한 휴가
상관들의 권위의식에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던 비스마르크에게 예상보다 빠르게 그들과 ‘절교’할 기회가 다가왔다. 바로 그날이었다. 비스마르크가 며칠 휴가를 청하기 위해 상관들 중 한 사람인 메딩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1시간 이상 무작정 기다려야 했는데, 하는 일도 없이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메딩을 반쯤 열린 문으로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마침내 황송하게도 면회가 허락되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상대가 누구든 불손한 태도에는 민감하게 보복하던 비스마르크로서는 불합리한 관료체계에 대한 혐오감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비스마르크가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사실 저는 며칠 휴가를 내고자 왔습니다만, 감사하게도 당신께서 즉각 저를 해고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표를 제출합니다!
그 후 비스마르크는 어느 초대받은 자리에서 예전의 상관을 마주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서로를 소개했다.
두 분께서는 서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재빨리 답했다.
그런 영광은 얻질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소개가 끝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태연스레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정말 반갑습니다.
042 천생연분
비스마르크 부부는 기질이 서로 달랐지만, 무엇보다 가족적인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소박하고도 도덕적인 가정환경을 중시했으며 이런 생활방식은 부부의 사랑처럼 늘 한결같았다.
언젠가 비스마르크가 친구 샤를라흐에게 요한나와 부부로 함께한 48년의 의미를 진솔하게 얘기했다.
신께 감사드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독일제국을 통일한 재상으로서 맘껏 누린 영광이 아니라, 요한나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있게 된 것이네.
사실 요한나는 남편에게 헌신하고 순종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남편에게 맞추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주장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생각했고 남편의 주변 관계에도 무리 없이 적응해가려 했기에 매사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며 긴장감이 넘치는 비스마르크에게 그야말로 최고의 반려자가 아닐 수 없었다. (중략)
1894년 요한나가 죽기 몇 주 전 비스마르크가 주치의인 슈베닝거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늘 내게 ‘작센의 은자’라고들 하지만, 나는 둘이서 함께하는 은자라네. ……지금의 나 자신, 내가 이룬 모든 것이 아내 덕분이라네.
066 훈장의 출처
1854년 뮌헨 근교에서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렸을 때였다. 그 자리에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프로이센 대사 자격으로 비스마르크가 참석했고, 오스트리아 대공도 참석했다.
대공은 가슴에 훈장을 가득 달고 있는 프로이센 병사들은 물론이고 프로이센 국경수비대 복장에 몇 개의 훈장을 달고 있는 비스마르크를 한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잠시 뒤에는 지난날의 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격한 논쟁도 오갔다. 끝내 대공은 당시 프로이센이 보였던 소극적인 태도를 슬쩍 비꼬면서 비아냥거렸다.
저 많은 훈장들을 보시오! 모두 적에게서 노획한 것들이오?
비스마르크가 응수했다.
물론입니다. 모든 것이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적에게서 획득한 것이지요.
077 외교관과 숙녀의 차이
페테르부르크 시절 비스마르크가 한 숙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비스마르크에게 알랑거리듯 말했다.
사람들은 외교관들을 신뢰할 수 없어요. 외교관이 ‘예’라고 말하면, 그건 ‘아마’라는 뜻일 테죠. ‘아마’라고 말하면, ‘아니요’라는 의미이고, ‘아니요’라고 말하면 …… 그는 외교관이 아니에요.
숙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비스마르크가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우는 정반대겠지요. 숙녀가 ‘아니요’라고 말하면, ‘아마’라고 생각한 것일 테죠. ‘아마’라고 말하면 ‘예’라는 의미일 테고, 그리고 ‘예’라고 말하면 …… 그녀는 숙녀가 아니겠지요.
079 현격한 입장 차이
1862년 수상에 임명되기 직전 비스마르크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프랑스 대사로 몇 개월간 파리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나라 대표들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알려진 나폴레옹 3세 앞에서 몸을 낮춘 반면 그는 유일하게 목을 꼿꼿이 세운 외교관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프로이센 사람’에게 실로 친절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한번은 가족도 없이 파리에 머무르는 그에게 연인까지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연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처지를 해명했으나 황제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답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 아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소!
비스마르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상관없는 일입니다, 폐하. (하략)
130 간교한 시종
비스마르크가 친구이자 바르비 지역 의원인 디에체의 저택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고 있던 때였다. 오후 무렵 정부 형태를 두고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비스마르크가 한마디를 했다.
나는 정부 형태 가운데 절대주의야말로 가장 불행한 체제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비스마르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강력하게 항변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역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절대권력으로 통치되는 국가의 정세에 간교한 시종이 자주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당신은 전혀 믿지 않으시는 것 같군.
147 담배와 향수의 진실
보불전쟁 중 영국 대사 러셀 경이 비스마르크와 면담하기 위해 베르사유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아르님 백작이 먼저 수상을 찾아 보고하는 관계로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아르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개진 얼굴에 연신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해대며 몹시도 끙끙대는 눈치였다.
참을 수가 없었소. 그렇게 강한 아바나 여송연을 연거푸 피워대다니, 끔찍해!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야만 했소. 적어도 당신은 이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엔 러셀이 들어갔다. 비스마르크는 흔쾌히 그를 맞이했다.
오, 친애하는 러셀 경!
그때 러셀은 열린 창가에 서 있던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 거기서 비스마르크 역시 거침없이 속내를 늘어놓았다.
놀랄 만한 취향이군. 드디어! 아르님, 그 사람!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향수에 쩔어 있었소. 그걸 견뎌내자니 창문을 열어야만 했다오. 자, 앉으시오!
이후 역사적인 진실의 문제를 두고 논란이 생길 때마다 러셀은 늘 베르사유에서의 이 일화를 상기했다.
159 대담한 무례
1871년 비스마르크가 파리에 입성할 때였다.
한 프랑스인이 갑자기 다가와 거침 없이 외쳤다.
이 천박한 악한!
그 일이 있은 후 비스마르크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
왜 그를 체포토록 하지 않았습니까?
비스마르크는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나는 ‘그 사람을 체포하라’ 하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가도록 내버려뒀소. 그의 대담한 행위가 나로서는 감탄스러웠다오.
174 풍자 잡지 주인공
독일의 풍자만화에는 나폴레옹 3세와 터키의 술탄 이외에 비스마르크도 자주 등장했다. 나폴레옹은 이미 죽어버렸고 또 술탄이 “부적당한 풍자화로 인해 자기 인격이 계속해서 모독될 경우 터키에 거주하는 독일인에게 준엄한 보복조치를 수행하겠다”며 독일 정부를 위협하고 나오는 바람에 졸지에 비스마르크 홀로 남은 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 이르자, 비스마르크는 술탄의 결정을 태연히 받아들이고는 한마디 던졌다.
자, 이제는 나 혼자 풍자판에 내버려졌군. 지금까지 우리는 적어도 역할을 나누었지. 술탄도 물러난 지금, 그 프로그램을 나 혼자 도맡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그래.
180 재산에 대한 가치관
재산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철저하리만큼 보수적인 프로이센 융커의 자세를 견지했지만, 분명 그만의 가치관은 있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아름다운 공원을 산책하며, 편안한 침대에서 잠자고, 세련된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집이 아니고, 내 나무가 아니고, 내 침대와 내 탁자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런 호감도 느끼지 못한다.
192 내 이름은 오토
외교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비스마르크는 미국 대사 부인도 초대했다. 그 무렵 독일에 주재한 대사의 국가와 독일제국 사이에 어려운 협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대사 부인은 비스마르크에게 자국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자신의 온갖 매력을 연신 발휘하려 했다. 비스마르크 옆에 앉아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던 부인은 먼저 비스마르크를 “재상님”이라 부르더니 더욱 상냥해져서는 “경애하는 제후님”이라며 고쳐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후식이 나올 때쯤이었다. 그녀의 어투는 어느새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호칭인 “내 사랑하는 비스마르크”로 확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웃으면서 그런 매력을 잠시 즐기는 듯하더니 모카를 마시던 대사 부인에게 싱긋 웃으면서 몸을 구부렸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속삭이기까지 했다.
친애하는 부인, 내 이름은 오토라오.
289 운명
48시간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비스마르크는 다시 고열 증세를 보이며 수차례 혼미한 상태를 거듭하면서 심상찮은 증세를 보였다. 딸 마리 백작 부인이 이마를 닦아주자, “고맙구나, 얘야!”라며 인사를 잊지 않았던 그는 1898년 7월 30일 토요일 자정이 되기 직전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숨을 거두기 직전의 짧고도 절실했던 마지막 순간에는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만을 남겼다. 그날 모든 가족들이 모였고, 주치의 슈베닝거 역시 노재상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내내 자리를 지켰다.
머리를 왼쪽으로 기댄 채 마치 자는 사람처럼 누운 비스마르크의 얼굴은 온화하고 평온했다. 그는 2년 전부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해왔다. 장례식을 소란스럽게 치르지 말 것을 당부했고, 유언에 따라 사슴 무리가 살고 있는 장소 건너편의 언덕에 묻혔다. 그리고 7개월 후에 작센발트의 조묘 교회에 요한나와 나란히 묻힘으로써 비로소 영원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사후에도 삶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비스마르크의 뜻대로 조묘 교회는 철도선 근처에 있어 한층 의미를 더했다.
▣ 작가 소개
편자 : 강미현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비스마르크 평전》 《독일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의 역사상과 독일인Das Bismarckbild nach der Wiedervereinigung Deutschlands und die Deutschen》과 주요 논문으로 〈Bismarck 식민정책의 연구 동향에 관한 고찰〉 〈비스마르크 시대 포젠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 정책〉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 광포한 융커: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2 정계의 신출내기: 여우굴의 제일인자
3 호의적인 ‘악동’: 독일 전역에서 사랑받는 인물
4 헤게모니의 제왕: 누가 나를 휘두르랴
5 프로이센의 호메로스: 내가 어디에 앉든 그곳이 상석
6 강철재상: 사회복지정책, 국가가 떠맡을 일
7 충직한 독일 신하: 정치 무대에서 일층 객석으로
후기
강철재상 이면의 인간 비스마르크를 만나다
2012년 1월 30일자 〈뉴욕타임스〉는 비스마르크의 육성이 녹음된 축음기의 실린더 보관통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1889년 발명가 에디슨의 대리인 방게만(Theo Wangemann)이 프리드리히스루우를 방문했을 때 녹음한 기록이 2011년 마침내 기술자 푸이(Stephan Puille)에 의해 디지털화함으로써 가녀리고 가라앉은 듯 흐릿하지만 복원된 진짜 목소리를 통해 예상치 않게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게 된 것이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고 20년이 넘었다. 그 출발점인 ‘비스마르크의 제국’과 그의 업적에 대한 재평가도 시대적 과제로 자리해왔고, ‘프로이센의 천재’요 ‘독일제국의 창건자’로서 영웅이라는 찬사 이면에 제3제국 나치 독재의 ‘개척자’이자 ‘군부 독재자’, ‘독일역사 발전의 파괴범’이라는 오명도 여전하다.
비스마르크는 모순의 화신이었다. 프로이센에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역사의 그늘로 밀어넣어 버렸고, 독일에 국민국가를 건설했으나 수백만의 독일인들을 배제했으며, 혁명에 대항해 투쟁을 불사했으나 스스로는 ‘혁명’을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의회를 경시했으나 민주주의 선거권을 지닌 제국의회를 일궈냈고, 옛 군주국과 작별을 고했으나 자신과 왕조를 위해 드높은 명망을 이뤄냈으며, 적 없이는 살 수 없었으나 노동자운동에 맞서 투쟁하는 와중에도 과감하게 사회복지국가의 건설을 외쳤다.
비스마르크는 28년을 집권했다. 국가적·경제적으로 제대로 통합조차 되지 못했던 독일을 통일하고 산업화를 이룩하는 한편, 민족주의가 만연하고 제국주의가 팽배하던 19세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독일의 위상을 확립하고 국제정치를 조정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힘의 논리를 추종하고 분열과 대립을 초래한 주역이었던 만큼 그 자신과 시대를 평가하는 데 공과의 논란은 여전하다.
비스마르크는 정적이나 이념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안팎으로 어떤 제한이나 구분도 두지 않았다. 사안의 경중에 좌우되었을 뿐 두 개의 공만 바라보고 두 개의 공만을 가지고 놀지 않은, 이른바 실용주의적 처세에 능했다.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한꺼번에 다섯 개의 공도 마다하지 않는 “다선의 정책”으로 “가능의 기교”를 완성함으로써 현실정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1890년 “비스마르크 왕조”는 젊은 황제 호엔촐레른 왕조로 교체되면서 모든 직위와 권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일층 객석”으로 물러났음에도 정치적 조력자인 국방장관 론의 표현처럼 “커피 대용”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조용히 말없이 그 존재만으로 독일 국가의 위상과 자국민의 영혼에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일화 291편은 전무후무한 비스마르크의 성공담보다는 남달리 풍부한 유머와 재치, 신랄한 풍자로 상황마다 간결하고도 정확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비스마르크 스타일’로 유독 눈길을 끈다. 중갑기병의 헬멧에다 부릅뜬 두 눈만으로도 적수에게 호전적으로 비치기에는 그만인가 하면, 주치의 슈베닝거 말처럼 손놀림의 제스처 하나로 상대를 매료시킬 수도 있다. 독일문학의 백미를 장식하는 문학적 소양이 번득이는 예술가의 지성에 찬사를 잇게 하면서도, 공명심과 소유욕, 사랑과 열정, 분노와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굴레를 새삼 일깨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말과 행동은 이런 모순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처리하고 보답하되 헛되이 말하는 법이 없었고, 냉대하고 관리하되 가벼이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신중하고 집요하며 저돌적인 생명력을 지닌 정치가, 또 철두철미한 통치력과 충심을 품은 지도자로서 그 이상의 이미지를 대면케 되는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말은 지략이고 술책이면서 또한 그의 정신과 인격을 담아냈고, 행동은 화합이나 탄압에 기울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과 충성으로 일관했다. 정치가로서 지도자로서 그의 말과 행동은 곧 정치의 중심이고 국가의 얼굴이었다.
언젠가 비스마르크는 “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나는 단 한 번도 유머감각을 놓아버린 적이 없었다”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극단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던 그였기에 남다른 인내와 자제력의 고충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패’의 순간에서조차 진한 연륜을 드러내는 타고난 자산을 수긍하게 된다. 론의 말이 새삼스럽다. “누구든 가지는 행운이지만, 많지 않은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며, 또 겨우 소수만이 그걸 이용할 뿐이다.”
1815년 4월 1일 태어난 비스마르크는 올해로 탄생 197주년을 맞는다. 19세기의 비스마르크를 비판하면서도 그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비스마르크에게 공감하면서도 또한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서 우리의 시대도 돌아보게 된다.
일화 몇 편
015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방탕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비스마르크는 장래 희망으로 외교관을 꼽아 줄곧 미련을 버리질 못했다. 어느 날 외무고시 결과에 가문의 배경이나 관료와의 친분이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데다, 특히 프로이센의 평범한 지방 귀족 자제는 하늘의 별 따기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버리고 주저앉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결국 외교 업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는 등 사생결단의 각오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심중을 털어놓았다.
나는 프로이센의 최고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이 되고 말 테다.
025 영원한 휴가
상관들의 권위의식에 거부감을 떨치지 못하던 비스마르크에게 예상보다 빠르게 그들과 ‘절교’할 기회가 다가왔다. 바로 그날이었다. 비스마르크가 며칠 휴가를 청하기 위해 상관들 중 한 사람인 메딩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기실에서 1시간 이상 무작정 기다려야 했는데, 하는 일도 없이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메딩을 반쯤 열린 문으로 보고 있자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마침내 황송하게도 면회가 허락되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상대가 누구든 불손한 태도에는 민감하게 보복하던 비스마르크로서는 불합리한 관료체계에 대한 혐오감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침내 비스마르크가 분명한 의사를 밝혔다.
사실 저는 며칠 휴가를 내고자 왔습니다만, 감사하게도 당신께서 즉각 저를 해고해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사표를 제출합니다!
그 후 비스마르크는 어느 초대받은 자리에서 예전의 상관을 마주하게 되었다. 집주인이 따로 자리까지 마련해 서로를 소개했다.
두 분께서는 서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스마르크는 재빨리 답했다.
그런 영광은 얻질 못했습니다.
그러고는 소개가 끝나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태연스레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정말 반갑습니다.
042 천생연분
비스마르크 부부는 기질이 서로 달랐지만, 무엇보다 가족적인 삶을 지향했다. 그들은 소박하고도 도덕적인 가정환경을 중시했으며 이런 생활방식은 부부의 사랑처럼 늘 한결같았다.
언젠가 비스마르크가 친구 샤를라흐에게 요한나와 부부로 함께한 48년의 의미를 진솔하게 얘기했다.
신께 감사드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독일제국을 통일한 재상으로서 맘껏 누린 영광이 아니라, 요한나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있게 된 것이네.
사실 요한나는 남편에게 헌신하고 순종했으며, 심지어 자신을 남편에게 맞추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주장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생각했고 남편의 주변 관계에도 무리 없이 적응해가려 했기에 매사에 주도적이고 적극적이며 긴장감이 넘치는 비스마르크에게 그야말로 최고의 반려자가 아닐 수 없었다. (중략)
1894년 요한나가 죽기 몇 주 전 비스마르크가 주치의인 슈베닝거에게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늘 내게 ‘작센의 은자’라고들 하지만, 나는 둘이서 함께하는 은자라네. ……지금의 나 자신, 내가 이룬 모든 것이 아내 덕분이라네.
066 훈장의 출처
1854년 뮌헨 근교에서 대규모 퍼레이드가 열렸을 때였다. 그 자리에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프로이센 대사 자격으로 비스마르크가 참석했고, 오스트리아 대공도 참석했다.
대공은 가슴에 훈장을 가득 달고 있는 프로이센 병사들은 물론이고 프로이센 국경수비대 복장에 몇 개의 훈장을 달고 있는 비스마르크를 한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잠시 뒤에는 지난날의 전쟁 준비와 관련하여 격한 논쟁도 오갔다. 끝내 대공은 당시 프로이센이 보였던 소극적인 태도를 슬쩍 비꼬면서 비아냥거렸다.
저 많은 훈장들을 보시오! 모두 적에게서 노획한 것들이오?
비스마르크가 응수했다.
물론입니다. 모든 것이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적에게서 획득한 것이지요.
077 외교관과 숙녀의 차이
페테르부르크 시절 비스마르크가 한 숙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비스마르크에게 알랑거리듯 말했다.
사람들은 외교관들을 신뢰할 수 없어요. 외교관이 ‘예’라고 말하면, 그건 ‘아마’라는 뜻일 테죠. ‘아마’라고 말하면, ‘아니요’라는 의미이고, ‘아니요’라고 말하면 …… 그는 외교관이 아니에요.
숙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비스마르크가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성들의 경우는 정반대겠지요. 숙녀가 ‘아니요’라고 말하면, ‘아마’라고 생각한 것일 테죠. ‘아마’라고 말하면 ‘예’라는 의미일 테고, 그리고 ‘예’라고 말하면 …… 그녀는 숙녀가 아니겠지요.
079 현격한 입장 차이
1862년 수상에 임명되기 직전 비스마르크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프랑스 대사로 몇 개월간 파리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다른 나라 대표들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알려진 나폴레옹 3세 앞에서 몸을 낮춘 반면 그는 유일하게 목을 꼿꼿이 세운 외교관이었다.
나폴레옹은 그런 ‘프로이센 사람’에게 실로 친절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한번은 가족도 없이 파리에 머무르는 그에게 연인까지 소개해주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정중히 거절했다.
저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연인을 만나지 못합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처지를 해명했으나 황제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황제는 비스마르크의 답변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 아내가 여기 있는 것도 아니잖소!
비스마르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상관없는 일입니다, 폐하. (하략)
130 간교한 시종
비스마르크가 친구이자 바르비 지역 의원인 디에체의 저택에서 사냥을 하기 위해 잠시 머물고 있던 때였다. 오후 무렵 정부 형태를 두고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비스마르크가 한마디를 했다.
나는 정부 형태 가운데 절대주의야말로 가장 불행한 체제라고 생각하오.
그런데 비스마르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강력하게 항변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 역시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절대권력으로 통치되는 국가의 정세에 간교한 시종이 자주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당신은 전혀 믿지 않으시는 것 같군.
147 담배와 향수의 진실
보불전쟁 중 영국 대사 러셀 경이 비스마르크와 면담하기 위해 베르사유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아르님 백작이 먼저 수상을 찾아 보고하는 관계로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아르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개진 얼굴에 연신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해대며 몹시도 끙끙대는 눈치였다.
참을 수가 없었소. 그렇게 강한 아바나 여송연을 연거푸 피워대다니, 끔찍해!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아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야만 했소. 적어도 당신은 이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엔 러셀이 들어갔다. 비스마르크는 흔쾌히 그를 맞이했다.
오, 친애하는 러셀 경!
그때 러셀은 열린 창가에 서 있던 비스마르크를 발견했다. 거기서 비스마르크 역시 거침없이 속내를 늘어놓았다.
놀랄 만한 취향이군. 드디어! 아르님, 그 사람!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향수에 쩔어 있었소. 그걸 견뎌내자니 창문을 열어야만 했다오. 자, 앉으시오!
이후 역사적인 진실의 문제를 두고 논란이 생길 때마다 러셀은 늘 베르사유에서의 이 일화를 상기했다.
159 대담한 무례
1871년 비스마르크가 파리에 입성할 때였다.
한 프랑스인이 갑자기 다가와 거침 없이 외쳤다.
이 천박한 악한!
그 일이 있은 후 비스마르크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
왜 그를 체포토록 하지 않았습니까?
비스마르크는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나는 ‘그 사람을 체포하라’ 하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가도록 내버려뒀소. 그의 대담한 행위가 나로서는 감탄스러웠다오.
174 풍자 잡지 주인공
독일의 풍자만화에는 나폴레옹 3세와 터키의 술탄 이외에 비스마르크도 자주 등장했다. 나폴레옹은 이미 죽어버렸고 또 술탄이 “부적당한 풍자화로 인해 자기 인격이 계속해서 모독될 경우 터키에 거주하는 독일인에게 준엄한 보복조치를 수행하겠다”며 독일 정부를 위협하고 나오는 바람에 졸지에 비스마르크 홀로 남은 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 이르자, 비스마르크는 술탄의 결정을 태연히 받아들이고는 한마디 던졌다.
자, 이제는 나 혼자 풍자판에 내버려졌군. 지금까지 우리는 적어도 역할을 나누었지. 술탄도 물러난 지금, 그 프로그램을 나 혼자 도맡을 수 있을지 궁금하군그래.
180 재산에 대한 가치관
재산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철저하리만큼 보수적인 프로이센 융커의 자세를 견지했지만, 분명 그만의 가치관은 있었다.
좋은 집에서 살고, 아름다운 공원을 산책하며, 편안한 침대에서 잠자고, 세련된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집이 아니고, 내 나무가 아니고, 내 침대와 내 탁자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런 호감도 느끼지 못한다.
192 내 이름은 오토
외교관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비스마르크는 미국 대사 부인도 초대했다. 그 무렵 독일에 주재한 대사의 국가와 독일제국 사이에 어려운 협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대사 부인은 비스마르크에게 자국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려고 자신의 온갖 매력을 연신 발휘하려 했다. 비스마르크 옆에 앉아 활발하게 대화를 나누던 부인은 먼저 비스마르크를 “재상님”이라 부르더니 더욱 상냥해져서는 “경애하는 제후님”이라며 고쳐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후식이 나올 때쯤이었다. 그녀의 어투는 어느새 친밀감을 불러일으키는 호칭인 “내 사랑하는 비스마르크”로 확 바뀌어 있었다.
그녀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지만, 비스마르크는 웃으면서 그런 매력을 잠시 즐기는 듯하더니 모카를 마시던 대사 부인에게 싱긋 웃으면서 몸을 구부렸다.
그러고는 귓속말로 속삭이기까지 했다.
친애하는 부인, 내 이름은 오토라오.
289 운명
48시간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비스마르크는 다시 고열 증세를 보이며 수차례 혼미한 상태를 거듭하면서 심상찮은 증세를 보였다. 딸 마리 백작 부인이 이마를 닦아주자, “고맙구나, 얘야!”라며 인사를 잊지 않았던 그는 1898년 7월 30일 토요일 자정이 되기 직전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숨을 거두기 직전의 짧고도 절실했던 마지막 순간에는 “요한나를 다시 만나게 해주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만을 남겼다. 그날 모든 가족들이 모였고, 주치의 슈베닝거 역시 노재상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내내 자리를 지켰다.
머리를 왼쪽으로 기댄 채 마치 자는 사람처럼 누운 비스마르크의 얼굴은 온화하고 평온했다. 그는 2년 전부터 조용히 죽음을 준비해왔다. 장례식을 소란스럽게 치르지 말 것을 당부했고, 유언에 따라 사슴 무리가 살고 있는 장소 건너편의 언덕에 묻혔다. 그리고 7개월 후에 작센발트의 조묘 교회에 요한나와 나란히 묻힘으로써 비로소 영원한 안식처를 찾게 되었다. 사후에도 삶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비스마르크의 뜻대로 조묘 교회는 철도선 근처에 있어 한층 의미를 더했다.
▣ 작가 소개
편자 : 강미현
동아대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성신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비스마르크 평전》 《독일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의 역사상과 독일인Das Bismarckbild nach der Wiedervereinigung Deutschlands und die Deutschen》과 주요 논문으로 〈Bismarck 식민정책의 연구 동향에 관한 고찰〉 〈비스마르크 시대 포젠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 정책〉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1 광포한 융커: 최고의 룸펜 아니면 최고의 인물
2 정계의 신출내기: 여우굴의 제일인자
3 호의적인 ‘악동’: 독일 전역에서 사랑받는 인물
4 헤게모니의 제왕: 누가 나를 휘두르랴
5 프로이센의 호메로스: 내가 어디에 앉든 그곳이 상석
6 강철재상: 사회복지정책, 국가가 떠맡을 일
7 충직한 독일 신하: 정치 무대에서 일층 객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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