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인 열정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가 그려낸
19세기의 실천적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
낭만적 반항아인가 위대한 혁명가인가?
“전기의 모범이자 최고의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쓰인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평전!” ― 이사야 벌린
‘바쿠닌’이란 무엇인가 ― 20세기의 역사가 E. H. 카가 답하다
“쾅!” 지난 5월 13일, 독일 포츠담에서 유럽연합(EU) 구제금융 정책관인 호르스트 라이첸바흐의 아내가 소유한 베엠베 승용차에 불이 붙었다. 담벼락에는 붉은 페인트 자국이 뚜렷했다. 그리스에 긴축 정책을 강요한 대가였다. 베를린의 아나키스트들이 한 행동으로 추측되는 이 ‘테러’는, 대중의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시위와 ‘종이 짱돌’을 넘어 극단적 테러로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는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뛰어난 전기 작가인 E. H. 카는 《미하일 바쿠닌》에서 치밀한 조사를 거쳐 추린 전기적 사실과 여러 언어로 된 문헌 자료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아나키즘의 아버지’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의 초상을 완성한다. 이 두툼한 전기에서 카는 바쿠닌의 인간적 면모나 실천 활동에 줄곧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를 살다간 한 인물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전기가 지녀야 할 미덕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또한 바쿠닌과 함께 한 시대를 주름잡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표트르 크로포트킨, 칼 마르크스 등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은 영국의 저명한 정치사상가이자 카와 숙적 관계이던 이사야 벌린도 “전기의 모범이자 최고의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쓰인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평전”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낼 만큼 전기 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바쿠닌의 정치적 견해나 이데올로기가 지닌 가치를 지나치게 깎아내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 이국적 사상가에 관한 방대한 전기를 관통하는 ‘추적자’이자 ‘수집가’인 카의 시선에는 아웃사이더의 정서를 공유하는 공감의 변호론이 짙게 깔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바쿠닌 추적자’ 카가 1937년에 쓴 이 책은 바쿠닌의 감추어진 사생활을 복원하고 유년기와 정치적 활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조망하는, 한 편의 뛰어난 평전이자 역사서인 동시에 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 1989년에 한 차례 축약 번역된 적이 있지만 오역과 누락이 많은데다 절판돼 독자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던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 이제 우리는 원본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에 아나키즘 전문가인 하승우 박사의 해설을 덧붙인 《미하일 바쿠닌》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스트의 자취를 추적하는 20세기의 역사가의 긴 여정에 동승할 수 있게 됐다.
‘은폐된 반항자’가 수집한 실천적 아나키스트의 초상
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은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다. 또한 혁명의 불씨를 좇아 일생을 바친 혁명가이기도 하다.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바쿠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하지만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1834년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의 스탄케비치 서클에 들어가 벨린스키와 헤르첸 등과 교류하고,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에 심취했다. 1840년 유럽으로 가 혁명적 범슬라브주의와 아나키즘에 빠져들었고, 1847년 혁명 활동 탓에 프랑스에서 추방된 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모든 슬라브 민족의 연방을 고대하며 1848년 프라하 봉기에 이어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가 곧바로 진압되고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등 관련자들은 도망치지만 바쿠닌은 체포돼 러시아 정부에 넘겨졌고, 괴혈병으로 이까지 빠진 피폐한 심신으로 1857년 시베리아에 유배된다. 25세 연하의 아내를 맞아 유형지에 정착하는 듯했지만, 특유의 낙관과 열정을 잃지 않은 바쿠닌은 1861년에 극적으로 탈출해 반년에 걸쳐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긴 여정 끝에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이어진 투옥과 유형의 세월이 끝난다.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에 참여했고, 1864~1868년에는 이탈리아 혁명 운동에 관여했다. 1868년 스위스로 근거지를 옮겨 사회민주동맹을 만들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때 슬라브 민족의 해방을 혁명의 목표로 삼던 바쿠닌은 아나키즘에 기운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인터내셔널에도 가입하는데, 이때 권력의 집중을 추구하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충돌했다.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결국 바쿠닌을 제명했다. 인터내셔널 제명과 네차예프 스캔들에 휘둘린 바쿠닌은 지독한 가난 속에 살다 스위스 베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 바쿠닌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청년기를 장식한 몇 차례의 연애 사건이나 시베리아에 남겨놓은 아내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1년 9개월 만에 재회하는 모습 등 낭만적 면모를 지닌 반면, 특유의 열정과 진지함을 발휘해 여러 무장봉기에 관여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혁명의 계획은 그야말로 창대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했고, 여러 번 시도한 비밀 결사는 엉성한데다 기쁨에 겨워 자기 입으로 음모의 실체를 드러내는 등 부주의했다. 스파이로 몰릴 정도로 논리보다 행동이 앞서고, 마르크스의 《자본》 번역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매듭짓지도 못했다.
혁명가 바쿠닌의 인격도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허풍선이에 빚쟁이인데다 “네 돈은 내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뻔뻔한 사람이었지만,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카리스마와 열정을 갖추고 있었다. 권위를 싫어했지만 비밀 결사를 만들어 수장이 되려 했고, “임신 3개월을 9개월로 착각”할 정도로 늘 바쁘게 돌아다녀도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한 바쿠닌의 삶은 바쿠닌 자신이 지닌 모순된 인격의 결과라는 것이다.
혁명가 바쿠닌의 사상도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주창자지만, 사상가가 아니라 실천가인 바쿠닌은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한 결과물을 후대에 남기지 않았다. 다만 바쿠닌의 사상과 실천은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의 혁명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마르크스 등에 맞서 급진적 혁명을 옹호하거나 러시아 혁명의 주역은 농민이라고 주장한 점은 바쿠닌 특유의 직관이 지닌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바쿠닌의 혁명은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뜨거운 열변으로 구체화됐는데, 반항과 파괴 같은 부정적 힘의 가능성을 중시한 반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만약 계획하는 게 모두 성취돼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물음에 바쿠닌은 “그때가 되면 나는 즉시 내가 만든 모든 것을 다시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전세계에 딱 세 명만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중 두 명은 나머지 한 사람을 억압하려고 힘을 합치려 들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권위와 중앙 집중을 일관되게 거부한 바쿠닌의 ‘파괴를 향한 창조적 열정’은 어디까지나 낭만적 반항아의 속성일 수도 있다는 게 카의 비판적 결론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해설을 쓴 하승우는 바쿠닌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자”라는 카의 주장을 적절히 논박한다. 오히려 바쿠닌은 고전적인 개인주의를 거부하며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의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연대를 통한 자유와 평등 속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지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노예로 산다면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고 보는 게 바쿠닌의 진심인데, 사실 ‘은폐된 반항자’ 카도 이런 점에 동의하고 있다.
자발성과 능동성의 혁명가 바쿠닌, 열정을 살다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인 열정이다.” 1842년 10월 《독일 연감》에 ‘쥘레 엘리사르’라는 필명으로 쓴 〈독일의 반동 ― 한 프랑스인의 노트에서〉에서 바쿠닌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한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평생 혁명의 불씨를 좇아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을 떠돌았다. 만년에는 스스로 “나는 평생을 시시포스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냈고, 끊임없이 자신의 어깨 위에서 무너져내리는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준비하며 살았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바쿠닌은 “돛대도, 키도 없이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거대한 배” 같았다.
바쿠닌은 이론이나 과학의 틀에 맞춰 현실을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카는 그 점을 늘 불평하지만, 바쿠닌은 동시대 지식인이나 혁명가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또는 애국심과 민주주의의 융합이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선험적 사고’나 ‘예정된 법칙’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추상적인 사회 법칙으로 인간의 삶을 재단할 수 없다고 믿었다.
어떤 시대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누가 어떻게 혁명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려고 끊임없이 다투고 편을 가른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회색빛 이론이 아니라 생명의 자발성에 의지했고, 외부 세계의 우발성에 반응하는 인간의 능동성을 신뢰했다. 19세기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이미 생명의 자발적인 능동성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운명”을 타고난 바쿠닌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영향력”과 “우람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으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게 혁명의 불씨를 되살렸다.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 온전한 삶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이 시대에 바쿠닌의 삶과 사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폴 애브리치는 《아나키스트의 초상》에서 역사상의 여러 급진 운동이 마르크스주의를 내걸지만 투쟁의 방식은 바쿠닌주의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다. 권위에 반항하는 젊음의 열정은 마르크스의 치밀하고 냉정한 분석보다는 바쿠닌의 뜨거운 가슴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바이틀링의 손은 모든 사람을 반대했고, 무력을 통한 국가 전복과 부의 몰수를 설교했다. “공산주의의 모든 적들을 사정없이 공격할 것”을 처음 주장한 인물일 것이다. 바쿠닌은 이 “숭고한 정신”의 이상주의와 무모한 야만성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격정적인 성격과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만남은 바쿠닌을 사변적인 철학자에서 현실적인 혁명가로 완전하게 전환시켜준, 바쿠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러시아 귀족이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하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사회적 또는 정치적 질서의 폭력적 전복은 미하일 바쿠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 183쪽
바쿠닌에게 마르크스는 언제나 좀 이질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반감을 일으키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엄격하고, 지나치게 신중하며, 계산적이기까지 했다. 바쿠닌은 순수한 사고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실천했다. 바쿠닌에게는 감정을 띠지 않은 것은 어느 것도 바람직한 게 아니었다. 러시아 귀족과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 사이에는 단순히 기질상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전통과 사상에서도 공통된 배경이 없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애초부터 서로 이해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좋아할 수도 없었다. ― 192쪽
바쿠닌은 프루동이 “공론만 일삼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보다 그 행동과 직관에서 몇 백 배나 더 혁명적이다”라고 썼다. 프루동은 생시몽주의자와 푸리에주의자들의 감상적인 낙관주의와 공상에 기초한 백일몽을 하늘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과감하게 현존 질서의 세 가지 주요한 기둥인 신, 국가, 사유 재산을 공격했다. …… 권위를 향한 바쿠닌의 타고난 반항을 진정한 아나키즘의 강령으로 변형시킨 장본인은 프루동이었다. ― 194쪽
바쿠닌의 성격은 합리적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속한다. 바쿠닌의 야망은 불분명한데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글은 활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일관성이 결여돼 있었다. …… 심지어 죽기 전부터 이미 고국을 제외한 몇몇 나라에서는 전설이 됐다. 바쿠닌이 정치적 웅변이 살아 있는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나라에서 성장했다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웅변가 중 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바쿠닌은 공개 석상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상황, 그것도 모국어로는 단 한 번도 연설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살았다.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그런 기회가 올 때면 그 우람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은 청중을 최면 상태로 몰아넣었다. ― 211쪽
미하일 바쿠닌만큼 한 개인의 인생과 사상이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지만, 그런 사람 중에서 미하일 바쿠닌만큼 자신의 견해에 관해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바쿠닌은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타고난 기질 탓에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그리고 문어보다는 구어에 의지해서 글을 썼다. ― 242쪽
첫째, 바쿠닌은 부르주아지가 명확하게 반혁명적 세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과 미래의 혁명을 향한 희망은 노동 계급에 달려 있다는 점을 믿었다. 둘째, 혁명의 전제 조건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와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자유 슬라브 공화국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 최후에는 농민, 특히 러시아 농민이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이 무렵 바쿠닌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기초였다. ― 246쪽
기질로 보면 마르크스보다는 바쿠닌이 대의제를 거부하기가 더 쉬웠다. 러시아 귀족으로 태어난 바쿠닌에게는 정치적 지혜를 발휘할 수단으로 표결이라는 형식을 받아들일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바쿠닌은 자유를 사랑했지만, 평등에는 불쾌감을 갖고 있었다. 평등은 바쿠닌에게 하나의 선전 문구요 이상일 뿐이지 결코 살아 있는 신념인 적이 없었다. ― 249쪽
민족주의자로서 바쿠닌은 슬라브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같은 열정을 독일의 민족주의를 위해 불어넣지는 않았다. 반면 국제주의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비난했지만, 여기에 상응하는 독일 민족주의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 놓인 쟁점에 관해서 역사는 아직도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또한 어쩌면 역사는 여전히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 문제에 관해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1918년에는 바쿠닌이 승리했다. ― 255쪽
이론상으로는 절대 자유의 주창자요, 그때는 물론 그 뒤에도 공산주의의 경직된 규율을 가장 혹독한 말을 사용해 비난한 바쿠닌, 그 바쿠닌이 자신의 혁명 활동을 조직화하면서 보이는 모습은 자기 자신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를 뿐 아니라 교조적이고 전횡을 일삼는 마르크스가 가진 가장 극단적인 야심을 훨씬 능가하려 하고 있다. ― 265쪽
바쿠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로 인계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했다. 러시아에서는 애초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만약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조국의 인민들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 앞에 있는 게 낫다. ― 290쪽
그 시대의 다른 모든 급진주의자들이나 혁명가들과 바쿠닌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 바로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솔직한 성격이었다. 게르첸은 러시아 인민을, 그리고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각각 이상화했다. 그러나 게르첸은 농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가져온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마르크스가 직공한테서 그러지 못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은 귀족이었는데도 이전에 농노이던 인물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채 관계를 맺는 일은 계급의식에서 충분히 자유로운 바쿠닌이기에 가능했다. ― 375쪽
바쿠닌은 늘 성급하게 일했다. 언제나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으며, “임신 3개월을 9개월로 착각했다.”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하던 오가료프는 또 다른 직유형 표현을 사용해서 바쿠닌을 묘사했다. 혁명과 사랑에 빠진 바쿠닌은 마치 아직 미숙한 어린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 380쪽
바쿠닌 자신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쓴 창립 선언문을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새로운 사상에 열광하는 바쿠닌의 천성대로 공감을 표시하고 기꺼이 도움을 줄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오해는 지원의 본질 때문에 생겼다. 매사 꼼꼼한 것과 질서를 선호하는 마르크스는 절대적으로 충성과 복종을 바치지 않는 사람의 협력은 필요 없었다. 근본적으로 규율을 싫어하는 바쿠닌은 자신이 끌고 갔으면 끌고 갔지 결코 남을 따라갈 인물은 아니었다. 바쿠닌은 인터내셔널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자기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 435~436쪽
《혁명가의 교리 문답》은 민족주의가 혁명의 동인이라는 점을 미하일이 처음으로 부인한다고 선언하는 문서이자 아나키즘의 신조가 명확하게 윤곽을 드러낸 첫 문서다. 이 문서는 “모든 현존하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급진적으로 파괴”하고 “자유, 이성, 정의, 노동을 기초로 한 보편적인 사회를 수립”하자고 요구함으로써 바쿠닌의 진정한 의도대로 시작하고 있다. ― 451쪽
“지금 같은 중앙 집중화된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세계 평화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권위와 정복이라는 권리에 따라 강제로 조직된 통일체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지방에서 코뮌으로, 코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유럽합중국으로 자유로운 연방을 구성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자유롭게 조직된 통일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중앙 집중화 된 국가의 파멸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 465쪽
“저는 공유를 싫어합니다. 공유는 자유의 부정이고, 저로서는 자유 없는 인간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사회의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그것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또한 국가의 수중에 모든 소유를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반드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국가의 폐지를 원합니다. …… 저는 어떤 권위라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권위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로 조직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사회와 집산체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목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478쪽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자유, 정의, 평화를 수립하기를 바라는 사람, 인간성의 승리와 인민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모든 국가를 파괴하고, 모든 나라의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세계 연방을 국가의 폐허 위에서 수립하기를 소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481쪽
네차예프하고 다르게 바쿠닌은 동료들에게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다. 네차예프와 달리 오직 말로만 인정사정없었다. 무엇보다도 바쿠닌이 지닌 주요한 특성은 자신이 수행할 수 없는 것을 진심으로 설파하고 다니는 인간적인 모순이었다. 동시대 인물 중에서 바쿠닌처럼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546쪽
바쿠닌은 시민들에게 무장하자고 호소했다. 일단 막혀 있던 열정이 봇물처럼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면 무장한 세력들은 폭도로 변할 것이라고 바쿠닌은 확신했다. 심지어 반항하는 국민군에게 마취제를 놓을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동료들은 당황했다. 이미 시가지에 내걸린 그 선언문에 서명한 장본인들이고, 그 선언문은 끝에 “무기를 들어라!!!”라고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561쪽
“1월 2일. 지갑 텅 빔. …… 21일, 수중에 53프랑 70상팀 있음. 24일, 주머니에 20프랑. 25일, 커피 없다. 28일, 프랑초니 마담에게 편지, 내일쯤 답장이 올 듯. 어떤 내용일까? 한 푼도 없나? 200프랑? 300프랑? 400프랑? 29일, 프랑초니 마담한테 300프랑 받다. 파리는 28일 항복하다. 부르바키, 스위스에 들어오다. 니나(가정부)에게 25프랑 주다(2월 1일까지 20프랑 더 줘야 함). 마리에게 40프랑 주다(2월 4일까지 208프랑 더 줘야 됨). 베톨리에게 55프랑 주다(25프랑 더 줘야 함).” ― 567쪽
미하일 바쿠닌과 칼 마르크스는 자신만의 명성과 교의를 지니고 19세기 후반의 혁명 운동을 주도한 주역이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비슷한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두 사람 모두 토대는 헤겔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을 긍정과 부정, 보수와 진보 사이의 헤겔식 반정립의 산물로 인식했다. 또한 두 사람은 부정이 긍정을, 진보가 보수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파괴를 위한 열정은 또한 창조적인 열정이다”라는 바쿠닌의 언명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 600쪽
바쿠닌의 자유 개념은 철저히 분석해보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였다. 그것은 낭만적 신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리고 어떤 극단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에 제대로 부합하는 결론이었으며, 개인의 자기주장 속에서 자연스런 출구를 발견했다. 바쿠닌은 이론상으로는 자유의 가장 열광적인 옹호자였으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자였다. ― 601쪽
국가를 향한 바쿠닌의 혐오는 인간 개인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신념에서 직접 나온다. 그리고 “권위에 관한 모든 행사는 왜곡되고, 권위에 관한 일체의 복종은 인간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고 말했다. 바쿠닌은 “모든 신학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옳지 못하고 사악한 존재로 가정”하기 때문에 국가야말로 “인간성에 관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냉소적이며, 가장 완벽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 603쪽
바쿠닌의 교의는 일련의 기사, 논문, 소책자에서 발췌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작들은 대부분 특수한 경우나 특정한 목적을 고려해 쓴 것이고, 대부분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며, 만약 바쿠닌이 자기 글을 수정할 여력이 있었다면 최종 수정본은 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술의 대부분은 일관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쿠닌은 말과 개성이라는 알기 어려운 재능에 의존해서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겪는 운명을 똑같이 겪었다. 생전에 자신을 알던 사람들에게 항상 보여준 압도하는 듯한 힘찬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기란 불가능했다. ― 607쪽
“나는 평생을 시시포스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냈고, 끊임없이 자신의 어깨 위에서 무너져내리는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준비하며 살았다.” ― 609쪽
“전세계에 딱 세 명만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중 두 명은 나머지 한 사람을 억압하려고 힘을 합치려 들 거야.” ― 661쪽
바쿠닌은 자신의 젊은 손님과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노동자들과 함께 여전히 혁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 때면 두 눈이 빛나면서 “활기가 넘치고, 날카로우면서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쿠닌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 670쪽
모든 철학자는 인간을 전체 민중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으로 다루면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바쿠닌은 설명했다. 회고록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회고록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민족은 혁명의 본능을 잃어버렸다. 순종적이고 무기력해지다 보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바쿠닌은 병마를 털고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집단의 원리를 토대로 한 윤리학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 674쪽
▣ 작가 소개
저자 : E. H. 카(Edward Hallett Carr)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 1892년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외무부에 들어가 활동하다, 1936년에 사임하고 웨일스 대학교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됐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 《타임스》 부편집인을 맡았고, 1948년에는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개별지도 교수를 지냈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196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명예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소련사 분야의 권위자인 카는 1950년부터 1978년에 걸쳐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4권)를 완성했다. 또한 196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한 G. M. 트리벨리언에 관한 강의를 엮어 만든 《역사란 무엇인가》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밖에도 《위기의 20년, 1919~1939》(1939), 《평화의 조건》(1942),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1946), 《새로운 사회》(1951), 《러시아 혁명》(1979),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1980)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역자 : 이태규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했으며, 논문으로 <그람시 문화정치의 재구성 ― 일상성, 대중문화의 주체를 중심으로>(2001)가 있다.
▣ 주요 목차
해설ㆍ반란의 불씨를 지핀 혁명가, 바쿠닌 하승우 5
1부| 젊은 낭만주의자
1장ㆍ반항아의 탄생
뼈대 있는 가문과 어린 시절 21|페테르부르크 30|젊은 세대 35|탈영과 귀향 38
2장ㆍ사랑과 형이상학
스탄케비치와 나탈리 43|형제간의 사랑 46|칸트와 명상 생활 52
3장ㆍ낭만에 불타는 여름
모스크바 57|미하일과 타티야나 63|피히테적인 환상 67
4장ㆍ가을의 현실
벨린스키와 현실 72|낭만적 패러디 80
5장ㆍ형제와 자매들
뤼보프의 비극 85|바르바라의 해방 90
6장ㆍ헤겔과 벨린스키
헤겔과 반란 98|실재와 이성 104|벨린스키와 불화하다 110
7장ㆍ도피
제자리걸음 118|모스크바 스캔들 125|베를린의 유혹 130|출발 전야 134
2부| 혁명가의 모험
8장ㆍ두 세계 사이에서
베를린의 세계 143|프레무키노의 세계 151|유럽 속의 고립 154
9장ㆍ철학이여, 안녕
헤겔과 혁명 162|불타는 보트 166|헤르벡과 도주하다 169
10장ㆍ스위스에 머물다
스위스라는 천국 174|빚더미와 명예 177|바이틀링과 공산주의 181
11장ㆍ파리 생활
브뤼셀과 파리 186|마르크스와 프루동 190|러시아의 기억 194|게르첸, 투르게네프, 벨린스키 201
12장ㆍ혁명의 전주곡
자유와 폴란드 205|브뤼셀이여, 다시 한 번 213
13장ㆍ1848년
불길이 타오르다 218|독일에서 겪은 모험 224|프라하와 슬라브족 228|프로이센 235
14장ㆍ어느 혁명가의 신조
슬라브 민족에게 보내는 호소 242|부르주아지의 배제 246|슬라브인의 해방 251|러시아의 농민들 255
15장ㆍ난파
음모와 낙관주의 261|드레스덴의 바쿠닌 268|드레스덴 봉기 271|패배와 체포 277
3부| 산 채로 매장되어
16장ㆍ작센, 오스트리아
작센의 감옥 283|작센의 재판 288|프라하와 올뮈츠 292|오스트리아의 재판 296
17장ㆍ러시아
《참회록》 300|수감 생활 309|탄원과 추방 316
18장ㆍ시베리아 모험
결혼 321|무라비요프 장군 326|세계를 돌아서 332
4부| 재기
19장ㆍ런던에 첫발을 딛다
오르세트 하우스에서 339|영국 생활 349|슬라브인, 게르만인, 이탈리아인 353|회상 359
20장ㆍ정치적 야심
의견과 음모 363|고의식파 371|러시아의 농민들 374|토지와 자유 378
21장ㆍ폴란드
폭풍 전야 383|바쿠닌, 출진하다 394|와드 잭슨호를 타고 398|후유증 405
22장ㆍ스웨덴 에피소드
스웨덴인과 핀란드인 408|피닉스 호텔의 연회 412|퇴각 416|게르첸과 불화하다 418
23장ㆍ피렌체
“이탈리아를 사랑하게 됐다” 425|마르크스와 만나다 432|바쿠닌, 형제단을 창설하다 437
24장ㆍ나폴리
아낌없이 주는 공작부인 441|국제형제단 447|이탈리아에서 물러나다 452|안토니아 454
5부| 바쿠닌과 마르크스
25장ㆍ평화와 자유 동맹
제네바 회의 459|바쿠닌,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다 466|바쿠닌, 동맹을 떠나다 476
26장ㆍ국제사회민주동맹의 탄생
1차 캠페인 483|국제형제단의 종말 493|쥐라의 바쿠닌 495|동맹,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다 501
27장ㆍ바젤 대회
제네바의 준비 504|바젤 대회 507|논쟁과 비방 511|바쿠닌, 로카르노로 은퇴하다 519
28장ㆍ네차예프 사건
모험가의 승리 523|혁명가의 교리 문답 528|많은 편법들 534|굴욕과 결별 542
29장ㆍ리옹의 대실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548|용감한 대령 551|리옹의 혁명 557|도주 563
30장ㆍ동맹의 세력들
스위스에서 불화하다 569|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575|동맹이란 무엇이었나 582
31장ㆍ마르크스 대 바쿠닌
예비 책동 587|헤이그 대회 595|마르크스주의와 바쿠닌주의 600
6부| 만년
32장ㆍ최후의 기획
취리히로 옮겨가다 613|슬라브의 여러 음모 618|로카르노로 돌아가다 626|전사, 무기를 내려 놓다 632
33장ㆍ바로나타
뜻밖의 횡재 638|희극과 비극 641|바로나타의 종말 648
34장ㆍ어느 금리 생활자의 죽음
루가노의 바쿠닌 657|질병과 쇠락 665|마지막 나날들 668
참고문헌 677
옮긴이의 글 683
찾아보기 689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인 열정이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가 그려낸
19세기의 실천적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 ―
낭만적 반항아인가 위대한 혁명가인가?
“전기의 모범이자 최고의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쓰인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평전!” ― 이사야 벌린
‘바쿠닌’이란 무엇인가 ― 20세기의 역사가 E. H. 카가 답하다
“쾅!” 지난 5월 13일, 독일 포츠담에서 유럽연합(EU) 구제금융 정책관인 호르스트 라이첸바흐의 아내가 소유한 베엠베 승용차에 불이 붙었다. 담벼락에는 붉은 페인트 자국이 뚜렷했다. 그리스에 긴축 정책을 강요한 대가였다. 베를린의 아나키스트들이 한 행동으로 추측되는 이 ‘테러’는, 대중의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위기의 시대에 시위와 ‘종이 짱돌’을 넘어 극단적 테러로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는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뛰어난 전기 작가인 E. H. 카는 《미하일 바쿠닌》에서 치밀한 조사를 거쳐 추린 전기적 사실과 여러 언어로 된 문헌 자료에 독자적 해석을 더해 ‘아나키즘의 아버지’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의 초상을 완성한다. 이 두툼한 전기에서 카는 바쿠닌의 인간적 면모나 실천 활동에 줄곧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를 살다간 한 인물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전기가 지녀야 할 미덕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또한 바쿠닌과 함께 한 시대를 주름잡은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표트르 크로포트킨, 칼 마르크스 등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은 영국의 저명한 정치사상가이자 카와 숙적 관계이던 이사야 벌린도 “전기의 모범이자 최고의 기본 사료를 바탕으로 훌륭하게 쓰인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평전”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낼 만큼 전기 문학의 백미로 손꼽힌다. 바쿠닌의 정치적 견해나 이데올로기가 지닌 가치를 지나치게 깎아내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 이국적 사상가에 관한 방대한 전기를 관통하는 ‘추적자’이자 ‘수집가’인 카의 시선에는 아웃사이더의 정서를 공유하는 공감의 변호론이 짙게 깔려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바쿠닌 추적자’ 카가 1937년에 쓴 이 책은 바쿠닌의 감추어진 사생활을 복원하고 유년기와 정치적 활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조망하는, 한 편의 뛰어난 평전이자 역사서인 동시에 사상사라고 할 수 있다. 1989년에 한 차례 축약 번역된 적이 있지만 오역과 누락이 많은데다 절판돼 독자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던 E. H. 카의 《미하일 바쿠닌》. 이제 우리는 원본에 충실한 새로운 번역에 아나키즘 전문가인 하승우 박사의 해설을 덧붙인 《미하일 바쿠닌》과 함께 19세기 아나키스트의 자취를 추적하는 20세기의 역사가의 긴 여정에 동승할 수 있게 됐다.
‘은폐된 반항자’가 수집한 실천적 아나키스트의 초상
미하일 바쿠닌(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은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다. 또한 혁명의 불씨를 좇아 일생을 바친 혁명가이기도 하다.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바쿠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를 졸업하지만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1834년 모스크바로 갔다. 모스크바의 스탄케비치 서클에 들어가 벨린스키와 헤르첸 등과 교류하고, 헤겔을 비롯한 독일 철학에 심취했다. 1840년 유럽으로 가 혁명적 범슬라브주의와 아나키즘에 빠져들었고, 1847년 혁명 활동 탓에 프랑스에서 추방된 뒤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모든 슬라브 민족의 연방을 고대하며 1848년 프라하 봉기에 이어 1849년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가 곧바로 진압되고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등 관련자들은 도망치지만 바쿠닌은 체포돼 러시아 정부에 넘겨졌고, 괴혈병으로 이까지 빠진 피폐한 심신으로 1857년 시베리아에 유배된다. 25세 연하의 아내를 맞아 유형지에 정착하는 듯했지만, 특유의 낙관과 열정을 잃지 않은 바쿠닌은 1861년에 극적으로 탈출해 반년에 걸쳐 지구 반 바퀴를 도는 긴 여정 끝에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렇게 12년 동안 이어진 투옥과 유형의 세월이 끝난다.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에 참여했고, 1864~1868년에는 이탈리아 혁명 운동에 관여했다. 1868년 스위스로 근거지를 옮겨 사회민주동맹을 만들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때 슬라브 민족의 해방을 혁명의 목표로 삼던 바쿠닌은 아나키즘에 기운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인터내셔널에도 가입하는데, 이때 권력의 집중을 추구하는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충돌했다.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는 결국 바쿠닌을 제명했다. 인터내셔널 제명과 네차예프 스캔들에 휘둘린 바쿠닌은 지독한 가난 속에 살다 스위스 베른에서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 바쿠닌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청년기를 장식한 몇 차례의 연애 사건이나 시베리아에 남겨놓은 아내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1년 9개월 만에 재회하는 모습 등 낭만적 면모를 지닌 반면, 특유의 열정과 진지함을 발휘해 여러 무장봉기에 관여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혁명의 계획은 그야말로 창대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했고, 여러 번 시도한 비밀 결사는 엉성한데다 기쁨에 겨워 자기 입으로 음모의 실체를 드러내는 등 부주의했다. 스파이로 몰릴 정도로 논리보다 행동이 앞서고, 마르크스의 《자본》 번역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들을 제대로 매듭짓지도 못했다.
혁명가 바쿠닌의 인격도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허풍선이에 빚쟁이인데다 “네 돈은 내 돈이고 내 돈은 내 돈”이라고 생각하는 뻔뻔한 사람이었지만,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카리스마와 열정을 갖추고 있었다. 권위를 싫어했지만 비밀 결사를 만들어 수장이 되려 했고, “임신 3개월을 9개월로 착각”할 정도로 늘 바쁘게 돌아다녀도 뚜렷한 성과는 거두지 못한 바쿠닌의 삶은 바쿠닌 자신이 지닌 모순된 인격의 결과라는 것이다.
혁명가 바쿠닌의 사상도 모순으로 가득했다고 카는 평가한다.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주창자지만, 사상가가 아니라 실천가인 바쿠닌은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한 결과물을 후대에 남기지 않았다. 다만 바쿠닌의 사상과 실천은 스페인, 이탈리아, 러시아의 혁명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마르크스 등에 맞서 급진적 혁명을 옹호하거나 러시아 혁명의 주역은 농민이라고 주장한 점은 바쿠닌 특유의 직관이 지닌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바쿠닌의 혁명은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라 ‘가슴’에서 나온 뜨거운 열변으로 구체화됐는데, 반항과 파괴 같은 부정적 힘의 가능성을 중시한 반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만약 계획하는 게 모두 성취돼 자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물음에 바쿠닌은 “그때가 되면 나는 즉시 내가 만든 모든 것을 다시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전세계에 딱 세 명만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중 두 명은 나머지 한 사람을 억압하려고 힘을 합치려 들 거야”라고 말할 정도로 권위와 중앙 집중을 일관되게 거부한 바쿠닌의 ‘파괴를 향한 창조적 열정’은 어디까지나 낭만적 반항아의 속성일 수도 있다는 게 카의 비판적 결론이다.
그러나 이 책의 해설을 쓴 하승우는 바쿠닌이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자”라는 카의 주장을 적절히 논박한다. 오히려 바쿠닌은 고전적인 개인주의를 거부하며 개인과 집단 사이의 상호의존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연대를 통한 자유와 평등 속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지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노예로 산다면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고 보는 게 바쿠닌의 진심인데, 사실 ‘은폐된 반항자’ 카도 이런 점에 동의하고 있다.
자발성과 능동성의 혁명가 바쿠닌, 열정을 살다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적인 열정이다.” 1842년 10월 《독일 연감》에 ‘쥘레 엘리사르’라는 필명으로 쓴 〈독일의 반동 ― 한 프랑스인의 노트에서〉에서 바쿠닌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한 말을 몸소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평생 혁명의 불씨를 좇아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을 떠돌았다. 만년에는 스스로 “나는 평생을 시시포스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냈고, 끊임없이 자신의 어깨 위에서 무너져내리는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준비하며 살았다”고 토로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바쿠닌은 “돛대도, 키도 없이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다니는 거대한 배” 같았다.
바쿠닌은 이론이나 과학의 틀에 맞춰 현실을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카는 그 점을 늘 불평하지만, 바쿠닌은 동시대 지식인이나 혁명가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또는 애국심과 민주주의의 융합이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선험적 사고’나 ‘예정된 법칙’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추상적인 사회 법칙으로 인간의 삶을 재단할 수 없다고 믿었다.
어떤 시대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누가 어떻게 혁명을 일으킬 것인가?”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려고 끊임없이 다투고 편을 가른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회색빛 이론이 아니라 생명의 자발성에 의지했고, 외부 세계의 우발성에 반응하는 인간의 능동성을 신뢰했다. 19세기의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이미 생명의 자발적인 능동성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답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운명”을 타고난 바쿠닌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영향력”과 “우람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으로 뭇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게 혁명의 불씨를 되살렸다.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 온전한 삶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이 시대에 바쿠닌의 삶과 사상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폴 애브리치는 《아나키스트의 초상》에서 역사상의 여러 급진 운동이 마르크스주의를 내걸지만 투쟁의 방식은 바쿠닌주의에 더 가깝다고 지적한다. 권위에 반항하는 젊음의 열정은 마르크스의 치밀하고 냉정한 분석보다는 바쿠닌의 뜨거운 가슴에 더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바이틀링의 손은 모든 사람을 반대했고, 무력을 통한 국가 전복과 부의 몰수를 설교했다. “공산주의의 모든 적들을 사정없이 공격할 것”을 처음 주장한 인물일 것이다. 바쿠닌은 이 “숭고한 정신”의 이상주의와 무모한 야만성의 결합 속에서 자신의 격정적인 성격과 비슷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만남은 바쿠닌을 사변적인 철학자에서 현실적인 혁명가로 완전하게 전환시켜준, 바쿠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러시아 귀족이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하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사회적 또는 정치적 질서의 폭력적 전복은 미하일 바쿠닌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 183쪽
바쿠닌에게 마르크스는 언제나 좀 이질적이고 어딘가 모르게 반감을 일으키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거기에다 엄격하고, 지나치게 신중하며, 계산적이기까지 했다. 바쿠닌은 순수한 사고를 토대로 적극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를 실천했다. 바쿠닌에게는 감정을 띠지 않은 것은 어느 것도 바람직한 게 아니었다. 러시아 귀족과 유대인 변호사의 아들 사이에는 단순히 기질상의 차이만 있는 게 아니라 전통과 사상에서도 공통된 배경이 없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애초부터 서로 이해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좋아할 수도 없었다. ― 192쪽
바쿠닌은 프루동이 “공론만 일삼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보다 그 행동과 직관에서 몇 백 배나 더 혁명적이다”라고 썼다. 프루동은 생시몽주의자와 푸리에주의자들의 감상적인 낙관주의와 공상에 기초한 백일몽을 하늘 저 편으로 날려버렸다. 과감하게 현존 질서의 세 가지 주요한 기둥인 신, 국가, 사유 재산을 공격했다. …… 권위를 향한 바쿠닌의 타고난 반항을 진정한 아나키즘의 강령으로 변형시킨 장본인은 프루동이었다. ― 194쪽
바쿠닌의 성격은 합리적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속한다. 바쿠닌의 야망은 불분명한데다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글은 활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일관성이 결여돼 있었다. …… 심지어 죽기 전부터 이미 고국을 제외한 몇몇 나라에서는 전설이 됐다. 바쿠닌이 정치적 웅변이 살아 있는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나라에서 성장했다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웅변가 중 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바쿠닌은 공개 석상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상황, 그것도 모국어로는 단 한 번도 연설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살았다.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그런 기회가 올 때면 그 우람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은 청중을 최면 상태로 몰아넣었다. ― 211쪽
미하일 바쿠닌만큼 한 개인의 인생과 사상이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람도 드물지만, 그런 사람 중에서 미하일 바쿠닌만큼 자신의 견해에 관해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기록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바쿠닌은 글을 많이 쓰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타고난 기질 탓에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그리고 문어보다는 구어에 의지해서 글을 썼다. ― 242쪽
첫째, 바쿠닌은 부르주아지가 명확하게 반혁명적 세력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과 미래의 혁명을 향한 희망은 노동 계급에 달려 있다는 점을 믿었다. 둘째, 혁명의 전제 조건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체와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서 자유 슬라브 공화국 연방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 최후에는 농민, 특히 러시아 농민이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력이라는 사실이 입증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 가지 개념은 이 무렵 바쿠닌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기초였다. ― 246쪽
기질로 보면 마르크스보다는 바쿠닌이 대의제를 거부하기가 더 쉬웠다. 러시아 귀족으로 태어난 바쿠닌에게는 정치적 지혜를 발휘할 수단으로 표결이라는 형식을 받아들일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다. 바쿠닌은 자유를 사랑했지만, 평등에는 불쾌감을 갖고 있었다. 평등은 바쿠닌에게 하나의 선전 문구요 이상일 뿐이지 결코 살아 있는 신념인 적이 없었다. ― 249쪽
민족주의자로서 바쿠닌은 슬라브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같은 열정을 독일의 민족주의를 위해 불어넣지는 않았다. 반면 국제주의자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비난했지만, 여기에 상응하는 독일 민족주의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에 놓인 쟁점에 관해서 역사는 아직도 최종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또한 어쩌면 역사는 여전히 중부 유럽의 슬라브인 문제에 관해 마지막 말을 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1918년에는 바쿠닌이 승리했다. ― 255쪽
이론상으로는 절대 자유의 주창자요, 그때는 물론 그 뒤에도 공산주의의 경직된 규율을 가장 혹독한 말을 사용해 비난한 바쿠닌, 그 바쿠닌이 자신의 혁명 활동을 조직화하면서 보이는 모습은 자기 자신의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를 뿐 아니라 교조적이고 전횡을 일삼는 마르크스가 가진 가장 극단적인 야심을 훨씬 능가하려 하고 있다. ― 265쪽
바쿠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로 인계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을 정도로 두려워했다. 러시아에서는 애초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 만약 굴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면 조국의 인민들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 앞에 있는 게 낫다. ― 290쪽
그 시대의 다른 모든 급진주의자들이나 혁명가들과 바쿠닌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 바로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이런 솔직한 성격이었다. 게르첸은 러시아 인민을, 그리고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각각 이상화했다. 그러나 게르첸은 농노에게서 자신의 사상을 가져온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마르크스가 직공한테서 그러지 못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은 귀족이었는데도 이전에 농노이던 인물과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채 관계를 맺는 일은 계급의식에서 충분히 자유로운 바쿠닌이기에 가능했다. ― 375쪽
바쿠닌은 늘 성급하게 일했다. 언제나 혁명이 임박했다고 생각했으며, “임신 3개월을 9개월로 착각했다.” 인내심을 가지라고 조언하던 오가료프는 또 다른 직유형 표현을 사용해서 바쿠닌을 묘사했다. 혁명과 사랑에 빠진 바쿠닌은 마치 아직 미숙한 어린 소녀가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 380쪽
바쿠닌 자신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쓴 창립 선언문을 읽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새로운 사상에 열광하는 바쿠닌의 천성대로 공감을 표시하고 기꺼이 도움을 줄 생각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오해는 지원의 본질 때문에 생겼다. 매사 꼼꼼한 것과 질서를 선호하는 마르크스는 절대적으로 충성과 복종을 바치지 않는 사람의 협력은 필요 없었다. 근본적으로 규율을 싫어하는 바쿠닌은 자신이 끌고 갔으면 끌고 갔지 결코 남을 따라갈 인물은 아니었다. 바쿠닌은 인터내셔널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자기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줄 수 있는 도움이었다. ― 435~436쪽
《혁명가의 교리 문답》은 민족주의가 혁명의 동인이라는 점을 미하일이 처음으로 부인한다고 선언하는 문서이자 아나키즘의 신조가 명확하게 윤곽을 드러낸 첫 문서다. 이 문서는 “모든 현존하는 종교,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급진적으로 파괴”하고 “자유, 이성, 정의, 노동을 기초로 한 보편적인 사회를 수립”하자고 요구함으로써 바쿠닌의 진정한 의도대로 시작하고 있다. ― 451쪽
“지금 같은 중앙 집중화된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세계 평화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권위와 정복이라는 권리에 따라 강제로 조직된 통일체들의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지방에서 코뮌으로, 코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유럽합중국으로 자유로운 연방을 구성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자유롭게 조직된 통일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중앙 집중화 된 국가의 파멸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 465쪽
“저는 공유를 싫어합니다. 공유는 자유의 부정이고, 저로서는 자유 없는 인간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국가에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사회의 모든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고, 그것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또한 국가의 수중에 모든 소유를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반드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국가의 폐지를 원합니다. …… 저는 어떤 권위라도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권위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로 조직되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합으로서 아래에서 위로 조직되는 사회와 집산체적 소유 또는 사회적 소유를 목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478쪽
“그래서 저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자유, 정의, 평화를 수립하기를 바라는 사람, 인간성의 승리와 인민의 완전한 해방을 바라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모든 국가를 파괴하고, 모든 나라의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이라는 세계 연방을 국가의 폐허 위에서 수립하기를 소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481쪽
네차예프하고 다르게 바쿠닌은 동료들에게 아주 너그럽고 친절했다. 네차예프와 달리 오직 말로만 인정사정없었다. 무엇보다도 바쿠닌이 지닌 주요한 특성은 자신이 수행할 수 없는 것을 진심으로 설파하고 다니는 인간적인 모순이었다. 동시대 인물 중에서 바쿠닌처럼 복잡하고 당혹스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546쪽
바쿠닌은 시민들에게 무장하자고 호소했다. 일단 막혀 있던 열정이 봇물처럼 터지고 싸움이 시작되면 무장한 세력들은 폭도로 변할 것이라고 바쿠닌은 확신했다. 심지어 반항하는 국민군에게 마취제를 놓을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동료들은 당황했다. 이미 시가지에 내걸린 그 선언문에 서명한 장본인들이고, 그 선언문은 끝에 “무기를 들어라!!!”라고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561쪽
“1월 2일. 지갑 텅 빔. …… 21일, 수중에 53프랑 70상팀 있음. 24일, 주머니에 20프랑. 25일, 커피 없다. 28일, 프랑초니 마담에게 편지, 내일쯤 답장이 올 듯. 어떤 내용일까? 한 푼도 없나? 200프랑? 300프랑? 400프랑? 29일, 프랑초니 마담한테 300프랑 받다. 파리는 28일 항복하다. 부르바키, 스위스에 들어오다. 니나(가정부)에게 25프랑 주다(2월 1일까지 20프랑 더 줘야 함). 마리에게 40프랑 주다(2월 4일까지 208프랑 더 줘야 됨). 베톨리에게 55프랑 주다(25프랑 더 줘야 함).” ― 567쪽
미하일 바쿠닌과 칼 마르크스는 자신만의 명성과 교의를 지니고 19세기 후반의 혁명 운동을 주도한 주역이었다.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비슷한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두 사람 모두 토대는 헤겔에 놓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을 긍정과 부정, 보수와 진보 사이의 헤겔식 반정립의 산물로 인식했다. 또한 두 사람은 부정이 긍정을, 진보가 보수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완성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파괴를 위한 열정은 또한 창조적인 열정이다”라는 바쿠닌의 언명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 600쪽
바쿠닌의 자유 개념은 철저히 분석해보면 극단적인 개인주의였다. 그것은 낭만적 신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그리고 어떤 극단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질에 제대로 부합하는 결론이었으며, 개인의 자기주장 속에서 자연스런 출구를 발견했다. 바쿠닌은 이론상으로는 자유의 가장 열광적인 옹호자였으며, 역사상 가장 완벽한 개인주의자였다. ― 601쪽
국가를 향한 바쿠닌의 혐오는 인간 개인의 본성에 관한 자신의 신념에서 직접 나온다. 그리고 “권위에 관한 모든 행사는 왜곡되고, 권위에 관한 일체의 복종은 인간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고 말했다. 바쿠닌은 “모든 신학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옳지 못하고 사악한 존재로 가정”하기 때문에 국가야말로 “인간성에 관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냉소적이며, 가장 완벽한 부정”이라고 여겼다. ― 603쪽
바쿠닌의 교의는 일련의 기사, 논문, 소책자에서 발췌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작들은 대부분 특수한 경우나 특정한 목적을 고려해 쓴 것이고, 대부분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며, 만약 바쿠닌이 자기 글을 수정할 여력이 있었다면 최종 수정본은 사라졌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저술의 대부분은 일관성을 결여한 채 모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쿠닌은 말과 개성이라는 알기 어려운 재능에 의존해서 당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겪는 운명을 똑같이 겪었다. 생전에 자신을 알던 사람들에게 항상 보여준 압도하는 듯한 힘찬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기란 불가능했다. ― 607쪽
“나는 평생을 시시포스의 역할을 수행하며 보냈고, 끊임없이 자신의 어깨 위에서 무너져내리는 정치 혁명과 사회 혁명을 준비하며 살았다.” ― 609쪽
“전세계에 딱 세 명만 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중 두 명은 나머지 한 사람을 억압하려고 힘을 합치려 들 거야.” ― 661쪽
바쿠닌은 자신의 젊은 손님과 마지막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노동자들과 함께 여전히 혁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럴 때면 두 눈이 빛나면서 “활기가 넘치고, 날카로우면서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쿠닌은 미래보다는 과거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 670쪽
모든 철학자는 인간을 전체 민중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으로 다루면서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바쿠닌은 설명했다. 회고록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위해 회고록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민족은 혁명의 본능을 잃어버렸다. 순종적이고 무기력해지다 보니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바쿠닌은 병마를 털고 일어설 수만 있다면 집단의 원리를 토대로 한 윤리학에 관한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 674쪽
▣ 작가 소개
저자 : E. H. 카(Edward Hallett Carr)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정치학자. 1892년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외무부에 들어가 활동하다, 1936년에 사임하고 웨일스 대학교의 국제정치학 교수가 됐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 《타임스》 부편집인을 맡았고, 1948년에는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의 정치학 개별지도 교수를 지냈고, 195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특별 연구원, 1966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의 명예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소련사 분야의 권위자인 카는 1950년부터 1978년에 걸쳐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14권)를 완성했다. 또한 196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한 G. M. 트리벨리언에 관한 강의를 엮어 만든 《역사란 무엇인가》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밖에도 《위기의 20년, 1919~1939》(1939), 《평화의 조건》(1942), 《소련이 서구에 준 충격》(1946), 《새로운 사회》(1951), 《러시아 혁명》(1979),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1980)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역자 : 이태규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했으며, 논문으로 <그람시 문화정치의 재구성 ― 일상성, 대중문화의 주체를 중심으로>(2001)가 있다.
▣ 주요 목차
해설ㆍ반란의 불씨를 지핀 혁명가, 바쿠닌 하승우 5
1부| 젊은 낭만주의자
1장ㆍ반항아의 탄생
뼈대 있는 가문과 어린 시절 21|페테르부르크 30|젊은 세대 35|탈영과 귀향 38
2장ㆍ사랑과 형이상학
스탄케비치와 나탈리 43|형제간의 사랑 46|칸트와 명상 생활 52
3장ㆍ낭만에 불타는 여름
모스크바 57|미하일과 타티야나 63|피히테적인 환상 67
4장ㆍ가을의 현실
벨린스키와 현실 72|낭만적 패러디 80
5장ㆍ형제와 자매들
뤼보프의 비극 85|바르바라의 해방 90
6장ㆍ헤겔과 벨린스키
헤겔과 반란 98|실재와 이성 104|벨린스키와 불화하다 110
7장ㆍ도피
제자리걸음 118|모스크바 스캔들 125|베를린의 유혹 130|출발 전야 134
2부| 혁명가의 모험
8장ㆍ두 세계 사이에서
베를린의 세계 143|프레무키노의 세계 151|유럽 속의 고립 154
9장ㆍ철학이여, 안녕
헤겔과 혁명 162|불타는 보트 166|헤르벡과 도주하다 169
10장ㆍ스위스에 머물다
스위스라는 천국 174|빚더미와 명예 177|바이틀링과 공산주의 181
11장ㆍ파리 생활
브뤼셀과 파리 186|마르크스와 프루동 190|러시아의 기억 194|게르첸, 투르게네프, 벨린스키 201
12장ㆍ혁명의 전주곡
자유와 폴란드 205|브뤼셀이여, 다시 한 번 213
13장ㆍ1848년
불길이 타오르다 218|독일에서 겪은 모험 224|프라하와 슬라브족 228|프로이센 235
14장ㆍ어느 혁명가의 신조
슬라브 민족에게 보내는 호소 242|부르주아지의 배제 246|슬라브인의 해방 251|러시아의 농민들 255
15장ㆍ난파
음모와 낙관주의 261|드레스덴의 바쿠닌 268|드레스덴 봉기 271|패배와 체포 277
3부| 산 채로 매장되어
16장ㆍ작센, 오스트리아
작센의 감옥 283|작센의 재판 288|프라하와 올뮈츠 292|오스트리아의 재판 296
17장ㆍ러시아
《참회록》 300|수감 생활 309|탄원과 추방 316
18장ㆍ시베리아 모험
결혼 321|무라비요프 장군 326|세계를 돌아서 332
4부| 재기
19장ㆍ런던에 첫발을 딛다
오르세트 하우스에서 339|영국 생활 349|슬라브인, 게르만인, 이탈리아인 353|회상 359
20장ㆍ정치적 야심
의견과 음모 363|고의식파 371|러시아의 농민들 374|토지와 자유 378
21장ㆍ폴란드
폭풍 전야 383|바쿠닌, 출진하다 394|와드 잭슨호를 타고 398|후유증 405
22장ㆍ스웨덴 에피소드
스웨덴인과 핀란드인 408|피닉스 호텔의 연회 412|퇴각 416|게르첸과 불화하다 418
23장ㆍ피렌체
“이탈리아를 사랑하게 됐다” 425|마르크스와 만나다 432|바쿠닌, 형제단을 창설하다 437
24장ㆍ나폴리
아낌없이 주는 공작부인 441|국제형제단 447|이탈리아에서 물러나다 452|안토니아 454
5부| 바쿠닌과 마르크스
25장ㆍ평화와 자유 동맹
제네바 회의 459|바쿠닌,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다 466|바쿠닌, 동맹을 떠나다 476
26장ㆍ국제사회민주동맹의 탄생
1차 캠페인 483|국제형제단의 종말 493|쥐라의 바쿠닌 495|동맹,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다 501
27장ㆍ바젤 대회
제네바의 준비 504|바젤 대회 507|논쟁과 비방 511|바쿠닌, 로카르노로 은퇴하다 519
28장ㆍ네차예프 사건
모험가의 승리 523|혁명가의 교리 문답 528|많은 편법들 534|굴욕과 결별 542
29장ㆍ리옹의 대실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548|용감한 대령 551|리옹의 혁명 557|도주 563
30장ㆍ동맹의 세력들
스위스에서 불화하다 569|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575|동맹이란 무엇이었나 582
31장ㆍ마르크스 대 바쿠닌
예비 책동 587|헤이그 대회 595|마르크스주의와 바쿠닌주의 600
6부| 만년
32장ㆍ최후의 기획
취리히로 옮겨가다 613|슬라브의 여러 음모 618|로카르노로 돌아가다 626|전사, 무기를 내려 놓다 632
33장ㆍ바로나타
뜻밖의 횡재 638|희극과 비극 641|바로나타의 종말 648
34장ㆍ어느 금리 생활자의 죽음
루가노의 바쿠닌 657|질병과 쇠락 665|마지막 나날들 668
참고문헌 677
옮긴이의 글 683
찾아보기 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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