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한일양국의 지식인, 정치인, 문화예술인, 학자 등의 글 88편이 실려 있다. 염상섭, 나혜석, 변영로, 오상순, 김억, 남궁벽 등이 활동했던 유명한 문예동인지 [폐허]의 동인들과 교류하던 다쿠미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복을 입었으며, 지위고하ㆍ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살리고 홍수와 가뭄을 막는 한편,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고 부흥시켰으며, 한국의 문화적, 외교적 독립을 염원했던 다쿠미는 극우 성향 일본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박해와 협박에 시달렸다.
한국땅에 한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기 위해 노력하던 다쿠미는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과로로 순직한다. 만40세였다. 그의 서거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그의 장례식에는 한일양국의 저명인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참여했으며,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소다 가이치가 다쿠미의 장례식을 집전했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 까지도 한복 수의(壽衣)를 입었고, 죽어서도 한국땅에 묻혀, 한줌 한국의 흙이 되었다.
다쿠미는 조선 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했다. 당시 조선의 산들에 대해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지적법에 의해 많은 토지가 소유자 부재라는 억지 주장을 하며 몰수했다. 그리고, 그 토지와 임야를 일본으로부터 온 이민자나, 일본정부에 협조적인 조선인에게 차례차례로 불하해 버리고 있었다.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토지에 집착이 없고 곧바로 나무를 벌채해 팔아 버린다. 한반도의 산들은 단단한 암반이며 거기에 얇은 표토가 가리고 있다. 민둥산이 된 조선의 산들은 금새 보수력을 잃어 홍수를 일으켜 버리게 되었다. 홍수와 가뭄으로 조선 민중이 겪는 고통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에 마음 아파한 다쿠미는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고안해 조선의 많은 산들을 복원했다. 현재 한반도 산림면적의 약 37%가 다쿠미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에 직ㆍ간접으로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녹지라고 하며, 다쿠미가 개발한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은 오늘날 미국에서도 각광받는 육묘 및 산림녹화 방식이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고 주장하며,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속국인 한국을 구원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자체가 중국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의 밥상을 예로 들어, 조선의 문화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문화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초적인 근간은 食문화이다. 조선인들의 식문화가 펼쳐지는 場인 소반(밥상)이라는 것은 온돌방에 둘러 앉아 식사하던 한반도 특유의 것으로 중국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쿠미는 소반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많은 [생활공예품]들을 통해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다쿠미는,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문화적 독립’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조선의 외교적 독립’도 확신했다. 그리고 염원했다. 실제로 다쿠미가 죽고 14년후에 조선은 독립되었다.
[조선 도자기의 神] 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은,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아사카와 노리다카이다. 노리다카는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일본도자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며, 일본도자기의 원류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심취하게 된다. 졸업후 한국의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의 공예, 도예를 연구하게 된다. 노리다카는 그 자신이 직접 회화나 조각도 했지만, 그 보다는 조선의 공예와 도예에 대한 연구가(硏究家) 및 컬렉터(collector)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노리다카의 성장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다쿠미이다. 다쿠미는 농업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형이 있는 조선땅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공무원으로 일한다. 다쿠미는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기 위해 조선의 온 산야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학교에 몸담고 있느라 필드(Field)연구에 제약이 컸던 친형 노리다카를 위해, 조선 각지의 가마터에서, 도자기와 도자기 파편을 구해 형에게 제공했다. 노리다카가 [조선 도자기의 神]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다쿠미가 [조선 도자기의 천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공무원이었던 다쿠미는 길에서 조선인 걸인을 만나면, 남자걸인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여자걸인에게는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다 쥐어주었다. 다쿠미는 시내의 일본인 밀집지역에 살지 않고,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어를 썼으며, 일본순사의 조선인 박해를 조선인들과 함께 감내해냈다. 다쿠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과자를 사서 나눠주곤 했다. 다쿠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인텔리 였던 [폐허] 동인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작농이나 천민 출신의 조선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다쿠미는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국적도 종교도 초월했다. 다쿠미가 죽자, 서로 다쿠미의 상여를 매겠다고 나선 조선인들로 인해 청량리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당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저항하고 있던 동아일보였지만, 조선 총독부 임업연구소 소속의 日人공무원의 사망에 대해서 사실상의 추도기사를 냈을 정도였다.
다쿠미의 고향은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다카네정이다. 1000년전 신라의 삼국통일로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다쿠미에게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작가 소개
저자 : 백조종
국내 여러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법학 등을 전공하다가 최종적으로 행정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도시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몇 년 후 다시 도시행정학으로 또 다른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오비린 국제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서울시청 국제교류과에 근무했고,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의 일본어 교관을 지냈다.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도쿄사무소에서도 근무했으며, 일본 호쿠토시 명예시민으로서 경기도 포천시와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의 자매결연을 성사시켰다. 중앙대 건설산업기술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지방의회 발전연구원 객원연구원, 한국해외연수센터 사무국장, 한국공동주택 관리실무전문교육원장, 범아관광학원 일본어 학감, 베세토 민제공사 사장, 韓中합자 중경상림 기계화공정 유한공사 부동사장, 동남건설 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서울국제친선협회(SIFO)부회장,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일본어 통역/번역가 및 출판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 강의와 강연으로 분주하다.
역서 : 제3섹터 (중앙대 건설대학원장 황영주 교수와 공역)
논문 : 도시자치정부의 장기계획수립과정에 관한 비교 연구
논문 : 서울시 공공서비스의 민간화 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 국제법 기원과 주권론 - KCI(Korean Citation index 한국학술지인용색인)등재예정
▣ 주요 목차
축 사(한국측) : 이낙연
축 사(일본측) : 누카가 후쿠시로
머 리 말 : 이어령
발 간 사 : 조만제
1장. 짧은 삶
1.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 유상용
2. 카인과 아벨 : 하마시타 마사히로
3. 적다색赤茶色 민둥산 : 박경구
4. 사람(サラム)과 사랑(サラン) : 모치즈키 쿠니오
5.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 백조종
2장. 나무를 심는 사람
1. 식목일 행사 준비중 순직 : 김석권
2. 실용적인 육묘법 : 고바야시 후지오
3.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 김병윤
4.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 15대 심수관
3장. 공예
1. 인도 도예가 구차란 싱 : 하시모토 요리미츠
2. 해강海剛 유근형 : 유광열
3. 지순탁(池順鐸) : 지수구
4.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 오시마 마사히코
5. 다쿠미가 간다 : 문옥배
4장. 박물관은 살아있다
1. 박물관 선배 : 김종규
2. 두 개의 보물 : 정양모
3. 조선민족미술관은 왜 세워졌나? : 김정기
4. 한국의 미를 찾아서 : 야마모토 ?스케
5. 외동딸 소노에 : 이시이 리에
5장. 1931년 4월 경성
1. 인간의 가치 : 아베 요시시게
2. 순결한 영혼 : 야나기 무네요시
6장. 망우 공원
1.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 : 조경숙
2. 서울 국제 친선 협회 : 이순주
3. 이웃 아저씨 : 성기동
4. 청량사 : 구본설
5. 발복(發福) : 한상배
6. 사색의 길에 핀 성스러운 한 송이 꽃 : 정종배
7장.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1. 다카네(高根)정 : 시미즈 치가미
2. 김성진! 그로부터 : 사와야 시게코
3. 일본측 아사카와 기념회 : 나가세키 후쿠지
4. 자료관 건립 과정 : 히나따 요시히코
8장. 공공교류
1. 포천시 : 서장원
2. 호쿠토(北杜)시 : 시라쿠라 마사시
3. 두 도시 이야기 : 츠치야 마사미츠
4. 크레아 서울 : 야스모토 도시오
5. 한복을 입은 일본인 : 강기홍
9장. 민간교류
1. 다카사키 소지 : 하정웅
2. 하정웅의 메세나 : 김제윤
3. 기요사토 긴가쥬쿠 : 니시가와 히로토
4. 알폰클럽과 요델클럽의 산속 음악회 : 민완기
5. 조선오엽송으로 만든 아루프호른 : 나카가와 시게토시
10장. 식민지
1. 반일 사상범 : 조용래
2. 쉰들러 리스트 : 백정필
3. 백자 달 항아리가 불러온 식민지배의 책임 : 허문도
4.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는 : 오타 유키무라
5.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한 마키구치 : 이종수
11장. 여행
1. 그의 고향에 서서 한일교류를 그린다 : 김찬영
2. 성지 순례 : 사와야 시게코
3. 클럽의 일본 방문기 : 조성주
4. 한일 우호 교류단 : 김병권
5. 설렁탕과 무김치 : 쯔치다 히사유키
12장. 문헌과 논문
1. 편지 : 야나기 무네요시
2.『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번역에 붙여 : 심우성
3. 인생의 반환점에서 느낀 진실한 사랑 : 김순희
4. 흰색 바지 저고리를 입고 : 에미야 다카유키
5. 낯선 산촌마을에서 흙투성이로 : 게이노 미스즈
6. 명예롭지 않은 문화유산 : 이나가 시게미
7. 교토의 귀무덤 vs. 망우리 다쿠미묘 : 박미정
13장. 영화로 부활하는 다쿠미
1. 아름다운 스토리 : 나가사카 코지
2. 씨네마 천국 : 이춘호
3. 한일 공동제작 및 흥행 : 오자와 류이치
4. [백자의 사람] 2011년 가을 출간 : 박종균
부록 : 영화 협력 제안서
14장. 한국의 미래세대
1. 가슴 속 메아리 : 이승철
2. 꿈에라도 조선인이 되고 싶어 : 김지인
3. 세계 국민으로서의 자세 : 금중혁
4. 한국 청소년의 생각 : 최이주
5. 꿈과 희망의 등불 : 성종찬
6. 삶의 스승 : 하진성
7. 사용자 예술가 : 박성훈
8. 봉사정신이 강한 집안 : 오준호
9. 소나무를 좋아했다고 : 이한별
10. 당신 같은 사람이 앉을 곳이 아니야 : 이경희
11. 글로벌 인물 : 김예경
12.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 김민성
13. 한류 열풍 : 곽진원
14. 우리의 공예품 : 김예림
15. 자국의 문화제는 자국에 있어야 : 한미루
16.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경향 : 조우상
17. 천사라고 불러도 : 정재호
18. 코리아삼성, 코리아LG : 박세은
19. 차가웠던 일제시대 : 안광찬
20. 인류애 : 조호철
맺 음 말 : 최서면
편저자 후기 : 백조종
한일양국의 지식인, 정치인, 문화예술인, 학자 등의 글 88편이 실려 있다. 염상섭, 나혜석, 변영로, 오상순, 김억, 남궁벽 등이 활동했던 유명한 문예동인지 [폐허]의 동인들과 교류하던 다쿠미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복을 입었으며, 지위고하ㆍ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한국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국적과 종교를 초월하여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민둥산에 나무를 심어 숲을 살리고 홍수와 가뭄을 막는 한편,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보존하고 부흥시켰으며, 한국의 문화적, 외교적 독립을 염원했던 다쿠미는 극우 성향 일본인들로부터 끊임없는 박해와 협박에 시달렸다.
한국땅에 한그루의 나무라도 더 심기 위해 노력하던 다쿠미는 식목일 행사를 준비하다 과로로 순직한다. 만40세였다. 그의 서거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고, 그의 장례식에는 한일양국의 저명인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참여했으며, “한국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소다 가이치가 다쿠미의 장례식을 집전했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 까지도 한복 수의(壽衣)를 입었고, 죽어서도 한국땅에 묻혀, 한줌 한국의 흙이 되었다.
다쿠미는 조선 총독부 산림과에 근무했다. 당시 조선의 산들에 대해 일제는 자신들이 만든 지적법에 의해 많은 토지가 소유자 부재라는 억지 주장을 하며 몰수했다. 그리고, 그 토지와 임야를 일본으로부터 온 이민자나, 일본정부에 협조적인 조선인에게 차례차례로 불하해 버리고 있었다.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토지에 집착이 없고 곧바로 나무를 벌채해 팔아 버린다. 한반도의 산들은 단단한 암반이며 거기에 얇은 표토가 가리고 있다. 민둥산이 된 조선의 산들은 금새 보수력을 잃어 홍수를 일으켜 버리게 되었다. 홍수와 가뭄으로 조선 민중이 겪는 고통은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것에 마음 아파한 다쿠미는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을 고안해 조선의 많은 산들을 복원했다. 현재 한반도 산림면적의 약 37%가 다쿠미의 노천매장발아촉진법에 직ㆍ간접으로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녹지라고 하며, 다쿠미가 개발한 노천매장발아촉진법은 오늘날 미국에서도 각광받는 육묘 및 산림녹화 방식이라고 한다.
조선 총독부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고 주장하며,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속국인 한국을 구원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또한, 한국의 문화 자체가 중국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쿠미는, 조선의 밥상을 예로 들어, 조선의 문화는 중국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것임을 강조했다. 인간의 모든 문화 중 가장 중요하고, 가장 원초적인 근간은 食문화이다. 조선인들의 식문화가 펼쳐지는 場인 소반(밥상)이라는 것은 온돌방에 둘러 앉아 식사하던 한반도 특유의 것으로 중국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쿠미는 소반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이 일상 사용하는 많은 [생활공예품]들을 통해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주장했다. 다쿠미는,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의 문화적 독립’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조선의 외교적 독립’도 확신했다. 그리고 염원했다. 실제로 다쿠미가 죽고 14년후에 조선은 독립되었다.
[조선 도자기의 神] 이라고 추앙받는 사람은,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아사카와 노리다카이다. 노리다카는 일본에서 미술을 전공하면서, 일본도자기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며, 일본도자기의 원류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 심취하게 된다. 졸업후 한국의 도자기를 연구하기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조선의 공예, 도예를 연구하게 된다. 노리다카는 그 자신이 직접 회화나 조각도 했지만, 그 보다는 조선의 공예와 도예에 대한 연구가(硏究家) 및 컬렉터(collector)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노리다카의 성장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다쿠미이다. 다쿠미는 농업학교 임학과를 졸업하고 형이 있는 조선땅으로 건너와, 조선총독부 산림과 공무원으로 일한다. 다쿠미는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기 위해 조선의 온 산야를 헤집고 돌아다니면서, 학교에 몸담고 있느라 필드(Field)연구에 제약이 컸던 친형 노리다카를 위해, 조선 각지의 가마터에서, 도자기와 도자기 파편을 구해 형에게 제공했다. 노리다카가 [조선 도자기의 神]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동생 다쿠미가 [조선 도자기의 천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총독부 공무원이었던 다쿠미는 길에서 조선인 걸인을 만나면, 남자걸인에게는 일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여자걸인에게는 수중에 있는 돈을 전부 다 쥐어주었다. 다쿠미는 시내의 일본인 밀집지역에 살지 않고,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과 어울려 살았다. 다쿠미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어를 썼으며, 일본순사의 조선인 박해를 조선인들과 함께 감내해냈다. 다쿠미는 아이들을 귀여워해서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과자를 사서 나눠주곤 했다. 다쿠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인텔리 였던 [폐허] 동인지의 문인들과 교류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작농이나 천민 출신의 조선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친하게 지냈다. 다쿠미는 사람을 대할 때 빈부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국적도 종교도 초월했다. 다쿠미가 죽자, 서로 다쿠미의 상여를 매겠다고 나선 조선인들로 인해 청량리의 교통이 마비상태에 빠졌으며, 당시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저항하고 있던 동아일보였지만, 조선 총독부 임업연구소 소속의 日人공무원의 사망에 대해서 사실상의 추도기사를 냈을 정도였다.
다쿠미의 고향은 야마나시현 호쿠도시 다카네정이다. 1000년전 신라의 삼국통일로 멸망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해서 집단으로 모여 살던 곳이다. 다쿠미에게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 작가 소개
저자 : 백조종
국내 여러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법학 등을 전공하다가 최종적으로 행정학 학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에서는 도시계획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몇 년 후 다시 도시행정학으로 또 다른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 오비린 국제대학 박사과정에 합격했다. 서울시청 국제교류과에 근무했고, 서울시 공무원 교육원의 일본어 교관을 지냈다.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재단 도쿄사무소에서도 근무했으며, 일본 호쿠토시 명예시민으로서 경기도 포천시와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의 자매결연을 성사시켰다. 중앙대 건설산업기술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국지방의회 발전연구원 객원연구원, 한국해외연수센터 사무국장, 한국공동주택 관리실무전문교육원장, 범아관광학원 일본어 학감, 베세토 민제공사 사장, 韓中합자 중경상림 기계화공정 유한공사 부동사장, 동남건설 주식회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는 서울국제친선협회(SIFO)부회장, 아사카와 다쿠미 현창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일본어 통역/번역가 및 출판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 강의와 강연으로 분주하다.
역서 : 제3섹터 (중앙대 건설대학원장 황영주 교수와 공역)
논문 : 도시자치정부의 장기계획수립과정에 관한 비교 연구
논문 : 서울시 공공서비스의 민간화 방안에 관한 연구
논문 : 국제법 기원과 주권론 - KCI(Korean Citation index 한국학술지인용색인)등재예정
▣ 주요 목차
축 사(한국측) : 이낙연
축 사(일본측) : 누카가 후쿠시로
머 리 말 : 이어령
발 간 사 : 조만제
1장. 짧은 삶
1.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 유상용
2. 카인과 아벨 : 하마시타 마사히로
3. 적다색赤茶色 민둥산 : 박경구
4. 사람(サラム)과 사랑(サラン) : 모치즈키 쿠니오
5.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 백조종
2장. 나무를 심는 사람
1. 식목일 행사 준비중 순직 : 김석권
2. 실용적인 육묘법 : 고바야시 후지오
3.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 김병윤
4. 새롭게 지주가 된 사람들은 : 15대 심수관
3장. 공예
1. 인도 도예가 구차란 싱 : 하시모토 요리미츠
2. 해강海剛 유근형 : 유광열
3. 지순탁(池順鐸) : 지수구
4.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 오시마 마사히코
5. 다쿠미가 간다 : 문옥배
4장. 박물관은 살아있다
1. 박물관 선배 : 김종규
2. 두 개의 보물 : 정양모
3. 조선민족미술관은 왜 세워졌나? : 김정기
4. 한국의 미를 찾아서 : 야마모토 ?스케
5. 외동딸 소노에 : 이시이 리에
5장. 1931년 4월 경성
1. 인간의 가치 : 아베 요시시게
2. 순결한 영혼 : 야나기 무네요시
6장. 망우 공원
1.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 : 조경숙
2. 서울 국제 친선 협회 : 이순주
3. 이웃 아저씨 : 성기동
4. 청량사 : 구본설
5. 발복(發福) : 한상배
6. 사색의 길에 핀 성스러운 한 송이 꽃 : 정종배
7장. 아사카와 형제 자료관
1. 다카네(高根)정 : 시미즈 치가미
2. 김성진! 그로부터 : 사와야 시게코
3. 일본측 아사카와 기념회 : 나가세키 후쿠지
4. 자료관 건립 과정 : 히나따 요시히코
8장. 공공교류
1. 포천시 : 서장원
2. 호쿠토(北杜)시 : 시라쿠라 마사시
3. 두 도시 이야기 : 츠치야 마사미츠
4. 크레아 서울 : 야스모토 도시오
5. 한복을 입은 일본인 : 강기홍
9장. 민간교류
1. 다카사키 소지 : 하정웅
2. 하정웅의 메세나 : 김제윤
3. 기요사토 긴가쥬쿠 : 니시가와 히로토
4. 알폰클럽과 요델클럽의 산속 음악회 : 민완기
5. 조선오엽송으로 만든 아루프호른 : 나카가와 시게토시
10장. 식민지
1. 반일 사상범 : 조용래
2. 쉰들러 리스트 : 백정필
3. 백자 달 항아리가 불러온 식민지배의 책임 : 허문도
4.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누워있는 : 오타 유키무라
5. 일본의 침략전쟁에 반대한 마키구치 : 이종수
11장. 여행
1. 그의 고향에 서서 한일교류를 그린다 : 김찬영
2. 성지 순례 : 사와야 시게코
3. 클럽의 일본 방문기 : 조성주
4. 한일 우호 교류단 : 김병권
5. 설렁탕과 무김치 : 쯔치다 히사유키
12장. 문헌과 논문
1. 편지 : 야나기 무네요시
2.『조선의 소반』과 『조선도자명고』번역에 붙여 : 심우성
3. 인생의 반환점에서 느낀 진실한 사랑 : 김순희
4. 흰색 바지 저고리를 입고 : 에미야 다카유키
5. 낯선 산촌마을에서 흙투성이로 : 게이노 미스즈
6. 명예롭지 않은 문화유산 : 이나가 시게미
7. 교토의 귀무덤 vs. 망우리 다쿠미묘 : 박미정
13장. 영화로 부활하는 다쿠미
1. 아름다운 스토리 : 나가사카 코지
2. 씨네마 천국 : 이춘호
3. 한일 공동제작 및 흥행 : 오자와 류이치
4. [백자의 사람] 2011년 가을 출간 : 박종균
부록 : 영화 협력 제안서
14장. 한국의 미래세대
1. 가슴 속 메아리 : 이승철
2. 꿈에라도 조선인이 되고 싶어 : 김지인
3. 세계 국민으로서의 자세 : 금중혁
4. 한국 청소년의 생각 : 최이주
5. 꿈과 희망의 등불 : 성종찬
6. 삶의 스승 : 하진성
7. 사용자 예술가 : 박성훈
8. 봉사정신이 강한 집안 : 오준호
9. 소나무를 좋아했다고 : 이한별
10. 당신 같은 사람이 앉을 곳이 아니야 : 이경희
11. 글로벌 인물 : 김예경
12.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 : 김민성
13. 한류 열풍 : 곽진원
14. 우리의 공예품 : 김예림
15. 자국의 문화제는 자국에 있어야 : 한미루
16. 외국인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경향 : 조우상
17. 천사라고 불러도 : 정재호
18. 코리아삼성, 코리아LG : 박세은
19. 차가웠던 일제시대 : 안광찬
20. 인류애 : 조호철
맺 음 말 : 최서면
편저자 후기 : 백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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