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조선朝鮮
무인과 잡류는 물론 왕까지 눌렀던 5백년 지배체제 조망
조선을 흥망케 한 사士의 역사적 존재의미 탐구
조선시대사 학계의 원로이자 당쟁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조선 5백년 정치지형 속에서 선비라는 존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읽어낸 『선비평전』을 펴냈다. 이 책의 특징은 조선을 대표하는 계급이자 이념이었던 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발가벗겨’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간 선비에 관한 여러 저작들이 있었지만 ‘선비정신=대쪽정신’이라는 유산의 밝은 면을 통해 현실을 계몽하려는 입장의 책들, 수탈계급으로서의 존재와 망국책임 등을 타박하는 책들, 개별적 선비들의 선행과 비행을 에피소딕하게 소비하는 책들의 세 갈래로 나뉘어 그 종합적 역사상이 완벽하게 그려지지 못한 감이 컸다.
선비를 보는 양 갈래의 관점 통합한 비평적 시야
허나 ‘선비’라 하면 미국의 ‘청교도’, 일본의 ‘무사도’, 영국의 ‘신사도’처럼 조선을 대표하는 정신적 기풍이자 사회의 조직논리이고, 명실상부한 국가의 중심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규명해 그 역사적 실체를 제도적으로,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 『선비평전』은 그런 상황에서 선비에 가해진 긍·부정의 관점을 모두 포용해 ‘쌍라이트’를 켜고 그 복잡한 미로를 밝게 비추고자 한 시도이다. 조선건국의 특수성에서 배태된 운명적 사회제도들을 살핌과 동시에 다양한 선비의 인간상을 개별적으로 탐사하여 역사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이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다가 얻은 일종의 낙수落穗”라고 겸양하지만 군데군데 빛을 발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분명 이러한 균형 잡힌 종합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1)통설 2)통사적 흐름 속에서 개별 선비 탐색 3)선비정신의 구조와 본질 탐색이 그것이다.
먼저 통설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증, 왜 조선에 선비라는 계급이 등장했는지, 선비지배체제의 일반적 특징은 무엇인지, 그것을 5백 년 간이나 지속시켜준 제도적 여건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이 선비의 나라였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조선이 ‘민본주의民本主義’를 표방했다고 해서 실제 조선이 모든 ‘민民’을 아우르는 국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20쪽)
조선은 군사령관도 문신文臣이 차지한 국가다. “전술보다 전략이 더 중요하다는 명분”에서였다. 선비국가는 중국에서도 못 막은 환관의 발호를 막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 환관은 사대부 앞에서 힘을 못 쓰게 되었다. 직종도 다르고, 금령도 많았으며, 처벌도 심했던 것이다.
왜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더 위험한가
당쟁사와 조선의 정치제도사를 면밀히 살핀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즉위하면 훨씬 위험하다. 그 이유는 “똑똑하지 못한 왕이 즉위하면 훌륭한 신하만 피해를 입게 되지만, 중종처럼 우유부단한 국왕이 권력을 잡으면 좋은 현신과 간신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 말이 맞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 말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똑똑한 선비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강병정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답한다. 조선은 농업국가였지만 농업조건이 좋지 않았다. 농토는 적고 토박하며, 날씨는 가물다가 7-8월에 태풍이 불어 상습적으로 홍수가 일었다. 만성 기근을 조선인들은 피해갈 수 없었고, 이런 환경에서 강군을 양성하기란 어려웠다. 그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강군을 기르면 쿠데타의 가능성이 있어 문치주의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선을 국방보다는 외교에 치중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선비의 역사 통사적으로 훑고 ‘선비정신’ 체계화
2장에서는 선비국가가 전면에 내세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의 면면들을 살펴보았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여말선초’-‘사림정치’-‘임진왜란’-‘정묘·병자호란’-‘숙종조의 당쟁’-‘세도정치’ 등 시대순으로 내려가면서 전쟁과 같은 큰 사건들과 사림정치가 어떻게 맞물리면서 역사가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비라는 존재가 어떻게 운위했는지 행위자들의 구체적 사유와 판단, 정치적 실천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선비와 선비사상’이라는 장을 마련해 선비들의 정치적 강령을 뒤에서 받쳐준 철학체계과 정신세계를 압축적으로 체계화시켜 살펴봄으로써 끝을 맺는다.
충의의 사육신 신화는 사실 정치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고려 말에 형성돼 조선 중기에 사림정치로 완성되는 선비 지배체제가 선비들의 주체적 역량으로 일궈내어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성리학이라는 대전제와 도통과 의리라는 명분 아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치적 수읽기로 상대방을 음해하고 그야말로 명줄을 놓고 각축한 생존분투의 측면을 함께 읽어냄으로써 ‘선비의 역사’ 또한 이상추구와 생존본능이 치밀하게 교직된 현장이었다는 점을 실감나게 펼쳐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자면, 저자는 그동안 충의忠義의 대표 격으로 여겨져 왔던 ‘사육신’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살피고 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사육신이 애초에는 모두 수양대군 라인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단종을 대신해서 전권을 쥐고 인사권을 행사하던 당시의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에게 집현전 학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대간大諫으로서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 또한 이런 집현전 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포섭하려고 애썼다. 운명은 세조가 즉위하면서부터 틀어졌다. 즉, 그가 전제군주의 모습을 보이며 6조 직계제 등 왕권강화를 노골화하자 집현전 학사들은 그런 전제군주화가 자신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 관계로 ‘단종복위’를 내세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사육신 사건이 겉으로는 충·역 시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사육신의 역사무대 복귀’도 그 안엔 정치적 배경이 존재한다. 이는 숙종이 송시열 등 노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기 위해서였다. 군주를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내세워 송시열 등을 불충으로 낙인찍고, 원자 책봉을 강행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즉, 사육신의 충절은 이처럼 숙종대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창출된 면이 강하다.
오윤겸, 반석평 등 선비의 재발견과 인조반정 비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를 살다간 여러 선비들을 재발견해서 보여준다.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등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이들이 소개되며, 기인奇人으로만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포천·아산 현감이 되었을 때 펼친 개혁정책의 좌절 과정도 들려준다. 율곡 이이에 의해서 “옛사람들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 사람(이준경)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악하다”고 적대시된 이준경이 실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서 붕당의 당쟁을 막아보려고 했던 균형잡힌 선비였다는 점을 강조했고, 같은 차원에서 당쟁 속에서의 아계 이산해의 실리적 현실주의와 임진왜란 중에서의 유성룡의 현실적 실용노선을 파악하기도 했다. 특히 인조 조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훌륭한 목민관으로서의 업적, “남인 같은 서인”이라 불리며 당색을 초월했던 인품과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한 과정, 목숨 걸고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한 기개 등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을 이끈 실무관료’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기존 역사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도 잇따른다. 인조반정이 내세운 “광해군이 존명사대尊名事大를 어겼고, 폐모살제廢母殺弟했다”는 명분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정세에 잘못 대처한 선비들의 쿠데타가 내세운 거사명분일 뿐이라며 재평가를 촉구하기도 했다.
▣ 작가 소개
지음 :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자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1~7)』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공저)』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제1장 통설
선비, 임협과 문사를 갖춘 존재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무사와 환관과 여성을 누르다
똑똑하지 못한 왕이 위험한 이유
교린 없이 사대에만 치중하다
노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까닭
936년간 나라의 저력이 된 과거제도
일제가 만든 한자어를 없앨 수 있을까
제2장 유교문화
공자인 인仁, 사람다움을 가르는 기준
겸애로 공자에게 맞선 묵자
공자식 사랑이 감추고 있는 폭력성
동중서, "인으로 스스로를 살찌우지 마라"
짐승도 할 수 있는 효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효
제3장 여말선초의 선비들
망국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이색의 절의
유생의 영수로서 선禪에 심취했던 목은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
한양 정도와 정도전
13년 2개월간 관직에서 쫓겨난 맹사성
김종서를 알아보았던 황희
태종은 병권을, 세종은 정권을
단종복위라는 역사의 아이러니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은 권력투쟁인가
훈구파와 사육신의 갈림길-세조와 이계전
단종복위와 금성대군·이보흠의 운명
제4장 사림과 사림정치
사림정치,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다
이세좌와 연산군, 뿌리 깊은 악연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해"
토정 이지함의 기행
퇴계의 공부법
종계변무와 역관 홍순언
사람을 알아보는 동고 이준경
세 번째 엎드린 분을 왕으로 세우다
제5장 당쟁과 선비들
붕당과 당쟁
붕당사의 굵은 줄기들
당쟁의 조짐, 선배와 후배의 대결
"곧 붕당이 일어날 것이다"-영의정 이준경의 유차
이준경이 이황을 꾸짖은 까닭
이준경과 이이, 원수처럼 배척하다
십만양병이 가능한가
좌퇴계 우남명
당쟁의 서곡, 동서분당
5현종사
제6장 임진왜란과 선비들
김충선, 오랑캐의 나라를 저버리다
정철의 건저의
오성과 한음, 삶과 죽음을 같이하다
선릉·정릉 도굴사건
유극량의 살신성인
재주꾼 이산해
이구 부인 전주이씨
허준의 출생과 경력의 진위논쟁
『동의보감』 다시 보기
임진왜란 18년간의 기록, 『고대일록』
주화오국
『퇴계집』으로 갈라선 조목과 유성룡
제7장 정요·병자호란과 선비들
인조반정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우러사 이정구 가문의 영광
월사 산소의 명당 찾기
오윤겸, 목숨 걸고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다
오달제와 『남한산성』
장만과 정충신
장만에 대한 양면적 평가
척화파 김상헌 vs 주화파 최명길
이경석을 비난만 할 수 있는가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송시열과 이경석
이경석, 효종을 위해 청에 무릎 꿇다
원종 추숭
제8장 숙종 조의 당쟁과 선비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했나
평안감사 박엽의 권력형 비리
이만부의 실학사상
윤휴에 대한 서인의 평가
이옥의 배사론
영남호강론
퇴계변무소
48조목으로 집안을 이끌다-분봉가훈
기혜예송
갑인예송
1728년의 무신난
제9장 비도정치와 선비들
다산이 다산이 된 까닭
윤상도의 상소
추사와 「세한도」
매천 황현의 절명시
부록: 선비와 선비 사상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조선朝鮮
무인과 잡류는 물론 왕까지 눌렀던 5백년 지배체제 조망
조선을 흥망케 한 사士의 역사적 존재의미 탐구
조선시대사 학계의 원로이자 당쟁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조선 5백년 정치지형 속에서 선비라는 존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읽어낸 『선비평전』을 펴냈다. 이 책의 특징은 조선을 대표하는 계급이자 이념이었던 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발가벗겨’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간 선비에 관한 여러 저작들이 있었지만 ‘선비정신=대쪽정신’이라는 유산의 밝은 면을 통해 현실을 계몽하려는 입장의 책들, 수탈계급으로서의 존재와 망국책임 등을 타박하는 책들, 개별적 선비들의 선행과 비행을 에피소딕하게 소비하는 책들의 세 갈래로 나뉘어 그 종합적 역사상이 완벽하게 그려지지 못한 감이 컸다.
선비를 보는 양 갈래의 관점 통합한 비평적 시야
허나 ‘선비’라 하면 미국의 ‘청교도’, 일본의 ‘무사도’, 영국의 ‘신사도’처럼 조선을 대표하는 정신적 기풍이자 사회의 조직논리이고, 명실상부한 국가의 중심동력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규명해 그 역사적 실체를 제도적으로, 사실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 『선비평전』은 그런 상황에서 선비에 가해진 긍·부정의 관점을 모두 포용해 ‘쌍라이트’를 켜고 그 복잡한 미로를 밝게 비추고자 한 시도이다. 조선건국의 특수성에서 배태된 운명적 사회제도들을 살핌과 동시에 다양한 선비의 인간상을 개별적으로 탐사하여 역사를 정합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이 책이 “조선시대사를 연구하다가 얻은 일종의 낙수落穗”라고 겸양하지만 군데군데 빛을 발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분명 이러한 균형 잡힌 종합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1)통설 2)통사적 흐름 속에서 개별 선비 탐색 3)선비정신의 구조와 본질 탐색이 그것이다.
먼저 통설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고증, 왜 조선에 선비라는 계급이 등장했는지, 선비지배체제의 일반적 특징은 무엇인지, 그것을 5백 년 간이나 지속시켜준 제도적 여건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이 선비의 나라였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조선이 ‘민본주의民本主義’를 표방했다고 해서 실제 조선이 모든 ‘민民’을 아우르는 국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20쪽)
조선은 군사령관도 문신文臣이 차지한 국가다. “전술보다 전략이 더 중요하다는 명분”에서였다. 선비국가는 중국에서도 못 막은 환관의 발호를 막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 환관은 사대부 앞에서 힘을 못 쓰게 되었다. 직종도 다르고, 금령도 많았으며, 처벌도 심했던 것이다.
왜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더 위험한가
당쟁사와 조선의 정치제도사를 면밀히 살핀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똑똑하지 못한 왕보다 우유부단한 왕이 즉위하면 훨씬 위험하다. 그 이유는 “똑똑하지 못한 왕이 즉위하면 훌륭한 신하만 피해를 입게 되지만, 중종처럼 우유부단한 국왕이 권력을 잡으면 좋은 현신과 간신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쪽 말을 들으면 이쪽 말이 맞고, 저쪽 말을 들으면 저쪽 말이 맞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똑똑한 선비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강병정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에 저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답한다. 조선은 농업국가였지만 농업조건이 좋지 않았다. 농토는 적고 토박하며, 날씨는 가물다가 7-8월에 태풍이 불어 상습적으로 홍수가 일었다. 만성 기근을 조선인들은 피해갈 수 없었고, 이런 환경에서 강군을 양성하기란 어려웠다. 그럴 돈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강군을 기르면 쿠데타의 가능성이 있어 문치주의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선을 국방보다는 외교에 치중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선비의 역사 통사적으로 훑고 ‘선비정신’ 체계화
2장에서는 선비국가가 전면에 내세운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의 면면들을 살펴보았고, 3장부터 9장까지는 ‘여말선초’-‘사림정치’-‘임진왜란’-‘정묘·병자호란’-‘숙종조의 당쟁’-‘세도정치’ 등 시대순으로 내려가면서 전쟁과 같은 큰 사건들과 사림정치가 어떻게 맞물리면서 역사가 전개되었고, 그 과정에서 선비라는 존재가 어떻게 운위했는지 행위자들의 구체적 사유와 판단, 정치적 실천을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선비와 선비사상’이라는 장을 마련해 선비들의 정치적 강령을 뒤에서 받쳐준 철학체계과 정신세계를 압축적으로 체계화시켜 살펴봄으로써 끝을 맺는다.
충의의 사육신 신화는 사실 정치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고려 말에 형성돼 조선 중기에 사림정치로 완성되는 선비 지배체제가 선비들의 주체적 역량으로 일궈내어 각고의 노력으로 지켜낸 결과라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성리학이라는 대전제와 도통과 의리라는 명분 아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정치적 수읽기로 상대방을 음해하고 그야말로 명줄을 놓고 각축한 생존분투의 측면을 함께 읽어냄으로써 ‘선비의 역사’ 또한 이상추구와 생존본능이 치밀하게 교직된 현장이었다는 점을 실감나게 펼쳐 보인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자면, 저자는 그동안 충의忠義의 대표 격으로 여겨져 왔던 ‘사육신’을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살피고 있다.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사육신이 애초에는 모두 수양대군 라인에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단종을 대신해서 전권을 쥐고 인사권을 행사하던 당시의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에게 집현전 학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대간大諫으로서 이들을 공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양대군 또한 이런 집현전 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며 포섭하려고 애썼다. 운명은 세조가 즉위하면서부터 틀어졌다. 즉, 그가 전제군주의 모습을 보이며 6조 직계제 등 왕권강화를 노골화하자 집현전 학사들은 그런 전제군주화가 자신들이 원하던 바가 아니었던 관계로 ‘단종복위’를 내세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사육신 사건이 겉으로는 충·역 시비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사육신의 역사무대 복귀’도 그 안엔 정치적 배경이 존재한다. 이는 숙종이 송시열 등 노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기 위해서였다. 군주를 위해 충절을 지킨 사육신을 내세워 송시열 등을 불충으로 낙인찍고, 원자 책봉을 강행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즉, 사육신의 충절은 이처럼 숙종대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창출된 면이 강하다.
오윤겸, 반석평 등 선비의 재발견과 인조반정 비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를 살다간 여러 선비들을 재발견해서 보여준다.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등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선비의 기개를 보여준 이들이 소개되며, 기인奇人으로만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 포천·아산 현감이 되었을 때 펼친 개혁정책의 좌절 과정도 들려준다. 율곡 이이에 의해서 “옛사람들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착했는데, 지금 사람(이준경)은 죽으려 할 때 그 말이 악하다”고 적대시된 이준경이 실은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서 붕당의 당쟁을 막아보려고 했던 균형잡힌 선비였다는 점을 강조했고, 같은 차원에서 당쟁 속에서의 아계 이산해의 실리적 현실주의와 임진왜란 중에서의 유성룡의 현실적 실용노선을 파악하기도 했다. 특히 인조 조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훌륭한 목민관으로서의 업적, “남인 같은 서인”이라 불리며 당색을 초월했던 인품과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한 과정, 목숨 걸고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한 기개 등은 그간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을 이끈 실무관료’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기존 역사해석에 대한 문제제기도 잇따른다. 인조반정이 내세운 “광해군이 존명사대尊名事大를 어겼고, 폐모살제廢母殺弟했다”는 명분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정세에 잘못 대처한 선비들의 쿠데타가 내세운 거사명분일 뿐이라며 재평가를 촉구하기도 했다.
▣ 작가 소개
지음 : 이성무
1937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여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하버드 옌칭연구소 연구교수와 독일 튀빙겐대학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 연세대학교 용재석좌교수를 지냈다. 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자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의 과거제도』 『조선초기 양반연구』 『조선의 사회와 사상』 『조선양반사회연구』 『한국역사의 이해(1~7)』 『조선왕조사』 『조선시대 당쟁사』 『조선을 만든 사람들』 『명장 열전』 『조선의 옛 사람들에게서 우리를 만나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공저)』 등이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제1장 통설
선비, 임협과 문사를 갖춘 존재
붓을 빠는 이들이 다스린 나라
무사와 환관과 여성을 누르다
똑똑하지 못한 왕이 위험한 이유
교린 없이 사대에만 치중하다
노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까닭
936년간 나라의 저력이 된 과거제도
일제가 만든 한자어를 없앨 수 있을까
제2장 유교문화
공자인 인仁, 사람다움을 가르는 기준
겸애로 공자에게 맞선 묵자
공자식 사랑이 감추고 있는 폭력성
동중서, "인으로 스스로를 살찌우지 마라"
짐승도 할 수 있는 효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효
제3장 여말선초의 선비들
망국대부는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이색의 절의
유생의 영수로서 선禪에 심취했던 목은
이집과 최원도의 각별한 우정
한양 정도와 정도전
13년 2개월간 관직에서 쫓겨난 맹사성
김종서를 알아보았던 황희
태종은 병권을, 세종은 정권을
단종복위라는 역사의 아이러니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은 권력투쟁인가
훈구파와 사육신의 갈림길-세조와 이계전
단종복위와 금성대군·이보흠의 운명
제4장 사림과 사림정치
사림정치,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다
이세좌와 연산군, 뿌리 깊은 악연
심희수와 기생 일타홍
노비 출신 형조판서 반석평
"외할머니가 생각나면 눈앞이 아득해"
토정 이지함의 기행
퇴계의 공부법
종계변무와 역관 홍순언
사람을 알아보는 동고 이준경
세 번째 엎드린 분을 왕으로 세우다
제5장 당쟁과 선비들
붕당과 당쟁
붕당사의 굵은 줄기들
당쟁의 조짐, 선배와 후배의 대결
"곧 붕당이 일어날 것이다"-영의정 이준경의 유차
이준경이 이황을 꾸짖은 까닭
이준경과 이이, 원수처럼 배척하다
십만양병이 가능한가
좌퇴계 우남명
당쟁의 서곡, 동서분당
5현종사
제6장 임진왜란과 선비들
김충선, 오랑캐의 나라를 저버리다
정철의 건저의
오성과 한음, 삶과 죽음을 같이하다
선릉·정릉 도굴사건
유극량의 살신성인
재주꾼 이산해
이구 부인 전주이씨
허준의 출생과 경력의 진위논쟁
『동의보감』 다시 보기
임진왜란 18년간의 기록, 『고대일록』
주화오국
『퇴계집』으로 갈라선 조목과 유성룡
제7장 정요·병자호란과 선비들
인조반정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우러사 이정구 가문의 영광
월사 산소의 명당 찾기
오윤겸, 목숨 걸고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다
오달제와 『남한산성』
장만과 정충신
장만에 대한 양면적 평가
척화파 김상헌 vs 주화파 최명길
이경석을 비난만 할 수 있는가
"개도 그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송시열과 이경석
이경석, 효종을 위해 청에 무릎 꿇다
원종 추숭
제8장 숙종 조의 당쟁과 선비
송시열은 왜 윤휴를 두려워했나
평안감사 박엽의 권력형 비리
이만부의 실학사상
윤휴에 대한 서인의 평가
이옥의 배사론
영남호강론
퇴계변무소
48조목으로 집안을 이끌다-분봉가훈
기혜예송
갑인예송
1728년의 무신난
제9장 비도정치와 선비들
다산이 다산이 된 까닭
윤상도의 상소
추사와 「세한도」
매천 황현의 절명시
부록: 선비와 선비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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