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강이천 사건으로 18세기 조선의 열망과 좌절을 되살리다
영정조 시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흔히 영정조 시대를 두고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일컫는다. 특히 정조 대는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라 불린다. 정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통해 정치ㆍ경제적 안정을 꾀했던 영조를 이어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규장각을 세워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등용했다. 영조의 뜻을 받들어 탕평책을 지속적으로 실시, 인물 본위로 관리를 선발하려 애썼다. 이 같은 사회 전반의 개혁 분위기 속에서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홍재전서》 등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문예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영정조 시대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다분히 평면적이다. 그것만으로는 당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자취들, 그들의 망설임과 혼란과 고독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당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 묻어버린다.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등을 통해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략들을 파헤쳐 역사적 인간에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은 백승종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에서 18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얼굴을 부조해낸다. 저자는 1791년에 벌어진 한 사건의 관련 기록을 차례로 분석함으로써 강이천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지식인들과 국왕 정조 사이에 심각한 ‘문화투쟁’이 전개되었음을 밝힌다. 18세기 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다. 이 책은 그때 그 사람들의 열망과 좌절, 바람과 분투를 절실하게 그려낸다.
정조와 강이천의 문화투쟁, 18세기 조선사회를 읽는 새로운 방식
표암 강세황의 손자로 이를테면 당대의 불량선비로 간주된 강이천姜彛天(1768~1801)과 그의 재주를 아끼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긴 국왕 정조正祖(1752~1800)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들이 벌인 ‘문화투쟁’, 즉 문화적 지배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책의 주제다. 1797년 11월, 강이천은 허랑한 소문으로 혹세무민한 죄로 유배를 간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패관소품稗官小品을 더욱 철저히 금지한다. 문체반정을 밀어붙인 것이다. 심지어는 과거시험 답안지의 글씨체까지 엄격히 통제한다. 얼핏 보면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태의 연이은 발생에 주목한 저자는 내적 관련성을 찾아낸다.
저자는 문학사조로서 소품문, 당시 기성권력을 위협하고 있던 《정감록鄭鑑綠》을 비롯한 종교ㆍ사회운동, 그리고 반체제 문화운동으로까지 인식되던 천주교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1797년에 일어난 문제의 사건을 파헤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된 강이천 사건은 주류문화인 성리학과 천주교 및 정감록 등의 소문화 집단 간의 대립을 상징했다. 문화투쟁은 18세기 조선을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새로운 코드다.
중층적 서사와 〈연구노트〉의 작성, 새로운 역사 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다
저자 백승종은 근대적 역사학의 한계에 도전한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수한 파편 조각일 뿐이며 애당초 사실의 파편들은 서로 무질서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저자라서 중층적인 서사가 시도된다. 저자는 강이천 사건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갈등,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략의 충돌을 짚어낸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그날그날의 연구 성과가 집약된 연구노트를 작성했다. 거기에는 중요 자료의 번역과 사료 비판 및 2차 자료의 요약과 비평이 꼬박꼬박 기록되었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역사 쓰기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점들이 많다. 우선 사료를 읽는 방법이며, 하나의 연구 주제를 다루는 동안 역사가에게 떠오르기 마련인 여러 가지 고민의 흔적이 여실하다. 가설을 설정하고, 사료를 살핀 후 그것을 수정ㆍ보완하는 작업 그리고 연구 도중 자신의 역사관을 성찰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책은 한 권의 역사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정조와 강이천, 시대를 다르게 인식하다
18세기 조선, 불온한 상상력으로 물들다
18세기 조선에는 당시 지배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몇 가지 불온한 사조가 있었다. 첫째, 바다의 섬에서 진인眞人이 군대를 끌고 나타나 삽시간에 조선을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러한 예언이 조선 사회에 횡행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독 심해진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고, 더욱이 강이천과 같은 명류名流 출신이 예언에 빠져 감히 역모를 꿈꾸기까지 한 것은 정조 때였다.
둘째, 지배층이 이단으로 규정해 뿌리 뽑으려 한 천주교의 교세도 점차 확산 중이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었다. 거기에 불교와 도교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유불선儒彿仙 삼교로는 채워지지 않는 문화적 갈망에 목말라 하던 일부 선비들이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잦아졌다.
셋째, 명말청초에 유행하던 ‘패관소품’을 즐기는 양반들 또한 늘어났다. 새로운 문예풍조였던 패관소품은 정조와 지배층에게는 골칫거리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패관소품을 유행시킨 중국 작가들이 정통 성리학과는 거리가 먼 양명학자거나 고증학자로서, 전통적인 성리학이 표방해온 이념과 가치를 폄훼하는 불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패관소품은 가냘프고, 삐뚤어진 글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망한 이유를 그러한 패관소품의 특징에 돌리는 이들이 많았다. 패관소품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수군거림이 널리 퍼진 것이다.
조선의 멸망을 점치는 예언의 만연, 왕이 아닌 천주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새 종교의 전파, 성리학적 사고에 반기를 든 패관소품의 유행은, 국왕을 비롯한 보수지배층으로서는 묵과하기 어려운 혹세무민의 불온한 사조였다.
18세기, 새로운 기회의 시대인가 위기의 시대인가
저자는 이런 18세기 시대상황을 강이천과 정조가 정반대 쪽에서 바라봤다고 진단한다. 한 사람(강이천)은 새로운 기회의 시대로, 다른 사람(정조)은 위기의 시대로 인식했다는 주장이다. 강이천이 18세기 조선에서 변화의 희망을 찾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회적 상상력’이 깨어난 까닭인데, 이것은 당시 조선사회의 문화적 변화에서 추동되었다 한다.
그러나 정조 입장은 달랐다. 왕은 18세기 조선의 위기담론을 앞장서 이끌었다. 저자는 정조가 강이천 등이 꿈꾼 이상사회를 ‘망상’ 또는 ‘공상’으로 치부하고 위험시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당시 이상사회에의 열망이 확산된 원인을 정조는 체제의 자체모순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사조에서 찾았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소품문小品文’의 악영향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정조의 ‘소품문’ 퇴치 노력은 그러한 현실 진단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강이천 사건은 시대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파악한 양 진영의 충돌이었다.
두 주인공, 강이천과 정조
강이천, 새 세상을 꿈꾼 이상주의자
강이천은 ‘소북小北’을 대표하는 명가의 후예였다. 이름난 화가요 문인이었던 표암 강세황이 그의 할아버지였다. 시서화에 능한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강이천도 어려서부터 특출한 문학적 재능을 뽐냈다. 열두 살 되던 1779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 들어가 시를 지어 왕의 칭찬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열일곱에는 벌써 진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이천은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성리학 공부에 매몰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시대를 고뇌했다. 성리학 지상주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이상을 키웠다. 그리고 운명이 자신을 완전히 추락시킬 때까지 이상을 향한 날갯짓을 계속했다.
그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도 않고 억울한 처지에 놓이지도 않는 사회를 꿈꿨다. 그것은 성리학적 이상주의자들이 꿈꾼 세계가 아니었다. 기성 체제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 조선 왕조가 ‘금지한’ 이상사회를 고민했다. 천주교의 천당 이론이 삼강오륜을 압도하는 사회, 사회적 약자가 문학과 역사의 주된 관심거리가 되는 문화, 공자와 맹자와 주자의 가르침이라도 당연히 검증을 거친 뒤라야 믿을 수 있다는 경험적 사고가 강이천의 머릿속에 여물어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 왕조가 금기시한 ‘사회적 상상력’의 분출이었다.
정조, 오래된 성리학 질서의 수호자
정조는 지적인 면에서 18세기의 어떤 성리학자보다 탁월했다. 그러나 정조가 새로운 정치이념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정치와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혁신을 꾀한 적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개혁군주 정조의 한계는 명확했다.
정조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정통한 철인 설에 정치군주였지만 그의 능력은 기성 체제를 방어하는 쪽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성리학 지상사회의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장기간에 걸쳐 이단과 잡술을 상대로 ‘문화투쟁’을 벌였다. 왕은 해묵은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기성의 가치와 사회관습을 철저히 유지하려 했다.
1797년 11월 11일, 강이천 사건 벌어지다
강이천,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죄로 고발당하다
소년시절부터 장래가 촉망되었던 강이천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아치로서 평탄하게 살지 못하고 좌초한다.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1797년 11월 1일, 우의정 이병모는 정조에게 한 유언비어 사건을 알린다. 천안에 사는 진사 강이천이 해적에 관한 불길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시골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처음에는 이를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11월 11일, 사건 소식에 놀라 불안에 빠진 강이천이 자신을 이병모에게 고발한 김신국을 비롯해 친구 김려와 김건순까지 되레 고발하면서 사건은 확대된다.
정조는 사건을 형조에 맡겨 조사를 명한다. 사설邪說을 지어내고 비밀 호칭을 썼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역모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단순한 사기 사건처럼 처리하려 했다. 노론 명가인 안동김씨였던 김건순의 죄행은 덮어주고 나머지 사람들만 처벌하라 한 것이다.
형조로 이관된 사건은 하루 뒤인 11월 12일 마감된다. 김건순은 아예 심문조차 받지 않았고, 강이천과 김건순의 5촌 당숙인 김이백만 간단히 조사를 받는 선에서 수사가 종결된다. 김건순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고 사건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챈 조정 대신들은 그러한 수사 종결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강이천, 김이백, 김려의 귀양으로 사건 처리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정조 사망 뒤 이상겸, 목만중 등 대신들의 강이천 사건 재조사 요구가 잇따르고, 1801년 3월 16일 자수한 주문모 신부가 김건순, 강이천 등을 만난 사실을 언급하면서 사건의 재조사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강이천은 하옥되어 1801년 3월 29일 옥중에서 사망한다. 같은 해 4월 20일 김건순과 김이백 등도 처형된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강이천 사건의 공식적인 전말이다.
강이천 사건의 내막
그러나 저자는 《일성록》, 《노상추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통해 강이천 사건의 숨겨진 이면을 찾는다. 그의 눈길을 따라가 보자.
김려는 강이천과 성균관 입학시험인 승보시를 함께 치르고 성균관에서도 늘 같이 지낸 친구였다. 김건순은 김려와의 인연으로 강이천을 알게 된다. 김건순의 5촌 당숙으로 그의 집에서 식객처럼 지내기도 했던 김이백은 김건순과의 인연으로 강이천과 사제지간을 맺는다.
강이천 사건의 주요 인물들은 이렇게 인연을 맺어 당대의 여러 사안들을 토론한다. 1797년 8월에는 김려 형제의 주선으로 강이천, 김건순이 서울에서 만나 며칠 동안 깊은 토론을 한다. 강이천을 처음 만나고 난 직후 김건순은 서울에 숨어 있던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몰입한다. 곧이어 강이천과 김이백도 주문모 신부를 만난다. 이후 한 달여 동안 강이천과 김건순 등은 문학과 종교문답을 많이 나눈다.
1797년 10월에는 강이천이 김이백, 김신국, 김정신, 김종억 등을 집으로 불러 천주교를 소개한다. 당시 강이천은 조선의 멸망과 새 나라의 건국을 기대하며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를 꿈꾸고 있었다. 이 같은 조짐을 알아챈 김신국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1797년 11월 1일 자신의 사촌형 김정국을 통해 강이천을 역모죄로 고발한다.
이때 김정국은 우의정 이병모가 아닌 조정 대신 김달순을 먼저 찾는다.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김달순은 이병모를 찾아가 사건 처리 방안을 조율한다. 자신이 속한 안동김씨 가문의 종손 김건순과 주문모 신부가 개입된 천주교 문제를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겠다는 〈밀계〉를 정조에게 올린 것은 이 같은 사전 조율의 결과다.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정조가 사건을 조용히 사기 사건으로 덮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새 세상을 향한 열망의 좌절
강이천, 시한폭탄 같은 존재
강이천은 그렇게 허망하게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상상력을 실현시키기엔 너무 짧은 생이었다.
정조를 위시한 지배층에게 강이천은 18세기 후반의 불온한 분위기를 한 몸에 지닌 ‘종합선물세트’였다. 시한폭탄이었다. 비록 정치력이나 조직력, 지도력이 출중하지는 못했지만 강이천이란 존재는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강이천의 내면세계가 여러 가지 불온한 사조로 뒤엉켜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지배층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던 문제의 핵심이었다. 예언과 천주교와 서양에 대한 기대와 패관소품의 애호가 종횡으로 얽히면 그것은 체제를 파괴하는 엄청난 폭발물이 될 수 있었다. 강이천의 가슴과 머릿속에 영글어가고 있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꿈이 바로 문제였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 개혁안으로서는 아직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종의 공상적 이상사회론이 강이천의 내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늘도 계속되는 문화투쟁 그리고 보수화
강이천과 그의 친구 및 추종자들은 대부분 조선 사회의 지식층이었다. 양반들이었다. 정조와 최고 지배층이 강이천 등에게서 즉각적인 위협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그에게서 체제 위기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정조가 강이천으로 상징되는 불량한 선비들을 상대로 ‘문화투쟁’을 펼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은 물론이고, 그 조치를 한 단계 더 강화시켰다. 중국 서적의 수입금지, 패관소품식 글쓰기의 금지를 넘어 과거시험에서 패관소품류를 완전히 추방했다. 불온한 문체를 연상시키는 글씨체까지 엄금했다. 철저한 사상통제요, 문화적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문화투쟁’이었다.
정조의 문화투쟁은 다음 왕인 순조 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최상층 양반자제들 가운데서 강이천과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배출되지 않았다. 상상력의 분출구가 완전히 가로막힌 탓이었다. 조선 지배층의 체질은 더할 수 없이 보수화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력으로 도저히 사회개혁과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써 사회개혁은 조선의 소수자 또는 평민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저자는 강이천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강이천이 살던 그때와 너무나 닮았다.”
▣ 작가 소개
저자 백승종
백승종은 1990년대부터 미시사의 실천운동에 전념해왔다. 그의 연구는 재량권, 생존전략 및 문화투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집약되는데 이 책은 문화투쟁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연구는 주로 한국의 예언문화사에 집중된 결과,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2007),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2006), 《한국의 예언문화사》(2006) 등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미시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을 탐구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역서 《미시사의 즐거움》(공역, 2003)과 《미시사와 거시사》(공역, 2001)는 그 과정에서 얻은 결실이다.
그는 미시사 연구를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가족 및 마을생활에 적용하고, 근현대 한국의 문화사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싶어 했다. 《조선의 통치철학》(공저, 2010)을 비롯해 The Stem Family in Eurasian Perspective(Population, Family, and Society/ Population, Famille Et Societe)(공저, 2009),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2003), 《그 나라의 역사와 말》(2002),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추억》(2000), 《아버지 난 누구예요》(편저, 2000), 《한국사회사연구》(1996) 등에서 저자의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990년부터 저자는 국내외 여러 대학교 및 연구기관에 근무하며 강의와 연구에 종사했다.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재직기간 1990∼1999)를 시작으로, 서강대학교(1999∼2003), 프랑스 국립 고등사회과학원(2000), 독일 막스플랑크역사연구소(1995, 1996, 2001, 2002∼2003),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2004), 독일 보훔대학교(2003, 2009) 등 여러 곳을 거쳤다.
지난해부터 저자는 충청남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한문고전과 독일어 성경을 가르치며, 마을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연구에 착수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강이천 사건 연보
1장 작업 가설-18세기 조선, 불온한 상상력으로 물들다
첫 인상
세 사람, 강이천과 김건순 그리고 정조
또 하나의 의문-천주교와 정감록
연구 성과의 탐색-스즈키의 〈조선 후기 천주교 사상과 ‘정감록’〉비평
가설: 강이천과 국왕 정조는 “문화투쟁”을 벌였다!
2장 사건 스케치-진사에서 불량선비로
유망선비와 불량선비의 갈림길에서
강이천 사건의 재구성
머릿속을 오가는 몇 가지 의문점
죄인들의 심문 현장으로
《일성록》 읽기-1797년 형조의 심문 기록 속으로
3장 정조의 사건 처리-소품을 박멸하라
문화투쟁이다!
소품과 천주교와 강이천 사건, 그 3자의 관계
소품이 사학으로 가니
정조의 “문체반정”, 어떻게 볼 것인가
천주교를 거론하지 마라
1790년대 조선 천주교회의 교리 지식과 교리서
4장 신유박해의 소용돌이에서
강이천 사건, 재연되다!
《노상추일기》에서 만난 강이천 사건
《추안급국안》에 드러난 강이천의 심문 전략
강이천과 김건순의 서울 회동
사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미궁에 빠지기 쉬운 역모 사건의 해석
강이천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 더 읽기: 주변인들의 최후 진술
5장 천주교와 김건순
김건순은 왜 천주교를 선택했는가
천주교와 지식인
서양 배와 천주교
역사학의 글쓰기
6장 여언餘言: 그들을 위하여
정조의 이념적 경직성, 고도로 계산된 통치 전략
강이천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가 꿈꾼 세상
김려, 그와 강이천의 우정에 대하여
김건순을 말한다
소수자의 시선 - 김이백과 이주황과 김신국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
주석
찾아보기
강이천 사건으로 18세기 조선의 열망과 좌절을 되살리다
영정조 시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
흔히 영정조 시대를 두고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라 일컫는다. 특히 정조 대는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라 불린다. 정조는 탕평책과 균역법을 통해 정치ㆍ경제적 안정을 꾀했던 영조를 이어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규장각을 세워 참신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등용했다. 영조의 뜻을 받들어 탕평책을 지속적으로 실시, 인물 본위로 관리를 선발하려 애썼다. 이 같은 사회 전반의 개혁 분위기 속에서 《대전통편》, 《무예도보통지》, 《홍재전서》 등 편찬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문예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다. 영정조 시대에 대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평가는 다분히 평면적이다. 그것만으로는 당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자취들, 그들의 망설임과 혼란과 고독함을 보여주지 못한다. 당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다양한 인간군상의 삶을 묻어버린다.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게임》 등을 통해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략들을 파헤쳐 역사적 인간에 호흡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은 백승종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에서 18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얼굴을 부조해낸다. 저자는 1791년에 벌어진 한 사건의 관련 기록을 차례로 분석함으로써 강이천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지식인들과 국왕 정조 사이에 심각한 ‘문화투쟁’이 전개되었음을 밝힌다. 18세기 조선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다. 이 책은 그때 그 사람들의 열망과 좌절, 바람과 분투를 절실하게 그려낸다.
정조와 강이천의 문화투쟁, 18세기 조선사회를 읽는 새로운 방식
표암 강세황의 손자로 이를테면 당대의 불량선비로 간주된 강이천姜彛天(1768~1801)과 그의 재주를 아끼면서도 못마땅하게 여긴 국왕 정조正祖(1752~1800)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들이 벌인 ‘문화투쟁’, 즉 문화적 지배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책의 주제다. 1797년 11월, 강이천은 허랑한 소문으로 혹세무민한 죄로 유배를 간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패관소품稗官小品을 더욱 철저히 금지한다. 문체반정을 밀어붙인 것이다. 심지어는 과거시험 답안지의 글씨체까지 엄격히 통제한다. 얼핏 보면 아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태의 연이은 발생에 주목한 저자는 내적 관련성을 찾아낸다.
저자는 문학사조로서 소품문, 당시 기성권력을 위협하고 있던 《정감록鄭鑑綠》을 비롯한 종교ㆍ사회운동, 그리고 반체제 문화운동으로까지 인식되던 천주교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1797년에 일어난 문제의 사건을 파헤친다. 그의 시선에 포착된 강이천 사건은 주류문화인 성리학과 천주교 및 정감록 등의 소문화 집단 간의 대립을 상징했다. 문화투쟁은 18세기 조선을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새로운 코드다.
중층적 서사와 〈연구노트〉의 작성, 새로운 역사 쓰기의 전형을 보여주다
저자 백승종은 근대적 역사학의 한계에 도전한다. 역사적 사실이란 무수한 파편 조각일 뿐이며 애당초 사실의 파편들은 서로 무질서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저자라서 중층적인 서사가 시도된다. 저자는 강이천 사건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갈등,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전략의 충돌을 짚어낸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그날그날의 연구 성과가 집약된 연구노트를 작성했다. 거기에는 중요 자료의 번역과 사료 비판 및 2차 자료의 요약과 비평이 꼬박꼬박 기록되었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역사 쓰기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점들이 많다. 우선 사료를 읽는 방법이며, 하나의 연구 주제를 다루는 동안 역사가에게 떠오르기 마련인 여러 가지 고민의 흔적이 여실하다. 가설을 설정하고, 사료를 살핀 후 그것을 수정ㆍ보완하는 작업 그리고 연구 도중 자신의 역사관을 성찰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책은 한 권의 역사책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정조와 강이천, 시대를 다르게 인식하다
18세기 조선, 불온한 상상력으로 물들다
18세기 조선에는 당시 지배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몇 가지 불온한 사조가 있었다. 첫째, 바다의 섬에서 진인眞人이 군대를 끌고 나타나 삽시간에 조선을 멸망시키고야 말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이러한 예언이 조선 사회에 횡행한 것은 오래 전부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독 심해진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였고, 더욱이 강이천과 같은 명류名流 출신이 예언에 빠져 감히 역모를 꿈꾸기까지 한 것은 정조 때였다.
둘째, 지배층이 이단으로 규정해 뿌리 뽑으려 한 천주교의 교세도 점차 확산 중이었다.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성리학이었다. 거기에 불교와 도교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유불선儒彿仙 삼교로는 채워지지 않는 문화적 갈망에 목말라 하던 일부 선비들이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천주교의 문을 두드리는 일이 잦아졌다.
셋째, 명말청초에 유행하던 ‘패관소품’을 즐기는 양반들 또한 늘어났다. 새로운 문예풍조였던 패관소품은 정조와 지배층에게는 골칫거리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 패관소품을 유행시킨 중국 작가들이 정통 성리학과는 거리가 먼 양명학자거나 고증학자로서, 전통적인 성리학이 표방해온 이념과 가치를 폄훼하는 불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패관소품은 가냘프고, 삐뚤어진 글이었다. 그런데 명나라가 망한 이유를 그러한 패관소품의 특징에 돌리는 이들이 많았다. 패관소품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는 수군거림이 널리 퍼진 것이다.
조선의 멸망을 점치는 예언의 만연, 왕이 아닌 천주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하는 새 종교의 전파, 성리학적 사고에 반기를 든 패관소품의 유행은, 국왕을 비롯한 보수지배층으로서는 묵과하기 어려운 혹세무민의 불온한 사조였다.
18세기, 새로운 기회의 시대인가 위기의 시대인가
저자는 이런 18세기 시대상황을 강이천과 정조가 정반대 쪽에서 바라봤다고 진단한다. 한 사람(강이천)은 새로운 기회의 시대로, 다른 사람(정조)은 위기의 시대로 인식했다는 주장이다. 강이천이 18세기 조선에서 변화의 희망을 찾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사회적 상상력’이 깨어난 까닭인데, 이것은 당시 조선사회의 문화적 변화에서 추동되었다 한다.
그러나 정조 입장은 달랐다. 왕은 18세기 조선의 위기담론을 앞장서 이끌었다. 저자는 정조가 강이천 등이 꿈꾼 이상사회를 ‘망상’ 또는 ‘공상’으로 치부하고 위험시했다고 말한다. 게다가 당시 이상사회에의 열망이 확산된 원인을 정조는 체제의 자체모순이 아니라 새로운 문학사조에서 찾았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소품문小品文’의 악영향이라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정조의 ‘소품문’ 퇴치 노력은 그러한 현실 진단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강이천 사건은 시대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파악한 양 진영의 충돌이었다.
두 주인공, 강이천과 정조
강이천, 새 세상을 꿈꾼 이상주의자
강이천은 ‘소북小北’을 대표하는 명가의 후예였다. 이름난 화가요 문인이었던 표암 강세황이 그의 할아버지였다. 시서화에 능한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강이천도 어려서부터 특출한 문학적 재능을 뽐냈다. 열두 살 되던 1779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궁궐에 들어가 시를 지어 왕의 칭찬까지 받았을 정도였다. 열일곱에는 벌써 진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강이천은 당대 사회가 요구하던 성리학 공부에 매몰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시대를 고뇌했다. 성리학 지상주의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이상을 키웠다. 그리고 운명이 자신을 완전히 추락시킬 때까지 이상을 향한 날갯짓을 계속했다.
그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더 이상 굶주리지도 않고 억울한 처지에 놓이지도 않는 사회를 꿈꿨다. 그것은 성리학적 이상주의자들이 꿈꾼 세계가 아니었다. 기성 체제가 용인하지 않는 새로운 사회, 조선 왕조가 ‘금지한’ 이상사회를 고민했다. 천주교의 천당 이론이 삼강오륜을 압도하는 사회, 사회적 약자가 문학과 역사의 주된 관심거리가 되는 문화, 공자와 맹자와 주자의 가르침이라도 당연히 검증을 거친 뒤라야 믿을 수 있다는 경험적 사고가 강이천의 머릿속에 여물어가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선 왕조가 금기시한 ‘사회적 상상력’의 분출이었다.
정조, 오래된 성리학 질서의 수호자
정조는 지적인 면에서 18세기의 어떤 성리학자보다 탁월했다. 그러나 정조가 새로운 정치이념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정치와 경제제도의 근본적인 혁신을 꾀한 적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개혁군주 정조의 한계는 명확했다.
정조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정통한 철인 설에 정치군주였지만 그의 능력은 기성 체제를 방어하는 쪽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성리학 지상사회의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그래서 장기간에 걸쳐 이단과 잡술을 상대로 ‘문화투쟁’을 벌였다. 왕은 해묵은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기성의 가치와 사회관습을 철저히 유지하려 했다.
1797년 11월 11일, 강이천 사건 벌어지다
강이천,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죄로 고발당하다
소년시절부터 장래가 촉망되었던 강이천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아치로서 평탄하게 살지 못하고 좌초한다.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죄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1797년 11월 1일, 우의정 이병모는 정조에게 한 유언비어 사건을 알린다. 천안에 사는 진사 강이천이 해적에 관한 불길한 유언비어를 퍼뜨려 시골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처음에는 이를 문제 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11월 11일, 사건 소식에 놀라 불안에 빠진 강이천이 자신을 이병모에게 고발한 김신국을 비롯해 친구 김려와 김건순까지 되레 고발하면서 사건은 확대된다.
정조는 사건을 형조에 맡겨 조사를 명한다. 사설邪說을 지어내고 비밀 호칭을 썼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역모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단순한 사기 사건처럼 처리하려 했다. 노론 명가인 안동김씨였던 김건순의 죄행은 덮어주고 나머지 사람들만 처벌하라 한 것이다.
형조로 이관된 사건은 하루 뒤인 11월 12일 마감된다. 김건순은 아예 심문조차 받지 않았고, 강이천과 김건순의 5촌 당숙인 김이백만 간단히 조사를 받는 선에서 수사가 종결된다. 김건순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고 사건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음을 눈치챈 조정 대신들은 그러한 수사 종결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강이천, 김이백, 김려의 귀양으로 사건 처리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정조 사망 뒤 이상겸, 목만중 등 대신들의 강이천 사건 재조사 요구가 잇따르고, 1801년 3월 16일 자수한 주문모 신부가 김건순, 강이천 등을 만난 사실을 언급하면서 사건의 재조사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강이천은 하옥되어 1801년 3월 29일 옥중에서 사망한다. 같은 해 4월 20일 김건순과 김이백 등도 처형된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강이천 사건의 공식적인 전말이다.
강이천 사건의 내막
그러나 저자는 《일성록》, 《노상추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통해 강이천 사건의 숨겨진 이면을 찾는다. 그의 눈길을 따라가 보자.
김려는 강이천과 성균관 입학시험인 승보시를 함께 치르고 성균관에서도 늘 같이 지낸 친구였다. 김건순은 김려와의 인연으로 강이천을 알게 된다. 김건순의 5촌 당숙으로 그의 집에서 식객처럼 지내기도 했던 김이백은 김건순과의 인연으로 강이천과 사제지간을 맺는다.
강이천 사건의 주요 인물들은 이렇게 인연을 맺어 당대의 여러 사안들을 토론한다. 1797년 8월에는 김려 형제의 주선으로 강이천, 김건순이 서울에서 만나 며칠 동안 깊은 토론을 한다. 강이천을 처음 만나고 난 직후 김건순은 서울에 숨어 있던 청국인 주문모 신부를 만나 천주교에 몰입한다. 곧이어 강이천과 김이백도 주문모 신부를 만난다. 이후 한 달여 동안 강이천과 김건순 등은 문학과 종교문답을 많이 나눈다.
1797년 10월에는 강이천이 김이백, 김신국, 김정신, 김종억 등을 집으로 불러 천주교를 소개한다. 당시 강이천은 조선의 멸망과 새 나라의 건국을 기대하며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를 꿈꾸고 있었다. 이 같은 조짐을 알아챈 김신국은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1797년 11월 1일 자신의 사촌형 김정국을 통해 강이천을 역모죄로 고발한다.
이때 김정국은 우의정 이병모가 아닌 조정 대신 김달순을 먼저 찾는다. 사건의 내막을 파악한 김달순은 이병모를 찾아가 사건 처리 방안을 조율한다. 자신이 속한 안동김씨 가문의 종손 김건순과 주문모 신부가 개입된 천주교 문제를 드러내지 말고 조용히 처리하는 편이 좋겠다는 〈밀계〉를 정조에게 올린 것은 이 같은 사전 조율의 결과다.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정조가 사건을 조용히 사기 사건으로 덮으려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새 세상을 향한 열망의 좌절
강이천, 시한폭탄 같은 존재
강이천은 그렇게 허망하게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상상력을 실현시키기엔 너무 짧은 생이었다.
정조를 위시한 지배층에게 강이천은 18세기 후반의 불온한 분위기를 한 몸에 지닌 ‘종합선물세트’였다. 시한폭탄이었다. 비록 정치력이나 조직력, 지도력이 출중하지는 못했지만 강이천이란 존재는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강이천의 내면세계가 여러 가지 불온한 사조로 뒤엉켜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지배층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던 문제의 핵심이었다. 예언과 천주교와 서양에 대한 기대와 패관소품의 애호가 종횡으로 얽히면 그것은 체제를 파괴하는 엄청난 폭발물이 될 수 있었다. 강이천의 가슴과 머릿속에 영글어가고 있던 새로운 사회를 향한 꿈이 바로 문제였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 개혁안으로서는 아직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종의 공상적 이상사회론이 강이천의 내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늘도 계속되는 문화투쟁 그리고 보수화
강이천과 그의 친구 및 추종자들은 대부분 조선 사회의 지식층이었다. 양반들이었다. 정조와 최고 지배층이 강이천 등에게서 즉각적인 위협을 느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그에게서 체제 위기의 불온한 기운을 감지했다. 정조가 강이천으로 상징되는 불량한 선비들을 상대로 ‘문화투쟁’을 펼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은 물론이고, 그 조치를 한 단계 더 강화시켰다. 중국 서적의 수입금지, 패관소품식 글쓰기의 금지를 넘어 과거시험에서 패관소품류를 완전히 추방했다. 불온한 문체를 연상시키는 글씨체까지 엄금했다. 철저한 사상통제요, 문화적 헤게모니의 장악을 위한 ‘문화투쟁’이었다.
정조의 문화투쟁은 다음 왕인 순조 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최상층 양반자제들 가운데서 강이천과 같은 부류의 젊은이들이 다시는 배출되지 않았다. 상상력의 분출구가 완전히 가로막힌 탓이었다. 조선 지배층의 체질은 더할 수 없이 보수화되었다. 결국 그들은 자력으로 도저히 사회개혁과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로써 사회개혁은 조선의 소수자 또는 평민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저자는 강이천 사건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의 우리 현실은 강이천이 살던 그때와 너무나 닮았다.”
▣ 작가 소개
저자 백승종
백승종은 1990년대부터 미시사의 실천운동에 전념해왔다. 그의 연구는 재량권, 생존전략 및 문화투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집약되는데 이 책은 문화투쟁에 관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연구는 주로 한국의 예언문화사에 집중된 결과,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2007),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2006), 《한국의 예언문화사》(2006) 등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미시사 연구의 이론과 방법을 탐구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역서 《미시사의 즐거움》(공역, 2003)과 《미시사와 거시사》(공역, 2001)는 그 과정에서 얻은 결실이다.
그는 미시사 연구를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가족 및 마을생활에 적용하고, 근현대 한국의 문화사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싶어 했다. 《조선의 통치철학》(공저, 2010)을 비롯해 The Stem Family in Eurasian Perspective(Population, Family, and Society/ Population, Famille Et Societe)(공저, 2009), 《대숲에 앉아 천명도를 그리네》(2003), 《그 나라의 역사와 말》(2002), 《동독 도편수 레셀의 북한추억》(2000), 《아버지 난 누구예요》(편저, 2000), 《한국사회사연구》(1996) 등에서 저자의 이러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1990년부터 저자는 국내외 여러 대학교 및 연구기관에 근무하며 강의와 연구에 종사했다. 독일의 튀빙겐대학교(재직기간 1990∼1999)를 시작으로, 서강대학교(1999∼2003), 프랑스 국립 고등사회과학원(2000), 독일 막스플랑크역사연구소(1995, 1996, 2001, 2002∼2003),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2004), 독일 보훔대학교(2003, 2009) 등 여러 곳을 거쳤다.
지난해부터 저자는 충청남도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한문고전과 독일어 성경을 가르치며, 마을사람들의 구술생애사 연구에 착수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강이천 사건 연보
1장 작업 가설-18세기 조선, 불온한 상상력으로 물들다
첫 인상
세 사람, 강이천과 김건순 그리고 정조
또 하나의 의문-천주교와 정감록
연구 성과의 탐색-스즈키의 〈조선 후기 천주교 사상과 ‘정감록’〉비평
가설: 강이천과 국왕 정조는 “문화투쟁”을 벌였다!
2장 사건 스케치-진사에서 불량선비로
유망선비와 불량선비의 갈림길에서
강이천 사건의 재구성
머릿속을 오가는 몇 가지 의문점
죄인들의 심문 현장으로
《일성록》 읽기-1797년 형조의 심문 기록 속으로
3장 정조의 사건 처리-소품을 박멸하라
문화투쟁이다!
소품과 천주교와 강이천 사건, 그 3자의 관계
소품이 사학으로 가니
정조의 “문체반정”, 어떻게 볼 것인가
천주교를 거론하지 마라
1790년대 조선 천주교회의 교리 지식과 교리서
4장 신유박해의 소용돌이에서
강이천 사건, 재연되다!
《노상추일기》에서 만난 강이천 사건
《추안급국안》에 드러난 강이천의 심문 전략
강이천과 김건순의 서울 회동
사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미궁에 빠지기 쉬운 역모 사건의 해석
강이천의 죽음, 어떻게 볼 것인가
자료 더 읽기: 주변인들의 최후 진술
5장 천주교와 김건순
김건순은 왜 천주교를 선택했는가
천주교와 지식인
서양 배와 천주교
역사학의 글쓰기
6장 여언餘言: 그들을 위하여
정조의 이념적 경직성, 고도로 계산된 통치 전략
강이천이라는 사람 그리고 그가 꿈꾼 세상
김려, 그와 강이천의 우정에 대하여
김건순을 말한다
소수자의 시선 - 김이백과 이주황과 김신국의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입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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