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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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프레드리크 스탠턴
출판사항말글빛냄, 발행일:2011/03/03
형태사항p.335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2114660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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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세계 현대사를 바꾼 위대한 8개의 협정
-미국 독립혁명에서 냉전시대까지-
소통은, 특히 외교관이나 정치인들 간의 소통은 역사를 만들기도 하고, 역사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 현대의 외교적 역량들은 소통을 통한 대결 구도의 해소를 위해 누가,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승리와 좌절로 점철되어왔다.
협상은 타결의사를 가진 2인 또는 그 이상의 당사자 사이에 양방향 의사소통을 통하여 상호 만족할만한 수준으로의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가 간의 협상은 한 나라의 운명을 바꾸기도 하고, 세계 지도를 다시 바꿔 놓기도 한다.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기회가 실패로 귀결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고, 합의는 국가 간의 힘의 논리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공한 협상들의 공통점은 힘보다는 이성에 의해 승리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러한 승리들은 협상 당사자들이 노련한 외교술과 결단력을 겸비하고, 자신의 국가를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독일의 군사 이론가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ousewitz는 “전쟁은 정치의 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협상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다. 탁월한 협상가들이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중요한 역할에 대해 알게 될수록, 그들의 업적이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오늘날까지 이용 가능한 정책적 대안들이 그들의 협상 결과의 영향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또한 협상의 결과는 미래를 전망하는 데 많은 지식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협상가들이 회담에서 초반의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한 상황으로 변화시키고 서로 상충되는 사항들을 조정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마치 마술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회담은 강ㆍ온 전략을 적절히 구사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탁월한 협상가들은 대립과 화해, 갈등과 타협 등과 같은 모순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이해관계가 크면 클수록 한 번의 실수가 엄청난 재앙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매국노로 낙인찍힐 수도 있다. 협상 당사자들은 위기에 처해 있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적 순발력을 발휘해야 하고, 불굴의 의지와 창의력, 엄포 등도 불사해야 한다. 또한 상대를 설득하고 전략적으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는 협상과 관련해 그들의 숭고함과 희생, 고무적인 대화 말고도,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과 수많은 배신, 흑색선전, 밀고, 심지어 암살 등과 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 왔다. 이 책에서는 협상가의 우유부단함, 강직함과 같은 개인적 성향이 역사의 중요한 기로에서 어떠한 결과를 야기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단서들도 엿볼 수 있다.
협상가들은 그들에게 닥친 수많은 난관을 헤쳐 나가면서 놀랄만한 성과를 이뤄낸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영토 매입이라는 유례가 없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역사의 물길을 바꿔 놓았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포츠머스조약을 중재하면서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또 한 차례의 세계대전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흐루시초프) 또한 핵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유럽, 아시아와 중동지역은 협상테이블에서 이루어진 결정들 때문에 그들의 운명이 바뀌어졌다. 또 미국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강대국으로의 부상은 외교적 협상들의 성공 때문에 가능했고, 그들의 군사력도 전쟁에 의해서라기보다 외교적 협상에 의해서 강화되었다. 현대사를 되돌아보면 미국 독립전쟁에서 냉전 시대까지 많은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 전쟁을 피하고,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숱한 협상들은 역사에 심오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협상가들이 서로 다른 상황과 문제들을 다루면서 분투하는 동안, 국민들도 경쟁 국가들에게서 보다 많은 양보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대표들을 성원하고 격려하면서 만족한 결과를 기대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외교 협상에서 필요한 끈기나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을 헤쳐 나가는 순발력 등의 외교 전략 패턴들을 배우게 된다.

이 책은 세계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던 8개의 협정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국가의 운명이 걸려있는 테이블에서 협상 당사자들이 이성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해 전쟁을 비롯한 인류에게 닥칠 수 있는 수많은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가는 외교적 노력들을 통해 그들의 국가관, 인간적인 고뇌와 연민 등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의 역사적 배경 또한 눈여겨 볼 수 있다. 국가의 협상은 늘 외교의 심장과 같이 없어서는 안 되는 외교술의 핵심적인 도구이다. 우리들이 과거에 있었던 외교 협상의 사례들을 많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국가 간의 첨예한 이견들을 해소하기 위해서 무력에 의존하려는 욕구들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독립혁명_미국과 프랑스 동맹
미국은 1776년 7월 독립을 선언했을 때, 미 대륙의 군대는 무기와 화약 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13개의 식민지의 대표로 구성된 대륙회의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에 맞서기 위해 벤저민 프랭클린을 대표로 한 미사절단을 프랑스에 보냈다. 프랑스도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영국의 부와 힘의 원천이었던 식민지 미국을 영국에서 떼어냄으로써, 그동안 쌓아왔던 양국 간의 원한을 갚고, 더 나아가서는 그토록 갈망했던 유럽에서의 세력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의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미국과 영국의 전투는 프랑스의 결정을 계속 미루게 했고, 이에 분노한 프랭클린은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해 영국 대표와의 회동을 갖는다. 이는 프랭클린의 의도된 행동으로, 프랑스 측에 미국이 영국과의 평화 협상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압박을 주기 위한 고도의 외교 술책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을 맺는다.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은 독립전쟁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고,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에 패배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원하는 동안 프랑스 연간 예산의 3배에 해당하는 10억 리브르 이상을 쏟아 부으면서 재정을 빚더미에 올려놓았고, 프랑스 왕실은 이러한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다. 결국 이것은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의 발단이 되었으며, 1793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참수되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영국이 미국의 요크타운에서 항복한 지 22년이 지난 뒤, 미합중국은 중요한 국제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1803년 프랑스는 비밀리에 스페인 왕실과 접촉하여 토스카나 공국과의 교환조건으로 루이지애나를 취득하게 되었다. 그 지역은 미시시피 강 상류에서부터 로키 산맥까지 뻗어있는 거대한 불모의 땅이었지만 나폴레옹은 그 지역에 신세계에서의 프랑스 제국의 중심지로 개발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미국 사절단의 제임스 먼로와 로버트 리빙스턴은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략적 긴장관계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나폴레옹을 설득하여 80만 평방마일에 달하는 루이지애나 영토를 6,000만 프랑(1,500만 달러)에 사들일 수 있었다. 루이지애나 매입은 미국의 지도를 한 순간에 변화시켰고, 북미대륙의 모든 식민지들을 미합중국의 울타리 속으로 집결시킬 수 있었다. 또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미국의 영토는 두 배로 확장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의 대열로 합류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어느 국가든 미시시피 지역을 차지하는 국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었고, 또 교환 조건으로 내세웠던 토스카나 공국을 아직도 통치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6,000만 프랑은 거저 굴러 들어온 돈이나 다름없었다. 이 행운 같은 매매로 막대한 재정 수입을 확보한 나폴레옹은 1814년 전쟁을 도발했고, 결국 동맹국들에게 패하여 엘바 섬으로 추방되었다.

**비엔나 회의
1814년, 지난 20년 동안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나폴레옹의 전쟁은 프랑스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4국 동맹(영국, 러시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은 힘의 균형을 도모하고 현안인 영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엔나 회의를 개최했다. 회의는 승전국들만 참석하는 회담으로 결정되었으나, 승전국들 간의 갈등과 이해관계의 충돌로 프랑스 외무장과인 탈레랑-페리고르도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탈레랑은 강대국들 간의 이견을 부추기고 이간시키면서 프랑스의 발언권을 강화해 나갔고,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이전의 영토를 온전히 보존해 프랑스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등 북쪽 대부분을 확보하면서 영토를 두 배로 늘렸고, 프로이센도 북유럽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보호아래 두게 되었으며, 영국은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인접한 영토를 흡수한 네덜란드를 영향력 하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비엔나 회의는 스위스를 중립국으로 만드는 등 대체로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유럽의 판도를 새로이 바꿔놓았으며, 군주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로써 유럽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까지 거의 100년 간 전쟁 없는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포츠머스 조약
1905년 여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러시아 대표들을 뉴햄프셔 주의 포츠머스로 초청해 러ㆍ일 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중재에 나선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극동의 전략적 가치로 보아 러시아와 일본이 각기 다른 유럽연맹과 동맹을 체결할 경우,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일본도 연일 계속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전력보다 3배나 강한 나라와의 전쟁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피 말리는 수십 차례의 협상 속에서 러시아의 대표 세르게이 위트의 협상력이 단연 돋보이는 회담이었다. 타고난 집요함과 일본 대표의 엄포와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그의 대담성, 그리고 인간적인 눈물은 일본 대표 고무라로부터 백기를 들게 했다. 이 합의로 양국은 적어도 수십만 명의 인명을 구했고, 일본은 조선, 요동반도와 사할린 남부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그 외에도 만주의 철도 지분과 러시아 북태평양 연안지역의 어업권도 획득했다. 러시아는 확전을 피할 수 있었으며, 일본이 점령했던 영토의 일부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일본은 협상에서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이 합의로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굳히고 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로 일본의 주식은 폭락했고, 모든 언론은 천황이 협정을 무효화시키고 공격명령을 내리도록 촉구했으며, 폭동이 일본전역을 휩쓸었다. 곧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일본 내각은 1906년 1월 총 사퇴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회담을 결렬시키라는 러시아 차르의 지시를 무시하고 협상 끝에 양보안을 얻어낸 위트에게 백작의 자격을 수여하면서 평화를 안겨준 데 대한 공로를 치하했다. 두 국가 사이에서 중재 협상을 벌였던 루스벨트 대통령은 평화를 가져온 공로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회담의 결과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이 바뀌었고, 미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위상을 내외에 과시하면서 세계 외교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파리 평화회의
1919년 독일과 4개 연합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간의 휴전은 제1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다. 지난 5년 동안의 전쟁은 지구 구석구석까지 그 흔적을 남겼고, 4천만 명의 희생자들은 유럽을 피로 물들였으며, 생존자들은 똑같이 평화협상에 한 가닥의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 유럽과 동맹국의 지도자들은 평화를 보장하기위한 규정들을 만들고, 피폐화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왔다. 초청된 국가는 모두 27개국으로 전 세계 4분의 3을 대표하는 중요한 회의였다. 그러나 연합국 간의 무조건적인 결속력은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각국의 이해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놓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따라서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국제연맹 창설에 관한 14개 원칙은 그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타협은 유럽의 약소국들과 중동을 재편성했고, 독일 일부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은 지도에서 거의 사라져 버리게 했다.
또 강대국의 무자비한 조치에 따라 패전국인 독일을 엄청난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독일은 영토의 13%와 인구의 10%에 이르는 7백만 명을 잃었으며, 탄광의 16%, 철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광산을 빼앗겼다. 독일의 식민지가 몰수되고 폴란드가 독립하면서 동 프로이센은 독일과 격리되었다. 독일이 참여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창출을 기치로 내걸었던 윌슨의 14개 원칙이 좌절되자 독일인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독일은 철저히 소외되고, 약화되고, 분노하고, 좌절했지만 결국에는 살아남았다. 따라서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이때 독일인들의 가슴에 부당함과 굴욕감을 안겨주면서 미리 예견되었다.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이전에 빼앗겼던 영토에 대한 미련과 갈망을 계속해서 간직해 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주변에 산재해 있던 소수 독일인들을 세력 확장의 디딤돌로 활용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파리 평화회의 때 영국대표들이 묵었던 마제스틱 호텔은 21년이 지난 후 독일 파리점령군 사령부로 징발되어 사용되었다.

**이집트-이스라엘 휴전협정
파리 평화회의의 결정대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1948년에 끝나고, 팔레스타인을 유태인이 거주하는 지역과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분리하자는 UN 안에 대한 협상이 실패하자, 이스라엘은 독립을 선포하고 이집트의 주도 하에 있는 인근 아랍국들을 공격했다. UN은 수차례의 휴전 종용이 효력이 없자 스웨덴 출신의 베르나도테를 협상중재자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는 2개월간의 휴전 중재 노력도 헛되이 예루살렘에서 암살되었다. 10월 중순 이스라엘은 집중공격을 개시하여 이집트 전선을 파괴했다. 일주일도 채 안되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남부지역을 점령한데 이어, 알팔루자에 있는 약 2,700명의 이집트 정예부대를 포위했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갈릴리 지역도 점령했다. UN안정보장이사회는 11월에 회의를 열어 전투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휴전협상을 개시할 것을 촉구했으나 양국이 이를 거부했다.
12월 10일, 이집트는 알팔루자에 있는 정예부대를 탈환하기위해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스라엘군은 이를 격퇴하고 이집트군을 시나이 반도 쪽으로 몰아냈다. 양국 간의 전투로 1만 명 이상의 사망자와 5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의 대열이 줄을 이루고, 미국, 영국과 UN의 결정적인 압력을 받고서야 휴전협상에 동의한다. UN은 휴전 협상중재자로 미국출신의 랠프 번치를 파견한다. 처음에 양국의 협상 대표들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악수는커녕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표들은 공식회담 장소에서 의자에도 앉지 않고 회담이 끝날 때까지 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어려운 협상을 번치는 약 70일 동안 끈기와 인내로 중계역할을 한 끝에 양국 대표들을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만들었고 급기야 협정서에 서명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휴전협정은 이집트와 싸웠던 135평방마일에 효력이 미쳤는데 그중 약 100평방마일은 중립지역으로 남겨졌고, 나머지는 이스라엘에 넘겨졌다. 알팔루자의 병력은 안전하게 철수했고, 그 사단의 부사단장이던 나세르는 훗날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었다. 30년 후 캠프데이비드 협정 때까지 휴전 협정은 잘 지켜졌고, 중동에서의 유일하게 의미 있는 외교적 노력 끝에 이뤄진 성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탁월한 협상중재로 무려 30년간 중동의 평화를 가져왔던 랠프 번치는 1950년 처칠과 같은 거물을 물리치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었다. 그는 미국 흑인으로서는 첫 노벨평화상 수상자였고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위기의 발단은 1959년 카스트로의 공산당 정권이 탄생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플로리다 해안에서 불과 9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서쪽지역에 공산당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부심했다. 1961년 4월, 쿠바에서 탈출한 망명자들로 구성된 1,200명의 특공대들이 피그스 만을 침공 했지만 모두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소련서기장 흐루쇼프는 미국이 곧 쿠바를 공격할 것을 예상, 그의 동맹국을 보호하기위해 1962년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미국의 U-2기에 의해 관측된 쿠바 핵미사일 기지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뒤이어 케네디 대통령의 해상봉쇄가 시작되고 급기야 미ㆍ소 간의 일촉즉발의 위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어느 국가가 선제공격을 하든, 방어공격을 하든 양국 간의 수백만 명의 희생자는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른 두 지도자는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물밑 협상, 공개적인 협상을 통한 극적인 타협으로 인류를 핵전쟁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 이 사건으로 보면 협상만으로도 인류의 대재앙까지도 피해나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인류를 절멸시킬 수도 있는, 인류가 만든 가공할 만한 핵무기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을 비추어보면, 케네디의 특별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말대로 “이러한 위험한 무기들을 하나라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쿠바위기를 넘기고 24년이 지난 후, 미ㆍ소 양국의 핵 보유량은 20배나 증가하였다. 양국 모두 발사명령 몇 분 안에 발사가 가능하도록 준비 되어있었다. 바야흐로 세계는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의 절멸이라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강대국들은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제한, 핵탄두 장착용 탄도 미사일의 제한 등과 같은 전략무기 감축협상을 다루기 위해, 수차례 회담을 가져봤지만 성과는 거의 없었다.
미ㆍ소 정상은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따라 1986년 12월 11일∼12일 이틀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전략무기 감축에 관한 회담을 열었다. 소련은 ICBM(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포함한 전략무기를 절반으로 감축하자고 제의하면서 미국도 ABM(탄도탄 요격미사일)금지조약을 향후 10년간 유지 하겠다는 약속을 요구했다. 소련의 또 다른 목적은 미국이 유럽에 배치한 퍼싱II를 비롯한 중거리 미사일의 철수와 우주 배치 정찰 시스템 개발인 SDI(미국 전략방위계획)의 제한이었다.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은 ABM 금지조약은 양보할 수 있었으나 SDI를 연구실에서만 수행하자는 SDI 제한 요구는 거절했다. 소련은 그때 SDI와 같은 우주에서의 요격체제를 개발하고 있었다. 소련의 기술은 미국에 비해 훨씬 떨어져 있어, 레이건은 미국이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SDI 개발 작업을 계속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동안 소련의 수차례 조약 파기를 경험했기 때문에 레이건에게는 최소한 SDI라는 보호 장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이 회담은 SDI로 인해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협상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두 강대국 정상들이 지구상의 모든 핵무기들을 파기하기위해 노력했던 의미 있는 회담이었고, 또 이 노력은 냉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슐츠장관과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레이캬비크에서 이미 합의를 본 내용들을 보완하는 작업을 계속했고 두 정상이 언제라도 서명할 수 있도록 문서화했다. 1987년 2월, 드디어 고르바초프는 SDI 제한 요구를 철회했고, 단거리 탄도 미사일 파기하겠다고 동의했다. 그해 말, 레이건도 ABM 금지조약에 서명했으며,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은 그로부터 4년 뒤에 이루어졌다. 1991년 7월 31일 레이건 대통령의 후임인 조지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는 START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의 기본적인 제안들은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마련한 것들이었고, 이 협정으로 양국의 핵무기는 절반으로 감축되었으며, 최소한 양국에서 5,000개의 핵탄두들과 1,600기의 미사일과 장거리 폭격기들이 파기되었다. 이 협정이 서명된 후 5개월째 되는 크리스마스 날, 소련은 붕괴되어 12개의 독립국가로 나뉘어졌으며, 동ㆍ서 베를린 장벽도 막을 내렸다.

▣ 작가 소개

저자 프레드리크 스탠턴Fredrik Stanton
컬럼비아대학 신문의 전신이었고, 지금은 지역 신문으로 독립한 Columbia Daily Spectator의 발행인 겸 대표를 지냈다, 그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공화국, 보스니아, 코소보와 아제르바이잔에서 UN 선거 감시단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보스턴 헤럴드와 유엔협회 산하 기관인 ‘Global Agenda’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역자 김춘수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제주도에 거주하면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마오의 제국>이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독립혁명_ 미국과 프랑스 동맹, 1778년
2장) 루이지애나 매입, 1803년
3장) 비엔나 회의, 1814-1815년
4장) 포츠머스 조약, 1905년
5장) 파리 평화회의, 1919년
6장) 이집트-이스라엘 휴전협정, 1949년
7장)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8장) 레이캬비크 정상회담,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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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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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취소반품 불가 사유
  • 단순변심으로 인한 반품 시, 배송 완료 후 7일이 지나면 취소/반품 신청이 접수되지 않습니다.
  • 주문/제작 상품의 경우, 상품의 제작이 이미 진행된 경우에는 취소가 불가합니다.
  • 구성품을 분실하였거나 취급 부주의로 인한 파손/고장/오염된 경우에는 취소/반품이 제한됩니다.
  • 제조사의 사정 (신모델 출시 등) 및 부품 가격변동 등에 의해 가격이 변동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반품 및 가격보상은 불가합니다.
  • 뷰티 상품 이용 시 트러블(알러지, 붉은 반점, 가려움, 따가움)이 발생하는 경우 진료 확인서 및 소견서 등을 증빙하면 환불이 가능하지만 이 경우, 제반 비용은 고객님께서 부담하셔야 합니다.
  • 각 상품별로 아래와 같은 사유로 취소/반품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환불불가
상품군 취소/반품 불가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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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상품/식품/화장품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가전/설치상품 전자제품 특성 상, 정품 스티커가 제거되었거나 설치 또는 사용 이후에 단순변심인 경우, 액정화면이 부착된 상품의 전원을 켠 경우 (상품불량으로 인한 교환/반품은 AS센터의 불량 판정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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