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역사의 전환점마다 그 이면에는 언제나 용병이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 용병
매춘 다음으로 용병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다. 용병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그야말로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용병은 고용주를 가리지 않는다. 보수만 준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보수는 토지도 아니고 명예는 더더욱 아니다. 오로지 현금뿐이었다. 그리고 군복무가 끝나면 어제까지 적이었던 편에서 다시 일하는 것조차 사양하지 않았다. 권력에 좌우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원래 권력이란 것을 경멸하기 때문에 그런 권력에 자기 인생을 바치는 충성심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이것이 란츠크네흐트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용병이었다. 적어도 란츠크네흐트는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 싶어, 주인이 따로 없다는 자부심과 각오로 살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용병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권력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충성심과는 관계없이 싸워온 용병 자신들 덕분이었다. 강력한 권력은 용병들에게서 ‘주인이 따로 없다’ 는 자부심과 각오를 빼앗았다. 고향 주정청의 뻔뻔한 돈벌이로 전투에서 형제가 서로 죽이는 짓을 해야 했던 스위스 용병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용병다운 기반이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유럽 용병은 자유전사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거대 권력에 징발되어 어딘가 이국으로 팔려가는 용병노예 같은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스위스 용병의 비극
유럽 최대의 경제위기인 14세기, 기사들에게도 위기가 덮쳤고 기사들은 현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아다녔다. 영주를 위한 군역을 금전으로 대납하고 그 자신들은 기사용병으로서 돈을 벌어들였다.
십자군원정이 끝나고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전투 병력은 마침내 금맥을 발견했다. 도시국가들이 항쟁하던 14세기의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용병대장의 시대였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탕아들이 오로지 흉포한 에너지가 날뛰는 대로 음모, 암살, 배반, 간통을 일삼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었다.
바로 그럴 때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침략해오자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에 빠졌다. 그것은 프랑스 기사군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프랑스군에 섞여 있는 다수의 용병, 특히 보병의 중심을 이루는 스위스 장창(長槍)부대였다.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힘차게 리듬을 타는 행진 방식, 원시적인 무대뽀 습관, 용맹함과 잔인함이 가득한 전장에서의 외침 소리 등, 스위스 장창부대원들은 세련된 르네상스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 눈에는 말과 행동, 그 무엇 하나도 경악하게 만드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인 것이다.
척박한 산간 지역에서 자란 덕택에 하체가 단련된 강건한 남자들이 일할 곳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돈 벌러 타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당시 대규모의 고용을 보장하는 최대의 산업은 단연 전쟁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스위스의 남자들은 용병이 되었다. 일할 데가 없는 건강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용병 모집에 응했고,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야말로 ‘피의 수출’인 것이다.
그러난 스위스 각 주정청은 전쟁 양측에 모두 스위스 병사를 팔아넘겼고 급기야 스위스 병사끼리 전투까지 벌어지게 된다. 스위스 병사는 자신의 조국 정부에 ‘배반당하고 팔려간 것’이다.
독일 용병 란츠크네흐트의 등장
15세기 말~17세기 동안 약 2백년에 걸쳐 유럽의 전장뿐 아니라 신대륙 남미를 포함해 세계 도처에 나타나 사람들을 떨게 한, 군사 역사상 매우 특이한 군사 조직인 란츠크네흐트이 등장한다. “란츠크네흐트는 복장과 무기 면에서 스위스 용병부대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다채로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특히 그 복장은 괴이하기까지 했다.
란츠크네흐트는 군 당국으로부터 관리 통제를 받지 않는 자신들만의 자치 조직을 갖고 있었다. 병사 집회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기능을 하며 급료의 미지급에 대한 항의, ‘돌격 수당’ 같은 특별 수당의 획득, 약탈품의 공동 분배 등, 공동 결정권을 행사하며 군 당국의 온갖 부정행위를 감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란츠크네흐트 부대는 군 역사상 보기 드물게 민주적인 군대였다.
전쟁기업가 용병대장, 그들은 누구인가?
그럼 이처럼 특수한 군대인 란츠크네흐트 부대를 이끄는 연대장, 즉 전쟁기업가인 용병대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병사들에게 있어서 연대장은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기업가였지만 그렇다 해도 연대장이 있고 나서야 병사들이 있는 것이다. 부대 내에서의 재판권, 전투 중의 작전지휘 등, 연대장은 그야말로 병사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병사들은 연대장의 고용주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이 어느 나라의 군주건, 적이 누구건, 누구를 위한 전쟁이건 전혀 관심 없었다. 오로지 어느 연대장을 따라가야 급료를 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고, 많은 약탈품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많은 수의 용병대장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위험시되고, 반대로 전투 운이 나쁘면 곧장 해고되었다. 언뜻 화려하게 보이지만 용병대장들이 서 있는 곳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과 같았다.
그래서 용병대장들은 생각했다. 매사에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즉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 맞붙은 용병대장들은 미리 짜고서 싸움을 질질 끌었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밀집대형을 짜지 않고 흩어져서 전선에 돌입하는 이탈리아식 공격 방법에 대해 작은 전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라며 통렬히 비난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판 전쟁게임이었다.
용병대장 호크우드는 돈에 대한 집념에서는 누구 못지 않았다. 영국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평소 좋지 않은 행실로 인해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흘러들어간 후 이탈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두 명의 수도사가 “신이 당신에게 평화를 내리시기를!”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호크우드는 “신이 베푸신 너희들의 양식을 다시 거둬들여 뒈져버리기를! 이 빌어먹을 놈들아, 신이 나에게 평화를 내리면 나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라고 소리쳤다.
용병대장은 “전쟁은 전쟁에서 영양을 섭취한다”라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자금회수 방법을 발견했다. 즉 승리한 쪽이 벌이는 일상적인 약탈보다 그 몇 배 규모로 약탈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용병대장 뒤에는 자금을 대는 민간 투자가가 있었다.
일본에도 용병이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나타났다. 약 10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으로 건너갔고, 그리고 돌아온 병사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렇다면 돈에 굶주린 병사들이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스페인의 마닐라 총독은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에게 일본인 용병의 위험성을 보고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같은 동양무역의 선두주자와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주자가 격돌하고 있던 전장이었다. 양측 모두 용맹을 떨치고 있는 일본인 용병을 몹시 원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 곳곳을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는 1621년 일본인 용병의 해외 진출을 금지했다. 또한 무기 수출입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유력한 병참지가 되는 것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것은 유럽 각국의 치열해진 식민지전쟁에 일본이 휩쓸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스위스 용병을 특히 총애했는데, 그가 어린 시절 연못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스위스 호위병이 구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루이 14세 때 스위스 인구는 약 90만 명이었고, 그 중 12만 명이 프랑스군을 위해 일했다. 따라서 스위스 병사는 프랑스의 단순한 용병이라기보다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급료를 받는 동맹자나 다름없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세력은 왕이 사는 튈르리 궁전으로 돌격했다. 이때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병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멸했다. 그리고 열흘 후 프랑스에 상주하던 스위스연대 4만 명의 병사가 해고되었다. 약 3백 년에 걸쳐 프랑스군의 중추를 담당한 스위스 용병부대가 프랑스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파리로 진격하던 혁명군 속에서 갑작스레 “프랑스 국민 만세!”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프랑스 국왕 만세!”가 아니라 틀림없이 “프랑스 국민 만세!”였다.
외침소리는 순식간에 프랑스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때 처음으로 ‘조국 아니면 죽음’을 의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이 탄생했다. 즉 이때부터 프랑스의 전쟁은 왕가에 의한 왕조전쟁이 아닌 국민전쟁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용병부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탄생
7월혁명(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루이 필리프 시대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였다. 유럽 각국에서 내란이 일어나 망명객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사회는 불안했고 알제리에서는 식민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의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골치아픈 망명객, 도피자들, 부랑자들 그리고 군대가 해체되어 불만에 차 있던 군인들을 모아 ‘외인부대’를 만들어 알제리로 보내 싸우게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부대의 당초 목적은 당시 프랑스가 손에 넣은 식민지 알제리의 점령 정책을 위해서였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외인부대 병사들은 병사인 동시에 도로 공사장의 인부이기도 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격심한 추위 속에서 병사들은 전투가 없을 때는 카빈총을 옆에 두고 도로 공사에 종사했다. 프랑스 정규군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인부대를 지휘하며 주로 알제리 전선에서 싸웠던 프랑스인 장군들은 ‘아프리카 촌놈’이라고 멸시당하며 군의 핵심에서 늘 밀려났다.
현대의 용병들
최근 리비아의 시민혁명에 가다피는 용병 3000명을 투입해 반정부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전장은 용병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돈벌이 장소이다. 현대의 용병들은 예전처럼 먹고살기 위해서만 용병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굳이 사지로 향하는 것은 자신들 몸에 깃들어 있는 모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전장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한 곳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서글픈 인간들인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기쿠치 요시오(菊池良生)
1948년, 이바라키현에서 출생.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메이지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전공은 오스트리아 문학, 주 연구 테마는 독일?오스트리아 문화사이며 특히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다. 유럽 근대, 합스부르크가, 용병제 등의 주제로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영광≫ ≪싸우는 합스부르크가≫ ≪합스부르크를 만든 남자≫ ≪이카로스의 추락≫ ≪개의 죽음≫ 등이 있다.
역자: 김숙이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역서로 ≪기적의 화술≫ ≪최근 100년의 세계사≫ ≪마흔에서 쉰, 그 짧은 사이≫
≪결심의 기술≫ ≪골프가 내 몸을 망친다≫ ≪아줌마 경제학≫ ≪감염≫
≪감정 정리의 기술≫ ≪여성의 품격≫ ≪아프리카의 눈물≫ 등 30여권.
▣ 주요 목차
제1장 크세노폰의 도주극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
크세노폰의 만인대
아테네의 쇠퇴와 용병의 발생
제2장 팍스 로마나의 종말
병역은 로마 시민의 긍지
시민군에서 지원병제로
용병의 시대가 시작되다
오도아케르의 권력찬탈
제3장 기사의 시대
전사계급의 탄생
아르바이트에 열심인 용병기사들
기사용병 시장의 탄생
악명 높은 용병기사단
제4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 용병대장
한 나라의 운명을 움켜쥔 용병대장
국장으로 치러진 용병대장
도시국가, 용병에 의존하다
용병대장에서 밀라노 공작으로
용병들의 사기극 전쟁
상비군 같은 용병부대
전쟁을 바꾼 스위스 장창부대
제5장 피의 수출
기병군의 대패
스위스 서약동맹의 발족
타지로 나간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
부르고뉴 전쟁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
노바라의 배반
제6장 란츠크네흐트의 등장
막시밀리안 1세와 남독일 용병부대
란츠크네흐트의 고향
란츠크네흐트 vs 스위스 용병부대
‘자유’야말로 우리의 정체성
란츠크네흐트의 병사 모집
역사상 보기 드문 민주적인 군대
주보상인의 존재
전쟁기업가 용병대장의 자격
란츠크네흐트의 아버지
파비아 전투
제7장 끝없이 이어지는 사악한 전쟁
독일농민전쟁
사코 디 로마
남미까지 사악한 전쟁을 수출하다
란츠크네흐트의 악명
용병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6세기 유럽
제8장 란츠크네흐트 붕괴의 시작
스페인 제국의 생명줄
네덜란드 독립전쟁
마우리츠의 네덜란드 군제개혁
보병?기병?포병의 확립
네덜란드의 약진
제9장 국가권력의 앞잡이가 된 용병
독일 30년전쟁과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
보헤미아의 반란
갑옷과 투구를 입은 거지
15만 명의 군대를 조직한 용병대장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제개혁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과 발렌슈타인의 암살
‘국가의식’과 용병의 지위 저하
제10장 태양왕의 용병들
프랑스 절대왕조의 탄생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와 스위스 용병
낭트칙령의 폐지와 위그노 유출
와일드 기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스위스 용병의 비극
제11장 용병의 슬픈 역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
프로이센군의 병사 사냥
아메리카로 팔려간 독일 용병
횡행한 병사 사냥
제12장 살아남은 용병
국민군의 탄생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피의 수출’ 금지
프랑스 외인부대의 탄생
외인부대를 지원하는 사람들
현대의 용병들
역사의 전환점마다 그 이면에는 언제나 용병이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 용병
매춘 다음으로 용병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다. 용병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그야말로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용병은 고용주를 가리지 않는다. 보수만 준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보수는 토지도 아니고 명예는 더더욱 아니다. 오로지 현금뿐이었다. 그리고 군복무가 끝나면 어제까지 적이었던 편에서 다시 일하는 것조차 사양하지 않았다. 권력에 좌우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원래 권력이란 것을 경멸하기 때문에 그런 권력에 자기 인생을 바치는 충성심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이것이 란츠크네흐트로 대표되는 16세기의 용병이었다. 적어도 란츠크네흐트는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잊고 싶어, 주인이 따로 없다는 자부심과 각오로 살고 있다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용병들이 그토록 경멸하는 권력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 그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충성심과는 관계없이 싸워온 용병 자신들 덕분이었다. 강력한 권력은 용병들에게서 ‘주인이 따로 없다’ 는 자부심과 각오를 빼앗았다. 고향 주정청의 뻔뻔한 돈벌이로 전투에서 형제가 서로 죽이는 짓을 해야 했던 스위스 용병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용병다운 기반이 무너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유럽 용병은 자유전사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거대 권력에 징발되어 어딘가 이국으로 팔려가는 용병노예 같은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스위스 용병의 비극
유럽 최대의 경제위기인 14세기, 기사들에게도 위기가 덮쳤고 기사들은 현금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찾아다녔다. 영주를 위한 군역을 금전으로 대납하고 그 자신들은 기사용병으로서 돈을 벌어들였다.
십자군원정이 끝나고 졸지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전투 병력은 마침내 금맥을 발견했다. 도시국가들이 항쟁하던 14세기의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용병대장의 시대였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탕아들이 오로지 흉포한 에너지가 날뛰는 대로 음모, 암살, 배반, 간통을 일삼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었다.
바로 그럴 때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지금껏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침략해오자 몸이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에 빠졌다. 그것은 프랑스 기사군이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프랑스군에 섞여 있는 다수의 용병, 특히 보병의 중심을 이루는 스위스 장창(長槍)부대였다. 피리와 북소리에 맞춰 힘차게 리듬을 타는 행진 방식, 원시적인 무대뽀 습관, 용맹함과 잔인함이 가득한 전장에서의 외침 소리 등, 스위스 장창부대원들은 세련된 르네상스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 눈에는 말과 행동, 그 무엇 하나도 경악하게 만드는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보인 것이다.
척박한 산간 지역에서 자란 덕택에 하체가 단련된 강건한 남자들이 일할 곳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돈 벌러 타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당시 대규모의 고용을 보장하는 최대의 산업은 단연 전쟁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스위스의 남자들은 용병이 되었다. 일할 데가 없는 건강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용병 모집에 응했고,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야말로 ‘피의 수출’인 것이다.
그러난 스위스 각 주정청은 전쟁 양측에 모두 스위스 병사를 팔아넘겼고 급기야 스위스 병사끼리 전투까지 벌어지게 된다. 스위스 병사는 자신의 조국 정부에 ‘배반당하고 팔려간 것’이다.
독일 용병 란츠크네흐트의 등장
15세기 말~17세기 동안 약 2백년에 걸쳐 유럽의 전장뿐 아니라 신대륙 남미를 포함해 세계 도처에 나타나 사람들을 떨게 한, 군사 역사상 매우 특이한 군사 조직인 란츠크네흐트이 등장한다. “란츠크네흐트는 복장과 무기 면에서 스위스 용병부대보다 훨씬 낭만적이고 다채로웠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특히 그 복장은 괴이하기까지 했다.
란츠크네흐트는 군 당국으로부터 관리 통제를 받지 않는 자신들만의 자치 조직을 갖고 있었다. 병사 집회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비슷한 기능을 하며 급료의 미지급에 대한 항의, ‘돌격 수당’ 같은 특별 수당의 획득, 약탈품의 공동 분배 등, 공동 결정권을 행사하며 군 당국의 온갖 부정행위를 감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란츠크네흐트 부대는 군 역사상 보기 드물게 민주적인 군대였다.
전쟁기업가 용병대장, 그들은 누구인가?
그럼 이처럼 특수한 군대인 란츠크네흐트 부대를 이끄는 연대장, 즉 전쟁기업가인 용병대장은 어떤 사람들일까?
병사들에게 있어서 연대장은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피를 빨아먹는 악덕 기업가였지만 그렇다 해도 연대장이 있고 나서야 병사들이 있는 것이다. 부대 내에서의 재판권, 전투 중의 작전지휘 등, 연대장은 그야말로 병사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병사들은 연대장의 고용주가 누구건 상관하지 않았다. 최고사령관이 어느 나라의 군주건, 적이 누구건, 누구를 위한 전쟁이건 전혀 관심 없었다. 오로지 어느 연대장을 따라가야 급료를 밀리지 않고 받을 수 있고, 많은 약탈품을 얻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
많은 수의 용병대장이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위험시되고, 반대로 전투 운이 나쁘면 곧장 해고되었다. 언뜻 화려하게 보이지만 용병대장들이 서 있는 곳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과 같았다.
그래서 용병대장들은 생각했다. 매사에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즉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 맞붙은 용병대장들은 미리 짜고서 싸움을 질질 끌었다. 이를 두고 마키아벨리는 “밀집대형을 짜지 않고 흩어져서 전선에 돌입하는 이탈리아식 공격 방법에 대해 작은 전투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라며 통렬히 비난했다. 그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판 전쟁게임이었다.
용병대장 호크우드는 돈에 대한 집념에서는 누구 못지 않았다. 영국의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평소 좋지 않은 행실로 인해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흘러들어간 후 이탈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두 명의 수도사가 “신이 당신에게 평화를 내리시기를!” 하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자 호크우드는 “신이 베푸신 너희들의 양식을 다시 거둬들여 뒈져버리기를! 이 빌어먹을 놈들아, 신이 나에게 평화를 내리면 나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라고 소리쳤다.
용병대장은 “전쟁은 전쟁에서 영양을 섭취한다”라는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자금회수 방법을 발견했다. 즉 승리한 쪽이 벌이는 일상적인 약탈보다 그 몇 배 규모로 약탈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용병대장 뒤에는 자금을 대는 민간 투자가가 있었다.
일본에도 용병이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나타났다. 약 10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으로 건너갔고, 그리고 돌아온 병사들은 갈 곳을 잃었다. 그렇다면 돈에 굶주린 병사들이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린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스페인의 마닐라 총독은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에게 일본인 용병의 위험성을 보고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같은 동양무역의 선두주자와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주자가 격돌하고 있던 전장이었다. 양측 모두 용맹을 떨치고 있는 일본인 용병을 몹시 원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 곳곳을 휩쓸고 다녔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는 1621년 일본인 용병의 해외 진출을 금지했다. 또한 무기 수출입 금지령을 내리고 일본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유력한 병참지가 되는 것도 완강히 거부했다. 그것은 유럽 각국의 치열해진 식민지전쟁에 일본이 휩쓸릴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과 루이 14세
루이 14세는 스위스 용병을 특히 총애했는데, 그가 어린 시절 연못에 빠져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스위스 호위병이 구해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루이 14세 때 스위스 인구는 약 90만 명이었고, 그 중 12만 명이 프랑스군을 위해 일했다. 따라서 스위스 병사는 프랑스의 단순한 용병이라기보다 프랑스 국왕으로부터 급료를 받는 동맹자나 다름없었다.
1792년 8월 10일, 프랑스 혁명세력은 왕이 사는 튈르리 궁전으로 돌격했다. 이때 튈르리 궁전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병은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멸했다. 그리고 열흘 후 프랑스에 상주하던 스위스연대 4만 명의 병사가 해고되었다. 약 3백 년에 걸쳐 프랑스군의 중추를 담당한 스위스 용병부대가 프랑스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파리로 진격하던 혁명군 속에서 갑작스레 “프랑스 국민 만세!”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프랑스 국왕 만세!”가 아니라 틀림없이 “프랑스 국민 만세!”였다.
외침소리는 순식간에 프랑스 전군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이때 처음으로 ‘조국 아니면 죽음’을 의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럽 역사상 최초의 ‘국민군’이 탄생했다. 즉 이때부터 프랑스의 전쟁은 왕가에 의한 왕조전쟁이 아닌 국민전쟁이 된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용병부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의 탄생
7월혁명(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으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왕좌에 오른 루이 필리프 시대는 극도로 혼란한 시대였다. 유럽 각국에서 내란이 일어나 망명객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었다. 사회는 불안했고 알제리에서는 식민지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의 군대를 파견하기에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골치아픈 망명객, 도피자들, 부랑자들 그리고 군대가 해체되어 불만에 차 있던 군인들을 모아 ‘외인부대’를 만들어 알제리로 보내 싸우게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부대의 당초 목적은 당시 프랑스가 손에 넣은 식민지 알제리의 점령 정책을 위해서였다.
아프리카에 주둔하는 외인부대 병사들은 병사인 동시에 도로 공사장의 인부이기도 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격심한 추위 속에서 병사들은 전투가 없을 때는 카빈총을 옆에 두고 도로 공사에 종사했다. 프랑스 정규군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인부대를 지휘하며 주로 알제리 전선에서 싸웠던 프랑스인 장군들은 ‘아프리카 촌놈’이라고 멸시당하며 군의 핵심에서 늘 밀려났다.
현대의 용병들
최근 리비아의 시민혁명에 가다피는 용병 3000명을 투입해 반정부군을 공격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전장은 용병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돈벌이 장소이다. 현대의 용병들은 예전처럼 먹고살기 위해서만 용병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굳이 사지로 향하는 것은 자신들 몸에 깃들어 있는 모험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전장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한 곳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들은 한편으로는 서글픈 인간들인 것이다.
▣ 작가 소개
저자: 기쿠치 요시오(菊池良生)
1948년, 이바라키현에서 출생.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메이지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전공은 오스트리아 문학, 주 연구 테마는 독일?오스트리아 문화사이며 특히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다. 유럽 근대, 합스부르크가, 용병제 등의 주제로 연구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영광≫ ≪싸우는 합스부르크가≫ ≪합스부르크를 만든 남자≫ ≪이카로스의 추락≫ ≪개의 죽음≫ 등이 있다.
역자: 김숙이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역서로 ≪기적의 화술≫ ≪최근 100년의 세계사≫ ≪마흔에서 쉰, 그 짧은 사이≫
≪결심의 기술≫ ≪골프가 내 몸을 망친다≫ ≪아줌마 경제학≫ ≪감염≫
≪감정 정리의 기술≫ ≪여성의 품격≫ ≪아프리카의 눈물≫ 등 30여권.
▣ 주요 목차
제1장 크세노폰의 도주극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직업
크세노폰의 만인대
아테네의 쇠퇴와 용병의 발생
제2장 팍스 로마나의 종말
병역은 로마 시민의 긍지
시민군에서 지원병제로
용병의 시대가 시작되다
오도아케르의 권력찬탈
제3장 기사의 시대
전사계급의 탄생
아르바이트에 열심인 용병기사들
기사용병 시장의 탄생
악명 높은 용병기사단
제4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꽃 용병대장
한 나라의 운명을 움켜쥔 용병대장
국장으로 치러진 용병대장
도시국가, 용병에 의존하다
용병대장에서 밀라노 공작으로
용병들의 사기극 전쟁
상비군 같은 용병부대
전쟁을 바꾼 스위스 장창부대
제5장 피의 수출
기병군의 대패
스위스 서약동맹의 발족
타지로 나간 용병은 스위스 최대의 산업
부르고뉴 전쟁
사악한 전쟁(마라 그에라)
노바라의 배반
제6장 란츠크네흐트의 등장
막시밀리안 1세와 남독일 용병부대
란츠크네흐트의 고향
란츠크네흐트 vs 스위스 용병부대
‘자유’야말로 우리의 정체성
란츠크네흐트의 병사 모집
역사상 보기 드문 민주적인 군대
주보상인의 존재
전쟁기업가 용병대장의 자격
란츠크네흐트의 아버지
파비아 전투
제7장 끝없이 이어지는 사악한 전쟁
독일농민전쟁
사코 디 로마
남미까지 사악한 전쟁을 수출하다
란츠크네흐트의 악명
용병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6세기 유럽
제8장 란츠크네흐트 붕괴의 시작
스페인 제국의 생명줄
네덜란드 독립전쟁
마우리츠의 네덜란드 군제개혁
보병?기병?포병의 확립
네덜란드의 약진
제9장 국가권력의 앞잡이가 된 용병
독일 30년전쟁과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
보헤미아의 반란
갑옷과 투구를 입은 거지
15만 명의 군대를 조직한 용병대장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제개혁
구스타프 아돌프의 죽음과 발렌슈타인의 암살
‘국가의식’과 용병의 지위 저하
제10장 태양왕의 용병들
프랑스 절대왕조의 탄생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와 스위스 용병
낭트칙령의 폐지와 위그노 유출
와일드 기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스위스 용병의 비극
제11장 용병의 슬픈 역사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프리드리히 대왕의 군대
프로이센군의 병사 사냥
아메리카로 팔려간 독일 용병
횡행한 병사 사냥
제12장 살아남은 용병
국민군의 탄생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피의 수출’ 금지
프랑스 외인부대의 탄생
외인부대를 지원하는 사람들
현대의 용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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