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다산의 후반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후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정조 치하 초계문신으로서 승승장구하던 다산의 운명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01년 11월, 다산은 천주학쟁이라는 죄목의 칼을 쓰고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형 정약전과 함께 기나긴 유배의 길에 올랐다. 그 모진 세월이 18년이다.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다시 18년간 일민(逸民)으로서의 삶을 살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1801년을 정점으로 하여 마치 곧장 수직낙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산은 유배지에서 많은 제자와 지인을 두었고, 6백여 권에 달하는 수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이러한 다산의 후반의 삶을 낙척한 선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이 이루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위대한 업적을 단순히 ‘기적’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 속에는 다산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연민마저 느껴지는 다산의 면모, 그리고 다산 곁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준 사람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로 사진작가이다. 이 책에 수록된 90여 컷의 사진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전라도 강진에서 그리고 경기도 마재에서, 다산이 걸었던 길을 저자는 함께 걸었고, 그 길을 카메라 렌즈에 핍진하게 담아냈다.
이 책의 저자는 다산이 태어난 해와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같다는 묘한 인연으로 이 책의 서두를 열고 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해에 다산은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의 치세에 젊은 각신(閣臣)으로서 기량을 발휘하던 다산은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산 또한 사도세자처럼 질곡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을까. 이후 다산은 36년의 긴 시간을 유배와 해배의 삶으로 채워야 했다.
이 책에는 동문 매반가의 주모, 제자 황상, 혜장선사, 초의선사, 윤단 가족, 석천 신작, 부인 홍씨 등 다산의 후반생을 함께한 이들이 매 꼭지마다 거론되고 있다.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 이들에게 지어준 시문 등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만들어간 다산의 기적과도 같은 치열한 삶을 매 꼭지마다 보여주고 있고, 유배 직후부터 삶을 마감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다산이 남긴 시문집을 비롯해서 다산과 교유한 주변 인물들의 문집까지 모두 검토하여 사실을 바탕으로 다산의 후반생을 재구성하였다.
너무나 치열했던 삶, 다산의 후반생 36년
유배 18년 ― 감시가 창작의 원동력이요, 함정이 곧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를 앞세운 정순왕후와 노론(老論) 세력이 정권을 잡을 무렵, 궁에 남은 남인(南人)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노론 세력은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내몰기 위해 적당한 죄목을 찾던 중 천주교라는 기막힌 건수를 찾아냈다.
정약용은 비록 정조 생전에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어떻게든 옭아 넣으려는 그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형이 이승훈이었고, 외종형이 윤지충이었고, 그의 셋째형이 정약종이었다. 이들은 1801년 신유사옥 때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다산은 정조 승하의 슬픔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유배의 길에 올랐다.
북풍에 눈 날리듯
남쪽 강진의 밥집까지 밀려 왔네.
다행히 조각산이 바다를 가려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
근심이 많아서 밤에 술을 더 마시지.
한 가지 일이 나그네 걱정 겨우 잊게 해 주니
동백이 설도 전에 벌써 꽃피운 거라네
― 「객지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쓰다」(이 책 28쪽 참조)
유배지에서 느꼈던 다산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그나마 씻어준 것은 남녘땅의 붉게 물든 동백이었다. 설날도 되지 않았는데, 남녘의 성급한 봄꽃은 벌써부터 꽃망울을 틔웠다. 지금도 강진 땅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세월의 켜가 쌓인 울창한 동백숲이 있다.
유배는 다산의 인생에서 불행의 시작이었다. 기어코 다산만은 죽여야 한다고 벼르던 그들은 유배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현감 이안묵을 강진으로 내려 보냈다. 게다가 강진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이 다산을 멀리했다. 천주학쟁이의 죄목을 쓰고 왔으니, 행여 다산과 가까이했다가 함께 천주학쟁이로 몰릴까 두려웠으리라. 이런 갑갑하고 암울한 현실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준 건 동문 매반가의 주모였다. 그녀는 강진읍성 동문 밖에서 매반가 즉 밥을 파는 집을 운영하던 할멈이었다. 동문 매반가의 할멈은 다산에게 잘 곳을 마련해주었고, 이후에는 근처 마을의 학동을 가르치게 해서 다산 스스로 살 수 있는 길도 터주었다.
비록 동문 매반가의 주모가 보살펴주긴 했지만, 현감 이안묵의 감시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다산은 좁은 골방에서 자연스레 집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다산의 6백여 권 저서 창작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의 감시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동문 매반가 주모의 주선으로 학당을 연 다산은 그의 평생의 제자 황상과 이학래를 만나고 그의 집필에 도움을 준 혜장스님, 초의스님 그리고 여러 학인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승려에게 의지하는데
가엾은 그 승려 수염이며 머리카락 길어져 묶어야 했네.
이제는 불가 계율 타파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 국까지 끓인다네.
― 「다산화사」 중 ‘스님’(이 책 163쪽 참조)
위 시는 다산이 동문 매반가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겨 살다가 다시 다산초당으로 옮겼을 무렵 혜장선사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혜장은 다산초당 옆에 초막을 짓고 직접 음식 수발까지 들었다고 하는데, 혜장 또한 큰 스님이었으니 직접 수발을 들었다는 건 과장이라 해도, 그만큼 정성을 들여 다산을 모셨다는 말일 것이다.
다산의 제자 이학래는 자그마치 20년간 다산을 모시고 그의 집필을 도왔다. 다산의 저서 상당수가 이학래에 의해 정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학래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말라고 했던 다산과 등지면서까지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욕을 불태우던 이학래는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 과거시험만 보다가 결국 마지막엔 우물에 빠져 죽었다. 자살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수로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다산의 업적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유배지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다산에게는 기적의 산실이었고, 기적의 거름이었다. 심지어 다산과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도 다산에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당시 손암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고, 다산은 손암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어 확인받고 질정하고 또 보완했다.
애초에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가게 된 것은 그곳에 천주교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산을 죽이려 했던 노론 세력은 죽일 명분이 없어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지만, 그곳에서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주교인이 많은 곳으로 보내 어떻게는 옭아 넣으려 했다. 강진 땅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세거(世居)였다. 처음엔 감시 아래 있었기에 이들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결국 다산은 해남 윤씨 집안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유배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집필에 필요한 자료도서까지 해남 윤씨 집안 녹우당에서 빌려다 볼 수 있었으니, 함정이라고 여겼던 강진이 다산에게는 학문의 산실이 된 셈이다.
해배 후 18년 ― 다산이 고개를 숙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던 유배의 시간도 결국 끝이 났다. 다산은 1818년 9월 14일 그의 아들과 제자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저술한 6백여 권의 책, 초서한 자료 등을 다 갖고 올라왔으니, 우마차 가득 짐을 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다산은 큰형님 정약현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에 참배를 갔다.
나는 정기를 늦게 받아 태어났기에
아버지께선 내 막내아들이라 하셨지요.
순식간에 30년이 흘렀는데
아버님 뜻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덤 속이 비록 저세상이지만
옛사람은 여묘 살며 모셨다는데,
아직도 생각납니다. 신유년 봄에
통곡하며 묘소를 하직했지요.
말 먹일 겨를도 없이 떠나면서
의금부의 관리에게 핍박당하고,
귀양지에서 떠돌다 보니
어느새 18년이 흘렀습니다.
봉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나무는
가지와 잎새가 예전처럼 푸른데,
사람의 생애는 저만도 못하여
버림받는 게 어찌 그리도 쉬운지요.
― 「어버이 무덤에 오르며」(이 책 259쪽 참조)
부모님 묘소 앞 나무는 여전히 푸르기만 한데, 자신은 어느새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다산은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이 한 편의 시로 풀어냈다. 물론 시 한 편에 그 세월의 한을 어떻게 다 풀 수 있을까마는 2백 년 뒤의 후손인 우리로서는 이 시를 읽으며 당시 다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뿐이다.
해배되어 돌아온 마재 집에서도 다산은 여전히 집필에 몰두했다. 이웃에 사는 심재 서용보가 끊임없이 다산을 떠보았고, 조정에서도 끊임없이 다산을 죽이려 했으니 마음 편한 노후는 못 되었다.
다산을 끝까지 죽이려 했고 다산의 석방과 해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서용보가 아직 완전히 사면되지도 않은 다산에게 사람을 보내어 두 번씩이나 안부를 전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심재 서용보는 당시 정승의 신분에 있던 실세였다. 그런 사람이 다산에게 안부를 물었다는 것은, 숙이고 들어오면 내 사람으로 받아주겠다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당시 다산의 지식과 국가경영 능력은 이미 그의 저�孤湧�통해서도 탁월함이 입증된 셈이니 말이다. 다산은 심재 서용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심재 서용보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면, 조선의 역사는 조금 바뀌었을까?
다산은 해배 후 철저히 조정에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고, 벼슬에 재임용한다는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한번 승지 임용의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파들의 거센 반발로 그것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재임용은커녕 다산을 죽이기 위해 반대파들은 두 번이나 다산을 조정으로 불렀다. 한번은 효명세자가 위독하니 올라와 치료하라는 것이었고, 또 한 번은 순조가 위독하니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만약 다산이 책임을 맡은 상황에서 효명세자나 순조가 죽게 되면 모든 책임을 다산이 뒤집어쓰고 죽어야한다.
다산은 한양으로 가는 발걸음을 최대한 늦추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산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죽고 말았다.
다산은 이제 정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국가경영을 위해 그동안 써왔던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런 힘든 시기에 다산은 대산 김매순, 석천 신작 등 이른바 열수(洌水-한강의 옛 이름)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다산은 자신의 『매씨상서평』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대산 김매순의 글을 그의 「자찬묘지명」에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으로 더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산은 해배 후 삶의 대부분을 저술의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자찬묘지명」을 썼다. 그리고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 등의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무덤 속에 넣을 「자찬묘지명」이라고 해도 당시 조정에 알려진다면 큰 물의를 일으킬 것이었다. 하물며 저잣거리에 시체가 걸렸던 중죄인들의 묘지명을 쓰겠다는 것은 물의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묘지명은 실질적으로 다산이 죽은 후 52년이 지난 1888년에 공개되었다. 다산으로서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이들의 억울함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생의 마지막을 부인 홍씨와 함께했다. 젊어서는 과거시험 공부하는 다산을 대신해 가정을 꾸렸고, 유배를 떠난 뒤로도 계속해서 집안일을 떠안았을 불쌍한 부인에게 다산은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 「회근시」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회혼잔치 날 아침 다산은 영면에 들었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눠졌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 「회근시」(이 책 383쪽 참조)
▣ 작가 소개
저자 : 차벽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한양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정책과정을 수료해�� 우리나라의 토기와 달항아리 등 도자기에 심취해 전국을 돌며 사진을 찍었고, 두 번의 전시회를 연 바 있다. 사진 작품을 찍는 틈틈이 역사 기행과 함께 글을 쓰고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 다산, 사도세자의 죽음과 함께 태어나다
현감 이안묵 - 다산을 감시하러 왔다
동문 매반가 주모 - 수통에 빠진 사람 내라도 돌봐야재!
윤광택가 - 딸을 주지 않겠나
제자 황상 -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 본 적이 없소이
표씨 부녀 - 피로 맺었으니 무슨 일인들
손암 정약전 - 하늘을 읽는 사람이요
혜장선사 - 나를 따를 자가 어디 있소
제자 이학래 - 스승이 곁에 없으니
초의 의순 - 대도가 크게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윤단 가족 - 손자들 교육 매낄 만헌디
태현 정약현 - 미용이 돌아왔다고
심재 서용보 -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석천 신작 - 시름도 즐거움도 없다네
외심 윤영희, 그리고 벗들 - 그대 따라 배 안에 집 지어 살고 싶네
부인 홍씨 - 살아 이별 죽어 이별
참고문헌
후반생 36년, 다산이 걸었던 길
『다산의 후반생』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후반 생애를 다룬 책이다. 정조 치하 초계문신으로서 승승장구하던 다산의 운명은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뀌었다. 1801년 11월, 다산은 천주학쟁이라는 죄목의 칼을 쓰고 초겨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형 정약전과 함께 기나긴 유배의 길에 올랐다. 그 모진 세월이 18년이다. 긴 유배 생활을 끝내고 고향 마재로 돌아온 다산은 다시 18년간 일민(逸民)으로서의 삶을 살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1801년을 정점으로 하여 마치 곧장 수직낙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산은 유배지에서 많은 제자와 지인을 두었고, 6백여 권에 달하는 수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이러한 다산의 후반의 삶을 낙척한 선비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사람이 이루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위대한 업적을 단순히 ‘기적’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그 속에는 다산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었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연민마저 느껴지는 다산의 면모, 그리고 다산 곁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준 사람들의 열기를 고스란히 이 책에 담았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로 사진작가이다. 이 책에 수록된 90여 컷의 사진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전라도 강진에서 그리고 경기도 마재에서, 다산이 걸었던 길을 저자는 함께 걸었고, 그 길을 카메라 렌즈에 핍진하게 담아냈다.
이 책의 저자는 다산이 태어난 해와 사도세자가 죽은 해가 같다는 묘한 인연으로 이 책의 서두를 열고 있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해에 다산은 태어났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의 치세에 젊은 각신(閣臣)으로서 기량을 발휘하던 다산은 정조의 갑작스런 승하로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된다. 다산 또한 사도세자처럼 질곡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을까. 이후 다산은 36년의 긴 시간을 유배와 해배의 삶으로 채워야 했다.
이 책에는 동문 매반가의 주모, 제자 황상, 혜장선사, 초의선사, 윤단 가족, 석천 신작, 부인 홍씨 등 다산의 후반생을 함께한 이들이 매 꼭지마다 거론되고 있다.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 이들에게 지어준 시문 등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은 아니다. 이들과 함께 만들어간 다산의 기적과도 같은 치열한 삶을 매 꼭지마다 보여주고 있고, 유배 직후부터 삶을 마감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다산이 남긴 시문집을 비롯해서 다산과 교유한 주변 인물들의 문집까지 모두 검토하여 사실을 바탕으로 다산의 후반생을 재구성하였다.
너무나 치열했던 삶, 다산의 후반생 36년
유배 18년 ― 감시가 창작의 원동력이요, 함정이 곧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순조를 앞세운 정순왕후와 노론(老論) 세력이 정권을 잡을 무렵, 궁에 남은 남인(南人)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노론 세력은 지난 정권의 실세들을 내몰기 위해 적당한 죄목을 찾던 중 천주교라는 기막힌 건수를 찾아냈다.
정약용은 비록 정조 생전에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어떻게든 옭아 넣으려는 그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형이 이승훈이었고, 외종형이 윤지충이었고, 그의 셋째형이 정약종이었다. 이들은 1801년 신유사옥 때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다산은 정조 승하의 슬픔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유배의 길에 올랐다.
북풍에 눈 날리듯
남쪽 강진의 밥집까지 밀려 왔네.
다행히 조각산이 바다를 가려
총총한 대나무로 세월을 삼는구나.
옷이야 남녘이라 겨울에도 덜 입지만
근심이 많아서 밤에 술을 더 마시지.
한 가지 일이 나그네 걱정 겨우 잊게 해 주니
동백이 설도 전에 벌써 꽃피운 거라네
― 「객지에서 마음에 품은 생각을 쓰다」(이 책 28쪽 참조)
유배지에서 느꼈던 다산의 막막함과 두려움을 그나마 씻어준 것은 남녘땅의 붉게 물든 동백이었다. 설날도 되지 않았는데, 남녘의 성급한 봄꽃은 벌써부터 꽃망울을 틔웠다. 지금도 강진 땅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에는 세월의 켜가 쌓인 울창한 동백숲이 있다.
유배는 다산의 인생에서 불행의 시작이었다. 기어코 다산만은 죽여야 한다고 벼르던 그들은 유배로는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현감 이안묵을 강진으로 내려 보냈다. 게다가 강진 사람들은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이 다산을 멀리했다. 천주학쟁이의 죄목을 쓰고 왔으니, 행여 다산과 가까이했다가 함께 천주학쟁이로 몰릴까 두려웠으리라. 이런 갑갑하고 암울한 현실에서 한줄기 빛이 되어준 건 동문 매반가의 주모였다. 그녀는 강진읍성 동문 밖에서 매반가 즉 밥을 파는 집을 운영하던 할멈이었다. 동문 매반가의 할멈은 다산에게 잘 곳을 마련해주었고, 이후에는 근처 마을의 학동을 가르치게 해서 다산 스스로 살 수 있는 길도 터주었다.
비록 동문 매반가의 주모가 보살펴주긴 했지만, 현감 이안묵의 감시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다산은 좁은 골방에서 자연스레 집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다산의 6백여 권 저서 창작의 원동력이 바로 이들의 감시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동문 매반가 주모의 주선으로 학당을 연 다산은 그의 평생의 제자 황상과 이학래를 만나고 그의 집필에 도움을 준 혜장스님, 초의스님 그리고 여러 학인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대밭 속의 부엌살림 승려에게 의지하는데
가엾은 그 승려 수염이며 머리카락 길어져 묶어야 했네.
이제는 불가 계율 타파한 채
싱싱한 물고기 잡아 국까지 끓인다네.
― 「다산화사」 중 ‘스님’(이 책 163쪽 참조)
위 시는 다산이 동문 매반가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겨 살다가 다시 다산초당으로 옮겼을 무렵 혜장선사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혜장은 다산초당 옆에 초막을 짓고 직접 음식 수발까지 들었다고 하는데, 혜장 또한 큰 스님이었으니 직접 수발을 들었다는 건 과장이라 해도, 그만큼 정성을 들여 다산을 모셨다는 말일 것이다.
다산의 제자 이학래는 자그마치 20년간 다산을 모시고 그의 집필을 도왔다. 다산의 저서 상당수가 이학래에 의해 정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학래의 마지막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말라고 했던 다산과 등지면서까지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욕을 불태우던 이학래는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 과거시험만 보다가 결국 마지막엔 우물에 빠져 죽었다. 자살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수로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다산의 업적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유배지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다산에게는 기적의 산실이었고, 기적의 거름이었다. 심지어 다산과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다산의 둘째형 손암 정약전도 다산에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당시 손암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고, 다산은 손암에게 자신의 글을 보내어 확인받고 질정하고 또 보완했다.
애초에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가게 된 것은 그곳에 천주교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다산을 죽이려 했던 노론 세력은 죽일 명분이 없어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지만, 그곳에서라도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천주교인이 많은 곳으로 보내 어떻게는 옭아 넣으려 했다. 강진 땅은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세거(世居)였다. 처음엔 감시 아래 있었기에 이들과 접촉할 수 없었지만, 결국 다산은 해남 윤씨 집안의 물질적인 도움으로 유배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집필에 필요한 자료도서까지 해남 윤씨 집안 녹우당에서 빌려다 볼 수 있었으니, 함정이라고 여겼던 강진이 다산에게는 학문의 산실이 된 셈이다.
해배 후 18년 ― 다산이 고개를 숙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바뀌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던 유배의 시간도 결국 끝이 났다. 다산은 1818년 9월 14일 그의 아들과 제자들과 함께 우마차를 끌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와 저술한 6백여 권의 책, 초서한 자료 등을 다 갖고 올라왔으니, 우마차 가득 짐을 실었을 것이다.
18년 만에 고향땅을 밟은 다산은 큰형님 정약현과 함께 부모님의 묘소에 참배를 갔다.
나는 정기를 늦게 받아 태어났기에
아버지께선 내 막내아들이라 하셨지요.
순식간에 30년이 흘렀는데
아버님 뜻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무덤 속이 비록 저세상이지만
옛사람은 여묘 살며 모셨다는데,
아직도 생각납니다. 신유년 봄에
통곡하며 묘소를 하직했지요.
말 먹일 겨를도 없이 떠나면서
의금부의 관리에게 핍박당하고,
귀양지에서 떠돌다 보니
어느새 18년이 흘렀습니다.
봉분 앞에 서 있는 한 쌍의 나무는
가지와 잎새가 예전처럼 푸른데,
사람의 생애는 저만도 못하여
버림받는 게 어찌 그리도 쉬운지요.
― 「어버이 무덤에 오르며」(이 책 259쪽 참조)
부모님 묘소 앞 나무는 여전히 푸르기만 한데, 자신은 어느새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다산은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이 한 편의 시로 풀어냈다. 물론 시 한 편에 그 세월의 한을 어떻게 다 풀 수 있을까마는 2백 년 뒤의 후손인 우리로서는 이 시를 읽으며 당시 다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뿐이다.
해배되어 돌아온 마재 집에서도 다산은 여전히 집필에 몰두했다. 이웃에 사는 심재 서용보가 끊임없이 다산을 떠보았고, 조정에서도 끊임없이 다산을 죽이려 했으니 마음 편한 노후는 못 되었다.
다산을 끝까지 죽이려 했고 다산의 석방과 해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서용보가 아직 완전히 사면되지도 않은 다산에게 사람을 보내어 두 번씩이나 안부를 전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심재 서용보는 당시 정승의 신분에 있던 실세였다. 그런 사람이 다산에게 안부를 물었다는 것은, 숙이고 들어오면 내 사람으로 받아주겠다는 심사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당시 다산의 지식과 국가경영 능력은 이미 그의 저�孤湧�통해서도 탁월함이 입증된 셈이니 말이다. 다산은 심재 서용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만약 자존심을 굽히고 심재 서용보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면, 조선의 역사는 조금 바뀌었을까?
다산은 해배 후 철저히 조정에서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고, 벼슬에 재임용한다는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한번 승지 임용의 기회가 있었지만 반대파들의 거센 반발로 그것 또한 물거품이 되었다.
재임용은커녕 다산을 죽이기 위해 반대파들은 두 번이나 다산을 조정으로 불렀다. 한번은 효명세자가 위독하니 올라와 치료하라는 것이었고, 또 한 번은 순조가 위독하니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만약 다산이 책임을 맡은 상황에서 효명세자나 순조가 죽게 되면 모든 책임을 다산이 뒤집어쓰고 죽어야한다.
다산은 한양으로 가는 발걸음을 최대한 늦추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다산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죽고 말았다.
다산은 이제 정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국가경영을 위해 그동안 써왔던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런 힘든 시기에 다산은 대산 김매순, 석천 신작 등 이른바 열수(洌水-한강의 옛 이름)의 학자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다산은 자신의 『매씨상서평』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대산 김매순의 글을 그의 「자찬묘지명」에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으로 더 살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다산은 해배 후 삶의 대부분을 저술의 정리 작업에 매진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자찬묘지명」을 썼다. 그리고 권철신, 이가환, 이기양 등의 묘지명을 썼다. 자신의 무덤 속에 넣을 「자찬묘지명」이라고 해도 당시 조정에 알려진다면 큰 물의를 일으킬 것이었다. 하물며 저잣거리에 시체가 걸렸던 중죄인들의 묘지명을 쓰겠다는 것은 물의를 일으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묘지명은 실질적으로 다산이 죽은 후 52년이 지난 1888년에 공개되었다. 다산으로서는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죄 없이 죽임을 당한 이들의 억울함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은 생의 마지막을 부인 홍씨와 함께했다. 젊어서는 과거시험 공부하는 다산을 대신해 가정을 꾸렸고, 유배를 떠난 뒤로도 계속해서 집안일을 떠안았을 불쌍한 부인에게 다산은 결혼 60주년 회혼잔치에 맞춰 「회근시」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회혼잔치 날 아침 다산은 영면에 들었다.
60년 풍상의 바퀴 눈 깜짝할 새 굴러 왔지만
복사꽃 화사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이 늙음을 재촉하나
슬픔 짧고 즐거움 길었으니 임금님 은혜겠지.
오늘밤 뜻 맞는 대화가 새삼 즐겁고
그 옛날 붉은 치마엔 먹 흔적이 남아 있네.
나눠졌다 다시 합해진 내 모습 같은
술잔 두 개 남겨 두었다 자손에게 물려주려네.
― 「회근시」(이 책 383쪽 참조)
▣ 작가 소개
저자 : 차벽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한양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정책과정을 수료해�� 우리나라의 토기와 달항아리 등 도자기에 심취해 전국을 돌며 사진을 찍었고, 두 번의 전시회를 연 바 있다. 사진 작품을 찍는 틈틈이 역사 기행과 함께 글을 쓰고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며 - 다산, 사도세자의 죽음과 함께 태어나다
현감 이안묵 - 다산을 감시하러 왔다
동문 매반가 주모 - 수통에 빠진 사람 내라도 돌봐야재!
윤광택가 - 딸을 주지 않겠나
제자 황상 -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 본 적이 없소이
표씨 부녀 - 피로 맺었으니 무슨 일인들
손암 정약전 - 하늘을 읽는 사람이요
혜장선사 - 나를 따를 자가 어디 있소
제자 이학래 - 스승이 곁에 없으니
초의 의순 - 대도가 크게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윤단 가족 - 손자들 교육 매낄 만헌디
태현 정약현 - 미용이 돌아왔다고
심재 서용보 -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석천 신작 - 시름도 즐거움도 없다네
외심 윤영희, 그리고 벗들 - 그대 따라 배 안에 집 지어 살고 싶네
부인 홍씨 - 살아 이별 죽어 이별
참고문헌
후반생 36년, 다산이 걸었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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