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건강한 밥상’이란? 조선시대 왕들의 밥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았다
『왕의 밥상』은 조선시대에 수라상이 차려지기까지 과정을 고찰하고, 역대 왕들의 식성을 분석해 당시의 통치 윤리와 연관시킨 작품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식사는 사적인 섭식(攝食)을 넘어선 공적인 의례였고, 왕은 전국에서 진상한 식재료들로 이루어진 수라상을 통해 각 지역의 현황과 백성들의 고뇌를 살폈다.
왕의 밥상에 오를 식재료를 생산하고, 옮기고, 관리하며, 조리해서, 진어할 때까지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왕은 한 숟갈, 한 젓갈마다 느끼고, 감사한다. 그리고 신하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백성들과 굶주림을 나눈다. 그것은 단지 음식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익만을 따져 불공평함이 없게 배려함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자부심과 노력을, 그리고 정(情)을 느끼고 응답하며 보상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으로 조화를 달성한 밥상이기에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 건강 밥상으로서 왕의 밥상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건강 밥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웰빙, 슬로우푸드, 로하스, 오가닉 등 자연식 밥상이 건강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왕의 밥상』은 우리 조상들이 왕을 위해 차린 밥상 레시피를 통해 건강 밥상을 살펴보았다.
-좋은 밥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왕은 잘 먹었는가
-왕들의 식습관
-밥이 약이다: 잘 먹는 것이 약이다
◎ 밥상의 정치학-백성과 더불어 먹는다
임금 혼자 배부르고 맛나면 안 된다!
왕의 밥상에는 ‘정치’가 있었다. 왕은 밥상머리에서도 사적일 수 없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은 거의 대부분 지방에서 진상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식재료 상태를 보고 지방 상황을 두루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언론 미디어요,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나라가 가뭄과 홍수 같은 재난에 처해 있다면 왕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는 감선, 고기반찬을 줄이는 철선을 시행했다. 이는 어찌 보면 불행해 보인다. 먹는 즐거움조차 온전히 개인적으로 즐길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배려하는 밥상, 생각하는 밥상이 되었다. 왕 혼자 배부르고 맛나게 먹지 않고 만백성과 더불어 먹기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감선(減膳) -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반찬의 가짓수나 식사 횟수를 줄였다!
철선(撤膳) _ 백성들이 오랜 가뭄과 홍수로 시달리는데,
고기반찬을 먹을 수 없다!
각선(却膳) - 신하들의 당파 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아예 수라를 들지 않았다.
국왕의 단식투쟁!
그러니,
왕의 식사란 자신의 입과 위장을 통해 세상을 돌아보는 행위였다!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역대 조선시대 왕들의 식습관
고르게 먹으려고 노력한 왕이 아무래도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 있는 스물일곱 왕들 각각의 밥상과 그들이 밥상머리에서 보인 행동거지를 통해, 조선왕조 궁중 식문화의 역사를 짚어보았다. 그것은 동시에 ‘밥상으로 보는 조선왕조사’이기도 하다.
1대 태조: 왕자의 난으로 자식들이 참사를 당하자 즐기던 고기를 끊었다.
2대 정종: 자못 진지하게 왕 흉내를 내었다간 무서운 아우(태종)의 의심을 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워 마음껏 놀고먹는 일에 더 몰두했다.
3대 태종: 밥상의 법도와 정치성을 수립했다.
4대 세종: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읽으며, 성군의 길을 부지런히 걷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뚱뚱하고 둔한 모습이었으며, 반대로 노년에는 비쩍 마른 몸에 온갖 병 때문에 얼굴빛은 파리하고 기침이 그치지 않는 ‘가련한 노인네’의 몰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성군의 모습이 왜 그 모양이었을까? 그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이 개인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무인 집안인 조선 왕실은 태종 때까지만 해도 격구나 사냥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였지만, 세종은 충녕대군으로 불리던 청소년기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운동은 즐기지 않았다.”
7대 세조-술 잘 마시는 호걸, 밥상의 균형과 세상의 조화를 꿈꾸다
“그는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건강이 유지됨을 숙지하고 있었고, 임금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 리더십을 지향할 경우 세종이나 문종처럼 건강을 해치고 정치도 위선으로 흐르게 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세조는 조선 왕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먹고 마시는 문제를 진지하게 여겼고, 균형 잡힌 식습관이 바람직하듯 일과 오락, 문(文)과 무(武) 사이에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여겼다.”
“즐겁게 먹으면서 고르게 먹는 일이 건강을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9대 성종-풍요로운 시대를 살며 물 말은 밥을 먹다
더위 먹은 증세를 보이는 서병(暑病)을 고질적으로 앓았다. 심한 두통과 고열, 설사가 이어지고 기절하기까지 하는데 한편으로 갈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성종은 물 말은 밥을 자꾸 찾았다. 문제는 서병에는 찬 음식이 금물이라는 데 있었다.
10대 연산군-‘성군의 길’을 마음껏 역주행하다
“연산군은 검소함 대신 사치스러움을, 조화로움 대신 치우침을 밥상에서 추구했다. 뭐든지 진귀한 게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구하기 어려워도 반드시 찾아다 바치게 해서 맛보았다. 그리고 유난히 고기를 즐겼고, 그것도 희귀한 고기에다 날고기를 즐겼다.”
“철선과 감선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즉 하늘과 사람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 사회에 큰 폐단이 있으면 자연히 하늘의 경고와 견책이 이루어진다는 설이나, 심지어 음양오행론조차 회의했다.”
12대 인종-생강을 상품으로 내리고, 울면서 닭죽을 먹다
13대 명종-사슴 꼬리를 좋아하다 망신당하고, 대책 없는 어머니와 외삼촌 때문에 속을 썩다
14대 선조-쌀알을 세며 무를 씹다
“전쟁 때문에 막 재미를 붙여 가던 양생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을 뿐 아니라 늘 긴장과 초조, 공포, 스트레스 속에서 생활했음인지, 말년의 선조는 고질적인 소화불량, 식욕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조급증에 중풍까지 얻었다.”
“입맛이 좀처럼 없는 선조를 달랠 음식물로, 전쟁 이전에 유희춘 등이 권한 것은 우유와 꿀이었다. 타락죽(駝酪粥), 즉 우유는 기혈을 보양하여 열과 갈증을 없애준다고 여겨졌고, 꿀은 오장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약해진 기를 끌어올린다고 하여 선조와 같은 상태의 사람에게 요긴한 먹을거리였다.”
19대 숙종-‘어머니의 밥상’으로 건강을 챙기다가, ‘몰래 먹는 야식’으로 몸이 나빠지다
“숙종은 세자 시절에 우유를 마시다가 송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불쌍한 마음에 우유 먹기를 그만두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본래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한 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었고, 극단적인 행동을 곧잘 취했다. 그래서 인현왕후 시대에는 서인을, 장희빈 시대에는 남인을 중용하며 그때마다 ‘야당’을, 또한 그 중심에 서 있던 여인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21대 영조-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다
“수명에는 어느 정도 선천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몸매나 성인병을 걱정해서 시도하는(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자기 관리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의 자기 관리처럼 끊이지 않는 싸움에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자기 관리였다.”
“영조는 자신의 밥상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칠순이 넘고 나서는 잔치 등에서 술 대신 생강차 또는 송절차를 쓰도록 하며 소고기도 빼게 했다. 밥상은 처음에는 조수라를 빼고 하루 네 차례의 밥상을 받다가 나중에는 낮것과 야참을 제하고 죽수라(초조반), 조수라, 석수라만 들이게 했다. 그리고 밥을 고봉으로 담아 올리는 관례를 폐지하고 적당히 담도록 했다.”
22대 정조-비빔밥에 깍두기를 먹고, 담배 한 대를 피다
“치우치게 먹고, 모자라게 먹고, 술과 담배에 탐닉하며, 과로하고, 무엇보다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 등쌀에 스트레스가 끊일 날이 없던 정조. 그가 무병장수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며 안질과 등창에 시달리게 된 그는 실제 나이보다 대략 십 년은 늙어 보였다 한다. 한때 백발백중으로 화살을 쏘며 말 위에 올라타 만군을 호령하던 건강한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26대 고종-서양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궁궐로 냉면을 시켜 먹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국 손님 접대용으로만 서양 음식을 쓴 게 아니라 직접 맛보고 즐겼다. 이들 부부는 아직 개국하기 이전인 1870년대 초중반부터 밤늦게까지 깨어 있다가 아침 동이 터서야 잠자리에 드는 ‘올빼미’ 생활을 몸에 익혔는데, 1880년대쯤에는 경복궁의 후원에 건청궁을 따로 짓고, 밤이면 거기서 주로 생활하며 전깃불을 환히 밝힌 채로 서양 음악을 듣고, 서양 음식과 술을 즐기며 흥겨운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 밥상의 음양오행-자연과 더불어 먹는다
-조선 왕들의 밥상, 그 위에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양생하고 장수하려는 뜻과 정치 이념과 현실에 따라 왕의 정치적 역할을 다하려는 뜻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단자(연산군, 인종)를 제외하면 대체로 두 가지 식도(食道), 즉 ‘음양오행, 의식동원(醫食同原)설에 입각한 양생의 밥상’과 ‘왕은 천하와 만민이 한집을 이루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데서 오는 밥상의 정치학’을 동시에 추구하는 식(食) 이념을 지켜왔다.
-왕은 한 나?의 최고 권력자니 당연히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사치를 누리며, 식문화에서도 민간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재료를 써서 조리한 미식의 최고봉을 누리는 게 보통이다. 왕실이 특별한 존재임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외국 사례를 보면 음식 사치를 부리던 끝에 건강을 해치는 일까지 많았다.
-“그런데 왕의 밥상을 보면 일상식은 물론이고 연회식에조차 그렇게 희한한 음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곰발바닥이나 제비집 같은 재료는 조선 왕 정도의 힘이라면 못 구할 것도 없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국내에서 나지만 워낙 귀해서 민간에서는 못 먹게 하고 왕만 먹는 재료 또는 음식은 없었다. 개화가 진행되던 조선 말을 제외하면, 역대 군주 중 연산군만이 유일하게 외국에서 식재료를 구해왔다.”
-“조선의 궁중요리가 특별한 점은 재료나 정교한 요리 기법에 있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써서 무척 많이 손을 대어 만든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성의 요리다.”
◎ 왕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그리고 왕의 밥상을 차린 사람들과 과정을 살펴본다.
일단 식재료부터 확보해야 한다. 왕의 밥상에는 일부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식재료도 썼지만, 기본적으로 조선 팔도 곳곳에서 올리는 진상 및 공납으로 식재료를 조달했다. 이 진상된 식재료는 다른 공납-진상품과 함께 사재감,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의영고, 사포서 같은 ‘공상육사(供上六司)’를 비롯한 공납-진상 관련 총 19개 아문(??경국대전?? 기준)에서 수취되어, 그곳에서 저장ㆍ관리되다가 왕의 밥상을 꾸미는 음식으로 조리되었다.
과연 ‘누가 왕이 먹을 일상의 수라상을 차렸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궁녀와 숙수들 중 누가 ‘수라간의 주역’이었을까?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6품의 재부(宰夫)는 대전과 왕비전에 식사를 내가는 진어를 담당하며, 종7품의 선부(膳夫)는 문소전 친선과 대전에 차를 내가는 진다(進茶)를, 종8품의 조부(調夫) 2명, 정9품의 임부(?夫) 2명, 종9품의 팽부(烹夫) 7명이 여러 요리를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모두 13명에 이르는 숙수들이 정식 관원으로 녹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궁녀들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숙수들은 해가 진 다음에는 원칙적으로 신료들이 궁궐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기에 퇴근하는데, 늦은 시각에라도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이 음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리하는 과정은 상당한 근력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수가 많으므로, 여성들이 전담하기는 벅차다. 오늘날에도 음식점의 주방에 여자 요리사의 수가 소수인 것은 관습적인 문제 외에도 그런 까닭이 있다. 결국 수라간의 주역은 남성 숙수들이었고, 궁녀들은 보조 역할을 맡았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어반미와 백비탕
어반미: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임금님용 쌀을 사용했다.
백비탕: 물을 100번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물에 양기를 더해 마신다. 먼저 묘시 정각(새벽 5시)에 어정에서 물을 떠서 그 물을 마실 물이나 찻물로 쓰는데, 이때가 하루 중에 양기가 왕성해지는 시각이므로 물에도 양기가 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저 : 함규진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저자의 맨 처음 전공은 법학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해서 교수님께 “학문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으려면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하는 질문을 드리자 “법대에 들어왔으면 사법고시에 필요한 책만 봐라. 그것 말고는 볼 책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법학 공부에 정이 붙지 않았던 저자는 대학도 학과도 바꾸고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두번째로 택한 것은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였다. 처음엔 행정학과로 입학했으나,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정외과에서도 정치사상을 택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동양 및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역사법정』, 『세상을 움직인 명문vs명문』이 있고, 논문에는 「예의 정치적 의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등이 있다.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록펠러 가의 사람들』, 『마키아벨리』, 『팔레스타인』, 『죽음의 밥상』, 『유동하는 공포』 등의 번역서도 다수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전하, 수라상 대령이옵니다!
젓수시옵소서!
수라간의 주역은 ‘장금이’였나, ‘대령숙수’였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적인 밥상이 되다
건강이 먼저이지만, 맛도 놓칠 수 없어
임금 혼자 배부르고 맛나면 안 된다!
2장 역대 왕들의 밥상-태조에서 순종까지
1기 태조~세조. 왕의 밥상의 법도가 만들어지다
2기 예종~명종. 풍요 속에서 일탈과 형식주의가 나타나다
3기 선조~효종. 전란의 시대
4기 현종~철종. 변화하는 시대, 도전과 응전
5기 고종~순종. 조선이여, 안녕
3장 한 차례의 수라상을 차리기까지
왕의 밥상, 무엇이 올라왔나
식문화로서 궁중음식의 특징
왕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12첩 반상에 담긴 뜻
1월에 나물을 먹고, 3월에 꽃을 먹고
4장 밥상의 우주-자연과 더불어 먹는다
음양오행과 의식동원
조선의 왕들은 장수했는가?
5장 밥상의 정치학-사람과 더불어 먹는다
백성이 바친 것을 먹는다-진상
백성과 나누어 먹는다-휼전 급식과 사여 급식
백성과 함께 굶주린다-감선
맺음말-밥상의 도(道)
‘건강한 밥상’이란? 조선시대 왕들의 밥상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았다
『왕의 밥상』은 조선시대에 수라상이 차려지기까지 과정을 고찰하고, 역대 왕들의 식성을 분석해 당시의 통치 윤리와 연관시킨 작품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식사는 사적인 섭식(攝食)을 넘어선 공적인 의례였고, 왕은 전국에서 진상한 식재료들로 이루어진 수라상을 통해 각 지역의 현황과 백성들의 고뇌를 살폈다.
왕의 밥상에 오를 식재료를 생산하고, 옮기고, 관리하며, 조리해서, 진어할 때까지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왕은 한 숟갈, 한 젓갈마다 느끼고, 감사한다. 그리고 신하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백성들과 굶주림을 나눈다. 그것은 단지 음식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익만을 따져 불공평함이 없게 배려함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자부심과 노력을, 그리고 정(情)을 느끼고 응답하며 보상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정치적으로 조화를 달성한 밥상이기에 자연과도 조화를 이루었다.
◎ 건강 밥상으로서 왕의 밥상
면역력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건강 밥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이 커지면서,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웰빙, 슬로우푸드, 로하스, 오가닉 등 자연식 밥상이 건강 트렌드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왕의 밥상』은 우리 조상들이 왕을 위해 차린 밥상 레시피를 통해 건강 밥상을 살펴보았다.
-좋은 밥상이란 무엇인가
-과연 왕은 잘 먹었는가
-왕들의 식습관
-밥이 약이다: 잘 먹는 것이 약이다
◎ 밥상의 정치학-백성과 더불어 먹는다
임금 혼자 배부르고 맛나면 안 된다!
왕의 밥상에는 ‘정치’가 있었다. 왕은 밥상머리에서도 사적일 수 없었다.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은 거의 대부분 지방에서 진상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식재료 상태를 보고 지방 상황을 두루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언론 미디어요, 일종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나라가 가뭄과 홍수 같은 재난에 처해 있다면 왕은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아예 밥상을 물리는 감선, 고기반찬을 줄이는 철선을 시행했다. 이는 어찌 보면 불행해 보인다. 먹는 즐거움조차 온전히 개인적으로 즐길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동시에 배려하는 밥상, 생각하는 밥상이 되었다. 왕 혼자 배부르고 맛나게 먹지 않고 만백성과 더불어 먹기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감선(減膳) -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반찬의 가짓수나 식사 횟수를 줄였다!
철선(撤膳) _ 백성들이 오랜 가뭄과 홍수로 시달리는데,
고기반찬을 먹을 수 없다!
각선(却膳) - 신하들의 당파 싸움을 다스리기 위해 아예 수라를 들지 않았다.
국왕의 단식투쟁!
그러니,
왕의 식사란 자신의 입과 위장을 통해 세상을 돌아보는 행위였다!
◎ 밥상으로 본 조선왕조사-역대 조선시대 왕들의 식습관
고르게 먹으려고 노력한 왕이 아무래도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
실제로 기록에 나타나 있는 스물일곱 왕들 각각의 밥상과 그들이 밥상머리에서 보인 행동거지를 통해, 조선왕조 궁중 식문화의 역사를 짚어보았다. 그것은 동시에 ‘밥상으로 보는 조선왕조사’이기도 하다.
1대 태조: 왕자의 난으로 자식들이 참사를 당하자 즐기던 고기를 끊었다.
2대 정종: 자못 진지하게 왕 흉내를 내었다간 무서운 아우(태종)의 의심을 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워 마음껏 놀고먹는 일에 더 몰두했다.
3대 태종: 밥상의 법도와 정치성을 수립했다.
4대 세종: 밥상머리에서도 책을 읽으며, 성군의 길을 부지런히 걷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뚱뚱하고 둔한 모습이었으며, 반대로 노년에는 비쩍 마른 몸에 온갖 병 때문에 얼굴빛은 파리하고 기침이 그치지 않는 ‘가련한 노인네’의 몰골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성군의 모습이 왜 그 모양이었을까? 그의 생활 습관과 식습관이 개인적 또는 정치적 이유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무인 집안인 조선 왕실은 태종 때까지만 해도 격구나 사냥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였지만, 세종은 충녕대군으로 불리던 청소년기에도 늘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운동은 즐기지 않았다.”
7대 세조-술 잘 마시는 호걸, 밥상의 균형과 세상의 조화를 꿈꾸다
“그는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건강이 유지됨을 숙지하고 있었고, 임금이 지나치게 도덕주의적 리더십을 지향할 경우 세종이나 문종처럼 건강을 해치고 정치도 위선으로 흐르게 될 수 있음을 경계했다. 세조는 조선 왕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먹고 마시는 문제를 진지하게 여겼고, 균형 잡힌 식습관이 바람직하듯 일과 오락, 문(文)과 무(武) 사이에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여겼다.”
“즐겁게 먹으면서 고르게 먹는 일이 건강을 유지하는 지름길이다.”
9대 성종-풍요로운 시대를 살며 물 말은 밥을 먹다
더위 먹은 증세를 보이는 서병(暑病)을 고질적으로 앓았다. 심한 두통과 고열, 설사가 이어지고 기절하기까지 하는데 한편으로 갈증을 유발한다. 그래서 성종은 물 말은 밥을 자꾸 찾았다. 문제는 서병에는 찬 음식이 금물이라는 데 있었다.
10대 연산군-‘성군의 길’을 마음껏 역주행하다
“연산군은 검소함 대신 사치스러움을, 조화로움 대신 치우침을 밥상에서 추구했다. 뭐든지 진귀한 게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아무리 구하기 어려워도 반드시 찾아다 바치게 해서 맛보았다. 그리고 유난히 고기를 즐겼고, 그것도 희귀한 고기에다 날고기를 즐겼다.”
“철선과 감선의 이론적 근거가 되는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 즉 하늘과 사람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인간 사회에 큰 폐단이 있으면 자연히 하늘의 경고와 견책이 이루어진다는 설이나, 심지어 음양오행론조차 회의했다.”
12대 인종-생강을 상품으로 내리고, 울면서 닭죽을 먹다
13대 명종-사슴 꼬리를 좋아하다 망신당하고, 대책 없는 어머니와 외삼촌 때문에 속을 썩다
14대 선조-쌀알을 세며 무를 씹다
“전쟁 때문에 막 재미를 붙여 가던 양생법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을 뿐 아니라 늘 긴장과 초조, 공포, 스트레스 속에서 생활했음인지, 말년의 선조는 고질적인 소화불량, 식욕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 조급증에 중풍까지 얻었다.”
“입맛이 좀처럼 없는 선조를 달랠 음식물로, 전쟁 이전에 유희춘 등이 권한 것은 우유와 꿀이었다. 타락죽(駝酪粥), 즉 우유는 기혈을 보양하여 열과 갈증을 없애준다고 여겨졌고, 꿀은 오장을 안정시키고 마음을 편하게 하며 약해진 기를 끌어올린다고 하여 선조와 같은 상태의 사람에게 요긴한 먹을거리였다.”
19대 숙종-‘어머니의 밥상’으로 건강을 챙기다가, ‘몰래 먹는 야식’으로 몸이 나빠지다
“숙종은 세자 시절에 우유를 마시다가 송아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불쌍한 마음에 우유 먹기를 그만두었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본래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한 번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었고, 극단적인 행동을 곧잘 취했다. 그래서 인현왕후 시대에는 서인을, 장희빈 시대에는 남인을 중용하며 그때마다 ‘야당’을, 또한 그 중심에 서 있던 여인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21대 영조-단식투쟁을 벌이다가, 고추장에 보리밥을 비벼 먹다
“수명에는 어느 정도 선천적인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몸매나 성인병을 걱정해서 시도하는(흔히 작심삼일이 되는) 자기 관리가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의 자기 관리처럼 끊이지 않는 싸움에 대비해서 힘을 비축하고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자기 관리였다.”
“영조는 자신의 밥상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칠순이 넘고 나서는 잔치 등에서 술 대신 생강차 또는 송절차를 쓰도록 하며 소고기도 빼게 했다. 밥상은 처음에는 조수라를 빼고 하루 네 차례의 밥상을 받다가 나중에는 낮것과 야참을 제하고 죽수라(초조반), 조수라, 석수라만 들이게 했다. 그리고 밥을 고봉으로 담아 올리는 관례를 폐지하고 적당히 담도록 했다.”
22대 정조-비빔밥에 깍두기를 먹고, 담배 한 대를 피다
“치우치게 먹고, 모자라게 먹고, 술과 담배에 탐닉하며, 과로하고, 무엇보다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 등쌀에 스트레스가 끊일 날이 없던 정조. 그가 무병장수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중년에 접어들며 안질과 등창에 시달리게 된 그는 실제 나이보다 대략 십 년은 늙어 보였다 한다. 한때 백발백중으로 화살을 쏘며 말 위에 올라타 만군을 호령하던 건강한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26대 고종-서양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궁궐로 냉면을 시켜 먹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국 손님 접대용으로만 서양 음식을 쓴 게 아니라 직접 맛보고 즐겼다. 이들 부부는 아직 개국하기 이전인 1870년대 초중반부터 밤늦게까지 깨어 있다가 아침 동이 터서야 잠자리에 드는 ‘올빼미’ 생활을 몸에 익혔는데, 1880년대쯤에는 경복궁의 후원에 건청궁을 따로 짓고, 밤이면 거기서 주로 생활하며 전깃불을 환히 밝힌 채로 서양 음악을 듣고, 서양 음식과 술을 즐기며 흥겨운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 밥상의 음양오행-자연과 더불어 먹는다
-조선 왕들의 밥상, 그 위에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양생하고 장수하려는 뜻과 정치 이념과 현실에 따라 왕의 정치적 역할을 다하려는 뜻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단자(연산군, 인종)를 제외하면 대체로 두 가지 식도(食道), 즉 ‘음양오행, 의식동원(醫食同原)설에 입각한 양생의 밥상’과 ‘왕은 천하와 만민이 한집을 이루는 나라의 중심이라는 데서 오는 밥상의 정치학’을 동시에 추구하는 식(食) 이념을 지켜왔다.
-왕은 한 나?의 최고 권력자니 당연히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사치를 누리며, 식문화에서도 민간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재료를 써서 조리한 미식의 최고봉을 누리는 게 보통이다. 왕실이 특별한 존재임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했다. 외국 사례를 보면 음식 사치를 부리던 끝에 건강을 해치는 일까지 많았다.
-“그런데 왕의 밥상을 보면 일상식은 물론이고 연회식에조차 그렇게 희한한 음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곰발바닥이나 제비집 같은 재료는 조선 왕 정도의 힘이라면 못 구할 것도 없었을 텐데,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외국에서 구입해 들여온 진기한 식재료나, 국내에서 나지만 워낙 귀해서 민간에서는 못 먹게 하고 왕만 먹는 재료 또는 음식은 없었다. 개화가 진행되던 조선 말을 제외하면, 역대 군주 중 연산군만이 유일하게 외국에서 식재료를 구해왔다.”
-“조선의 궁중요리가 특별한 점은 재료나 정교한 요리 기법에 있지 않고, 다양한 재료를 써서 무척 많이 손을 대어 만든다는 데 있다. 이른바 정성의 요리다.”
◎ 왕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그리고 왕의 밥상을 차린 사람들과 과정을 살펴본다.
일단 식재료부터 확보해야 한다. 왕의 밥상에는 일부 자체적으로 조달하는 식재료도 썼지만, 기본적으로 조선 팔도 곳곳에서 올리는 진상 및 공납으로 식재료를 조달했다. 이 진상된 식재료는 다른 공납-진상품과 함께 사재감,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의영고, 사포서 같은 ‘공상육사(供上六司)’를 비롯한 공납-진상 관련 총 19개 아문(??경국대전?? 기준)에서 수취되어, 그곳에서 저장ㆍ관리되다가 왕의 밥상을 꾸미는 음식으로 조리되었다.
과연 ‘누가 왕이 먹을 일상의 수라상을 차렸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궁녀와 숙수들 중 누가 ‘수라간의 주역’이었을까?
??경국대전??에 따르면 종6품의 재부(宰夫)는 대전과 왕비전에 식사를 내가는 진어를 담당하며, 종7품의 선부(膳夫)는 문소전 친선과 대전에 차를 내가는 진다(進茶)를, 종8품의 조부(調夫) 2명, 정9품의 임부(?夫) 2명, 종9품의 팽부(烹夫) 7명이 여러 요리를 직접 담당하고 있었다. 모두 13명에 이르는 숙수들이 정식 관원으로 녹봉을 받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궁녀들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숙수들은 해가 진 다음에는 원칙적으로 신료들이 궁궐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되기에 퇴근하는데, 늦은 시각에라도 왕이나 왕비, 대비 등이 음식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리하는 과정은 상당한 근력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수가 많으므로, 여성들이 전담하기는 벅차다. 오늘날에도 음식점의 주방에 여자 요리사의 수가 소수인 것은 관습적인 문제 외에도 그런 까닭이 있다. 결국 수라간의 주역은 남성 숙수들이었고, 궁녀들은 보조 역할을 맡았다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어반미와 백비탕
어반미: 전국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임금님용 쌀을 사용했다.
백비탕: 물을 100번 끓이고 식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물에 양기를 더해 마신다. 먼저 묘시 정각(새벽 5시)에 어정에서 물을 떠서 그 물을 마실 물이나 찻물로 쓰는데, 이때가 하루 중에 양기가 왕성해지는 시각이므로 물에도 양기가 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저 : 함규진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저자의 맨 처음 전공은 법학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해서 교수님께 “학문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기초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으려면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하는 질문을 드리자 “법대에 들어왔으면 사법고시에 필요한 책만 봐라. 그것 말고는 볼 책이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 후로 법학 공부에 정이 붙지 않았던 저자는 대학도 학과도 바꾸고 새출발을 하게 되었다.
저자가 두번째로 택한 것은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였다. 처음엔 행정학과로 입학했으나, 대학원은 정외과로 갔다. 정외과에서도 정치사상을 택했고, 다시 그 중에서도 동양 및 한국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 결국 박사학위까지 받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역사법정』, 『세상을 움직인 명문vs명문』이 있고, 논문에는 「예의 정치적 의미」,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등이 있다.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록펠러 가의 사람들』, 『마키아벨리』, 『팔레스타인』, 『죽음의 밥상』, 『유동하는 공포』 등의 번역서도 다수 있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말
1장 전하, 수라상 대령이옵니다!
젓수시옵소서!
수라간의 주역은 ‘장금이’였나, ‘대령숙수’였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적인 밥상이 되다
건강이 먼저이지만, 맛도 놓칠 수 없어
임금 혼자 배부르고 맛나면 안 된다!
2장 역대 왕들의 밥상-태조에서 순종까지
1기 태조~세조. 왕의 밥상의 법도가 만들어지다
2기 예종~명종. 풍요 속에서 일탈과 형식주의가 나타나다
3기 선조~효종. 전란의 시대
4기 현종~철종. 변화하는 시대, 도전과 응전
5기 고종~순종. 조선이여, 안녕
3장 한 차례의 수라상을 차리기까지
왕의 밥상, 무엇이 올라왔나
식문화로서 궁중음식의 특징
왕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12첩 반상에 담긴 뜻
1월에 나물을 먹고, 3월에 꽃을 먹고
4장 밥상의 우주-자연과 더불어 먹는다
음양오행과 의식동원
조선의 왕들은 장수했는가?
5장 밥상의 정치학-사람과 더불어 먹는다
백성이 바친 것을 먹는다-진상
백성과 나누어 먹는다-휼전 급식과 사여 급식
백성과 함께 굶주린다-감선
맺음말-밥상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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