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이 책에 대하여
― 상소문, 조선의 왕에게 내려치는 죽비소리
우리가 몰랐거나 생소한 역사적 소재들을 다루는 역사책들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점점 가벼워지는 사회 트렌드를 반영한 결과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단순히 역사로 보지 않고 소설, 즉 해학소설이나 골계소설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의 역사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역사를 통사通史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미시사, 즉 ‘작은 역사’를 다루는 책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역사 찾기’다. 다시 말해 역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는 책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왕에게 고하라》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태종과 세종조의 상소문을 중심으로 엮었다. 조선왕조 문치 오백 년 기틀의 상당 부분이 태종과 세종조에 확립되었다는 점과 왕도정치의 핵심 가치와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왕 아닌 신하들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조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자료로서 상소문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상소문은 언어로 된 당대의 ‘스냅 사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우리가 조선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왕은 상소문을 읽고 신하들과 논의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것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렇게 상소문은 왕이 백성들이나 신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이자, 정치를 하는 통로였다.
상소문은 왕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던 정부의 공식문서였다. 상소문을 포함한 실록의 자료인 사초는 왕 자신도 볼 수 없었다. 때로는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 태워버리고 싶은 상소문도 있었지만, 이미 사관이 그 내용을 베껴 사초로 만들어둔 뒤라 왕도 어쩔 수 없었다는 기록이 더러 보인다. 이런 식의 자기성찰을 제도화한 것은 동서양 어느 문명국에 견주어도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상소문에는 도의가 타락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 백성의 어려운 살림살이에 대한 아픈 고발, 외적의 침략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 위선적인 관료들의 행태와 상하귀천을 막론한 허영의 폐단 등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왕의 자책과 나름의 원칙과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선조들의 고민과 통찰, 지금까지 여운을 남기는 비장한 격정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마디로 상소문은 조선의 자화상이자, 조선의 생활풍속과 정치와 역사가 들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책상 위에 있었던 상소문을 살짝 들추어 보는 일은 조선의 왕과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주요 내용
왕의 허리띠 금장식과 옷감을 훔치다
상소문에는 유독 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왕의 잘잘못이나 왕의 처벌과 아량, 백성들에 대한 고민 등이 대부분이다. 1430년 9월 1일 사헌부에서 상소문을 올렸다. 다름 아닌 왕의 의복과 궁궐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을 처벌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의 의복과 궁궐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인 김을현金乙玄, 윤수미尹須彌, 하도河圖 등은 왕께 올릴 의복의 띠를 만들 때 잘 감독하지 못한 탓으로 장인이 거기에 장식한 금을 훔쳐 쓰게 했습니다. 실무책임자인 백환白環과 그 아랫사람인 유흥준兪興俊, 송성립宋成立 등은 그 금이 없어진 것을 잘 살피지 못하고 옷을 지을 때도 허술하게 관리하여 바느질 하는 자에게 옷감을 몰래 가져가도록 했으니 그 불경스러운 죄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판 ‘국새 파문’이라고 할 만하다. 관리가 감독을 소홀하게 해서 왕의 허리띠 장식에 쓰이는 금과 왕의 옷감이 도난당한 것은 불경스러운 죄이기 때문에 관리를 파직하라는 상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왕에게 올릴 탕약을 맛보지 않고 올린 일에 대한 상소도 있다.
“왕이 병이 있어 약을 먹으면 신하가 먼저 맛보고, 아비가 병이 있어 약을 먹으면 아들이 이를 맛보는 것은 왕과 아비를 중히 여겨 약을 신중하게 쓰기 위함입니다. 이주와 평원해가 왕이 드실 약을 조제할 때 성질과 일정한 방식에 따라 알맞게 가공하는 법에 소홀하여 성체聖體를 평안치 못하게 했으니, 그 불경과 불충의 죄가 큽니다.”
하지만, 왕은 신하들이 자신을 병들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일에 대해 다시는 논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대사헌에서 금주령을 내려 소비를 줄이고 예의를 지키게 해달라는 상소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술을 금지하면 그 감시가 엄격하지 못해 종종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 막걸리 한 잔을 마시다가 붙잡히는 수가 있고, 힘 좀 있고 부유한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가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해 형평에 맞지 않으니 금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오.”
이처럼 태종과 세종은 상소문을 듣고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때론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신하들이 사냥을 만류하자, 중국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거론하며, 지나치게 즐기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응수한다. 조선의 ‘왕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토목 공사는 안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조세와 각종 공물의 납부, 군역 외에 나라의 공적인 일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부역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세금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거나 삶을 포기하게 했다. 공신들도 세금이 무서워 자신의 재산을 거짓으로 꾸몄다가 들통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403년 9월 22일에는 사간원에서 말馬을 위해 교외에 마구간을 짓는 것을 정지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따로 마구간을 두어 무식한 무리에게 그 일을 맡기면 감찰의 눈과 귀가 미치지 못한다 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폐단이 전과 같이 생길까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재지변이 여러 번 나타나서 하늘이 경고를 보내니 전하께서는 토목 공사로 백성이 피곤하게 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좋으니, 교외의 마구간 짓는 일을 중단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이처럼 백성들의 부역에 관한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농사철에는 백성들이 부역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들의 노는 손과 각 관아의 아전들을 투입하여 부역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농간과 횡포가 있을까 염려하여 토지세를 매기는 법(공법貢法)을 만들었으나, 그것의 폐해가 심각하니 흉년이 든 마을에는 공법을 시행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일부 관리들은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1407년 10월 8일의 상소문을 보자.
“현장에서 실무를 맡은 자는 그 감독 관원을 두려워하여 일하는 백성들을 매우 엄하게 다그치면서 채찍질하고 내모니 소나 양과 다를 바 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분주하게 굴다가 나무와 돌에 상하는 자가 자주 있습니다. …… 나무를 베고 운반하던 즈음에 죽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령, 먹고 튀다!
조선은 군현제를 확립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수령은 실질적으로 지방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왕권의 대행자였다. 하지만 지방 목민관들의 비리와 탐욕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437년 8월 7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자.
“수령들의 탐욕이 끊이지 않아 관물官物을 도둑질하되 공공연하게 바리바리 실어 나르니 불법이 극에 달했습니다. …… 죄상이 드러나면 잽싸게 직첩을 싸 가지고 도망하여 숨어 구차하게 법망을 피한 다음 사면을 엿보니 죄를 면하는 자가 종종 있습니다. …… 이제부터 부정축재죄를 범하고 도망했다가 사면 이후에 슬그머니 나오는 자들은 그 사건은 이미 사면 전의 행위이므로 문신 형벌을 받은 죄인의 경우와 같이 곧 직첩을 회수하고 이름을 남겨서 영구히 벼슬에 쓰지 말고 뒷사람을 경계하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 잡으소서.”
어떤 수령은 관아의 창고를 개인 곳간으로 여겨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자기 집으로 옮겨 놓았다가 꼬리를 밝히는 바람에 법으로 처벌되었는데, 이들은 “사형에 처해도 허물이 남는다”는 상소문도 올라왔다. 급기야 사간원에서는 “기력이 차차 쇠퇴하여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지니 부역과 재판의 일을 향리에게 맡기”거나 “탐심을 품고 재물이나 긁어모으려는 동기로” 지방 근무를 바란다며, 지방과 중앙 근무를 번갈아 맡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관리들을 고발한다고 해도 처벌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고발자 처벌법’으로 인해 고발한 사람이 고초를 당하기 때문이다. 1425년 2월 2일 좌사간 유계문이 올린 상소문을 보자.
“대개 백성을 억압하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자들이 군현에 도사리고 앉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골수를 깎아내 자기 배를 채우게 되면 백성들은 부지하고 살 길이 없어집니다. 이런 때에 그 입으로 탐관오리의 비행을 말하고자 해도 고발자 처벌법을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 수령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욕을 채우게 되니 백성들이 입게 될 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소문,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이야기하다
조선의 신하들이 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방법 중 문서로 올리는 의견을 상소라 한다. 상소문은 그 내용에 따라 간쟁, 탄핵, 시무, 사직 등에 관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간쟁은 왕의 결정이나 행동에 관해 지적하는 것인만큼 상소자로서는 왕의 노여움을 살 위험이 매우 크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대�祈�왕의 잘못을 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왕은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통해 신하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정치를 했다. 결국 상소문은 소통을 하고자 하는 통로였다. 또한 태종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목적으로 1401년에 대궐 밖 문루門樓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게 했다. 이에 정역鄭易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에서 바닥 민심이 위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문고를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와서 치도록 허락하여 왕의 총명을 막거나 가리는 근심을 없애니,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리고 간쟁소諫爭訴만큼 치열한 상소는 탄핵소彈劾訴였다.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공직자들의 비위 사실에 대해 처벌이나 인사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왕에 의해 늘 수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염치’, ‘의리’, ‘효’와 같은 윤리적 엄정함은 단순한 적법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보루가 되었다.
그래서 상소문에는 조선의 자화상이 빼고 더할 것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자화상이 아름다운 것이든, 미운 것이든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왕이 어떻게 신하들이나 백성들과 소통했는지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 서로의 의견차에 대해 논의하고 논쟁하여 보다 합리적인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호선
196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구로공단 등에서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는 방송 석사과정을, 영국 리즈Leeds 대학교에서 ‘EU 경제 및 국제통상법’ 전공으로 LL.M 과정을 졸업했다. 25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로펌에서 일하기도 했다. 40세가 되던 해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상법과 경제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빅딜》, 《공부습관 3주 만에 바뀐다》,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자신감》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왕과 리더십
꿩 먹고 알 먹고, 사냥하고 제사하고 | 기상 이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탕약은 맛보고 올려라 | 사냥에 탐닉하다 | 가뭄 때문에 거처를 옮긴다 | 궁궐 매를 훔치다 | 그들도 한 잔씩 해야 되지 않겠소 | 외국인의 생명도 귀하다 | 여악은 좋지 않다 | 왕의 허리띠 금장식과 옷감을 훔치다 | 스캔들만 가지고 처벌할 수 없다 | 어가에 호소하다 | 털을 불어가며 흉을 찾다 | 사랑은 죄가 아니다 | 병영에서 애인과 함께 숙직하다
제2장 관리의 예의와 염치
전과 기록을 훔쳐내다 | 종로에 익명의 유인물이 붙다 | 공신도 무서워하는 세금 | 사신인가 장사꾼인가 | 생선 눈깔인가 진주인가 | 왕이 임명한 병조판서가 낙마한 까닭 | 옷 색깔을 함부로 하지 마라 | 황희, 법을 굽히다 | 농부의 작은 이익까지 탐하지 마라 | 생대구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 | 군공을 가로챘다가 들통나다 | 첩이 사주했습니다 | 사치가 화를 부르다 | 뇌물은 백성의 피와 땀이다
제3장 과거제도와 인재 등용
벼슬을 버리고 과거장으로 가다 | 과거 입시위원, 너무 생색낸다 | 성균관이 비었다 | 서얼은 과거 응시도 못하는가 | 그때도 족보는 있었다 | 대리시험을 보다가 들켰다 | 소과를 보게 하라 | 응시자의 이름을 몰라야 한다
제4장 부역과 조세제도
말보다는 백성이 중요하다 | 공무원들을 시킵시다 | ‘빨리빨리’가 사람 죽인다 | 왕이 건축을 논하다 | 부러진 들보와 기둥은 고쳐야 하오 |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 한양에 가깝다는 죄 | 그때도 파파라치가 있었다 | 모판이 마르고, 이삭이 패지 않는다
제5장 조선의 사법제도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다 | 친족은 사건을 심리할 수 없다 | 신문고가 악용되고 있다 | 종친의 살인죄 | 몰수형은 너무합니다 | 공신 자손도 전과 기록을 남겨야 한다 | 오심으로 죽은 자가 아홉이나 됩니다 | 판사의 오판인가 백성의 오기인가 | 억울한 판결을 바로잡다 | 일사부재리 원칙 | 연좌제를 금하다 | 잦은 사면이 범죄를 양산한다 | 관리의 부정축재는 사면으로도 덮을 수 없다 | 심신박약은 정상 참작 사유 | 법은 술에 관대하다 | 죄를 번 심리하다 | 부마는 폭행 치사 교사범 | 판사, 억울함을 호소하다
제6장 조선의 국방과 안보 정책
불쌍한 수군 | 병선은 나라의 그릇이다 | 시위군이 한양 물가를 올린다 | 군대는 출신보다 계급이다 | 소나무가 바다를 지킨다 | 인화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벌레는 생나무를 좋아한다 | 성은 매년 하나씩 쌓다 | 함길도의 성터를 살피는 것은 지금도 늦었다 | 조선의 일은 사흘을 못 넘긴다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장맛비 한 번에 성이 무너지다
제7장 조선의 목민관
수령의 업적 평가 기준 | 포악한 수령의 벼슬길을 막다 | 백성을 구제해도 죄가 된다 | 관청 예산, 비리의 싹이 되다 | 수령을 고발합니다 | 수령의 호종죄 | 년 임기제냐, 년 임기제냐 | 수령의 부정축재죄 | 무능한 수령들 | 뛰는 수령 위에 나는 백성 | 수령, 먹고 튀다 | 사형에 처해도 허물이 남는다 | 수령이 너무 늙었다
제8장 조선의 효
불효자를 파직하다 | 관직을 받더라도 년상은 치러야 한다 | 효성으로 벼슬을 얻다 | 벼슬보다 시묘살이를 택하다 | 부친상 중에 기생과 간통하다 | 손가락까지 끊어야 효는 아니다
제9장 조선의 부부관
노처녀는 나랏돈으로라도 시집보내야 한다 | 조강지처를 버려 파직되다 | 처와 첩을 나누다 | 남의 첩을 빼앗다 | 여승을 환속시켜 시집을 보내다 | 첩을 두어 제가에 실패하다 | 혼인 전에는 얼굴을 보지 마시오
제10장 조선의 민간신앙
분에 넘치는 장례식 | 승려들은 앉아서 먹기만 한다 | 무당에게 베를 바치다 | 귀신에게 아첨하다 | 귀신 핑계 대고 놀아나다
참고문헌
이 책에 대하여
― 상소문, 조선의 왕에게 내려치는 죽비소리
우리가 몰랐거나 생소한 역사적 소재들을 다루는 역사책들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점점 가벼워지는 사회 트렌드를 반영한 결과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고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단순히 역사로 보지 않고 소설, 즉 해학소설이나 골계소설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의 역사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역사를 통사通史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미시사, 즉 ‘작은 역사’를 다루는 책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숨어 있는 역사 찾기’다. 다시 말해 역사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들을 다루는 책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왕에게 고하라》는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태종과 세종조의 상소문을 중심으로 엮었다. 조선왕조 문치 오백 년 기틀의 상당 부분이 태종과 세종조에 확립되었다는 점과 왕도정치의 핵심 가치와 사상이 일목요연하게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왕 아닌 신하들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조선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자료로서 상소문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상소문은 언어로 된 당대의 ‘스냅 사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우리가 조선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왕은 상소문을 읽고 신하들과 논의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그것을 물리치기도 했다. 이렇게 상소문은 왕이 백성들이나 신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이자, 정치를 하는 통로였다.
상소문은 왕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되었던 정부의 공식문서였다. 상소문을 포함한 실록의 자료인 사초는 왕 자신도 볼 수 없었다. 때로는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아 태워버리고 싶은 상소문도 있었지만, 이미 사관이 그 내용을 베껴 사초로 만들어둔 뒤라 왕도 어쩔 수 없었다는 기록이 더러 보인다. 이런 식의 자기성찰을 제도화한 것은 동서양 어느 문명국에 견주어도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상소문에는 도의가 타락되는 데 대한 안타까움, 백성의 어려운 살림살이에 대한 아픈 고발, 외적의 침략에 대한 끊임없는 긴장, 위선적인 관료들의 행태와 상하귀천을 막론한 허영의 폐단 등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왕의 자책과 나름의 원칙과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선조들의 고민과 통찰, 지금까지 여운을 남기는 비장한 격정도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마디로 상소문은 조선의 자화상이자, 조선의 생활풍속과 정치와 역사가 들어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의 책상 위에 있었던 상소문을 살짝 들추어 보는 일은 조선의 왕과 역사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주요 내용
왕의 허리띠 금장식과 옷감을 훔치다
상소문에는 유독 왕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왕의 잘잘못이나 왕의 처벌과 아량, 백성들에 대한 고민 등이 대부분이다. 1430년 9월 1일 사헌부에서 상소문을 올렸다. 다름 아닌 왕의 의복과 궁궐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을 처벌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의 의복과 궁궐의 일용품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인 김을현金乙玄, 윤수미尹須彌, 하도河圖 등은 왕께 올릴 의복의 띠를 만들 때 잘 감독하지 못한 탓으로 장인이 거기에 장식한 금을 훔쳐 쓰게 했습니다. 실무책임자인 백환白環과 그 아랫사람인 유흥준兪興俊, 송성립宋成立 등은 그 금이 없어진 것을 잘 살피지 못하고 옷을 지을 때도 허술하게 관리하여 바느질 하는 자에게 옷감을 몰래 가져가도록 했으니 그 불경스러운 죄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판 ‘국새 파문’이라고 할 만하다. 관리가 감독을 소홀하게 해서 왕의 허리띠 장식에 쓰이는 금과 왕의 옷감이 도난당한 것은 불경스러운 죄이기 때문에 관리를 파직하라는 상소문이다. 그런가 하면 왕에게 올릴 탕약을 맛보지 않고 올린 일에 대한 상소도 있다.
“왕이 병이 있어 약을 먹으면 신하가 먼저 맛보고, 아비가 병이 있어 약을 먹으면 아들이 이를 맛보는 것은 왕과 아비를 중히 여겨 약을 신중하게 쓰기 위함입니다. 이주와 평원해가 왕이 드실 약을 조제할 때 성질과 일정한 방식에 따라 알맞게 가공하는 법에 소홀하여 성체聖體를 평안치 못하게 했으니, 그 불경과 불충의 죄가 큽니다.”
하지만, 왕은 신하들이 자신을 병들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일에 대해 다시는 논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대사헌에서 금주령을 내려 소비를 줄이고 예의를 지키게 해달라는 상소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술을 금지하면 그 감시가 엄격하지 못해 종종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 막걸리 한 잔을 마시다가 붙잡히는 수가 있고, 힘 좀 있고 부유한 자는 날마다 마셔도 누가 감히 뭐라고 하지 못해 형평에 맞지 않으니 금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보오.”
이처럼 태종과 세종은 상소문을 듣고 백성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때론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 신하들이 사냥을 만류하자, 중국 송나라 진덕수의 《대학연의》를 거론하며, 지나치게 즐기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응수한다. 조선의 ‘왕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토목 공사는 안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조세와 각종 공물의 납부, 군역 외에 나라의 공적인 일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부역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는 고사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세금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거나 삶을 포기하게 했다. 공신들도 세금이 무서워 자신의 재산을 거짓으로 꾸몄다가 들통이 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403년 9월 22일에는 사간원에서 말馬을 위해 교외에 마구간을 짓는 것을 정지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따로 마구간을 두어 무식한 무리에게 그 일을 맡기면 감찰의 눈과 귀가 미치지 못한다 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폐단이 전과 같이 생길까 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재지변이 여러 번 나타나서 하늘이 경고를 보내니 전하께서는 토목 공사로 백성이 피곤하게 되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 좋으니, 교외의 마구간 짓는 일을 중단해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소서.”
이처럼 백성들의 부역에 관한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농사철에는 백성들이 부역을 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들의 노는 손과 각 관아의 아전들을 투입하여 부역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농간과 횡포가 있을까 염려하여 토지세를 매기는 법(공법貢法)을 만들었으나, 그것의 폐해가 심각하니 흉년이 든 마을에는 공법을 시행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일부 관리들은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1407년 10월 8일의 상소문을 보자.
“현장에서 실무를 맡은 자는 그 감독 관원을 두려워하여 일하는 백성들을 매우 엄하게 다그치면서 채찍질하고 내모니 소나 양과 다를 바 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분주하게 굴다가 나무와 돌에 상하는 자가 자주 있습니다. …… 나무를 베고 운반하던 즈음에 죽은 자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령, 먹고 튀다!
조선은 군현제를 확립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수령은 실질적으로 지방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왕권의 대행자였다. 하지만 지방 목민관들의 비리와 탐욕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437년 8월 7일 사헌부에서 올린 상소문을 보자.
“수령들의 탐욕이 끊이지 않아 관물官物을 도둑질하되 공공연하게 바리바리 실어 나르니 불법이 극에 달했습니다. …… 죄상이 드러나면 잽싸게 직첩을 싸 가지고 도망하여 숨어 구차하게 법망을 피한 다음 사면을 엿보니 죄를 면하는 자가 종종 있습니다. …… 이제부터 부정축재죄를 범하고 도망했다가 사면 이후에 슬그머니 나오는 자들은 그 사건은 이미 사면 전의 행위이므로 문신 형벌을 받은 죄인의 경우와 같이 곧 직첩을 회수하고 이름을 남겨서 영구히 벼슬에 쓰지 말고 뒷사람을 경계하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 잡으소서.”
어떤 수령은 관아의 창고를 개인 곳간으로 여겨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자기 집으로 옮겨 놓았다가 꼬리를 밝히는 바람에 법으로 처벌되었는데, 이들은 “사형에 처해도 허물이 남는다”는 상소문도 올라왔다. 급기야 사간원에서는 “기력이 차차 쇠퇴하여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지니 부역과 재판의 일을 향리에게 맡기”거나 “탐심을 품고 재물이나 긁어모으려는 동기로” 지방 근무를 바란다며, 지방과 중앙 근무를 번갈아 맡도록 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관리들을 고발한다고 해도 처벌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고발자 처벌법’으로 인해 고발한 사람이 고초를 당하기 때문이다. 1425년 2월 2일 좌사간 유계문이 올린 상소문을 보자.
“대개 백성을 억압하고 재물을 긁어모으는 자들이 군현에 도사리고 앉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골수를 깎아내 자기 배를 채우게 되면 백성들은 부지하고 살 길이 없어집니다. 이런 때에 그 입으로 탐관오리의 비행을 말하고자 해도 고발자 처벌법을 두려워하여 아무 말도 못하게 하면 수령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욕을 채우게 되니 백성들이 입게 될 화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상소문, 불통의 시대에 소통을 이야기하다
조선의 신하들이 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방법 중 문서로 올리는 의견을 상소라 한다. 상소문은 그 내용에 따라 간쟁, 탄핵, 시무, 사직 등에 관한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간쟁은 왕의 결정이나 행동에 관해 지적하는 것인만큼 상소자로서는 왕의 노여움을 살 위험이 매우 크지만, 조선의 신하들은 대�祈�왕의 잘못을 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왕은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통해 신하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정치를 했다. 결국 상소문은 소통을 하고자 하는 통로였다. 또한 태종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목적으로 1401년에 대궐 밖 문루門樓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게 했다. 이에 정역鄭易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에서 바닥 민심이 위에 이르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문고를 설치하고, 사람들에게 와서 치도록 허락하여 왕의 총명을 막거나 가리는 근심을 없애니,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리고 간쟁소諫爭訴만큼 치열한 상소는 탄핵소彈劾訴였다. 주로 사헌부와 사간원 등에서 공직자들의 비위 사실에 대해 처벌이나 인사상 조치를 요구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왕에 의해 늘 수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염치’, ‘의리’, ‘효’와 같은 윤리적 엄정함은 단순한 적법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보루가 되었다.
그래서 상소문에는 조선의 자화상이 빼고 더할 것 없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자화상이 아름다운 것이든, 미운 것이든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왕이 어떻게 신하들이나 백성들과 소통했는지를 배우는 게 중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 서로의 의견차에 대해 논의하고 논쟁하여 보다 합리적인 결과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 작가 소개
저자 : 이호선
1964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구로공단 등에서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는 방송 석사과정을, 영국 리즈Leeds 대학교에서 ‘EU 경제 및 국제통상법’ 전공으로 LL.M 과정을 졸업했다. 25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로펌에서 일하기도 했다. 40세가 되던 해부터 국민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상법과 경제법 등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빅딜》, 《공부습관 3주 만에 바뀐다》, 《질문이 답이다》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자신감》을 우리말로 옮겼다.
▣ 주요 목차
책머리에
제1장 왕과 리더십
꿩 먹고 알 먹고, 사냥하고 제사하고 | 기상 이변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 탕약은 맛보고 올려라 | 사냥에 탐닉하다 | 가뭄 때문에 거처를 옮긴다 | 궁궐 매를 훔치다 | 그들도 한 잔씩 해야 되지 않겠소 | 외국인의 생명도 귀하다 | 여악은 좋지 않다 | 왕의 허리띠 금장식과 옷감을 훔치다 | 스캔들만 가지고 처벌할 수 없다 | 어가에 호소하다 | 털을 불어가며 흉을 찾다 | 사랑은 죄가 아니다 | 병영에서 애인과 함께 숙직하다
제2장 관리의 예의와 염치
전과 기록을 훔쳐내다 | 종로에 익명의 유인물이 붙다 | 공신도 무서워하는 세금 | 사신인가 장사꾼인가 | 생선 눈깔인가 진주인가 | 왕이 임명한 병조판서가 낙마한 까닭 | 옷 색깔을 함부로 하지 마라 | 황희, 법을 굽히다 | 농부의 작은 이익까지 탐하지 마라 | 생대구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 | 군공을 가로챘다가 들통나다 | 첩이 사주했습니다 | 사치가 화를 부르다 | 뇌물은 백성의 피와 땀이다
제3장 과거제도와 인재 등용
벼슬을 버리고 과거장으로 가다 | 과거 입시위원, 너무 생색낸다 | 성균관이 비었다 | 서얼은 과거 응시도 못하는가 | 그때도 족보는 있었다 | 대리시험을 보다가 들켰다 | 소과를 보게 하라 | 응시자의 이름을 몰라야 한다
제4장 부역과 조세제도
말보다는 백성이 중요하다 | 공무원들을 시킵시다 | ‘빨리빨리’가 사람 죽인다 | 왕이 건축을 논하다 | 부러진 들보와 기둥은 고쳐야 하오 |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 한양에 가깝다는 죄 | 그때도 파파라치가 있었다 | 모판이 마르고, 이삭이 패지 않는다
제5장 조선의 사법제도
목숨은 다시 살릴 수 없다 | 친족은 사건을 심리할 수 없다 | 신문고가 악용되고 있다 | 종친의 살인죄 | 몰수형은 너무합니다 | 공신 자손도 전과 기록을 남겨야 한다 | 오심으로 죽은 자가 아홉이나 됩니다 | 판사의 오판인가 백성의 오기인가 | 억울한 판결을 바로잡다 | 일사부재리 원칙 | 연좌제를 금하다 | 잦은 사면이 범죄를 양산한다 | 관리의 부정축재는 사면으로도 덮을 수 없다 | 심신박약은 정상 참작 사유 | 법은 술에 관대하다 | 죄를 번 심리하다 | 부마는 폭행 치사 교사범 | 판사, 억울함을 호소하다
제6장 조선의 국방과 안보 정책
불쌍한 수군 | 병선은 나라의 그릇이다 | 시위군이 한양 물가를 올린다 | 군대는 출신보다 계급이다 | 소나무가 바다를 지킨다 | 인화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벌레는 생나무를 좋아한다 | 성은 매년 하나씩 쌓다 | 함길도의 성터를 살피는 것은 지금도 늦었다 | 조선의 일은 사흘을 못 넘긴다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장맛비 한 번에 성이 무너지다
제7장 조선의 목민관
수령의 업적 평가 기준 | 포악한 수령의 벼슬길을 막다 | 백성을 구제해도 죄가 된다 | 관청 예산, 비리의 싹이 되다 | 수령을 고발합니다 | 수령의 호종죄 | 년 임기제냐, 년 임기제냐 | 수령의 부정축재죄 | 무능한 수령들 | 뛰는 수령 위에 나는 백성 | 수령, 먹고 튀다 | 사형에 처해도 허물이 남는다 | 수령이 너무 늙었다
제8장 조선의 효
불효자를 파직하다 | 관직을 받더라도 년상은 치러야 한다 | 효성으로 벼슬을 얻다 | 벼슬보다 시묘살이를 택하다 | 부친상 중에 기생과 간통하다 | 손가락까지 끊어야 효는 아니다
제9장 조선의 부부관
노처녀는 나랏돈으로라도 시집보내야 한다 | 조강지처를 버려 파직되다 | 처와 첩을 나누다 | 남의 첩을 빼앗다 | 여승을 환속시켜 시집을 보내다 | 첩을 두어 제가에 실패하다 | 혼인 전에는 얼굴을 보지 마시오
제10장 조선의 민간신앙
분에 넘치는 장례식 | 승려들은 앉아서 먹기만 한다 | 무당에게 베를 바치다 | 귀신에게 아첨하다 | 귀신 핑계 대고 놀아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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