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살아보기 -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 생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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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반주원
출판사항제3의공간, 발행일:2017/04/17
형태사항p.335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5989454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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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출판사서평

그윽하고 친근해서 그리운 이의
살 냄새 같은 삶의 자취, 조선 생활 실록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대중의 것인지 특별한 지배층의 것인지, 그 뜨거운 논쟁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쉼 없이 이루어졌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어떤 업적도 다수의 대중이 생활 속에 정착시켜 함께 할 때만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삶의 자취를 자연스럽게 기록하는 생활사라는 부분은 특별하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도 마치 숨 쉬는 공기처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정보를 담뿍 담고 있다. 진한 향수의 인위적인 향내는 아니어도 그윽하고 친근해서 그리운 이의 살 냄새 같은 분야가 생활사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가깝고도 먼 시대로 생각했던 그 시대, 남존여비사상에 묶인 고리타분한 성리학 국가라는 선입견으로 바라보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리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이혼과 재혼,
결국은 성리학의 규범을 강요하는 역할을 했던 ‘열녀문’

건국 당시만 해도 조선은 여자의 경우에도 이혼과 재혼을 금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민이 이혼을 원할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곤 했는데 ‘사정파의’와 ‘할급휴서’가 그것이다. ‘사정파의’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고 생각되면 두 부부가 마주 앉아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쿨하기 그지없었다.
‘할급휴서’는 칼로 저고리 앞섶을 베어서 그 조각을 상대에게 이혼의 표시로 주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으면 이혼을 수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할급휴서’의 경우 잘라낸 옷자락이 날개를 편 나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나비를 주고받았다”라는 말로 이혼에 동의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혼에 동의하는 표식이라면 이것 또한 일종의 이혼합의서와 같은 것인데 하늘하늘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떠올리는 조상들의 운치 있는 행동과 정서는 삶의 아픈 순간에도 멋들어지게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것이다. 일반민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혼을 선택한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집을 나누어 거주지를 분리하지 못하고 같은 집, 심지어 같은 방에서 구역을 정해 동거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조선이 점차 성리학의 도를 국가 차원의 정치 규범으로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여자라면 누구나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고 나면 자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던 여성에 대한 삼종지도가 강조되었다. 사실상 남성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 노동력을 충원하고 생계수단을 이어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애정이나 법도라는 것을 걷어내고 먹고사는 일로만 들여다보아도 남성 노동력을 수급하는 수단으로서의 결혼은 여성의 삶에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점차 생활 전반의 규율로 확대해 나가던 조선이라는 국가 입장에서는 여성이 한번 혼인을 했다면 남편이 사망한 후에도 다시 시집가지 않고 수절을 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정절을 지키는 바른 아내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성리학의 대표적 규범과 도리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을 시각화하여 입증하는 훌륭한 사례였다. 결국 생계로서의 재혼에서 보다 자유로운 양반 사회를 시작으로 여성이 재혼을 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와 장치가 만들어졌고, 이러한 움직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일반 양인 여인에 이르기까지 관습적으로 칭송받을 만한 일로 정착되어 갔다.

조선은 여자의 개가를 직접적으로 금지하기보다 사회적 제약과 불이익을 준다는 족쇄를 채워 여자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여자에게 ‘재가는 악행이고, 수절은 선행’이라는 논리가 제도적 장치와 어우러져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기록에 의하면 건국 이후 명종 때까지 국가가 공인한 열녀의 수가 272명인데 반해 선조 이후에 접어들면 845명으로 그 수가 매우 빠르게 늘었고 급기야는 남편의 병 수발을 위해 제 살을 잘라내어 먹이거나 남편이 죽자 슬픔과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식음을 전폐하고 죽었다는 식의 스토리가 가미되며 열녀를 추종하는 분위기는 날로 심화된다.

밤낮으로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던 조선시대 한류 바람과
이방인의 눈으로 본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조선

‘한류’라는 낯선 말이 여기저기에서 폭죽 터지듯이 들려오기 시작하던 무렵, 텔레비전을 통해 중국과 일본 내에서 우리 드라마와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한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취재한 프로그램들이 방송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한류의 시작은 언제부터였던 것일까? 좀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우리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조선의 역사 속에도 우리의 문화에 열광했던 주변 국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세기 중반, 인조와 효종 시절을 거치며 조선 중기를 풍미한 이름난 도화서 화원 김명국은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을 오가며 특색 있는 그림을 그려서 큰 인기를 누렸던 인물로 유명하다.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이중 두 번째 일본 방문은 일본으로부터 특별한 요청이 있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김명국의 인기가 당시 일본에서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통신사에 김명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이 알려질 때마다 일본의 귀족과 관리들이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곤 했다. 통신사가 직접 적은 기행문인 《해사록》의 한 부분에는 1636년 김명국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김명국의 그림을 청하는 일본인들이 밤낮으로 구름 떼처럼 모여드는 바람에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리던 김명국이 지친 나머지 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대해 이야기한 외국인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이들이 《하멜 표류기》의 하멜을 떠올릴 것이다. 하멜뿐만 아니라 다블뤼, 쥐베르 등 그들에게는 낯선 나라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들이 있었다. “갑곶이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아름다웠다. 이른 아침의 풍경은 특히 아름다웠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곧게 하늘로 올라가는 시간이면 아름다운 논과 밀밭, 옥수수밭, 무밭,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숲과 촌락들이 서서히 어둠을 벗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삐뚤빼뚤 이어가며 경계를 짓고 있는 논밭의 모습은 마치 아이들이 한 조각 한 조각 맞추어 놓은 퍼즐처럼 보여서 우리네 평야가 보여주는 직선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 그리고 더 멀리 겹겹이 포개진 산들의 명암과 안개 자욱한 그 사이의 계곡들은 따뜻하고 행복한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병인양요 당시 조선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자 화가였던 쥐베르의 글에 드러난 조선의 모습은 우아하고 학구적이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 준 외국인이 있는가 하면 다른 시각도 있었다. “조선인은 1인당 쌀밥을 한 사발씩 1리터를 먹어치워도 충분하지 않고 2, 3인분 이상을 쉽게 먹는다. 우리 천주교인들 중의 한 사람은 나이가 30세에서 45세가량 되는데 어떤 내기에서 7인분까지 먹었다. 아무도 고기로 꽉 찬 접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일을 대접하려고 큰 복숭아를 내놓을 때에 가장 절제하는 사람이 10개 정도는 먹으며, 종종 30개, 40개, 50개를 먹는다. 참외를 먹을 경우 보통 10개 정도 먹지만 때때로 20개나 30개를 먹어 치운다. … 술을 마실 때도 임금이나 영의정 할 것 없이 모두 공공연히 폭음을 한다. 술에 취하면 정신을 잃고 바닥에 뒹굴거나 술을 깨기 위해 잠을 잔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이것은 큰 타락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이를 허용하며 아주 고상한 일이 된다.” 프랑스 신부였던 다블뤼의 기록은 조선인이 읽어도 이것이 어느 나라 이야기인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왜곡된 것이었다.

‘들돌들기’, ‘손더듬’ 등 조선시대의 성인식과
그 시대에도 ‘발렌타인데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매달이 청춘남녀들의‘데이’로 가득 차 바쁘게 돌아간다. 2월의 밸런타인데이와 3월의 화이트데이는 이젠 고전적인 기념일로 젊은이들에겐 전통의 명절 수준이 되었고, 5월 셋째 주 월요일은 ‘성년의 날’이라 하여 본래는 사회인으로서의 책무를 일깨워주는 날이지만 실제로는 꽃다발, 향수, 키스라는 낭만적인 조합으로 포장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발렌타인데이와 같이 사랑의 징표를 나누는 날과 성년의 날과 같은 기능을 하는 기념일이 있었을까? 오늘날 세상에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 대부분은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다.
조선시대 성년의 날에는 ‘관례’라는 이름의 성인식이 치러졌다. 사실 관례가 정확하게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삼국사기》에도 성인식이 치러졌음을 알려주는 구절이 보이고 《고려사》기록 속에도 고려 광종이 아들을 위해 관례를 치르고 연회를 베푼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의 뿌리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관례는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정신과 육체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15~20세 전후에 행해지는데, 왕실과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혼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혼하지 않은 자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 대우를 해주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연회를 베풀지는 못했지만 일반민들은 ‘들돌들기’라는 의식으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음을 주변에 알리곤 했다. ‘들돌들기’는 마을 어귀 성황당 나무 아래에 크고 둥근 바위를 두고 그 돌을 들면 어른, 들지 못하면 아이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농업이 국가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조선에서 제대로 된 성인 남자 한 명의 노동력으로 인정받느냐 아니냐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려 가장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의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육체적인 힘을 인정받는 것이 곧 성인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실제로‘들돌들기’를 해낸 자와 아닌 자는 품삯을 지급할 때에도 차등을 두었다.

일반민 여자의 경우는 ‘손더듬’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15세 전후의 딸을 동네 여인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길쌈 두레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날을 잡아 음식을 준비해서 동네 어른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아직 어려서 손으로 하는 섬세한 길쌈에 서툰 딸이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 여자처럼 일을 할 테니 잘 가르치고 이끌어 달라는 의미를 담은 행사였다. 남자의 ‘들돌들기’처럼 여자도 ‘손더듬’을 하고 나면 성인 여성 노동력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성인식인 관례를 치르고 본격적으로 몸도 마음도 한층 성숙해질 즈음의 젊은이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사랑에 눈을 뜨기 마련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고 봄을 알리는 개구리의 몸짓이 선명한 ‘경칩’(양력 3월 5일경)은 조선시대의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역할을 하며 연심을 품은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특별한 날로 애용되곤 했다. 단단한 껍질 속에 씁쓸한 맛이 나는 은행열매가 땅에 떨어져 싹을 제대로 틔우기만 하면 천 년을 가는 은행나무로 성장하는 것처럼 헤어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서로에게 은행을 선물한 것이다. 은행의 한자 표기는 ‘銀杏’로 은빛 살구라는 뜻이다. 작고 소중한 ‘은빛 살구’는 사랑의 징표로 사용되었다.

요즘 일부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몸에 문신으로 새기듯이 조선시대에도 문신으로 사랑을 증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새기는 문신을 ‘연비’라고 불렀다. 《성종실록》을 보면 양반가의 유부녀임에도 여러 남자와 정을 통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어우동을 잡아들였는데 팔뚝에 정을 통한 사내들의 이름이 가득하게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이름이 넘쳐나서 등에도 문신이 있어서 그들을 잡아들이고 어우동은 교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듯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연비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조선시대에 문신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간통을 조사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작가 소개

저 : 반주원
고려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 진학했다. 외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사 및 통합사회 강사로 메가스터디, 비타에듀, 비상에듀 등의 유명 대형 학원과 EBS 등에서 두루 강의를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국 최고 사탐 강사 5인(입시타임즈 선정)에 뽑히는 등 수능 영역에서는 10년 이상 최고의 사회과 스타 강사로 입지를 굳혔다. 이후 공무원 한국사 영역으로 강의 영역을 확장했으며, 현재는 TV 프로그램 ≪황금알≫에 한국사 전문가로 출연 중이다. 『반주원 한국사』 시리즈, 『반주원의 국사 교과서 새로보기』 외 다수의 저서를 편찬·집필하였다.

▣ 주요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시대를 막론하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인의 욕망
2장 남겨진 이혼의 기록, 나비를 주고받다?
3장 얼음 창고, 석빙고와 여름철 원기 충전 보양식
4장 한류, 귀한 그림 한 점과 감탄스러운 시와 학문
5장 삼작저고리, 스란치마, 너울… 규수와 기녀의 옷
6장 비밀리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자, 비선실세
7장 50세에 청려장과 80세에 조장, 노인을 위한 나라
8장 궁궐을 등진 ‘방배동’과 태생이 다른 마을, ‘이태원’
9장 여인이 빛났던 이유, 미모를 완성하는 후광 효과
10장 곡물가루와 약초로 목욕하고,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닦다
11장 권력의 균형을 위한 ‘언론삼사’, 억울한 백성을 위한 ‘격쟁’과 ‘상언’
12장 남성의 옷, 화려한 사라능단에서 면포, 마포로 만든 실용복까지
13장 발효과학 김장과 따뜻한 온돌방의 확산 과정
14장 깊은 밤 남몰래 처리하던 비밀스러운 달거리
15장 하멜과 다블뤼, 쥐베르…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
16장 국 먹기는 여름 같이 하며, 술 먹기는 겨울 같이 하라
17장 곱게 빗어 넘긴 머리, 관자와 풍잠으로 눈에 띄는 남성의 멋
18장 족보에도 기재된 ‘후부’라는 명칭과 재혼의 일종이었던 ‘보쌈’
19장 고초액으로 혈흔을 찾아내고, 엄격한 삼검제도로 최후를 판결
20장 끓는 가마솥에 풍덩? 팽형이란 무엇인가?
21장 사랑의 징표, 은빛 살구를 선물하고 연비를 새기다

작가 소개

목 차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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