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우리나라 국새의 역사
국새는 오래전부터 왕권의 상징물이었다. 고대의 기록으로 고구려에서도 왕권 계승의 상징물로 국새를 바치는 장면이 보인다. 고려와 조선의 경우에서도 유교(遺敎)와 국새의 전달이 즉위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국새의 수수(授受)는 곧 새 국왕의 탄생을 의미하는 중요한 행위였다. 즉위식에서 국새를 받음으로써 즉위의 정당성과 국왕으로서의 상징성이 완성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대보(大寶) · 국새(國璽), 고려시대에는 국새 · 국인(國印) · 어보(御寶) · 새보(璽寶)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이 용어는 물론 새(璽)와 보(寶)를 왕실 인장의 대명사로 사용하였으나 ‘국새’와 ‘대보’만은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용어로 국한하였다. 조선시대의 국새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왕위를 계승할 때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하였다. 또한 국왕의 각종 행차에서 행렬의 앞에서 봉송하였다.
조선시대의 외교용 국새는 대부분 명·청의 황제들에 의해 책봉과 동시에 사여(賜與)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 국새 내려주기를 여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태조 당대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건국 이후 명나라로부터 국새를 받기 이전 약 10년간 조선에서는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조선에서는 명·청과의 외교를 위한 국새를 받아 사용했지만, 국내의 각종 결재를 위한 국새는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의 시작은 주로 세종 때로부터 보이며, ‘신보(信寶)’와 ‘행보(行寶)’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인문(印文)은 각각 ‘국왕신보(國王信寶)’·‘국왕행보(國王行寶)’였다. 신보는 사신(事神, 기우제 등 신을 섬기는 일)·사유(赦宥,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하는 일)·공거(貢擧,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여 등용하던 제도)에, 행보는 책봉·제수(除授, 관직을 내리는 일) 등에 사용하였다.
신보와 행보는 고려에서도 사용하였으며, 중국의 새보 제도에 연원을 두었다. 신보와 행보로부터 시작한 국내용 국새는 이후 용도의 확장과 다변화로 매우 많이 늘어났으며 대한제국 이전까지 약 19과로 집계된다.
개화기를 전후하여 조선은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끝내면서 종전의 책봉에 의한 국새 인수 제도를 폐지하고 국내에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1881년 고종은 일본에 신사(信使)가 가지고 가는 국서(國書)에 기존에 사용하던 〈위정이덕(爲政以德)] 보 대신에 〈대조선국보(大朝鮮國寶)〉를 제작하여 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를 즈음하여 조선에서는 이 국새 외에도 〈대조선국대군주보(大朝鮮國大君主寶)〉, 〈대군주보(大君主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를 제작하여 외교 관련 문서에 사용하였다.
대한제국기에는 국새의 전면적인 교체가 있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한 직후 조선에서는 황제 즉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조야 각계로부터 쇄도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의 위압을 받아 정해졌던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광무(光武)’로 변경하고, 10월 초에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변경함으로써 505년간 지속된 조선 왕조는 종언을 고하였고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황제의 나라에 걸맞은 새로운 국새를 제작하였다. 이때 제작한 국새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3과, 〈칙명지보(勅命之寶)〉 2과,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흠문지새(欽文之璽)〉로 총 10과이다. 이 가운데 〈대한국새〉는 외교문서에 사용하고, 다른 인장들은 모두 국내용 행정 문서에 사용한 국새이다.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외에도 〈군주어새(君主御璽)〉와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비밀 국새가 있었다. 〈군주어새〉는 대한제국 선포 직전인 1897년 9월 프랑스와 독일 양국에 우호 증진과 상호 협조를 구하
는 내용의 친서에 찍혀 있으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유리필름으로 남아 있다. 〈황제어새〉는 대한제국 시기에 러시아, 이탈리아 등 각국에 일본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의 지지를 요청하는 친서에 사용한 인장이다. 〈황제어새〉의 존재는 문서와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었는데, 2009년 3월 한 재미 교포로부터 국립고궁박물관이 입수하여 실물을 확인할 수 있다.
어보의 제작 목적
어보는 왕실의 각종 의례 때 제작한 인장이다. 국가 의례 가운데 가례에 속하는 책봉 · 존호 · 존숭 의례와 흉례에 해당되는 국장 · 부묘 의례 때 해당 주인공에게 올렸다. 해당 인물의 위호를 새긴 어보를 주인공에게 바치는 일은 의례에서 가장 핵심적인 절차였다.
어보를 제작하는 대표적인 의례는 책봉이다. 책봉의 대상은 왕비를 비롯하여 왕세자, 왕세제, 왕세손과 그 빈들이었다. 또한 국왕과 직접 관련되는 의례 가운데 존호를 올리는 의례 때도 어보를 제작하였다. 존호는 국왕만이 아니라 왕후나 왕대비, 대왕대비 및 왕실의 선조에게도 올렸다.
어보를 제작한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존호를 올리는 의례와 더불어 국왕이나 왕비에게 묘호나 시호를 올리는 의례가 있을 때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이나 왕비에게 상사(喪事)가 있는 경우 궁궐에 혼전(魂殿)을 두고 3년의 상기를 마친 뒤 그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게 된다. 이때 붙인 이름이 묘호인데, 이것이 국왕을 호칭하는 대표적인 이름으로, 이때에도 어보를 제작하여 종묘에 봉안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어보는 실제 행정 문서에 찍는 실용적 목적을 위해 제작한 인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간혹 어보를 실제 문서에 사용한 특수한 사례가 있다.
어보를 문서에 사용한 드문 사례
우선 1401년(태종 1) 태상왕(太上王)으로 있던 태조 이성계가 후궁과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숙신옹주)에게 집과 땅을 상속하면서 준 문서인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淑?翁主家垈賜給成文)」이 있다. 이 문서는 조선시대부터 태조의 친필로 여겨져 석각으로 제작하여 탁본의 형태로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려 현재 여러 박물관과 도서관에 전한다.
조선 전기 어보가 찍힌 문서의 또 다른 사례로 「상원사중창권선문(上院寺重創勸善文)」이 있다. 1464년(세조 10)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 등이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고자 상원사를 중창하면서 지은 글과, 이 소식을 듣고 세조(世祖)를 포함한 왕실에서 물품을 하사한다는 내용이다. 이 자료에는 1458년(세조 4)에 제작한 세조의 〈체천지보(體天之寶)〉와, 1457년(세조 3)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에게 올린 존호보 〈자성왕비지보(慈聖}王妃之寶)〉, 1457년(세조 3) 예종(睿宗)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책봉인 〈왕세자인(王世子印)〉이 찍혀 있다. 이 가운데 현존하는 유물은 정희왕후의 어보뿐이다.
왕실의 어보를 공식 문서에 찍은 또 하나의 사례로 왕세자·왕세제·왕세손 대리청정기의 문서를 들 수 있다. 대리청정은 국왕이 연로하거나 중병으로 인해 직접 청정(聽政)할 수 없는 경우에 세자나 세제, 세손 등이 왕명에 의해 정사를 대신한 행위를 말한다. 대리청정기 문서 가운데 어보가 찍힌 사례는 휘지(徽旨, 4품 이상 고신), 영지(令旨), 영서(令書), 전문(箋文) 등이다. 각각 책봉 시에 받은 〈왕세자인〉, 〈왕세제인〉, 〈왕세손인〉을 찍었다.
이러한 몇몇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왕실의 어보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실제 행정상의 문서에 쓰이지 않았다. 생전에 받았던 책봉보인, 존호보 등은 해당 인물 자신이 직접 보관했고 사후 종묘에 봉안되었다. 추상존호보(追上尊號寶), 시호보, 묘호보 등도 실용을 목적으로 제작된 인장은 아니었다.
어보의 손잡이 모양
조선시대의 어보는 손잡이의 모양에 따라 용뉴(龍?, 용 모양 손잡이), 귀뉴(龜?, 거북 모양 손잡이), 직뉴(直?, 특별한 모양이 없는 손잡이)로 나눌 수 있다. 조선 전기 태조(太祖)와 정종(定宗), 태종(太宗)의 어보가 용뉴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유물이 현전하지는 않는다. 세종 대 이전까지 만들어진 용뉴 어보가 어떠한 이유에서 계속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대한제국 성립 이전까지의 동물형 어보는 모두 귀뉴로 제작하였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에는 귀뉴 어보와 더불어 황제국을 상징하는 용뉴 어보를 병용하였다. 방형의 귀뉴 어보는 앞 시대를 따라 꾸준히 제작하였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양식상의 변화가 뚜렷하다. 한편 직뉴형 어보는 3과가 있는데, 모두 조선 전기 왕세자빈에게 내려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중세로 올라가 보면 이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고려 명종 2년(1172)에 금나라로부터 받은 왕의 인장이 타뉴(駝?, 낙타 모양 손잡이)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후 공민왕 19년(1370)에는 명나라로부터 귀뉴의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명종 대에 받았다는 타뉴는 고대 한반도에서 예(濊), 부여(夫餘), 한(韓), 고구려(高句驪) 등이 진(晉)·한(漢)으로부터 받은 관인 유물에도 남았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본다면 고대로부터 12세기까지 중원으로부터 받은 인장의 뉴식은 유물과 기록을 통해 모두 타뉴이며 중원에 명나라가 들어선 14세기 이후로는 귀뉴로 정착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한제국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국새와 어보는 거북에서 용으로 일대 변화를 보였다. 조선시대에는 인장을 제외한 왕실의 각종 의물에서 용을 쓴 흔적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왕실의 각종 의물에는 용의 발톱 수에 따라 왕은 오조룡(五爪龍), 왕세자는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은 삼조룡(三爪龍)으로 규정하여 사용하였다. 이 규정은 세습하는 왕의 상징을 용 아래로 격하시킬 수 없는 불가피함과 더불어 용의 서열을 발톱 수로 정한다는 합리적인 계산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된다.
조선 왕실의 각종 의물에 용 문양을 사용한 데 반해 유독 인장에서만은 거북이를 고수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다른 기물에 비해 인장은 고대로부터 재질, 용어, 뉴식의 측면에서 국가 간 신분의 질서를 나타내는 전통이 있었다. 제후국인 조선에서 고대로부터 받아왔던 인장의 뉴식은 낙타와 거북이었다. 낙타는 한대(漢代)로부터 동북방에 부여된 인장의 상징이지만 실상 우리 민족과 그리 친숙한 동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제후국으로서 전통을 유지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거북이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조선시대에 명·청으로부터 받았던 6과의 국새 또한 모두 귀뉴였다. 그런데 어보를 그보다 높은 상징인 용으로 제작한다면 국새와 어보 사이에 위격(位格)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시대에 귀뉴를 고수한 이유는 선택이 아닌 당위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국새의 유실과 환수
조선 개국(開國)이래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각종 보인(寶印)과 부신(符信)의 모양을 그림으로 그려 설명하고 그 총수를 기록한 책인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실린 조선시대의 국새는 총 12과이며 이 가운데 현존 국새는 성암고서박물관이 소장한 〈선사지기(宣賜之記)〉와 2014년 미국에서 환수한 〈유서지보(諭書之寶)〉 등 2과에 불과하다.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는 조선시대 국새는 총 10과이다.
또한 『보인부신총수』에 실린 개화기 국새는 총 12과인데 이 가운데 현존 국새는 2014년 미국에서 환수한 〈준명지보(濬明之寶)〉 1과에 불과하며, 소재를 알 수 없는 개화기 국새는 총 11과이다. 특히 개화기 일본과의 외교 관계 변화로 인해 제작한 6과의 외교용 국새는 1과도 남아 있지 않다.
같은 책에 실린 대한제국 국새는 총 10과인데, 고종이 비밀리에 제작하여 외교 활동을 펼친 국새 3과를 포함해 대한제국 국새는 총 13과인 셈이다.
이렇게 국새의 사례만 들더라도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 사용하여 190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국새는 모두 37과에 달한다. 그러나 최근 환수한 국새를 포함하더라도 현재까지 파악된 사례는 8과에 불과하다. 29과의 국새 유물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는 셈이다. 국내외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이들 국새를 찾는 일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왕실문화총서(전 7권)
조선 왕실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실 문화의 본질과 형식이 잘 드러나는 상징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 시리즈는 왕실 문화의 핵심 주체인 국왕과 왕실을 상징화하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천착하여 이뤄낸 연구 성과이다.
1. 조선 국왕의 상징 / 정재훈
국왕의 상징을 ‘구상화된 것’과 ‘무형의 것’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상징성의 의미를 천착한 책이다. 왕의 상징이 제대로 상징성을 발휘하느냐의 여부는 백성과의 관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데, 역대 조선 왕들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그 변천 과정을 깊이 있게 추적한다.
2. 국새와 어보 - 왕권과 왕실의 상징 / 성인근
국가와 국왕의 인장이라 할 수 있는 국새와 왕실의 의물인 어보는 왕권의 신성함과 왕실의 권위를 나타낸다. 이 책은 국새와 어보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망라하면서 각각의 제작 방식을 알아보고 거기에 부여된 상징성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
3. 조선 왕조의 의궤와 왕실 행사* / 김해영
의궤는 의례의 법식에 관한 책자이자 각종 국가적 행사 내역에 대해 기록한 책자이다. 이 책은 문화의 반복과 전승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고유의 전통을 만들어낸 의궤의 모든 것을 상징성의 측면에서 연구한 성과를 담아냈다.
4. 조선 왕비의 상징* - 여성 최고 권력자의 상징 코드 / 이순구
자리가 이미 정해진 왕과 달리 왕비의 상징성은 더더욱 중요했다. 새롭게 부여되는 상징성을 통해 곧바로 권위의 완전성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왕비의 위치를 확고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왕비의 상징성 또는 상징물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있게 연구한 책이다.
5. 등록, 왕자녀와 후궁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다* / 김지영
왕자녀와 후궁의 일생 의례를 담고 있는 등록은 왕실 문화의 상징으로, 그 안에는 왕실 가족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등록 속에 담겨 있는 생생한 왕실 가족 이야기와 왕실의 문화 요소들을 깊이 있고 세심하게 풀어내 왕실 문화의 진면목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한다.
6. 국왕의 혼령과 신주* / 임민혁
생전의 국왕 권력이 사후에도 유지될 수 있도록 고안해낸 상징물은 종묘에 봉안된 신주이다. 여기서 가장 중시된 의례는 제사이며, 이는 국왕 권력을 보장하는 절대선이었다. 이미 형성된 왕권의 상징이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사후에도 종묘와 왕릉이라는 상징물로 순환하는지를 밝힌 책이다.
7. 국장과 왕릉- 국왕의 사후 상징과 만나다* / 장경희
국왕의 사후에 육신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문제는 유교 윤리의 실천과 종법 사회의 건설, 왕권의 유지와 영속의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이 책은 국장의 절차와 왕릉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 권위와 상징성의 의미를 풀어낸다.
(* 표시는 근간)
작가 소개
저 : 성인근
계명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서예를 전공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의 인장사(印章史)를 역사학, 문헌학, 전각학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동양화·서예 전공 초빙교수로 있다. 저서로 『한국인장사』(다운샘) 등이 있고, 「조선시대 어보의 상징체계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목 차
서론 - 국새(國璽)와 어보(御寶)의 상징성
1장 왕권의 상징, 국새(國璽)
1. 아시아의 국새 전통
2. 한국 국새의 흐름
3. 국왕의 책봉과 국새의 인수
4. 국왕의 즉위와 국새의 인계
2장 국새의 종류와 쓰임
1. 조선시대의 외교용 국새
2. 조선시대의 내치용 국새
3. 개화기의 국새
4. 대한제국기의 국새
3장 왕실의 상징, 어보(御寶)
1. 어보의 개념
2. 신분과 상징
3. 어보의 용도
4장 국가의 의례와 어보의 제작
1. 왕실의 책봉과 어보
2. 국장(國葬)과 어보
3. 존숭, 추숭과 어보
4. 숙종과 그 왕후들의 어보
5. 어보의 봉안과 관리
5장 어보의 제작 과정
1. 도감의 구성과 행정
2. 장인의 종류와 역할
3. 어보의 의장품
6장 유물에 담긴 상징성
1. 어보의 서체와 상징
2. 어보의 뉴식과 상징
3. 어보의 재질과 상징
7장 국새와 어보의 수난
1. 조선시대의 전쟁과 파손
2. 현대의 전쟁과 유실
3. 왕실 인장의 환수 사례
4. 현황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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