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계몽주의와 시민사회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예법이 확산되던 18세기, 이탈리아의 귀족 계급은 ‘치치스베오’라는 독특한 관습 혹은 현상을 만들어낸다. 이 특이한 사회적 페르소나는 대개 연하의 귀족청년에게 맡겨지는데, 그는 자신이 시중드는 귀부인의 집에서 환담과 오락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며, 그녀가 외출할 때는 항상 옆에서 보좌한다. 이 관습을 지극히 이탈리아식으로 만드는 요소는 그의 존재가 귀부인의 남편이 공인하는 ‘공적’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많은 유럽 지식인까지도 의아해했던 이 흥미로운 현상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으며, 한 세기 만에 사라져버린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 책은 다양한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시 문화사이며, ‘콘베르사치오네’라는 르네상스 이래의 사교성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최근 연구가 점화되고 있는 감수성의 역사이기도 하다.”_추천사 중에서
공식적으로 허락된 귀부인의 남자
《이탈리아어대사전》은 치치스베오를 “18세기에 발달했던 관습에 따라 남편이 부재중일 때 귀부인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모든 활동을 챙기고 돕는 시종기사(cavaliere servente)” 라고 정의합니다. 치치스베오는 귀부인의 사교 모임에 동행하는 젊은 귀족 남성을 가리킵니다. 귀부인의 지루하고 습관적인 일상을 함께하는 동반자이기도 하지요. 귀족 가문에서 일어나는 여러 갈등을 능숙하게 중재하는 해결사이기도 합니다. 치치스베오 한 명이 귀부인 여럿을 수행하기도 하고, 한 귀부인이 동시에 여러 치치스베오를 거느리기도 합니다.
치치스베오의 선택과 활동은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계약입니다. 치치스베오의 서비스가 남성 사이의 계약에 기초하며, 따라서 보통 미망인은 치치스베오를 두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귀부인과 치치스베오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통해 밀도 놓은 친밀감을 유지하는, 평온하고 안정된 우정의 관계였습니다. 젊은 귀족 남성에게는 귀부인을 수행하면서 세속 생활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치치스베오가 귀부인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감정적 끌림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치치스베오가 흥미로운 지점은 성적인 방종이나 외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한 여성에게 다른 남성의 접근이 ‘공식적으로’ 허락됐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귀족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
저자는 당대의 방대한 1차 사료를 검토하여 역사 속 실제 치치스베오의 모습을 재구성합니다. 실제로 귀부인과 치치스베오 사이에서 오갔던 편지나 일기 등을 주된 사료로 활용하지만, 그림을 비롯해 수많은 희곡과 소설과 회고록 등 문학작품, 여행자의 기록, 카페 주인이 남긴 목록, 소송 기록 당사자 간에 주고받은 편지 등 흥미로운 사료들도 많이 등장합니다. 정확하고 상세한 사료를 통해 각 인물의 구체적인 이야기에 접근하는 순간, 별달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았던 목록조차도 출처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소설 속 이야기를 따라가듯이 인용한 사료들을 따라 읽는 재미가 그만입니다.
저자는 치치스베오를 근대 이탈리아의 귀족 문화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활용합니다. 치치스베오가 남편을 대체하던 혹은 남편과 협력하던 새로운 유형의 동반자가 된 까닭은 앙시앵 레짐 시기의 귀족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그들의 결혼 및 상속 관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치치스베오와 관련되어 있는 유럽의 여러 문화 현상들, 즉 계몽주의, 귀족 계층의 유산 상속 문제, 가족 윤리, 성 풍속, 그랜드 투어 등이 함께 다루어집니다. 이탈리아에 대한 유럽인의 편견 등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치치스베오와 관련된 물질적, 정신적 배경이 상세하게 재구성돼 있습니다.
여성의 삶과 조건 그리고 소멸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 책의 핵심입니다. 저자는 치치스베오의 발생과 소멸이 무엇보다 여성에 대한 관념의 변화,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결국 남성에 의해 부과된 틀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치치스베오의 사회적인 삶은 ‘사교’ 혹은 ‘교제’라고도 불리는 더 광범위한 문화적 맥락 안에 들어갑니다. 18세기 이탈리아 귀족 사회에 폭넓게 확산되던 사교 문화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유럽 지배 계급의 새로운 문화를 상징하는 갈랑트리(여성에 대한 예의를 강조하고 여성의 환심을 사려는 태도)가 무르익어간 것입니다. 가정의 영역에 은둔해있던 여성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남녀가 상당히 빈번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갈랑트리와 자유연애가 성행하는 이 새로운 만남의 장에서 여성들의 곁을 지켰던 연하의 남성 귀족이 바로 치치스베오였습니다. 치치스베오는 한편으로는 여성들에게 가부장적인 가족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정 바깥의 영역에서 여성의 부정(不貞)을 통제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치치스베오의 관습은 루소의 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가족 윤리의 등장과 함께 한 세기만에 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프랑스 혁명기의 금욕적인 부르주아 윤리가 이탈리아에 전파되면서 치치스베오의 활동 무대인 사교의 장을 근절되어야 할 악덕의 온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19세기 민족주의의 등장과 함께 완전한 종말을 맞습니다. 모든 개인을 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 속하게 만드는 새로운 이념 아래에서 귀족 계층의 난혼(亂婚)과 연결되던 치치스베오의 관습은 윤리적 관점뿐만 아니라 유전적 관점에서도 하나의 얼룩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기 남성들에게는 조국을 지키는 전사로서의 남성성이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영웅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정절과 순결함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18세기 사교의 주인공이었던 여성들은 다시 가정의 영역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가정 바깥의 영역에서 그들을 수행했던 치치스베오 역시 존재의 이유를 상실합니다. 완전히 사라진 관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로베르토 비조키
이탈리아 피사대학교 사학과 교수. 1981년 피사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르네상스 연구센터와 런던 바르부르크 연구소 그리고 우디네 대학교를 거쳤다. 교회제도사와 지성사, 문화사 그리고 여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믿을 수 없는 족보》, 《가족 안에서: 근대 이탈리아의 매력과 애정의 역사》, 《근대사 연구 입문》, 《근대 이탈리아의 성직 계층》, 《15세기 토스카나의 교회와 권력》, 《이탈리아 도서관과 왕정복고 시기의 문화》, 《마키아벨리의 독자 구이차르디니》 등이 있다.
옮긴이 : 임동현
한국외국어대학교, 인천대학교, 아주대학교, 신한대학교에서 서양근대사와 이탈리아사를 강의하고 있다. 2016년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에서 잠바티스타 비코의 보편사 서술에 관한 연구로 역사학 분야 국가연구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관심 분야는 근대 유럽의 지성사와 종교사, 여성사, 계몽주의, 비코 연구 등이다. 주요 저서로는 《이탈리아역사 다이제스트 100》, 대표 논문으로는 〈Vico and the disgregation of historia salutis〉,〈비코의 자기검열〉, 〈유럽의식의 위기와 비코의 로마사 서술〉,〈피에트로 베리와 계몽주의 여성관〉, 〈근대 자연법사상의 대두와 가톨릭 세계의 저항〉 등이 있다.
목 차
추천의 말
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1. 치치스베오는 누구였는가?Introduzione. Chi erano i cicisbei?
2. 계몽주의 세계 안에서Nel mondo dell’lluminismo
치치스베오의 사교
치치스베오와 유사한 관습
통제 혹은 자유
위협적이지 않은 적
3. 18세기 사회 안에서Nella societa del Settecento
독신과 치치스베이스모
동맹의 논리
삼각관계
4. 치치스베오의 지정학Una geopolitica dei cicisbei
도시 귀족 사이의 치치스베오
그 밖의 치치스베오
콤파레와 치치스베오
5. 에로티카Erotica
치치스베오와 연인
계몽된 결혼
멋들어진 등허리
6. 금지된 치치스베오I cicisbei al bando
우스꽝스러운 제목
거부된 삼각관계: 테레사와 페데리코
민족을 위한 가족
옮긴이의 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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