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냉전의 흐름을 거슬러 그 너머를 상상한
대한민국 현대 지성사의 계보
이 땅에 남은 ‘일본 총독’이 본 통일 해법
지난 7월 우리 곁을 떠난 소설가 최인훈 선생이 살아 있다면, 과연 요즘 무슨 말을 했을까.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이렇게 무르익어 가는데도, 여전히 북한을 조금도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언론을 두고 말이다.
1970년대 그가 쓴 소설 《총독의 소리》에는 해방 이후 한반도에 몰래 남아 제국 일본의 부활을 꿈꾸며 행여 한반도가 통일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일본 총독이 등장한다. 그는 밤마다 지하방송을 내보내는데, 여기엔 현재 우리가 여전히 귀담아 들을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 흡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남북 양 체제를 각각 극도로 합리화시키는 경지로 통일을 표현한 대목이 바로 그렇다.
“통일의 가장 쉬운 길은 남북이 군비 경쟁을 버리고 각기 체제의 합리성을 높여가는 길입니다. …… 통일은 민족의 힘의 합리화에 비례하고 전쟁에 반비례한다. …… 총독부는 반도인들이 이 같은 해답에 다가서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42년 전에 쓰인 이 소설에는 그로부터 24년 후 공식화된 6.15 남북공동선언을 연상시키는 데가 분명 있다. 도통 멀게만 느껴지는 통일문제를 이런 식으로 일찌감치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38선 이북 태생인 소설가의 직관에 가까운 통찰인지 모른다. 그러기에 한반도 전환기를 맞아 냉전과 분단이 빚어낸 뒤틀린 질서와 씨름했던 한국 현대 지성들의 발자취를 지금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와 의의는 분명하다.
해방기의 ‘중간파’에서 제3공화국 시절 함석헌까지
이 책은 한국의 지성사에서 최인훈과 같이 일찌감치 냉전의 본질을 꿰뚫어 본 인물들, ‘글로벌한 대세’였던 냉전의 흐름을 거스르며 길 없는 곳에 감히 길을 내고자 분투했던 시도들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 모은, 일종의 ‘계보 만들기’ 작업이다.
해방기에 ‘중간파’ 혹은 ‘남북협상파’라 불렸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설가 염상섭이 이 계보의 첫 번째 순서에 놓였다. 서울 중산층들의 삶을 그린 소설가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염상섭이지만, 해방기의 그는 ‘남북협상파’를 적극 지지했던 명민한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을 적敵으로 돌려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현실 판단이 무모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역시 거부했던 중도변혁적 세력의 편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당국의 가혹한 검열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런 자신을 닮은 인물들을 이 시기 소설 속에서 자주 그려 내었다.
이 책은 해방기의 염상섭으로부터 시작해 정치인 여운형과 조봉암을, 1960년대의 최인훈과 이호철, 동양사학자 김준엽, 민두기를 그리고 1970년대의 장준하, 함석헌, 리영희와 같은 인물들을 지금.여기로 다시금 불러내었다. ‘인물’뿐만이 아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64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운동, 1955년의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와 같은 ‘사건’도 이 책이 특별히 주목하는 포인트다. 미국과 소련 양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임이었던 반둥회의는 이후 ‘제3세계’라는 새로운 정치 개념과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시도들이 각자의 한계를 안은 채 성공적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결국 좌절되는 과정도 이 책에서 같은 비중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지점들이기도 하다. 어느 지점에서 현저하게 빛났고, 또 어느 지점에서 허망하게 삐끗하며 결국 무너져 버렸는지,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하고 복기한다는 것.
결국 계보를 만드는 일이란, 그것이 사건이든 사람이든 앞선 시간과의 영향 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발상에서 시작한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냉전 패러다임의 전환은 지나간 시간 속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채 싹을 틔우지 못해 과거에는 비록 명백한 실패의 형상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들은 우리 안에 문화적.상징적 유전자로 각인되어 단절적으로든 격세유전隔世遺傳의 형태로든 이미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독일 역사학자 코젤렉의 ‘개념사’ 틀에 빚진 구성
냉전과 냉전의 ‘결을 거스르는 움직임’이란 주제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이 책은 개념사의 틀을 빌려왔다. 냉전을 거스르는 힘이란, 바로 동일한 개념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의지, 당대와는 다른 현재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코젤렉의 개념사가 이미 주류가 된 정치, 사회 개념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 책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개념들에 주로 주목했다. 원래 마이너한 개념들이었다기보다는 냉전을 둘러싼 국제, 국내 정세에 따라 급격히 주변화되거나 심지어 금기taboo시 되었던 개념들인 셈이다. 해방기의 ‘중간파’(1장), ‘농민’(2장), 한국전쟁기의 ‘포로’(3장), 1960년대의 ‘동양/아시아’(4장, 6장) 및 ‘북한’(5장), ‘식민(지)’(8장) 그리고 1970년대 초반 ‘평화’(9장)와 같은 개념들이 그것이다.
이 책이 갖는 현재적 의의
남북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역내域內 그리고 북미 관계의 대전환을 앞두고 너나 할 것 없이 평화를 이야기하는 즈음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평화를 ‘위장’ 내지 ‘기만’, ‘거짓’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대등한 핵 보유를 통한 공포의 균형이라는 관점에 입각해서만 평화를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상당수 존재한다. 결국, ‘진영논리’로 뭉뚱그려 부를 수 있는 이 현상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개념이 단지 사유의 영역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불러 모은 탈냉전적 상상의 계보들은 그저 먼지 묻은 아카이브 속에서 잠자는, 아무래도 좋을 과거가 아니다. 오늘의 한반도에 불어오는 시대정신Zeitgeist이 화해와 평화라면, 부디 “지금 시간으로 충전된 과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목록들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더 많이 갖게 될수록 ‘한반도의 봄’은 우리 곁에 다가와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비관론’에 대해
이 책은 ‘우리 시대의 비관론’이 어디서 발원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 ‘국면 전환’에 관해 쏟아지는 미국 내 대다수 소위 한국 ‘전문가들’과 그에 편승한 한국 사회 일각의 ‘트랜스내셔널한’ 비관론에는 아무래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그런 종류의 비관은 스스로 한 말을 번복하고 있으며, 그 뿌리가 결코 깊지도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의 모순을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한 냉전 종식의 세계적 전환기를 떠올려 보자. 당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부상했던 슬로건은 바로 ‘역사의 종말’이었다. 드디어 ‘자유민주주의’가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고야 말았다는 자신감, 영원할 것으로만 여겨졌던 숙적의 라이벌에게 승리했다는 기쁨. 그리하여 인류는 역사의 최후 종점에 다다랐다는, 그토록 의기양양하게 울려 퍼졌던 선언 말이다. 커다란 국면 전환기에 사람들이 느끼게 마련인 근본적인 불안에 대해, 그 책의 저자가 누차 언급했던 내용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 하나를 떠올려 보자.
현명한 사람들은 자주 비관론에 끌리지만, 그것이 반드시 지혜로운 판단은 아니라고. 그래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교훈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작가 소개
연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상상된 아메리카와 1950년대 한국문학의 자기표상〉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인하대학교 한국학 연구소를 거쳐 2018년 현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45년 이후 미국이 개입해서 형성된 동아시아의 냉전 문화를 살펴보는 데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상상된 아메리카》, 《슬픈 아시아》가 있다. 옮긴 책으로는 《냉전문화론》 등이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는 《냉전과 혁명의 시대 그리고 〈사상계〉》, 《한국의 근현대 개념으로 읽다》 등이 있다.
목 차
책머리에
1부 개념의 분단, 적대의 기원
01_사라진 중도 자유주의의 상상력: 염상섭의 《효풍》을 통해 본 ‘중간파(남북협상파)’의 행방
해방 직후의 정치 지형도|‘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중간파’의 목소리들|바람이 멈춘 곳, 그리고 ‘중간파’의 행방
02_‘해방’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 빈곤 대중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해방’, 몫 없는 자들의 귀환|농민은 어떻게 정치화되는가|《농민주보》 혹은 치안으로서의 미디어|빈곤 대중의 존재론과 정치의 행방
03_한국식 냉전 주체의 기원: 포로수용소의 생명정치: UN군 관리 포로수용소 서사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포로라는 존재|UN포로수용소의 특이성singularities|포로란 누구인가: 남한 냉전 주체의 원형과 ‘증언’의 영역|자유로운 개인과 인권의 아이러니, 그리고 포로들의 글쓰기
2부 냉전이 만든 지식, 냉전을 넘어서는 지식
04_미국도 소련도 아닌 다른 길은 없는가: 반둥회의와 한국 지식인들의 아시아 상상(1955~1965)
반둥회의와 ‘제3세계The Third World’|1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1955)와 아시아 상상|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1965)의 좌절과 아시아 상상의 행방|인터내셔널리즘으로서의 아시아는 불가능한가
05_원한, 노스탤지어, 과학: 월남 지식인들과 1960년대 북한 학지學知의 성립 사정
월남 지식인들의 북한 재현이라는 문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터부에서 실재로|노스탤지어의 종언과 지역연구area study와의 접속|“생은 다른 곳에”: 경계인의 운명과 내부 비판의 상상력
06_라이샤워와 전후 미국의 지역연구: 한국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지역연구와 싱크탱크think tank|부활하는 전전戰前의 권력-지식: 트랜스퍼시픽의 미?일 네트워크|《동양문화사》의 표층 서사와 심층 서사|위계화된 내러티브와 한국학의 장소location|타자의 목소리, 비판의 새로운 전통을 위하여
3부 혁명의 정념과 데탕트détente의 힘
07_“우리는 시민이다”, 한일협정 반대운동과 《사상계》의 마니페스토
《사상계》의 변전,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6?3|6?3세대와의 연대와 시민불복종|군사정권과 《사상계》의 민족주의 경쟁|‘실재’하는 미국과의 조우|시민과 ‘국민’ 사이에서
08_“식민지는 과연 사라졌는가”: 최인훈의 질문과 제3세계적 상상력
1960년대 일본 상상과 최인훈 텍스트|회귀하는 식민지: “일본이 다시 온다”|‘신식민주의’란 무엇인가: 제국 일본을 통해 바라본 서양|제3세계 내셔널리즘의 당대적 가능성
09_7.4 남북공동성명과 함석헌의 반反국가주의적 평화 개념
‘냉전-평화’와 데탕트détente의 도래|‘평화’와 ‘통일’의 결합은 가능한가|‘평화’의 상이한 기대지평들|함석헌을 넘어서-민중의 확장 혹은 ‘제3세계’의 발견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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