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I. 책의 구성
이 책은 프랑스의 한 귀족부인이 직접 체험한 프랑스혁명에 대한 회고록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전문 역사가가 쓴 프랑스혁명사도 아니며 전문 작가가 쓴 프랑스혁명사 이야기도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서 체계적인 학술적 분석이나 문학적 기술을 기대할 수는 없다. 프랑스혁명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 특히 저자가 겪은 반혁명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이 없다면, 이 책을 역사적으로 가치 있게 만든 방데 전쟁에 대한 기술이 무의미하고 지루한 전쟁 이야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프랑스혁명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혁명이 아니라 반혁명의 시각에서, 승자가 아니라 패자의 입장에서 혁명을 바라본다면 전에 보이지 않았던 슬프고도 위대한 측면들이 드러날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의 ‘기억’은 프랑스혁명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은 모두 28장과 ‘보유’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저자의 출생에서부터 1789년 5월 5일 삼신분회가 소집될 때까지의 저자와 저자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2장은 삼신분회 소집부터 같은 해 10월 6일 파리 민중이 베르사유를 공격하여 왕실과 의회를 파리로 옮겨가는 이야기이다. 당시 저자는 베르사유에 살았으므로 베르사유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제3부는 왕실이 파리로 옮겨간 후 저자의 가족이 프랑스 중서부의 가스코뉴 영지로 내려가서 살던 이야기이다. 저자와 남편 레스퀴르 후작은 망명을 떠나는 길에 파리의 왕궁에 들렀다가 왕비의 권유로 파리에 남아 1792년 6월 20일 파리 민중의 왕궁 공격 사건을 목격한다. 제4장은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왕궁을 공격하여 사실상 왕정을 붕괴시킨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8월 10일 사건은 “제2의 프랑스혁명”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사건인데, 이 사건에 대한 저자의 기록은 상세하고 생생하여 높은 사료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된다.
제5장부터 제21장까지는 이 책의 핵심인 방데 전쟁 체험기이다. 방데 전쟁은 1793년 3월에 시작되어 그해 12월 말에 끝난다. 당시 프랑스는 주변국과의 전쟁, 서부의 방데 전쟁, 남부의 대도시들에서 일어난 소위 연방주의 반란으로 그야말로 존망지추의 위기에 빠져 있었다. 혁명정부는 ‘공포정치’라는 방법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방데 전쟁과 연방주의 반란에 대한 진압과 사후처벌은 대단히 잔혹했다. 방데 전쟁으로 전체 주민의 3분의 1인 20만 명의 방데인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혁명정부가 양민 수만 명을 학살한 것에 주목하여 방데 전쟁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인종 학살)가 자행되었다는 주장을 했고 이후 프랑스혁명사에서는 제노사이드 논쟁이 벌어졌다. 학살의 성격이 제노사이드인가 아닌가 여부를 떠나 혁명정부가 비무장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혁명 이념에 감추어진 ‘폭력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혁명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니만큼 방데 전쟁에서 혁명의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차원에서 저자의 기술은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전투 이야기가 산만하고 지루하게 계속되지만 ‘폭력’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다면 의미 있는 혁명사 공부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제22장부터 제25장까지는 1793년 12월 말 사브네 전투 패배로 방데 전쟁이 소멸된 후 브르타뉴 지방의 벽촌 농가에 숨어 살다가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끝나 그해 말 사면될 때까지 저자와 저자의 동료들이 겪은 이야기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방데인 도망자들을 보호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난하고 무지하며 광신적인 농민들은 광신적인 가톨릭 사제들과 여자들의 사주를 받아 반혁명에 동원되었다는 역사가들의 설명이 농민들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 편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다. 방데 전쟁 도망자들을 보호해준 브르타뉴의 농민들은 비록 가난하고 무지했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였다.
제26장부터 마지막 제28장까지는 저자가 방데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 후작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 후작과 결혼한 이후 남편이 보르도 지방의 왕정복고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한 이야기이다. 『회고록』은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이 국왕 루이 18세를 알현하는 것으로 끝난다. ‘보유’는 저자가 브르타뉴 지방에 숨어 지낼 때 보호해준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이 방데 전쟁 이후 전개되는 슈앙 반혁명운동에 가담하여 싸운 이야기이다.
제1장부터 제3장까지와 제26장부터 제28장까지는 다소 산만하고 지엽적인 이야기이니 독자들은 제4장부터 제25장까지의 방데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읽는 것이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반혁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II. 저자의 생애
마리 루이즈 빅투아르 드 도니상(Marie Louise Victoire de Donnissan)은 1772년 베르사유에서 태어나 1857년 사망했다. 그녀는 고위 궁정귀족인 기 조제프 드 도니상 후작과 마리 프랑수아즈 드 뒤르포르 드 시브라크의 무남독녀로 태어났으며, 화려한 궁정생활을 누리며 자랐다. 루이 16세의 고모인 마담 빅투아르와 루이 16세의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왕정복고 후의 루이 18세)이 그녀의 대모와 대부를 섰다. 마담 빅투아르는 왕궁에서 저녁을 마치면 저자의 외할머니 집에 와서 시간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그녀의 집안은 왕실과 밀착되어 있었다. 1791년 그녀는 이종사촌인 루이 마리 드 레스퀴르 후작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삶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래 레스퀴르 후작도 다른 대부분의 귀족처럼 망명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과 왕비의 권유로 파리에 남았고, 1792년 8월 10일 파리 민중이 왕궁을 공격하여 왕권을 정지시키는 엄청난 사건을 체험했다. 그들은 귀족이라는 이유로 파리 민중에게 붙잡혀 학살당할 위험을 간신히 넘기고 고향인 푸아티에로 낙향하여 조용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93년 3월 방데 지방에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레스퀴르 후작이 농민군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그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가톨릭 근왕군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하여 혁명 파리를 위협할 정도였으나 그해 10월의 숄레 전투에서 패한 후 루아르강을 건너 브르타뉴 지방을 유랑하다가 1793년 12월 말 사브네 전투에서 패한 후 사실상 소멸된다.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브르타뉴 지방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숨어 지냈다. 농민들은 목숨 걸고 방데 전쟁 도망자들을 보호해주었다. 1년간의 도피 생활은 혹독한 빈곤과 고통과 불안의 시간이었으나, 동시에 브르타뉴 농민들의 소박한 삶과 용기와 인간미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아홉 달간의 전쟁에서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어린 딸을 잃었으며, 도피 중에 태어난 두 딸 역시 도피 중에 세상을 떠났다.
1794년 말 단행된 사면으로 레스퀴르 후작부인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1802년에 레스퀴르 후작의 사촌이며 방데 전쟁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의 동생인 루이 드 라로슈자클랭과 재혼하여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이 되었다. 루이는 방데 전쟁 중에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정복고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814년 왕정복고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815년 권좌에 복귀한 나폴레옹에 맞서 방데 봉기를 주도하다가 사망했다. 저자의 둘째 아들인 루이 앙리는 1830년 혁명으로 왕위를 빼앗긴 샤를 10세의 며느리인 베리 공작부인이 주도한 방데 봉기에 가담했으며 1833년에 리스본 전투에서 사망했다.
1832년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방데 지방 지역인 푸아투를 떠나 두 딸이 사는 오를레앙으로 올라왔다. 마침 오를레앙에서는 방데 봉기에 가담했던 왕당파 피의자들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집필을 도와준 유력 정치가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1782~1866) 같은 인사들에게 청원하여 그들이 무죄 방면되도록 돕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지고 방데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농민들을 돕는 일에 전념했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1857년 2월 15일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귀족은 두셋에 불과했고 나머지 200~300명은 빈민이었다. 당국은 장례식이 정치집회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장례식은 후작부인의 관대하고 고결한 덕성을 기리는 종교적인 집회가 되었다. 장례식에 참석하여 추도사를 한 푸아티에의 주교는 그녀가 자선사업에 헌신했음을 찬양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방데 전쟁의 지도자들은 신(神)이었다”는 정치적인 발언을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첫 남편인 레스퀴르 후작은 ‘푸아투의 성인’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방데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방데 전쟁의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일반 농민들도 놀라운 종교적인 덕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회고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방데 전쟁은 가톨릭을 파괴한 프랑스혁명이라는 대체종교에 맞선 ‘성전’의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다.
III. 『회고록』 출판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1794년 말에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혁명력 5년 수확월 18일(1797년 9월 4일)의 위기가 발생하면서 후작부인의 삶에 파란이 일어났다. 후작부인은 혁명기에 망명을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망명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안에 있다가 발각되면 망명자로 취급되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후작부인은 스페인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8개월 후에 망명을 떠나지 않았음이 인정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롱드도(道)에서는 망명자 명부에서 삭제했으나 파리에서는 삭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또다시 망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스페인으로 망명을 가서 10개월 체류한 후 1799년 5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녀가 『회고록』 집필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후작부인은 1802년 재혼한 후 한동안 중단했던 회고록 집필을 계속했고, 방데 전쟁 중에 함께 생사를 넘나들었던 어머니와 전쟁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초고를 완성했다. 후작부인이 초고의 내용을 수정하고 표현을 다듬는 데 도움을 준 사람은 역사가이고 작가이며 정치가인 프로스페르 드 바랑트였다. 바랑트는 1807년부터 1815년까지 브레쉬르 군수, 방데도(道) 지사, 루아르 앵페리외르도(道) 지사 등을 역임하면서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 부부와 친교를 맺었으며, 후작부인의 원고를 읽고 수정하고 정리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후작부인의 초고에 담겨 있던 솔직하고 거친 표현들은 바랑트의 문재(文才)를 통해 정제되어 1814년에 출판되었다.
『회고록』은 전(全)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에서는 1889년 이전에 최소한 13판이 출판되었으며, 1816년에는 미국에서, 1817년에는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벨기에에서는 2판, 영국에서는 5판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월터 스콧이 1816년에 『회고록』을 직접 번역하고 감동적인 서문을 붙였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회고록』은 옛 공포정치가인 메르시에 뒤 로셰 같은 잔혹한 반대자들의 비판적인 검토를 견뎌내었다는 점이다. 『회고록』은 방데 전쟁을 증언해주는 귀중한 사료임을 양측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프랑스혁명을 둘러싼 논쟁에서 수정 해석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퓌레도 방데 전쟁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이 『회고록』을 꼽고 있다.
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후작부인의 원고가 책으로 완성되는 데 있어서 바랑트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이 번역판의 ‘저자 서문’에서도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작업은 후작부인의 원고를 바랑트가 읽고 다시 후작부인이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1814년과 그 이후에 출판된 『회고록』의 내용, 표현, 판단, 문체 등이 후작부인의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역사가들에게는, 바랑트가 정제하기 이전의 더 솔직하고 순수하며 가공되지 않은 후작부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바람이 컸고, 또 거기에 더 많은 사료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1889년에 후작부인의 아들인 쥘리앵 드 라로슈자클랭이 펴낸 『회고록』은 이러한 바람에 따라 필사본 원고를 토대로 출판한 것이고, 2010년에 알랭 제라르가 펴낸 『회고록』은 쥘리앵 드 라로슈자클랭의 『회고록』에서 정제되기 이전의 더 순수한 필사본 원고를 토대로 출판한 것이다.
여기에 번역한 1848년판은 제6판이므로 후작부인이 사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나온 책이다. 제5판까지는 초판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제6판은 구성이 달라졌다. 원래 필사본에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세 장(章)으로 구성했었으나 1814년의 초판에서는 그것을 하나의 장으로 줄였던 것을 1848년판에서는 원래대로 세 장(책의 제1장, 제2장, 제3장)으로 구성했다. 또 1848년판에서는 초판에 있던 보유를 3장으로 늘렸고(제26장, 제27장, 제28장), 브르타뉴 지방에 숨어 지낼 때 도움을 준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기술을 덧붙였다.
『회고록』이 사료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솔직하고 사실적인 기술 때문이다. 후작부인이 간결한 문체를 고집한 이유도 간결한 문체만이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회고록』의 문체는 간결하며 내용은 솔직하고 냉정하다. 독자들은 후작부인이 처했던 고통스러운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후작부인의 솔직한 표현을 보면 인간미를 느끼게 된다. 1792년 8월 10일, 왕궁을 공격하는 파리의 상퀼로트를 피해 남편과 함께 도망 다니던 후작부인은 극심한 공포에 이성을 잃고서 급기야는 “상퀼로트 만세! 불을 비추어라! 유리창을 부숴라!”라고 마치 상퀼로트처럼 외쳤다. 스무 살의 젊은 귀족부인은 너무도 무서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고백할 정도로 후작부인은 솔직하다. 개인적으로 역자는 이 대목을 읽고서 후작부인의 기술을 신뢰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793년 10월 루아르강을 건너 유랑할 때는 병사들과 비무장인(여자, 어린이, 노인들)이 함께 이동했다. 적군의 공격으로 패배가 확실해지자, 후작부인은 농민보다 더 농민답게 옷을 입고서 미친 듯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앙제를 공격할 때 후작부인은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일종의 착란상태에 빠졌다. 말을 타고 무작정 전진하는 그녀를 아버지가 구해주었는데, 그때의 상황을 그녀는 “나는 내가 찾아 나선 위험에서 벗어날 때 은근한 만족감을 느꼈다”고 기술한다. 브르타뉴 지방에 은거할 때 공화파의 야간 수색에 쫓겨 농가에서 나온 후작부인과 어머니는 들판에서 잠을 잔다. 그때 후작부인은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루아르강을 건너 유랑하던 시기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하던 시기였다.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드 라로슈자클랭은 “나는 죽고 싶습니다”라고 울먹였다. 후작부인은 브르타뉴의 농가에 숨어 지내다 낳은 쌍둥이 딸의 죽음을 보며 “네가 나보다 더 행복하구나”라고 말한다. 아버지, 남편, 세 딸의 죽음을 그토록 담담하게 맞이하고 표현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역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IV. 『회고록』에 비친 프랑스혁명
우리나라의 교과서에 나오는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의 위대한 시민혁명이지만, 『회고록』에 나오는 프랑스혁명은 광적인 폭력이다. 1792년 8월 10일의 사건은 교과서에서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연 위대한 사건이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후작부인에게는 특권계급에 대한 증오심에 취한 (그리고 실제로 술에 취한) 파리 민중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소위 정통해석을 대표하는 알베르 소불은 8월 10일의 사건을 “1792년 8월 10일의 혁명”이라고 환호하지만, 후작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해 9월 초에 벌어진 ‘9월 학살’과 그 후에 진행된 공포정치의 전주곡이었다. 9월에 파리의 그 민중들은 파리의 여러 감옥을 공격하여 선서거부신부 270여 명을 포함하여 수인(囚人) 1,000여 명을 즉결 처형했다. 그 후 공포정치가 자행되어 시민 5만여 명이 약식 처형당한다.
1793년 3월부터 1793년 12월 말까지 계속된 방데 전쟁에서는 후일 “프랑스인에 의한 프랑스인의 인종 학살(제노사이드)”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광적인 폭력이 자행되었다. 누가 폭력을 행사했는가? ‘가톨릭 근왕군’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구체제의 야만적인 농민들이 폭력을 행사했는가? 아니면 ‘자유, 평등, 형제애’를 내세운 공화국 병사들이 폭력을 행사했는가? 혁명군은 방데군의 학살에 대한 보복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보복은 혁명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지나쳤으며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은 물론이고 무장하지 않은 여자, 어린이, 노인들을 포함하여 20만 명이 넘는 방데인을 학살했고, 방데 지방을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사막으로 만들어버렸다. 방데라는 이름도 아예 ‘방제’(복수라는 뜻)로 바꾸어버렸다.
물론 방데인들이 학살을 자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793년 3월 마슈쿨에서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애국파 160여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초기의 농민반란이 지휘체계를 갖추어가면서 이러한 학살은 사라졌다.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은 방데군은 마슈쿨의 불행한 학살 이후에는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회고록』에서는 방데군 장군들이 학살과 약탈을 금지하고 만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봉샹 장군이 공화파 포로 5,000여 명을 석방한 것은 방데인들의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이 놀라운 사건은 공화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후일 포로로 수감되어 있던 봉샹 장군의 부인은 이때 풀려난 공화파 병사들의 증언으로 목숨을 구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정부군의 보복이 자행되면서 방데군도 보복학살의 유혹을 받았으나, 그들은 대체로 폭력을 자제했다. 방데군 장군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약탈을 허용한 적이 있지만, 그들은 그 때문에 신의 징벌을 받았다며 그것을 후회했다. 방데 전쟁에서는 혁명군이 방데군보다 더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무기와 불을 함께 들고 다녔다. 공화주의 역사가인 미슐레는 방데군이 가톨릭교회의 광신주의에 젖어 있어서 마치 중세의 종교전쟁에서처럼 잔인했으며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했다고 강조하지만 아무래도 미슐레의 주장은 그의 반교권주의에서 비롯된 편견이지 않을까 싶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은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으로 공포정치의 주도자인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부터 누그러진다. 우리의 후작부인이 공화파의 수색에서 자유로워지고 드디어 사면을 받게 된 것도 열월 정변 덕분이었다. 우리의 교과서는 이 사건을 열월 ‘반동’이라고 규정하여 혁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반동적인 사건인 것처럼 평가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방데 전쟁 희생자들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 공포정치가들은 혁명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진하던 혁명가들이라기보다는, 프랑수아 퓌레가 말하듯이, “독재와 신화라는 미지의 세계로 대책 없이 도망치는” 사람들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장 클레망 마르탱 같은 역사가들이 변호하듯이 상퀼로트들의 무정부주의적인 폭력을 제어하려고 애쓴 사람이 아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1794년 봄에 과격한 에베르파와 온건한 당통파를 제거하고, 전쟁 승리로 상황이 호전되어 공포정치를 계속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1794년 6월에 목월의 법을 제정하여 오히려 “대공포정치”를 자행한 것은 로베스피에르를 평가할 때 결정적인 대목이 아닐까 싶다. 로베스피에르는 ‘덕의 공화국’이라는 명분과 ‘자유의 독재’라는 미명 하에 독재정치를 자행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1794년 7월의 열월 정변은 바로 독재자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하고 혁명의 이탈을 바로잡은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열월 정변의 뒤를 이어 혁명을 종식시킨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1799년 11월 9일(혁명력 8년 안개월 18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방데 전쟁에 대해서 “부당한 법이 제정되었고 집행되었으며 자의적인 행동들이 시민들의 안전과 양심의 자유를 위협했다”고 인정한 후,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고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시했으며 전쟁으로 파괴된 방데 지역에 대한 복구 사업을 벌였다. 『회고록』에서, 보르도 지역을 방문한 나폴레옹은 방데군 사령관이었던 레스퀴르 후작과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모든 군대를 격파한 군대를 격파한” 기적적인 부대의 장군들이었던 것이다.
『회고록』에서는 혁명의 허상이 깨어지고, ‘구체제’는 오랜 왜곡에서 벗어나 순수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부의 귀족들은 교과서에 나타나듯이 농민들을 착취하는 ‘특권지배계급’이 아니었다. 프랑스혁명기에 귀족들이 망명을 떠난 것은 비겁하게 도망친 것이 아니라 반혁명군에 가담하여 혁명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레스퀴르 후작처럼 부득이하게 프랑스에 남아 반혁명전쟁에 가담한 귀족들은 무질서한 농민군의 선두에 서서 그들을 지휘했다. 나이 스물한 살의 앙리 라로슈자클랭은 농민들의 지휘를 맡으면서 “내가 전진하면 나를 따르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죽이고, 내가 죽으면 내 복수를 해 달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으며, 그대로 실천했다. 그들은 귀족으로서의 명예는 지켰지만 목숨은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귀족으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잘 보여준 인물이 레스퀴르 후작과 앙리 라로슈자클랭 후작이다. 역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은 귀족들의 명예심과 거기에서 나오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에 감동을 받았다.
농민들도 순수했다. 그들은 귀족들에게서 착취당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을 따랐으며, 혁명이 강요한 성직자민사기본법에 선서하지 않은 신부들을 존경했다. 농민들이 ‘가톨릭 근왕군’에 기꺼이 참여한 것은 농민-귀족-성직자 사이에 맺어진 신뢰 때문이었다. 브르타뉴의 농민들이 방데 학살을 피해 도망친 후작부인과 어머니를 보호하는 데에서는 어떠한 계급적인 적대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혁명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착취하는 귀족, 무위도식하는 성직자의 이미지는 혁명이 혁명을 정당화하려고 만들어낸 가공의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러한 귀족과 성직자는 『회고록』의 무대였던 프랑스 서부지역에서는 다수가 아니었다.
『회고록』을 읽으면, 프랑스혁명은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는지, 과연 혁명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1789년 혁명이 발발했을 때는 방데의 농민들도 혁명을 환영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기대는 1792년 왕정의 붕괴, 1793년 1월 루이 16세의 처형 등을 겪으며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농민들의 분노와 반감은 1793년 3월에 실시된 30만 명 징집에 대한 거부로 분출했다. 전쟁 승리를 위해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혁명은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혁명은 다수의 국민들에게 외면당한 소수의 혁명가들과 상퀼로트들이 짊어지고 나아가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프랑스 국민의 다수가 염원한 혁명은 헌법이 제정되고 입헌군주정이 수립되는 것이었다. 입헌군주정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제시한 개혁이었다. 바르나브가 말했듯이, 이 지점에서 혁명을 끝냈어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전제정을 없애는 방법은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지 왕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후작부인이 체험한 1792년 8월 이후의 프랑스혁명은 무정부주의요 독재정치였다.
우리나라의 프랑스혁명 이해는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혁명은 선(善)이고 반(反)혁명은 악(惡)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단순 도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방데 전쟁이 반혁명전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고 폄하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회고록』은 방데 전쟁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혁명 그 자체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준다.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인식을 갖는 것인데, 『회고록』은 그러한 인식을 갖게 하는 데 역할을 잘 해낼 것으로 기대한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마리 루이즈 드 라로슈자클랭
역 : 김응종
1955년 대전 출생.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프랑쉬콩테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충남대학교 평생교육원장과 인문대학장, 한국프랑스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아날학파』(민음사),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푸른역사), 『페르낭 브로델: 지중해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살림), 『서양사개념어 사전』(살림), 『관용의 역사』(푸른역사), 『오늘의 역사학』(공저. 한겨레신문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프랑스혁명사』(일월서각),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민음사), 『고대도시』(아카넷), 『랑그도크의 농민들』(공역. 한길사), 『유럽은 어떻게 관용사회가 되었나』(푸른역사) 등이 있다. 현재 '다시 생각하는 프랑스혁명-혁명과 폭력'이라는 주제로 연구서를 준비 중이다.
목 차
나의 아이들에게
서문
1. 나의 출생에서 삼신분회까지
2. 삼신분회에서 10월 6일까지
3. 가스코뉴로의 출발부터 1792년 8월 10일까지
4. 8월 10일-파리 탈출
5. 보카주에 대한 묘사-주민들의 심성-혁명의 첫 번째 효과-1792년 8월의 봉기-방데 전쟁 이전 시기
6. 전쟁 발발-므쓔 라로슈자클랭의 출발-우리의 체포
7. 앙주 부대의 철수-므쓔 라로슈자클랭이 레조비에에서 승리를 거두다-앙주 부대가 손실을 만회하다-브레쉬르 학살-공화파가 도시를 포기하다-므쓔 라로슈자클랭이 클리송에 도착하다
8. 방데인들이 브레쉬르를 점령하다-왕당파 부대의 구성
9. 투아르, 파르트네, 샤테느레 점령-퐁트네 패배-퐁트네 점령
10. 최고위원회 구성-비이에, 두에, 몽트뢰유의 승리-소뮈르 점령
11. 앙제 점령-낭트 공격-파르트네 철수-물랭 오 셰브르 숲의 전투
12. 샤티옹 재점령-마르티녜와 비이에 전투-므쓔 델베의 선출-뤼송 공격
13. 므쓔 탱테니아크의 도착-제2차 뤼송 전투-샹토네 승리
14. 라로슈 데리녜, 마르티녜, 두에, 투아르, 코롱, 볼리외, 토르푸, 몽태귀, 생퓔장 전투-클리송 수송대 공격
15. 물랭 오 셰브르 전투-샤티옹 탈환과 재탈환-라트랑블레 전투와 숄레 전투
16. 루아르강 도하-앵그랑드, 캉데, 샤토 공티에, 라발 통과
17. 라발과 샤토 공티에 사이에서의 전투-마옌, 에르네, 푸제르 길-므쓔 레스퀴르의 죽음
18. 영국에서 파견된 두 망명자의 도착-퐁토르송과 아브랑슈 경유-그랑빌 공략-아브랑슈, 퐁토르송, 돌을 지나서 돌아감
19. 돌 전투-앙트랭, 푸제르, 라플레슈 경유-앙제 공략
20. 라플레슈로 귀환-르망 패주
21. 루아르강 재도하 시도-사브네 패주-군대의 소멸
22. 브르타뉴인들의 용감한 환대-1793년과 1794년의 겨울
23. 드레뇌프 성 체류
24. 사면-방데인 도망자들에 대한 세부 사실들
25. 전쟁을 계속한 방데인들에 대한 기술-보르도로 돌아감
26. 결혼 이후
27. 1808년에서 1814년까지
28. 3월 12일
보유: 뒤무스티에 집안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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