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세운 공화국 - 9월 학살에서 왕의 처형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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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주명철
출판사항여문책, 발행일:2018/12/14
형태사항p.351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87700272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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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 왕의 피로 액땜하고 불안한 걸음마를 시작한 공화국

 프랑스에서 왕조의 연극을 끝낸 혁명은 새로운 세상을 여는 중요한 연극이었다. 그것은 왕이 주인공이던 연극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들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서로 주인공 역할을 맡으려고 노력하는 연극이었다. 그 무대는 파리나 주요 도시의 거리, 정치 클럽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곳은 국회의사당이었다. 처음에는 베르사유 궁에서 시작해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왕이 옮겨갈 때 의원들도 따라가고, 국회가 따라가자 정치 클럽도 함께 따라갔다. 파리의 정치 클럽도 그 나름의 무대였으며, 거기서 주역으로 떠오른 사람이 국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만큼 파리가 모든 연극의 중심이 되었다. 관객은 정치화한 시민들이었다. 구체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이 정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혁명의 계기를 마련한 전국신분회가 소집되는 공고가 나가고, 175년 만에 열리는 전국신분회의 형식을 놓고 토론이 벌어지면서 도시부터 농촌까지 모든 프랑스인은 정치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혁명이라는 연극을 지켜보던 관객이 교육을 받고, 주역이나 도우미가 되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베르사유에서 전국신분회가 국민의회로 바뀌는 과정부터 관객이 지켜보았다. 이제 정치는 관객 앞에서 주인공들이 자기 역할을 다하고 관객을 감동시키는 연극이 되었다. 루이의 편에서 볼 때 그는 주역이었지만, 점점 비중이 커지는 조역들에게 밀려나다가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죽는 역할을 수행했고, 그렇게 해서 천년 이상 발달한 왕정의 연극은 막을 내렸다. “왕은 죽었다, 왕 만세!”의 시대가 끝났다. 왕이 인민의 피로 손을 적시던 시대가 갔다. “왕은 죽었다, 공화국 만세!” 걸음마를 시작한 공화국은 이렇게 왕의 피로 액땜을 했다.
- 본문 중에서

◆ 왕조의 연극을 끝내고 공화국의 문을 연 혁명

 루이 16세는 1792년 8월 13일 탕플 탑에 갇히기 전부터 ‘루이 카페’로 불렸다.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뽑힌 뒤 1328년까지 프랑스에서는 장자상속법에 따라 3세기 이상 직계 자손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다가 직계손이 없게 되자, 카페 왕조의 방계 가문에서 후계자를 찾았고, 그렇게 해서 발루아 가문, 발루아 앙굴렘 가문, 부르봉 가문이 차례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부르봉 가문의 왕위는 앙리 4세에서 아들 루이 13세, 손자 루이 14세, 5대손 루이 15세, 7대손 루이 16세로 넘어갔다. 그런데 혁명이 일어나고 특히 왕이 폐위된 뒤, 사람들은 그를 카페 왕조 사람이라는 뜻으로 루이 카페라 불렀다. 파리 코뮌은 루이 카페와 그 가족을 탕플 감옥의 아성으로 옮기고, 그들을 밤낮없이 감시했다.
이런 상황에서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에 처음 모인 의원들은 왕정을 폐지하기로 합의하고, 이튿날 프랑스 공화국 원년을 선언했다. 그들은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고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에 맞서 혁명을 완수하는 일에 착수했다. 11월 13일에 그들은 본격적으로 루이 카페를 재판하자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12월 3일에 로베스피에르는 “루이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연설로 공화국의 안정을 방해하는 반혁명의 구심점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8월 10일에는 파리의 혁명 코뮌이 ‘제2의 혁명’을 일으켜 혁명의 추진력을 높였는데, 이번에는 국민공회가 주도권을 쥐고 혁명을 한 단계 도약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성향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던 지롱드파와 몽타뉴파가 ‘왕의 사형’을 둘러싸고 대립했으며, 결국 몽타뉴파가 바라는 대로 집행유예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 ‘왕의 사형’은 국내외 정세에 따라 본격적인 권력투쟁과 함께 의회민주주의가 이름뿐인 상태로 나아가는 ‘공포정’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 ‘9월 학살’과 왕의 처형을 둘러싼 갈등

1792년 당시 프랑스는 국내외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 중이었으며, 국내적으로는 끊임없는 소요사태와 봉기뿐 아니라 파리와 인근 감옥에서 ‘9월 학살’까지 일어난 상황이었다. 국민공회 안에는 왕당파가 발을 붙이지 못했지만 그들은 전국적으로 계속 반혁명을 꾀하며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는 데 극렬하게 저항했다.
8월 10일 상퀼로트 계층이 튈르리 궁을 공격하면서 ‘제2의 혁명’이 일어난 후, 실권을 장악한 파리 코뮌은 왕당파를 필두로 한 반혁명분자들을 잡아들이는 데 매진하면서 ‘인민이 심판하는 법원’의 설립을 추진했다. 이로써 최초의 ‘혁명법원’이 생겼으며 신속한 ‘인민재판’을 통해 감옥에 갇히는 사람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인권과 거리가 멀었던 구체제를 타파하고 자유의 시대를 연 혁명기에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감옥이 파리에 생긴 것은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새 질서를 세우고 적폐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죄인이 계속 늘어났고 기존의 감옥만으로는 모자랐기 때문에 수많은 종교시설을 국가가 수용해서 감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아무튼 9월 2일부터 6일까지 ‘인민재판’을 실시한 감옥에는 모두 2,500여 명이 갇혀 있었다. 그들 가운데 모두 1,090~1,395명이 학살당했는데, 이것이 바로 ‘9월 학살’이다.
파리에서는 학살이 끝났지만, 인근의 베르사유·오를레앙·모·랭스에서도 학살사건이 일어나 모두 150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그 학살을 조직하거나 명령하거나 실행한 사람들을 구체적인 증거로 일일이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당시에도 정치적인 투쟁에서 지롱드파가 몽타뉴파와 급진좌파 언론인들에게 혐의를 씌웠지만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9월 학살’은 정치판에 등장해서 세력을 얻기 시작한 상퀼로트의 행동을 규제할 만큼 공권력이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한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한편 왕정 폐지를 의결한 국민공회 구성원의 비율을 보면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 의원 749명 중 47퍼센트가 변호사·검찰관·공증인·판사·법률가였고, 10퍼센트가 과거 공직에 있거나 법률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상업과 제조업에서 10퍼센트 정도, 의사와 종교인 6퍼센트, 교육과 문화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6퍼센트, 군인 8.5퍼센트, 지주 6퍼센트였으며, 노동계급에서 6명, 후작과 왕족이 8명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성향을 보면, 몽타뉴파(좌파)와 이들이 정적을 숙청한 뒤 이름 붙인 지롱드파(우파), 이들 중간에 다수파인 평원파가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의의는 귀족과 평민의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고 입헌군주제를 거쳐 종국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공화정을 수립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년 이상 지속되어온 왕정을 확실하게 뿌리 뽑기 위해 루이 16세를 처형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국회 내에서 극심한 의견대립으로 날마다 몸살을 앓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는 그만큼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일의 지난함을 웅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개인의 사망으로만 끝나지 않은 루이 16세의 죽음

 베르사유 궁에서 열쇠를 직접 만들어 방문을 열고 다니는 취미를 가졌던 루이 16세는 왕실 전속 자물쇠공 가맹에게 열쇠 만드는 법을 배우면서 즐거워했으며, 그와 시간을 보내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렸고, 탕플 감옥에서 루이와 그의 가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하던 모욕을 날마다 견뎌야 했다. 정원에서 일하는 일꾼들도 가끔 연장을 들어 보이면서 그것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벨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루이의 가족은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9월 초 파리의 감옥에서 일어난 학살사건도 그들에게 큰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루이의 맏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하루를 함께 지냈다. 아버지는 내 동생에게 지리를 가르치고, 어머니는 역사를 가르치고 또 시를 배우도록 했다. 고모는 산수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다행히 책꽂이를 발견하고 거기에 빠져들었다. 어머니는 수를 놓아 장식융단(타피스리)을 만들었다. 파리 코뮌 사람들은 너무 격식을 무시했고, 아버지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아버지를 감시했다. (160~161쪽)

9월 2일, 욕설을 더 많이 들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다. 사방의 창문으로 돌이 날아왔다. 누군가 아버지께 던진 돌이지만 다행히 아무도 맞지 않았다. (163~164쪽)

이렇듯 급격한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루이의 신세는 날로 외롭고 초라해졌으며, 모든 사람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는 원칙 위에서 공화국을 선포한 시대에 루이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시민이 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마침내 ‘반혁명’ 혐의로 재판을 받기에 이르렀다. 루이가 왕으로서 전국신분회를 소집해 개회식에서 엄숙하게 왕권을 행사하고, 또 네케르를 재무총재에서 해임하던 1789년부터 국민공회에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해야 하는 1792년 말까지 겨우 3년이 지났지만, 정치적 관계는 완전히 뒤집혀버린 것이다.
주명철 교수는 사실 루이가 늘 반혁명을 꿈꾸었다고 말하기란 어렵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왕을 폐위하자고 외치던 사람들, 외적의 침입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처벌의지를 불태운 사람들은 루이가 일관성 있게 반혁명을 꾀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가 조상 대대로 저지른 잘못까지 뒤집어써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792년 12월 11일, 루이는 국민공회에 직접 출석해 1789년부터 혁명을 방해한 죄를 낱낱이 지적하는 내용을 들어야 했다. 신문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후 루이는 12월 26일 9시 46분부터 12시 10분까지 변호인의 도움을 받았다. 루이의 신문과 변론은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를 요약한다. 루이는 처음부터 혁명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반혁명만 꿈꾸는 죄인이었다. 단 두 시간 반도 못 채운 변론이 그가 왕으로서 18년 동안 지은 죄, 3년 동안 혁명에 협조하지 않은 죄를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로베스피에르는 “루이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했고, 루이도 유언장을 작성해놓은 뒤였으니, 루이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닌 처지였다. 1793년 1월, 국민공회는 왕의 재판에 대한 토론을 종결하고 4차에 걸친 호명투표 끝에 루이의 사형을 최종 의결했다(20일). 이에 따라 루이는 이튿날 오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이 16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이 16세가 죽자마자 탕플 감옥에 갇힌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세자를 루이 17세로 예우했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형식일 뿐이었다. (중략) 루이 16세가 조상의 이름을 따서 ‘루이 카페’로 불린 것은 아주 상징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의 뒤를 이어 제3왕조라 할 카페 왕조는 987년 위그 카페가 왕으로 뽑히면서 시작되었다. 위그는 카파capa라는 종교인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카페capet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카파, 카페는 머리와 관련된 낱말이었으며, 루이 16세를 루이 카페라고 부를 때부터 머리가 잘려나갈 운명을 암시했다고 믿고 싶어진다. 물론 아무것이나 연결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이렇게 결과에 대한 원인이나 상징을 찾고 싶은 유혹에 저항하기 어렵다. 아무튼 루이 16세, 루이 카페가 죽은 사건은 13세기 동안이나 발전한 왕정이 공식 사망한 대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루이 16세가 마지막 주인공을 맡았던 왕조의 연극이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344~345쪽)

◆ 혁명은 느린 개혁과 급격한 개혁의 변증법

 주 교수는 이 시리즈를 한창 집필하던 2016년 10월에 처음 촛불을 든 이후 혹독한 겨울추위에도 수그러들지 않고 끝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킨 우리의 ‘촛불집회’에 남다른 자부심과 큰 기대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학자로서 독자에게 전하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촛불집회’는 18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일어난 운동보다, 아니 21세기까지 일어났던 어떤 정치적 운동보다 더 평화적이었지만, 그 결과는 혁명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저자는 그러나 “개혁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인데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면서 조급해하지 말자고 당부한다. 나아가 촛불을 들고 모였던 첫날의 마음을 장기적으로 간직하자고 호소한다. 본디 모든 혁명은 정치혁명이자 문화혁명이며, 느린 변화와 급격한 변화의 변증법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숨에 개혁을 바라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좌절하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세력에게 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적폐를 없애는 일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 사람도 자칫하면 현실에 타협할까봐 두렵다. 새 정부는 적폐를 청산하고 청렴한 국가를 만들라는 국민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지만 만만치 않은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게다가 그동안 법을 무시하고 어긴 사람들이 민주주의·법치주의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모순을 본다. 입법부가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고 다음 선거에서 자리를 보전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하는데, 어찌 한술 뜨고 배부르다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개혁의 출발선에서 겨우 몇 걸음 떼었을 뿐이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멀리 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여전히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100년 이상 모든 곳에 뿌리와 줄기를 뻗은 적폐를 청산하는 일임을 명심하고 숨이나 고르자.

작가 소개

지은이 : 주명철 
1987년부터 2015년 여름까지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문화사학회, 역사학회, 한국서양사학회 종신회원, 한국서양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대서사의 서막』, 『1789』, 『진정한 혁명의 시작』, 『1790』, 『왕의 도주』, 『헌법의 완성』, 『제2의 혁명』(이상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1~7권), 『바스티유의 금서』(이후 『서양 금서의 문화사』로 재출간), 『지옥에 간 작가들』, 『파리의 치마 밑』,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 『계몽과 쾌락』,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등이 있고, 앙시앵레짐과 프랑스 혁명 관련 책을 여러 권 우리말로 옮겼다. 2018년 현재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재미있게 저술하여 한평생 추구한 학문을 제대로 마무리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목 차

시작하면서

제1부 공화국 선포

1. 8월 10일의 국회
2. 탕플에 갇힌 루이 카페
3. 파리 코뮌
4. 파리를 지키자
5. 9월 학살
6. 공화국 선포
7. 공화국은 하나다

제2부 루이의 재판과 처형

1. 루이의 하루
2. 루이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3. 루이의 비밀금고
4. 루이의 신문訊問
5. 평화냐, 전쟁이냐?
6. 루이의 재판
 제1차 호명투표 - 루이 카페는 범죄를 저질렀는가?
제2차 호명투표 - 루이의 판결에 대해 기초의회에서 국민의 재가를 받을 것인가?
파리의 분위기
 제3차 호명투표 - 한때 프랑스인의 왕이었던 루이에게 어떤 벌을 내려야 할까?
루이 카페의 마지막 청원
 제4차 호명투표 - 루이를 당장 처형할 것인가, 미룰 것인가?
7. 루이의 마지막 밤
8. 루이의 마지막 길

 연표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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