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거장들 - 선생님이 들려주는 세계사 15 16세기 유럽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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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박인숙
출판사항간디서원, 발행일:2018/12/30
형태사항p.361 B5판:24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97533268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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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다섯 명의 거장들을 통해 본 세계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 15-16세기 유럽

이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대 살았던 레오나르드 다빈치, 마키아벨리,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 마르틴 루터 등 5인의 거장들을 다룬 인물사이자 세계사입니다.
이들 중에는 오늘날 천재라 불리는 인물도 있고, 당대 최고위직에 오른 고관대작도 있었습니다만 이들 모두 평탄하고 쉬운 인생을 살진 않았습니다. <모나리자>의 작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누구보다도 앞선 상상력으로 시대를 앞서 살았던 인물이었고 평생을 자연의 원리를 탐구한 과학적 마인드의 소유자였지만 사생아라는 사회적 편견과 제약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았고 후원자를 찾아 이리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당시 여러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 피렌체의 고위관리였던 마키아벨리는 평생 정치에 나가 열심히 일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한순간에 쫓겨납니다. 군주에게 자신의 경험을 녹여 쓴 책을 헌정했지만 인정받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복귀를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기다림에 지쳐 아쉬운 일생을 마감합니다.
또 토마스 모어는 국왕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아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왕의 이혼과 새 결혼을 반대해 사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렇듯 이 분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15,6세기 유럽의 사회상과 역사적 흐름이 자연스럽게 그려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통해 시대는 다르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비춰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시작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인간은 죄로 물든 타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세속적 욕구를 억제하고 경건한 생활로 끊임없이 구원을 갈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교회의 힘이 약화되자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인간의 세속적 욕구와 희노애락을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죄로 물든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이성을 활용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존재들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에 모범이 된 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옛 문화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는 인간의 감정을 존중하고, 이성의 힘을 믿는 인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대 문헌들을 더 깊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자신들이 혐오하던 중세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그러한 고대의 문화적, 학문적 경향을 부활, 재생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프랑스어 ‘르네상스(Renaissance)’란, 고대 문화의 부활과 재생을 꾀하는 문화적 운동을 총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부활되고 재생된 새로운 문화의 본질은 ‘휴머니즘(Humanism)’이란 단어로 표현되었는데, 당대에 ‘휴머니즘’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단어였습니다. 즉, 고전고대 문헌을 연구하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내려는 지적 학풍(인문주의), 그리고 인간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경향(인본주의)이라는 두 가지 뜻 모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이탈리아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부를 획득한 도시 국가들이 여럿 부상하면서 세속적 분위기가 크게 성행하였고 옛 로마제국의 터전이어서 유럽 어느 곳보다 고대적 유산에 대한 친밀감이 강했던 곳이었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그리하여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했던 두 명의 인물은 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키아벨리였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1452년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피에로는 법률가로 피렌체에서 생활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 근교 빈치(Vinci)라는 곳에서 2-3Km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할아버지와 삼촌의 보호 아래 자랐습니다. 10대에 그는 피렌체의 탁월한 조각가이자 장인인 안드레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1453-1488)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갑니다. 당시의 ‘공방’은 회화, 조각 뿐 아니라 건축이나 일상적인 가구제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을 제공하는 장인들의 작업장이었는데, 베로키오 공방은 귀족들을 위해 그림과 조각, 식기류, 장식품들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50-1523),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등 촉망받는 동료들이 바로 이 공방 출신이었습니다.
1472년 20세 견습생활을 끝낸 다빈치는 ‘장인’ 자격을 취득하고 스승인 베로키오와 함께 「그리스도의 세례」(The Baptism of Christ)라는 그림을 그렸고, 선원근법과 극적인 명암효과를 사용한 「수태고지」(The Annunciation)라는 작품을 그립니다.
1477년 경 공방을 나와 독립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섰지만 사생아에다 동성애자라는 딱지까지 붙은 레오나르도는 공방 동료였던 보티첼리 같은 당대의 다른 피렌체 예술가들과는 달리, 군주인 메디치(Medici)의 인정과 후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1482년 30세에 레오나르도는 피렌체를 떠나 밀라노로 갑니다. 당시 밀라노 지배자는 루드비코 스포르차(Ludvico Maria Sforza, 1451-1508) 공작이었는데, 용병 출신의 스포르차 가문의 눈에 들기 위해 레오나르도는 화가나 조각가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공격용, 수비용 기계를 제작할 수 있는 무기기술자로서 자신을 채용해달라고 제안서를 냅니다. 하지만 소식도 없고 허송세월만 할 수 없어 프레디스가 두 형제들과 <암굴의 성모>를 그렸고, 스포르차 공작의 부탁으로 <청동기마상>작업에 착수했지만 당시 프랑스의 공격으로 청동이 부족해 미완성에 그칩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벽화 <최후의 만찬>을 그려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 벽화는 축축한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색칠을 해 그려내는 전통적인 프레스코화가 아니고, 달걀을 안료에 섞어 쓰는 템페라(Tempera)기법을 썼는데, 이 기법은 보존성이 약해 심한 훼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프랑스 루이 12세의 밀라노 침공으로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1500년) 귀향한 다빈치는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로 중부 이탈리아를 수중에 넣은(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잔혹하지만 냉철한 리더십의대가로 보았던 인물) 체사레 보르자의 군사기술자로 1502년부터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체사레가 점령한 지역을 측량하고 조류를 기록하고 다리를 놓고 지도를 제작하는 일 등을 합니다.
다시 1503년 피렌체로 돌아온 다빈치는 조콘도(Giocondo)라는 한 직물 상인 부인의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습니다. 이 초상화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Mona Lisa)입니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귀족이 아닌 중산층을 그린 그림으로, 여인의 표정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는 놀라운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특히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가 창안한 ‘스푸마토(Sfumato)’기법(한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의 경계선을 희미하게 하고 색채를 부드럽게 하는 기법)이 사용된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너무나 대조적인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레오나르도는 외모에서부터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남자이자, 온화한 멋쟁이라면 미켈란젤로는 단정하지 못한 외모에 등이 굽었지만 몸은 딱 바라지고 동료 조각가와 싸우다가 코뼈가 부러질 만큼 너그럽지 못하고 격한 성격의 싸움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레오나르도가 서자로 태어나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던 반면, 미켈란젤로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일종의 귀족적 자부심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회화를 선호하였다면,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 불리기를 원했으며, 레오나르도가 과학적이면서 낙천적이었다면, 미켈란젤로는 강박적이기까지 한 완벽주의자였다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두 거장 사이는 좋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시대를 넘어선 탁월한 상상력의 소유자였고 자연의 원리를 탐구한 과학자였습니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기중기, 방직기, 압연기, 장갑차, 대형 석궁, 잠수함 등 많은 발명품들을 고안하였습니다. 귀족들의 축제나 연극을 감독했으며 새처럼 하늘을 날수 있다는 비행기계를 만들려고 했고 30구 이상의 시체를 해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탐구정신은 그가 남긴 수천장의 수기 메모에서 잘 나타납니다.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피렌체에서 비교적 명성이 있는 중간계급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빈궁하였지만 인문주의에 심취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마키아벨리는 어린 시절에 이미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비롯한 여러 고전들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조국 피렌체는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번성해 교황청을 비롯한 많은 군주들의 금고 역할을 했고,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탁월한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자국군대도 가지지 못한 약소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 이탈리아 내 국가들 간의 경쟁과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어린 마키아벨리는 백주대낮에 피렌체의 집권자를 노린 암살음모가 벌어지고 가담자들의 목이 줄줄이 걸리는 과정을 직접 보았고 여러 차례 전쟁을 경험하며 자랐습니다.
메디치가문의 몰락 후 권력을 잡았던 사보나롤라의 신정정치가 몰락했을 때 29세의 청년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새로 구성된 피렌체 공화정의 제2서기장으로 선출됨으로써 그의 파란만장한 공직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초기 외교관 시절, 피렌체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은 ‘피사(Pisa)’ 문제였습니다. 본래 피렌체의 속국이던 피사가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틈타, 피렌체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던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렌체가 선택한 방법은, 용병을 고용해 피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피렌체 공화정부는 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던 파올로 비텔리(Paolo Vitelli)를 고용하였지만 승리를 목전에 앞두고 막바지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용병대장 파올로 비텔리(Paolo Vitelli)가 갑자기 군대를 철수해 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결국 코앞에서 다잡은 물고기를 놓친 피렌체 사람들은, 비텔리를 잡아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이 ‘비텔리 사건’은 마키아벨리에게 자국군의 필요성을 각인시켰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는 프랑스 궁정에서의 경험이었습니다. 새 프랑스 왕 루이 12세(Louis XII, 1462-1515, 재위: 1498-1515)가 밀라노를 무력 점령하자 피렌체 정부는 이번에는 강력한 프랑스군을 이용해 피사를 탈환하기로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의 피사 공격을 독려할 2명의 군사고문을 보좌해 프랑스에 파견됩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그는 약소국 관리의 설움을 체험해야 했습니다. 국왕은 피렌체 대사들을 잘 만나주지도 않았고 프랑스 사람들은 피렌체를 돈이나 밝히는 상인집단들이라고 폄하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조국 피렌체가 얼마나 약한 나라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1502년에 마카아벨리는 자신에게 특히 큰 영향을 줄 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아들로 이탈리아 중부지방에 대한 무력 정벌을 하고 있던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였습니다. 1502년 6월 우르비노에서 처음 그를 만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에게 매료됩니다. 그는 후일 이 인물을 자신의 책 <군주론>에서 이상적 정치인으로 칭송합니다.
1505년부터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방위군을 조직하는 일에 착수합니다. 용병 비텔리 사건, 프랑스 궁정에서의 모멸감, 그리고 국제적 역학관계가 바뀔 때마다 강자들에게 달려가 돈을 바치고 굽신거려야 했던 약소국 외교 관리로서의 한을, 군대를 조직하며 풀고 있었던 것입니다. 훌륭히 피렌체 방위군을 조직해내자, 그의 위상은 높아졌습니다. 이제 피렌체 공화정부에서 마키아벨리는, 없어서는 안 될 주요 인물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1512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스페인군이 피렌체를 공격하여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았던 것입니다. 이 정변으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장 자리에서 쫓겨났고 반란혐의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면되었지만 산탄드레아 시골농장에서 실업자 신세가 된 그는 15년간의 공직생활의 경험을 녹여 책 한권을 씁니다. 그 책이 ‘악마의 서’라고 알려진 『군주론』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메디치 지배자에게 헌정해 공직에 복귀하고자 노력하였지만 군주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기다림에 지쳐가던 중, 그는 피렌체의 청년귀족들과 교류를 맺으면서 『군주론』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또 한권의 저서를 완성합니다. 이것이 『로마사 논고』(Discorsi sorpa la prima deca di Tito Livio)였습니다. 이 책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체제의 장점을 강조하고 대중의 역량을 강화할 것을 강조하고 있어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마키아벨리가 군주정 지지자인지 공화정 지지자인지를 놓고 의문을 품게 합니다.
또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진지한 글들 외에도 대박이 난 인기 희곡, 『만드라골라』(Mandragola)와 작가였고 오십이 넘어서 그는 피렌체의 역사를 집필해 역사가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 카를 5세가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었던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교황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이탈리아는 또다시 전쟁에 휩싸입니다. 이탈리아가 전쟁의 수렁으로 빠지는 순간 마키아벨리는 신설된 피렌체의 ‘5인 성벽관리 위원회’의 서기장으로 임명됩니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 끝에 공직에 복귀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함락되었고, 피렌체에서는 즉각 폭동이 일어나 메디치 가문은 다시 추방됩니다. 피렌체는 15년 만에 다시 공화국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정부가 전쟁터에 파견한 사절이 되어버렸고 그의 공직임무는 다시 끝나버립니다. 다시 그의 자리인 제2서기장 자리로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거친 전쟁터에서의 노고로 지쳐서인지, 상실감 때문인지 그는 병이 듭니다. 그리고 불과 얼마 후인 1527년 6월 21일에 세상을 떠납니다.

기독교 인문주의의 부상과 종교개혁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 루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간중심적 문화운동은, 성직자, 학자와 예술가들의 교류, 무역, 전쟁 등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서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알프스 이북(오늘날의 독일, 프랑스, 영국 같은 지역)에서 르네상스 정신은 독특한 성격을 띠고 이탈리아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이탈리아가 도시가 발달하고, 중세 기독교 윤리체계를 넘어서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반면, 이곳 북부 지역은 봉건적 질서가 유지되고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였으며 그래서인지 휴머니즘 정신은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띠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라고 부릅니다.
이곳 지식인들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이탈리아에서처럼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세속주의 경향을 띠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에 대한 관심이 강하고, 본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며 이는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요컨대 알프스 이북 유럽에서 새로운 인간중심적 문화 풍조는 기독교의 본래적 정신을 찾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지식인들을 배출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그러했듯이, 북부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들 역시 그리스, 로마 고전 저작들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러한 고전의 가르침이 기독교 정신과 일치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고대의 작품들 속에서 순수한 인간성과 숭고한 신성을 발견하였고, 고전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킨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영적 성장을 돕는다고 보았습니다.) 곧 이성을 통한 지식의 습득은 신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신앙으로 나가는 통로였으며 그리하여 이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원전을 보다 더 철저히 연구하여 진정한 신앙의 길을 찾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영국의 토마스 모어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 및 독일의 루터였습니다.

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는 1478년 2월 7일, 평민이었지만 법률가로 성공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이 되던 1485년 무렵 그는 런던의 명문 학교로 알려진 ‘세인트 앤소니(St. Anthony)’학교에 입학했고 거기서 모든 학문의 기초였던 라틴어를 체계적으로 연마합니다. 12살이 되던 1490년에 당시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대법관이던 존 모턴(John Morton, 1420?-1500)경의 시동으로 들어갔다가 모턴경의 추천으로 2년 뒤에는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합니다.
옥스퍼드에서 간 모어는 이 시기부터 영국에 전파된 기독교 인문주의 정신에 푹 빠지게 됩니다. 선배격인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활발히 교류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열심히 공부하였고, 플라톤(Plato, BC. 427-BC. 347), 아리스토텔레스(Aristotole, BC. 384-BC. 322), 에피쿠로스(Epicuros, BC. 341-BC. 271) 등을 탐독하면서 고전탐구에 깊은 열정을 가진 기독교 인문주의자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명을 따라 런던으로 돌아와야 했고 1496년에는 ‘링컨 인(Lincoln Inn)’이라는 법률 전문학교에 들어가 법학공부에 매진하게 됩니다. 인문주의의 열정을 간직한 청년 모어에게 이제 대를 이은 법률가의 길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용적인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고전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옥스퍼드에서 만난 인문주의자들과의 연을 계속 이어갔고, 1499년 여름에는 그들을 통해 평생의 소울메이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을 특징짓는 또 하나는 그가 남달리 깊은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1501년 법정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모어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카르투지오(Cartusian) 수도사들의 차터하우스(Charterhouse)에 들어가 4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수도사들과 살면서 엄격한 영성 훈련을 함께 했습니다. 아마도 성직과 세속적 직업을 놓고 진로를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수도사들의 신앙을 존경하고 수도원 생활을 동경한 것은 분명하지만, 모어는 결국 수도원 행을 포기하고 세속의 법률가로 남았습니다. 요컨대, 청년 모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문장에 능통한 인문주의자였고, 논리적 사고로 무장한 법률가였지만, 누구보다도 신실한 기독교 신앙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청년시절의 가치관이야말로, 이후 그의 인생 내내 많은 선택을 결정지은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나온 그는 1504년에 선거에 나가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세속정치의 세계에 입문합니다. 법률가로도 사회적 신망이 높았지만, 1509년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재위: 1509-1547)가 즉위하면서 모어의 정치 인생은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1510년에는 런던 시 부장관(undersheriff)으로 시장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고, 1515년에는 왕의 특사 자격으로 플랑드르 지방에 파견되기도 합니다.
이 시기, 그는 그의 이름에 항상 따라 다닐 유명한 소설책 한 권을 쓰게 됩니다. 이 책이 1515년 여름에서 1516년 가을에 걸쳐 라틴어로 쓰인, 『유토피아』였습니다. 『유토피아』는 일종의 가상 소설입니다. 모어는 이 책에서 여행가인 ‘라파엘 히슬로다에무스’(Raphael Hythlodaeus)라는 한 허구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 영국의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사회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여기서 모어는 당대 잉글랜드 사회의 범죄들이 지배층의 탐욕과 불평등한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의 물질주의적 세계관과 특히 지배층의 사리사욕과 허영심, 오만을 비판하고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비물질주의적인 사회의 사례를 제시합니다.
이 책이 나온 후 1518년 3월 모어는 ‘국왕 자문관(추밀원 의원: councillor)’이 되어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궁정인이 되었습니다. 왕은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고 이후 이러한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그는 재무부 차관, 하원의장, 랭카스터 직할 영지 대법관을 거쳐, 1529년 대법관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었습니다.
한편 유럽은 1517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의 열풍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모어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분열과 혼란, 폭력을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이에 반대합니다. 헨리 8세는 처음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지만 1526년경 앤 불린(Anne Boleyn)과 새로운 사랑에 빠지면서 입장을 바꾸게 됩니다. 자신의 이혼에 대한 관면이 계속 연기되자, 화가 난 헨리는,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1529년에 대법관이 된 모어는, 왕 자신도 우려했던 교회의 분열이 왕의 이혼 문제로 인해 영국에서 가시화되던 1532년 대법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그가 왕의 이혼과 일련의 반로마적 개혁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현하지 않고 침묵하자, 그는 곧 요주의 사찰 대상이 되었고 ‘왕위계승법’에 대한 맹세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1534년 4월 17일에 런던탑에 수감됩니다. 국왕 측 인사들의 여러 차례의 회유와 가족들의 간청에도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1535년 7월 6일 처형됩니다. 자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목숨을 던질지언정 양심을 파는 타협을 결코 할 수 없었던 지고지순한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람에게도 격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에라스무스
 이탈리아 북부 기독교 인문주의의 대표 주자는 에라스무스였습니다. 네덜란드의 항구 도시 로테르담(Roterdam)에서 태어난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비롯한 많은 저작을 저술한 당대 최고의 저술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세 사람의 인생처럼, 이 사람도 결코 편안하거나 안락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합법적 결혼에서 태어나지 못해 평생 사생아라는 굴레에 매여 있었고, 어린 시절 부모를 모두 잃고 수도원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그는 라틴어와 고전을 접하며 인문주의자로 성장할 지적 자산을 얻었지만 타고난 자유주의적 기질 때문에 수도원을 벗어나 평생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1495년 에라스무스는 후원을 얻어 파리 몽테규 대학(the College of Montaigu) 신학 박사과정에 등록합니다. 하지만 파리에서 그는 갖가지 고통과 시련에 맞닥뜨립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문제였습니다. 후원금은 몹시 불충분했고, 그것도 언제 끊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가정교사와 잡문쓰기로 생활을 근근이 유지해야 했습니다. 또 그에게 파리 대학에서 가르치는 스콜라 철학은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면 할수록, 교리적 추론을 깊게 파고들어 치밀한 논리만을 강조하는 당시 스콜라 철학에 그는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파리의 여러 인문주의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누면서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1499년 여름 에라스무스는 한 제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영국으로 건너갑니다. 여기서 에라스무스는 콜렛(John Colet)과 피셔(John Fisher), 그로신(William Grocyn), 그리고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같이 평생을 교류하며 영향을 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서 인문주의자로서 그가 해야 할 일들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즉,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참 모습을 알리기 위해 고전에 기초한 초기 교회 시대의 신학을 연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1500년 1월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후 『격언집』(Adagiorum Collectanea)을 내놓으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1507년부터 1508년까지 베니스의 알두스 출판사에서 『격언집』 증보판을 비롯해 수많은 그리스어 라틴어 고전을 출판합니다. 그의 명성을 알릴 본격적인 출판 작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1509년 7월 이탈리아를 떠나 다시 영국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에라스무스는 새로운 책을 하나 구상합니다. 친구 토마스 모어를 생각하면서 모어의 이름을 딴 주인공을 화자로 내세운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에라스무스의 이름 옆에 언제나 붙어 다닐 수식어가 될, 위대한 작품, 『우신예찬』이었습니다.
1514년 7월 초 에라스무스는 5년간의 영국 생활을 끝내고, 다시 대륙으로 돌아옵니다. 40대 후반에 이른 에라스무스의 위상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유명한 『격언집』과 『엔케리디온』의 저자였으며, 무엇보다 『우신예찬』을 지은 고전의 대가였습니다. 그에 대해 인문주의자들은 “세상의 빛”이라고까지 칭송하면서, 열광적으로 그를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1516년 2월 에라스무스는 새로운 ‘그리스어 신약 성경(Novum Instrumentum)’을 드디어 발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성경에 자신의 ‘주석(Annotationes)’를 붙여 놓았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원전을 보다 잘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는 불가타와 크게 다른, 라틴어 신약성서도 함께 발간하였습니다. 이것 역시 사람들에게 성경의 원전을 접하게 하고, 그 문헌학적 고증을 통해 정확한 성서를 제공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불가타 성서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보던 당시에, 가톨릭 성서에 부분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수정한 에라스무스의 새로운 신약성경은 매우 대담한 시도였습니다. 이 성서가 나오자 에라스무스는 기성 신학자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즈음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합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95개조 논제를 내걸면서 교회가 신,구교로 분열되어 싸우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평생을 따라다닌 가난보다 더 고통스러운 폭풍우 속으로 에라스무스를 밀어 넣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신앙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신랄한 비판과 조롱은 당연히 그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할 것이라는 생각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은 그는 처음부터 양측 어느 쪽도 분명히 지지하지 않는 중립적 태도를 보입니다. 개혁파들은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태도를 비겁하다고 비난했고 가톨릭 측은 루터를 반박하지 않는 한, 루터의 편이라는 주장으로 그를 압박하였습니다. 가난 속에서도 평생을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탐구하는데 바쳤고, 시대와 사회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글을 써 ‘인문주의자의 왕’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세상이 두 편으로 나뉘어져 싸우는 상황에서, 그는 어느 편에도 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편 모두로부터 숱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편 사이에서 시달리던 노년의 그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했습니다. 루뱅을 떠나 스위스 바젤(Basel)로 갔고 바젤이 다시 신교지역에 되자 1529년 프라이부르크로 옮겨가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1536년 7월 11일 바젤에서 외롭고 고단한 삶을 마감합니다.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의 광산도시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자수성가한 광산업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1501년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진학했고 1505년 2월에는 석사 학위까지 취득합니다. 법학박사과정 공부를 준비 중이던 그는 7월 초 잠시 집에 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던 길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슈토테른하임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천둥번개를 만나게 되었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수도사가 되겠다는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1505년 7월 17일, 21세의 이 청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입회를 신청함으로써 수도사의 길로 들어섭니다. 누구보다 성실히 엄격한 수도사 규율을 따랐지만 수도사가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구원을 확신하지 못해 고통받았습니다. 이런 고통을 잊기 위해 성서를 깊이 연구하였던 그는 1512년 성서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교수가 되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던 그는 1514-15년을 전후한 어느 날. 아우구스부르크 수도원 자신의 방에서 ‘로마서’를 읽다가 구원은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냥 주신 선물,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이 깨달음은 ‘이신칭의’라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한편 루터는 1517년 10월, 95개 조항으로 된 「면죄의 능력과 유효성에 관한 논쟁」 (Disputatis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라는 논제를 작성해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붙임으로써 예기치 않았던 종교개혁의 포문을 엽니다. 그는 신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요구한 것이었지만 이 문제는 독일과 유럽전체로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가져옵니다. 몇 차례의 심문과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서 루터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가톨릭의 교리와 화해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고 결국 철회를 거부함으로써 공식적 파문을 당합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다시 한 번 목숨을 구할 기회를 얻었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국의 범법자가 된 그는 작센 선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게 되었고 거기서 에라스무스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합니다. 그가 숨어지내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는 개혁자들이 개혁에 착수하였지만 이 개혁이 급진적 성향을 띠자 루터는 1522년 3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돌아옵니다.
사실 당시 유럽 내에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구체적 개혁의 내용이나 속도, 방식에 대한 생각 역시 매우 다양했습니다. 루터가 개혁의 빗장을 열자, 이런 다양한 개혁세력들이 요구와 행동이 물밀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루터는 스스로 주도권을 잡아 개혁의 내용과 속도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사실 그가 선택한 것은 매우 온건한, 어쩌면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평화적 개혁이었습니다.
이런 루터의 온건 개혁노선은 1524년-25년에, 독일 남부에서 시작된 독일 농민전쟁과 충돌합니다. 처음에 농민들의 처지에 동정을 표하긴 했지만 그는 농민들의 폭동이 과격화되자 무시무시한 말로 농민들을 가혹하게 진압할 것으로 강력히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사탄의 행위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신분질서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습니다.
한편 41세의 루터는 농민전쟁으로 한참 시끄러울 시기인 1525년 6월, 환속한 수녀이자 16살이 어린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와 갑자기 결혼하여 가정을 꾸립니다. 루터 부부는 총 6명의 자녀들을 두었고 목사의 결혼은 이제 개신교의 한 특징이 됩니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개혁이 자리 잡자 종교개혁은 작센 선제후의 영내에만 머물지 않고 제국 내 다른 지역들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526년에는 필리프 (Philipp I von Hessen, 1504-1567) 백작이 다스리던 헤센(Hessen)지역이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을 지지하며 루터파로 돌아섰고, 1524-26년 사이에 남부, 북부의 여러 자유도시에서도 시민계급들이 루터파 개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루터파가 확산되자 1530년이 되어서 황제는 루터 문제와 교회개혁 논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새로운 제국의회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기로 선언합니다. 화해의 제스처였지만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화해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결국 양측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아우구스부르크 회의 다음해인 1531년 루터파 제후들은 슈말칼덴(Schmalkalden)에 모여 황제와 가톨릭에 맞서 자신들을 방어할 군사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1530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1546년까지 루터는 새로운 개혁 교회의 지도자이자 신학교수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느라고 그 이전만큼이나 매우 분주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년에 4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학생들에게 성경을 계속 강의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글을 쓰고, 찾아오는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편지들을 해댔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일은 그의 건강을 해쳤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여러 가지 신체적 질병으로 고통 받았습니다.
1539년 여름부터 루터는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앞서 발간된 독일어 성경의 개정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이 작업은 1541년 9월에 마무리되어 루터는 마침내 전체 성경의 개정판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60대를 향하고 있던 루터는 점점 더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그는 자신이 이룬 개혁의 성과들에 부정적이 되어 갔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개혁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내비치었고, 세상에는 더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노년의 루터는 의기소침해지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교황을 비롯한 적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546년 2월 18일 루터는 고향 만스펠트의 백작인 가브하르트(Gabhard)와 알브레히트(Albrecht) 형제 사이의 상속권 분쟁을 중재하러 갔다가 아이슬레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인숙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문학 석사 및 박사학위(서양현대사 전공)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와 부산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를 거쳐 2018년 현재 카이스트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전임교원으로 재직 중이다.
미국대외정책 관련 논문을 다수 썼고, 역서로는 윌리엄 애플맨 윌리엄스 저, 『미국외교의 비극』 (늘함께, 1995), 공저서로는 미국현대외교사: 루즈벨트에서 클린턴시대까지』 (비봉출판사, 1998) 등이 있다. 최근에는 역사교육 방법론과 인물사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으며 프랑스 혁명기를 다룬 새로운 인물사 책을 준비 중이다.

 

목 차

서문

1부 이탈리아,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시작

제1장 시대를 앞선 위대한 상상력, 레오나르도 다빈치
1. 외로운 어린 시절
2. 피렌체
3. 밀라노에서
4. 귀향: 다시 피렌체에서
5. 연구의 열정
6. 다시 밀라노
7. 노년
8. 인간 레오나르도
9. 연결

제2장 차갑고도 뜨거운 현실주의자, 니콜로 마키아벨리
1. 폭력과 전쟁; 어린 시절
2. 약소국 피렌체와 정치적 격변
3. 공직자가 되다.
4. 모든 것을 잃은 후
5. 복귀, 그리고 마지막
6. 인간 마키아벨리
7. 한바탕의 짧은 꿈

2부 기독교 인문주의의 부상과 종교개혁

제3장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다. 토마스 모어
1. 성장: 청년 인문주의자, 수도사를 꿈꾸다.
2. 세속에서: 출사와 결혼
3. 유토피아: 모두가 행복한 사회
4. 가정, 인간 토마스 모어
5. 종교개혁에 반대하다.
6. 먹구름
7. 죽음으로
8. 사람에게도 격이 있다

제4장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 에라스무스
1. 저지대: ‘새로운 경건 운동’의 요람
2. 수도원
3. 파리 유학
4. 전환점: 영국
5. 가난과 싸우며 공부하고 쓰다.
6. 이탈리아에서
7. 우신예찬: 세상의 어리석음을 예찬하다
8. 명성을 얻다.
9. 소용돌이 속으로
10. 양편 사이에서
11. 개혁의 돌풍 속에서
12. 인간 에라스무스

제5장 개혁의 망치를 들다, 마르틴 루터 
1. 자수성가한 광산업자의 아들
2. 전환과 고뇌
3. 깨달음
4. 저항
5. 개혁과 정치
6. 루터교의 형성
7. 분열
8. 노년, 그리고 죽음
9. 루터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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