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문명과 ‘미개’의 만남에서만이 아니라 무릇 두 문화가 서로 만나면 둘 다 변한다. 두 문화는 서로를 모방하는가 하면 서로를 배타하기도 하고, 또한 각자가 이전에는 의문시하지 않던 정체성에 대해 성찰을 시작하기도 한다. 두 문화가 만나면서 정체성과 타자성 사이의 상호작용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미메시스 이론을 발판으로 삼아 모방의 역사가 식민주의 경험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문명과 ‘미개’의 첫 만남(첫 접촉)이 이루어진 긴장된 순간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이른바 탈식민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아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미메시스 능력’(모방능력)이 어떻게 작동해왔고, 어떤 양상을 보여왔는지를 세세하게 추적한다.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미메시스 이론과 저자의 인류학적 현장 연구를 통해 미메시스의 본질을 탐구
인간의 역사에서 미메시스 능력은 과연 창조적인 이성, 지성, 상상력 또는 언어능력으로 점차 대체되어왔는가? 아니면 후자의 능력들 속에서 은밀하게 작용하는가? 사물의 외양을 충실하게 모사하는 것이 미메시스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아니라면, 미메시스의 대상은 대체 무엇일까? 왜 인간은 타인을 흉내 내고 모방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심지어 인간은 타인을 경멸하고 폄하할 때도 그 타인의 동작이나 모습을 모방하는데, 어째서 그럴까? 이렇듯 미메시스에 대한 물음은 무한히 이어지며, 그 신비한 구조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근대 이래 ― 과학과 이성의 주도 아래 ― 문명화된 서구는 내면으로 억압하거나 극복했다고 여겨진 미메시스를 비서구 내지 비문명화된 문화(원시, 야생, 미개)를 만나면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더욱이 대상을 정교하게 복제하는 매체들, 즉 ‘미메시스 기계들’(사진기, 축음기, 영화 등)이 식민주의 과정에서 야생과 만나면서 미메시스는 다시 한 번 곡예를 펼친다.
저자 타우시크는 미메시스에 관한 벤야민과 아도르노의 이론적 성찰을 인용하는 동시에, 그 자신의 인류학적 현장 연구에 바탕을 둔 민족지(民族誌)를 활용하여 미메시스가 지닌 풍부한 의미층을 드러낸다. 그는 현장 연구에서 관찰하고 탐구한 것들을 바탕으로 미메시스를 단지 이론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비서구,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하는 창조적인 틀로서 사유한다. 그가 미메시스를 통해 다시 읽어낸 서구-비서구 사이의 ‘접촉’은 단지 권력이나 문화적 우위로 단순히 설명해낼 수 없는 모방과 유희, 지배와 그것의 전복의 끝없는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미메시스에 대한 탐구에서 저자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성찰하는 사례는 파나마운하와 콜롬비아 사이에 있는 다리엔 지역의 인디언족인 쿠나인과 엠베라인들이 식민주의 역사를 겪으며 생존해온 과정이다. 그는 스스로 이 지역의 현장 연구를 통해 관찰한 것과 이 지역에 관해 쓰인 여러 민족지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미메시스에 관한 성찰을 심화하고 확장한다. 그에 따르면, 미메시스의 ‘기적’은 복제에 있다. 이 복제는 원본의 재현 자체가 원본의 특성과 힘을 넘겨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원본의 특성과 힘을 보존한다. 즉 재현은 재현된 것의 힘을 공유하거나 재현된 것에서 그 힘을 빼앗는다.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는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에서 이러한 과정을 ‘공감각적 마법’이라고 불렀는데, 타우시크에 따르면 그 마법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체화될 수 있는 어떤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정체성의 인식에도 필수적이다.
이어서 저자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통해 지각이 변화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축음기와 사진기를 비롯해 그밖의 미메시스 기계들은 현실을 복제하면서 ‘원시적인 것’을 현대적인 것으로 전이한다. 즉 19세기 후반에 카메라와 같은 미메시스적 기계가 발명되면서 특이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미메시스 능력이 강화된다. 즉 식민지적 ‘첫 접촉’의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순간은 기계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모방과 접촉의 공감각적 마법으로 재생산된 이미지 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공식적인 식민지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20세기 중반부터 접촉은 역전되어 서구와 나머지 세계, 문명과 그것의 타자들 사이의 본질적으로 다른 경계의 탄생을 가져온 ‘두 번째 접촉’이 이루어진다. 저자에 따르면, ‘두 번째 접촉’과 경계의 불안정화로 인해 풀려난 힘을 흥미롭게 증명해주는 것은 자아가 더는 타자로부터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제 자아는 타자, 말하자면 자아가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맞서야만 하는 타자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메시스적 기계장치들이 타자의 신체와 눈, 그리고 수공품들 속 서구에 대한 미메시스적 반영들과 상호작용할 때 만들어내는 공포와 쾌락의 결합을 설명해준다.
미메시스라는 창(窓)을 통해 인간의 문명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
이 책에서 저자는 그의 비정통적인 분석틀과 역동적이고 긴장에 가득 찬 서술방식으로 민족지, 인종주의, 사회, 낯선 것에 대한 지각과 자기 자신의 지각을 잇는 연결고리에 대한 심층적 이해 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이 여정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미메시스와 타자성의 수많은 순환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어떤 거대한 의미의 자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고, 미메시스를 통해 세계와 자신에 대해 새롭게 성찰할 것을 주문한다. 단지 미메시스 현상이나 미메시스 능력 자체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미메시스를 도구로 인간의 문명화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마이클 타우시크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태어나 의학과 인류학을 수학했으며,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그는 남미 콜롬비아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수행한 현장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스의 물신숭배, 식민주의, 노예제도 등에 관한 독특한 인류학적 사유를 펼쳐왔다. 저서로 『남미에서 악마와 상품물신』(The Devil and Commodity Fetishism in South America, 1980), 『샤머니즘, 식민주의, 야생의 인간: 테러와 치유에 대한 연구』(Shamanism, Colonialism, and the Wild Man: A Study in Terror and Healing, 1987), 『신경체계』(The Nervous System, 1992), 『국가의 마법』(Magic of the State, 1996), 『발터 벤야민의 무덤』(Walter Benjamin’s Grave, 2006), 『콘 울프』(The Corn Wolf, 2015) 등이 있다. 그의 연구는 민족지, 역사, 메타민족지, 이미지와 감각을 혼융한 것이 특징이며, 이러한 독창적인 글쓰기 방식은 그를 가장 논쟁적인 인류학자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옮긴이 : 신은실
이화여대에서 국문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며, 같은 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과에서 「발터 벤야민의 현재성」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이후 영국 에든버러 대학 사회인류학과로 옮아가 「재난 이후: 위험과 불평등에 관한 질문들」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대학교에서 「유령적인 것을 껴안기: 후쿠시마 재난 이후의 동요하는 생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2019년 3월부터 일본 센다이(仙台)의 도호쿠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머물면서 현장 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옮긴이 : 최성만
1995년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벤야민의 미메시스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 『표현인문학』(공저, 생각의나무),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도서출판 길, 2014)이 있으며, 역서로는 『예술의 사회학』(공역, 아놀드 하우저, 한길사, 1990), 『윤이상의 음악세계』(공역, 한길사, 1991),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을 추억하며』(게르숌 숄렘, 한길사, 2002), 『아방가르드의 이론』(페터 뷔르거, 지만지, 2009), 『독일 비애극의 원천』(공역, 발터 벤야민, 한길사, 2009), 『미메시스: 사회적 행동-의례와 놀이-미적 생산』(크리스토프 불프?군터 게바우어, 글항아리, 2016), 『삶은 계속된다』(루트 클뤼거, 문학동네, 2018) 등이 있다. 아울러 벤야민, 아도르노, 미메시스, 해체론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2007년부터 『발터 벤야민 선집』(도서출판 길, 전 15권) 기획과 번역을 주도하고 있다.
목 차
제2판 서문 이 책의 출간 20여 년 후 9
감사의 말 13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17
제1장 사람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영(영)들의 초상을 통해 그 영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25
제2장 시각 세계의 관상학적 양상들 51
제3장 공간 속에 해체되기 73
제4장 황금가지: 미메시스의 마법 91
제5장 황금빛 군대: 미메미스를 조직하기 115
제6장 세계사의 바람을 우리의 돛에 받기 133
제7장 마임 배우의 정신, 증여의 정신 161
제8장 미메시스적 세계들, 보이지 않는 반대세계들 179
제9장 세계의 기원 197
제10장 타자성 221
제11장 타자성의 색 243
제12장 백인 인디언을 찾아서 271
제13장 여성으로서의 아메리카: 서구 복장의 마법 291
제14장 말하는 기계 315
제15장 주인의 목소리 339
제16장 성찰 369
제17장 탈식민주의 시대의 공감각적 마법 391
옮긴이의 말 400
참고문헌 407
찾아보기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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