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879인의 ‘육성’으로 보는
해방공간(1945~1950) 북한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 나오는 유명한 테제이다. 다소 과장이 섞여 있을지 몰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이 명제를 살짝 눙치자면 “과거를 모르고서는 의미 있는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정도가 되겠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 서 있는지 알려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어디로 갈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삼고 있는 우리에게 북한사는 단순한 역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정치․경제․군사만이 아니라 북한의 역사를 알아야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향하는 초석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연구서라는 점에서 이 책은 출간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를 가진다.
북한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 제시
국내에서 북한사 연구 분야는 그 역사도 짧고 연구진도 두텁지 못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료 입수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사료 개방정책 덕분에, 중국 당안과 몇몇 러시아 아카이브를 제외하고, 북한 관련 자료의 제한이 대부분 풀렸다. 그에 힘입어 이 책은 결이 다른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다.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신선한 사료를 바탕으로 과거를 추적하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북한사를 연구해온 지은이는 북한 당국이 체제 유지 혹은 강화를 위해 개개인들로부터 수합한 879인의 자술서․이력서 그리고 이에 대한 상급자의 평정서들을 중심으로 북한사의 핵심 이슈들을 흥미롭게 엮어냈다.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진주했던 미군이 노획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 중이던 사료들이다. 교수 교사 학생 공직자 간부 노동당원 군인 등 북한의 젊은이들이 생존을 위해 혹은 출세를 위해 털어놓은 그들의 삶은 그만큼 진솔하다. 그러기에 그간 정치사 제도사 중심으로 진행돼 왔던 북한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참고: 미군이 전시에 북한지역 공공기관에서 탈취한 이 문건들은 그 기관에 근무한 직원들 개개인의 기록물이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진, 평양공업대학 교수진, 흥남공업대학 교수진, 평양의학대학 교수진, 함흥의과대학 교수진, 청진의과대학 교수진, 평양교원대학 역사과․지리과․노어과․수학물리과․화학과․체육과 학생들, 황해도 재령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강원도 김화군․평강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함경남도 영흥군․함주군 내 각 중학교 교사들, 황해도 벽성군․송화군․은율군 내 참심원들, 조선인민군 하사관과 병사들, 조선중앙통신사 직원들 등의 자서전․이력서이다.)
이제까지 연구자들이 주로 활용한 북한 관련 자료는 잡지나 신문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자료들이 대부분이다. 철저한 검열의 전통이 지속돼 왔기 때문에, 북한의 공식 간행물에서 생동감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자서전․이력서는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의 집단 경험은 혁명에 착수한 북한의 시대상과 사회상을 생생히 보여준다.
‘아래로부터의’ 진솔한 이야기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일상사 미시사 연구의 활성화는 이를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북한 연구가 통치자나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왔다면, 이 연구는 북한을 살았던 이름 없는 일반인들을 조명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북한 연구가 통치자나 지배층의 시각을 통해 역사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면, 지은이는 대중 또는 민중으로 일컬어지는 일반인들의 관점을 통해 북한사를 재구성함으로써 나름의 성취를 보여준다. 즉 이 책에는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
황해도 송화군에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공산청년동맹과 적위대는 사이렌을 울리며 주민들의 피신을 유도했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부녀자들을 잘 간수해야 한다는 경고도 했단다(124쪽). 한선일이라는 젊은이가 소개한 대목인데, 소련군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당시 좌익 단체조차 불신했을 만큼 좋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공식 기록과 다른 민초의 시각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가 놓쳤던 역사의 이면들
역사를 읽는 큰 재미 중 하나는 종종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무릎을 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군의軍醫로 타이완에 끌려갔던 황수봉이란 젊은이 이야기가 그렇다. 그는 해방 후 진급을 시켜주겠다는 사령관의 회유를 뿌리치고 탈주해 현지에서 1300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 병사들을 모아 ‘인민의용군’을 창설해 일본군은 물론 중국국민당 중앙군과 협상해 1946년 무사 귀국을 성사시켰다(107쪽).
북한의 국가건설에 경성대학 교수 등 남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어떤가?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반대했던 경성공업대학 수학교수 홍성해,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이한희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301쪽).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임용 예정인 전문가 중 남한 출신이 절반 가까운 44.4퍼센트라는 기록도 보인다.
따지고 보면 역사라는 것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대를 살았던 이들의 육성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는 자서전․이력서야말로 정사가 놓치고 있는 역사를 재현하기에 최적화된 자료이다.
흐름을 짚으며 디테일을 함께 살리다
지은이는 자서전․이력서를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해방의 감격과 혼란, 국가건설 과정, 토지개혁, 연좌제 등 해방공간 북한에서 벌어진 굵직한 이슈들을 따라 자서전과 이력서를 정교하게 엮어냈다. 예컨대 북한의 토지개혁이 수많은 ‘혁명의 밀알’을 낳아 체제의 버팀목이 되었다는 의미를 짚어내며, 이를 둘러싼 환호와 탄식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식이다.
황해도 재령군의 머슴 출신 오남제는 토지개혁으로 논 800여 평을 분여받고는 어엿한 가정을 이루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첫 수확 후 가장 먼저 현물세로 쌀 네 가마니를 납부하고도 ‘애국미’ 여섯 가마니를 추가로 헌납했을 정도였다(272쪽). 해방 직후 북한에 불어 닥친 러시아어 학습 열풍을 “인텔리나 대학생이라면 러시아어 서명을 만드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정성스레 자서전을 마무리한 그들은 작성일과 성명을 기입한 뒤, 멋들어진 러시아어 서명을 남겼다”(130쪽)고 그리거나, 출신성분과 사회성분을 따진 북한에서 황충환이란 이는 기독교 장로인 장인과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인 처남을 둔 “불순한 가정”과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시달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여느 역사책에선 볼 수 없는 세밀화이다.
북한사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미래의 삶의 질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사람들의 일상 삶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봄으로써 통일의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실린 자서전과 이력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일상사 사회사 미시사는 북한 사람들의 의식과 심리에 다가갈 수 있는 훌륭한 길잡이 구실을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고려대학교 대학원 한국사학과에서 북한의 국가 건설과 계급정책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강의를 하며, 고려대?경희대?충북대 사학과 산하 기관의 연구교수를 역임해왔다. 주요 연구 성과로는 《북한체제의 기원-인민 위의 계급, 계급 위의 국가》(2018)가 있다. 대중들이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북한사를 쉽고 역동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목 차
머리말
서설
김삼돌의 고백
제1부 전략적 글쓰기
집안의 역사 고백
당국을 기만하기
자서전 쓰기의 전략|변명성 글쓰기|허위 기재|의도적 누락
평정서: 개개인을 해부하기
기만적 글쓰기 적발|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평정자들
제2부 해방의 소용돌이
해방의 전조
소련군 참전|수심에 젖은 피란민들
기록으로 포착된 해방의 순간
감격에 젖은 사람들|일본인들 사이에서 맞은 해방|일제의 군병에서 조선의 군인으로
해방의 두 얼굴
민족성 되찾기|혼돈에서 건설로
해방군의 나라
붉은 군대|러시아어 학습 열풍|소련계 한인 서춘식
제3부 대중조직 건설운동
해방기의 혼란 수습
질서유지에 앞장선 학생 치안대원들|임시 치안기구에서 영구 보안기구로|자치기구 결성에 나선 조선인들
북조선 청년층 장악
공산청년동맹|민주청년동맹
인민 장악과 동원의 가교 사회단체
제4부 일제 잔재 청산
공분의 표적 일본인과 친일파
보복 대상이 된 일본인들|친일파 척결
면죄부를 받은 일제시기 공직자들
참회와 속죄|비켜가지 않은 처벌
제5부 반체제운동
좌우 대립
우익을 지지하는 학생들|정치투쟁의 장으로 돌변한 학원사회
우익 기반의 몰락
사상투쟁의 선두에 선 민청|학내 경찰력 투입|수면 아래로 잠수한 저항운동
제6부 주도권 쟁탈에 나선 정당들
북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
혁명투사 선발과 육성|부적격자 처벌과 축출|“종파분자”로 몰린 고영찬
우당友黨: 연대와 갈등의 불협화음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의 만주 진출|조선신민당|조선민주당|천도교청우당
제7부 혁명의 시작, 토지개혁
몰수와 분여
토지개혁의 정당성|역사의 현장에서 본 토지개혁|과열된 계급투쟁, 2차 토지개혁으로
환호와 보답
토지개혁이 낳은 기적|체제의 버팀목이 된 빈농들
시련과 저항
토지개혁이 불러온 절망과 시련|불만을 넘어 저항으로
제8부 국가 건설
기술자 부족 사태
인재 충원과 간부 등용
일제시기 전문가와 생계형 부역자 재등용|이공계 출신과 고학력자 우대|‘국대안’ 파동과 남한 전문가 초빙
대중들의 국가건설운동 참여 열기
건국을 향한 열의와 헌신|공장관리운동|표창과 인센티브|건축 기술자 김응상의 국가건설운동 참여
제9부 교육: ‘새로운 인간형’ 만들기
무너진 교육제도
열악한 교육 여건과 교원 부족|빈곤층을 막아선 교육의 장벽|추천을 통한 대학 진학
새로운 세계를 약속한 마르크스-레닌주의
대중 앞에 나선 혁명가들|사상 학습이 불러온 놀라운 변화|혁명가 양성의 산실, 정치학교와 정치서클|알려지지 않은 이론가 이학모의 삶|알려지지 않은 이론가 이인범의 삶|진보적 사상에서 일반인들의 교양으로
인간 개조
인민과 개인|성격과 개성의 개조|종교는 아편이자 독한 마취약|김덕윤의 고백: 인간 개조의 성공 사례
제10부 가족
연좌제
가정 장악과 처벌
사상적 전염 예방|불순한 가족관계에 연대 책임 부과
제11부 계급
출신성분
성분 분류의 모호성|인성과 사상성을 비추는 거울
무산계급과 유산계급
노동자․농민 출신 우대|지주와 부유층 억압
궁지에 몰린 착취계급
희망의 상실|가로막힌 출셋길|끝없는 참회의 길
맺음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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