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 조선 역사가들의 시선을 빌려 복원한 새로운 고려 인물론
- 사료 속에 박제되어 있던 고려 인물을 역사의 무대로 소환하다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고 ‘승자의 역사’를 기록하게 된 조선 역사가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의 인물들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또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와는 어떻게 다를까? 30년 넘게 고려사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온 역사학자 박종기의 신작이 출간됐다. 고려사 분야 대표 교양서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 《고려사의 재발견》이 500년 고려사를 통사적으로 다뤘다면, 전작 《고려 열전》에 이은 《조선이 본 고려》는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로서 ‘인간’에 집중해 고려사를 서술하는 이른바 역사 인물론이다. 이번 《조선이 본 고려》가 특별한 이유는 그저 인물을 매개로 당대 역사를 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 인물에 대한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망라하여 각각의 인물을 다각적으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 다른 시대 역사가들의 생각을 경유하고 종합하여 고려 인물들의 삶을 복원하는 시도이자, 고려사와 역사 인물을 조망하는 새로운 방법론인 셈이다.
태조 왕건, 정도전, 최치원, 이색 같은 고려의 대표적 인물뿐 아니라, 가장 오해받거나 잘못 평가되어온 우왕, 창왕부터 새로이 주목해야 할 김득배, 원천석까지. 저자는 고려 당대부터 조선, 현대를 넘나들며 역사가들의 시선을 교차해 살핌으로써, 사료 속에 박제되어 있던 고려 인물들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를 보는 다양한 관점과 한 인물을 둘러싼 겹겹의 평가를 그대로 드러내고 견주며 고려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역사를 움직이는 ‘인간’의 삶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조선 역사가들은 인물에 대한 평가를 주로 사론(史論)으로 남겼고, 따라서 사론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 평가와 견해를 정리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 역사가들의 평가와 고려 당대의 평가,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를 비교·검토해 각 인물의 삶과 그가 살던 시대를 가능한 한 충실하고 객관적으로 살려내려 했다. …… 다른 시대 역사가들의 생각을 통해 또 다른 시대와 그 시대를 산 인물들의 삶을 복원하려는 방법은 지금껏 역사서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이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6~7쪽)
2. 선과 악의 잣대를 허물고 인간의 입체적인 면모를 살피다
- 고려 인물을 바라보는 다층적인 시선
저자는 조선 후기 역사가 성호 이익이 저술한 《성호사설》을 기본 텍스트로 삼고, 이익이 소환한 약 20명의 고려 인물에 대해 각기 다른 시기, 관점에서 부여되어온 평가들을 덧붙인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같은 조선 전기의 관찬사서, 《성호사설》, 《동사강목》, 《여사제강》 같은 조선 후기 대표적 학자들의 역사서뿐 아니라, 최승로, 서필 등 고려 당대 인물의 평가부터 저자 본인을 비롯한 동시대 역사학자들의 ‘현대판 사론’까지 아우른다. 나아가 ‘시로 쓴 역사’로서 우리 역사에서는 희귀한 역사책인 원천석의 《운곡시사》와 이색이 남긴 시편 등,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당대의 사건과 현실을 반영하는 사료라면 형식을 가리지 않고 담아냈다.
다양한 역사가들의 해석이 겹겹이 쌓이면서, 하나의 사료로 바라봤을 땐 알 수 없던 고려 인물의 입체적 면모가 드러난다. 예컨대 고려의 관리 이공승은 환관 출신 정함을 관료로 임명하려는 의종의 완강한 요청에 동의한 이유로 조선 전기 역사가들로부터 비난 일변도의 평가를 받았으나, 조선 후기 이익은 이공승이 자신의 결정을 번복한 사실에 새롭게 주목한다. 이익의 시선은 인물을 선과 악의 잣대만으로 평가하는 전근대 유교사관의 하나인 포폄론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편 광종 개혁을 바라보는 현대 역사학계의 긍정적인 시선과 달리, 고려 당대를 살았던 최승로와 서필은 광종에 대한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광종 대에 이미 기존 질서에 깊이 안착해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던 이들의 눈에 정국의 변화를 꾀하는 광종은 견제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800여 년이 지나고서야, 광종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종휘에 의해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무관하게 평가될 수 있었다.
이처럼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일관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역사가 역시 한 시대에 속박된 개인으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념과 가치관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평가하는 사람과 평가받는 인물이 놓인 상황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며, 때론 사건을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충분한 시차가 생겨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인간이 본래 입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간 알고 있던 고려 인물의 새로운 모습을, 혹은 선악으로 납작하게 평가되었으나 다시 주목받아야 마땅한 인물을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이익의 인간관은 인물의 행적을 각각 공과 과로 나누어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근대 역사학의 평가방식인 공과론을 연상시킨다. 18세기 조선의 역사가 이익의 역사학에서 그러한 단서가 보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익은 인물을 오로지 선과 악의 어느 하나의 잣대로 평가한 전근대 유교사관의 하나인 포폄론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 이익은 공과론의 입장에서 인물이 가진 공과 과를 두루 살펴 인물을 입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했다. 이익의 공과론은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와 인물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새로운 통찰과 상상력을 더해주고 있다. 인물 평가의 어려움과 즐거움이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학의 또 다른 매력이다. - 2부 2장 〈이공승: 포폄론과 공과론〉 중에서(78~79쪽)
가까이에서 보아야 잘 보이는 경우가 있고 멀리서 보아야 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역사 평가가 그러하다. 가까이서 목격하고 기록한 사실은 당대의 시대성을 담고 있지만, 평가와 해석은 한발 물러선 뒤에서 볼 때 더 객관적일 수 있다. 광종 사후 800여 년 뒤의 역사가 이종휘의 안목에서 역사해석은 시효성과 관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임을 깨닫게 된다. 서필과 최승로가 광종이 등용한 귀화 외국인을 ‘남북의 어중이떠중이’, ‘신참’,‘ 귀화한 중국사람’으로 비하하면서 광종의 등용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종휘는 친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공정한 인재 등용책이 광종 개혁이 성공한 원동력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종휘의 광종 평가는 광종 치세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뒤의 평가이지만, 역사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 1부 2장 〈광종: 개혁과 입현무방〉 중에서(38~39쪽)
3. 승자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시 읽는 고려사
- 경합하고, 수용되고, 때로는 뒤집히는 역사 평가와 해석의 현장
저자 박종기는 고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역사가들의 평가를 통해, 고려 인물에 대한 하나의 서술이나 관점을 채택하기보다 여러 겹의 평가를 있는 그대로 제시한다. 바로 여기에서 《조선이 본 고려》의 미덕이 드러난다. 종전의 평가를 의심 없이 답습하는 대신 다시 의문을 던지고 재해석하는 것이 역사가들의 태도라면, 이 책이야말로 역사학이 지녀야 할 바로 그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단선적으로 매끄럽게 서술된 ‘유일한’ 역사를 암기하듯이 받아들이기보다 저자가 역사가들의 평가를 견주고 고민하는 과정을 좇음으로써, 고려사에 대한 무수한 해석이 서로 경합하고, 수용되고, 때론 뒤집히면서 현재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폐가입진론’을 둘러싸고 조선 역사가들의 평가가 변화해온 과정은 이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이다. 고려 망국과 조선 건국이라는 전환점의 시기,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은 신씨인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론’으로 발전해 두 왕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역사의 주역이 된 조선 건국 세력은 이 일련의 흐름을 조선 전기 역사서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기록했고, 이는 오래도록 부정되지 않는 ‘정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승자의 역사’도 결국은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는 용기 있는 역사가들에 의해 뒤집히곤 한다. 300여 년이 흘러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성호 이익, 안정복 등이 이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역사와 그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이는 역사학이 지닌 본질적인 난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고 재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조선이 본 고려》는 역사는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될 수 없으며 관점을 초월한 온전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불가능하다는 지고의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나아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해석되고 만들어지고 있는 동시대의 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사유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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