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행상인의 짐꾸러미
저가품 시장을 만들어낸 첫 주역은 18세기 중반의 행상인들이었다. 이들의 주무기는 저렴함 이전에 진기함, 다양성, 접근성이었다. 행상인의 짐꾸러미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은 소비자들을 경이와 흥미,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놓았다. 이들은 화려한 언변술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소비자의 감각과 감정을 자극했다. 1790년대에 이르러 행상인들은 상설 잡화점으로 편입되었고, 저렴하고 열등하지만 풍부하고 다채로운 상품을 선보여 소비자들을 현혹했다.
아주 낮은 균일 가격으로 여러 물품을 판매하는 균일가 매장이 그 뒤를 이었다. 균일가 매장 모델을 대중화시킨 것으로 알려진 프랭크 울워스는 1879년 첫 5센트 균일가 매장을 열어 10년 만에 24만6700달러라는 매출을 달성했다. 저렴한 물건의 과잉 현상과 어리석은 소비 행태를 경계한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저렴함’의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몸을 불린 잡화점과 균일가 매장들은 판매술을 정교하게 다듬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체인점 형태로 발전했다. 그들은 매장에 냄새, 소리, 조명 등 소비자의 감각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배치했으며, ‘수익성 높은 조합’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진열함으로써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이를테면 “치약과 칫솔은 서로를 추천하는 것이 명백하므로 매출 상승 효과를 내게 하기 위해서는 가까이에 진열해야 한다”. 그리고 “쌓여 있는 물건들 옆에 깔끔하게 정리된 물건들을 두는 것으로 뒤죽박죽인 상품이 값싸고 좋은 물건이 되는 효과가 났다”. 이 모든 전략은 결국 소비자들을 “싸구려의 풍요라는 감각적인 로맨스에 휩쓸리게 했다”.
창의적인 쓸모없음
싸구려 정신을 드러낸 것은 저렴한 물건들뿐만이 아니었다. 각종 신형 버터 교반기, 자동 감자 껍질 깎이, 수십 가지 기능을 가진 공구, 아스파라거스 전용 집게(도대체 아스파라거스만을 위한 집게가 왜 필요했을까) 등 진보와 혁신과 독창성이라는 이름 아래 소비자들에게 접근한 기기들이야말로 싸구려가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렘브란트 자동 감자 껍질 깎이’는 유압을 이용해 1분도 안 걸려 자동으로 감자의 껍질을 벗기고 표면을 세척하며 잔여물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혁신적인 기기로 홍보되었다. 그러나 이 기기는 일을 줄여주기는커녕 괜한 일을 만들어냈다. 감자가 기기에서 튀어나와 사방팔방에 억세게 눌어붙은 반죽으로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기기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싸구려는 단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사물 이면에 있는 기만과 협잡이다. 기술의 발전과 특허 열풍에 힘입어, 아무리 봐도 터무니없는 기이한 기기들이 시장에 넘쳐났다. 천재 아니면 사기꾼, 괴짜들의 대부분 허황되고 가끔씩 예지적인 상상력, 즉 ‘미국적 창의성’의 시대였다. 어떤 기기는 진짜배기일 때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 과장된 광고보다 실효성이 한참 떨어지는 거짓말 덩어리였다. 112가지 도구를 합쳐서 만든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도대체 어떻게 실제로 사용할 수 있었겠는가(심지어 가격이 1400달러였다).
때맞춰 TV가 보급되면서, 기기는 인포머셜(실시간 구매를 유도하는 장시간 광고)을 통해 날개를 달았다. 인포머셜의 대가 윌리엄 ‘파파’ 바너드는 온갖 과장과 거짓말을 동원해 TV 앞에 앉은 소비자들을 유혹했다. 인포머셜을 보고 있노라면 기기의 신통한 능력이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고, 소비자들은 직접 기기를 사용함으로써 혁신의 흐름에 동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기기의 시대는 이처럼 제작과 광고, 소비 모든 면에서 싸구려 그 자체였다.
아직도 내가 공짜로 보여?
19세기 초, ‘공짜’ 물건들이 나타났다. 공짜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은 상품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소비자들의 삶에 싸구려를 채워넣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당대 최고의 비누 상인이라고 자칭한 히버드 로스는 비누를 파는 데 거의 서른 가지 경품을 제공했다. 구매자는 손수건이나 잡지, 금제 회중시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철도역 근처 땅(!)도 경품에 포함되어 있었다. ‘증정품’ ‘선물’ ‘경품’은 희망, 욕망, 기대, 선의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냄으로써, 공짜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전망만으로도 필요 이상의 물건을 사도록 소비자들을 자극했다. 전략 자체도 싸구려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경품으로 증정되는 물건들도 가짜 보석, 도금 펜, 장식 단추 등 잡동사니였다. 경품 전략은 판로가 막힌 싸구려 물건에서 가치를 이끌어내주기도 했다. 공짜로 증정함으로써 다른 물건의 판매를 촉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공급하는 업체들도 생겨났다.
20세기에 전략은 훨씬 더 노골적으로 발전했다. ‘광고 판촉물advertising specialty’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싸구려가 탄생한 것이다. 그간의 경품은 판매와 관련 있는 데다 상품을 어느 정도 사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면, 광고 판촉물은 정말로 공짜로 주는, 업체의 광고용 각인이 찍힌 물건이었다. 경품은 상품화를 위한 장치였던 반면 광고 판촉물은 ‘살아 있는 광고 매체’였던 것이다. 만년필, 식기 세트, 달력, 문진, 지갑 등 업체의 이름이나 로고가 찍힌 광고 판촉물들이 선의와 친밀함을 내세워 사람들의 삶 속으로 침투했다. 사람들은 공짜라는 생각에 광고 판촉물을 반겼지만 사실 이 물건들은 공짜가 아니었다. 소유자를 ‘걸어다니는 광고판’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대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공짜는 삶에 완전히 통합되었고, 사람들은 호감과 선의와 같은 감정마저도 팔아치우는 충실한 소비자가 되고 말았다.
취향과 안목, 가치의 상술
각종 장식품과 소품, 골동품도 싸구려의 반열에 합류했다. 도자기, 유리 제품, 인형, 접시, 조명 등 실내를 장식하는 물건들은 소비자들이 고고한 취향을 뽐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비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이런 물건들에는 역사나 서사가 부여되었는데, 사실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었으니 기만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가게에 들어와 작은 인물 조각상 세트를 구경하는 순진한 손님에게 ‘알프스산맥의 목동이 마을의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만든 조각상입니다’라며 거짓말을 하는 식이었다. 20세기 초에는 이런 상품들을 이르는 신조어 ‘선물용품giftware’이라는 말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선물용품은 ‘진기하다’ ‘예스럽다’ ‘차별성 있다’ ‘세련됐다’ 등의 수식어를 등에 업고 소비자들의 허영심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사람들은 남들과 다른 안목을 뽐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선물용품을 구매하고 주고받았지만, 사실 대량생산된 이 물건들은 구매자를 “다른 모두와 똑같이 독특하게” 만들어줄 뿐이었다.
수집품 시장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볼 수 있었다. 원래 수집이란 기꺼이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 스스로의 귀함을 설명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수집되기를 노골적으로 의도하여 제작된 ‘의도적인 수집품’들이 나타난 것이다. 미술 작품을 인쇄한 접시 세트,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새긴 기념품 스푼, 기념 주화 같은 물건들이 그 예다. 1970년대 후반 캘훈스컬렉터스소사이어티는 ‘공식 베들레헴 크리스마스 접시’를 판매했는데, 베들레헴의 그리스 정교회 인물을 끌어들여 공신력이 있는 척한 데다가 온갖 주먹구구식 도장과 서명을 활용해 수집품으로서의 거짓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주화 열풍을 이끌었던 프랭클린민트 주화, 수집용 조각상의 대표 격인 후멜 조각상과 프레셔스모먼츠 조각상, 수집품 시장을 한때 지배했던 타이 워너의 비니베이비스 인형 등도 비슷한 전략을 사용했다. 이들 의도적인 수집품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거품이 빠지고 그 실체가 드러나면서 수집가와 투자자들을 나락으로 빠트렸다.
우리는 그간 너무 많은 싸구려와 함께 살아왔다. 간편하고 저렴하다는 이유로 별 뜻 없이 주변을 싸구려로 채워오다가 어느새 톡톡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넘쳐나는 일회용품과 플라스틱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저가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지구 곳곳에서 노동 착취가 성행하고 저가품을 공급하기 위해 각국의 대형 마트에서 점원들이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저렴함과 풍요로움에 안주하여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물건들이야말로 우리를 규정한다. 무심코 사들이던 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좀더 알아야 할 때가 왔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친숙한 물건들을, 그리고 스스로의 모습을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웬디 A. 월러슨(Wendy A. Woloson)
럿거스대학 캠든캠퍼스 역사학 교수 겸 학과장. 캘리포니아 도서관조합에서 10년 넘게 종이책 큐레이터로 일한 이력이 있으며, 순수미술 석사학위를 취득한 판화 예술가이기도 하다. 주로 소비자 문화, 물질 문화, 시각 문화, 2차 시장, 19세기 미국의 자본주의를 가르치고 연구한다. 『품격 있는 취향: 소금, 사탕, 그리고 19세기 미국의 소비자』 『전당포: 독립부터 대공황까지 미국의 전당업』 등을 저술했으며 『가스등이 밝힌 자본주의: 19세기 미국 경제를 조명하다』 등 다양한 책의 편집에 참여했다.
옮긴이 : 이종호
서강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국제금융, 해외 자본 유치, 해외 IR 업무를 담당하며 직장생활을 했다. 현재는 독일에 거주하고 있다. 번역가 모임인 바른번역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레이 달리오의 금융 위기 템플릿』 『또래압력은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가』 『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수의 금융 수업』 등이 있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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