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태종 이방원 1-1400년~1402년 태종실록 원본 그대로-(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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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김혜정, 김흥중, 이남철, 배용구
출판사항공감의힘, 발행일:2022/02/10
형태사항p.511 국판:23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91874273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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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태종 이방원이 있었기에, 성군 세종대왕이 있었다.”


리더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자질,

권력자가 짊어져야 할 모든 숙명,

마지막엔, 모든 권력을 스스로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이방원!


고려의 불교와 봉건 귀족사회라는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던 혁명적인 전환기 때 누구보다 조선의 건국에 앞장섰던 리더 이방원,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고 냉철하였다. 이는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여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와 비교해 볼 때, 쿠데타로 즉위한 인물로서의 공통점은 있지만, 사후 처리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즉, 세조는 왕위 등극 후에 공신을 우대해 줘서 이들에게 공을 치하했지만, 태종은 반대로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조선 최고의 왕이 된다.

이방원은 두 번의 왕자난을 일으켜 잔혹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가족 사랑에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 말론 브란도와 알파치노가 출연한 영화 <대부>속의 알파치노와 닮았다.

본서는 ????태종실록????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하였다. 주요 인물을 각주 처리하였으며 본서의 마지막에 인물 찾기를 하였다.

더불어 KBS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을 시청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22년 1월

만든 사람들 올림



서언


태종 이방원


▪개요

성은 이李, 휘는 방원芳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1400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생애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부 귀주에서 이성계와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은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 운곡 원천석이 태종의 왕자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였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다. 1388년(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함경도)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왕 2년), 밀직사대언에 임명되었고, 1391년 어머니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일)를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경처 강씨(신덕왕후)는 여묘살이를 중단시키고 해주로 건너가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내었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청구영언????과 ????가곡원류????, ????병와가곡집????, ????해동가요????, ????시가????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此亦何如彼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하여가」


「하여가」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단심가」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방원은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1398년 방원은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의 상징으로 나타내어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 이것은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


▪조선 개국

조선의 제3대 임금(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이다.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원래 장자 승계의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보다 신권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


▪제1, 2차 왕자의 난

개국 후 태조는 강씨를 현비로 책봉해 수비(首妃: 으뜸 왕비)로 삼고, 한씨에게 절비節妃의 시호와 제릉齊陵이라는 능호를 주어 추증 왕비로 삼아 차비次妃로 삼았으며 강씨 소생의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별하여 막내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강씨가 사망하여 태조가 강씨를 왕후로 추봉하니 비록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한씨는 후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또한 태조는 개국 초 군권분장정책에 의해 왕자와 종친 및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으며, 이에 반발한 한씨 소생 왕자들이 동복 형제들 및 종친들과 결탁해 태조 7년(1398년) 10월 6일(음력 8월 26일)에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강씨 소생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방번이 살해되고 한씨 소생 둘째 아들인 방과가 왕세자로 등극하였다가 한 달 뒤 즉위하니 그가 곧 정종이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 방원이 정종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난을 일으킨 이유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함이었음을 명분으로 하여 동시에 이복이지만 친아우들을 살해한 패륜의 책임을 당장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무장으로서는 탁월했지만 정치적 감각은 그보다 부족했던 형 정종에게서 자리를 양도받을 자신이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이후 정종을 압박하는 방원의 행위에 여러 왕자들이 분개하다가 그 중 방원과 함께 비어있는 왕세자의 자리를 노리던 방간이 정종 2년(1400년) 음력 1월에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이를 제압한 방원은 2월 25일(음력 2월 1일)에 왕세자로 등극하고, 그해 11월 28일(음력 11월 13일)에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하니 그가 태종이다.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새로이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의흥부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척불숭유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원전을 몰수하였다. 또한 호패법·서얼금고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다스리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 사병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 조직은 사라졌으며, 이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다.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태종 대에는 모두 4차례에 걸쳐 관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태조 때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 방향성을 권근과 하륜 등이 수정하여 국왕-의정부-육조-언관 체제가 이 시기 자리잡았다. 태종 14년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태종은 1402년(태종 2)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또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를 폐지하고 저화를 발행했다.


▪공신의 숙청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당대와 다음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 태종은 먼저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이거이 부자를 유배 보내고, 공신이자 오른팔이었던 안성부원군 이숙번을 유배보낸 뒤 ‘사후 백여 년간 도성출입을 금지’하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원경왕후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 민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네 명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과 민무회 등은 모두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었다.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지지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장인 민제는 곧 병사했고, 장인의 죽음과 동시에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유배했다가 사사케 하고,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 그의 처가는 몰락하게 되었다. 1405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 본인이 제거한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서적편찬과 간행

1403년 태종은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여 계미자 활판을 제작하게 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다. 1404년 2월에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것을 명령한 사실까지 실록에 기록되었다.

1413년에는 즉위 이후에 추진한 일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과 ????속집상절???? 2권을 간행하였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하려다가 중단한 ????고려사????의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하게 하였으며, 권근과 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이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불교와 도참사상의 억제

태종은 집권 직후 종교 문제에도 개입하였다. 그 자신이 성리학을 수학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한층 강화한다. 1406년 사원혁파를 단행하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압수하였으며, 승려들 역시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전토를 국고에 강제 환속시켰다. 도교에도 부정적이었던 그는 1417년부터는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참서와 예언서들, 무속 관련 서적들을 소각하도록 한다.


▪서얼 차별 규정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 및 서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배제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

방원은 둘째 형 영안군 방과를 왕으로 앉히면서, 그 교지에 ‘간신 정도전 등이 서얼을 세워 후사를 삼아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뒤엎고 적서의 구분을 어지럽히려 하였다.’라고 쓰게 하였다. 이것이 적, 서를 구분지은 최초의 기록이다. 그 뒤 태종은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서자 차별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적서, 구분의 문제는 여러 신하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다. 하륜은 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하였다.

그 후 서선徐選은 14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고 공의를 내세워 이의 채택을 보았다. 서얼 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 등의 공의를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된다.


▪집권 후반기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하였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이도, 훗날 세종)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태종은 명하여 충녕이 책을 못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를 보냈다.


▪퇴위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 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사위인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박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왕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 충녕대군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1422년 5월 10일, 56세로 승하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로 승하하였다. 일찍이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승하한 것이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묘호와 시호

묘호는 태종이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숙종과 고종 때 존호가 더해졌다. 최종 존시는 태종太宗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능호는 헌릉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1호에 있다.

작가 소개

김헤정


현 한라대학교 영상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디자인학 박사

강원도지역혁신위원회 심의위원

태종 이방원 - 편집위원


저서

기초조형입문서 - 이끌림의 비밀 (넥센미디어)

미국 대통령의 명연설문 재발견 공감의힘, 2021)

리더 태종이방원 (공감의힘, 2022)

목 차

▪머리말 / 3

▪이방원은 누구인가? / 5

∙ 개요 / 5

∙ 생애 / 5

∙ 조선 개국 / 7

∙ 제1, 2차 왕자의 난 / 8

∙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 8

∙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 9

∙ 공신의 숙청 / 9

∙ 서적편찬과 간행 / 10

∙ 불교와 도참사상의 억제 / 110

∙ 서얼 차별 규정 / 11

∙ 집권 후반기 / 11

∙ 퇴위 / 12

∙ 1422년 5월 10일, 56세로 승하 / 13

∙ 묘호와 시호 / 13


▪주요 등장인물 / 14


정종 2년(1400년)


1400년 11월 01일 정종이 우현보에게 전지 70결을 하사하다 / 26

1400년 11월 11일 정종이 왕세자에게 선위하다 / 29

1400년 11월 13일 세자가 수창궁에서 즉위하고 사면령을 반포하다 / 31

1400년 12월 01일 왕이 상왕전에 나아가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헌수하다 / 39

1400년 12월 22일 수창궁이 화재를 당하다 / 49


태종 1년(1401년)


1401년 01월 01일 태상전(태조)과 상왕전(정종)에 조알하다 / 56

1401년 01월 09일 정빈 민씨를 정비靜妃로 삼다 / 58

1401년 01월 14일 권근이 치도 6조목을 임금에게 권고하다 / 60

1401년 01월 15일 노비변정 도감을 혁파하다 / 70

1401년 02월 12일 중국 사신 육옹이 시 3편을 올리다 / 95

1401년 03월 01일 태상전 궁녀들에게 3품부터 9품까지 작을 주다 / 103

1401년 03월 13일 박석명이 생원시를 조종생 등 1백 사람을 뽑다 / 108

1401년 03월 23일 문하부낭사에서 경연에 참석할 것을 건의하다 / 112

1401년 윤 03월 01일 문익점․최무선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다 / 118

1401년 윤 03월 15일 태종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는 명나라 자문이 도착되다 / 122

1401년 윤 03월 22일 대사헌 유관 등이 승려의 수를 줄일 것을 건의하다 / 126

1401년 윤 03월 23일 경연에서 불교 폐지론에 관해서 논하다 / 130

1401년 04월 06일 하륜의 건의에 따라 사섬서를 설치하여 저화를 맡게하다 / 134

1401년 04월 09일 지공거 하륜이 뽑은 장원 조말생 등 3인을 등용하다 / 136

1401년 04월 20일 김효손의 별사전 혁파를 윤허하다 / 142

1401년 05월 17일 회안 대군 이방간의 병을 치료하게 하다 / 156

1401년 06월 04일 태상왕의 명으로 회안군 소환을 정부와 백관이 반대하다 / 162

1401년 06월 16일 하륜․권근․이첨에게 관제를 개정하게 하다 / 170

1401년 07월 08일 수군 도절제사 김영렬을 서북면 왜적을 막게 하다 / 181

1401년 07월 18일 등문고를 설치하다 / 186

1401년 08월 01일 등문고를 고쳐 신문고라 하였다 / 197

1401년 10월 10일 평주 온천에 있는 태상왕을 문안하다 / 222

1401년 11월 07일 권근의 건의에 따라 정몽주․김약항 등에게 증직하다 / 237

1401년 11월 16일 신문고가 설치되다 / 240

1401년 12월 05일 가묘․특사 등에 관한 이지의 건의를 의정부에 내리다 / 251

1401년 12월 20일 실농한 농민들의 역을 면제하고 진휼하다 / 264

1401년 12월 22일 경연관들에게 하례를 그만두게 하다 / 269


태종 2년(1402년)


1402년 01월 03일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서로 탄핵하다 / 274

1402년 01월 16일 전곡의 출납과 회계 ․이문 등의 법을 제정하다 / 284

1402년 02월 10일 생원시에서 민무회 등 1백 명을 뽑다 / 301

1402년 02월 12일 의정부에서 저화의 통용 방안에 대해 아뢰다 / 304

1402년 02월 26일 명황제의 칙서를 홍려시 행인 반문규가 가져오다 / 311

1402년 03월 09일 태상왕이 소요산 아래에 별전을 짓다 / 318

1402년 04월 06일 사평부의 건의에 따라 저화 사용 확대 방안을 세우다 / 343

1402년 04월 19일 김사형이 각사를 이끌고 원자 책봉의 하례를 받지 않다 / 352

1402년 04월 24일 원자의 학궁을 성균관의 동북쪽 모퉁이에 짓다 / 358

1402년 05월 01일 태상왕이 소요산으로 다시 행차하였다 / 361

1402년 05월 16일 임금의 탄신일이라 태형 이하의 죄를 용서하다 / 369

1402년 05월 26일 대마도의 수호 종정무에게 토산물을 내려 주었다 / 372

1402년 06월 05일 예조에서 의례 상정소와 의논하여 악조 10곡을 올리다 / 379

1402년 06월 11일 삼군 도총제 이하의 무관을 두어, 편제 등을 새로 정하다 / 390

1402년 06월 18일 원자의 입학 등에 관한 사간원 시무 조목이 채택되다 / 399

1402년 07월 02일 종묘 ․사직 ․명산 ․대천과 소격전에 비를 빌다 / 410

1402년 08월 01일 박돈지가 원군을 요청하는 명 황제의 조서를 베껴 보다 / 428

1402년 08월 08일 세 살 난 왕녀가 죽다. 날씨가 추워 농사를 걱정하다 / 434

1402년 09월 10일 우레하고 비가 오면서 우박이 내렸다 / 441

1402년 09월 18일 밤에 지진이 일어났다 / 446

1402년 09월 24일 저화와 상오승포를 함께 통용하도록 하다 / 451

1402년 10월 02일 중외로 하여금 건문의 연호를 쓰지 말게 하다 / 456

1402년 10월 15일 민무구 ․민무질 ․이숙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461

1402년 10월 22일 양영이 회암사에서 돌아왔다 / 466

1402년 11월 01일 태상왕이 동북면으로 향하였다 / 472

1402년 11월 10일 누른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 481

1402년 11월 19일 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 490

1402년 12월 03일 기온이 따뜻하기가 봄 날씨와 같았다 / 498

1402년 12월 26일 임금이 태상전에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었다 / 504


▪인물 찾아보기 /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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