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재건축사업으로 사람들이 모두 떠난 동네에서 일어난 일
우리가 버리고 떠난 집과 마당의 꽃나무와 개와 고양이와 새들의 이야기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린 우리 이웃, 그들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
책을 펼치면 비탈길을 따라 크고 작은 집이 올망졸망 늘어선 동네가 나옵니다. 옥상에서 빨래가 펄럭이고, 담장 너머로 꽃나무들이 배죽 고개를 내밉니다. 동네 어귀에는 자그마한 수퍼가 있고 오가는 이들이 다리쉼하며 이야기꽃을 피울 의자와 평상이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 나올 듯 정겹고 익숙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텅 빈 여백 속에 집 모양으로 배열된 빽빽한 글자들이 눈길을 끕니다. 그 아래 떡 하니 자리 잡은 건 “재건축 이주 안내”라는 현수막입니다.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했던 “손때 묻은 정든 집”이 어느새 “귀찮고 초라한 집”이 되었고, 낡은 집을 모두 부수고 새 아파트를 짓기로 했다는 사연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떠난 자리, 사람들이 끝이라고 여기는 순간에서 이 그림책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떠나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들
사람들은 많은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구석구석 추억을 담은 집과 손때 묻은 가구, 고장 난 가전제품, 들고 가기 거추장스러운 화분, 마당의 꽃나무, 심지어 키우던 개마저 버리고 훌훌 떠났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터전으로 살았던 건 사람들만은 아니었어요. 이곳에 뿌리 내리고 사는 풀과 나무,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과 길고양이들이 있었지요.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꽃은 피고, 나무는 푸르게 우거지고, 새들은 지저귀었습니다. 고양이들은 부서진 가구 더미를 뛰어넘으며 놀았고, 버림받은 개는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남은 생명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그 시간이 영원할 수는 없었지요. 철거가 시작되었으니까요. 집들이 차례차례 무너집니다. 풀이 꺾이고 나무가 찍혀 쓰러집니다. 이제 남은 이들은, 제 보금자리가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가 김한울이 두 번의 개인전에 담지 못한 이야기
우리는 종종 사람만이 생명이 있고 사람만이 권리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반려 동식물뿐만 아니라, 그 땅에 뿌리 내리고 가지 뻗으며 나이테를 쌓아온 나무들, 둥지 짓고 알 낳고 새끼를 길러온 새들, 길고양이들, 그 밖의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자본의 논리만을 앞세운 개발 사업은 사람에게도 폭력적이지만 동식물에게는 더욱 폭력적입니다. 삶의 터전을 빼앗고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니까요. 우리처럼 말하지 않고, 요구하지 못하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요.
이 그림책은 나고 자란 동네가 재개발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그 경험을 토대로 지속적인 회화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김한울이 쓰고 그렸습니다. 작가는 ‘자라나는 집’과 ‘일구어진 땅’이라는 두 번의 개인전으로 잃어버린 집과 공동체에 대한 상실감을 토로한데 이어, 이 그림책에서는 인간 중심의 개발 논리가 다른 생명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심스럽게 성찰합니다.
우리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책
버려진 간판 위에 웅크린 고양이, 을씨년스러운 폐가에서 환하게 피어난 자목련, 주인 냄새가 밴 옷에서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버림받은 개, 팔이 뜯어진 곰 인형, 죽은 새를 애도하듯 피어난 들꽃 무리, 무너진 담장을 타고 오르는 초록 덩굴…. 작가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 눈길 주지 않는 것들을 주목합니다. 동네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피는 작가의 시선은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잊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잃었는지, 우리가 다른 생명에게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 묻는 듯합니다.
작가는 위기에 내몰린 작은 생명들 앞에 고깔을 쓴 너구리를 보냅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이 너구리들은 집을 지키는 작은 신 같기도 하고, 버려진 이들을 위로하고픈 작가의 마음 같기도 합니다. 손때 묻은 낡은 물건과 줄기 꺾인 풀꽃을 소중하게 여기고, 잊힌 동물들을 알아봐 주는 너구리. 하지만 자신들이 살아온 터전을 떠날 수도, 계속 머무를 수도 없는 이들에게 너구리들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요.
마지막 남은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버려진 집이 생기를 되찾고, 깨진 창문 너머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망가진 선풍기가 꽃바람을 뿜으며, 모두가 행복한 얼굴로 함께 하는 꿈같은 밤입니다.
그러나 밤은 짧고 현실은 견고합니다. 이제 동네는 사라졌습니다. 마치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빈 흙더미뿐입니다. 그래도 봄이 오면 그 흙더미 위에 다시 노란 민들레가 피어날 거예요. 삶은 계속되니까요.
작가 소개
국민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크고 작은 그림을 그리고 흙으로 여러 가지를 빚습니다. 재개발, 재건축 사업으로 사라지는 집들을 눈여겨보면서 작품을 만들어 개인전 〈자라나는 집〉과 〈일구어진 땅〉을 열었고, 마음속에 담아 둔 생각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안녕, 우리들의 집》은 첫 그림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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