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고층 아파트 숲, 조각난 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아파트들이 빽빽하게 늘어섰다. 다닥다닥 들어선 똑같은 모양의 건물들, 똑같은 모양의 창문들 사이로 활짝 열린 작은 창 하나가 보인다. 창가에는 남자아이 하나가 앉아 있다. 늦도록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달은 이지러진 곳 없이 꽉 찬 보름달이다. 달빛은 휘영청 밝다.
환한 달빛에 이끌려 아이가 달을 올려다본다. 달은 유난히 크고 유난히 밝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보름달은 점점 커지고 아이를 덮칠 기세로 가까워지더니, 두둥! 느닷없이 보름달처럼 둥글고 커다란 얼굴이 아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이 앞에 등장한 것은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에 오색 빛깔의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 사자는 놀자는 듯 고개를 까닥거리며 아이를 부른다. 놀랄 틈도 없고 망설일 이유도 없다. 아이는 냉큼 사자 등 위로 뛰어내린다.
보름달처럼 둥근 얼굴의 사자가 우리를 부른다
아이는 사자와 함께 동네를 돌며 외친다. “얘들아, 모여라. 신나게 놀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성냥갑 같은 집, 레고블록으로 쌓아올린 것 같은 동네에도 뛰어놀고 싶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
아이들은 환한 보름달 달빛 아래에서 사자와 함께 신명나게 뛰어논다. 뛰고 구르고 뒹굴며, 웃고 떠들고 소리치며. 사자의 오색 갈기가 달빛에 반짝이며 휘날리고, 아이들의 즐거운 함성이, 힘차게 뛰는 맥박이, 가쁜 숨소리가 온 세상을 채우고 온 우주를 뒤흔들며 유유히 뻗어나간다.
아이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사자도 아이들도 모두 사라졌다. 달빛은 아파트 숲을 환하게 물들이고 보름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하늘에 걸려 시치미를 떼고 있다. 사자는 정말 찾아왔던 걸까? 그저 아이의 상상이었을까? 이 모든 것이 보름달의 마법인 걸까?
힘차고도 섬세한 펜화로 구현한 활기차고 몽환적인 달밤
깊은 밤처럼 어두운 틀 안에 힘차고도 섬세한 펜화가 놓여 있다. 검은 펜 선 아래 배어나오는 색들은 깊고도 아련하다. 검푸른 빛을 기조로 노랑과 녹색, 보라로 번지는 색조의 변화는 몽환적이면서도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작가 특유의 생생한 표정과 활기찬 동작은 생동감이 넘친다. 구도는 대담하고 역동적이나, 섬세한 펜 선을 겹겹이 쌓아올려 빚은 세계는 농밀하고 감성적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보름달과 사자로 채운 도입부는 강렬하고, 힘차게 뻗은 선과 연속 동작으로 그려낸 사자와 아이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아 움직인다. 사자와 아이들은 보름달 환한 달빛 아래에서 탈춤을 추듯 발을 구르고 머리를 흔들고 어깻짓을 하고, 원을 그리며 휘돌고 소용돌이처럼 뻗어나가며 달의 춤을 춘다.
지금 이곳의 아이들이 꾸는 꿈
이 책이 그려내는 세상은 흥겹고 아름다우나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본능이지만 그 본능이 억눌려 있는 현실을 작가가 뼈아프게 느끼고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견고한 사각 틀로 이루어진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발걸음 내딛을 때마다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아이들은 탑에 갇힌 라푼젤을 연상시킨다. 라푼젤을 가둔 건 마녀지만 아이를 가둔 것은 누구일까?
보름달과 함께 등장한 존재가 하필 북청사자놀음의 사자인 것도 흥미롭다. 북청사자놀음은 정월대보름 밤에 마을공동체가 합심하여 한바탕 신명나게 벌이던 대동놀이다. 이웃과 나누는 삶, 함께 사는 즐거움, 신명나는 놀이판을 되새겨본다. “아무개야, 놀자” 소리에 달려 나가 놀던 시절이 그립다. 보름달 뜨는 밤을 손꼽아 기다려 보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아파트 숲 사이 조각난 하늘에 떠오르는 밤, 보름달만큼이나 환하고 둥근 얼굴의 사자를 만나길 빌어 보자.
작가 소개
이혜리
그림책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다. 홍익대학교와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림책 《비가 오는 날에》와 《달려》를 쓰고 그렸으며 《우리 집에는 괴물이 우글우글》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누군지》 《우리 몸의 구멍》 《여름휴가》 《가시연잎이 말했네》 《누구게?》 들에 그림을 그렸다. 출간작 대부분이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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