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199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과비평》 평론으로 등단한 김경복 평론가의 평론집.
김경복 평론가는 총 4부로 나뉜 커다란 테마 속에서, 영혼과 한, 노년의 삶과 죽음, 의식의 점등과 동일성, 여성의 자의식과 치유에 맞춰 시인들의 시를 읽어 나간다. 시인과 작품을 동시에 일컬을 수 있는 시의 ‘태동’을 느끼며, 나아가 창조적 비평으로까지 도약한다. 이 책은 고영, 김선태, 최서림, 최두석, 김상미 시인 등 한국 시단의 든든한 나무들을 뿌리 깊게 호명하여 울창한 숲을 이루게 한다. 그 웅숭깊은 비평의 그늘 속에서 따뜻함을 불어넣는 평론가의 목소리는 새롭고 진귀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비평이 인간적인 위안으로 나아가는, 더불어 존재성을 희미하게 느끼게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고백이다. 작품과 감성이 만날 때의 ‘호응’을 넘치지 않게 잘 담아낸 이 비평들은, 한 시인의 세계로 입장하는데 커다란 디딤돌이 된다. 저자가 말하는 ‘창조적 비평’이란, 한마디로 주관적 비평이며 시인의 의식에 저자의 의식을 동조시킨 의식비평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미 유추에만 지나지 않고, 시라는 본질 속에 깃든 아름다움과 사람이라는 존재에 물음을 가지고 동시에 다가선다. 그 맥락이, 곧 ‘연민의 시학’이며 시를 품고 걸어 나가는 새로운 비평의 목소리다.
“독자 자신의 경험이나 지향과 맞물려 섞여들면서 시는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존재의 본질을 변화시킨다.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의 접면에 영혼의 생살이 닿게 되었을 때 생기는 어질머리가 바로 여러 날을 혼미하게, 그러면서 달콤하게 보내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고통과 쾌락의 초기 증상은 그 호르몬의 변화는 같고 그 중상이 비슷하므로 그것이 고통인지 쾌락인지 잘 모르게 된다고 하는데 바로 이 경우가 거기에 딱 들어맞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한 시가 내게 기쁨인지 고통인지 그 시작은 어질머리로 출발해 여러 날들을 숙고하는 동안 마음의 평정을 주는 기쁨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나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고통의 죽비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일상 속의 무미건조한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운 고통이다. 좋은 시는 나의 존재성을 뒤흔들어 각성케 하는 회초리 같은 것이다. (p16)”
최서림의 시는 궁극이 아니라 궁극에 가기 위해 애쓰는‘지금 여기’의 초라하지만 의연한 인간의 한 표상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진정 시가 가져야 할 위의(威儀)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그의 삶과 시작(詩作)은 앞으로도 여전히 꺽, 꺽 가시 걸린 목소리로 울고 있거나 지하 바라크 한 편에 떨고 있을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무상한 날들을 그렇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 애닯다. 차마 이 무료하여 끔찍한 날들의 슬픔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앉았다 일어났다 그리고 건너편 산을 쳐다봤다가 다시 책상에 주저앉아도 주위의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 되는가.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최서의 시가 마음 한 편에 불어준 따뜻한 울림 하나에 그나마 위안을 받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시와 시인의 운명에 대해 생각게 하고 존재의 운명에 대해 생각게 한 시인의 시에 경의를 표하며 건필을 빌어본다.(p.95)
“문학은 사람이란 존재의 일면성을 재고케 하여 삶과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김명희 시인의 시는 우리로 하여금 쉽게 시를 이해하게 하기 보다는 삶의 다층성과 심원성을 자신의 역정과 심리적 분투과정에 아로새김으로써 생 자체를 폭 넓고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생의 단면에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 너머의 세계에 시선을 두게 함으로써 생의 피상적 실제에 머물지 않고 본래적 의미가 어디에 있을지를 탐구케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김명희 시는 사색적이다. 흔히 말하는 여성적 시가 갖는 일상적 감수성의 표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역사적 존재의 실존적 의미를 성찰하고 여기에 존재론적 차원의 삶의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시적 깊이의 한 자락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길은 조금 험난해 보인다. 자신의 존재성을 좀 더 치열하게 바라보고 이를 토대로 동시대적 존재의 특성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김명희 시인의 시가 어떠한 경로를 그리며 어떤 무늬로 표출될지 관심을 갖고 살펴볼 필요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p.269)”
나는 아직도 비평가보다 시인으로 한 생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평을 쓸 때 아직까지 어떻게 쓰면 독창적이고 참신한, 감성과 상상력이 넘치는 글이 될까 고민하는 것을 보면 비평으로 시적 창작의 열망을 대신하려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비평은 작품에 대한 이성적 판단보다 심중에 일어나는 감성적 반응에 더 기대어 전개된다. 시인의 의식에 나의 의식을 동조시킨 의식비평. 한마디로 주관적 비평이다. 좋게 말하면 창조적 비평이다.
쓰는 나는 사실 재미가 있다. 그리고 시인들의 반응도 자신의 내면적 의식을 잘 포착해주었다고 감사와 동시 부끄러움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객관성이 조금 결여된 듯해 보여 비평으로서 위엄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괜히 나의 만족을 위해 그들의 시를 이용한 것 같아 미안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를 깊이 음미해 살아있는 풍경으로 그려내는 것은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글쓰기도 나이 들어가는 일 못지않게 방황이다. 문제는 어떤 치열함이 내게 없다는 점이다. 생활에 안주해 살아가는 배불뚝이 중년의 삶의 모습을 내게서 본다. 아, 언제부터 나는 이렇게 열정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을까? 문득 늙음과 죽음의 문제가 현실적 감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과 글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제 삶의 본질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글도 좀 더 성찰적으로 써야 하리라. 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꼽아보아야겠다. 글은 그래도 언제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다행의 발판이다.
-「서문」중에서
작가 소개
저 : 김경복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199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문학과비평》 평론 등단. 저서 『풍경의 시학』 『한국 아나키즘시와 생태학적 유토피아』 『서정의 귀환』 『생태시와 넋의 언어』 『시의 운명과 혼의 형식』 『한국 현대시의 구조와 의식지평』 『시와 비평의 촉기』 등이 있음. 현재 경남대 국어교육과 교수. 《신생》 편집주간.
목 차
서문
제1부 영혼의 고통과 한의 미학
처연의 미와 연민의 시학
-고영 시의 의미 15
우주를 공명케 하는 한의 울림
-김선태 시의 의미 39
탈각(脫殼)의 상상력
-김완하 시의 의미 61
피로 쓰는 영혼의 비망록
-최서림 시의 의미 73
제2부 노년의 삶과 죽음의 성찰
내부로의 유배와 경계 위의 눈뜸
-강영환 시의 의미 99
죽음을 이겨내는 시
-강희근 시의 의미 121
원융무애(圓融無)의 삶
-신진 시의 의미 133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는 촉각적 상상력
-오정환 시의 의미 153
제3부 의식의 점등과 동일성의 추구
생의 범속함에 대한 환멸과 일상의 승화
-성선경 시의 의미 171
천지를 품고 기르는 그늘의 마음
-이월춘 시의 의미 195
의식의 점등과 존재의 성화(聖化)
-조성래 시의 의미 217
역사의 바다로 나아가는 민중의 이야기
-최두석 시의 의미 239
제4부 여성의 자의식과 치유의 상상력
매운 결기로 피우는 생명의 꽃
-김명희 시의 의미 253
부정과 자학, 그 끔찍한 날들의 기록
-김상미 시의 의미 271
한 유미주의자의 고백
-박은형 시의 의미 285
불온한 진실
-손수진 시의 의미 297
상처의 치유와 물의 상상력
-진명주 시의 의미 321
코스프레의 삶을 박살내는 여전사의 칼
-허혜정 시의 의미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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