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시대, 유토피아를 복원하다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다. 자본주의와 맞선 체제는 이미 사라졌고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세계를 압도한다. 소비적 쾌락에 사로잡힌 현대인은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비웃는다. 게다가 기후변화, 경제적 불평등, 공동체 파괴, 폭력과 테러 등으로 인해 미래는커녕 현재조차 그 지속성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이 지적했듯이 유토피아의 포기는 역사 창조의 의지는 물론 역사 이해의 능력의 상실로 귀결된다. 인류 문명의 역사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유토피아의 꿈을 붙잡아야 한다. 현실 바깥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교란하는 유토피아 상상의 복구가 절실하다.
유토피아의 추구는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에 기초한다. 인간의 본성, 잠재력, 욕망에 관한 깊은 인간학적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러한 유토피아 담론에서 문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소외와 분열을 넘어 존재의 본향을 좇는 인간의 근원적 소망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 담론의 미래는 문학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에 담긴 유토피아 상상을 되짚어보기 위해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의 문학 전공 교수들이 힘을 모았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부터 박민규의 『핑퐁』까지 동서고금의 유토피아문학을 엄선해 유토피아 상상의 복원을 시도한다. 이 책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는 여섯 개의 주제(사유재산과 계급 불평등, 과학과 기술 문명, 무위와 자연, 감시와 자유, 몸과 욕망, 폭력과 공존) 아래 25편의 유토피아문학을 다룬다.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을 담았으며 소설의 줄거리와 작가도 친절하게 소개한다.
유토피아문학의 전형은 당대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 사회를 급진적으로 상상한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이명호)는 16세기 영국 사회를 풍자하면서 화폐와 사유재산이 철폐된 공산 사회를 제시한다.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강수진)과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오봉희)에서도 19세기 미국과 영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민주적 사회복지 국가와 실용 사회주의가 등장한다. 허버트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김상욱)는 다소 색다른 대안을 꿈꾼다. 전통적 유토피아의 집단적 공산 체제가 아니라 개인과 국가가 상생하는 공유 경제를 해결책으로 내놓는다.
유토피아는 과학기술의 발전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 자급자족의 풍요로운 공간인 잠수함 노틸러스 호(쥘 베른의 『해저 2만리』(오정숙)), 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유토피아 행성인 화성(A. 톨스토이의 『아엘리타』(김성일)), 과학기술로 이룬 안정된 공동체(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김상욱))가 이상 사회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 사회의 화려함과 완벽함 이면에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즉 디스토피아가 자리 잡고 있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정전은 조지 오웰의 『1984』(전소영)다. 경찰국가인 오세아니아에서 인간의 소외는 극에 달한다. 예브게니 자먀찐이 『우리들』(문준일)에서 묘사한 ‘단일제국’은 이성이 지배하는 집단주의적 통제 사회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안지영)에서 사회주의 유토피아론의 합리적 이기주의를 디스토피아로 규정한다. 최인훈의 『회색인』(김종수)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체화되지 못한 한국 근대사의 질곡이 다름 아닌 디스토피아다.
디스토피아 담론은 다양한 폭력성을 고발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욕망과 폭력의 광기(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권미선)), 사적 영역 내에서의 폭력과 폭력을 피할 수 없는 잔혹한 세계(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남상욱)), 이상향에 숨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적 속성(이청준의 『이어도』(이선이)), 타자를 말살하는 유럽 문명과 이를 모방한 후진국의 군부독재(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박정원)),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현대사회 시스템(박민규의 『핑퐁』(김종수))을 암울하게 그려낸다. 그런데 디스토피아는 보기와 달리 유토피아에 적대적이지 않다. 디스토피아적 외피 속에서 유토피아를 갈망한다. 추락의 끝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정치경제 제도의 완비를 통해 구현된다. 다시 말해 문명의 문제점을 문명의 새로운 제도로 해결한다. 하지만 문명을 벗어나 문명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유토피아문학도 있다. 바로 동아시아의 도교적 전통이다. 문명이 닿지 않은 목가적인 농촌 공동체(도연명의 『도화원기』(김경석)), 원시적인 인성의 순박함과 선량함(선총원의 『변성』(김경석)), 중국의 전통과 조우한 현대적 유토피아(거페이의 『복사꽃 피는 날들』(김순진)), 비판이 존재하지 않는 용궁(다자이 오사무의 『우라시마』(한경자)) 등이 도교적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한편 쿠바의 소설가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잃어버린 발자취』(황수현) 역시 서구 문명이 도착하기 전의 원형적 라틴아메리카에서 유토피아를 찾는다. 그런데 문명의 거부가 동아시아적 유토피아의 전부는 아니다. 대동 사회와 왕도 정치를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는 유교적 전통도 있다. 율도국이라는 이상국을 그린 허균의 『홍길동전』(이선이)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세상을 바꾸지 않고 인간을 바꿔 유토피아를 구현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이명호)은 성이 없는 사회로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고,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김영임)는 기쁨과 괴로움을 초월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인류의 새로운 종을 상상한다. 그리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나무』(박규현)를 통해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다르게 보기’를 제안한다.
이렇듯 유토피아문학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저마다 꾸는 꿈이 다르고 꿈을 전하는 방법도 다르고 서양과 동양이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이들 모두 ‘지금 여기 없는 좋은 곳’ 유토피아를 욕망한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세계문학 연구총서의 제1권이다. 이 총서는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소속의 문학 전공 교수들로 구성된 ‘세계문학 독회모임’에서 발간한다.
‘세계문학 독회모임’은 인간, 삶, 세계를 트랜스내셔널한 관점에서 성찰하는 기획물을 계속 출간할 계획이다.
“현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상은 ‘주어진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개방함으로써 현실을 ‘재사유’하고 ‘재배치’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유토피아 상상’이다. … 우리 시대 유토피아 충동과 욕망은 부서지고 깨어진 잔해 속에 묻혀 있다. 문화의 지층에 묻혀 있는 이 흔적들을 발굴하여 미래적 가능성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문화 비평가의 과제라 할 수 있다.” ― 서문 중에서
작가 소개
강수진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권미선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
김경석 경희대학교 중국어학과 교수
김상욱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김성일 청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순진 한신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김영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김종수 경희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남상욱 인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문준일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초빙 연구원
박규현 성균관대학교 프랑스어권연구소 책임 연구원
박정원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
안지영 경희대학교 러시아어학과 교수
오봉희 경남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오정숙 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이명호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이선이 경희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전소영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
한경자 경희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
황수현 경희대학교 스페인어학과 교수
목 차
이야기 하나: 사유재산과 계급 불평등
몫 없는 자들을 위한 공유 사회의 꿈: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 이명호
율도국을 허하노라: 허균의 『홍길동전』 ― 이선이
모두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에드워드 벨라미의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 ― 강수진
노동과 예술, 휴식이 어우러진 삶: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 오봉희
이야기 둘: 과학과 기술 문명
해체된 가족의 역설, 유토피아를 향하여: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김상욱
과학의 유토피아, 욕망의 디스토피아: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 오정숙
우주를 향해 쏘아 올린 유토피아의 꿈: A. 톨스토이의 『아엘리타』 ― 김성일
공정 무역과 유토피아: 허버트 웰스의 『모던 유토피아』 ― 김상욱
이야기 셋: 무위와 자연
일상 속에 감춰진 유토피아: 도연명의 『도화원기』 ― 김경석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 알레호 까르뻰띠에르의 『잃어버린 발자취』 ― 황수현
이룰 수 없는 꿈, 꾸지 않을 수 없는 꿈: 거페이의 『복사꽃 피는 날들』 ― 김순진
오지 마을에 구현된 유토피아: 선총원의 『변성』 ― 김경석
말 없는 세계, 비판 없는 세상: 다자이 오사무의 『우라시마』 ― 한경자
이야기 넷: 감시와 자유
응답하라, 과거의 기억이여: 조지 오웰의 『1984』 ― 전소영
궁전보다 닭장에서 비를 피하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 ― 안지영
환멸의 역사에서 정치적 유토피아로: 최인훈의 『회색인』 ― 김종수
우리들, 나의 상실, 그리고 지상에 구현된 낙원: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 ― 문준일
이야기 다섯: 몸과 욕망
전쟁 없는 사회, 성 없는 사회: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 이명호
가까이, 더 가까이에서 다르게 보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 ― 박규현
인류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 새겨진 유토피아: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 ― 김영임
이야기 여섯: 폭력과 공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혹은 폭력과 사랑: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 남상욱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삶의 모습: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 ― 권미선
이상향의 두 얼굴: 이청준의 『이어도』 ― 이선이
시간 이탈자들의 역사를 찾아서: 리카르도 피글리아의 『인공호흡』 ― 박정원
파국의 역설: 박민규의 『핑퐁』 ― 김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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