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시인은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해자는 그런 제가 처음 만난 시인이었습니다.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게 하나의 우주를 펼쳐보는 것 같’다는 김해자 시인은 이 책에서 갓난아기에게 밥알을 씹어 미음을 만들어 먹이는 어머니처럼 열일곱 분의 우주를 꼭꼭 읽어주었습니다. 한 술 한 술 받아 마시다 보니 가슴이 채워지고 마음이 부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험한 소리, 아픈 말 하지 않고 다 받아주는 바다 같은 성품은 이름에 ‘해’ 자가 들어갔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김해자 시인은 술 취해 들어간 새벽에도 딸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여놓는 어머니이자 땅을 일구다 지렁이가 나오면 얼른 흙을 덮어주는 인간입니다. 암요, 시가 머물 만한 시인이지요.
_‘추천사’ 중에서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것
김수영은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단순히 ‘새로운’ 시인을 발굴하는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는 ‘시인’ 말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인됨’을 읽어내는 역량을 말하기도 한다. 시인이 뛰어난 비평가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눈으로 ‘시인됨’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시의 눈, 벌레의 눈』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에 바쳐졌다.
김해자 시인은 이 책에서 많은 시인들을 불러내, 오늘날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책의 구성 양식으로는 16명의 시인과 1명의 가객으로 보이지만, ‘칠곡 할매들’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많은 복수의 시인을 발견한 셈이다. 김민기는 통념적으로 불리는 ‘시인’은 아니지만, 저자는 김민기에게서 ‘시인됨’을 찾아낸다.
책의 맨 처음에 백무산을 배치한 것에서부터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시인됨’의 모습을 눈치 챌 수 있다. 저자는 백무산의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길 밖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길들을 부정하는 것이었음을 발견한다. 유용성의 몫만큼 도려내고 그 나머지를 배제하는 죽은 사유요 뼈만 남은 언어라는 거다. 그것은 “죽은 관념의 덫에 걸려 사는” 시간이었다. 백무산은 과거의 길에 대한 부정으로 ‘살아 있는 길’을 찾는다. 길의 탐색은 자신의 몸과 기억,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성찰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길은 존엄하게 살다 존엄하게 죽어야 할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무기물조차 아우르는 길이다.(18)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룬 시인‘들’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김해자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그것은 물질의 세계이면서 또한 영혼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간의 문제이다. 백무산 시인에게서 ‘발견’한 것은 “살아 있는 시간”이고 황규관 시인에게서는 선형적인 구조가 깨진 “오고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몸을 통해서 오고, 몸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다.
벌레의 눈!
고인이 된 육봉수 시인과 송경동 시인에게는 끝나지 않은 노동 착취와 억압을 읽어내고 있다. 육봉수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저자는 과연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묻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존재하는 한 과연 노동자의 현실이 달라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상의 삶조차 누리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자기 몫을 받고 노동자들이 자기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가 어찌 지난 시대 관념일 수 있느냐고. 자기 시대 고통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을 건져 올리고, 소외된 자의 해방과 이해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과연 낡을 수 있느냐고. 이어 시간을 착취하는 것이 존재를 소멸시키는 일이라는 걸 육봉수 시인은 ‘교대근무’를 통해 처참하게 보여줍니다.(46)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착취하는 것도 바로 “시간”이다. 삶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으로 전환시킨 다음에야 착취가 가능한 것이니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외화된 삶의 시간을 착취하는 꼴이다.
저자가 송경동 시인의 시집 『꿀잠』에 대한 글 제목으로 ‘삶은 부활해야 한다’로 했을 때도 아마 이 삶의 시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된 사회, 계약직과 파견직 등으로 몸값 차이가 제도적으로 정당화된 작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존재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삶이 치욕이고 매 순간이 벼랑이다.” 시가 삶의 시간을 노래하는 것이 곧 ‘시의 눈’이고 세상을 하늘 위에서 조감하는 게 아니라 땅에서 바라볼 때 ‘벌레의 눈’이 된다. 저자는 ‘벌레의 눈’이라는 개념을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에게서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미 저자의 존재가 새가 아니라 벌레였을 것이다. 삶을 초월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대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 저자의 한결같은 주장인데 이럴 때만이 시는 벌레의 것이 된다.
‘칠곡 할매들’의 시를 말하면서 그 주장이 더더욱 확실하게 내면화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흙과 만물을 먹여 살리는 지상의 존재들과 가난한 농부들이 권력과 기업과 유전자조작과 생명복제의 실험실에 갇힌 과학자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상상해보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이웃들의 주름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182)
시 읽기와 상상하기
이러한 문명비판적 관점은 이시영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저자는 이시영 시인의 시에서 “자본의 위력과 개발 앞에서 다수의 평화는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본다. 시는 “사라져가는 사람 냄새와 얼굴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가난했어도, 못 배웠어도, 고생스러웠어도 함께 일하고 목욕하고 웃던 농촌 공동체가 살아 있던 세계”를 떠올린다. 물론 저자 근대 이전의 시간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폭력적인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 같은 주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농촌이 근대화되고(아니 파괴되고)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대주는 처지로 전락했을 때 정님이와 후꾸도 같은 사람들은 도시에 나가 루핑집을 짓거나 천막을 치고 살면서 날품팔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펜대와 도장을 쥔 머리들에게 살과 뼈와 근육과 손발을 대주었습니다”라는 문장은 그 증거이다.
시를 읽는 일은 저자에게 일종의 ‘해방’이라는 사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방’은 그러나 소극적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런 대목 때문이다. “그냥 그들이 있는 자리에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도 그들은 이미 평화이고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냥 그들이 있는 자리에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는 것은 많은 투쟁을 필요로 한다. 왜냐면 “서로의 목에 총칼을 겨누는 전쟁에 끌어들이거나,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거나 억울하게 끌고 가거나, 억지로 배제하지만 않“아야 하는 가능한 일이니까.
여기서 저자의 비판적 인식은 상당히 급진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급진적 정치의식을 시를 읽으면서 펼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어지러운 이론과 학문을 통해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폭력과 배제, 그리고 억압과 수탈로 뒤덮여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자신의 정치적 급진성을 위해 동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난해한 김정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남긴 아래와 같은 문장은 김해자 시인의 시 읽기가 그야말로 얼마나 시적인지 알려준다.
시와 음악은 시간을 공간화하고 풍경을 시간화하고, “생의 전면화인 무의식과 생각보다 더 많이 관계하는 의식”이 공조해 만들어가는 협주곡. 죽음과 삶사이, 진폭이 큰 상념과 사유 사이, 어딘가에 닿을지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는 시인의 노래를 ‘리퀴드(Liquid)시’라 부르겠다.(84)
작가 소개
저 : 김해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조립공, 시다, 미싱사, 학습지 배달, 학원 강사 등을 전전하며 노동자들과 시를 쓰다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 『무화과는 없다』『축제』『집에 가자』, 산문집 『민중열전』『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등이 있으며, 전태일문학상과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목 차
제1부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 - 15
육봉수 : 희망 없음을 희망 있음으로 - 41
황규관 : 어둠에 보내는 찬사 - 59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 - 81
송경동 : 삶은 부활해야 한다 - 109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 - 130
제2부
칠곡 할매들 : 시 안 쓰는 시인들 - 161
권선희 :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축제와 제의로서의 말 - 188
이명희 : 모호성과 단순성의 공존으로서의 사랑 - 214
이민숙 : 타인의 얼굴과 생명, 그 소소한 그물 - 239
이 섬 : 아줌마들의 시인공화국을 꿈꾸다 - 263
제3부
정희성 :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모두 시인 되기 - 289
이정록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목록들이 전부 시였다 - 317
이시영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보아 - 346
안상학 : 처음인 양 재생되는 오래된 사랑 - 371
도종환 : 다시 길 위에서 - 390
김민기 :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의 노래에 부쳐 -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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