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장서가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해체하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책의 세헤라자데’ ‘도서관의 돈 후안’ ‘우리 시대의 몽테뉴’라 불리는 알베르토 망겔이 70여 개의 상자에 3만 5천여 권의 책을 포장하며 느낀 소회와 단상을 담은 에세이다. 서재를 해체하고 책들을 상자에 집어넣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망겔은 자신에게 서재가 어떤 의미인지, 책을 서가에 꽂거나 창고에 처박아두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또 문학의 효용가치가 의심받는 이 시대에 문학이 갖는 힘은 무엇인지 사유한다.
망겔은 자신이 앞으로 살 나이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면서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이 책에는 책과 도서관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압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 통찰은 대략 언어와 이야기의 관계, 재현을 둘러싼 신과 인간의 관계, 꿈과 현실의 관계, 읽기와 쓰기의 관계, 그리고 책과 도서관의 관계 등 다섯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서재를 잃고 실의에 빠진 망겔의 슬픔을 어루만져준 다정한 문장들과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위로로 가득한 이 회고록은 동서고금의 책과 작가들을 매개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며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이자 2018년 구텐베르크 상 수상자이기도 한 알베르토 망겔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이지만 이스라엘, 영국, 캐나다, 스페인, 타히티,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활동해온 명실상부한 세계 시민이다. 그런 그가 15년 전 가을,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자신의 장서가 모두 들어갈 만큼 넓은 헛간이 딸린 집을 발견한 후 파트너와 함께 그곳에 정착한다. 그 조용한 프랑스 시골집 서재에서 그가 느낀 충만함은 그의 전작 『밤의 도서관』에 잘 묘사되어 있다.
2015년, 어느덧 67세가 된 망겔은 인생에서 더 이상의 변화를 원치 않았으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생 최대의 변화를 맞닥뜨리게 되니, 그건 다름 아닌 ‘서재의 해체’였다. 모종의 이유로(본문에서 ‘떠올리기 싫은 일’ ‘지저분한 관료제의 영역에 속한 일’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는데, 망겔은 프랑스 정부와 세금 문제로 소송 중이다) 프랑스를 떠나 맨해튼의 침실 한 칸짜리 아파트로 이사하게 된 망겔은 자신의 서재에 꽂혀 있던 대규모 장서들 중 가져갈 책, 몬트리올의 창고에 보관할 책, 버릴 책 등을 분류해 포장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8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연결된 망겔과 베냐민
우선 이 책의 원제 ‘Packing My Library’는 발터 베냐민의 에세이 ‘Unpacking My Library’(민음사판 『발테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수록된 이 에세이는 ‘나의 서재 공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에 대한 알베르토 망겔의 애정을 담은 오마주다. 마흔 살이 되기 직전의 베냐민은 아내와의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며 작은 아파트로 집을 옮긴 후 2천여 권의 책 짐을 풀면서 독자의 특혜와 책임에 관해 명상했는데, 그 명상의 결과물이 바로 ‘Unpacking My Library(나의 서재 공개)’이다.
망겔은 뜻밖의 송사에 휘말려 15년 넘게 산 시골집을 떠나면서 책 짐을 싸게 된 자신의 신세가 80여 년 전 베냐민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재산도, 지위도, 집도, 돈도 없다’고 한탄하던 베냐민이 책 짐을 푸는 일로 정신의 균형추를 맞췄듯이, 망겔 또한 책 포장 과정에 수반된 회상과 단상을 통해 자신의 상실감과 분노를 다독인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망겔은 이 책 곳곳에서 복수를 다짐하는 리어 왕,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돈키호테, 리드 숙모를 용서한 제인 에어 등 문학 작품 속 인물들에 감정 이입하며 서재를 잃은 분노를 표출하는데, 그 솔직하고 위트 넘치는 모습이 독자를 슬그머니 웃음 짓게 한다. 일례로 자신의 책들을 불태우고 감춘 사람들로부터 ‘마법사가 나타나 서재를 연기처럼 사라지게 했다’는 거짓말을 들은 후 2주 동안 집 안에 칩거한 돈키호테를 떠올리며 망겔은 “그 사기당한 노인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꼈노라”고 말한다.
책은 그걸 읽는 순간 속에 존재하고, 그 후에는 읽은 페이지에 대한 기억으로서 존재하며, 책이라는 구체적 형태는 얼마든지 처분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스승 보르헤스와 달리, 망겔은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책의 단단한 현존, 그 형체, 크기, 질감을 원하는 사람이다. 그는 전자책이 플라토닉한 관계의 특성만 갖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은 “믿으려면 먼저 만져봐야 한다”는 성경 속 도마 같은 사람이라고 자평한다. 이런 사람이기에 망겔에게 책을 상자에 넣어 창고에 처박아두는 일은 생매장처럼 느껴졌고, 서재의 해체 후 긴 애도의 기간을 견뎌야 했다.
서재를 해체하기로 결정한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나 카프카를 떠올린 망겔은, 마침내 모든 책을 포장한 후 텅 빈 서재의 한가운데 서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부재의 무게를 느끼며 1911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그림이 도난당했을 때 사람들이 그림을 걸었던 네 개의 못과 텅 빈 공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심정을 유추하기도 한다.
삶을 견디고 돌파하게 해주는 책의 힘
망겔은 서재를 잃고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를 치유해준 것 또한 책이었다. 서재를 뒤로하고 떠나던 날, 복수와 분노, 절망에 관한 온갖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방망이질하던 그날, 낯선 장기판 왕국에 떨어져 비참함을 느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백색 여왕이 한 말이 그를 위로해주었던 것이다. “네가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지 생각해보아라. 네가 오늘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보아라. 지금 몇 시인지 생각해보아라.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생각해보아라. 그리고 울지 마라.”
감옥에 갇힌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옷감에 “나의 끝은 나의 시작이다”고 자수로 새겨놓았듯이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 하나가 열리기 마련인지라, 프랑스를 떠나온 망겔은 결국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직을 제안받는 행운을 마주한다. 그리고 상자 속에 갇혀 밤의 감옥에서 꺼내주길 호소하는 자신의 책들에게 언젠가 새 집을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신곡』에서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연옥, 천국의 3계를 여행한다. 망겔이 이 책에서 단테가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베르길리우스는 될 수 있으리라. 우리를 책의 세계로 안내하는 믿음직한 길잡이로서 그는 베르길리우스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 망겔처럼 모든 문제의 해답이 책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 마치 거북이 등딱지가 그렇듯이 서재를 자신의 일부라 믿는 사람이라면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셰익스피어, 플라톤, 장자 등을 종횡무진 아우르는 망겔의 해박함과 통찰로 빼곡한 이 작은 책에서 그 어느 고전 못지않은 지적 즐거움과 충만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옮긴이의 상세하고 개성 있는 역주는 독자를 더 깊고 넓은 독서로 안내할 것이다.
작가 소개
저 : 알베르토 망겔
Alberto Manguel
2018년 구텐베르크 상 수상자이자 현재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작가이자 번역가, 편집자, 국제펜클럽 회원이며, 구겐하임 펠로십과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책의 수호자’ ‘우리 시대의 몽테뉴’ ‘도서관의 돈 후안’ 등으로 불리며 명실공히 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가이자 장서가로 평가받고 있다.
194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나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이스라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십 대 후반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만났고, 시력을 잃어가던 그에게 4년 동안 책을 읽어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68년 아르헨티나를 떠나 스페인, 영국, 타히티,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 등에 거주하며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1985년에 캐나다 국적을 얻었다.
소설과 비소설을 아우르는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여 그중 『독서의 역사』로 프랑스의 메디치 상을, 『낯선 나라에서 온 소식』으로 영국의 매키터릭 상을,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독일의 만하임 상을 수상했고 스페인에선 헤르만 산체스 루이페레스 재단 상, 이탈리아에선 그린차네 카부르 상을 받기도 했다. 그 밖의 저서로 『독서 일기』, 『밤의 도서관』, 『나의 그림 읽기』, 『책 읽는 사람들』,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은유가 된 독자』 등이 있다. 그의 책들은 30여 개의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역 : 이종인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한국 브리태니커 편집국장과 성균관대학교 전문번역가 양성과정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주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교양서를 번역했고 최근에는 E.M.포스터, 존 파울즈, 폴 오스터, 제임스 존스 등 현대 영미작가들의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전문 번역가로 활동한 이래 지금까지 140권의 책을 번역했으며, 500권을 목표로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번역을 잘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며 20만 매에 달하는 번역 원고를 주무르는 동안 글에 대한 안목이 희미하게 생겨났고 번역 글쓰기에 대한 나름의 체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유현한 문장의 숲을 방황하는 동안 흘낏 엿본 기화요초의 추억 덕분에 산문 30여 편을 모아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 앞으로도 우자일득(愚者一得: 어리석은 자도 많은 궁리를 하다 보면 한 가지 기특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의 넉자를 마음에 새기며 더 좋은 번역, 글을 써 볼 생각을 갖고 있다.
번역서로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폴 오스터의 뉴욕 통신』『오픈북』『나를 디자인하라』『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고전 읽기의 즐거움』『가르칠 수 있는 용기』『파더링: 아버지가 된다는 것』『백만장자 파트너십』『촘스키 이펙트』,『프로이트와 모세』,『에라스뮈스』,『촘스키, 知의 향연』, 『요한 하위징아』, 『가르칠 수 있는 용기』,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보이지 않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못 읽는 여자』, 『호모 루덴스』,중세의 가을』,『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퇴임 후로 본 미국 대통령의 역사』,『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들』,『흐르는 강물처럼』 등이 있고, 저서로는 『번역은 내 운명』(공저)와 『지하철 헌화가』가 있다.
목 차
* 서문: 영혼의 진료실을 떠나보내며
1장 책 싸기와 책 풀기
2장 서재의 해체
3장 다락방에 틀어박힌 작가
4장 위로와 안식의 장소
5장 상실과 창조
6장 부활의 의례
7장 문학에서의 꿈
8장 생애 최초로 사서가 되다
9장 도서관과 시민 공동체
10장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감사의 말
* 옮긴이의 말: 바벨의 도서관에서 책 제목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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