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그는 불쌍한 조선사회를 위하여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가지고 발버둥치는 여성이니 그가 고국에 돌아오는 날은 반드시 한 줄기 희망의 불이 비칠 것입니다.”(《조선일보》)
일제에 의해 나라가 강점되었던 시절, 이처럼 기대를 모으며 당시로는 이름도 생소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스웨덴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한 여성이 있었다. 최영숙, 그는 이땅의 여성 가운데 경제학을 전공한 첫번째 인물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그는 5개국어에 능통한 재원이 되어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배운 지식을 제대로 써먹을 수 없었다. 아무 곳에도 취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대문 밖에 조그마한 점포를 내고 배추, 감자, 미나리단, 콩나물을 팔았다. 최고의 인텔리를 이렇게 대우한 것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었다.
최영숙은 여성들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무엇보다 노동여성의 삶을 바꾸는 데 일생을 바칠 결심이었다. 파산한 집안의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했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자소비조합을 인수해 채소 장사에 나선 이유다. 가난에 시달리며 과중한 업무를 떠맡았던 최영숙은 돌연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쓰러져 귀국한 지 6개월 만에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최영숙에게 세상은 잔인했다. 죽음과 함께 드러난 임신을 두고 스캔들을 부풀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을 위해 몸 바치려 했던 최영숙의 삶은 이국 남성과의 통속적인 연애사 울타리에 갇히고 만다. 최영숙은 윤색되고 희화화된 울타리 속에 한 세기 가까이 갇혀 있었던 셈이다. 그의 삶 속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를 상징하는 식민지 조선의 시대정신과 어그러진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한 시대 역사의 격랑 속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산 한 선각자를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이다.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남긴 기록이다. 이 책에는 최영숙이 쓴 모든 글을 한데 모았다. 기사 속에 들어 있는 글이라 할지라도 최영숙의 육성이 담긴 것이라면 추려내었다. 최영숙의 삶과 죽음을 다룬 주요 잡지 기사도 모두 모았다. 비록 흥미 본위의 글이라 할지라도 최영숙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최영숙의 글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도 기행문이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사로지니 나이두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인도를 찾았다. 그에게 인도는 조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출구였다. 귀국길에 인도뿐 아니라 유럽 각지를 두루 둘러 본 것도 학문 연구를 넘어 ‘실지적 생의 싸움을 실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 유학을 떠나고 여성운동의 세계적 지도자 엘렌 케이를 찾아 다시 스웨덴 유학길에 올랐던, 자신의 학문과 지식이 나라와 겨레에 소용되기를 간구하며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다 간 한 선각자의 초상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발굴하고 새로 쓰기 위한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시리즈의 하나다. 그동안 출간된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시리즈는 영화감독 나운규의 영화론을 묶은 《조선영화의 길》과 작가 나혜석의 페미니스트 산문집 《나는 페미니스트인가》가 있다.
그리운 옛날 학창시대
스웨덴 대학생 생활
4개 성상의 남경 유학
이화학당 고등과를 졸업하고 정든 고국을 떠나던 때도 그리 가깝지 않은 7년 전 옛날이었습니다. 나는 남달리 일본 유학을 싫어하였으며 까닭도 없이 중국 유학을 즐겨 함에 따라 그 땅을 몹시 동경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남경南京 땅을 밟았을 때에도 그다지 외국이라는 낯선 느낌을 갖지 않았으며,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곧 재미를 붙이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가옥 제도라든가 풍속 등이 우리 조선과 흡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요일 같은 때에 교회당에 가서 여러 동포들을 만나고, 목사 집에 가서 조선 김치를 얻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남경 유학 시절의 재미 있던 기억의 한 토막입니다.
세월은 빨리 흘러서 어느덧 4개 성상星霜이라는 긴 시일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내가 배우던 학교南京 ?文學校를 떠나는 동시에 애착을 가졌던 남경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동경하던 스웨덴의 풍경
남경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고국엔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토故土를 밟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나는 남보다 여유 있는 가정에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조선을 떠나던 날부터 물질의 고통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4년을 지내던 때에도 순전히 내 손으로 학비를 벌었지만, 더 알아야겠다는 향학열은 물질의 고통에 거리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다른 어느 곳보다 가장 동경하던 스웨덴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땅을 밟았을 때는 북극의 추위도 풀리기 시작하는 따듯한 봄날이었습니다. 눈에 싸였던 스웨덴의 풍물은 조용히 내려 쪼이는 햇빛을 맞이하고, 호수마다 꽁꽁 얼어붙었던 얼음이 슬금슬금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활기가 넘치는 스웨덴 사람들은 한층 더 활기를 뿜으면서 긴 다리로 거리를 활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동경하던 스웨덴 땅의 산수山水조차 찬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찬미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 찬미하게 되지를 않았습니다.
처음 스웨덴 땅을 밟던 때의 나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한 느낌 때문에 어쩔 줄 몰랐습니다. 스웨덴의 풍경은 어릴 때 지리를 배우면서 상상하던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언어와 풍속이 전혀 다르고 아는 사람조차 없으니 어찌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으리까? 그래서 한 달 동안은 밤이나 낮이나 울기만 했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울기만 해서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을 겨우 깨닫게 되자, 시골 중학교 비슷한 학교에 가서 어학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몇 개월간 어학을 배운 다음 가을 학기에 스톡홀름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별로 재미있는 줄도 몰랐으나 차츰 배워가는 중에 무한한 재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남녀 공학이었는데 동무들은 몹시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내가 조선 사람인 줄을 몰랐답니다. 아예 조선이라는 땅의 존재도 몰랐습니다. 내가 조선 사람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기고, 자기들과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는 동안에 그들도 조선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차츰 그들과 한층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서툴던 이국 생활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으며, 살풍경으로만 생각되던 스웨덴의 풍경도 옛날 머릿속에 상상하던 풍경보다 더욱 미려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독점한 그 땅에서 주어진 시간 동안 학업에 힘쓰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앞에서도 말하였거니와 나는 그 땅에서도 고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심한 고통은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무들과 똑같이 여름이면 수영으로, 겨울이면 스키로,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만큼 재미스럽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때 일이 지금 와서는 끝없이 그리워집니다. 물론 한 달에 백 원이라는 학비를 벌려니 고통 되는 때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괴롭던 일은 죄다 잊히고 재미스럽던 일만 회상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스웨덴은 눈雪의 나라입니다. 스웨덴의 설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경치라고 생각합니다. 눈이 몹시 쌓인 그 위를 동무와 손잡고 스키 타러 다니던 일도, 호숫가에 우거진 꽃이며 푸른 잔디가 쭉 깔린 넓은 들을 가로질러 물 맑은 호수를 찾아다니던 일도, 모두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옛날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끝없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시간은 가는 줄도 모르게 흘러서 재미있던 학창 시절을 떠난 지도 벌써 만 일 년이 넘었습니다. 남경에서 지낸 4년간의 학창시대의 일은 벌써 희미한 옛일로 돌려보낼 뿐이지만, 스웨덴에서의 4개 성상의 즐겁던 생활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습니다. 졸업하고 교문을 나서던 날의 일이며 동무들과 서로 떨어지기 애처로워하던 일이 지금까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할 뿐입니다.
책을 펴내며
최영숙은 역사 속에 묻힌 사람 가운데 하나다. 27살의 짧은 생으로 요절하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를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려 한다. 비록 짧았으나 그의 삶 속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를 상징하는 식민지 조선의 시대정신과 어그러진 민낯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불쌍한 조선사회를 위하여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가지고 발버둥치는 여성이니 그가 고국에 돌아오는 날은 반드시 한 줄기 희망의 불이 비칠 것입니다.”(《조선일보》 1928.4.10)
놀라운 표현이다. 이 글만 보고 그 대상이 23살의 어린 여성임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보다 한 해 앞서 《동아일보》는 하얼빈 특파원의 보도로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 최영숙의 여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1931년 말 최영숙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유력 신문과 잡지가 앞다투어 최영숙의 귀국을 알렸다. 《매일신보》는 최영숙이 배를 타고 인천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인천발 전화’로 송고해 기사화하였다. 마치 최영숙의 유학을 여러 언론이 중계방송하는 듯하다.
나어린 여성에게 사회가 이토록 큰 관심을 쏟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 식민지 현실이 몹시 암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최영숙이 특별한 존재여서일 것이다. 최영숙은 중국 유학을 마치고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당시까지 외국에 나가 경제학을 공부한 여성은 없었다. 그만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22년 최영숙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데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다. 3·1만세운동 직후 급격히 떠오른 유학 대상지는 중국이었다. 이화학당을 다닌 최영숙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중국어는 물론 영어, 독일어까지 익혀야 하는 힘든 유학 생활 중에도 최영숙은 독립운동의 꿈을 키우며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한다.
자신의 인생행로를 결정하는 사표師表가 된 엘렌 케이를 책으로 만난 것은 이때였다. 엘렌 케이는 20세기 초 동아시아 여성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였다. 엘렌 케이를 매개로 최영숙은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든다. 엘렌 케이의 사상에 심취한 최영숙은 1926년 다시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다. 엘렌 케이를 만나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엘렌 케이는 최영숙이 스웨덴을 향해 떠나기 몇 달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최영숙의 목표는 분명했다. 장차 고국에 돌아가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을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그 중심은 다시 노동여성으로 좁혀진다. 목표가 분명했기에 이국적인 모습에 반한 스웨덴 청년들의 구애를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나 S군아, 네 사랑 아무리 뜨겁다 한데도 이 몸은 당당한 대한의 여자라. 몸 바쳐 나라에 사용될 몸이라, 네 사랑 받기에 허락지 않는다.”
학업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최영숙은 기대에 부응하듯 일견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다. 1932년 1,2월에만 기사화된 기행문, 논설, 대담이 10여 회가 넘는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고민이 있었다. 부친의 사업이 파산하는 바람에 당장 취직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것이다.
최영숙은 5개 국어에 능통한데다 경제학을 공부한 당시로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원이었다. 국제적인 감각과 해외 인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영숙에게 선뜻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은 없었다. 아무리 경제대공황의 시대였다지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최영숙은 여성들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자신의 코가 석 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낙원동 여자소비조합을 인수한 이유다. 소비조합을 인계 받은 최영숙은 서대문 밖에 작은 점포를 내고 배추, 감자, 미나리, 콩나물 등속을 팔아야 했다. 또한 이화학당 은사 김활란의 청을 받고 공민독본을 편찬하는 일에도 온 힘을 기울였다.
최영숙은 무시로 밥을 굶다시피 했다. 영양실조와 과중한 업무, 그리고 스트레스는 그의 몸을 갉아먹었다. 한번 쓰러진 비운의 천재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불귀의 몸이 되었다.
뜻을 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최영숙에게 세상은 잔인했다. 죽음과 함께 드러난 임신을 두고 스캔들을 부풀리기에 혈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을 위해 몸 바치려 했던 최영숙의 삶은 이국 남성과의 통속적인 연애사 울타리에 갇히고 만다.
최영숙은 윤색되고 희화화된 그 울타리 속에 한 세기 가까이 갇혀 있었던 셈이다. 최영숙이 활동한 시기는 너무도 짧았고, 스캔들은 그의 사후에 터졌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다.
이 책은 한 시대 역사의 격랑 속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산 한 선각자를 재조명하기 위한 기획이다. 그의 생각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가 남긴 기록이다. 이 책에는 최영숙이 쓴 모든 글을 한데 모았다. 기사 속에 들어 있는 글이라 할지라도 최영숙의 육성이 담긴 것이라면 추려내었다. 최영숙의 삶과 죽음을 다룬 주요 잡지 기사도 모두 모았다. 비록 흥미 본위의 글이라 할지라도 최영숙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다.
최영숙의 글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인도 기행문이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와 사로지니 나이두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인도를 찾았다. 그에게 인도는 조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출구였다. 귀국길에 인도뿐 아니라 유럽 각지를 두루 둘러 본 것도 학문 연구를 넘어 ‘실지적 생의 싸움을 실험’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희망의 문이었지만, 다른 한편 비극의 씨앗이기도 했다.
이 책이 짧은 생애를 치열하게 살다 간 한 선각자의 삶을 복원하고 그의 삶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018년 9월
작가 소개
지은이 : 최영숙
5개 국어에 능통하고 우리나라 여성 가운데 최초로 경제학을 공부한 재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시 3·1운동을 겪으며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중국에 유학해 도산 안창호 등의 가르침을 받던 중 인생행로의 사표가 된 엘렌 케이의 사상에 심취해 다시 스웨덴 유학길에 오른다. 1931년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경제학사)을 졸업하였다. 귀국길에 세계정세를 살피고 식민지 조선 문제의 해법을 찾을 수 있는 출구라고 생각한 인도를 방문해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 사로지니 나이두와 교분을 쌓는다.
최영숙은 여성들이 차별 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을 펼치려던 그의 관심의 중심은 노동여성이었다. 언론에 활발히 글을 발표하고 여자소비조합 운영, 공민독본 편찬 등에 애쓰던 중 귀국 6개월 만에 27살의 짧은 생으로 요절함으로써 역사 속에 묻히고 만다.
목 차
1부 인도 유람
그리운 옛날 학창시대-스웨덴 대학생 생활
인도 유람
간디와 나이두 회견기
2부 여성들이 자유로운 세상을
김산 형, 아뢰옵니다
여성들이 자유로운 세상을
귀국 소감과 포부
역경에 처한 조선 여성을 위해 일할 결심으로
대중의 단결
스웨덴 가정의 감복할 시간경제
영구성과 단결 위해 경제생활의 토대를 구비하자
어떠한 경제학이 정당한가
금강산이 보고 싶다
외국 여성의 삶과 여성 문제
3부 어여쁜 처녀여!
최영숙 일기
4부 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哀史
스웨덴에서 사회학을 배우려고 하얼빈 시를 통과한 최영숙 양
구십춘광九十春光을 등지고
청춘에 요절한 최영숙 애사哀史
경제학사 최영숙 여사와 인도 청년과의 연애 관계의 진상
인도 청년과 가약 맺은 채 세상 떠난 슬픈 사랑
애도哀悼 최영숙 씨
최영숙 지하 방문기, 명부행 열차를 추격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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