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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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데니스 C. 라스무센
출판사항에코리브르, 발행일:2018/10/25
형태사항p.424p. 국판:22CM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88962631876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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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두 거장,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
 근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철학적 우정!

이 책은 조금 특별하다. 위대한 두 사상가의 ‘우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불화와 싸움보다 우정을 재현하기는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갈등은 극적인 드라마에 도움이 되지만 동지애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철학적 갈등에 관한 책은 많지만 철학적 우정을 다룬 책은 훨씬 적다. 흄의 전기들도 스미스와의 오랜 우정보다 루소와의 잠깐의 충돌에 더 주목한다.
이 책은 영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흄과, 존경받는 도덕철학 교수이자 자본주의 창시자로서 추앙받는 애덤 스미스의 오랜 우정을 탐구한다. 1749년 그들의 첫 만남부터 1776년 흄이 사망할 때까지 둘의 우정의 추이를 따라가면서 개인적 상호 작용은 물론 각자가 상대방의 세계관에 끼친 영향을 검토한다. 그들이 서로의 저술에 어떤 논평을 하고 상대방의 일과 문학적 야심을 어떻게 응원했으며, 개인적 문제에서는 서로 어떤 조언을 주고받았는지 풀어낸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지식인 사회의 일원으로서 흄과 스미스는 같은 친구(그리고 적)를 사귀고 같은 사교 단체에 가입했으며, 철학과 경제학 외에도 수없이 많은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책은 스미스의 내밀한 종교관이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흄의 공개적인 종교관에 상당히 근접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아울러 흄이 많이들 알고 있는 것보다 경제학에 더 크게 기여했다(그리고 스미스는 철학에 더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두 사상가와 관련한 참고 자료

 흄과 스미스는 살아생전에 명성과 상대적인 부를 얻었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글과 사생활이 공개되는 것을 꺼렸다. 흄은 자신의 서신이 “쓸데없는 사람들의 손에 흘러 들어가 출판되는 영예를 얻을까봐” 걱정했고, 스미스는 “제가 막을 수 있는 한 제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하는 일을 절대 당하지 않지만, 애석하게도 제가 항상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더군요”라고 썼다. 그들은 사생활뿐 아니라 사후의 평판도 걱정했다. 죽음이 가까워오자 두 사람은 엄선된 소수의 문서를 제외하고는 전부 불태우라고 유언했다. 흄의 경우와 달리 스미스의 경우는 이 유언이 집행되었다.
그들의 위상과 영향을 놓고 봤을 때, 지금까지 흄과 스미스의 개인적·지적 우정에 관한 책이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은 놀랍다. 한 가지 그럴 법한 이유는 그들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만큼 제대로 문서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편지들이 길이와 양의 부족을 재치와 매력으로 보완해주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흄은 편지를 그다지 많이 쓴 사람이 아니었고, 스미스는 더했다. 흄은 종이에 펜을 가져가기 싫어하는 스미스의 습관을 “나도 당신처럼 어쩌다 쓰거나 짧게 쓸 수 있답니다……” “나도 당신만큼 편지 쓰기를 게을리하고 있네요……”로 시작하는 편지에서 이따금 책망했다.
다행히 스미스는 다른 이들보다는 흄과의 서신 교환에 더 신경을 썼고, 그들의 우정 말기에는 특히 그랬다. 흄이 죽기까지 스미스가 썼거나 받았다고 알려진 편지는 전부 합쳐 170통이다. 그중 스미스가 흄에게 쓴 편지 15통과 흄이 스미스에게 쓴 41통, 즉 저자가 갖고 있는 이 56통의 편지는 그들의 생각과 주장, 그들이 출판한 저작물의 행운과 불운, 시사 문제와 신간 도서, 그리고 가족, 친구, 적, 건강, 취업 전망, 여행 및 장래 계획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주제를 망라한다.
또한 명시적·암시적으로 흄을 언급한 스미스의 모든 저술과 《도덕감정론》에 대한 흄의 익명 리뷰를 검토한다. 게다가 평생에 걸친 명성 덕분에 많은 동시대인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두걸드 스튜어트의 스미스 전기, 제임스 보스웰의 무수한 글, 온건파 목사 알렉산더 칼라일의 자서전과 극작가 존 홈의 일기, 많은 지인들의 사적인 서신, 정기 간행물과 서평 그리고 일간지 부고란, 헨리 매켄지와 오크터타이어의 존 램지가 수집한 일화들이 여기에 속한다.
저자는 그들과 동시대에, 그리고 가까운 시대에 속한 수많은 자료에서 그들의 우정에 관한 논평과 회고담을 찾고, 흄과 스미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최대한 제공하기 위해 입수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동원한다.

흄과 스미스의 우정이 생겨난 배경

 흄과 스미스가 태어난 18세기 초의 스코틀랜드는 무수한 세월 동안 가난과 질병, 무지와 미신, 끊임없는 종교 갈등과 잦은 군사 점령에 시달렸다. 하지만 흄과 스미스의 생애 동안에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과의 활기찬 새 시대가 도래했다.
18세기 벽두까지만 해도 유럽 변방의 가난하고 낙후했던 나라가 어떻게 같은 세기 중반 무렵 그런 지식 강국이 되었을까? 여기에는 스코틀랜드를 세계 최고의 교양 국가 중 하나로 만든 교구 소속 학교들의 혁신적 시스템, 유럽의 최우수 교육 기관으로 성장한 글래스고·에든버러·애버딘·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수많은 사교 단체와 토론 모임의 등장, 출판업의 호황, 그리고 마침내 커크(스코틀랜드 국교회)를 이끌게 된 진보적인 온건파 목사들을 포함한 많은 요인이 연관되어 있다. 대영제국을 탄생시킨 1707년의 연합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연합은 비록 오래 걸리긴 했으나 약속한 경제 호황과 함께 개인의 자유와 기회의 증대를 가져왔다. 흄과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적인 모든 것에 대한 잉글랜드인의 지속적 편견에 분개했음에도 쌍수를 들어 연합을 받아들였다.
흄과 스미스의 우정은 대체로 영국의 정치적 안정기 동안에 이뤄졌다. 사실 이 기간은 이전과 이후에 찾아온 격동의 시대 사이에 낀 시기였다. 그들이 처음 만난 1749년은 굵직한 재커바이트 반란이 마지막으로 일어난 후 몇 년이 지난 때였고, 흄이 사망한 1776년은 아메리카 식민지와의 갈등이 막 고조되기 시작한 때였다.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 역시 연관이 있다. 명예혁명이 가져온 결과 중 하나는 잉글랜드가 영국 국교회를 유지하는 사이 1690년 스코틀랜드 장로교인 커크가 스코틀랜드 국교회로 복원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커크의 성격과 관행은 18세기 내내 지속적이고 때로 격렬한 갈등의 근원이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온건파로 알려진 일단의 진보적 성직자들이 단결해 커크를 근대적이고 예의 바르며 계몽된 세계로 끌어내려 애썼다. 그들은 교리보다 실천을 강조하는 좀더 부드러운 유형의 칼뱅주의를 설파하고, 관용과 인문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온건파의 의제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내 상대 파벌인 회중교회파의 반대에 사사건건 부딪혔다. 이 반대 집단은 엄격한 정통주의의 유지를 대단히 중시했고, 존 녹스 및 종교 개혁 시대 이래로 스코틀랜드 교회를 특징지었던 한층 철저한 교리와 실천을 견지 또는 회복하려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흄과 스미스는 삶 및 글쓰기와 관련해 다소 다른 접근법을 택했다.

다른 듯 같은 두 사상가

 두 사람 중 흄은 열두 살 더 많았고, 출발이 빨라 스미스가 책을 내기 시작하기도 전에 거의 모든 저술을 집필했다. 그 결과 스미스의 생각이 흄의 사상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그 역보다 훨씬 많다. 물론 스미스는 다른 많은 사상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스미스 학자들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에 흄의 영향이 스며 있음을 인정한다. 니컬러스 필립슨은 스미스를 가리켜 “열렬한 흄주의자”, 심지어 “완벽한 흄주의자”라 칭한다. 저명한 스미스 학자 새뮤얼 플라이섀커는 “스미스가 흄에게 진 부채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의 많은 주요 이론의 근원을 놓치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가 흄의 이론을 수정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스미스의 가장 변별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를 놓치는 것이다”고 말한다.
흄과 스미스 사이의 지적 친화성이 이렇게 넓고 깊다는 생각은 흔히 이 두 인물에게 따라다니는 일련의 설명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흄이 형이상학 및 인식론의 추상적 질문에 주로 관심을 가진 철학자였던 반면 스미스는 좀더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 실리적인 경제학자였고, 흄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토리당 지지자였던 반면 스미스는 진보적인 휘그당 지지자였다. 아울러 종교와 관련해 흄은 회의주의자, 아니 어쩌면 무신론자이기까지 했던 반면 스미스는 확고한 기독교 신자였다.

차이점으로 추정되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는 다루기 쉽다. 흄이 형이상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질문을 탐구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한 건 사실이고, 그의 전집 중에서 여전히 철학자들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하지만 흄은 데뷔작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본문에서조차 상당히 추상적인 이런 쟁점을 심리학 및 도덕과 관련한 좀더 현실적인 논의로 전환시켰다. 더욱이 이후에는 종교에 관한 몇몇 저술과 기념비적인 《영국사》뿐 아니라 정치에서 일부다처제에 이르기까지, 경제에서 웅변술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범주의 주제에 관한 논고를 계속 썼다.
마찬가지로 스미스는 흔히 자본주의 ‘창시자’로 일컬어지지만, 경제학자를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다. 오히려 정치경제학을 많은 지적 관심사 중 하나에 포함시킨 도덕철학 교수였고, 상업 사회와 관련한 많은 잠재적 위험 요인과 문제점을 인식했다. 스미스는 윤리학과 법학과 수사학을 강의했으며, 그 밖의 많은 주제 중에서도 특히 언어의 발달과 천문학의 역사에 관한 논고를 썼다. 흄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1권과 스미스의 《국부론》에 나오는 유명한 몇몇 구절에서 벗어나면 흄과 스미스의 관심사가 많이 겹쳤음이 명백하다.
스미스는 인간의 도덕 이론을 감정에 기초해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흄의 뒤를 이었지만, 스미스식 도덕감정론은 흄의 이론을 여러 면에서 상당히 개선했다. 반대로, 흄은 《국부론》이 등장하기 50∼60년 전에 자유 무역 옹호론을 펼치고 상업의 도덕적·사회적·정치적 혜택을 강조했다. 《국부론》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흄의 통찰을 기반으로 했는지 살펴보면 가히 놀랍다.

두 사람 사이의 두 번째 이분법이라고 알려진 것에도 어폐가 있다. 흄의 정치사상이 보수적 색채를 띠고 스미스는 의심할 나위 없이 자유주의 전통의 핵심 일원이지만, 그 역 또한 사실이다. 흄 역시 넓은 의미로 봤을 때 자유주의자이며, 스미스의 자유주의 역시 뚜렷한 보수적 경향을 띤다. 이 두 사상가는 모두 자유주의 전통과 연관된 핵심적 이상을 수용했고 법의 지배, 작은 정부, 종교적 관용, 표현의 자유, 사유 재산, 상업의 장점을 강조했다.
‘토리’와 ‘휘그’ 같은 용어에 관해서는 흄이건 스미스건 정확하게 한 당의 신봉자라고 할 수 없다. 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학자는 그 둘에게 “회의주의적 휘그”라는 딱지를 붙였다. 즉 그들은 명예혁명의 결과 탄생한 헌법을 지지하고 그것이 개인에게 자유와 안보를 제공하는 합리적 과업을 이뤘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휘그이지만, 휘그주의에 종종 따라붙는 이념적 부담에는 드러내놓고 거리를 뒀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자유주의 전통의 핵심 이상을 수용했지만 절제, 신중함, 유연성 그리고 이러한 이상을 적용할 때의 맥락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점 등의 중요성을 강조했음을 감안하면 “실용주의적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인다.

이 두 사상가의 흔한 이미지가 함축하고 있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차이(이 책의 중요한 부분)는 종교적 시각과 관련한 것이다. 종교는 흄이 몰두한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종교 옹호론의 신뢰성, 종교의 심리학적 기원과 결과, 종교의 역사, 종교가 도덕과 정치에 미친 영향 등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어떤 식으로든 이 주제를 건드렸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논란이 있지만, 그의 견해를 이루는 윤곽은 비교적 명확하다. 흄은 신앙인도 아니고 철저한 무신론자도 아닌, 회의론자라고 일컫는 부류다. 그는 전능한 존재를 결코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존재를 대표하는 주요한 주장은 그다지 그럴싸하게 여기지 않았고, 종교가 끼치는 영향은 대부분 유해하다고 생각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스미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이 드러나는 것을 회피하고 독실한 신도들과의 대립을 멀리하려 애썼다. 또한 이 주제에 관해 흄보다 훨씬 적은 글을 썼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글에서도 다양한 방향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전능한 존재에 대한 믿음에는 현실적으로 중요한 이득이 있으며, 무엇보다 위안을 주고 도덕의 버팀목이 된다고 흄보다 훨씬 더 여러 번 기술한다. 반면 도덕이나 정치, 경제에 관한 스미스의 핵심 주장은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종교적 전제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의 도덕 이론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흄의 목표처럼 도덕이 신의 말씀이나 의지가 아니라 인간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종교란 선의 전제 조건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스미스의 《국부론》은 표현과 가치관에서 놀랄 만큼 세속적이며, 사후 출간된 몇몇 논고의 성격은 지극히 회의주의적이다.
스미스가 흄보다 훨씬 말을 아낀 이유는 무엇일까. 스미스가 단순히 기질적으로 신중한 성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자신의 명성과 경력상·직업상의 성공에 훨씬 관심이 많았든지, 혹은 종교를 덜 중요하고 덜 위험한 현상으로 봤을 수도 있다. 아니면 대놓고 맞서기보다는 조용히 무시함으로써 종교의 위험을 더 제대로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난히 가까웠던, 신앙심 돈독한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흄이 겪은, 교인들과의 언짢은 만남에서 교훈을 얻은 것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분석한 저자는 그를 (흄 같은 노골적 회의주의자와 대조적으로) 회의적 이신론자라고 일컫는다.

첫 만남, 외모와 성품

 흄과 스미스가 서로에게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 흄은 38세의 나이로 이미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를 비롯한 몇 권의 논집과 《첫 번째 탐구》를 통해 상당히 뛰어난 사상가이자 작가로 명성을 얻은 뒤였다. 키가 크고 살집이 많은 그는 외모적으로 꽤 눈에 띄는 존재였다. 스미스를 만나기 직전 토리노에 있던 흄과 마주친 한 관찰자는 “그는 얼굴이 넓고 통통하며 입이 크고 …… 전신의 비만은 세련된 철학자 쪽보다는 거북을 먹는 시의원의 이미지를 전달하기에 훨씬 더 적합했다. ……지혜가 이토록 보기 흉한 복장으로 위장한 적은 과거에 결코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흄의 볼품없는 외모를 오히려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성격 면에서는 역대 철학자 중 가장 원만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온순한 성질이 무너질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어찌나 개방적이고 친절하고 쾌활한지 그의 저술에 분개한 사람들조차 개인적으로 만나면 무장 해제되는 일이 허다했다. 그는 음식, 술, 카드 게임,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벗들과 어울리는 것을 사랑했다. 알렉산더 칼라일은 흄을 잘 아는 다른 모든 이들처럼 그와의 대화를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라 생각했고 “순수한 웃음소리와 기분 좋은 농담에서 그에 대적할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26세의 스미스는 이제 막 경력을 시작하는 중이었고, 아직 자신의 글을 하나도 발표하지 않은 때였다. 좀더 말년이 될 때까지 스미스의 외모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 18세기에 그처럼 유명한 사람치고는 특이하게 한 번도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의 묘사로 판단하건대 그는 평균 체격에 키가 평균보다 약간 크고 두드러진 치아와 눈꺼풀이 두툼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옥스퍼드에서 보낸 시절 덕분에 스코틀랜드 문인들 사이에서 아주 귀하게 여기던 “대단히 순도 높은” 잉글랜드 남부의 교양 있는 영어를 구사했다. 스미스의 성품은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그의 진실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약간 특이한 버릇으로 정신을 딴 데 팔고 혼잣말을 하며 혼자 피식 웃는 습관이 있었다. 스미스의 행실 묘사에서 거듭 등장하는 단어는 ‘멍하다’였다. 제임스 보스웰은 그를 “상당히 박식하고 정확하고 멍한 사람”으로 특징짓고, 두걸드 스튜어트는 그가 “익숙한 사물과 일상적인 일에는 늘 부주의하며, 멍한 표정을 자주 지었다”고 언급한다.
사교적이고 매력적인 흄과 그보다 내성적이고 정신을 딴 데 팔곤 하는 스미스의 극명한 대조 때문인지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용케도 잘 지내게 됐는지 의아해했다. 20세기 초 흄의 전기 작가 J. Y. 그레이그는 그러한 대조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노력하면서 “그들의 우정은 그들의 매우 다른 성격이 허락하는 한에서 거의 완벽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흄 또한 대규모 집단보다는 “소수의 엄선한 벗들”과 함께 있는 걸 선호했고, 그 역시 일종의 미워할 수 없는 산만함을 보일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스미스가 비록 멍하기로 유명했지만 결정적으로 현실적 측면도 갖고 있었다.

스미스가 흄의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 사후 출판 거절로 불거진 갈등

 흄은 1776년 1월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스미스를 자연스럽게 자신의 유저 관리자로 지명했다. 흄이 친구에게 부여하려 한 임무 중 하나는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의 사후 출판을 감독하는 것이었지만, 스미스는 이런 요청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 일화는 그들의 우정을 심각하게 손상시켰고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흄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스미스가 흄의 회의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다거나 반기를 들었다는 조짐으로 때때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이 일화는 흔히 추측하는 것보다 덜 신랄하고 철학적으로도 덜 격렬했다.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둘러싼 흄과 스미스의 의견 충돌이 유난히 격렬했다는 일반적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거의 없다. 흄이 그 책을 편애하고 그것이 출간되는 걸 간절히 보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미스가 이런 책임을 맡길 거부하는 바람에 흄이 엄청나게 상처받고 그들의 우정에도 상당히 금이 갔다는 생각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스미스에 대한 흄의 애정은 조금도 식은 것 같지 않다. 이 주제와 관련해 흄이 쓴 첫 번째 편지는 스미스에게 좀더 자주 편지를 보내라는 흄 특유의 간청과 직접 만나지 못하는 데 대한 역시 특유의 유감을 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마지막 편지는 그를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 같은 말로 끝난다. 어떤 것을 살펴봐도 심각하게 사이가 틀어졌다거나 원망의 감정이 뿌리 깊다는 느낌은 보이지 않는다.
스미스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의 출판을 거부한 데 대한 가장 그럴싸한 설명은 단순하다. 스트러핸에게 보낸 편지들의 초안에서 직접 내비쳤듯 스미스는 그 책이 도발할 대중의 “소란”과 그러한 소란이 자신의 “조용한 삶”과 흄의 사후 평판에 미칠 영향을 경계했다.
그렇다면 이는 때때로 회자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주의 깊은, 심지어 지나치게 비겁한 사례였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는 스미스에게만 있는 특별한 결점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기록으로 보면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 대해 아는 흄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출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흄이 길버트 엘리엇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엘리엇이 출판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판하지 말라니 당신이 이렇게 경직되고 폭압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스튜어트 왕조가 했던 짓보다 더 폭압적입니다.” 휴 블레어도 흄에게 똑같은 충고를 했다. “행여 그것이 빛을 보더라도 부디 유작이 되도록 하세요. 솔직히 그러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게 제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흄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조언만으로는 스미스가 비겁했다는 혐의를 벗기에 충분치 않다면, 흄 본인의 말과 행동은 어떤가. 흄은 기꺼이 논란을 자초하겠다는 각오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를 좋아하는 확고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스스로 25년간 그 책의 출판을 자제했다. 하물며 그는 죽기 두 달 전까지도 출판업자에게 원고가 있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질문은 스미스가 책의 출판을 왜 거절했느냐가 아니라, 25년간 비밀에 부쳤던 원고를 출판하는 데 흄이 갑자기 왜 그토록 확고부동했는가, 그리고 심지어 그 의무를 왜 스미스에게 떠맡기려고 했는가이다.

흄의 자서전 〈나의 생애〉와 스미스의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

흄은 마지막 투병 기간 중 짧은 자서전을 집필해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흄은 거기에 〈나의 생애〉라는 제목을 붙인 뒤, 스트러핸에게 장차 자신의 모든 저작물 모음집의 머리말로 써달라고 요청했다. 스미스가 〈애덤 스미스 법학 박사가 윌리엄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흄이 사망할 무렵의 이야기를 거기에 보충한 것을 보면 그도 찬성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두 사람의 공동 저작물에 가장 가까우며, 스미스의 글은 독자의 관심을 현저하게 자신들의 우정에 집중시킨다. 6쪽가량의 지면에서 ‘친구’란 단어를 17차례나 사용할 정도다.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비록 짧지만 영리하게 여러 가지 역할을 한다. 첫 번째이자 가장 분명한 역할은 감동적인 추도사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덜 명확하지만 우정에 대한 일종의 찬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흄의 명성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흄에게 빈번히 적대적이었고 그의 사상에 거의 언제나 적대적이었던 세상에서 그의 업적을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은연중에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는 종교 없는 삶의 가능성과 도덕성에 대한 변호이기도 한 셈이다.
스미스는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신이 이제까지 쓴 아주 치명적인 문장 중 하나로 끝맺는다. “전체적으로 저는 그가 살아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에도 그렇고, 인간의 나약함이라는 본성이 허용하는 선에서 어쩌면 완벽하게 지혜롭고 도덕적인 인간이라는 개념에 거의 근접한 사람일 수 있겠다고 항상 생각해왔습니다.”
스미스는 훗날 “작고한 친구 흄 씨의 죽음에 관해 무심코 쓴, 내가 보기에는 지극히 무해한 단 한 편의 글이 내가 대영제국 전체의 상업 체제에 가했던 격렬한 맹공보다 10배는 더 많은 비난을 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절대 그 책에서 한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절대 책을 출판한 것을 사과하지 않았고, 절대 비평가들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데니스 C. 라스무센
미시간 주립대학교 제임스 메디슨 칼리지를 졸업하고, 2005년 듀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 정치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정치철학사·현대 정치 이론·미국 정치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계몽주의, 자유 민주주의, 시장 자본주의의 미덕과 단점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저서로 《실용주의적 계몽주의(The Pragmatic Enlightenment)》 《상업 사회의 문제점과 약속(The Problems and Promise of Commercial Society)》, 편저로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흄의 죽음(Adam Smith and the Death of David Hume)》 《애덤 스미스와 루소(Adam Smith and Rousseau)》 등이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찰스타운에서 살고 있다. 
 

옮긴이 : 조미현 

서울대학교 신문학과를 졸업하고, 영화 잡지 〈월간 키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 밖에 장편영화 연출부, 독립영화 프로듀서, 실험극단 기획자 등으로 활동했다. 옮긴 책으로 《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불평등의 역사》 《에드먼드 버크와 토머스 페인의 위대한 논쟁》 《십대의 재능은 어떻게 발달하고 어떻게 감소하는가》 《마음의 혼란》이 있다.
 

 

목 차

머리말
감사의 글

서문 가장 친애하는 벗들에게
01 쾌활한 무신론자(1711∼1749)
02 흄과의 조우(1723∼1749)
03 싹트는 우정(1750∼1754)
04 역사가와 교회(1754∼1759)
05 도덕 감정의 이론화(1759)
06 프랑스의 환대(1759∼1766)
07 괴짜 철학자와의 싸움(1766∼1767)
08 치명적인 물 공포증(1767∼1775)
09 국부의 탐구(1776)
10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1776)
11 한 철학자의 죽음(1776)
12 10배 많은 비난(1776∼1777)
맺음말 에든버러에서 보낸 스미스의 말년(1777∼1790)

부록 흄의 〈나의 생애〉와 〈애덤 스미스 법학 박사가 윌리엄 스트러핸 씨에게 보내는 편지〉
인용 문헌 관련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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