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상처 입은 지구에 대한 사랑과 분노로 쓰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팬데믹의 시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수많은 트러블과 함께, 수많은 반려종과 함께
공-산共-産의 실뜨기로 새로운 관계를 발명하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 친척kin을 만들자
우리 시대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의 한 사람인 도나 해러웨이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선언의 사상가’로 불리는 해러웨이는 세계적인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이다. 남성/여성, 인간/동물, 유기체/기계 같은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고, 학문의 장벽을 뛰어넘는 다학제 연구와 종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시각으로 사유의 지평을 넓혀왔다. 인간-기계의 혼종적 존재인 사이보그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재형상화한 《사이보그 선언》(1985)은 현대의 고전이 되었으며, 《반려종 선언》(2003)은 생물학적 종을 횡단하며 공진화하는 ‘반려종’ 개념을 통해 새로운 생명정치의 상을 제시했다.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 자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온 해러웨이는 2016년 저작인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는 이러한 사유를 더 밀어붙여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라는 슬로건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친척kin’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넘어서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확장하는 개념이다. 이 도발적 제안은, 우리가 직면한 절박한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해러웨이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망가지고 상처 입은 지구와, 그리고 지구의 모든 인간/비인간 거주자들과 맺는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메시지다. 이 관계의 창의적 변화를 위해 우리는 “트러블과 함께”하며 “복수종multispecies 생물들과 동맹”하고 “친척”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을 넘어 지구에 존재하는 수많은 반려종, 수많은 친척들과 공-산共-産, 공-생共-生하는 삶의 양식을 회복해야 한다.
해러웨이는 철학과 문학, 생물학, 인류학, 생태학 등을 넘나드는 융합적 사유, 비유와 상징과 스토리텔링을 오가는 자유분방한 글쓰기,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서 길어 올린 공-산의 사례들을 엮어 새로운 관계와 삶의 가능성을 담대하게 펼쳐 보인다. 기후위기와 감염병 팬데믹의 시대, 정체성으로 경계를 짓고 배제와 혐오의 목소리가 폭발하는 여기, 해러웨이 사유의 촉수가 우리를 “찌르고” “야단법석을 떨”게 하기를, 다른 세계로 향하는 “이동 통로”를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 이 책은 도나 해러웨이의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ersity Press, 2016의 1, 2, 3, 4, 8장을 옮긴 것이다. 5, 6, 7장(원서 104~133쪽)은 저작권 계약상의 문제로 이 번역본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응답 능력 키우기
호주 멜버른 배트맨공원에는 둥근 탑 모양의 거대한 비둘기집이 있다. 야생 비둘기들을 위해 둥지 상자 200개를 설치한 곳이다. 비둘기들이 찾아와 알을 낳으면 사람들이 인공 알로 교체하고, 비둘기는 이것을 품는다. 비둘기 개체수가 불어나 문제를 일으키자 세계 여러 도시가 먹이를 주지 못하게 하는 등 배제의 정책을 펴는 데 반해 배트맨공원은 집을 마련해주고 부화를 제한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비둘기에게 가혹한 처사로 보이는 이 방식에서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작지만 실질적인 예를 발견한다. 경주용 새, 전시의 스파이, 과학연구의 파트너, 애완동물, 도시의 반려… 오랜 세월 인간과 서로를 길들여온 비둘기가 유해 동물이 된 현실에서 이 문제를 말끔히 없애줄 해법은 없다.
트러블과 함께한다는 것은, 복잡하고 애매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즉각 응답하는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을 요구하거나 ‘게임 오버’라며 절망에 빠지는 대신, 트러블과 함께 머물면서 지금 당장 실현 가능한 응답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 비둘기집은 낙태 반대 프로젝트가 아니다.” 해러웨이에 따르면 그것은 트러블과 함께하기의 목표인 ‘복수종의 번성’, ‘생물다양성 회복’을 위한 실천이며, 동물-인간의 진지한 ‘함께?되기’ 시도이다. 그것은 무구하지 않고 완벽하지 않으며, 공원 땅에 얽힌 식민지 정복, 습지대 파괴 같은 복잡한 역사를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전한 화해나 복구가 아니라, 부분적인 회복 그리고 ‘함께 잘 지내기’ 위한 현실적인 가능성들이다. 문제투성이 세계에서 두텁게 공존하며 살아가야 할 필멸의 존재인 우리는 “절망이나 희망에 굴복”하는 대신, “살기와 죽기 모두에 관한” 응답 능력을 키워야 한다.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트러블과 함께.
인류세, 자본세, 플랜테이션세, 쑬루세
트러블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애매하고 복잡한 사태들이다. 그런데 2000년부터 조명받기 시작한 ‘인류세Anthropocene’ 담론, 즉 인간의 활동이 지구에 미친 파괴적 영향력을 새로운 지질시대로 설명하는 흐름은 해러웨이가 보기에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오늘의 위기가 인간이라는 생물종 탓이라는 진단은 명확해 보이지만, 책임 주체를 희석해버리는 이런 식의 일반화에서 구체적인 응답을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인간이 유일한 동인이자 행위자라는 오만한 인간중심주의도 문제다.
해러웨이는 인류세보다 ‘자본세Capitalocene’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화석을 태우며 이윤을 쥐어짜는 자본의 욕망이 생태계 파괴와 정치적 무질서를 빚어낸 것을 겨냥한 것이다. 또 동료 학자들과 함께 ‘플랜테이션세Plantationocene’라는 또 다른 이름을 제안한다. 노예 플랜테이션 시스템이 자연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탄소/기계 기반 시스템에 동력을 제공했으며, 오늘날 공장식 축산과 기업식 단작농업의 형태로 더욱 흉포하게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아가 해러웨이는 ‘쑬루세Chthulucene(지하세地下世)’라는 독자적인 시대 개념을 제시한다. ‘땅’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톤khthon’과 ‘피모아 크툴루Pimoa cthulhu’라는 거미의 학명을 토대로 만든 ‘쑬루’는 땅속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연결망을 가리킨다. 인류세가 천상 신의 위계적 지배를 함의한다면, 쑬루세는 그물망과도 같은 땅속 존재들의 촉수적인 연결을 함의한다. 쑬루세에서 인간은 유일하게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며, “연대를 통한 함께 살기와 함께 죽기는 자본의 명령에 대한 치열한 대응”일 수 있다. 쑬루세는 지금과는 다른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고, 인간만의 폴리스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거주자들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테라폴리스terrapolis에 참여하는 시대를 의미한다.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Make Kin Not Babies!
해러웨이의 새로운 선언, 트러블과 함께하기 위한 구체적인 응답. 바로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이다. 반려종들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해러웨이의 친척은 혈통과 계보, 생식과는 무관한 개념이다. 친척 만들기의 주체/대상이 개체나 인간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기존의 혈연과 종의 의미에 트러블을 일으키기 위해 해러웨이는 ‘친구’ 대신 ‘친척’이라는 용어를 선택하며, 절멸 위험에 빠진 생물종들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을 요청한다. 친척 만들기는 여성을 ‘출산 기계’로 간주하는 가부장제에 맞서 성과 생식의 자유를 위해 분투해온 페미니즘, 반인종주의·반식민주의·반자본주의·친퀴어 페미니스트들의 실천이기도 하다. 국가 이익에 복무하는 인구조절 정책에 저항하면서 ‘과잉인구’라는 트러블과 함께하기 위한, 종의 경계를 넘어 공생하기 위한 급진적 처방인 것이다.
이 책의 5장 “카밀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은 친척을 만들자는 슬로건을 형상화한 한 편의 SF다. 인간 아이와 왕나비들의 다섯 세대에 걸친 공생발생적 결합을 보여주는 이 이야기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는 셋 이상의 부모가 있으며, 젠더 구별 없이 임신한 부모는 아이를 위해 동물 공생자를 선택한다. 손상된 땅을 회복하기 위해 모인 ‘퇴비의 아이들’은 동물의 유전자를 몸에 이식하고, 공생자들과 돌봄을 주고받으며 생명의 릴레이를 이어간다. 신체 일부를 공유하는 SF적 관계뿐만 아니라, 가령 비둘기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서로를 길들여온 친척이며, 생존을 위해 공생하는 오징어와 비브리오균 같은 존재들도 서로를 돌보고 변형시키는 친척이다. 이 관계 역시 무구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친척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되는 관계 속으로 진입하는 일, 즉 트러블과 함께하는 일이다.
공-산, 함께 만들기,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 함께 되기
친척은, 반려종은 공?산共?産의 존재이다. 쑬루세는 트러블과 함께하는 공-산의 시공간이다. 공-산은 ‘함께sym?만들기poiesis’라는 뜻으로, 지구의 모든 거주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어떤 것도 자신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며, 모든 것이 개체/개인을 넘어 연결되어 있다. 해러웨이는 린 마굴리스의 공생발생설을 비롯한 생물학의 성과들에 기대어 함께 서로를 만드는 공-산의 의미를 탐구하며, 현실의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한다. 특히 트러블을 겪고 있는 위급한 네 지역에서 헌신하고 있는 과학-예술 활동가들의 세계 만들기를 비롯한 다양한 연대의 움직임을 강조한다.
해양생태계 파괴로 산호 표백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자 27개국 8천여 명의 공예가들은 코바늘로 산호를 떠서 전시회를 열었다. 실과 천, 비닐, 테이프, 랩 등 온갖 재료로 짜인 수많은 산호들이 메시지를 발산한 ‘산호초 코바늘뜨기 프로젝트’ 이야기다. 해러웨이는 과학과 예술과 정치의 공-산적 실뜨기인 이 프로젝트를 환경파괴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예술 행동주의라고 말한다. 마다가스카르의 ‘아코 프로젝트’도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의 우정이 만들어낸 공-산적 선물이다. 마다가스카르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한 어린이 자연사 책 시리즈 출간 프로젝트로, 마다가스카르에만 서식하는 여우원숭이와 그 서식지인 숲이 빠르게 파괴되고 있는 이곳의 생물다양성에 관한 공감과 지식을 확산하고 있다. ‘네버 얼론Never Alone’은 알래스카 원주민인 이누피아트족이 참여해 만든 컴퓨터 게임이고, 애리조나 블랙메사 땅의 이야기는 집단학살과 절멸의 역사 위에서 펼쳐지는 부활을 위한 싸움의 연대를 보여준다. 모두 서로의 삶에 참여하는, 함께 만들고 함께 얽히는 “복수종의 함께-되기”의 사례들이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도나 해러웨이
세계적인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생물학자, 과학학자, 문화비평가이다. 남성/여성, 인간/동물, 유기체/기계 같은 이분법적 질서를 해체하고 종의 경계를 허무는 전복적 사유로 명성이 높다.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와 인간중심주의, 반과학주의를 비판하고,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다학제 연구를 진행하면서 끊임없이 사상의 전선을 확장하고 있다.
1944년생으로 콜로라도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예일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캘리포니아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의식사학과 석좌교수이다. 저서로 《사이보그 선언》 《반려종 선언》 《영장류의 시각》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겸손한_목격자@제2의_천년.여성인간ⓒ_앙코마우스TM를_만나다》 《한 장의 잎사귀처럼》 등이 있다.
옮긴이 : 최유미
KAIST 화학과에서 〈비활성기체의 결정안정성에 대한 통계역학적인 연구〉로 이론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IT회사에서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에 참여했다. 지금은 동서양의 철학을 횡단하면서 인문학을 깊이 공부하고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공부의 중심에 도나 해러웨이의 사상과 과학기술 담론,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의 ‘함께 살기’에 대한 고민이 있다. 지은 책으로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공저) 등이 있으며, 〈기계와 인간의 공동체를 위하여〉 〈인공지능과 함께 되기〉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목 차
서론
1장 반려종과 실뜨기하기
복수종의 스토리텔링과 반려들의 실천
캘리포니아 경주용 비둘기와 비둘기 애호가들
신뢰할 수 있는 여행자들
2장 촉수 사유: 인류세, 자본세, 쑬루세
인류세Anthropocene
자본세Capitalocene
쑬루세Chthulucene
3장 공 – 산 : 공생발생과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활기찬 예술
공생발생
‘안으로 말림’의 모멘텀으로 과학과 예술을 엮어 짜기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위한 과학‐예술 세계 만들기
맺으며: 실들을 묶기
4장 친척 만들기 : 인류세, 자본세, 플랜테이션세, 쑬루세
5장 카밀 이야기: 퇴비의 아이들
카밀의 세계를 상상하기
카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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