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우물 안 개구리? 고루한 유학은 잊어라!
근대 유학자 18인, 시대를 고민하다
이 책은 조선 유학의 재인식을 목표로 하는 한국 근대 유학 안내서이다. ‘서양 근대와 전통 유학’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넘어서고자 ‘근대 유학’의 문제적 현장들을 찾았다. 유교 지식인 열여덟 사람의 인상적인 글을 선별하여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고 다시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그에 대한 감상문을 썼다. 문선文選과 평설을 겸한 이 책의 부제가 ‘한국 근대 유학 탐史’인 까닭이다.
꼼꼼히 짚어본 조선 근대 유학의 육성
현재 한국 사회에 친숙한 조선 유학의 이미지는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전근대의 정지된 시간이다. 뿐인가.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조선 망국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개화냐 수구냐, 신학문이냐 구학문이냐, 서양 근대냐 전통 유학이냐 하는 이분법적 인식 틀이 오랜 기간 한국 사회에서 맹위를 떨쳤던 탓이다.
실상은 다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누구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대를 고민하고, 충심 어린 제언을 했다. 진정한 문명개화란 무엇인지, 서구 열강은 어떻게 부강하게 되었는지, 공화정의 의미 등 다양한 주제를 논했다. 그리하여 독자들이 조선 유학의 실상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 1906년 7월 6일 자 《황성신문》의 논설 〈껍데기 개화의 커다란 폐해〉와 신동엽 시인의 유명한 시 〈껍데기는 가라〉에서 빌려온 책 제목은 지은이의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진정한 개화, 부국의 길을 궁리하다
책에 실린 글은 크게 세상, 역사, 학문 3부로 갈래지어 있다. 제1부 세상은 개화의 대도大道를 모르면서 엉터리 개화를 만들고 있는 세태의 비판과 제언을 담은 글 6편을 실었다. 근대 한국에서 지식인의 자기반성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근대 한국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관념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가, 이른바 ‘수구守舊’란 어떤 의미이고 진정한 개화는 무엇인가 등 에 대한 질문을 생각하게 만드는 글들이다. 그러기에 “갑오개혁 이후 한국 사회는 개화! 개화! 하며 제도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개화에 노력했지만 어째서 나라가 쇠망에 빠졌는가? 대충 보고 들은 설익은 지식으로 개화를 치장하고 개화를 행세한 구이口耳의 개화, 그 껍데기 개화 때문이었다”(23쪽)이란 자탄이 그런 예이다. 그런가 하면 유교 국가 조선의 멸망을 두고 “양반은 넘쳐나도 선비는 드물었다. …… 그것은 직분을 다하지 않은 사의 책임을 묻는 사건이었다. …… 이제 사농공상은 가고 상공농사가 왔다”(55쪽)는 자성을 엿볼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며 구국의 길을 모색하다
제2부 역사는 근대 유학자들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글 6편을 묶었다. 1911년 호남 유학자 양재경이 쓴 《조선말년사》의 한 대목은 “화란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니 서리를 밟게 되어 단단한 얼음이 생기듯 반드시 그 시초가 있는 법”이라면 “우리나라 임금과 신하가 만약 임오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신년(1884)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갑신년에 잘못을 뉘우쳤으면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의 변란, 을사년(1905)과 병오년(1906)의 화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경술년(1910)의 망국도 없었을 것이다”(81쪽)이라 짚는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평설을 통해 일본의 다이쇼정변 직후인 1913년 고종의 밀지에 따라 의병을 모의했다든가, 일본이 영친왕 부부를 강화회의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 신혼여행을 보내 한일 왕가의 친분을 과시하려다 고종의 급사로 무산되었던 사실 등 역사적 사실이 소개된다.
유학 전통과 서학의 조화를 추구하다
제3부 학문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유학자들의 안간힘을 담은 글 6편이 실렸다. 19세기 서양사를 다룬 《태서신사》를 읽고 “이용후생은 서양을 배우고 교화는 동화東華를 주로 한 뒤에야 부강을 꾀할 수 있고 영속을 말할 수 있겠다”한 권상규의 ‘독후감’이나 안동 유학자 송기식이 루소의 민약설, 다윈의 진화설, 프랭클린의 전기설은 물론 마르크스의 과학설을 언급했던 사실은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글들이다.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사 비평, 근대 한국에서 세계 학문의 총론을 쓰고자 했던 지적 기획, 근대 한국 유학자의 세계 학문 총론 쓰기 구상 등 학문에 관한 유학자들의 진지한 모색을 만날 수 있다.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를 묻지도 않고 동양을 배척하고 서구를 숭상한다면 근본을 등지고 성인을 속이는 일이니 다시 조국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214쪽)라는 이건방의 질문은 지금도 여전한 울림을 지녔다.
지은이 노관범 교수(서울대 규장각)는 전작 《고전통변》에서 18~20세기 한국 한문 소품을 대상으로 고전 읽기와 역사 평설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이 책은 전작의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한국 근대 유학에 집중했다는 특징이 있다. 지은이는 이 책이 조선 유학이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된 과거가 아니라 근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현재로서 새롭게 인식되는 작은 밀알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작가 소개
노관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부교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대한제국기 박은식과 장지연의 자강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제국기 실학 개념의 역사적 이해’로 모하실학논문상을 수상했다. 전통과 근대의 통합적 사유를 위해 분발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한국의 사상사, 지성사, 개념사, 지식사, 학술사이다.
지은 책으로는 《백암 박은식 평전》(2021), 《기억의 역전》(2016), 《고전통변》(2014) 등이 있다. 함께 지은 책으로는 《근대전환기 문화들의 전환과 메타모포시스》(2021), 《동아시아에서 세계를 보면》(2017), 《한국의 근현대, 개념으로 읽다》(2016), 《민음 한국사: 19세기, 인민의 탄생》(2015), 《두 시점의 개념사》(2013), 《500년 공동체를 움직인 개념의 힘》(2013) 등이 있다. 함께 번역한 책으로는 《신역 정조실록》(2019), 《음빙실자유서》(2017) 등이 있다.
최근의 관심사는 한국에서 사상사의 탄생, 한국인이 생각한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 학계의 실학 만들기 등이다.
목 차
지은이의 말
1부 세상
1장 개화 세상의 허실
1. 껍데기 개화는 가라(정일우, 《율헌집》 〈개화〉)
2. 나는 수구, 세상에 저항한다(유영선, 《현곡집》 〈야사문답〉)
2장 사회 변화의 열망
3. 동학농민운동을 향해 묻는다(이관후, 《우재문집》 〈갑오문답〉)
4. 농부는 선비의 미래이다(공학원, 《도봉유집》 〈사민론〉)
3장 문물제도의 신설
5. 대한제국의 비원 (안종덕, 《석하집》 〈창덕궁비원중수미액영련탑본발〉)
6. 개성박물관을 소개한다 (손봉상, 《소산집》 〈박물관기〉)
2부 역사
4장 조선 말기의 기억
1. 조선의 말년사를 성찰한다(양재경, 《희암유고》 〈국조기사〉)
2. 광복의 역사를 만든 하늘의 뜻(김종가, 《입헌집》 〈서동감강목후〉)
5장 중국 혁명의 여파
3.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임한주, 《성헌집》 〈속산중문답〉)
4. 신해혁명, 다이쇼 정변, 고종의 밀지(임병찬, 《둔헌유고》 〈관견〉)
6장 한국 독립운동의 현장
5. 서간도와 홍콩, 광복군 임경업(박은식, 〈한교제임장군기〉)
6. 고종독살설과 유림의 독립운동(송주헌, 《삼호재집》 〈무기사변시효섭〉,〈조선유림독립운동사략〉)
3부 학문
7장 한문 서학서의 인식
1. 세계사를 성찰한다 (권상규, 《인암집》 〈서태서신사후〉)
2. 신학을 넓혀 구학을 돕는다(이병헌, 《이병헌전집》 〈제미국진사이가백씨신구학설후〉)
8장 해외 학문의 자각
3. 바다에서 비추어 유학이 밝아진다(송기식, 《해창문집》 〈해창설〉)
4. 일본 유학이란 무엇인가(장화식, 《복암집》 〈퇴도시변의〉)
9장 유학 전통과 현대
5. 유학의 도는 정덕인가 대덕인가(김윤식, 《운양집》 〈돈화론〉)
6. 가짜 신학문을 비판한다(이건방, 《난곡존고》 〈원론 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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