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반도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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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허문명
출판사항동아일보사, 발행일:2022/10/18
형태사항p.455 국판:22
매장위치사회과학부(B1) , 재고문의 : 051-816-9500
ISBN9791192101156 [소득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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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베스트셀러 ‘경제사상가 이건희’를 출간한 허문명 동아일보 기자가 제2탄 격으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이룬 반도체 신화를 집중적으로 다룬 ‘이건희 반도체 전쟁’을 펴냈다. 이 회장 2주기인 10월 25일에 맞춰 출간되는 이 책은 1부 호암 이병철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2부 역대 대표적인 삼성반도체 CEO들의 증언을 통해본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암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1부 ‘호암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편에서는 한국 사람들은 물론 삼성 직원들조차 반도체의 ‘반’자도 모르던 시절 호암이 어떻게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1970년대 앞이 보이지 않던 암울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최초 반도체 회사였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시작된 호암의 반도체 사업 구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내년 2023년은 1983년 호암이 최첨단 메모리 반도체(VLSI) 진출을 선언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이며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 선언(1993년)을 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통해 한국 사회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빠른 추격자)’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로 가야 한다고 앞서서 주창했으며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결과로 말한 세계적인 경영자들이다.

남의 것을 뒤에서 쫓는 추격자에서 벗어나 맨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의 조직 문화·교육 방식·상상력을 모두 바꿔야 한다. 호암과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처럼 리스크가 큰 사업에 투자하다 삼성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주저하고 반대할 때 고독한 결단의 순간과 수없이 마주하며 초인적인 힘으로 사업을 밀고 나갔고 결국 큰 성과를 일구었다.

그것은 단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개발 기간이 얼마나 걸리고 예산은 얼마나 투입되며 손익분기점은 어느 수준인지 등의 문제보다 반도체가 만들 세상에 대한 비전·가치·철학에 집중했다.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반도체 산업


삼성반도체의 전신은 1974년 1월 경기도 부천에 세워진 한국반도체다. 칩 설계에서부터 당시로서는 최첨단인 3인치(75㎜) 웨이퍼(반도체 칩 원재료가 되는 동그란 실리콘 기판) 생산 라인까지 전 공정을 갖춘 그야말로 제대로 된 최초의 반도체 공장이었다. 한국반도체는 시간을 숫자로 표시하는(그전에는 모두 아날로그 바늘이었다) 디지털 손목시계용 칩 생산을 목표로 출발한 회사였는데, 자금난에 처한 것을 알게 된 호암이 절반의 지분을 샀고 이후 이건희 회장이 사재를 털어 완전 인수하면서 삼성반도체 역사가 시작된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던 1970년대 말은 삼성이 TV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호암은 반도체가 전자산업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이건희 당시 부사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인수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증언들이 펼쳐진다.

무엇보다 호암이나 이건희 회장 모두 반도체 사업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호암에게 끊임없이 사업에 대한 필요성과 영감을 불어넣은 것으로 알려진 이건희 회장은 1970년 한국 사회가 미증유의 오일쇼크로 경제사회적 직격탄을 맞은 상황에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면서 막 PC 여명기를 맞고 있던 미국의 정보통신혁명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생전에 평소 임직원들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이른바 ‘업(業)의 개념’에 천착한 경영인답게 한국인의 젓가락 문화, 밥상문화,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문화에 기반 해 한국에서 반도체사업의 가능성을 보았다는 대목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다시 보는 호암의 리더십


호암은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 산업국가였던 일본을 드나들며 사업구상을 많이 했는데 일본이 이미 차세대 먹거리로 중후장대가 아닌 ‘경박단소’ 사업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면서 반도체 관련 학자와 전문가 집단과 깊게 교류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반도체 사업의 가능성을 보았고 한국도 못할 것 없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책에는 반도체 신화를 만든 초기 반도체 조직을 만들고 공정을 지휘한 김광호 전 부회장 등 대표적 전문경영인들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이건희 회장도 생전에 “일본, 미국을 직접 다니면서 반도체 기술자들을 만나 기술을 전수해달라고 사정하는 ‘기술 보따리 장사’를 했다”는 말을 직접 하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호암은 73세라는 당시로서는 고령의 나이였다. 당시 제당, 모직 등 전통 제조업에서 전자 산업이라는 전인미답의 길을 택해 대 성공을 거둔 대한민국 최고 갑부로서 이미 이룩한 부富를 누리고 살아도 충분한 때에 호암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또 목숨을 건 일대 결단이기도 했다. 그는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하기 수년 전 위암 수술을 하면서 생과 사의 기로에 서서 언제 재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마무리를 생각할 시점임에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그의 고민은 호암자전에 잘 나와 있다.


“수많은 미국과 일본 전문가를 비롯하여 국내 전문가들의 의견을 거의 다 들었다. 관계 자료는 손닿는 대로 섭렵했고,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한 최고의 자료를 얻고자 무한히 애를 썼다. 그 결과 전혀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점을 알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만 있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내 나이 73세, 비록 인생의 만기晩期이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어렵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이처럼 반도체 개발의 결의를 굳히면서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호암자전)


●공장 건설에서부터 기술추격까지 이룬 기적의 연속


1983년 2월 도쿄 선언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라는 최첨단 반도체 사업진출을 공식 선언한 뒤 6개월 만에 공장을 완공하라고 지시하는데 현재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라 할 만한 기흥부지가 땅 매입에서부터 용도변경까지 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초창기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리고 공장을 짓는 과정에서 휴일도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전 직원들이 매달려 당시로서는 한국에서 없던 클린룸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이어진다.

삼성은 64K, 256K 개발 성공의 여세를 몰아 1986년 7월 13일에는 마침내 1M D램 개발에까지 성공한다. 개발에 착수(1985년 9월)한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1M D램은 꿈의 반도체 ‘킬로비트에서 메가비트 단위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는 슈퍼 칩이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곪고 있었다. 삼성이 야심차게 64K D램 양산을 시작한 1984년은 불행히도 D램 시장이 대폭락기로 접어든 초입이었다.

그해 말부터 세계 반도체 업계에는 최악의 D램 대폭락 사태라는 쓰나미가 덮친다. 미국과 일본의 설비투자 경쟁이 이뤄지면서 64K, 256K 공급과잉이 시작되자 일본은 덤핑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이른바 미일 치킨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미·일 고래 싸움에서 삼성은 새우는커녕 피라미 신세에 불과했다. 삼성 직원들에겐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자칫하면 그룹 전체가 와해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호암은 엄청난 반도체의 경영 손실을 안고서도 천문학적 개발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지옥의 터널을 통과하면서도 외친 ‘돌진하라’


호암의 기업가 정신에서 놀라운 사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상황에서도 반도체 개발을 독려하고 막대한 돈을 들여 2공장(1984년 8월), 3공장(1987년 3월)을 계속 지었다는 것이다. 다들 이대로 가면 망한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호암은 ‘올인 하라’고 했다. 생전에 적자만 보고 눈을 감은 호암이었건만 별세 이듬해인 1988년부터 기적적으로 반도체 호황이 닥치면서 삼성은 기사회생한다.

호암 특유의 공격적 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다. 반도체 업계에서 웨이퍼 크기 늘리기 경쟁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3인치, 4인치, 5인치는 미국이 선도했지만 6인치는 일본이 먼저 치고 나갔다. 하지만 호암이 6인치 도입을 결정할 당시엔 일본에서도 제대로 만드는 회사조차 없던 상황이었다. 호암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6인치 결정을 내렸고 이는 3공장 증설과 함께 또 다른 신의 한 수였다. 1988년 삼성반도체 대반전의 역사는 256K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가능했는데 이는 256K 양산 라인이던 2공장의 6인치 웨이퍼가 결정적으로 효자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극적인 반전을 보지 못하고 호암은 눈을 감았다.

웨이퍼 크기 늘리기로 대표되는 공격적인 설비투자는 이건희 회장 때에도 이어지는 데 삼성반도체가 1993년 메모리 부문 매출 세계 1위로 뛰어오르는 신화창조의 분수령이 된 계기는 8인치를 적용한 16M D램 양산 라인(5공장)이었다.

삼성전자가 8인치에 뛰어든 1990년과 1991년, 세계 D램 시장에는 또 다시 불황이 닥쳤고 6인치로 앞서 달리며 세계 선두를 주도하던 일본 업체들도 투자 규모를 줄이고 신규 투자를 주저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이 한창이던 1993년 6월 D램 업계 최초로 8인치 양산 라인인 5공장을 준공한다. 그리고 이 승부수는 1990년과 1991년 극심한 불황을 겪던 시장이 인터넷 확산으로 PC 열풍이 불면서 다시 호황 사이클로 급반전되던 때라 대성공을 거둔다. 삼성전자는 1994년 1조 6,800억 원, 1995년 3조 5,400억 원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 이익을 낸다. 1995년의 경우 메모리 반도체 이익만 2조 7,000억 원에 달했다. 이건희 회장의 공격 경영은 8인치에서 끝나지 않고 세계 최초 12인치 공장 준공으로 이어진다.


●삼성의 초격차, 1등주의, 위기의식의 배경


생전의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본질로 ‘타이밍’을 강조했는데 이는 반도체 업의 본질에 정확히 닿아있는 말이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조금이라도 더 나은 최첨단 칩을 제품에 넣기 원하는 완제품 업체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피 말리는 스피드 경쟁을 벌인다. 분 초 단위 시간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에서 하루나 일주일 단위로 결정이 늦어지면 몇 년 뒤 몇 십 조 원의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반도체 사업은 또 전형적인 승자 독식 구조다. 이회장이 생전에 초일류 정신, 1등주의를 강조했던 것도 2등이나 이류를 무시하는 엘리트 의식의 표현이 아니라 반도체라는 업의 정체성 자체가 1등 아니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구조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앞으로 5년 뒤, 10년 뒤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난다’거나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들은 10년만 지나도 사라질 것’이라며 끊임없이 ‘위기, 위기’를 말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결정적 선택, 결정적 순간들로 본 이건희 리더십


반도체 산업사史를 보면 어떤 기술을 선택했는지가 기업의 성패를 결정짓는 경우가 있다. 스택과 트렌치도 그 경우다.

1989년이 되면서 D램 크기가 4M를 넘자 저장소 형태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전부 하나의 평면 위에 트랜지스터와 저장소를 함께 늘어놓는 방식이었다.

1M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4M부터는 집적도가 갑자기 올라가다 보니 손톱만 한 칩 평면 위에 모두 늘어놓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밀도를 높이려면 저장소를 복층으로 해야 했다. 여기서 나온 게 스택 방식이냐, 트렌치 방식이냐 하는 것이었다.

건축도 그렇지만 칩도 복층으로 만들려면 위로 세울 수도 있고 지하를 팔 수도 있다. 스택은 위로 쌓는 것이고 트렌치는 지하로 파 내려가는 방식이다. 각각 장단점이 있었다. 트렌치가 안전하기는 했지만 공정이 까다로워 경제성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회로가 보이지 않았다. 스택은 작업하기 쉽고 경제적이었지만 품질이 불안정했다.

장단점이 엇갈리다 보니 선발 업체들의 선택도 나라별, 회사별로 갈렸다. 미국 회사들은 대부분 트렌치를 택했다. 일본의 경우는 도시바와 NEC는 트렌치를, 히타치, 미쓰비시, 마쓰시다, 후지쓰는 스택을 택했다.

고민이 깊었던 삼성도 실리콘밸리에 있는 미국 팀이 트렌치, 한국의 기흥 팀이 스택으로 연구를 진행하다 ‘위로 쌓는 게 더 쉽지 않겠는가’라는 이건희 회장의 결정에 따라 스택 방식으로 결정을 내렸고 이를 통해 트렌치를 선택했던 일본 회사들을 앞서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다.

호암이 마련한 반도체라는 초석 위에 30년 만에 ‘세계 최고의 집’을 지은 이건희 회장은 과감한 투자 결정이라는 경영 감각을 갖췄고 미래 기술 추세를 예측하는 시야가 넓었으며 좋은 기술에 대한 안목도 있었다. 이 점에서 탁월한 기술경영자였다고 할 수 있다.

스택과 트렌치 일화는 직원들이 갑론을박할 때 최고경영자의 빠른 의사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건희 회장과 함께 일했던 전직 삼성맨들은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 대해 ‘자율’과 ‘위임’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실제로 이 회장은 생전에도 경영자의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책임은 내가 진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저질러 보라’고 말하고 행동했던 리더였다.

권오현 전 부회장은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고 호황과 불황 사이의 진폭이 말도 못 하게 큰 반도체 사업에서 사이클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밀고 나갔던 오너의 집념과 의지가 일본을 이긴 결정적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사람 냄새 나는 기술 이야기


코로나19는 인류에게 닥친 대재앙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그래왔듯 인류가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는 배경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기술혁명이 도움이 됐다는 데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공유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한다.

그 정점에 반도체가 있다. 반도체가 없었다면 4차 산업혁명은 없었다. 반도체는 단지 산업의 쌀 정도가 아니라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났던, 현재 일어나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기술혁명의 원천이다.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의 모든 산업, 자율주행차, AI(인공지능), AR·VR(가상 증강 현실), 바이오, 커머셜, 휴대전화, TV 등 쓰이지 않는 데가 없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들어가는 반도체는 300여 개지만 전기 자동차에는 2,000여 개가 들어간다.

스티브 블랭크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21세기 반도체는 지난 세기의 석유와 같다. 생산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경제 군사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가 외교이고 국방이고 안보인 시대다.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세계 시장점유율은 2021년 기준 70%를 넘어섰다. 단군 이래 대한민국에서 세계시장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선도한 수출 품목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됐는지 이 책은 차근차근 풀어가고 있다.

두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 책의 미덕은 흔히 과학과 기술 이야기라고 하면 컴퓨터나 돈, 비즈니스 관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기술에서도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 기술을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파고들다 보면 결국 사람으로 귀결된다. 사람과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기술 발전을 이끈 동력과 결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무모하고 과감한 도전을 하며 경계를 부쉈던 혁신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술 관련 서적은 기술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나 설비투자 혹은 생산성 향상 및 비용 절감 등 제조업의 앵글을 활용한다. 정보통신혁명은 제조업의 논리와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상상력에 의존하는 바가 더 크다.


<제2부 반도체 대표 CEO들로부터 듣는 이건희 리더십>


삼성반도체 역사는 크게 다섯 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반도체 입문’ 시기로 호암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1975년부터 도쿄선언을 하기 전인 1982년까지 부천에서 반도체 기초기술을 축적하고 인재를 양성하던 시기다.

두 번째는 ‘메모리 창업기’로 호암의 도쿄선언이 있었던 1983년부터 별세한 1987년까지 기흥사업장이 건설되고 메모리 산업의 프레임이 만들어지던 시기다.

세 번째 시기는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신경영 선언을 하던 해인 1989년부터 1993년으로 메모리 분야에서 추격을 완성하고 선두주자로 나서는 ‘선두 진입기’다.

네 번째 시기는 1994년부터 1999년 세계 1위로서의 도약기인데 1994년부터 메모리 기술을 선도하는 상황에서 1996년부터 시작된 4년간의 반도체 대공황을 이겨낸 ‘역경의 시기’다.

마지막 2000년부터 2003년까지는 ‘비메모리 사업으로의 재 창업기’로 2000년부터 비메모리 글로벌 사업방향을 재정립하고 본격 추진을 시작해 2003년 비메모리 전용라인이 건설되어 첨단 파운드리 사업이 시작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부에 소개되는 이윤우 진대제 임형규 황창규 권오현 등 삼성을 대표하는 전직 최고경영자들은 삼성이 아직 초일류가 되기 전에 삼성입사를 결심하고 함께 신화를 주도한 대표적 CEO들이다. 이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삼성반도체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이건희 회장의 초격차 리더십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지금은 삼성전자 반도체가 대한민국을 넘어 명실상부한 글로벌 독점 사업이 됐지만 초창기에는 삼성 내부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부서였고 특히 미국에서 영입된 진대제 황창규 권오현 부회장의 경우 삼성반도체의 성공이 불확실하던 시절 한국행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소개되는 이윤우 전 부회장의 경우 초기부터 반도체 신화를 만든 대표적 전문경영인으로 미국에 삼성반도체 연구소를 만들던 1980년대 초부터 사업의 밑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특히 64K D램 기술전수를 받기 위해 갔던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갑질’을 당한 이야기들은 초창기 기술개발의 어려움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말하는 이회장의 의미는 다음의 말로 압축된다.


“이건희 회장은 단지 반도체 사업을 성공시켰다 정도로 의미 부여를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봅니다. ① 게임의 룰을 완전히 바꿨다. 즉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판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게임 체인저’였다고 생각합니다. ② 단순한 ‘혁신’ 정도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 다시 말해 굼벵이를 나비로 만들 정도로 이전에는 없던 형태의 진화와 혁신을 이룬 기업인이었다는 겁니다. ③ 내수 시장만 바라보던 전 산업의 지형도를 명실상부 글로벌 스탠더드로 확장한 뒤 우리도 세계 1등이 될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저는 인텔 창업자 앤디 그로브를 책으로 공부한 사람입니다. 삼성이 인텔과 ‘맞짱’을 뜨고 더 나아가 인텔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반도체업계에서 인텔은 거의 신神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희 회장 덕분에 아, 인텔도 신이 아니구나, 우리도 신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지금 한국의 유니콘 기업들도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요. 이건희 회장 전에는 국내 시장만 보고 싸우는 거였지만 이후는 기업인들의 시선이 글로벌 컴퍼니가 되자는 쪽으로 확장됐으니까요. 호암께서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이건희 회장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3년 역사적인 ‘도쿄 선언’을 하면서 그룹의 존망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호암은 수천억 적자 나는 것만 보고 돌아가셨습니다. 이걸 키운 분이 바로 이 회장이지요.”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진대제 전 사장은 주로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새로운 상상력을 경험한 적이 많았다고 증언한다.


“1989년쯤이었던 거 같은데 ‘주상복합단지를 지어라’ 그러시더라고요. 아파트 밑에 상가를 지으라는 거죠. 우리나라 주상복합이란 게 그렇게 해서 신대방동에 처음 만들어집니다. 아니 아파트면 아파트지 아파트 밑에 상가가 있는 게 어딨어? 처음엔 다들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대세가 됐잖아요.

이런 식으로 처음엔 무슨 말씀인가 싶었던 것들이 나중에 보면 다 맞는 말씀이었던 게 많았어요. 1990년경에는 디자이너를 많이 데려오라고 하시면서 이탈리아 최고 디자이너는 당시 돈으로 100만불(10억원) 연봉을 주더라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고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아니, 100만 불까지 주고 뭐 하러 데려오나? 이런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그런 디자인 경영이 삼성전자의 뛰어난 제품을 만든 거 아닙니까.

”시대를 한 10년쯤 앞서가는 얘기를 하시는데 제가 수첩에 회장님 말씀하셨던 거 적어 놓고 나중에 읽어 보면 '야, 그때 이런 의미로 하신 거구나!' 할 때가 많았어요. 또 하나는 이것도 1990년 정도였던 거 같은데 ‘지역 전문가라는 걸 내보내자’ 그러시더라구요. 반도체에서 300명씩 보내라면서 말이죠. 저는 사람이 없어서 일을 못해 죽겠는데 한가하게(?) 지역전문가를 보내라고 하니까 투덜투덜 댔었어요. 그때 참 여러 명 뺏겼지요. 근데 그게 지금 다 삼성의 저력이 됐잖아요. 남들이 가지 않는 나라에 지역전문가로 나갔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 법인장으로 파견됩니다. 가전제품이다 휴대폰이다 잘 팔리고 있는 게 다 그런 사람들 덕분이잖아요. 정말 앞서가신 거죠. 보는 시각이 달랐어요.”


“제가 정보가전 쪽에서 일할 때인데 ‘1조 원 이익을 내면 건물을 새로 짓겠습니다’ 했더니 ‘그러라’고 하셨어요. 공간이 많이 부족했거든요. 휴대폰 사업은 잘될 때였는데 가전 쪽은 사실 이익이 박하고 어렵잖아요. 건물이 오래돼서 공간도 많이 부족하고 여기저기서 먼지가 펄썩펄썩 떨어지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2002년 상반기에만 6,000억 이익을 냈어요. 연간으로 따지면 1조 원 이익이 거의 다 된 거죠. 그래서 이참에 정말 건물을 새로 지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돈 많이 들이면 안 되니까 기존 6층짜리 건물 위로 3개 층을 올릴까, 아니면 작게라도 새로 지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했어요. 그러다 무선 쪽 연구동 건물인 27층 R3(삼성은 수원에 있는 연구 단지 내 건물들을 Research의 R을 따서 아라비아 숫자를 붙이고 있다) 건물 옆에 24층 정도로 짓자는 걸로 의견이 모아졌죠.

일단 윤종룡 부회장께 보고를 드리고 빌딩 조감도를 갖고 함께 회장님께 갔죠. 조감도를 한참 보시더니 ‘이런 거 2개 지라(지어라)’ 이러시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지어진 R4는 제가 삼성을 떠난 다음에 착공이 됐는데 2005년 9월 준공 당시 37층 건물로 연 면적이 국내 최대였습니다. 우리 같은 전문 경영인들은 매사 길게 봐야 한 5년 정도 보고 일한다면 회장님은 한 50년쯤 내다보며 일하셨어요. 건물 하나 지으면 한 50년 가잖아요. 그때를 생각하면 당연히 건물이 커야겠지요. 다들 ‘크게 지어봐야 들어올 사람이 없는데’ 하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보면 정말 잘한 결정이었죠. 역시 회장님은 시야가 다르시구나, 정말 깜짝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현재 삼성전자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D램에 이어 플래시 메모리 기술에서 단연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음성과 문자 중심의 데이터 통신 시대가 지나고 5G, 빅 데이터 시장, 더 나아가 물건 하나하나가 컴퓨터가 되는 사물 인터넷 세상(IoT)은 플래시 메모리 기술의 혁신 없이는 불가능했다.

삼성전자는 2002년 이 분야에서 세계 1등이 된 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반도체 불모지에서 시작해 1990년대 D램 시장에서 일군 기적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내다보며 계속 혁신을 거듭했기에 가능했다.

세 번째로 소개되는 임형규 전 사장은 현재 카이스트 전신은 한국과학원을 졸업하고 삼성전자 해외 연수생 1호로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이후 메모리 반도체 개발 초기에서부터 현재 삼성메모리반도체 세계 독점을 가능케한 양대 산맥 중 하나인 낸드플래시 개발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임 전 사장은 삼성이 한국반도체 지분을 사들인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1978년 입사해 2003년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25년간 메모리 개발본부장, 비메모리(시스템 LSI) 사업부장, 기술총괄사장을 거치며 오늘날 반도체 신화를 만든 주역 중의 주역이다. 특히 그가 개발을 시작한 플래시 메모리 사업은 현재 삼성전자가 메모리 분야에서 독점이 가능하게 만든 1등 공신이다. 특히 효율과 성과가 제일로 중시되는 민간 기업에서 오랜 기간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을 지원했다는 것이 놀랍다.


“삼성의 성공 비결을 많이 물어보는데 어떻게 보면 매우 클리어한 거예요. 제대로 된 인재를 뽑아서, 그들에게 일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 경쟁자를 이기기 위한 어떤 핵심 개념, 예를 들어 기술이면 기술, 디자인이면 디자인, 그 외 여러 다른 것도 강조하셨죠. 그런 핵심 경쟁력을 잘 디파인Define(정의)한 후 사람들을 모티베이션시키는 것, 전자 같은 하이테크 산업은 그게 다 아니겠어요. 이건희 회장은 이걸 잘 한 거죠.”


이건희 회장이 일관되게 말했던 키워드는 ‘위기의식’, ‘인재 영입’ 두 가지였다고 했다.


“맨날 위기 위기 하시니 싫고 힘들었던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훗날 경영자 관점에서 보니 그래야 조직이 살고 사람도 산다는 걸 깨달았어요. 일이란 게 그냥 적당히 해서는 경쟁력이 없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회장이 강조했던 인재 영입은 저도 참 열심히 했습니다. 시스템 LSI 맡았을 때에는 임원급만 10명에다가 부장급까지 거의 30여 명을 미국에서 데려왔으니까요. 당시 한국에는 비메모리 인재 풀이 별로 없었어요. 삼성의 DNA에서 중요한 것은 순혈주의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밖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임원도 시키고 사장도 시켜서 경쟁을 시켜야 한다는 거죠.”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황창규 사장은 모바일 시대 삼성반도체 신화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애플 부활의 밑바닥에는 삼성반도체 기술이 있었다는 것부터 시작한다.

2001년 10월 애플에 복귀한 스티브 잡스가 휴대용 음악 재생기 ‘아이팟’에 삼성 플래시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간 저장 장치 ‘SSDSolid State Drive’를 씀으로서 진정한 모바일 기기로 거듭났다는 것, 플래시 메모리 사업은 한때 존폐 위기까지 갔을 정도로 불투명했던 사업이었다. 그랬던 것이 D램 신화에 이어 삼성만의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며 제2 반도체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은 삼성 임직원들의 땀과 헌신의 결과이지만 여기에도 이건희 회장의 기술적 선택에 대한 과감한 결정이 있었다. 그 결정적 장면이 바로 2001년 8월 ‘자쿠로 미팅’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삼성은 2008년 낸드 플래시 메모리 기술을 또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데 바로 ‘CTFCharge Trap Flash)기술’이다. 이전까지의 낸드 플래시에는 도시바에서 개발한 플로팅 게이트 기술이 30년간 사용됐으나 미세화가 진행되면서 셀 간 간섭 문제가 나타났다. CTF는 전하를 도체가 아닌 원자 단위 얇은 복합 물질로 구성된 부도체에 저장하는 혁신 기술이다. 여기에도 이건희 회장의 동기부여가 있었다고 한다.

CTF는 실제로 기존 낸드 플래시의 기술적인 한계를 완전히 뛰어넘는 혁신 기술로 인정받아 2005년, 2006년 연달아 IEDM 학회 최고 혁신 논문으로 선정됐다. 또 여러 건의 원천 특허와 수백 건이 넘는 응용 특허를 확보하며 플래시 기술의 표준이 됐다.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권오현 전 부회장은 시스템반도체의 토대를 닦은 CEO로 평가받는다.

그가 자신의 삶의 구호가 되었다고 말하는 반도체인의 신조 10개 항목은 업종이나 직업을 불문하고 지금도 새겨볼만한 가치가 있다.


반도체인의 신조 10개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2. 큰 목표를 가져라.

3.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져라.

4.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

5. 이유를 찾기 전에 자신 속의 원인을 찾아라.

6. 겸손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라.

7.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기록을 남겨라.

8. 무엇이든 숫자로 파악하라.

9. 철저하게 습득하고 지시하고 확인하라.

10. 항상 생각하고 연구해서 신념을 가져라.


“이 중 맨 앞 두 가지 구호인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큰 목표를 가져라’는 아직도 제 삶의 구호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슨 군대냐 하겠지만 이런 단순한 것에 힘이 있다는 것을 제가 경험적으로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전 임직원들이 한목소리로 간절하게 외쳤던 아침 구호가 하나둘 현실이 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고 큰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니 정말 꿈이 현실로 됐습니다.”


그는 이건희 부회장의 생각의 축은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제가 삼성전자 대표시절 거의 매주 회장님과 식사를 한 것 같아요. 다른 계열사보다는 삼성전자가 제일 크고 하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 오실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부르셨거든요. 제가 회장님 바로 앞, 그 옆에 실장이 앉고 옆에 이재용 부회장이 앉았습니다. 얘기는 많이 안 하셨지만 툭툭 던지는 말씀을 통해 ‘아, 경영이란 건 저렇게 하는 거구나’를 많이 배웠습니다.

당시 회장님이 제시한 화두는 10년 내에 삼성 제품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메시지였습니다. 회장님은 평생 그런 생각을 하셨죠.

현재 경영 성과가 어떻다고 보고를 드리면 간단히 하라고 야단을 치시면서 ‘과장급 정도가 하는 보고말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 미래에 어떻게 될 것 같은지 우리는 뭘 준비해야 위기 상황이 와도 극복할 수 있는지 어떤 인재가 필요한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굉장히 집요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지금 만드는 삼성 미래기술재단입니다. 어느 날 회장께서 ‘우리가 반도체 어찌어찌 잘해서 세트, 디바이스, 휴대폰도 잘 나오지만, 자꾸 중국도 쫓아오고 있다. 우리가 약한 게 뭐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말씀을 드린 게 ‘우리가 응용기술은 발달해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초과학기술이 약하다’고 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왜 그런 데 지원을 하지 않느냐, 당장에 필요한 게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그런 걸 준비해야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든 게 미래재단입니다.

2012년도인가부터 시작해서 10년 동안 1조 5,000억 원을 쓰기로 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쓰러지셨으니까 아마 건강하셨다면 다른 식의 또 다른 어프로치를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봅니다. 아쉬운 대목이죠.

회장님은 이렇게 늘 삼성뿐 아니라 국가 전체를 생각하셨습니다. 한국이 잘되어야 삼성도 잘된다. 그래서 항상 한국 전체가 잘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사원들에 대해서도 ‘항상 잘해줘라, 집보다 더 잘해줘라, 월급도 진짜 많이 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대 회장 때부터 이건희 회장님까지 오너들의 강한 약속, 즉 스트롱 커미트먼트strong commitment, 그 다음에 직원들의 헌신 딱 두 개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너의 커미트먼트가 지난 20~30년 동안 일관성을 유지했다는 것이죠. 끊임없이 기술 개발 투자를 하겠다, 시설을 보완하겠다, 인재를 확보하겠다, 이런 것을 단기간에 어느 일정 시점에만 한 게 아니라 선대 회장 때부터 계속 이어 왔다는 겁니다. 거기에 따라 임직원들도 진짜 헌신한 결과물이 오늘날의 삼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87년부터 20년 이상 미래 기술 투자를 일관성 있게 끊임없이 했다는 게 제일 큰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순간적으로 성공하는 건 가능해요. 그런데 그걸 오랜 기간 유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한 몇 년 하다가 이제 됐지 하고 포기라기보다는 관심을 끊어버릴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회장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것이 가장 큰 커미트먼트였다고 봅니다.

만약에 그렇게 안 하시고 ‘알아서들 해, 난 모르겠다’ 하셨으면 반도체 시황이라는 게 부침이 심한데 경기가 나쁠 때 과감한 투자를 할 수 있겠어요? 당신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가정 하에 20년, 30년을 계속 하신 분은 별로 없을 겁니다. 

작가 소개

허문명

1990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 오피니언팀장,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동아일보사 출판국 부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언론 사상 최초로 여성 시경 캡(사회부 사건기자팀장)을 맡아 일했으며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참언론인대상(한국언론인연합회),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서재필언론상, 일한교류기금상, 양성평등미디어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 숭산 큰스님 평전 《삶의 나침반》 등이 있으며, 2021년 《경제사상가 이건희》를 출간했다.

목 차

저자의 말 이 시대 ‘삼성 정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추천의 말 청년들이 이 책을 읽고 눈에 불이 켜졌으면


<제 1부 호암과 이건희가 초대한 반도체 세상>


PART 1 반도체, 세상을 바꾸다

문화인류학적 통찰, 반도체 신화를 만들다

“나라가 잘돼야 기업이 잘된다”

TV도 못 만들면서 무슨 반도체냐

삼성전자가 아오지탄광으로 불렸던 이유


PART 2 미래를 내다본 호암의 반도체 리더십

반도체 이전에 알아야 할 전자 산업 진출사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도전하다

독자 개발한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라

세계 최대 첨단 반도체 공장, 기흥밸리의 탄생

6개월 만에 세계 세 번째 64K D램을 만들다

D램 대폭락 사태에도 공장 지었던 호암

반전을 이룬 또 하나의 선택 “웨이퍼를 키워라”


PART 3 세계 최고로 이끈 이건희 리더십

결정적 선택 두 가지

오너십, ‘세계 최고의 집’을 짓다

자율 경영, 그리고 위임의 리더십

호암과 이건희, 두 거인의 리더십 차이


<제2부 반도체 CEO들로부터 듣는 이건희 리더십>


PART 4 이윤우 “이건희 회장은 진정한 게임체인저였다”

반도체 전쟁을 이끈 기술 총사령관

삼성이 잘되는 것이 애국하는 길

일본의 몰락을 예감하다

독특한 논리의 이건희 복합화

“대만의 경쟁 상대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


PART 5 진대제 “회장과의 대화는 모든 게 배움이었다”

D램의 기술 프레임을 만들다

남들은 보지 못하는 새로운 상상력을 경험하다

앞서가는 리더에게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다

믿고 맡기는 리더의 힘


PART 6 임형규 “회장의 키워드는 깡, 응집력, 고집, 용기, 겁 없음”

D램 신화에 이은 플래시 메모리 신화

반도체 설계와 플래시 메모리 개발의 산증인

마침내 일본에 기술을 전수하다

링에서 죽도록 얻어맞다 KO를 시키다

“삼성전자는 세 번 망할 뻔했다”


PART 7 황창규 “체어맨 리 때문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애플 부활에는 삼성반도체 기술이 있었다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그래도 “갈 길이 멀다”

안전한 길을 버리고 택한 ‘마이 웨이’의 대성공

세계 최고 원천기술을 가진 회사가 되다


PART 8 권오현 “생각의 모든 축을 미래로 집중한 월드클래스 경영자”

‘반도체인의 신조’는 내 삶의 구호였다

신경영 선언은 반도체 1등이 준 자신감

“미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

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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