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출판사서평
과학을 통해 역사를 성찰한다!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1959년 C. P. 스노우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단절을 ‘두 문화 two cultures’라는 단어로 규정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격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스노우가 강조한 것은 두 문화의 극점에 물리학자와 문학자가 있는데 이들이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도 통섭과 융합을 얘기하면서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선언만 있을 뿐 구체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등학교 때 수학 점수가 좋다는 이유로 이과를 선택하고, 수학 점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문과를 선택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왜 수학 ? 물리학을 잘 아는 변호사가 될 생각을 하지 않고, 글 잘 쓰고 철학에 정통한 과학자 ? 의사가 되지 못 하는가?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틀에서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유산에서 과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한국 유산에 과학이 있느냐고 반박한다. 과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동서양의 고전들을 섭렵하고 많은 세계 유산들을 직접 답사한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비판의 근거를 4가지로 정리했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 4가지
1. 우리의 유산 중에서 제작 방법이라든가 작동 방법 같은 과학적인 설명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거의 없다. 기술적인 내용이라도 한자로 기록했고 그림도 많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2. 수많은 자료들이 그동안의 전란이나 관리 소홀로 거의 파손되거나 멸실되었다. 전란이라는 악재 앞에서 귀중한 자료를 모두 챙기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유산의 수가 적다.
3. 위정자들이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자료를 파괴하거나 훼손했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의 문헌이나 자료에 남아 있어 애초 선조들이 물려준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많다는 논란도 이런 이유다.
4.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는 조상과 스승에 대한 숭배사상이다. 과학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학문인데, 스승의 이론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는 것이 순리이자 도리로 보았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느 유산에 과학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 것에 대한 기술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 것에 대한 정보가 곧바로 유입되었으므로, 외국 것이 우리 것보다 더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과학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신화 ? 전설 ? 문학작품에 과학성을 볼 수 있는 내용, 즉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이나 과학적 관찰력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틀렸다! 상상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전래 문학작품에서 과학적인 소재를 분명 찾을 수 있다. 『흥부전』, 『옹고집전』, 『도깨비감투』 등을 보면 우리 조상들도 공상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특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최신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유산에 대해 몰랐으며 이런 것을 발굴하는데 게을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부족이 과학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는 과학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과학사의 높은 위상을 알게 되어 뿌듯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 나로호 발사의 실패 원인을 신라의 포석정에서 찾는다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나로호를 발사시켰지만, 발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에서 폭발했다. 과학자들은 두 번의 발사 실패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서 다시 세 번째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로호 같은 우주 로켓에는 고체연료보다는 액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액체연료는 초냉각된 수소와 산소를 말한다. 산소와 수소의 혼합물은 액체 상태일 때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으므로 폭발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다. 이 액체연료는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에 탱크에 주입하는데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 회돌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우유를 포함한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인 용도를 위해서는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한다. 회돌이 현상은 유체의 주 흐름의 충돌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뜻하므로, 유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도 회돌이 현상을 이용해서 설계되었다. 액체연료 탱크와는 반대로 포석정은 회돌이 현상이 발생하도록 제작되었다.
먼저 포석정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자.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비운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기에 고려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신라를 위협했다. 그리고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자 신라에서는 왕건과 친교를 맺어 국가의 운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자, 신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명왕이 사망하고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가 바뀌었어도 신라의 위엄은 서지 않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삼국유사』 <기이(2)> ‘김부대왕’에 당시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천성 2년 정해 9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니,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종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해 죽게 하고 황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포석정이 과학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장근식 교수는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포석적의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해 분석했다. 장 교수는 포석정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에 의해 회돌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기능은 물결이 치는 듯 하는 독특한 포어鮑魚 모양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는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회돌이 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신라인들은 수로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에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했다. 즉, 포석정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 그 위에 술잔을 띄웠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주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특이한 예다. 공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기 않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과학 삼국유사』 49~50쪽)
■ 천 년 전에도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시켰다
인간은 각자 느끼는 시간이 상대적인 감각에 따르지 않고 일관된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정한 객관적인 물리현상을 사용하여 시간을 단지 측정 시스템의 결과로 간주한다. 이런 방법으로 가장 먼저 도입된 것이 해시계다. 해시계는 간단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흐린 날이나 밤에는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불편 때문에 모래시계나 불시계도 제작되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정밀하게 시간을 세분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정확도도 높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물시계다. 물시계는 인간이 문명시대로 들어간 초창기부터 개발되었는데 학자들은 적어도 기원전 2000년경에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며 그리스 시대에도 이미 보급되었다. 한국인 중에서 물시계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장영실이다.
그러나 물시계가 장영실의 전유물은 아니다. 장영실보다 거의 700년 전인 삼국시대에도 물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9> ‘경덕왕 8년’에 물시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경덕왕 17년’에도 물시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년 3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물시계)을 만들었다.” 이러한 누각이 제작된 지 700년이 지나 세종의 총애를 받은 장영실이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자격루는 삼국시대 이래 전래된 우리 고유 기술에 역대 중국 물시계와 이슬람의 자동시보장치 원리를 가미한 혁신적 기기였다.
장영실은 송나라 소송의 수운의상대(1206년), 원나라 곽수경의 대명전등루(1276년), 순제의 궁루(1354년) 등을 참고했다. 그러나 중국 물시계의 항아리는 대부분 네모난 궤짝 모양인데 반해 자격루는 청자나 백자항아리 모양의 청동 물항아리였다. 자격루에서 공이 굴러가서 시간을 알리는 방법은 13세기 아랍의 알 자자리가 만든 10개의 물시계(1206년) 가운데 제3(보트)시계, 제4(코끼리)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부력을 이용해서 1차 신호를 얻고 이것을 증폭시켜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추진력(2차 신호)을 얻는 방식은 알 자자리의 제7(촛불)시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혁신적인 방법이다. 제7시계는 촛불이 타면 그 무게만큼 가벼워져 양초의 받침대가 올라가고 이때 아래쪽의 공부터 차례로 떨어지면서 신호를 내는 방식으로, 이 시계는 항상 불을 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장영실은 부력을 이용한 독특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장영실의 물시계가 중국의 것보다 우수한 근거는 시간 측정의 정밀도다. 중국 물시계의 잣대 길이는 50~60cm 정도로 눈금 간격을 1각(15분) 단위밖에는 매길 수 없었다. 그래서 세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수수호의 물을 하루에 네 번 바꾸어 한 눈금 간격을 4분 정도로 높였다. 이럴 경우 항아리의 물을 빼고 잣대를 갈아 끼우는 동안에는 시간 측정이 중단되므로 연속적으로 측정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장영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수수호의 높이를 중국 것의 4배 정도로 키우고 잣대의 길이도 4배로 길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도 정밀도가 완전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수수호 한 개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할 경우, 하루가 지나면 항아리가 가득 차서 더 이상은 시간 측정이 곤란하므로 수수호의 물을 비우고 새로 물을 받아 시간 측정을 시작해야 한다. 장영실의 아이디어는 수수호를 2개 만들어 교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과학 삼국사기』 147~149쪽)
■ 로마 양식으로 제작된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이유
1973년 경주의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황금보검(보물 제635호)이 발견되었다. 5~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은 길이 36cm, 최대 폭 9.3cm로 그다지 크지 않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있는 무늬들은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 로만로렐, 파무늬, 메달무늬, 테두리선이다. 그리고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와 메달의 틀, 공백 부분에 금 알갱이가 장식되었다. 황금보검을 본 학자들이 놀란 것은 황금보검이 신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누금세공이란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사용하여 금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이다. 이 기법은 기원전 2500년경 우르 왕조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에 성행했다. 나선무늬는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그리스 ? 로마 시대의 테두리 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의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번개무늬가 점점 간략해져서 나선무늬로 변했고 누금세공 등의 테두리 무늬로 사용되었다. 또한 로만로렐은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무늬로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와 함께 테두리 무늬의 기본적인 모티브다.
황금보검의 제작지는 지금의 체코 ? 폴란드 ? 러시아 지방이다. 도나우강 유역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중심의 동부 유럽에는 켈트인이 주로 거주했다. 그런데 켈트 지역에서 제작된 이 보검이 정작 발견된 곳은 동부 유럽이 아니라 경주의 대릉원이다. 양 지역 사이의 거리는 약 8,000km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경험한 현대인의 거리 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경주로부터 8,000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유럽의 지배자가 황금보검을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에게 선물했다는 얘기인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보물을 선물했을까? 그리고 당시 동유럽과 한반도의 신라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흉노라는 매개자를 통하면 신라와 훈족의 지배자와도 연계가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보이는 신라 사신의 모습은 과거의 문물 교류가 오늘날 우리가 선입견을 갖는 것처럼 좁은 범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북방 초원 지대에 인위적인 국경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기마민족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훨씬 거칠 것 없는 거리 감각과 공간감을 가지고 자유로운 소통을 누렸을지 모른다. 트라키아 지역에 근거지를 둔 훈족과 신라의 친연성을 인식한다면 다음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의 지배자가 중국과의 전투에서 궁지에 몰리자 일족을 이끌고 두 갈래로 분지된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달려 동유럽에 다다르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인 신라(가야 포함)에 정착한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같은 혈족임을 잊지 않는다. 그 후 서쪽에 정착한 흉노의 한 갈래가 훈족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는데, 동쪽으로 간 다른 한 갈래가 신라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이 신라의 지배자에게 북방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보물인 황금보검을 전달한다. 물론 신라에서 훈족의 지배자로부터 황금보검을 선물받기 위해 신라의 사신들이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훈족 근거지를 방문하여 훈족의 지배자를 직접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이후에도 기술자를 직접 파견하여 당대 최고의 기술을 주고받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와 트라키아의 훈족 간에 친연성이 있다는 대전제를 이해한다면 동유럽에서 훈족의 지배자가 어떤 경로든 어떤 명분이든 신라 왕가에게 선물을 전달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과학 삼국사기』 96~97쪽)
■ 추천평
『과학 삼국사기』와 『과학 삼국유사』는 저자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여러 번 통독하면서 찾아낸 과학 관련 사실들을 동서양 근현대의 사례들을 통해 비교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아주 쉽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삼국시대의 과학적 소재를 실마리로 하여 현대 과학의 전거를 들어 설명하는 일종의 ‘한국과학사’입니다. 이 책을 대하면서 놀라는 것은 저자가 과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며, 그의 독서가 동서양 근현대 및 전문적인 논문에까지 종횡무진 섭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독서내용을 소화해서 재생산하고 있는 점에서나, 하나의 사실을 관련된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의 문제의식이 섬세하면서도 광범위하며 고대와 현대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국시대 과학을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세계화 ? 현대화시켜 독자들의 과학사적 지식을 끌어올려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국과학사를 새롭게 접하게 될 뿐만 아니라 높은 세계사적 위상까지 인식하게 되어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융합을 이루었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문제를 폭넓은 관점에서 연구하는 저자가 과학과 기술, 인문학을?한 틀에서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우리 역사에 담긴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서구 근대과학의 방법론은 아니지만?나름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이용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에도?과학이 있다!
박택규 (건국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이 책의 미덕은 과학자가 역사서를 분석하면서 역사학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과학적인 내용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특히 서양에 비해 과거의 한국에 과학이 없었다는 기존의 편견은 이 책으로 인해 사라질 것이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땅에 살았던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저자는 통계학적 방법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분석하여 우리 선조들이 과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대 한국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믿는다.
신형식 (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작가 소개
저자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 국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논문제출상을 수상하고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저술상, 국민훈장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고 연구해서 기초 없이 50층 이상의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 등 10여 개 특허권을 20여 개국에 출원했다. 과학과 관련해 100여 편의 논문과 80여권의 도서를 저술했으며, 문명 . 과학 . 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01 선덕여왕의 총기
02 막걸리
03 포석정
04 로봇이야기
05 온돌
06 용
07 소리개 통신원
08 앵무새의 사랑
09 차
10 사리이야기
11 첨성대
12 불국사
13 석굴암 제대로 보기
14 에밀레종
15 석빙고
16 가마솥
17 김치
18 국물 문화의 주인공 장
19 사발의 기원과 방짜의 진수 징
20 바둑
주
과학을 통해 역사를 성찰한다!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
1959년 C. P. 스노우는 케임브리지대학교 강연에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단절을 ‘두 문화 two cultures’라는 단어로 규정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간격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스노우가 강조한 것은 두 문화의 극점에 물리학자와 문학자가 있는데 이들이 대화를 한다고 해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이었다. 이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한국에서도 통섭과 융합을 얘기하면서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선언만 있을 뿐 구체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고등학교 때 수학 점수가 좋다는 이유로 이과를 선택하고, 수학 점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문과를 선택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왜 수학 ? 물리학을 잘 아는 변호사가 될 생각을 하지 않고, 글 잘 쓰고 철학에 정통한 과학자 ? 의사가 되지 못 하는가?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인문학을 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틀에서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유산에서 과학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 사람들은 한국 유산에 과학이 있느냐고 반박한다. 과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동서양의 고전들을 섭렵하고 많은 세계 유산들을 직접 답사한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비판의 근거를 4가지로 정리했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게 느껴지는 이유 4가지
1. 우리의 유산 중에서 제작 방법이라든가 작동 방법 같은 과학적인 설명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가 거의 없다. 기술적인 내용이라도 한자로 기록했고 그림도 많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2. 수많은 자료들이 그동안의 전란이나 관리 소홀로 거의 파손되거나 멸실되었다. 전란이라는 악재 앞에서 귀중한 자료를 모두 챙기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유산의 수가 적다.
3. 위정자들이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자료를 파괴하거나 훼손했다. 예를 들어, 아직도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의 문헌이나 자료에 남아 있어 애초 선조들이 물려준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 많다는 논란도 이런 이유다.
4.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뿌리 깊게 내려오고 있는 조상과 스승에 대한 숭배사상이다. 과학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학문인데, 스승의 이론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스승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철회하는 것이 순리이자 도리로 보았다.
우리 유산에 과학이 없다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느 유산에 과학이 있는지를 찾는 것이 시급하다!
우리 것에 대한 기술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외국 것에 대한 정보가 곧바로 유입되었으므로, 외국 것이 우리 것보다 더 좋은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과학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로 신화 ? 전설 ? 문학작품에 과학성을 볼 수 있는 내용, 즉 시대를 앞서가는 상상력이나 과학적 관찰력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틀렸다! 상상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우리의 전래 문학작품에서 과학적인 소재를 분명 찾을 수 있다. 『흥부전』, 『옹고집전』, 『도깨비감투』 등을 보면 우리 조상들도 공상적인 소재를 사용했다. 특히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최신 공상과학소설Science Fiction, SF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우리의 유산에 대해 몰랐으며 이런 것을 발굴하는데 게을리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부족이 과학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있는 과학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과학사의 높은 위상을 알게 되어 뿌듯한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 나로호 발사의 실패 원인을 신라의 포석정에서 찾는다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나로호를 발사시켰지만, 발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중에서 폭발했다. 과학자들은 두 번의 발사 실패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고서 다시 세 번째 발사를 준비하고 있다. 나로호 같은 우주 로켓에는 고체연료보다는 액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때 사용되는 액체연료는 초냉각된 수소와 산소를 말한다. 산소와 수소의 혼합물은 액체 상태일 때 정확하게 계량될 수 있으므로 폭발을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다. 이 액체연료는 우주 로켓을 발사하기 직전에 탱크에 주입하는데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 회돌이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할 때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우유를 포함한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인 용도를 위해서는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용기를 설계한다. 회돌이 현상은 유체의 주 흐름의 충돌면에서 에너지가 분산되는 것을 뜻하므로, 유체의 온도가 상승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포석정도 회돌이 현상을 이용해서 설계되었다. 액체연료 탱크와는 반대로 포석정은 회돌이 현상이 발생하도록 제작되었다.
먼저 포석정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자. 포석정은 신라 패망의 현장으로 비운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기에 고려 태조 왕건은 왕위에 올라 신라를 위협했다. 그리고 왕건이 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자 신라에서는 왕건과 친교를 맺어 국가의 운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 고려로 투항하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자, 신라는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경명왕이 사망하고 경애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왕위가 바뀌었어도 신라의 위엄은 서지 않고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여 몸을 부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경애왕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 11월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었다. 『삼국유사』 <기이(2)> ‘김부대왕’에 당시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천성 2년 정해 9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에 이르니,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종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해 죽게 하고 황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인 부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포석정이 과학적으로 주목을 끄는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술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 흐름에 반하는 회전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장근식 교수는 포석정의 모형을 만들어 실험과 컴퓨터를 이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포석적의 유체역학적 특성에 대해 분석했다. 장 교수는 포석정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비정상 난류 유동에 의해 회돌이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포석정의 유체역학적 기능은 물결이 치는 듯 하는 독특한 포어鮑魚 모양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포석정의 물이 흘러가는 경로는 다양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위치에서 출발시킬 경우 술잔은 같은 경로로 흘러가지 않는다. 술잔은 회돌이 구역에서 돌기도 하고 막혀서 갇힐 수도 있다. 신라인들은 수로 경사가 급격히 변하는 지점이나 굴곡이 있는 지점에 수로 폭을 확장하거나 내측 바닥면의 함몰을 조성하여 술잔의 전복을 방지했다. 즉, 포석정은 다양한 수로를 만들어 그 위에 술잔을 띄웠을 때 다양한 흐름과 위치 변화를 만들어내도록 주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 포석정에서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하는 것은 실용적인 면에서 특이한 예다. 공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기 않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과학 삼국유사』 49~50쪽)
■ 천 년 전에도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변환시켰다
인간은 각자 느끼는 시간이 상대적인 감각에 따르지 않고 일관된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정한 객관적인 물리현상을 사용하여 시간을 단지 측정 시스템의 결과로 간주한다. 이런 방법으로 가장 먼저 도입된 것이 해시계다. 해시계는 간단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흐린 날이나 밤에는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불편 때문에 모래시계나 불시계도 제작되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정밀하게 시간을 세분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정확도도 높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물시계다. 물시계는 인간이 문명시대로 들어간 초창기부터 개발되었는데 학자들은 적어도 기원전 2000년경에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 사용되었다고 추정하며 그리스 시대에도 이미 보급되었다. 한국인 중에서 물시계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장영실이다.
그러나 물시계가 장영실의 전유물은 아니다. 장영실보다 거의 700년 전인 삼국시대에도 물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9> ‘경덕왕 8년’에 물시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박사 1명과 누각박사 6명을 두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경덕왕 17년’에도 물시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17년 3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황룡사 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으로 누각(물시계)을 만들었다.” 이러한 누각이 제작된 지 700년이 지나 세종의 총애를 받은 장영실이 ‘때가 되면 저절로 시각을 알려주는 자동시보장치가 달린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자격루는 삼국시대 이래 전래된 우리 고유 기술에 역대 중국 물시계와 이슬람의 자동시보장치 원리를 가미한 혁신적 기기였다.
장영실은 송나라 소송의 수운의상대(1206년), 원나라 곽수경의 대명전등루(1276년), 순제의 궁루(1354년) 등을 참고했다. 그러나 중국 물시계의 항아리는 대부분 네모난 궤짝 모양인데 반해 자격루는 청자나 백자항아리 모양의 청동 물항아리였다. 자격루에서 공이 굴러가서 시간을 알리는 방법은 13세기 아랍의 알 자자리가 만든 10개의 물시계(1206년) 가운데 제3(보트)시계, 제4(코끼리)시계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부력을 이용해서 1차 신호를 얻고 이것을 증폭시켜 시보장치를 작동시키는 추진력(2차 신호)을 얻는 방식은 알 자자리의 제7(촛불)시계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혁신적인 방법이다. 제7시계는 촛불이 타면 그 무게만큼 가벼워져 양초의 받침대가 올라가고 이때 아래쪽의 공부터 차례로 떨어지면서 신호를 내는 방식으로, 이 시계는 항상 불을 관리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장영실은 부력을 이용한 독특한 방식으로 바꾸었다. 장영실의 물시계가 중국의 것보다 우수한 근거는 시간 측정의 정밀도다. 중국 물시계의 잣대 길이는 50~60cm 정도로 눈금 간격을 1각(15분) 단위밖에는 매길 수 없었다. 그래서 세밀하게 측정하기 위해 수수호의 물을 하루에 네 번 바꾸어 한 눈금 간격을 4분 정도로 높였다. 이럴 경우 항아리의 물을 빼고 잣대를 갈아 끼우는 동안에는 시간 측정이 중단되므로 연속적으로 측정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장영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수수호의 높이를 중국 것의 4배 정도로 키우고 잣대의 길이도 4배로 길게 만들었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도 정밀도가 완전하게 해결되지는 않았다. 수수호 한 개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할 경우, 하루가 지나면 항아리가 가득 차서 더 이상은 시간 측정이 곤란하므로 수수호의 물을 비우고 새로 물을 받아 시간 측정을 시작해야 한다. 장영실의 아이디어는 수수호를 2개 만들어 교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과학 삼국사기』 147~149쪽)
■ 로마 양식으로 제작된 황금보검이 신라에서 발견된 이유
1973년 경주의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황금보검(보물 제635호)이 발견되었다. 5~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은 길이 36cm, 최대 폭 9.3cm로 그다지 크지 않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있는 무늬들은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 로만로렐, 파무늬, 메달무늬, 테두리선이다. 그리고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와 메달의 틀, 공백 부분에 금 알갱이가 장식되었다. 황금보검을 본 학자들이 놀란 것은 황금보검이 신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누금세공이란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사용하여 금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이다. 이 기법은 기원전 2500년경 우르 왕조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에 성행했다. 나선무늬는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그리스 ? 로마 시대의 테두리 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의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번개무늬가 점점 간략해져서 나선무늬로 변했고 누금세공 등의 테두리 무늬로 사용되었다. 또한 로만로렐은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무늬로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와 함께 테두리 무늬의 기본적인 모티브다.
황금보검의 제작지는 지금의 체코 ? 폴란드 ? 러시아 지방이다. 도나우강 유역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중심의 동부 유럽에는 켈트인이 주로 거주했다. 그런데 켈트 지역에서 제작된 이 보검이 정작 발견된 곳은 동부 유럽이 아니라 경주의 대릉원이다. 양 지역 사이의 거리는 약 8,000km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경험한 현대인의 거리 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경주로부터 8,000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유럽의 지배자가 황금보검을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에게 선물했다는 얘기인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보물을 선물했을까? 그리고 당시 동유럽과 한반도의 신라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흉노라는 매개자를 통하면 신라와 훈족의 지배자와도 연계가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보이는 신라 사신의 모습은 과거의 문물 교류가 오늘날 우리가 선입견을 갖는 것처럼 좁은 범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북방 초원 지대에 인위적인 국경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기마민족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훨씬 거칠 것 없는 거리 감각과 공간감을 가지고 자유로운 소통을 누렸을지 모른다. 트라키아 지역에 근거지를 둔 훈족과 신라의 친연성을 인식한다면 다음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의 지배자가 중국과의 전투에서 궁지에 몰리자 일족을 이끌고 두 갈래로 분지된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달려 동유럽에 다다르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인 신라(가야 포함)에 정착한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같은 혈족임을 잊지 않는다. 그 후 서쪽에 정착한 흉노의 한 갈래가 훈족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는데, 동쪽으로 간 다른 한 갈래가 신라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이 신라의 지배자에게 북방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보물인 황금보검을 전달한다. 물론 신라에서 훈족의 지배자로부터 황금보검을 선물받기 위해 신라의 사신들이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훈족 근거지를 방문하여 훈족의 지배자를 직접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이후에도 기술자를 직접 파견하여 당대 최고의 기술을 주고받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와 트라키아의 훈족 간에 친연성이 있다는 대전제를 이해한다면 동유럽에서 훈족의 지배자가 어떤 경로든 어떤 명분이든 신라 왕가에게 선물을 전달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과학 삼국사기』 96~97쪽)
■ 추천평
『과학 삼국사기』와 『과학 삼국유사』는 저자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여러 번 통독하면서 찾아낸 과학 관련 사실들을 동서양 근현대의 사례들을 통해 비교 설명하면서 독자들에게 아주 쉽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 책은 삼국시대의 과학적 소재를 실마리로 하여 현대 과학의 전거를 들어 설명하는 일종의 ‘한국과학사’입니다. 이 책을 대하면서 놀라는 것은 저자가 과학자이면서도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며, 그의 독서가 동서양 근현대 및 전문적인 논문에까지 종횡무진 섭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가 독서내용을 소화해서 재생산하고 있는 점에서나, 하나의 사실을 관련된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그의 문제의식이 섬세하면서도 광범위하며 고대와 현대를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삼국시대 과학을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세계화 ? 현대화시켜 독자들의 과학사적 지식을 끌어올려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한국과학사를 새롭게 접하게 될 뿐만 아니라 높은 세계사적 위상까지 인식하게 되어 뿌듯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 책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두 문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진정한 융합을 이루었다.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문제를 폭넓은 관점에서 연구하는 저자가 과학과 기술, 인문학을?한 틀에서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우리 역사에 담긴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비록?서구 근대과학의 방법론은 아니지만?나름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을 이해하고 이용했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에도?과학이 있다!
박택규 (건국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이 책의 미덕은 과학자가 역사서를 분석하면서 역사학자들이 놓치기 쉬웠던 과학적인 내용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특히 서양에 비해 과거의 한국에 과학이 없었다는 기존의 편견은 이 책으로 인해 사라질 것이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 땅에 살았던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저자는 통계학적 방법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분석하여 우리 선조들이 과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대 한국사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으로 믿는다.
신형식 (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작가 소개
저자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 국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논문제출상을 수상하고 해외유치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또한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과학저술인협회 저술상, 국민훈장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고 연구해서 기초 없이 50층 이상의 빌딩을 지을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 등 10여 개 특허권을 20여 개국에 출원했다. 과학과 관련해 100여 편의 논문과 80여권의 도서를 저술했으며, 문명 . 과학 . 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주요 목차
머리말
01 선덕여왕의 총기
02 막걸리
03 포석정
04 로봇이야기
05 온돌
06 용
07 소리개 통신원
08 앵무새의 사랑
09 차
10 사리이야기
11 첨성대
12 불국사
13 석굴암 제대로 보기
14 에밀레종
15 석빙고
16 가마솥
17 김치
18 국물 문화의 주인공 장
19 사발의 기원과 방짜의 진수 징
20 바둑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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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군 | 취소/반품 불가사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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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상품/식품/화장품 | 고객님의 사용, 시간경과, 일부 소비에 의하여 상품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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