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인기 만점 조공 물품에서 갑옷 재료까지
‘조선의 반도체’ 닥종이 톺아보기
촘촘하게 그려낸 닥종이 기술문화사
대영박물과, 바티칸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 세계 굴지의 박물관에서 문화재 복원에 우리 전통 한지를 쓴다는 이야기는 이제 구문舊聞이다. 길고 복잡한 닥섬유로 만들어진 한지는 얇고 잘 찢어지는 다른 종이와는 달리 두껍고 튼튼해 문화재 복원계의 슈퍼스타라는 평가를 받는단다. 하지만 우리는 내구성이 1,000년 이상이라는 닥나무로 만든 닥종이, 전통 한지에 대해 잘 모른다.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물론 우리 역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무심하다.
이공계 출신에 외국의 다양한 배움터에서 과학사를 전공한 지은이는 잊혔던 닥종이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냈다. 제지 과정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록은 물론 의궤儀軌, 등록謄錄 등 다양한 사료를 섭렵해 가며 한지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를 짚어냈다.
조선 고유의 첨단 제지술, 도침
지은이가 꼽은 전통 한지 제조 비법의 핵심은 종이를 쌓아놓고 다듬이질하듯 두드리는 도침搗砧이라는 마무리 과정이었다. 조선에서만 시행된 도침법을 거친 닥종이는 광택, 밀도, 먹의 스밈, 방수 효과 등 품질이 뛰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모았다. 이에 따라 명ㆍ청은 주요 조공품으로 막대한 양의 종이를 요구해 전체 방물 예산의 3분의 1이 종이 관련인 때도 있었다(102쪽). 뿐만 아니라 1425년에는 명 황제가 세종에게 ‘종이 만드는 방법을 적은 글’을 바치라 요구하기도 했으며 역시 세종 때인 1420년엔 후지厚紙 3만 5,000장을 바치며 금은의 조공 양을 줄여달라고 청했을 정도도 한지의 가치는 컸다(89쪽). 그런가 하면 도침은 군역은 대신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기에 조선 후기에는 장인 중 가장 높은 공임을 받는 고급 기술이기도 했다.
‘쓰레기’의 화려한 변신, 휴지ㆍ환지
도침과 더불어 지은이가 전통 한지의 과학기술사에서 주목한 것은 휴지休紙ㆍ환지還紙라는 친환경적 재활용술이다. 한 번 쓰고 난 종이를 가리키는 ‘휴지’는 오늘날의 쓰레기 취급이 아니라 ‘돌아온 종이’ 환지가 되어 신발, 삿갓은 물론 북방을 지키는 군사들의 갑옷, 새색시가 타고 가는 가마 안의 요강으로 다시 태어났다. 면화를 키울 수 없었던 북방의 백성들은 과거시험 낙방자들의 답안지인 낙폭지 외투가 솜보다 낫다고 반겼으며(147쪽) 군기감은 쇠사슬로 만든 갑옷보다 가볍고 방호 효과가 뛰어나다며 종이 갑옷을 제작하기도 했다(130쪽).
이에 따라 휴지 확보에 비상이 걸려 세초洗草한 실록의 초고와 지방에서 공린 재실災實 장계까지 활용했다. 이 와중에 지방에서 실시된 과거시험의 낙폭지를 모두 서울로 보내도록 했는데 1705년에는 낙폭지 수송량이 적다는 이유로 한 시험관이 일종의 ‘휴지 횡령죄’로 파면되는 등 휴지는 청렴한 관료제 확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체제의 버팀목이자 변혁의 불씨
지은이가 파악하기로 종이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는 버팀목인 한편 정치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 불씨이기도 했다. 조공품으로 대중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15세기에 백성에게 유교적 덕목을 기르기 위해 《삼강행실도》와 불경 등 다양한 간행사업을 추진하느라 종이 공납 수량이 껑충 뛰고(90쪽) 세종이 《자치통감》 인쇄를 위해 100만 장을 조지서에 배정하며 지장紙匠이 아닌 승려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종이를 뜨게 한 것(91쪽)도 종이의 국가적 비중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과거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의 두껍고 좋은 종이를 고집하자 금령을 내리고 1702년엔 두꺼운 종이를 쓴 장원급제 답안에 대해 왕이 자격을 박탈한 사실(108쪽)에서는 종이가 사회 변화의 한 나침반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역紙役에 시달린 승려들이 절 비우기, 격쟁, 상소 등으로 저항하거나 조선 후기 화전민, 거사, 송상松商이 손을 잡고 국경을 넘는 시장을 개척한 사례를 통해 변화의 물결을 보여준다.
지은이는 닥종이의 기술문화사를 단선적으로 살핀 것이 아니다. 북학파를 비롯한 실학자의 ‘과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조선의 ‘닥종이 연대’가 발휘한 기지를 추적해 사물과 오랜 시간 함께하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노동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덕분에 이 책은 과학기술사 이상의 과학기술사로 자리매김할 법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정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했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 미시시피 주립대, 예일대에서 공부한 후,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협동과정(현 과학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의 니덤연구소, 타이페이의 중앙연구원, 베를린의 막스플랑크과학사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을 하고,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에 재직 중이다. 과학기술과 환경이 얽힌 역사에 관심이 있다.
목 차
책을 펴내며
서설_닥나무 중심의 과학기술사
닥나무ㆍ과학기술ㆍ인류세의 역사
닥나무와 기지라는 과학기술: 경계를 넘는 통합의 과학기술사
닥나무 연대의 조선 과학기술
1장 닥나무와 한반도 종이의 재발명
기록의 미로
경험의 미로
사물이 말하는 발명
다양한 사물과 연대하는 기지
2장 도침, 기지와 새로운 장인
조선 사대부가 완성한 종이 생산 체제 속의 도침
관영 종이 생산 체제와 충돌하는 사물의 법칙
홀로 남은 조지서와 늘어나는 종이 규격
새로운 장인들
3장 휴지와 환지, 귀한 쓰레기가 만든 조선적 관료제
쉬다가 돌아오는 종이
종이 위의 성공, 종의 안의 성공
휴지가 만드는 인자한 왕과 청렴한 관료제
귀한 쓰레기의 변신
4장 지구적 실학과 조선의 제지
중국의 책과 조선의 학문
이동하는 사물과 조선 후기 실학의 지구화
문자 연계 과학기술과 조선의 제지 과학기술
기지와 문자의 지연된 만남
5장 이주자 닥나무 연대와 닥종이 기지의 진화
국가의 닥나무, 백성의 닥나무
근면한 이주자들
탄압받는 사찰의 이주자 연대
사물적 기지의 닥종이 천지
에필로그_탈인류세를 위한 과학기술
주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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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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